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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 "Introduction", "생애", "업적", "외부 링크" ]
[ "\n\n'''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1790년 11월 17일 ~ 1868년 9월 26일)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n", "오늘날 작센안할트주 나움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하인리히 뫼비우스()였으며, 아버지는 춤 강습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이었다. 1820년 도로테아 크리스티안 율리안 로테와 결혼했으며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n\n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13년 괴팅겐 대학교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만나서 공부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철학학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n\n1816년 1월 22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천문대 관찰사가 되며 천문학과 특별교수가 되었다. 1844년 엔 고등 역학, 고등 천문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n\n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플라이센부르크에서 고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n", "일반에게 가장 유명한 업적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이며, 그는 주로 기하학과 역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n\n저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n\n* Der barycentrische Calcul (1827년)\n* Lehrbuch der Statik (1837년)\n* Die Elemente der Mechanik des Himmels (1843년)\n\n이 외에도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짧은 논문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n", "\n* \n* \n\n\n\n분류:1790년 출생\n분류:1868년 사망\n분류:독일의 수학자\n분류:독일의 천문학자\n분류:19세기 수학자\n분류:기하학자\n분류:19세기 천문학자\n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n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n분류:할레 대학교 동문" ]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 1790년 11월 17일 ~ 1868년 9월 26일)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오늘날 작센안할트주 나움부르크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 하인리히 뫼비우스()였으며, 아버지는 춤 강습을 직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마르틴 루터의 후손이었다. 1820년 도로테아 크리스티안 율리안 로테와 결혼했으며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13년 괴팅겐 대학교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를 만나서 공부했다. 1815년 라이프치히 철학학과에서 하빌리타치온을 통과했다. 1816년 1월 22일 라이프치히 대학교 천문대 관찰사가 되며 천문학과 특별교수가 되었다. 1844년 엔 고등 역학, 고등 천문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플라이센부르크에서 고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일반에게 가장 유명한 업적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뫼비우스의 띠이며, 그는 주로 기하학과 역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저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Der barycentrische Calcul (1827년) * Lehrbuch der Statik (1837년) * Die Elemente der Mechanik des Himmels (1843년) 이 외에도 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짧은 논문도 발표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 * 분류:1790년 출생 분류:1868년 사망 분류:독일의 수학자 분류:독일의 천문학자 분류:19세기 수학자 분류:기하학자 분류:19세기 천문학자 분류:괴팅겐 대학교 동문 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분류:할레 대학교 동문
이승엽
[ "Introduction", "선수 경력", "야구선수 은퇴 후", "응원가", "별명", "트리비아", "국가대표 경력", "등번호", "수상", "방송 출연", "광고 출연", "홍보대사", "통산 기록", "주요 기록", "각주", "외부 링크" ]
[ "\n\n\n\n\n'''이승엽'''(1976년 10월 11일 (음력 8월 18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전 최강 몬스터즈 감독, 현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감독이다.\n", "=== 아마추어 시절 ===\n중앙초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해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n\n=== 한국 프로야구 시절 ===\n==== 삼성 라이온즈 시절 ====\n1995년 KBO 리그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로부터 1년만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이 나와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 당시 삼성 1루수 요원 중에서는 김성래가 시범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해 전열에서 이탈한 데다 부상에서 회복한 1993년부터 본격적인 주전 우익수로 나선 이종두가 어깨와 허리 통증을 호소해 전년도인 1994년부터 완전히 지명타자로 바꾼 양준혁이 우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바람에 1994년부터 포지션을 바꾼 이만수 외엔 쓸만한 1루수 자원이 없어 그가 1루수로 전향했다.\n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며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n\n* 1995년에 2할대 타율, 13홈런, 73타점을 기록해 장거리 타자로서 자질을 보였고,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백인천에게‘외다리 타법’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인 홈런 타자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n* 1997년에 장타력에 돋보여 홈런 1위(32개), 타점 1위(114개), 최다 안타 1위(170개)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MVP와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차지했다.\n* 1998년에 38홈런, 102타점을 기록하여 당시 타이론 우즈와 시즌 최다 홈런 경쟁을 했으나 2위로 마감했다.\n* 1999년에 홈런(54), 타점(123), 득점(128), 출루율(0.458), 장타율(0.733)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고,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수립했다.\n* 2002년에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와 홈런 경쟁을 했고, 47홈런을 기록해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LG 투수 이상훈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 3점 홈런을 쳐 내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는 곧 마해영의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이어져 삼성 라이온즈가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n* 2003년 6월 22일 SK 투수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의 오 사다하루(27세 3개월 11일)와 MLB 알렉스 로드리게스(27세 8개월 6일)를 제치고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고지(26세 10개월 4일)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롯데전에서 투수 이정민을 56째 홈런을 쳐내며 한국 프로야구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자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으나 2022년 무라카미 무네타카에 의해 타이가 됐다.\n\n=== 일본 프로야구 시절 ===\n====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n===== 2004년 =====\n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으며 본인에 앞서 김재박이 1979년 1월 해당 팀(당시 롯데 오리온즈)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군대 문제가 걸려 무산됐다.\n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세이브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n\n===== 2005년 =====\n시범 경기에서 타율 0.10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해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때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됐다. 시즌 최종 타율은 2할대 타율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현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했다.\n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됐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을 쳐 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이 재팬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밀려 제팬 시리즈 MVP 수상에 실패했다.\n2005년 시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3번과 6번 타자로 출전했다.\n\n====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n===== 2006년 =====\n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이승엽.\n2005년 시즌 후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며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지바 롯데 마린스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1월 19일에 이적했다.\n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했는데, 이에 부응해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팀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n그가 기록한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n\n===== 2007년 =====\n2006년 시즌 후 MLB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팀의 우승 후로 연기했다.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즌 연봉은 6억 5,000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n이듬해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 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2할대 타율, 30홈런, 74타점을 기록했다.\n====2008년====\n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인 일본전에서 2점 홈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2점 홈런을 쳐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 45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OPS 0.755,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시리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진행했는데 7경기에서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 12삼진으로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n\n===== 2009년 =====\n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n16홈런, 2할대 타율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에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n\n=====2010년=====\n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팀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됐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시즌 후 11월 16일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n\n====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n===== 2011년 =====\n오릭스 버펄로스 시절의 이승엽.\n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n\n=== 한국 프로야구 복귀 ===\n==== 삼성 라이온즈 복귀 ====\n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n=====2012년=====\n3할대 타율,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상대적으로 1루수로 출장한 경기가 적어 처음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n\n===== 2013년 =====\n시즌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의 대결에서 6-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을 기록했다. 2013년 8월 28일 NC와의 경기에서 3000루타를 달성했으며, 이는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이다.\n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2할대 타율, 13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됐다.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돼 7경기에서 타율 0.148(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11월 1일 7차전까지 단 1타점도 기록하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의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해 그 해 골든글러브(지명타자)를 타격왕을 차지한 이병규에게 내 줬다.\n\n===== 2014년 =====\n타격 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30홈런-세 자릿수 타점을 달성하며 국민 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했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쳐 내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해 총 9번을 수상하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n\n===== 2015년 =====\n6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구승민을 상대로 장외 홈런이자 시즌 10호 홈런,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한일 통산 559호 홈런을 기록했다.\n한국시리즈에서는 15타수 6안타, 4할 타율을 기록했다. 시즌 후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2월 8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KBO 리그 최초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시즌 후 FA 선언을 했고, 2년 36억원에 잔류했다.\n\n===== 2016년 =====\n8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KBO 리그 통산 1390타점을 기록했고, KBO 리그 통산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웠다. 그 후 9월 14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재우를 상대로 한일 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했다.\n\n==== 2017년 ====\n시즌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5월 21일 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홈런을 기록했고,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 4000루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경기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경기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 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n", "2018년부터 KBO 홍보대사,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 SBS 및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n\n2020년에 지도자 연수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n\n2022 시즌 후 김태형의 후임으로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선임됐다.\n", "\n\n\n", "* '국민 타자', '국민 영웅', '라이언 킹' 등으로 불린다.\n*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이다.\n*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 WBC와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해 '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고 불린다. * 국제 대회나 중요한 경기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특히 8회에 결정적 역할을 해 '8회의 사나이'라고 불린다.\n* 삼성 라이온즈의 제 2구장인 포항야구장의 성적도 뛰어나 '포항의 사나이'라고 불린다.\n", "* 2016년 2월 25일에 팀의 새로운 홈 구장인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준공돼 그 기념으로 대구광역시 도시철도공사 홍보대사로 뽑혀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의 특별 안내방송을 맡게 됐다.\n\n", "* 2000년 시드니 올림픽\n*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n* 2006년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n* 2008년 베이징 올림픽\n* 2013년 제 3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n", "; KBO\n* '''36''' (1995년 ~ 2003년, 2012년 ~ 2017년, 삼성 라이온즈, '''영구 결번''')\n* '''77''' (2023년 ~, 두산 베어스 감독)\n\n; NPB\n* '''36''' (2004년 ~ 2005년, 지바 롯데 마린스)\n* '''33'''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n* '''25''' (2007년 ~ 201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n* '''3''' (2011년, 오릭스 버펄로스)\n", "=== 고교 야구 ===\n* 고교 청룡기 대회 - 우수 투수상 (1993년)\n\n=== 국제 대회 ===\n*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최다 홈런상, 최다 타점상 (1994년)\n*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0년)\n*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2년)\n* WBC 우수 선수 (2006년, 1루수 부문) & 초대 홈런왕 및 타점왕\n*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8년)\n\n=== KBO 리그 ===\n* KBO MVP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n* 골든글러브 10회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12년, 2014년, 2015년)\n* 한국시리즈 MVP 1회 (2012년)\n* 홈런왕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n* 타점왕 4회 (1997년, 1999년, 2002년, 2003년)\n* 득점왕 5회 (1998년, 1999년, 2000년, 2002년, 2003년)\n* 최고 출루율 1회 (1999년)\n* 최고 장타율 3회 (1998년, 1999년, 2002년)\n* 최다 안타 1회 (1997년)\n\n=== NPB ===\n*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2005년)\n* 월간 MVP 1회 (2006년 6월)\n* 도쿄 돔 MVP 1회 (2006년)\n\n=== 기타 ===\n*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7년)\n*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7년)\n*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8년)\n*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9년)\n* 한국스포츠연맹 선정 올해의 남자프로선수상 (1999년)\n* 일간스포츠001 최고타자상 (1999년)\n* 스포츠투데이 매일우유상 대상 (1999년)\n* 제 37회 백상체육대상 (2000년)\n* 서울외신기자클럽 외신홍보상 (2003년)\n*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대상 (2003년)\n* 한국언론인연합회 선정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2003년)\n* 자황컵 체육대상 프로선수상 (2003년)\n*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특별상 (2006년)\n* 제 55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대상 (2009년)\n*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최고타자상 (2012년)\n*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타자상 (2012년)\n* 제 2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2년)\n* 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2013년)\n*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재기상 (2014년)\n* 제 6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6년)\n* 휘슬러코리아 일구상 일구대상 (2016년)\n*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공로상 (2016년)\n*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2017 최고의 레전드 특별상 (2017년)\n* 2021년 SBS 연예대상 쇼•스포츠부문 남자 신인상\n", "* '''MBC'''\n** 성공시대 - 홈런왕 이승엽 (1999년 10월 23일)\n** PD수첩 - 이승엽 신드롬 (1999년 8월 24일)\n** 밀레니엄특집 아듀 20세기 웰컴 21세기 - 스포츠 100년 손기정에서 이승엽까지 (1999년 12월 31일)\n** 색션tv 연예통신 - 이승엽 이송정 결혼식 및 인터뷰(2002년 1월 7일)\n** 일밤 - 불가능은 없다 (2007년 12월 30일)\n** 대구MBC The Lion - 이승엽 삼성 복귀 내레이션 참여 (2012년 3월 25일)\n** 대구MBC 덕아웃 -프로야구 삼성 우승특집 방송 출연 (2012년 11월 16일)\n* '''KBS'''\n** 가족오락관 (1997년 11월 12일)\n** 체험 삶의 현장 -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1998년 11월 16일)\n** 서세원쇼 (1999년 8월 17일)\n** 작전타임 스포츠쇼 - 집중탐구 (1999년 9월 29일)\n** 개그콘서트 - 걸인의 추억 (2003년 8월 26일)\n**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 (2003년 12월, 게스트 윤도현, 장나라와 동반출연)\n** 파워 인터뷰 (2005년 11월 27일)\n** 단박 인터뷰 - 야구 선수 이승엽 (2007년 6월 26일)\n** 여유만만 - 역대 연봉 스포츠 스타로 키운 사연 (2009년 7월 31일)\n* '''SBS'''\n** 줌인 내인생의 특종 (1999년 8월 17일)\n** 좋은 아침 (SBS) 이승엽 이송정 결혼식 및 인터뷰 (2002년 1월 8일)\n** 한밤의 TV연예 이승엽 이송정 결혼식 및 인터뷰(2002년 1월 9일)\n**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국민타자 이승엽 (2012년 11월 19일, 2012년 12월 3일), 신년의 밤 (2015년 1월 19일)\n** SBS 스페셜 - 승엽의 시대 편 492회 (2017년 10월 15일)\n** 집사부일체\n** 편먹고 공치리\n\n* ''' JTBC'''\n** 최강야구 (2022년 6월 6일 ~ 현재)\n** 아는 형님 (2022년 7월 23일)\n", "* 2000년 삼성그룹 삼성증권\n* 2004년 신세계 신세계상품권 (부인 이송정과 출연)\n* 2006년 해태제과 홈런볼\n* 2006년 삼성전자 파브 full hd 모젤\n* 2007년 HK이노엔 컨디션파워 (2편에선 김제동과 출연)\n* 2007년 KB국민은행\n* 2007년 AIA생명 꼭하나의로보험 (부인 이송정, 손범수와 출연)\n* 2008년 나이키\n* 2009년 한국인삼공사 정관장\n* 2018년 SK브로드밴드 옥수수 (김제동과 출연)\n* 2018년 스크린야구 다함께야구왕\n* 2018년 IWC 포르토피노 크로노그래프 이승엽 에디션\n* 2020년 정직한삼\n\n; 라디오 광고\n* 1998년 삼성투자신탁\n* 1999년 삼성투자신탁증권\n* 2003년 삼성전자 애니콜\n", "* 2000년 대구지방경찰청 대구경북 청소년선도위원\n* 2009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명예홍보대사\n* 2012년 대구경북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장학지원 홍보대사\n* 2022년 대한사회복지회 홍보대사\n", "\n\n\n\n\n연도\n\n소속\n\n나이\n\n출장\n\n타석\n\n타수\n\n득점\n\n안타\n\n2루타\n\n3루타\n\n홈런\n\n타점\n\n도루\n\n도실\n\n볼넷\n\n삼진\n\n타율\n\n출루율\n\n장타율\n\nOPS\n\n루타\n\n병살타\n\n몸맞\n\n희타\n\n희플\n\n고4\n\n\n\n1995\n\n삼성\n\n19\n\n121\n\n411\n\n365\n\n55\n\n104\n\n29\n\n1\n\n13\n\n73\n\n0\n\n3\n\n33\n\n54\n\n.285\n\n.345\n\n.477\n\n.822\n\n174\n\n4\n\n4\n\n2\n\n7\n\n1\n\n\n\n1996\n\n20\n\n122\n\n504\n\n459\n\n57\n\n139\n\n32\n\n6\n\n9\n\n76\n\n4\n\n1\n\n34\n\n42\n\n.303\n\n.354\n\n.458\n\n.811\n\n210\n\n10\n\n5\n\n1\n\n5\n\n4\n\n\n\n1997\n\n21\n\n'''126'''\n\n'''577'''\n\n'''517'''\n\n96\n\n'''170'''\n\n'''37'''\n\n3\n\n'''32'''\n\n'''114'''\n\n5\n\n2\n\n49\n\n79\n\n.329\n\n.391\n\n.598\n\n.988\n\n'''309'''\n\n10\n\n6\n\n1\n\n4\n\n4\n\n\n\n1998\n\n22\n\n126\n\n'''568'''\n\n477\n\n'''100'''\n\n146\n\n32\n\n2\n\n38\n\n102\n\n0\n\n2\n\n78\n\n97\n\n.306\n\n.404\n\n'''.621'''\n\n1.024\n\n'''296'''\n\n4\n\n5\n\n1\n\n7\n\n10\n\n\n\n1999\n\n23\n\n'''132'''\n\n'''614'''\n\n486\n\n'''128'''\n\n157\n\n33\n\n2\n\n'''54'''\n\n'''123'''\n\n10\n\n2\n\n'''112'''\n\n114\n\n.323\n\n'''.458'''\n\n'''.733'''\n\n'''1.190'''\n\n'''356'''\n\n7\n\n12\n\n0\n\n4\n\n6\n\n\n\n2000\n\n24\n\n125\n\n544\n\n454\n\n'''108'''\n\n133\n\n33\n\n0\n\n36\n\n95\n\n4\n\n5\n\n80\n\n113\n\n.293\n\n.404\n\n.604\n\n1.008\n\n274\n\n5\n\n7\n\n0\n\n3\n\n'''7'''\n\n\n\n2001\n\n25\n\n127\n\n574\n\n463\n\n101\n\n128\n\n31\n\n2\n\n'''39'''\n\n95\n\n4\n\n2\n\n96\n\n130\n\n.276\n\n.412\n\n.605\n\n1.017\n\n'''280'''\n\n6\n\n12\n\n1\n\n2\n\n11\n\n\n\n2002\n\n26\n\n'''133'''\n\n'''617'''\n\n511\n\n'''123'''\n\n165\n\n'''42'''\n\n2\n\n'''47'''\n\n'''126'''\n\n1\n\n2\n\n'''89'''\n\n109\n\n.323\n\n.436\n\n'''.689'''\n\n'''1.125'''\n\n'''352'''\n\n11\n\n15\n\n0\n\n2\n\n5\n\n\n\n2003\n\n27\n\n131\n\n596\n\n479\n\n'''115'''\n\n144\n\n23\n\n\n\n\n'''144'''\n\n7\n\n0\n\n101\n\n89\n\n.301\n\n.428\n\n.699\n\n1.127\n\n'''335'''\n\n11\n\n10\n\n0\n\n6\n\n9\n\n\n\n2004\n\n지바롯데\n\n28\n\n100\n\n382\n\n333\n\n50\n\n80\n\n20\n\n4\n\n14\n\n50\n\n1\n\n2\n\n42\n\n88\n\n.240\n\n.328\n\n.450\n\n.779\n\n150\n\n6\n\n3\n\n1\n\n3\n\n0\n\n\n\n2005\n\n29\n\n117\n\n445\n\n408\n\n64\n\n106\n\n25\n\n2\n\n30\n\n82\n\n5\n\n4\n\n33\n\n79\n\n.260\n\n.315\n\n.551\n\n.866\n\n225\n\n9\n\n1\n\n0\n\n3\n\n3\n\n\n\n2006\n\n요미우리\n\n30\n\n143\n\n592\n\n524\n\n101\n\n169\n\n30\n\n0\n\n41\n\n108\n\n5\n\n1\n\n56\n\n126\n\n.323\n\n.389\n\n.615\n\n1.003\n\n322\n\n5\n\n5\n\n0\n\n7\n\n3\n\n\n\n2007\n\n31\n\n137\n\n583\n\n541\n\n84\n\n148\n\n29\n\n2\n\n30\n\n74\n\n4\n\n3\n\n38\n\n119\n\n.274\n\n.322\n\n.501\n\n.823\n\n271\n\n8\n\n1\n\n2\n\n1\n\n0\n\n\n\n2008\n\n32\n\n45\n\n170\n\n153\n\n21\n\n38\n\n4\n\n0\n\n8\n\n27\n\n1\n\n0\n\n11\n\n37\n\n.248\n\n.324\n\n.431\n\n.755\n\n66\n\n3\n\n6\n\n0\n\n0\n\n0\n\n\n\n2009\n\n33\n\n77\n\n257\n\n223\n\n33\n\n51\n\n9\n\n0\n\n16\n\n36\n\n1\n\n2\n\n28\n\n65\n\n.229\n\n.327\n\n.484\n\n.811\n\n108\n\n1\n\n5\n\n0\n\n1\n\n4\n\n\n\n2010\n\n34\n\n56\n\n108\n\n92\n\n13\n\n15\n\n1\n\n0\n\n5\n\n11\n\n1\n\n0\n\n12\n\n26\n\n.163\n\n.280\n\n.337\n\n.617\n\n31\n\n0\n\n3\n\n1\n\n0\n\n0\n\n\n\n2011\n\n오릭스\n\n35\n\n122\n\n432\n\n394\n\n28\n\n79\n\n20\n\n0\n\n15\n\n51\n\n0\n\n0\n\n32\n\n121\n\n.201\n\n.257\n\n.365\n\n.622\n\n144\n\n8\n\n0\n\n0\n\n6\n\n1\n\n\n\n2012\n\n삼성\n\n36\n\n126\n\n556\n\n488\n\n84\n\n150\n\n28\n\n2\n\n21\n\n85\n\n6\n\n0\n\n59\n\n101\n\n.307\n\n.384\n\n.502\n\n.886\n\n245\n\n10\n\n4\n\n1\n\n4\n\n4\n\n\n\n2013\n\n37\n\n111\n\n483\n\n443\n\n62\n\n112\n\n24\n\n0\n\n13\n\n69\n\n3\n\n1\n\n30\n\n94\n\n.253\n\n.298\n\n.395\n\n.693\n\n175\n\n8\n\n2\n\n0\n\n8\n\n2\n\n\n\n2014\n\n38\n\n127\n\n548\n\n506\n\n83\n\n156\n\n30\n\n0\n\n32\n\n101\n\n5\n\n1\n\n40\n\n77\n\n.308\n\n.358\n\n.557\n\n.915\n\n282\n\n10\n\n0\n\n0\n\n2\n\n3\n\n\n\n2015\n\n39\n\n122\n\n522\n\n470\n\n87\n\n156\n\n28\n\n1\n\n26\n\n90\n\n2\n\n1\n\n40\n\n71\n\n.332\n\n.387\n\n.562\n\n.949\n\n264\n\n10\n\n6\n\n0\n\n6\n\n2\n\n\n\n2016\n\n40\n\n142\n\n623\n\n542\n\n91\n\n164\n\n32\n\n2\n\n32\n\n131\n\n5\n\n2\n\n65\n\n89\n\n.303\n\n.380\n\n.518\n\n.899\n\n341\n\n7\n\n8\n\n0\n\n8\n\n1\n\n\n\n2017\n\n41\n\n135\n\n533\n\n472\n\n65\n\n132\n\n30\n\n5\n\n24\n\n87\n\n1\n\n1\n\n47\n\n85\n\n.280\n\n.347\n\n.517\n\n.864\n\n244\n\n7\n\n6\n\n0\n\n8\n\n6\n\n\n\nKBO 통산 : 15년\n\n'''1906'''\n\n'''8270'''\n\n\n\n\n\n\n\n\n\n\n'''1498'''\n\n'''57'''\n\n'''25'''\n\n'''953'''\n\n'''1344'''\n\n'''.302'''\n\n\n\n\n\n\n\n'''120'''\n\n'''102'''\n\n'''7'''\n\n'''76'''\n\n'''75'''\n\n\n\nNPB 통산 : 8년\n\n'''797'''\n\n'''2969'''\n\n'''2668'''\n\n'''394'''\n\n'''686'''\n\n'''138'''\n\n'''8'''\n\n'''159'''\n\n'''439'''\n\n'''18'''\n\n'''12'''\n\n'''252'''\n\n'''661'''\n\n'''.257'''\n\n'''.324'''\n\n'''.494'''\n\n'''.818'''\n\n'''1317'''\n\n'''40'''\n\n'''24'''\n\n'''4'''\n\n'''21'''\n\n'''11'''\n\n\n\n*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는 아시아 최고 기록(한 시즌 56홈런),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n", "=== KBO ===\n\n\n\n\n\n 기록\n\n 날짜\n\n 소속\n\n 구장\n\n 상대팀\n\n 상대 투수\n\n 경기수\n\n 달성 당시 나이\n\n 기타\n\n 각주\n\n\n\n최연소/최소 경기 2000루타\n\n2002. 5.16\n\n삼성\n\n대구\n\n롯데\n\n\n\n914\n\n25세 8개월 28일\n\nDH-2\n\n\n\n\n* 1999년 5월 5일 : 대구 현대전, 최연소 통산 100홈런(만 22세 8개월 17일, 상대 투수 3회 정명원)\n* 2001년 6월 21일 : 대구 한화전, 최연소 통산 200홈런(만 24세 10개월 3일, 상대 투수 8회 김정수)\n* 2003년 6월 22일 : 대구 SK전, 세계 최연소/최단 경기 통산 300홈런(만 26세 10개월 4일/1075경기, 상대 투수 8회 김원형)\n* 2003년 10월 2일 :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최고 기록 경신 (56개), 대구 롯데전 상대 투수 2회 이정민\n* 2012년 7월 29일 : 한·일 통산 500 홈런, 목동 넥센전 상대 투수 4회 앤디 밴 헤켄\n* 2013년 6월 20일 :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 경신 종전 양준혁 (351개),(352개), 인천 SK전 상대 투수 3회 윤희상\n* 2015년 6월 3일 : KBO 리그 최초 통산 400 런, 포항 롯데전 상대 투수 3회 구승민\n* 2016년 9월 14일 : 한·일 통산 600 홈런, 대구 한화전 상대 투수 2회 이재우\n* 2017년 10월 3일 : KBO리그 은퇴경기 최초 연타석 홈런 기록 넥센전 상대 투수 2회 한현희\n\n=== NPB ===\n* 일본 진출 첫 출장 · 첫 안타 : 2004년 3월 27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세이부 돔, 상대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n* 일본 진출 첫 홈런 : 2004년 4월 4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3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상대 투수 아라가키 나기사)\n* 한·일 통산 400호 홈런 달성 : 2006년 8월 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도쿄 돔, 만 29세 11개월 13일, 상대 투수 1회 이가와 게이)\n* 일본 통산 100호 홈런 달성 : 2007년 7월 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상대 투수 아오키 디카히로)\n* 일본 양대 리그 우승 외국인 선수 : 지바 롯데 마린스(200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09년)\n", "\n", "\n* \n* 이승엽 - 스탯티즈\n* 이승엽 - NPB 기록\n* \n\n\n\n\n\n\n\n\n분류:1976년 출생\n분류:살아있는 사람\n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n분류:대구광역시 출신\n분류:KBO 리그 내야수\n분류:KBO 리그 1루수\n분류:KBO 리그 지명 타자\n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n분류: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n분류:대한민국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n분류:오릭스 버펄로스 선수\n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n분류:지바 롯데 마린스 선수\n분류: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n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n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n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n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n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n분류: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n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n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n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n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n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n분류: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n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n분류: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n분류: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n분류:200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 선수\n분류:한국 프로 야구 1000타점 클럽\n분류:한국 프로 야구 300홈런 클럽\n분류:한국 프로 야구 400홈런 클럽\n분류:한국시리즈 MVP 수상자\n분류:KBO 골든글러브 수상자\n분류:KBO MVP 수상자\n분류:KBO 장타율상 수상자\n분류:KBO 출루율상 수상자\n분류:KBO 득점상 수상자\n분류:KBO 안타상 수상자\n분류:KBO 타점상 수상자\n분류:KBO 홈런상 수상자\n분류:KBO 리그 감독\n분류:두산 베어스 감독\n분류:광주 이씨\n분류:대구중앙초등학교 동문\n분류:경상중학교 동문\n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n분류:대구대학교 동문\n분류:대한민국의 불교도\n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n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n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
'''이승엽'''(1976년 10월 11일 (음력 8월 18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 전 최강 몬스터즈 감독, 현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감독이다. === 아마추어 시절 === 중앙초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해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한국 프로야구 시절 ===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1995년 KBO 리그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로부터 1년만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이 나와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 당시 삼성 1루수 요원 중에서는 김성래가 시범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해 전열에서 이탈한 데다 부상에서 회복한 1993년부터 본격적인 주전 우익수로 나선 이종두가 어깨와 허리 통증을 호소해 전년도인 1994년부터 완전히 지명타자로 바꾼 양준혁이 우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바람에 1994년부터 포지션을 바꾼 이만수 외엔 쓸만한 1루수 자원이 없어 그가 1루수로 전향했다.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며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 * 1995년에 2할대 타율, 13홈런, 73타점을 기록해 장거리 타자로서 자질을 보였고,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백인천에게‘외다리 타법’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인 홈런 타자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 1997년에 장타력에 돋보여 홈런 1위(32개), 타점 1위(114개), 최다 안타 1위(170개)를 기록하며 정규 시즌 MVP와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차지했다. * 1998년에 38홈런, 102타점을 기록하여 당시 타이론 우즈와 시즌 최다 홈런 경쟁을 했으나 2위로 마감했다. * 1999년에 홈런(54), 타점(123), 득점(128), 출루율(0.458), 장타율(0.733)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고,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 2002년에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와 홈런 경쟁을 했고, 47홈런을 기록해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LG 투수 이상훈을 상대로 극적인 동점 3점 홈런을 쳐 내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는 곧 마해영의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이어져 삼성 라이온즈가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 * 2003년 6월 22일 SK 투수 김원형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일본의 오 사다하루(27세 3개월 11일)와 MLB 알렉스 로드리게스(27세 8개월 6일)를 제치고 세계 최연소 300호 홈런 고지(26세 10개월 4일)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롯데전에서 투수 이정민을 56째 홈런을 쳐내며 한국 프로야구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자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으나 2022년 무라카미 무네타카에 의해 타이가 됐다. === 일본 프로야구 시절 === ====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 ===== 2004년 =====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으며 본인에 앞서 김재박이 1979년 1월 해당 팀(당시 롯데 오리온즈)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군대 문제가 걸려 무산됐다. 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세이브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 2005년 =====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0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해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때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됐다. 시즌 최종 타율은 2할대 타율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현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기록)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팀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했다. 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됐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을 쳐 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팀이 재팬 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이마에 도시아키에게 밀려 제팬 시리즈 MVP 수상에 실패했다. 2005년 시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3번과 6번 타자로 출전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 ===== 2006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이승엽. 2005년 시즌 후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며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지바 롯데 마린스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1월 19일에 이적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하라 다쓰노리는 그를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했는데, 이에 부응해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팀은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성적은 타율 2위, 타점 1위(108), 홈런 1위(41개)를 기록해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44홈런을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했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즈의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해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타율은 주니치 드래곤즈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냈다. ===== 2007년 ===== 2006년 시즌 후 MLB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팀의 우승 후로 연기했다.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즌 연봉은 6억 5,000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 이듬해 1월,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 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했다. 외다리 타법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후반에는 승부에 결정적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2할대 타율, 30홈런, 74타점을 기록했다.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후 받은 손가락 수술로 인해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인 일본전에서 2점 홈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2점 홈런을 쳐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 해 45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OPS 0.755,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시리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진행했는데 7경기에서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 12삼진으로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 2009년 =====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스스로 WBC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 3할 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했다. 16홈런, 2할대 타율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에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1루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2010년=====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팀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됐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시즌 후 11월 16일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 ===== 2011년 =====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의 이승엽.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 한국 프로야구 복귀 === ==== 삼성 라이온즈 복귀 ==== 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2012년===== 3할대 타율,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해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상대적으로 1루수로 출장한 경기가 적어 처음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 2013년 ===== 시즌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의 대결에서 6-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을 기록했다. 2013년 8월 28일 NC와의 경기에서 3000루타를 달성했으며, 이는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이다. 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2할대 타율, 13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됐다.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돼 7경기에서 타율 0.148(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11월 1일 7차전까지 단 1타점도 기록하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의 믿음에 보답했다. 하지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해 그 해 골든글러브(지명타자)를 타격왕을 차지한 이병규에게 내 줬다. ===== 2014년 ===== 타격 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30홈런-세 자릿수 타점을 달성하며 국민 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6월 17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했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쳐 내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대 타율,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해 총 9번을 수상하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했다. ===== 2015년 =====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구승민을 상대로 장외 홈런이자 시즌 10호 홈런,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한일 통산 559호 홈런을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15타수 6안타, 4할 타율을 기록했다. 시즌 후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2월 8일 열린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KBO 리그 최초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시즌 후 FA 선언을 했고, 2년 36억원에 잔류했다. ===== 2016년 ===== 8월 24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KBO 리그 통산 1390타점을 기록했고, KBO 리그 통산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웠다. 그 후 9월 14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이재우를 상대로 한일 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했다. ==== 2017년 ==== 시즌 전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5월 21일 송창식을 상대로 KBO 리그 첫 450홈런을 기록했고, 2달 뒤인 7월 29일에는 김성민을 상대로 KBO 리그 최초 4000루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기부터 소속 팀을 제외한 9개 구단에서 그를 위해 은퇴 투어를 진행했고 10월 3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를 끝으로 공식 은퇴했다. 그 경기에서 한현희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그의 은퇴를 바라보는 이들을 아쉽게 만들었다. 경기 후 팀은 그에 대한 성대한 은퇴식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인 '36번'은 구단 역대 세 번째로 영구 결번 처리됐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관련 직종에 종사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히며 "야구장 안팎에서 야구 관련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KBO 홍보대사,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 SBS 및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2020년에 지도자 연수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022 시즌 후 김태형의 후임으로 두산 베어스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 '국민 타자', '국민 영웅', '라이언 킹' 등으로 불린다. *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이다. * 2008년 하계 올림픽 때 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 WBC와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해 '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고 불린다. * 국제 대회나 중요한 경기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특히 8회에 결정적 역할을 해 '8회의 사나이'라고 불린다. * 삼성 라이온즈의 제 2구장인 포항야구장의 성적도 뛰어나 '포항의 사나이'라고 불린다. * 2016년 2월 25일에 팀의 새로운 홈 구장인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준공돼 그 기념으로 대구광역시 도시철도공사 홍보대사로 뽑혀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의 특별 안내방송을 맡게 됐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 2006년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 2013년 제 3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KBO * '''36''' (1995년 ~ 2003년, 2012년 ~ 2017년, 삼성 라이온즈, '''영구 결번''') * '''77''' (2023년 ~, 두산 베어스 감독) ; NPB * '''36''' (2004년 ~ 2005년, 지바 롯데 마린스) * '''33'''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 '''25''' (2007년 ~ 201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 '''3''' (2011년, 오릭스 버펄로스) === 고교 야구 === * 고교 청룡기 대회 - 우수 투수상 (1993년) === 국제 대회 === *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최다 홈런상, 최다 타점상 (1994년) *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0년) *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02년) * WBC 우수 선수 (2006년, 1루수 부문) & 초대 홈런왕 및 타점왕 *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8년) === KBO 리그 === * KBO MVP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 골든글러브 10회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12년, 2014년, 2015년) * 한국시리즈 MVP 1회 (2012년) * 홈런왕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 타점왕 4회 (1997년, 1999년, 2002년, 2003년) * 득점왕 5회 (1998년, 1999년, 2000년, 2002년, 2003년) * 최고 출루율 1회 (1999년) * 최고 장타율 3회 (1998년, 1999년, 2002년) * 최다 안타 1회 (1997년) === NPB ===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2005년) * 월간 MVP 1회 (2006년 6월) * 도쿄 돔 MVP 1회 (2006년) === 기타 === *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7년) *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7년) * 일간스포츠 연간 3상 기능상 (1998년) * 스포츠조선 레간자 대상 (1999년) * 한국스포츠연맹 선정 올해의 남자프로선수상 (1999년) * 일간스포츠001 최고타자상 (1999년) * 스포츠투데이 매일우유상 대상 (1999년) * 제 37회 백상체육대상 (2000년) * 서울외신기자클럽 외신홍보상 (2003년) *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대상 (2003년) * 한국언론인연합회 선정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2003년) * 자황컵 체육대상 프로선수상 (2003년) * 일간스포츠 대한화재 프로야구대상 특별상 (2006년) * 제 55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대상 (2009년) *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최고타자상 (2012년) *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타자상 (2012년) * 제 2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2년) * 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2013년) *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재기상 (2014년) * 제 6회 카스포인트 어워즈 카스모멘트 TOP3 (2016년) * 휘슬러코리아 일구상 일구대상 (2016년) *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공로상 (2016년) *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2017 최고의 레전드 특별상 (2017년) * 2021년 SBS 연예대상 쇼•스포츠부문 남자 신인상 * '''MBC''' ** 성공시대 - 홈런왕 이승엽 (1999년 10월 23일) ** PD수첩 - 이승엽 신드롬 (1999년 8월 24일) ** 밀레니엄특집 아듀 20세기 웰컴 21세기 - 스포츠 100년 손기정에서 이승엽까지 (1999년 12월 31일) ** 색션tv 연예통신 - 이승엽 이송정 결혼식 및 인터뷰(2002년 1월 7일) ** 일밤 - 불가능은 없다 (2007년 12월 30일) ** 대구MBC The Lion - 이승엽 삼성 복귀 내레이션 참여 (2012년 3월 25일) ** 대구MBC 덕아웃 -프로야구 삼성 우승특집 방송 출연 (2012년 11월 16일) * '''KBS''' ** 가족오락관 (1997년 11월 12일) ** 체험 삶의 현장 -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1998년 11월 16일) ** 서세원쇼 (1999년 8월 17일) ** 작전타임 스포츠쇼 - 집중탐구 (1999년 9월 29일) ** 개그콘서트 - 걸인의 추억 (2003년 8월 26일) **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 (2003년 12월, 게스트 윤도현, 장나라와 동반출연) ** 파워 인터뷰 (2005년 11월 27일) ** 단박 인터뷰 - 야구 선수 이승엽 (2007년 6월 26일) ** 여유만만 - 역대 연봉 스포츠 스타로 키운 사연 (2009년 7월 31일) * '''SBS''' ** 줌인 내인생의 특종 (1999년 8월 17일) ** 좋은 아침 (SBS) 이승엽 이송정 결혼식 및 인터뷰 (2002년 1월 8일) ** 한밤의 TV연예 이승엽 이송정 결혼식 및 인터뷰(2002년 1월 9일) **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국민타자 이승엽 (2012년 11월 19일, 2012년 12월 3일), 신년의 밤 (2015년 1월 19일) ** SBS 스페셜 - 승엽의 시대 편 492회 (2017년 10월 15일) ** 집사부일체 ** 편먹고 공치리 * ''' JTBC''' ** 최강야구 (2022년 6월 6일 ~ 현재) ** 아는 형님 (2022년 7월 23일) * 2000년 삼성그룹 삼성증권 * 2004년 신세계 신세계상품권 (부인 이송정과 출연) * 2006년 해태제과 홈런볼 * 2006년 삼성전자 파브 full hd 모젤 * 2007년 HK이노엔 컨디션파워 (2편에선 김제동과 출연) * 2007년 KB국민은행 * 2007년 AIA생명 꼭하나의로보험 (부인 이송정, 손범수와 출연) * 2008년 나이키 * 2009년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 2018년 SK브로드밴드 옥수수 (김제동과 출연) * 2018년 스크린야구 다함께야구왕 * 2018년 IWC 포르토피노 크로노그래프 이승엽 에디션 * 2020년 정직한삼 ; 라디오 광고 * 1998년 삼성투자신탁 * 1999년 삼성투자신탁증권 * 2003년 삼성전자 애니콜 * 2000년 대구지방경찰청 대구경북 청소년선도위원 * 2009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명예홍보대사 * 2012년 대구경북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장학지원 홍보대사 * 2022년 대한사회복지회 홍보대사 연도 소속 나이 출장 타석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도루 도실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루타 병살타 몸맞 희타 희플 고4 1995 삼성 19 121 411 365 55 104 29 1 13 73 0 3 33 54 .285 .345 .477 .822 174 4 4 2 7 1 1996 20 122 504 459 57 139 32 6 9 76 4 1 34 42 .303 .354 .458 .811 210 10 5 1 5 4 1997 21 '''126''' '''577''' '''517''' 96 '''170''' '''37''' 3 '''32''' '''114''' 5 2 49 79 .329 .391 .598 .988 '''309''' 10 6 1 4 4 1998 22 126 '''568''' 477 '''100''' 146 32 2 38 102 0 2 78 97 .306 .404 '''.621''' 1.024 '''296''' 4 5 1 7 10 1999 23 '''132''' '''614''' 486 '''128''' 157 33 2 '''54''' '''123''' 10 2 '''112''' 114 .323 '''.458''' '''.733''' '''1.190''' '''356''' 7 12 0 4 6 2000 24 125 544 454 '''108''' 133 33 0 36 95 4 5 80 113 .293 .404 .604 1.008 274 5 7 0 3 '''7''' 2001 25 127 574 463 101 128 31 2 '''39''' 95 4 2 96 130 .276 .412 .605 1.017 '''280''' 6 12 1 2 11 2002 26 '''133''' '''617''' 511 '''123''' 165 '''42''' 2 '''47''' '''126''' 1 2 '''89''' 109 .323 .436 '''.689''' '''1.125''' '''352''' 11 15 0 2 5 2003 27 131 596 479 '''115''' 144 23 '''144''' 7 0 101 89 .301 .428 .699 1.127 '''335''' 11 10 0 6 9 2004 지바롯데 28 100 382 333 50 80 20 4 14 50 1 2 42 88 .240 .328 .450 .779 150 6 3 1 3 0 2005 29 117 445 408 64 106 25 2 30 82 5 4 33 79 .260 .315 .551 .866 225 9 1 0 3 3 2006 요미우리 30 143 592 524 101 169 30 0 41 108 5 1 56 126 .323 .389 .615 1.003 322 5 5 0 7 3 2007 31 137 583 541 84 148 29 2 30 74 4 3 38 119 .274 .322 .501 .823 271 8 1 2 1 0 2008 32 45 170 153 21 38 4 0 8 27 1 0 11 37 .248 .324 .431 .755 66 3 6 0 0 0 2009 33 77 257 223 33 51 9 0 16 36 1 2 28 65 .229 .327 .484 .811 108 1 5 0 1 4 2010 34 56 108 92 13 15 1 0 5 11 1 0 12 26 .163 .280 .337 .617 31 0 3 1 0 0 2011 오릭스 35 122 432 394 28 79 20 0 15 51 0 0 32 121 .201 .257 .365 .622 144 8 0 0 6 1 2012 삼성 36 126 556 488 84 150 28 2 21 85 6 0 59 101 .307 .384 .502 .886 245 10 4 1 4 4 2013 37 111 483 443 62 112 24 0 13 69 3 1 30 94 .253 .298 .395 .693 175 8 2 0 8 2 2014 38 127 548 506 83 156 30 0 32 101 5 1 40 77 .308 .358 .557 .915 282 10 0 0 2 3 2015 39 122 522 470 87 156 28 1 26 90 2 1 40 71 .332 .387 .562 .949 264 10 6 0 6 2 2016 40 142 623 542 91 164 32 2 32 131 5 2 65 89 .303 .380 .518 .899 341 7 8 0 8 1 2017 41 135 533 472 65 132 30 5 24 87 1 1 47 85 .280 .347 .517 .864 244 7 6 0 8 6 KBO 통산 : 15년 '''1906''' '''8270''' '''1498''' '''57''' '''25''' '''953''' '''1344''' '''.302''' '''120''' '''102''' '''7''' '''76''' '''75''' NPB 통산 : 8년 '''797''' '''2969''' '''2668''' '''394''' '''686''' '''138''' '''8''' '''159''' '''439''' '''18''' '''12''' '''252''' '''661''' '''.257''' '''.324''' '''.494''' '''.818''' '''1317''' '''40''' '''24''' '''4''' '''21''' '''11'''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는 아시아 최고 기록(한 시즌 56홈런),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 === KBO === 기록 날짜 소속 구장 상대팀 상대 투수 경기수 달성 당시 나이 기타 각주 최연소/최소 경기 2000루타 2002. 5.16 삼성 대구 롯데 914 25세 8개월 28일 DH-2 * 1999년 5월 5일 : 대구 현대전, 최연소 통산 100홈런(만 22세 8개월 17일, 상대 투수 3회 정명원) * 2001년 6월 21일 : 대구 한화전, 최연소 통산 200홈런(만 24세 10개월 3일, 상대 투수 8회 김정수) * 2003년 6월 22일 : 대구 SK전, 세계 최연소/최단 경기 통산 300홈런(만 26세 10개월 4일/1075경기, 상대 투수 8회 김원형) * 2003년 10월 2일 :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최고 기록 경신 (56개), 대구 롯데전 상대 투수 2회 이정민 * 2012년 7월 29일 : 한·일 통산 500 홈런, 목동 넥센전 상대 투수 4회 앤디 밴 헤켄 * 2013년 6월 20일 : KBO 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 경신 종전 양준혁 (351개),(352개), 인천 SK전 상대 투수 3회 윤희상 * 2015년 6월 3일 : KBO 리그 최초 통산 400 런, 포항 롯데전 상대 투수 3회 구승민 * 2016년 9월 14일 : 한·일 통산 600 홈런, 대구 한화전 상대 투수 2회 이재우 * 2017년 10월 3일 : KBO리그 은퇴경기 최초 연타석 홈런 기록 넥센전 상대 투수 2회 한현희 === NPB === * 일본 진출 첫 출장 · 첫 안타 : 2004년 3월 27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세이부 돔, 상대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 * 일본 진출 첫 홈런 : 2004년 4월 4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3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상대 투수 아라가키 나기사) * 한·일 통산 400호 홈런 달성 : 2006년 8월 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도쿄 돔, 만 29세 11개월 13일, 상대 투수 1회 이가와 게이) * 일본 통산 100호 홈런 달성 : 2007년 7월 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상대 투수 아오키 디카히로) * 일본 양대 리그 우승 외국인 선수 : 지바 롯데 마린스(200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09년) * * 이승엽 - 스탯티즈 * 이승엽 - NPB 기록 * 분류:1976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분류:KBO 리그 내야수 분류:KBO 리그 1루수 분류:KBO 리그 지명 타자 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 분류: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 분류:대한민국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 분류:오릭스 버펄로스 선수 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분류:지바 롯데 마린스 선수 분류: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분류: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분류:2000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분류: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 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분류: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분류: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 분류:200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 선수 분류:한국 프로 야구 1000타점 클럽 분류:한국 프로 야구 300홈런 클럽 분류:한국 프로 야구 400홈런 클럽 분류:한국시리즈 MVP 수상자 분류:KBO 골든글러브 수상자 분류:KBO MVP 수상자 분류:KBO 장타율상 수상자 분류:KBO 출루율상 수상자 분류:KBO 득점상 수상자 분류:KBO 안타상 수상자 분류:KBO 타점상 수상자 분류:KBO 홈런상 수상자 분류:KBO 리그 감독 분류:두산 베어스 감독 분류:광주 이씨 분류:대구중앙초등학교 동문 분류:경상중학교 동문 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 분류:대구대학교 동문 분류:대한민국의 불교도 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한국야구위원회
[ "Introduction", "연혁", "조직", "총재", "역대 사무총장", "주요 활동",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사단법인 한국야구위원회'''(社團法人韓國野球委員會, ), 또는 '''KBO 사무국'''(KBO事務局, )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n", "* 1981년 12월 11일 창립\n*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으로 리그 시작\n* 2011년 1월 1일 기준으로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에서 2012년에 2군 퓨처스리그 참가 및 2013년에 1군리그 참가를 목표로 통합 창원시에 제9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선언했다.2011년 2월 8일자로 KBO로부터 창단승인을 받아 2013년 NC 다이노스라는 팀명으로 9번째 구단으로 프로리그에 참여하고 있다.\n* 2013년 통신회사인 KT가 경기도 수원시에 제10구단 창단을 선언하고 KBO가 창단을 승인하여 팀명 kt 위즈로 정식창단하였다. 2014년까지 2군 리그 참가 후 2015년부터 1군 리그에 정식 참여하고 있다.\n*2020년 5월 5일에 개막한 2020년 KBO 리그는 미국 ESPN과 일본 SPOZONE를 통해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지역에 생중계되었다.\n",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n", "'''KBO 총재'''는 KBO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n\n=== 역대 총재 ===\n\n\n\n\n\n 이름\n\n 재임 기간\n\n 비고\n\n\n\n 서종철\n\n 1981년 12월 11일 ~ 1988년 3월 27일\n\n \n\n\n\n 이웅희\n\n 1988년 3월 28일 ~ 1992년 5월 27일\n\n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제26대 문화공보부 장관제13·14·15대 국회의원\n\n\n\n 이상훈\n\n 1992년 5월 28일 ~ 1993년 9월 16일\n\n \n\n\n\n 오명\n\n 1993년 11월 26일 ~ 1993년 12월 21일\n\n \n\n\n\n 권영해\n\n 1994년 3월 21일 ~ 1994년 12월 23일\n\n 제30대 국방부 장관\n\n\n\n 김기춘\n\n 1995년 2월 8일 ~ 1996년 6월 8일\n\n 15·16·17대 국회의원제40대 법무장관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n\n\n\n 홍재형\n\n 1996년 7월 4일 ~ 1998년 5월 26일\n\n 16·17·18대 국회의원18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제37대 재무장관\n\n\n\n 정대철\n\n 1998년 5월 27일 ~ 1998년 9월 15일\n\n 9·10·13·14·16대 국회의원\n\n\n\n 박용오\n\n 1998년 12월 8일 ~ 2005년 12월 11일\n\n 총재 대행 (1998년 9월 16일 ~ 1998년 11월 28일)최장 임기(2561일)\n\n\n\n 신상우\n\n 2006년 1월 12일 ~ 2008년 12월 16일\n\n 8·9·10·11·13·14·15대 국회의원초대 해양부 장관\n\n\n\n 유영구\n\n 2008년 12월 17일 ~ 2011년 5월 2일\n\n\n\n\n\n 이용일\n\n 2011년 5월 17일 ~ 2011년 8월 21일\n\n대행\n\n\n\n 구본능\n\n 2011년 8월 22일 ~ 2017년 12월 31일\n\n두번째 최장 임기(2324일)\n\n\n\n 정운찬\n\n 2018년 1월 1일 ~ 2020년 12월 31일\n\n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제40대 국무총리\n\n\n\n 정지택\n\n 2021년 1월 1일 ~ 2022년 2월 8일\n\n 제19,20대 한국기계산업진흥회 회장동반성장위원회 위원\n\n\n\n 류대환\n\n 2022년 2월 8일 ~ 2022년 3월 25일\n\n 대행, 사무총장 겸임\n\n\n\n 허구연\n\n 2022년 3월 25일 ~ 현재\n\n 최초의 야구인 출신 총재\n\n\n", "\n\n\n\n\n 이름\n\n 재임 기간\n\n 비고\n\n\n\n 이용일\n\n 1981년 12월 15일 ~ 1991년 2월 21일\n\n \n\n\n\n 안의현\n\n 1991년 2월 ~ 1995년 12월\n\n \n\n\n\n 박종환\n\n 1996년 1월 ~ 1998년 3월\n\n \n\n\n\n 최영언\n\n 1998년 10월 8일 ~ 1999년 12월 24일\n\n \n\n\n\n 최영언\n\n 1999년 12월 28일 ~ 2006년 4월 5일\n\n \n\n\n\n 하일성\n\n 2006년 5월 8일 ~ 2009년 3월 31일\n\n \n\n\n\n 이상일\n\n 2009년 4월 1일 ~ 2011년 12월 13일\n\n \n\n\n\n 양해영\n\n 2011년 12월 14일 ~ 2017년 12월 30일\n\n \n\n\n\n 장윤호\n\n 2018년 1월 30일 ~ 2019년 2월 7일\n\n\n\n\n\n 류대환\n\n 2019년 2월 8일 ~ '''현재'''\n\n\n\n\n", "* KBO 리그 관리, 통괄\n* 페넌트레이스, 올스타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KBO 한국시리즈 주최\n* 야구 경기 기록, 관련 자료의 수집과 조사 및 분석 연구\n* 국제 야구 활동 교류 추진\n* 아마추어 야구의 발전을 위한 제반 지원 활동\n* TV 및 라디오 방송중계권 계약 활동\n* 야구 기술의 개발 및 지도 보급\n* 야구 관계자의 상벌 및 복지 사업\n* 회원 간의 연락 및 친선\n* 야구 박물관, 도서관 및 회관의 설치 운영\n* 한국 프로 야구 연감 및 간행물 발간\n* 한국야구위원회 재산/회계 관리\n* 기타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n", "*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n* KBO 리그\n* KBO 퓨처스리그\n*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n*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n", "\n", "* \n\n\n\n\n\n\n \n분류:1981년 설립된 스포츠 단체\n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단체\n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행정 기구\n분류:대한민국의 야구\n분류: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n분류:야구 단체\n분류:사단법인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
'''사단법인 한국야구위원회'''(社團法人韓國野球委員會, ), 또는 '''KBO 사무국'''(KBO事務局, )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 * 1981년 12월 11일 창립 *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으로 리그 시작 * 2011년 1월 1일 기준으로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에서 2012년에 2군 퓨처스리그 참가 및 2013년에 1군리그 참가를 목표로 통합 창원시에 제9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선언했다.2011년 2월 8일자로 KBO로부터 창단승인을 받아 2013년 NC 다이노스라는 팀명으로 9번째 구단으로 프로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 2013년 통신회사인 KT가 경기도 수원시에 제10구단 창단을 선언하고 KBO가 창단을 승인하여 팀명 kt 위즈로 정식창단하였다. 2014년까지 2군 리그 참가 후 2015년부터 1군 리그에 정식 참여하고 있다. *2020년 5월 5일에 개막한 2020년 KBO 리그는 미국 ESPN과 일본 SPOZONE를 통해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지역에 생중계되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 '''KBO 총재'''는 KBO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 역대 총재 === 이름 재임 기간 비고 서종철 1981년 12월 11일 ~ 1988년 3월 27일 이웅희 1988년 3월 28일 ~ 1992년 5월 27일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제26대 문화공보부 장관제13·14·15대 국회의원 이상훈 1992년 5월 28일 ~ 1993년 9월 16일 오명 1993년 11월 26일 ~ 1993년 12월 21일 권영해 1994년 3월 21일 ~ 1994년 12월 23일 제30대 국방부 장관 김기춘 1995년 2월 8일 ~ 1996년 6월 8일 15·16·17대 국회의원제40대 법무장관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 홍재형 1996년 7월 4일 ~ 1998년 5월 26일 16·17·18대 국회의원18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제37대 재무장관 정대철 1998년 5월 27일 ~ 1998년 9월 15일 9·10·13·14·16대 국회의원 박용오 1998년 12월 8일 ~ 2005년 12월 11일 총재 대행 (1998년 9월 16일 ~ 1998년 11월 28일)최장 임기(2561일) 신상우 2006년 1월 12일 ~ 2008년 12월 16일 8·9·10·11·13·14·15대 국회의원초대 해양부 장관 유영구 2008년 12월 17일 ~ 2011년 5월 2일 이용일 2011년 5월 17일 ~ 2011년 8월 21일 대행 구본능 2011년 8월 22일 ~ 2017년 12월 31일 두번째 최장 임기(2324일) 정운찬 2018년 1월 1일 ~ 2020년 12월 31일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제40대 국무총리 정지택 2021년 1월 1일 ~ 2022년 2월 8일 제19,20대 한국기계산업진흥회 회장동반성장위원회 위원 류대환 2022년 2월 8일 ~ 2022년 3월 25일 대행, 사무총장 겸임 허구연 2022년 3월 25일 ~ 현재 최초의 야구인 출신 총재 이름 재임 기간 비고 이용일 1981년 12월 15일 ~ 1991년 2월 21일 안의현 1991년 2월 ~ 1995년 12월 박종환 1996년 1월 ~ 1998년 3월 최영언 1998년 10월 8일 ~ 1999년 12월 24일 최영언 1999년 12월 28일 ~ 2006년 4월 5일 하일성 2006년 5월 8일 ~ 2009년 3월 31일 이상일 2009년 4월 1일 ~ 2011년 12월 13일 양해영 2011년 12월 14일 ~ 2017년 12월 30일 장윤호 2018년 1월 30일 ~ 2019년 2월 7일 류대환 2019년 2월 8일 ~ '''현재''' * KBO 리그 관리, 통괄 * 페넌트레이스, 올스타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KBO 한국시리즈 주최 * 야구 경기 기록, 관련 자료의 수집과 조사 및 분석 연구 * 국제 야구 활동 교류 추진 * 아마추어 야구의 발전을 위한 제반 지원 활동 * TV 및 라디오 방송중계권 계약 활동 * 야구 기술의 개발 및 지도 보급 * 야구 관계자의 상벌 및 복지 사업 * 회원 간의 연락 및 친선 * 야구 박물관, 도서관 및 회관의 설치 운영 * 한국 프로 야구 연감 및 간행물 발간 * 한국야구위원회 재산/회계 관리 * 기타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 KBO 리그 * KBO 퓨처스리그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 분류:1981년 설립된 스포츠 단체 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단체 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행정 기구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분류: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분류:야구 단체 분류:사단법인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국민학교
[ "Introduction", "각주", "참고 문헌" ]
[ "\n파일:Tokyo Municipal Akashi National Elementary School.JPG|섬네일|348x348px|도쿄시 아카시 국민학교. 현재 주오구립 아카시소학교\n'''국민학교'''(國民學校)는 일본 제국에서 중일 전쟁 발발 후 사회 정세에 따라 설치되어 초등교육 및 전기 중등교육을 행한 학교이다.\n\n1941년 국민학교령에 따라 설립되었다. 교육칙어의 가르침을 받들어 황국의 도에 입각한 초등보통교육을 베풀어 기초적 연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국가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게 가미된 것이다.\n\n\n\n명칭은 당시 문부성 보통학무국 초등교육 과장에 따르면 \"국민의 기초교육을 베푸는 학교\"에서 유래한다. 아울러 당시 동맹국이던 독일의 초등교육에 기원을 두고 독일어 Volksschule(Volks는 '국민·민족', schule은 '학교'를 뜻함)의 번역이라는 설이 있다.\n\n제도상의 개혁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n\n* 소학교심상과를 국민학교초등과(수업연한 6년), 소학교고등과를 국민학교고등과(수업연한 2년)로 개조.\n*국민학교의 고등과 2년 수료자를 대상으로 수업연한 1년의 특수과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함.\n*1944년(쇼와 19년)부터 의무교육연한을 6년에서 8년(국민학교초등과 6년+국민학교고등과 2년/국민학교초등과 6년+구제중등학교 2년)으로 연장하는 것을 규정. 단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책에 의해 연기되어 국민학교가 폐지될 때까지 의무교육의 연장은 결국 행해지지 않음.\n* 학구제를 도입하여 입학자를 학구 내에 주소하는 아동으로 한정한다.\n*이하와 같은 대책을 강구하여 취학의무를 철저히 꾀한다.\n*빈곤 등에 따른 아동취학의무면제·유예제도를 폐지.\n*심신이상아동을 위하여 지금까지 가정에서 의무교육을 행하여도 가능하게 한 제도를 폐지, 특별한 영호시설을 설치.\n*교두(敎頭)와 양호훈도(養護訓導)를 설치하거나 교장과 교두를 주임대우함으로써 직원의 조직·대우를 개선함.\n1947년(쇼와 22년) 4월 1일 학제개혁에 따라 국민학교는 폐지되고 국민교초등과는 신제소학교로 개조, 신제중학교가 발족하여 국민학교고등과 1년생원과 2년생 가운데 희망자는 신제중학교 2, 3년생이 되었다.\n\n대한민국에서는 독립 후 초등교육 6년간을 '국민학교'로 호칭하며 계속 써오다 김영삼 정권이던 1995년 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대만에서는 1941년 설립되었으며, 독립 후에도 '국민학교'(약칭 '국교')를 계속 써오다 1968년 '국민소학(國民小學)'(약칭 '국소')으로 개칭하였다.\n", "\n", "* \n* \n\n분류:일본의 교육\n분류:일본의 구제교육기관\n분류: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n분류:대한민국의 교육" ]
파일:Tokyo Municipal Akashi National Elementary School.JPG|섬네일|348x348px|도쿄시 아카시 국민학교. 현재 주오구립 아카시소학교 '''국민학교'''(國民學校)는 일본 제국에서 중일 전쟁 발발 후 사회 정세에 따라 설치되어 초등교육 및 전기 중등교육을 행한 학교이다. 1941년 국민학교령에 따라 설립되었다. 교육칙어의 가르침을 받들어 황국의 도에 입각한 초등보통교육을 베풀어 기초적 연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국가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게 가미된 것이다. 명칭은 당시 문부성 보통학무국 초등교육 과장에 따르면 "국민의 기초교육을 베푸는 학교"에서 유래한다. 아울러 당시 동맹국이던 독일의 초등교육에 기원을 두고 독일어 Volksschule(Volks는 '국민·민족', schule은 '학교'를 뜻함)의 번역이라는 설이 있다. 제도상의 개혁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 소학교심상과를 국민학교초등과(수업연한 6년), 소학교고등과를 국민학교고등과(수업연한 2년)로 개조. *국민학교의 고등과 2년 수료자를 대상으로 수업연한 1년의 특수과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함. *1944년(쇼와 19년)부터 의무교육연한을 6년에서 8년(국민학교초등과 6년+국민학교고등과 2년/국민학교초등과 6년+구제중등학교 2년)으로 연장하는 것을 규정. 단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방책에 의해 연기되어 국민학교가 폐지될 때까지 의무교육의 연장은 결국 행해지지 않음. * 학구제를 도입하여 입학자를 학구 내에 주소하는 아동으로 한정한다. *이하와 같은 대책을 강구하여 취학의무를 철저히 꾀한다. *빈곤 등에 따른 아동취학의무면제·유예제도를 폐지. *심신이상아동을 위하여 지금까지 가정에서 의무교육을 행하여도 가능하게 한 제도를 폐지, 특별한 영호시설을 설치. *교두(敎頭)와 양호훈도(養護訓導)를 설치하거나 교장과 교두를 주임대우함으로써 직원의 조직·대우를 개선함. 1947년(쇼와 22년) 4월 1일 학제개혁에 따라 국민학교는 폐지되고 국민교초등과는 신제소학교로 개조, 신제중학교가 발족하여 국민학교고등과 1년생원과 2년생 가운데 희망자는 신제중학교 2, 3년생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독립 후 초등교육 6년간을 '국민학교'로 호칭하며 계속 써오다 김영삼 정권이던 1995년 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대만에서는 1941년 설립되었으며, 독립 후에도 '국민학교'(약칭 '국교')를 계속 써오다 1968년 '국민소학(國民小學)'(약칭 '국소')으로 개칭하였다. * * 분류:일본의 교육 분류:일본의 구제교육기관 분류: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분류:대한민국의 교육
언어학
[ "Introduction", "분야", "커리큘럼", "같이 보기", "참고 도서", "각주", "외부 링크" ]
[ "\n\n\n'''언어학'''(言語學, )은 인간의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과 본질을 과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법과 같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지식을 체계화, 규칙화하는 것에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인지 및 사회적인 부분도 다루기 때문에 인문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지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n\n언어 체계의 분석은 크게 문장의 구조와 규칙에 대한 통사론, 의미론, 단어의 구조에 대한 형태론, 음성학, 음운론, 화용론으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진화 등 생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생물언어학, 심리학적 요소를 고려한 심리언어학 등의 분과도 존재한다.\n\n언어학은 이론적인 연구와 실용적인 연구를 모두 포괄한다. 이론언어학은 언어철학 등 인간 언어의 이론적인 부분을 다룬다. 응용언어학은 언어교육이나 문해와 같이 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한다.\n\n언어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연구할지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을 기준으로 어떤 한 순간의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으로 구분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언어의 개수에 따라 다중언어와 단일언어로 그 대상을 구분할 수도 있고, 아이와 어른으로 구분할 수도 있으며, 학습한 것과 습득한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n", "언어학의 연구 분야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 중의 하나는 어떤 한 순간의 언어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을 구분하는 것이다.\n\n* 공시언어학\n* 통시언어학\n\n다음은 언어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분야이다. 이러한 구분은 언어가 낮은 단계의 소리에서 높은 단계의 뜻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n\n* 음성학은 음성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학문\n* 음운론은 화자가 말할 때 심리적으로 구분하는 소리(음운)에 대한 학문\n* 문자론은 문자에 대한 학문\n* 형태론은 단어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n* 통사론은 문장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n* 의미론은 단어의 의미와 단어의 조합에 따른 의미 변화에 대한 학문\n* 화용론은 대화에서 화자의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학문\n* 텍스트언어학 또는 담화론은 가장 큰 언어단위인 텍스트 또는 담화에 대한 학문\n\n위에서 형태론과 통사론을 문법론으로 묶기도 한다.\n다음 분야들은 그 연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분야들로 전통언어학의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휘론은 단어들의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에 해당하고 어원론은 언어의 시간적인 변화, 방언학은 언어의 공간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n\n* 어휘론\n* 어원론 (어원학)\n* 방언학\n\n어떠한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분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에 제시된\n대상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음운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역사음운론, 전산적인 차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전산의미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통사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이론통사론 등으로 불린다.\n\n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등의 방법론을 이용한 접근법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순수한 언어학이 아니라 학제간 연구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로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해 응용언어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n\n* 비교언어학 (또는 역사언어학, 역사비교언어학)\n* 언어유형학 (언어유형론, 또는 짧게 유형론)\n* 전산언어학\n*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n* 법언어학\n\n또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존재한다. 언어학의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를 하는 메타언어학과 언어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사가 있다.\n\n* 메타언어학\n* 언어학사\n\n이외에도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문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는 문체론과 수사학,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기호학 등이 있다.\n\n* 문체론\n* 수사학\n* 기호학\n\n=== 응용 분야 ===\n언어와 관련된 실질적인 분야를 다루는 응용언어학에는 언어 관련 교재 개발, 교수법, 번역과 통역, 사전 편찬, 언어치료, 언어정책, 전산처리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n\n* 담화분석\n*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n* 맞춤법, 정서법\n* 대조언어학\n* 번역학\n* 사전학 (사전편찬학)\n* 언어교육학\n* 언어정책\n* 자연언어처리 :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n*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n\n=== 인접 분야와 학제적 연구 ===\n언어학은 연구 주제에서 문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특정 학문 분야의 하위 분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야들은 흔히 학제적연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일부 분야는 언어에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n\n* 기호학\n* 사회언어학\n* 언어 되살리기\n* 수리언어학\n* 신경언어학\n* 심리언어학\n* 언어병리학 - 언어장애, 언어치료\n* 언어습득\n* 응용언어학\n* 인류언어학 (참조 언어인류학)\n* 인지언어학\n* 자연언어처리 :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n* 전산언어학\n*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n* 언어지리학\n* 언어철학\n", "대한민국에서는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대학교, 충남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과 같이 주요 언어학에 대한 커리큘럼을 가진 언어학과들은 전공 학위에서 문학사로 분류하고 있다.\n", "\n\n* 비교 재구\n* 언어학자 목록\n", "* 김방한 (2001), 언어학의 이해, 민음사. ()\n* 김선미 (2003), 언어와 언어학 이론, 한국문화사. ()\n* 김진우 (2007), 언어 - 이론과 그 응용, 탑출판사. ()\n* 김진호 (2004), 언어학의 이해, 역락. ()\n* 배주채 (2015), 언어학개론, 태학사. ()\n* 송완용 (1999), 언어학 기초이론, 신아사. ()\n* 이건수 (2000), 언어학 개론, 신아사. ()\n* 이석규 (2001), 텍스트 언어학의 이론과 실제, 박이정. ()\n* 이철수, 문무영, 박덕유 (2004), 언어와 언어학, 역락. ()\n", "\n", "* AI Study\n* \n\n\n\n\n\n \n분류:언어" ]
'''언어학'''(言語學, )은 인간의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기능과 본질을 과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법과 같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지식을 체계화, 규칙화하는 것에 그 연구 목적이 있다. 인지 및 사회적인 부분도 다루기 때문에 인문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지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언어 체계의 분석은 크게 문장의 구조와 규칙에 대한 통사론, 의미론, 단어의 구조에 대한 형태론, 음성학, 음운론, 화용론으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진화 등 생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생물언어학, 심리학적 요소를 고려한 심리언어학 등의 분과도 존재한다. 언어학은 이론적인 연구와 실용적인 연구를 모두 포괄한다. 이론언어학은 언어철학 등 인간 언어의 이론적인 부분을 다룬다. 응용언어학은 언어교육이나 문해와 같이 보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연구한다. 언어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연구할지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을 기준으로 어떤 한 순간의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으로 구분할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언어의 개수에 따라 다중언어와 단일언어로 그 대상을 구분할 수도 있고, 아이와 어른으로 구분할 수도 있으며, 학습한 것과 습득한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언어학의 연구 분야를 나누는 가장 큰 구분 중의 하나는 어떤 한 순간의 언어 상태를 연구하는 공시언어학과 시간에 따른 언어의 변화를 연구하는 통시언어학을 구분하는 것이다. * 공시언어학 * 통시언어학 다음은 언어학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분야이다. 이러한 구분은 언어가 낮은 단계의 소리에서 높은 단계의 뜻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한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어떠한 대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 음성학은 음성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학문 * 음운론은 화자가 말할 때 심리적으로 구분하는 소리(음운)에 대한 학문 * 문자론은 문자에 대한 학문 * 형태론은 단어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 통사론은 문장의 내부 구조에 대한 학문 * 의미론은 단어의 의미와 단어의 조합에 따른 의미 변화에 대한 학문 * 화용론은 대화에서 화자의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학문 * 텍스트언어학 또는 담화론은 가장 큰 언어단위인 텍스트 또는 담화에 대한 학문 위에서 형태론과 통사론을 문법론으로 묶기도 한다. 다음 분야들은 그 연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분야들로 전통언어학의 분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휘론은 단어들의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에 해당하고 어원론은 언어의 시간적인 변화, 방언학은 언어의 공간적인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 어휘론 * 어원론 (어원학) * 방언학 어떠한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분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분은 위에 제시된 대상들을 어떠한 입장에서 또는 어떠한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하는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음운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역사음운론, 전산적인 차원에서 의미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전산의미론, 이론적인 관점에서 통사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이론통사론 등으로 불린다. 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등의 방법론을 이용한 접근법들도 존재하며 이들은 순수한 언어학이 아니라 학제간 연구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로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해 응용언어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 비교언어학 (또는 역사언어학, 역사비교언어학) * 언어유형학 (언어유형론, 또는 짧게 유형론) * 전산언어학 *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 * 법언어학 또한 언어의 어떤 측면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이라는 학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분야도 존재한다. 언어학의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연구를 하는 메타언어학과 언어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언어학사가 있다. * 메타언어학 * 언어학사 이외에도 언어학의 하위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고 문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도 하는 문체론과 수사학, 철학의 한 분야로 인식되는 기호학 등이 있다. * 문체론 * 수사학 * 기호학 === 응용 분야 === 언어와 관련된 실질적인 분야를 다루는 응용언어학에는 언어 관련 교재 개발, 교수법, 번역과 통역, 사전 편찬, 언어치료, 언어정책, 전산처리 등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 담화분석 * 말뭉치언어학 (또는 코퍼스언어학) * 맞춤법, 정서법 * 대조언어학 * 번역학 * 사전학 (사전편찬학) * 언어교육학 * 언어정책 * 자연언어처리 :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 *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 === 인접 분야와 학제적 연구 === 언어학은 연구 주제에서 문학, 철학, 인류학, 심리학, 인지과학 등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느 특정 학문 분야의 하위 분과로 분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분야들은 흔히 학제적연구라고 불린다. 이들은 언어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들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으며 일부 분야는 언어에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자들에 의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 기호학 * 사회언어학 * 언어 되살리기 * 수리언어학 * 신경언어학 * 심리언어학 * 언어병리학 - 언어장애, 언어치료 * 언어습득 * 응용언어학 * 인류언어학 (참조 언어인류학) * 인지언어학 * 자연언어처리 : 음성처리, 음성인식, 음성합성, 화자인식, 기계번역 * 전산언어학 * 통계언어학 (또는 계량언어학) * 언어지리학 * 언어철학 대한민국에서는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대학교, 충남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과 같이 주요 언어학에 대한 커리큘럼을 가진 언어학과들은 전공 학위에서 문학사로 분류하고 있다. * 비교 재구 * 언어학자 목록 * 김방한 (2001), 언어학의 이해, 민음사. () * 김선미 (2003), 언어와 언어학 이론, 한국문화사. () * 김진우 (2007), 언어 - 이론과 그 응용, 탑출판사. () * 김진호 (2004), 언어학의 이해, 역락. () * 배주채 (2015), 언어학개론, 태학사. () * 송완용 (1999), 언어학 기초이론, 신아사. () * 이건수 (2000), 언어학 개론, 신아사. () * 이석규 (2001), 텍스트 언어학의 이론과 실제, 박이정. () * 이철수, 문무영, 박덕유 (2004), 언어와 언어학, 역락. () * AI Study * 분류:언어
한국정보올림피아드
[ "Introduction", "역사", "경시 부문", "공모 부문", "논란", "역대 수상자<ref>{{웹 인용|url=https://www.digitalculture.or.kr/koi/WinnerList.do|제목=명예의 전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18-12-0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1024192740/http://www.digitalculture.or.kr/koi/WinnerList.do|보존날짜=2017-10-24|url-status=dead}}</ref>",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주해", "각주" ]
[ "\n\n'''한국정보올림피아드'''(, '''KOI''')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한민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이다. 알고리즘 설계 능력을 평가하는 경시 부문과 학생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공모 부문으로 나뉜다. 부문별 우승자는 각각 국제정보올림피아드와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14개 교육청에서 주관하며, 한국정보과학회에서 후원한다.\n", "\n===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n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했다. 국가적으로 정보산업을 육성하자는 의도였다. 대통령 산하에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출범하여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는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4월 22일,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지금과 같이 전국에서 선발된 초·중·고 학생들이 300명이 참가하여, 3시간 동안 문제를 풀었다. 개회식은 오전 9시에 열렸고 실제 대회는 9시 20분에 시작되었다. 참가 대상이 국민학생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교사부가 있었다. 공모부문도 1회부터 있었는데, 참가 대상에 제한이 없어서 단체도 참가할 수 있었다. 사용기종은 8비트 컴퓨터, 사용언어는 베이직과 어셈블리어였다. 역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같은 날 개최되었다.\n\n==== 전두환 방문으로 강제 정전 ====\n이 첫 대회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전 10시 20분에 체육관 전체가 정전되어 참가자와 관계자를 비롯해 모든 컴퓨터가 꺼진 것이다. 항의가 쏟아지자 대회 마감 시각이 12시 20분에서 2시간 연장되어 14시 20분으로 미루어졌다.\n\n정전 원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었다. 전두환이 예정에 없이 대회장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자 대통령 경호실이 경비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회장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응시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처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일개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갈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정부의 정보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경진대회 입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도 함께 먹었다.\n\n==== 초등학생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다 ====\n정전만큼이나 놀라운 일은, 컴퓨터를 고작 10개월밖에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 하형진(대구 계성국민학교 6학년)이 기라성 같은 중, 고등학생들을 다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하형진은 여러 차례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게임회사 KOG에서 프로그래머로 재직 중이다.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13회까지 열린 후 1996년부터 현재와 같이 정보올림피아드로 이름을 바꿔 개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n", "경시 부문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부문이다. 지역 예선 필기를 통과하면 전국 본선에 진출한다. 2016년 이전에는 시 단위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또 시 도별 지역 본선도 통과해야 했다. 경시부문 우수자(통상 금상 이상)에게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n\n=== 지역 예선 ===\n예선은 필기 시험으로 치른다. 수학적 규칙을 찾는 능력과 작성된 코드를 파악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n\n=== 지역 본선 ===\n컴퓨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기로 치른다. 2016년에 예선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n\n=== 전국 본선 ===\n실기로 치른다. 문제는 대체로 네 개가 출제되고, 시험시간은 3시간 가량이다. 구체적인 시상 규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n\n\n\n구분\n\n시상규모\n\n계\n\n시상내용\n\n\n\n초등학생부\n\n중학생부\n\n고등학생부\n\n\n\n계\n\n200\n\n200\n\n200\n\n총 600명\n\n\n\n\n\n대상(국무총리상)\n\n -\n\n -\n\n1\n\n1\n\n상장, 메달\n\n\n\n대 상(장관상)\n\n1\n\n1\n\n -\n\n2\n\n상장, 메달\n\n\n\n금상 (장관상)\n\n3\n\n3\n\n4\n\n10\n\n상장, 메달\n\n\n\n은상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n\n45\n\n45\n\n45\n\n135\n\n상장, 메달\n\n\n\n동상 (전문기관장상)\n\n50\n\n50\n\n50\n\n150\n\n상장, 메달\n\n\n\n장려상 (전문기관장상)\n\n101\n\n101\n\n100\n\n302\n\n상장\n\n\n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장려상은 0점자와 미참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시상된다. 항상 위 표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매년 세부 시행계획에서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다.\n", "공모 부분은 학생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도별 추천작품이 본선에 올라간다. 지역 예선 대회 개최 여부는 시·도마다 다르다. 공모부문 우수 시상자에게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의 컴퓨터 공학 부문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다음은 그 시상 규모와 내용이다.\n\n\n\n구분\n\n시상인원\n\n시상내용\n\n\n\n초등학생부\n\n중학생부\n\n고등학생부\n\n\n\n계\n\n18\n\n18\n\n18\n\n총 54명\n\n\n\n대상\n\n -\n\n -\n\n국무총리상(1)\n\n상장, 메달\n\n\n\n대상\n\n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1)\n\n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1)\n\n\n\n\n\n\n\n금상\n\n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n\n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n\n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n\n〃\n\n\n\n은상\n\n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n\n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n\n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n\n〃\n\n\n\n동상\n\n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n\n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n\n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n\n〃\n\n\n경시부문과 마찬가지로,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회의 심사에 따라 수상인원은 변경될 수 있다.\n", "\n=== 메모리 제한 ===\n2014년에는 이전과 달리 배열 크기가 제한되었으며 각 교육청은 이를 학생들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지역 본선(대구시정보올림피아드)이 치러질 당시 대구시교육청 산하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수험생에게 이를 안내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잘못을 인정하고 재채점을 진행하였다. 이 채점에서 5명이 구제되면서 대구시에서 전국 본선에 진출하는 고등부 수험생은 기존 7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났다.\n\n=== 표준 입출력 ===\n2015년에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문제풀이 형식을 파일 입출력에서 표준 입출력으로 변경하였다. 몇몇 학생과 학부모는 시험 방식이 변경된 사실이 제대로 공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대회에 응시한 일부 학생은 파일 입출력을 사용한 코드를 작성하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응시자 주의사항과 감독관을 통하여 충분히 강조했을 뿐더러 기존 방식대로 푼 학생을 구제하면 문제를 제대로 읽고 풀이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면서, 구제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파일 입출력에 맞춘 코드를 작성한 학생들은 결국 0점 처리가 되었다.\n\n=== 지역 예선 문제 오류 ===\n2018년 4월에 개최된 지역대회에서는 총 일곱 문항이 '정답없음', '복수정답' 처리되었다. 보기로 제시된 코드에 오타나 정의되지 않은 행동(Undefined behavior)이 포함된 데다가 컴파일러가 비주얼 스튜디오임을 전제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등, 상당히 많은 문제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에 학생과 학부모가 거세게 반발하자,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과 한국정보과학회 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출제 오류로 피해를 본 전원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기존에 합격점을 받은 600명에 구제된 147명을 더해 도합 747명이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정보올림피아드 발전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그 해 6월 정보올림피아드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공청회를 주최하였다. 공청회에서 대책위는 영재교육 위주 대회에 공교육 취지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문제 난이도 등 기준이 명확히 세워지지 않은 것, 출제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뽑지 못한 것, 기존 영재교육 전문가와 새로 들어온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 전문가가 제대로 협업하지 못한 것을 출제 오류 사태의 원인으로 꼽았다.\n\n=== 채점 지연 ===\n2018년 7월 개최된 전국대회에서는 고등부 채점이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보올림피아드 본선에서는 답안을 서버에 제출하면 프로그램이 채점하여 즉시 결과를 돌려주는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도 채점 결과가 나오지 않아 참가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주관 측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은 국제정보올림피아드의 채점 지연 시 대응 규정을 준용하여 경시 시간을 30분 연장하였고, 대회가 종료된 뒤 채점 결과를 참가자들에게 따로 통보하였다. 이후 진흥원은 예비소집 때 실시한 채점 환경 점검과 대회를 마친 후 진행한 원인 분석에서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데이터가 대량으로 몰리는 경시 시간 동안에만 일어나는 문제로 판단된다고 해명했다. 채점위원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지연되었으므로 기존 채점 기준대로 채점하였다고 밝혔다.\n", "\n=== 경시 부문 ===\n\n\n\n연도\n\n학급\n\n상격\n\n지역\n\n소속 학교\n\n이름\n\n\n\n2012\n\n초등부\n\n대상\n\n경기\n\n철산초등학교\n\n서규호\n\n\n\n금상\n\n경기\n\n신영초등학교\n\n김현수\n\n\n\n서울\n\n경기초등학교\n\n신동원\n\n\n\n경기\n\n안양신기초등학교\n\n백윤기\n\n\n\n중등부\n\n대상\n\n대구\n\n대구동중학교\n\n김민수\n\n\n\n금상\n\n경기\n\n상동중학교\n\n김종범\n\n\n\n제주\n\n제주제일중학교\n\n고지훈\n\n\n\n서울\n\n신반포중학교\n\n이현민\n\n\n\n고등부\n\n대상\n\n서울\n\n서울과학고등학교\n\n박서홍\n\n\n\n금상\n\n서울\n\n세종과학고등학교\n\n김동현\n\n\n\n경기\n\n경기북과학고등학교\n\n배근우\n\n\n\n강원\n\n민족사관고등학교\n\n최현민\n\n\n\n2013\n\n초등부\n\n대상\n\n서울\n\n서울도곡초등학교\n\n김재우\n\n\n\n금상\n\n대구\n\n대구월배초등학교\n\n박정익\n\n\n\n전남\n\n순천부영초등학교\n\n김세빈\n\n\n\n인천\n\n인천새말초등학교\n\n김민성\n\n\n\n중등부\n\n대상\n\n부산\n\n동래중학교\n\n박수찬\n\n\n\n금상\n\n경기\n\n능동중학교\n\n백우현\n\n\n\n경기\n\n늘푸른중학교\n\n오제노\n\n\n\n경북\n\n포항제철중학교\n\n최원우\n\n\n\n고등부\n\n대상\n\n서울\n\n서울과학고등학교\n\n조승현\n\n\n\n금상\n\n경기\n\n경기과학고등학교\n\n윤지학\n\n\n\n김진형\n\n\n\n대구\n\n경원고등학교\n\n방성원\n\n\n\n경남\n\n김해율하고등학교\n\n서상우\n\n\n\n2014\n\n초등부\n\n대상\n\n경기\n\n벌말초등학교\n\n배서연\n\n\n\n금상\n\n충남\n\n천안용암초등학교\n\n김진우\n\n\n\n경기\n\n호암초등학교\n\n장래오\n\n\n\n충남\n\n도하초등학교\n\n김계성\n\n\n\n중등부\n\n대상\n\n경북\n\n영남삼육학교\n\n시제연\n\n\n\n금상\n\n광주\n\n광주동명중학교\n\n신승원\n\n\n\n경기\n\n심원중학교\n\n이건호\n\n\n\n서울\n\n강신중학교\n\n이재영\n\n\n\n고등부\n\n대상\n\n서울\n\n서울과학고등학교\n\n박상수\n\n\n\n금상\n\n경기\n\n경기과학고등학교\n\n이재범\n\n\n\n서울\n\n서울과학고등학교\n\n정현식\n\n\n\n부산\n\n동래고등학교\n\n박수찬\n\n\n\n경기\n\n경기과학고등학교\n\n김종범\n\n\n\n2015\n\n초등부\n\n대상\n\n인천\n\n삼목초등학교\n\n최서현\n\n\n\n금상\n\n서울\n\n신중초등학교\n\n최은수\n\n\n\n경기\n\n경기초등학교\n\n박준호\n\n\n\n경남\n\n신서초등학교\n\n양병선\n\n\n\n중등부\n\n대상\n\n경기\n\n부천중흥중학교\n\n박관영\n\n\n\n금상\n\n서울\n\n대왕중학교\n\n임유진\n\n\n\n경기\n\n철산중학교\n\n서규호\n\n\n\n경기\n\n가운중학교\n\n신민철\n\n\n\n고등부\n\n대상\n\n경기\n\n경기과학고등학교\n\n최민제\n\n\n\n금상\n\n서울\n\n서울과학고등학교\n\n김제형\n\n\n\n경기\n\n경기과학고등학교\n\n조민규\n\n\n\n김강욱\n\n\n\n대구\n\n대구과학고등학교\n\n시제연\n\n\n\n2016\n\n초등부\n\n대상\n\n미\n기\n\n재\n\n벌말초등학교(6)\n\n송준혁\n\n\n\n금상\n\n개운초등학교(6)\n\n황수영\n\n\n\n신정초등학교(6)\n\n조수연\n\n\n\n상현초등학교(6)\n\n이예린\n\n\n\n중등부\n\n대상\n\n연향중학교(2)\n\n김세빈\n\n\n\n금상\n\n문정중학교(2)\n\n조경원\n\n\n\n가운중학교(2)\n\n신민철\n\n\n\n제주중앙중학교(3)\n\n박찬호\n\n\n\n고등부\n\n대상\n\n경기과학고등학교(3)\n\n오선재\n\n\n\n금상\n\n대구과학고등학교(2)\n\n시제연\n\n\n\n경기과학고등학교(1)\n\n김현수\n\n\n\n수원고등학교(1)\n\n김건\n\n\n\n충북과학고등학교(2)\n\n조보령\n\n\n\n2017\n\n초등부\n\n대상\n\n미\n기\n\n재\n\n만수초등학교\n\n반딧불\n\n\n\n금상\n\n초당초등학교\n\n김건우\n\n\n\n벌말초등학교\n\n이동현\n\n\n\n불당초등학교\n\n전정현\n\n\n\n중등부\n\n대상\n\n문정중학교\n\n조경원\n\n\n\n금상\n\n잠신중학교\n\n이민준\n\n\n\n내정중학교\n\n이종영\n\n\n\n갈뫼중학교\n\n최정현\n\n\n\n고등부\n\n대상\n\n경기과학고등학교\n\n신승원\n\n\n\n금상\n\n서울과학고등학교\n\n구준서\n\n\n\n수원고등학교\n\n김건\n\n\n\n경기과학고등학교\n\n김세빈\n\n\n\n박민솔\n\n\n\n=== 공모 부문 ===\n\n\n\n연도\n\n학급\n\n상격\n\n지역\n\n소속 학교\n\n이름\n\n작품명\n\n\n\n2012\n\n초등부\n\n대상\n\n서울\n\n서울원명초등학교\n\n박락영\n\n재시작 매니저\n\n\n\n금상\n\n서울\n\n광운초등학교\n\n한재혁\n\nPizza's CEO\n\n\n\n중등부\n\n대상\n\n광주\n\n광주서석중학교\n\n한윤도\n\n스크립트매크로\n\n\n\n금상\n\n인천\n\n청량중학교\n\n류지석\n\n선호투표제를 이용한 전자투표 프로그램\n\n\n\n고등부\n\n대상\n\n경기\n\n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n\n한바환\n\n코드 매니악스\n\n\n\n금상\n\n경기\n\n서해고등학교\n\n김지수\n\n엘피지 프로젝트\n\n\n\n2013\n\n초등부\n\n대상\n\n충남\n\n천안불당초등학교\n\n이준모\n\n다각형 나라 여행\n\n\n\n금상\n\n경기\n\n상현초등학교\n\n이선규\n\n오델로 알고리즘 대회\n\n\n\n중등부\n\n대상\n\n서울\n\n당산중학교\n\n함어진\n\n작은별\n\n\n\n금상\n\n서울\n\n방원중학교\n\n이어진\n\n두뇌개발 트레이닝\n\n\n\n고등부\n\n대상\n\n대구\n\n대구화원고등학교\n\n정주영\n\n불후의 플랜테이션\n\n\n\n2014\n\n초등부\n\n대상\n\n서울\n\n서울을지초등학교\n\n이든솔\n\nEasy Program Maker\n\n\n\n금상\n\n서울\n\n서울상원초등학교\n\n강태원\n\nE/V 군관리시스템\n\n\n\n중등부\n\n대상\n\n경북\n\n김천중학교\n\n박원빈\n\n링을 던져라\n\n\n\n금상\n\n경북\n\n구룡포중학교\n\n김훈\n\n에스컨도\n\n\n\n고등부\n\n은상\n\n충북\n\n충북과학고등학교\n\n김준구, 박원호\n\n손끝, 내 마음의 메신저\n\n\n\n조창호\n\n말하듯이 쓰는 온라인 수식 편집기\n\n\n\n울산\n\n신정고등학교\n\n김지용\n\n깃박스\n\n\n\n동상\n\n서울\n\n관악고등학교\n\n함어진\n\n타임키드\n\n\n\n경기\n\n경기과학고등학교\n\n윤지용\n\nRFLP 디자이너\n\n\n\n2015\n\n초등부\n\n대상\n\n대전\n\n삼천초등학교\n\n전종현\n\n숫자맞추기\n\n\n\n금상\n\n대전\n\n송림초등학교\n\n권도헌\n\n자동차의 목적지로 가는 길 검색기\n\n\n\n중등부\n\n대상\n\n대전\n\n두리중학교\n\n송석호\n\n빛의 퍼즐\n\n\n\n금상\n\n대전\n\n대덕중학교\n\n박진우\n\n듀얼테어\n\n\n\n고등부\n\n대상\n\n대전\n\n대덕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등학교\n\n박정환, 정원태\n\n플랙스 스크립트\n\n\n\n금상\n\n경기\n\n경기과학고등학교\n\n양찬솔\n\n비도비 스매시\n\n\n\n2016\n\n초등부\n\n대상\n\n미\n기\n\n재\n\n글꽃초등학교(6)\n\n김준영\n\n미\n기\n\n재\n\n\n\n금상\n\n영도초등학교(6)\n\n전효승\n\n\n\n중등부\n\n대상\n\n노은중학교(1)\n\n권도헌\n\n\n\n금상\n\n매봉중학교(3)\n\n김지섭\n\n\n\n고등부\n\n대상\n\n유성고등학교(1)\n\n김동민\n\n\n\n금상\n\n백양고등학교(2)\n\n김진관\n\n\n\nCairo American College(9)\n\n이희준\n\n\n\n2017\n\n초등부\n\n대상\n\n미\n기\n\n재\n\n경복초등학교\n\n이지성\n\n미\n기\n\n재\n\n\n\n금상\n\n구룡초등학교\n\n서범준\n\n\n\n중등부\n\n대상\n\n동도중학교\n\n염현지,\n염장운\n\n\n\n금상\n\n포항제철중학교\n\n조운경\n\n\n\n고등부\n\n대상\n\n양영디지털고등학교\n\n안지홍\n\n\n\n금상\n\n경남과학고등학교\n\n박지안, 이자윤, 조수진\n\n\n\n동안고등학교, 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n\n이희준, 함종헌\n\n\n", "*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IOI)\n*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n", "* 한국정보올림피아드 공식 웹사이트\n* 한국정보올림피아드 공식 웹사이트 (구)\n\n", "\n", "\n\n분류:대한민국의 문화\n분류:대한민국의 과학경시대회" ]
'''한국정보올림피아드'''(, '''KOI''')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청소년이 참가하는 대한민국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이다. 알고리즘 설계 능력을 평가하는 경시 부문과 학생이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창의성을 평가하는 공모 부문으로 나뉜다. 부문별 우승자는 각각 국제정보올림피아드와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정보화진흥원과 14개 교육청에서 주관하며, 한국정보과학회에서 후원한다. === 전국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 === 1983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했다. 국가적으로 정보산업을 육성하자는 의도였다. 대통령 산하에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출범하여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는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4년 4월 22일, 제1회 '''전국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가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지금과 같이 전국에서 선발된 초·중·고 학생들이 300명이 참가하여, 3시간 동안 문제를 풀었다. 개회식은 오전 9시에 열렸고 실제 대회는 9시 20분에 시작되었다. 참가 대상이 국민학생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교사부가 있었다. 공모부문도 1회부터 있었는데, 참가 대상에 제한이 없어서 단체도 참가할 수 있었다. 사용기종은 8비트 컴퓨터, 사용언어는 베이직과 어셈블리어였다. 역시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같은 날 개최되었다. ==== 전두환 방문으로 강제 정전 ==== 이 첫 대회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오전 10시 20분에 체육관 전체가 정전되어 참가자와 관계자를 비롯해 모든 컴퓨터가 꺼진 것이다. 항의가 쏟아지자 대회 마감 시각이 12시 20분에서 2시간 연장되어 14시 20분으로 미루어졌다. 정전 원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이었다. 전두환이 예정에 없이 대회장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자 대통령 경호실이 경비 체계를 점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회장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응시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처사였지만, 한편으로는 일개 대회에 대통령이 직접 찾아갈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것에서 정부의 정보화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경진대회 입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서 점심도 함께 먹었다. ==== 초등학생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다 ==== 정전만큼이나 놀라운 일은, 컴퓨터를 고작 10개월밖에 배우지 않은 초등학생 하형진(대구 계성국민학교 6학년)이 기라성 같은 중, 고등학생들을 다 제치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하형진은 여러 차례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핵물리학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했고, 지금은 게임회사 KOG에서 프로그래머로 재직 중이다. 퍼스널컴퓨터 경진대회는 13회까지 열린 후 1996년부터 현재와 같이 정보올림피아드로 이름을 바꿔 개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시 부문은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부문이다. 지역 예선 필기를 통과하면 전국 본선에 진출한다. 2016년 이전에는 시 단위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또 시 도별 지역 본선도 통과해야 했다. 경시부문 우수자(통상 금상 이상)에게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 지역 예선 === 예선은 필기 시험으로 치른다. 수학적 규칙을 찾는 능력과 작성된 코드를 파악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 지역 본선 === 컴퓨터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기로 치른다. 2016년에 예선과 통합되면서 사라졌다. === 전국 본선 === 실기로 치른다. 문제는 대체로 네 개가 출제되고, 시험시간은 3시간 가량이다. 구체적인 시상 규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 시상규모 계 시상내용 초등학생부 중학생부 고등학생부 계 200 200 200 총 600명 대상(국무총리상) - - 1 1 상장, 메달 대 상(장관상) 1 1 - 2 상장, 메달 금상 (장관상) 3 3 4 10 상장, 메달 은상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45 45 45 135 상장, 메달 동상 (전문기관장상) 50 50 50 150 상장, 메달 장려상 (전문기관장상) 101 101 100 302 상장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장려상은 0점자와 미참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에게 시상된다. 항상 위 표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며, 매년 세부 시행계획에서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다. 공모 부분은 학생이 스스로 개발한 창의적인 소프트웨어를 평가하는 것으로, 시·도별 추천작품이 본선에 올라간다. 지역 예선 대회 개최 여부는 시·도마다 다르다. 공모부문 우수 시상자에게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의 컴퓨터 공학 부문에 참가할 자격이 부여된다. 다음은 그 시상 규모와 내용이다. 구분 시상인원 시상내용 초등학생부 중학생부 고등학생부 계 18 18 18 총 54명 대상 - - 국무총리상(1) 상장, 메달 대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1)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1) 금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1) 〃 은상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 한국정보화진흥원장상 (6) 〃 동상 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 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 한국정보과학회장상 (10) 〃 경시부문과 마찬가지로, 초·중·고등부 대상 수상자에 한하여 지도교사에게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이 수여된다. 심사위원회의 심사에 따라 수상인원은 변경될 수 있다. === 메모리 제한 === 2014년에는 이전과 달리 배열 크기가 제한되었으며 각 교육청은 이를 학생들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지역 본선(대구시정보올림피아드)이 치러질 당시 대구시교육청 산하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수험생에게 이를 안내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의 항의에 대구교육연구정보원은 잘못을 인정하고 재채점을 진행하였다. 이 채점에서 5명이 구제되면서 대구시에서 전국 본선에 진출하는 고등부 수험생은 기존 7명에서 12명으로 늘어났다. === 표준 입출력 === 2015년에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문제풀이 형식을 파일 입출력에서 표준 입출력으로 변경하였다. 몇몇 학생과 학부모는 시험 방식이 변경된 사실이 제대로 공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대회에 응시한 일부 학생은 파일 입출력을 사용한 코드를 작성하였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은 응시자 주의사항과 감독관을 통하여 충분히 강조했을 뿐더러 기존 방식대로 푼 학생을 구제하면 문제를 제대로 읽고 풀이한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면서, 구제 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파일 입출력에 맞춘 코드를 작성한 학생들은 결국 0점 처리가 되었다. === 지역 예선 문제 오류 === 2018년 4월에 개최된 지역대회에서는 총 일곱 문항이 '정답없음', '복수정답' 처리되었다. 보기로 제시된 코드에 오타나 정의되지 않은 행동(Undefined behavior)이 포함된 데다가 컴파일러가 비주얼 스튜디오임을 전제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는 등, 상당히 많은 문제에서 오류가 발견되었다. 이에 학생과 학부모가 거세게 반발하자, 한국정보화진흥원 원장과 한국정보과학회 회장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출제 오류로 피해를 본 전원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기존에 합격점을 받은 600명에 구제된 147명을 더해 도합 747명이 전국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정보올림피아드 발전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그 해 6월 정보올림피아드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공청회를 주최하였다. 공청회에서 대책위는 영재교육 위주 대회에 공교육 취지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문제 난이도 등 기준이 명확히 세워지지 않은 것, 출제위원회를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뽑지 못한 것, 기존 영재교육 전문가와 새로 들어온 초중등 소프트웨어 교육 전문가가 제대로 협업하지 못한 것을 출제 오류 사태의 원인으로 꼽았다. === 채점 지연 === 2018년 7월 개최된 전국대회에서는 고등부 채점이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보올림피아드 본선에서는 답안을 서버에 제출하면 프로그램이 채점하여 즉시 결과를 돌려주는데, 시간이 상당히 흘러도 채점 결과가 나오지 않아 참가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주관 측인 한국정보화진흥원은 국제정보올림피아드의 채점 지연 시 대응 규정을 준용하여 경시 시간을 30분 연장하였고, 대회가 종료된 뒤 채점 결과를 참가자들에게 따로 통보하였다. 이후 진흥원은 예비소집 때 실시한 채점 환경 점검과 대회를 마친 후 진행한 원인 분석에서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데이터가 대량으로 몰리는 경시 시간 동안에만 일어나는 문제로 판단된다고 해명했다. 채점위원회는 모두에게 동등하게 지연되었으므로 기존 채점 기준대로 채점하였다고 밝혔다. === 경시 부문 === 연도 학급 상격 지역 소속 학교 이름 2012 초등부 대상 경기 철산초등학교 서규호 금상 경기 신영초등학교 김현수 서울 경기초등학교 신동원 경기 안양신기초등학교 백윤기 중등부 대상 대구 대구동중학교 김민수 금상 경기 상동중학교 김종범 제주 제주제일중학교 고지훈 서울 신반포중학교 이현민 고등부 대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박서홍 금상 서울 세종과학고등학교 김동현 경기 경기북과학고등학교 배근우 강원 민족사관고등학교 최현민 2013 초등부 대상 서울 서울도곡초등학교 김재우 금상 대구 대구월배초등학교 박정익 전남 순천부영초등학교 김세빈 인천 인천새말초등학교 김민성 중등부 대상 부산 동래중학교 박수찬 금상 경기 능동중학교 백우현 경기 늘푸른중학교 오제노 경북 포항제철중학교 최원우 고등부 대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조승현 금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윤지학 김진형 대구 경원고등학교 방성원 경남 김해율하고등학교 서상우 2014 초등부 대상 경기 벌말초등학교 배서연 금상 충남 천안용암초등학교 김진우 경기 호암초등학교 장래오 충남 도하초등학교 김계성 중등부 대상 경북 영남삼육학교 시제연 금상 광주 광주동명중학교 신승원 경기 심원중학교 이건호 서울 강신중학교 이재영 고등부 대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박상수 금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이재범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정현식 부산 동래고등학교 박수찬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김종범 2015 초등부 대상 인천 삼목초등학교 최서현 금상 서울 신중초등학교 최은수 경기 경기초등학교 박준호 경남 신서초등학교 양병선 중등부 대상 경기 부천중흥중학교 박관영 금상 서울 대왕중학교 임유진 경기 철산중학교 서규호 경기 가운중학교 신민철 고등부 대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최민제 금상 서울 서울과학고등학교 김제형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조민규 김강욱 대구 대구과학고등학교 시제연 2016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벌말초등학교(6) 송준혁 금상 개운초등학교(6) 황수영 신정초등학교(6) 조수연 상현초등학교(6) 이예린 중등부 대상 연향중학교(2) 김세빈 금상 문정중학교(2) 조경원 가운중학교(2) 신민철 제주중앙중학교(3) 박찬호 고등부 대상 경기과학고등학교(3) 오선재 금상 대구과학고등학교(2) 시제연 경기과학고등학교(1) 김현수 수원고등학교(1) 김건 충북과학고등학교(2) 조보령 2017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만수초등학교 반딧불 금상 초당초등학교 김건우 벌말초등학교 이동현 불당초등학교 전정현 중등부 대상 문정중학교 조경원 금상 잠신중학교 이민준 내정중학교 이종영 갈뫼중학교 최정현 고등부 대상 경기과학고등학교 신승원 금상 서울과학고등학교 구준서 수원고등학교 김건 경기과학고등학교 김세빈 박민솔 === 공모 부문 === 연도 학급 상격 지역 소속 학교 이름 작품명 2012 초등부 대상 서울 서울원명초등학교 박락영 재시작 매니저 금상 서울 광운초등학교 한재혁 Pizza's CEO 중등부 대상 광주 광주서석중학교 한윤도 스크립트매크로 금상 인천 청량중학교 류지석 선호투표제를 이용한 전자투표 프로그램 고등부 대상 경기 한국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한바환 코드 매니악스 금상 경기 서해고등학교 김지수 엘피지 프로젝트 2013 초등부 대상 충남 천안불당초등학교 이준모 다각형 나라 여행 금상 경기 상현초등학교 이선규 오델로 알고리즘 대회 중등부 대상 서울 당산중학교 함어진 작은별 금상 서울 방원중학교 이어진 두뇌개발 트레이닝 고등부 대상 대구 대구화원고등학교 정주영 불후의 플랜테이션 2014 초등부 대상 서울 서울을지초등학교 이든솔 Easy Program Maker 금상 서울 서울상원초등학교 강태원 E/V 군관리시스템 중등부 대상 경북 김천중학교 박원빈 링을 던져라 금상 경북 구룡포중학교 김훈 에스컨도 고등부 은상 충북 충북과학고등학교 김준구, 박원호 손끝, 내 마음의 메신저 조창호 말하듯이 쓰는 온라인 수식 편집기 울산 신정고등학교 김지용 깃박스 동상 서울 관악고등학교 함어진 타임키드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윤지용 RFLP 디자이너 2015 초등부 대상 대전 삼천초등학교 전종현 숫자맞추기 금상 대전 송림초등학교 권도헌 자동차의 목적지로 가는 길 검색기 중등부 대상 대전 두리중학교 송석호 빛의 퍼즐 금상 대전 대덕중학교 박진우 듀얼테어 고등부 대상 대전 대덕소프트웨어마이스터고등학교 박정환, 정원태 플랙스 스크립트 금상 경기 경기과학고등학교 양찬솔 비도비 스매시 2016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글꽃초등학교(6) 김준영 미 기 재 금상 영도초등학교(6) 전효승 중등부 대상 노은중학교(1) 권도헌 금상 매봉중학교(3) 김지섭 고등부 대상 유성고등학교(1) 김동민 금상 백양고등학교(2) 김진관 Cairo American College(9) 이희준 2017 초등부 대상 미 기 재 경복초등학교 이지성 미 기 재 금상 구룡초등학교 서범준 중등부 대상 동도중학교 염현지, 염장운 금상 포항제철중학교 조운경 고등부 대상 양영디지털고등학교 안지홍 금상 경남과학고등학교 박지안, 이자윤, 조수진 동안고등학교, 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이희준, 함종헌 *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IOI) *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 * 한국정보올림피아드 공식 웹사이트 * 한국정보올림피아드 공식 웹사이트 (구) 분류:대한민국의 문화 분류:대한민국의 과학경시대회
베이직
[ "Introduction", "기원", "문법", "예제", "외부 링크" ]
[ "\n\n\n코모도어 베이직 v2.0 시작 화면\n\n'''초심자용 다목적 기호명령부호'''(初心者用 多目的 記號命令符號,) 또는 단순히 '''베이직'''('''BASIC''', )은 사용하기 쉽도록 설계된 범용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다. 1964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존 케메니(John Kemeny)와 토머스 커츠(Thomas Kurtz)가 개발했다. 그들은 비과학 분야의 학생들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거의 모든 컴퓨터들은 과학자들과 수학자들만이 배우는 경향이 있는 맞춤 소프트웨어를 쓰는 것을 필요로 했다.\n\n1970년대 중반에 마이크로컴퓨터가 등장하면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Microsoft BASIC)을 비롯한 여러 베이직 방언이 개발되었다. 이 기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주 메모리(흔히 4KB)로 인해 다양한 타이니 베이직 방언도 만들어졌다. 베이직은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고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정용 컴퓨터 시스템을 위한 사실상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되었다. 이러한 PC에는 거의 항상 기본 인터프리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종종 펌웨어나 때로는 ROM 카트리지에 설치되어 있었다.\n\n베이직은 1990년대에 더 강력한 마이크로컴퓨터가 시장에 나왔고 파스칼과 C와 같은 고급 기능을 가진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1991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시각적 폼 빌더를 결합한 업데이트된 버전의 베이직인 비주얼 베이직을 출시했다.\n\n교육용으로 개발되어 언어의 문법이 쉬우며, 다트머스의 최초 제품 이래로 인터프리터 방식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컴파일러 방식도 많다. 현재는 다양한 종류의 베이직이 존재하며 서로 문법도 많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소스 코드는 호환되지 않는다.\n", "== 소프트웨어 목록 ==\n\n\n\n\n\n 제작사 \n\n 제품명 \n\n 해석 방식 \n\n 플랫폼 \n\n 설명\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 \n\n 인터프리터 \n\n \n\n \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코모도어 베이직(Commodore BASIC) \n\n 인터프리터 \n\n \n\n \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애플소프트 베이직 \n\n 인터프리터 \n\n \n\n\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MSX 베이직(MSX BASIC)\n\n 인터프리터 \n\n \n\n\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GW-BASIC \n\n 인터프리터 \n\n DOS \n\n MS-DOS의 번들\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퀵베이직(Quick BASIC) \n\n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n\n dos \n\n 컴파일러 방식 제공\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큐베이직(QBasic)\n\n 인터프리터 \n\n DOS \n\nMS-DOS에 번들\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비주얼 베이직(Visual BASIC) \n\n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n\n Win3.1 Win98, WinXP \n\n 자체버전 6.0까지 지원하고 중단됨 닷넷으로 출시됨\n\n\n\n 마이크로소프트 \n\n 비주얼 베이직 닷넷(Visual Basic .NET) \n\n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n\n WinXP, Win Vista, Win7 \n\n비주얼스튜디오닷넷에 포함되어 출시됨\n\n\n\n 볼랜드 \n\n 터보 베이직(Turbo-BASIC) \n\n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n\n DOS \n\n\n\n\n\n 리얼 소프트웨어 \n\n 리얼 베이직(REALBasic) \n\n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n\n WinXP, MacOS \n\n\n\n\n\n 트루베이직 \n\n 트루 베이직 \n\n \n\n \n\n 최초 베이직 개발자인 존 케머니와 토마스 커츠 교수 개발\n\n\n\n \n\n 다크 베이직(DarkBASIC) \n\n \n\n \n\n \n\n\n\n \n\n 퓨처 베이직(FutureBASIC) \n\n \n\n \n\n\n\n\n\n \n\n 프리 베이직(FreeBASIC) \n\n \n\n \n\n\n\n\n\n 삼선에스이 \n\n 한글 베이직 \n\n 인터프리터 \n\n DOS \n\n 1991년 안철우 씨 개발\n\n\n\n \n\n qb64 \n\n \n\n Windows7, Linux, Mac OSX\n\nQB4.5와 100%호환\n\n\n", "=== 일반적인 베이직 키워드 ===\n; 데이터 조작:\n* LET\n* DATA\n\n; 프로그램 제어 흐름:\n* IF ... THEN ... {ELSE}\n* FOR ... TO ... {STEP} ... NEXT\n* WHILE ... WEND 및 REPEAT ... UNTIL\n* DO ... LOOP {WHILE} 또는 {UNTIL}\n* GOTO\n* GOSUB\n* ON ... GOTO/GOSUB\n* DEF FN\n\n; 입출력:\n* LIST\n* PRINT\n* INPUT\n* TAB 또는 AT\n\n; 함수 목록:\n* ABS\n* ATN\n* COS\n* EXP\n* INT\n* LOG\n* RND\n* SIN\n* SQR\n* TAN\n\n; 기타:\n* REM\n* USR\n* TRON\n* TROFF\n* ASM\n", "=== Hello World ===\n아래 예는 모든 ANSI/ISO 호환 베이직과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마이크로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베이직에서 동작한다.\n 10 PRINT \"Hello, world!\"\n 20 END\n이러한 기종에 설치된 베이직은 줄번호가 생략된 즉각 모드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음 예를 실행할 때에는 RUN 명령어가 필요없다.\n PRINT \"Hello, world!\"\n ? \"Hello, world!\"\n이후의 베이직은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며 코드에서 줄번호가 사라졌다. 다음 예는 현대적인 베이직의 거의 대부분에서 RUN 명령으로 실행할 수 있다.\n PRINT \"Hello, world!\"\n END\n많은 베이직에서 End 선언문은 빼도 된다.\n\n=== 사용자 입력 개수 만큼 별 출력 ===\n\n\n\n\n\n\n==== 구조화되지 않은 예전의 문법 ====\n\n 10 INPUT \"이름을 입력하세요\"; A$\n 20 PRINT \"안녕하세요 \"; A$\n 30 INPUT \"별이 몇 개 필요하세요?\"; S\n 40 FOR I = 1 TO S\n 50 S$ = S$ + \"*\"\n 55 NEXT I\n 60 PRINT S$\n 70 INPUT \"별이 더 필요하세요?\"; Q$\n 80 IF LEN(Q$) = 0 GOTO 70\n 90 L$ = LEFT$(Q$, 1)\n 100 IF (L$ = \"Y\") OR (L$ = \"y\") THEN GOTO 30\n 110 PRINT \"안녕히 가세요\";\n 120 FOR I = 1 TO 200\n 130 PRINT A$; \" \";\n 140 NEXT I\n 150 PRINT\n\n\n\n\n==== 구조화된 형태의 문법 ====\n\n INPUT \"이름을 입력하세요.\"; UserName$\n PRINT \"안녕하세요.\"; UserName$\n DO\n INPUT \"별이 몇 개 필요하세요? \"; NumStars\n Stars$ = \"\"\n 'Stars$ = REPEAT$(\"*\", NumStars)\t' \"\"\n LOOP WHILE UCASE$(LEFT$(Answer$, 1)) = \"Y\"\n PRINT \"안녕히 가세요.\";\n FOR A = 1 TO 200\n PRINT UserName$; \" \";\n NEXT A\n PRINT\n\n\n\n\n==== Visual Basic .NET ====\n\n\nClass stars\n Sub Main()\n Dim UserName, Answer, stars As String ' UserName$, Answer$, stars$ may be used as well.\n Dim NumStars, I As Integer\n Console.Write(\"What is your name: \")\n UserName = Console.ReadLine()\n Console.WriteLine(\"Hello {0}\", UserName)\n Do\n Console.Write(\"How many stars do you want: \")\n NumStars = CInt(Console.ReadLine())\n stars = New String(\"*\", NumStars)\n Console.WriteLine(stars)\n Do\n Console.Write(\"Do you want more stars? \")\n Answer = Console.ReadLine()\n Loop Until Answer \"\"\n Answer = Answer.Substring(0, 1)\n Loop While Answer.ToUpper() = \"Y\"\n Console.WriteLine(\"Goodbye {0}\", UserName)\n End Sub\nEnd Class\n\n", "\n* \n\n\n\n\n\n \n분류: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n분류:다트머스 대학교\n분류:미국의 발명품\n분류:1964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n분류:ISO 표준 프로그래밍 언어" ]
코모도어 베이직 v2.0 시작 화면 '''초심자용 다목적 기호명령부호'''(初心者用 多目的 記號命令符號,) 또는 단순히 '''베이직'''('''BASIC''', )은 사용하기 쉽도록 설계된 범용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다. 1964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존 케메니(John Kemeny)와 토머스 커츠(Thomas Kurtz)가 개발했다. 그들은 비과학 분야의 학생들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거의 모든 컴퓨터들은 과학자들과 수학자들만이 배우는 경향이 있는 맞춤 소프트웨어를 쓰는 것을 필요로 했다. 1970년대 중반에 마이크로컴퓨터가 등장하면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Microsoft BASIC)을 비롯한 여러 베이직 방언이 개발되었다. 이 기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주 메모리(흔히 4KB)로 인해 다양한 타이니 베이직 방언도 만들어졌다. 베이직은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었고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정용 컴퓨터 시스템을 위한 사실상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되었다. 이러한 PC에는 거의 항상 기본 인터프리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종종 펌웨어나 때로는 ROM 카트리지에 설치되어 있었다. 베이직은 1990년대에 더 강력한 마이크로컴퓨터가 시장에 나왔고 파스칼과 C와 같은 고급 기능을 가진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1991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시각적 폼 빌더를 결합한 업데이트된 버전의 베이직인 비주얼 베이직을 출시했다. 교육용으로 개발되어 언어의 문법이 쉬우며, 다트머스의 최초 제품 이래로 인터프리터 방식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컴파일러 방식도 많다. 현재는 다양한 종류의 베이직이 존재하며 서로 문법도 많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소스 코드는 호환되지 않는다. == 소프트웨어 목록 == 제작사 제품명 해석 방식 플랫폼 설명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코모도어 베이직(Commodore BASIC)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소프트 베이직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MSX 베이직(MSX BASIC)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GW-BASIC 인터프리터 DOS MS-DOS의 번들 마이크로소프트 퀵베이직(Quick BASIC)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dos 컴파일러 방식 제공 마이크로소프트 큐베이직(QBasic) 인터프리터 DOS MS-DOS에 번들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isual BASIC)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Win3.1 Win98, WinXP 자체버전 6.0까지 지원하고 중단됨 닷넷으로 출시됨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 닷넷(Visual Basic .NET)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WinXP, Win Vista, Win7 비주얼스튜디오닷넷에 포함되어 출시됨 볼랜드 터보 베이직(Turbo-BASIC)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DOS 리얼 소프트웨어 리얼 베이직(REALBasic)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WinXP, MacOS 트루베이직 트루 베이직 최초 베이직 개발자인 존 케머니와 토마스 커츠 교수 개발 다크 베이직(DarkBASIC) 퓨처 베이직(FutureBASIC) 프리 베이직(FreeBASIC) 삼선에스이 한글 베이직 인터프리터 DOS 1991년 안철우 씨 개발 qb64 Windows7, Linux, Mac OSX QB4.5와 100%호환 === 일반적인 베이직 키워드 === ; 데이터 조작: * LET * DATA ; 프로그램 제어 흐름: * IF ... THEN ... {ELSE} * FOR ... TO ... {STEP} ... NEXT * WHILE ... WEND 및 REPEAT ... UNTIL * DO ... LOOP {WHILE} 또는 {UNTIL} * GOTO * GOSUB * ON ... GOTO/GOSUB * DEF FN ; 입출력: * LIST * PRINT * INPUT * TAB 또는 AT ; 함수 목록: * ABS * ATN * COS * EXP * INT * LOG * RND * SIN * SQR * TAN ; 기타: * REM * USR * TRON * TROFF * ASM === Hello World === 아래 예는 모든 ANSI/ISO 호환 베이직과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마이크로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베이직에서 동작한다. 10 PRINT "Hello, world!" 20 END 이러한 기종에 설치된 베이직은 줄번호가 생략된 즉각 모드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음 예를 실행할 때에는 RUN 명령어가 필요없다. PRINT "Hello, world!" ? "Hello, world!" 이후의 베이직은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며 코드에서 줄번호가 사라졌다. 다음 예는 현대적인 베이직의 거의 대부분에서 RUN 명령으로 실행할 수 있다. PRINT "Hello, world!" END 많은 베이직에서 End 선언문은 빼도 된다. === 사용자 입력 개수 만큼 별 출력 === ==== 구조화되지 않은 예전의 문법 ==== 10 INPUT "이름을 입력하세요"; A$ 20 PRINT "안녕하세요 "; A$ 30 INPUT "별이 몇 개 필요하세요?"; S 40 FOR I = 1 TO S 50 S$ = S$ + "*" 55 NEXT I 60 PRINT S$ 70 INPUT "별이 더 필요하세요?"; Q$ 80 IF LEN(Q$) = 0 GOTO 70 90 L$ = LEFT$(Q$, 1) 100 IF (L$ = "Y") OR (L$ = "y") THEN GOTO 30 110 PRINT "안녕히 가세요"; 120 FOR I = 1 TO 200 130 PRINT A$; " "; 140 NEXT I 150 PRINT ==== 구조화된 형태의 문법 ==== INPUT "이름을 입력하세요."; UserName$ PRINT "안녕하세요."; UserName$ DO INPUT "별이 몇 개 필요하세요? "; NumStars Stars$ = "" 'Stars$ = REPEAT$("*", NumStars) ' "" LOOP WHILE UCASE$(LEFT$(Answer$, 1)) = "Y" PRINT "안녕히 가세요."; FOR A = 1 TO 200 PRINT UserName$; " "; NEXT A PRINT ==== Visual Basic .NET ==== Class stars Sub Main() Dim UserName, Answer, stars As String ' UserName$, Answer$, stars$ may be used as well. Dim NumStars, I As Integer Console.Write("What is your name: ") UserName = Console.ReadLine() Console.WriteLine("Hello {0}", UserName) Do Console.Write("How many stars do you want: ") NumStars = CInt(Console.ReadLine()) stars = New String("*", NumStars) Console.WriteLine(stars) Do Console.Write("Do you want more stars? ") Answer = Console.ReadLine() Loop Until Answer "" Answer = Answer.Substring(0, 1) Loop While Answer.ToUpper() = "Y" Console.WriteLine("Goodbye {0}", UserName) End Sub End Class * 분류: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분류:다트머스 대학교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1964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ISO 표준 프로그래밍 언어
인터프리터
[ "Introduction", "역사", "종류", "각주", "외부 링크" ]
[ "\n\n\n'''인터프리터'''(, )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소스 코드를 바로 실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환경을 말한다. 원시 코드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와 대비된다. 인터프리터는 다음의 과정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n# 소스 코드를 직접 실행한다.\n# 소스 코드를 효율적인 다른 중간 코드로 변환하고, 변환한 것을 바로 실행한다\n# 인터프리터 시스템의 일부인 컴파일러가 만든, 미리 컴파일된 저장 코드의 실행을 호출한다.\n\n인터프리터는 고급 언어로 작성된 원시코드 명령어들을 한번에 한 줄씩 읽어들여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고급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인터프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명령어들을 중간 형태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실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컴파일러는 고급 명령어들을 직접 기계어로 번역한다.\n\n컴파일된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인터프리터를 이용해 실행시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행된다. 그러나 인터프리터의 장점은 기계어 명령어들이 만들어지는 컴파일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컴파일 과정은 만약 원시 프로그램의 크기가 크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터프리터는 고급 프로그램을 즉시 실행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터프리터는 종종 프로그램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한번에 적은 양의 내용을 추가하고 그것을 빠르게 테스트 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터프리터를 이용하면 프로그래밍을 대화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n\n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는 둘 다 대부분의 고급언어에 적용이 가능하지만 BASIC 이나 LISP과 같은 일부 언어들은 개발 당시에는 특별히 인터프리터에 의해서만 실행되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포스트스크립트와 같은 페이지 기술 언어 들도 인터프리터를 사용한다. 모든 포스트스크립트 프린터는 포스트스크립트 명령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다.\n", "최초의 인터프리트 방식의 고급 언어는 리스프였다. 리스프는 1958년 스티브 러셀이 IBM 704 컴퓨터에 최초로 구현하였다. 러셀은 존 매카시의 논문을 읽고 리스프의 eval 함수가 기계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맥캐시를 놀라게 했다. 작업 중인 리스프 인터프리터가 그 결과 만들어졌으며 리스프 프로그램의 실행, 더 정확히 말해, \"리스프 식의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n", "=== 바이트코드 인터프리터 ===\n\n=== 스레드 코드 인터프리터 ===\n\n=== 추상 구문 트리 인터프리터 ===\n\n=== JIT 컴파일 ===\n\n=== 자체 해석기 ===\n\n", "\n", "* IBM Card Interpreters page at Columbia University\n* Theoretical Foundations For Practical 'Totally Functional Programming' (Chapter 7 especially) Doctoral dissertation tackling the problem of formalising what is an interpreter\n* Short animation explaining the key conceptual difference between interpreters and compilers\n\n\n\n\n\n분류:프로그래밍 언어 구현" ]
'''인터프리터'''(, )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소스 코드를 바로 실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환경을 말한다. 원시 코드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와 대비된다. 인터프리터는 다음의 과정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 소스 코드를 직접 실행한다. # 소스 코드를 효율적인 다른 중간 코드로 변환하고, 변환한 것을 바로 실행한다 # 인터프리터 시스템의 일부인 컴파일러가 만든, 미리 컴파일된 저장 코드의 실행을 호출한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언어로 작성된 원시코드 명령어들을 한번에 한 줄씩 읽어들여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고급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인터프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명령어들을 중간 형태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실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컴파일러는 고급 명령어들을 직접 기계어로 번역한다. 컴파일된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인터프리터를 이용해 실행시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행된다. 그러나 인터프리터의 장점은 기계어 명령어들이 만들어지는 컴파일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컴파일 과정은 만약 원시 프로그램의 크기가 크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터프리터는 고급 프로그램을 즉시 실행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터프리터는 종종 프로그램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한번에 적은 양의 내용을 추가하고 그것을 빠르게 테스트 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터프리터를 이용하면 프로그래밍을 대화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는 둘 다 대부분의 고급언어에 적용이 가능하지만 BASIC 이나 LISP과 같은 일부 언어들은 개발 당시에는 특별히 인터프리터에 의해서만 실행되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포스트스크립트와 같은 페이지 기술 언어 들도 인터프리터를 사용한다. 모든 포스트스크립트 프린터는 포스트스크립트 명령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다. 최초의 인터프리트 방식의 고급 언어는 리스프였다. 리스프는 1958년 스티브 러셀이 IBM 704 컴퓨터에 최초로 구현하였다. 러셀은 존 매카시의 논문을 읽고 리스프의 eval 함수가 기계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맥캐시를 놀라게 했다. 작업 중인 리스프 인터프리터가 그 결과 만들어졌으며 리스프 프로그램의 실행, 더 정확히 말해, "리스프 식의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 === 바이트코드 인터프리터 === === 스레드 코드 인터프리터 === === 추상 구문 트리 인터프리터 === === JIT 컴파일 === === 자체 해석기 === * IBM Card Interpreters page at Columbia University * Theoretical Foundations For Practical 'Totally Functional Programming' (Chapter 7 especially) Doctoral dissertation tackling the problem of formalising what is an interpreter * Short animation explaining the key conceptual difference between interpreters and compilers 분류:프로그래밍 언어 구현
라이프 게임
[ "Introduction", "설명", "패턴의 예", "라이프 게임의 변종들", "외부 링크" ]
[ "\n\n‘글라이더’ 패턴의 진행.\n'''라이프 게임'''() 또는 '''생명 게임'''은 영국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가 고안해낸 세포 자동자의 일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세포 자동자 가운데 하나이다.\n\n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 1970년 10월호 중 마틴 가드너의 칼럼 〈Mathematical Games(수학 게임)〉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단순한 규칙 몇가지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 게임은 컴퓨터 과학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프 게임이 범용 튜링 기계와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진 세포 자동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n", "이 ‘게임’은 사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게임의 진행을 결정하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약간 많이 다르다. 라이프 게임의 진행은 처음 입력된 초기값만으로 완전히 결정된다.\n\n라이프 게임은 무한히 많은 사각형(혹은 ‘세포’)으로 이루어진 격자 위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세포 주위에는 인접해 있는 여덟 개의 ‘이웃 세포’가 있으며, 또 각 세포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가지 상태 중 한가지 상태를 갖는다(‘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격자를 이루는 세포의 상태는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으로 변화한다. 즉, 현재 세대의 세포들 전체의 상태가 다음 세대의 세포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n\n각각의 세포가 다음 세대에서 갖는 상태는 현재 자신의 상태와 이웃하는 여덟 개의 세포들 중 몇 개가 살아있는 상태인지만을 따져서 결정된다. 존 호턴 콘웨이의 규칙들이다.\n\n* 죽은 세포의 이웃 중 정확히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살아난다(‘태어난다’).\n* 살아 있는 세포의 이웃 중에 두 개나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계속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이외에는 ‘외로워서’, 또는 ‘숨이 막혀서’ 죽어버린다.\n\n존 호턴 콘웨이는 규칙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 설정하였다.\n\n* 폭발적인 성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래의 라이프 게임의 변종 중 대부분은 이를 만족하지 않는다.)\n* 예측할 수 없고 혼돈스러운 패턴.\n* 규칙은 최대한 간단해야 한다.\n* 존 폰 노이만의 세포 자동자을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n", "\n라이프 게임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고정된 패턴(정물 靜物, still life), 일정한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진동자, oscillator — 정물은 주기가 한 세대인 진동자라고 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 패턴(우주선, spaceship) 등 여러 패턴이 존재한다. 아래에 간단한 예가 있다. 살아 있는 셀은 검은 색으로, 죽어 있는 셀은 흰색으로 표현했다.\n\n\n\n\n 파일:game of life block.png\n\n 파일:game of life boat.png\n\n 파일:game of life blinker.png\n\n 파일:game of life toad.png\n\n 파일:game of life glider.png\n\n 파일:game of life lwss.png\n\n\n\n block\n\n 배(boat)\n\n 깜빡이(blinker)\n\n 두꺼비(toad)\n\n 글라이더(glider)\n\n LWSS\n\n\n\n‘block’과 ‘boat’는 정물이고, ‘blinker’와 ‘toad’는 진동자, 그리고 ‘글라이더(glider)’와 ‘경량급 우주선(lightweight spaceship — LWSS)’은 우주선에 속한다.\n그리고 무한히 이을 수 있는 패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배(boat)는 무한정 이을 수 있다.\n\n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많은 세대가 필요한 패턴도 있는데, ‘methuselah(므두셀라)’라고 불린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펜토미노 퍼즐의 모양 중 R-펜토미노(R-Pentomino)는 세포는 5개이지만 1130세대가 지나서야 안정화된다. (이는 6개 미만 세포 패턴 중 가장 활동적인 패턴이다.) ‘다이하드(diehard)’는 130세대가 지나서야 사라진다. ‘도토리(acorn)’는 5206세대가 지나서야 13개의 글라이더(glider)와 수많은 진동자 또는 정물을 남기고 안정화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패턴 중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가장 많은 세대를 거친 패턴은 리드카(Lidka)로, 무려 29,055 세대가 지나야 안정화된다.\n\n\n\n\n 파일:game of life diehard.png\n\n 파일:game of life methuselah.png\n\n\n\n diehard\n\n acorn\n\n\n\n라이프 게임이 처음 소개된 〈Mathematical Games〉에서, 콘웨이는 세포 수가 무한히 많아지는 패턴을 찾은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n\n해커 빌 가스퍼(Bill Gosper)가 1970년 11월에 처음 그러한 패턴들을 찾아 상금을 탔다. 패턴들 가운데에는 ‘글라이더’나 ‘우주선’을 발사하는 ‘총’과 안정화한 패턴들을 꼬리에 남기며 전진하는 ‘기관차’, 그리고 양쪽을 다 행하는 ‘갈퀴’ 패턴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제곱 비례로 성장하는 패턴인 ‘사육사’ 패턴도 찾아냈는데, 이것은 ‘총’ 패턴을 꼬리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한다. 이 후로 글라이더를 이용한 논리 게이트, 가산기, 소수 발생기와 라이프 게임을 더 큰 스케일과 느린 속도로 모방하는 단위 세포 등 다양한 패턴들이 만들어졌다.\n\n맨 처음 발견된 ‘총’이 여전히 알려진 가장 작은 총이다:\n\ncenter\n가스퍼의 글라이더 건\n\n무한히 성장하는 더 단순한 패턴들이 그 후에도 발견되었다. 아래의 세 패턴은 모두 무한히 성장한다. 처음 것은 10개의 살아있는 세포만을 가지며 이보다 적은 세포를 가진 무한 성장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5x5의 정사각형 안에 포함되는 패턴이고, 세 번째는 두께가 1인 패턴이다.\n\n\n\n\n 파일:game of life infinite1.png     파일:game of life infinite2.png\n\n\n\n 파일:game of life infinite3.png\n\n\n\n여러 개의 글라이더가 합성되어 재미있는 결과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두 개의 글라이더를 적당한 방법으로 블록에 충돌시키면, 블록은 글라이더가 발사된 곳을 향해 한 칸 다가간다. 세 개의 글라이더를 다른 방법으로 충돌시키면 블록은 발사된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한 칸 다가간다. 이것은 ‘움직이는 블록 메모리’라고 불리며 카운터를 모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더를 이용해 AND, OR, NOT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개의 카운터와 연결된 유한 상태 오토마타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능 튜링 기계와 똑같은 계산능력을 가지며, 이는 라이프 게임이 무한한 메모리를 가진 어떤 컴퓨터와도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글라이더 건의 패턴을 이용하여 새로운 개체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며, 원본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만능 건축사’ 패턴은 튜링 머신과 동등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n", "\n라이프 게임을 시작으로,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을 가진 변종들이 존재한다. 원래의 라이프 게임은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며, 2개 또는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생존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사망한다. 이 규칙은 ‘23/3’으로 표시할 수 있다. 앞쪽 숫자들은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하며, 뒤쪽 숫자들은 세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6/6’은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세포가 새로 태어나고, 1개나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생존하며 나머지 경우 사망하는 규칙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라이프'''(HighLife) 규칙은 원래 규칙에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새로 태어난다는 규칙이 추가되며, 이는 ‘23/36’으로 표시된다. HighLife는 ‘복제자’ 패턴들로 유명하지만, 이 규칙의 대부분의 패턴들이 너무 복잡하거나 황폐한 패턴들을 생성한다.\n\n* Diamoeba 5678/35678 (혼돈스럽다) 다이아몬드 모양 패턴들. 종종 파국적으로 멸망함\n* Seeds /2 (폭발적) 불사조(몇 개의 남은 세포들로부터 폭발적으로 부활함), 간결한 패턴들\n* Serviettes/234 (폭발적) 불사조, 레이스 무늬 패턴들\n* Maze 12345/3 (폭발적) 미로같은 패턴\n* Mazectric 1234/3 (폭발적) Maze와 아주 비슷함. Maze보다 덜 막혀있음\n* 2x2 125/36 (혼돈스럽다) 2x2 블록 패턴이 출몰함\n* Replicator 1357/1357 (폭발적) 모든 패턴이 복제자 패턴이다. Replicator은 복제자 패턴이란 뜻이다\n* Amoeba 1358/357 (혼돈스럽다) 아메바형 패턴\n* Conway's game of life 23/3 (혼돈스럽다) ‘라이프 게임’\n* Highlife 23/36 (혼돈스럽다) ‘하이라이프’ (복제자 패턴이 등장한다)\n* Stains 235678/3678 (안정적) 잉크 방울이 마르는 것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n* Coagulations 235678/378 (폭발적) 혼돈스러운 패턴과 응고하는듯한 정착 패턴들\n* Pseudo life 238/357 (혼돈스럽다)\n* Move 245/368 (안정적) 기관차와 우주선 패턴들\n* 34/34 (폭발적) ‘34 Life’\n* 34678/3678 (폭발적) ‘낮과 밤(Day & Night)’\n* Coral 45678/3 (폭발적) 산호초 모양으로 성장한다\n* 5/346 (안정적) ‘Long life’\n* Assimilation 4567/345 (혼돈스럽다)\n* Life without death 012345678/3 (폭발적)\n* Gnarl 1/1 (폭발적)\n* Walled cities 2345/45678 (안정적)\n* Pylamid /12345678 피라미드 형태\n* Sponge cells 01234567/456 (안정적) 스폰지 모양\n* wired life 23/3678 (혼돈스러움) 약간 오래 가는 life\n* 1 life 13/3 작은 막대 패턴과 진동자들\n* drill 245678/3 막대가 나오는 듯한 패턴\n* h tree 012345678/1 결정 또는 나무 모양으로 성장함\n* rats in maze 1234/37 미로 안쪽에서 움직이는 세포들\n* repilcater2 02468/1357 (폭발적) 복제자 패턴과 비슷함\n* wired life 37 23/37 () 일반 라이프보다 이상한 희귀 패턴이나 펄사가 매우 자주 나옴\nLife32/game of life 프로그램에 따름.\n", "\n* Life Lexicon\n* Conway's Game of Life applet software home page\n* Eric Weisstein's Treasure Trove of the Life C.A. - Dr. Eric Weisstein의 홈페이지. 여러 가지 라이프게임의 패턴들과 설명이 실려 있다.\n* Conway's Game of Life simulator for Microsoft Windows\n* Winlife32 Conway's Game of Life simulator\n* Game of Life on JavaScript\n\n분류:세포 자동자\n분류:인공 생명\n분류:자기조직화" ]
‘글라이더’ 패턴의 진행. '''라이프 게임'''() 또는 '''생명 게임'''은 영국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가 고안해낸 세포 자동자의 일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세포 자동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 1970년 10월호 중 마틴 가드너의 칼럼 〈Mathematical Games(수학 게임)〉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단순한 규칙 몇가지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 게임은 컴퓨터 과학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프 게임이 범용 튜링 기계와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진 세포 자동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 ‘게임’은 사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게임의 진행을 결정하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약간 많이 다르다. 라이프 게임의 진행은 처음 입력된 초기값만으로 완전히 결정된다. 라이프 게임은 무한히 많은 사각형(혹은 ‘세포’)으로 이루어진 격자 위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세포 주위에는 인접해 있는 여덟 개의 ‘이웃 세포’가 있으며, 또 각 세포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가지 상태 중 한가지 상태를 갖는다(‘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격자를 이루는 세포의 상태는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으로 변화한다. 즉, 현재 세대의 세포들 전체의 상태가 다음 세대의 세포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각각의 세포가 다음 세대에서 갖는 상태는 현재 자신의 상태와 이웃하는 여덟 개의 세포들 중 몇 개가 살아있는 상태인지만을 따져서 결정된다. 존 호턴 콘웨이의 규칙들이다. * 죽은 세포의 이웃 중 정확히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살아난다(‘태어난다’). * 살아 있는 세포의 이웃 중에 두 개나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계속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이외에는 ‘외로워서’, 또는 ‘숨이 막혀서’ 죽어버린다. 존 호턴 콘웨이는 규칙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 설정하였다. * 폭발적인 성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래의 라이프 게임의 변종 중 대부분은 이를 만족하지 않는다.) * 예측할 수 없고 혼돈스러운 패턴. * 규칙은 최대한 간단해야 한다. * 존 폰 노이만의 세포 자동자을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 라이프 게임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고정된 패턴(정물 靜物, still life), 일정한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진동자, oscillator — 정물은 주기가 한 세대인 진동자라고 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 패턴(우주선, spaceship) 등 여러 패턴이 존재한다. 아래에 간단한 예가 있다. 살아 있는 셀은 검은 색으로, 죽어 있는 셀은 흰색으로 표현했다. 파일:game of life block.png 파일:game of life boat.png 파일:game of life blinker.png 파일:game of life toad.png 파일:game of life glider.png 파일:game of life lwss.png block 배(boat) 깜빡이(blinker) 두꺼비(toad) 글라이더(glider) LWSS ‘block’과 ‘boat’는 정물이고, ‘blinker’와 ‘toad’는 진동자, 그리고 ‘글라이더(glider)’와 ‘경량급 우주선(lightweight spaceship — LWSS)’은 우주선에 속한다. 그리고 무한히 이을 수 있는 패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배(boat)는 무한정 이을 수 있다.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많은 세대가 필요한 패턴도 있는데, ‘methuselah(므두셀라)’라고 불린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펜토미노 퍼즐의 모양 중 R-펜토미노(R-Pentomino)는 세포는 5개이지만 1130세대가 지나서야 안정화된다. (이는 6개 미만 세포 패턴 중 가장 활동적인 패턴이다.) ‘다이하드(diehard)’는 130세대가 지나서야 사라진다. ‘도토리(acorn)’는 5206세대가 지나서야 13개의 글라이더(glider)와 수많은 진동자 또는 정물을 남기고 안정화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패턴 중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가장 많은 세대를 거친 패턴은 리드카(Lidka)로, 무려 29,055 세대가 지나야 안정화된다. 파일:game of life diehard.png 파일:game of life methuselah.png diehard acorn 라이프 게임이 처음 소개된 〈Mathematical Games〉에서, 콘웨이는 세포 수가 무한히 많아지는 패턴을 찾은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 해커 빌 가스퍼(Bill Gosper)가 1970년 11월에 처음 그러한 패턴들을 찾아 상금을 탔다. 패턴들 가운데에는 ‘글라이더’나 ‘우주선’을 발사하는 ‘총’과 안정화한 패턴들을 꼬리에 남기며 전진하는 ‘기관차’, 그리고 양쪽을 다 행하는 ‘갈퀴’ 패턴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제곱 비례로 성장하는 패턴인 ‘사육사’ 패턴도 찾아냈는데, 이것은 ‘총’ 패턴을 꼬리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한다. 이 후로 글라이더를 이용한 논리 게이트, 가산기, 소수 발생기와 라이프 게임을 더 큰 스케일과 느린 속도로 모방하는 단위 세포 등 다양한 패턴들이 만들어졌다. 맨 처음 발견된 ‘총’이 여전히 알려진 가장 작은 총이다: center 가스퍼의 글라이더 건 무한히 성장하는 더 단순한 패턴들이 그 후에도 발견되었다. 아래의 세 패턴은 모두 무한히 성장한다. 처음 것은 10개의 살아있는 세포만을 가지며 이보다 적은 세포를 가진 무한 성장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5x5의 정사각형 안에 포함되는 패턴이고, 세 번째는 두께가 1인 패턴이다. 파일:game of life infinite1.png     파일:game of life infinite2.png 파일:game of life infinite3.png 여러 개의 글라이더가 합성되어 재미있는 결과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두 개의 글라이더를 적당한 방법으로 블록에 충돌시키면, 블록은 글라이더가 발사된 곳을 향해 한 칸 다가간다. 세 개의 글라이더를 다른 방법으로 충돌시키면 블록은 발사된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한 칸 다가간다. 이것은 ‘움직이는 블록 메모리’라고 불리며 카운터를 모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더를 이용해 AND, OR, NOT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개의 카운터와 연결된 유한 상태 오토마타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능 튜링 기계와 똑같은 계산능력을 가지며, 이는 라이프 게임이 무한한 메모리를 가진 어떤 컴퓨터와도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글라이더 건의 패턴을 이용하여 새로운 개체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며, 원본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만능 건축사’ 패턴은 튜링 머신과 동등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라이프 게임을 시작으로,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을 가진 변종들이 존재한다. 원래의 라이프 게임은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며, 2개 또는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생존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사망한다. 이 규칙은 ‘23/3’으로 표시할 수 있다. 앞쪽 숫자들은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하며, 뒤쪽 숫자들은 세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6/6’은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세포가 새로 태어나고, 1개나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생존하며 나머지 경우 사망하는 규칙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라이프'''(HighLife) 규칙은 원래 규칙에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새로 태어난다는 규칙이 추가되며, 이는 ‘23/36’으로 표시된다. HighLife는 ‘복제자’ 패턴들로 유명하지만, 이 규칙의 대부분의 패턴들이 너무 복잡하거나 황폐한 패턴들을 생성한다. * Diamoeba 5678/35678 (혼돈스럽다) 다이아몬드 모양 패턴들. 종종 파국적으로 멸망함 * Seeds /2 (폭발적) 불사조(몇 개의 남은 세포들로부터 폭발적으로 부활함), 간결한 패턴들 * Serviettes/234 (폭발적) 불사조, 레이스 무늬 패턴들 * Maze 12345/3 (폭발적) 미로같은 패턴 * Mazectric 1234/3 (폭발적) Maze와 아주 비슷함. Maze보다 덜 막혀있음 * 2x2 125/36 (혼돈스럽다) 2x2 블록 패턴이 출몰함 * Replicator 1357/1357 (폭발적) 모든 패턴이 복제자 패턴이다. Replicator은 복제자 패턴이란 뜻이다 * Amoeba 1358/357 (혼돈스럽다) 아메바형 패턴 * Conway's game of life 23/3 (혼돈스럽다) ‘라이프 게임’ * Highlife 23/36 (혼돈스럽다) ‘하이라이프’ (복제자 패턴이 등장한다) * Stains 235678/3678 (안정적) 잉크 방울이 마르는 것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 * Coagulations 235678/378 (폭발적) 혼돈스러운 패턴과 응고하는듯한 정착 패턴들 * Pseudo life 238/357 (혼돈스럽다) * Move 245/368 (안정적) 기관차와 우주선 패턴들 * 34/34 (폭발적) ‘34 Life’ * 34678/3678 (폭발적) ‘낮과 밤(Day & Night)’ * Coral 45678/3 (폭발적) 산호초 모양으로 성장한다 * 5/346 (안정적) ‘Long life’ * Assimilation 4567/345 (혼돈스럽다) * Life without death 012345678/3 (폭발적) * Gnarl 1/1 (폭발적) * Walled cities 2345/45678 (안정적) * Pylamid /12345678 피라미드 형태 * Sponge cells 01234567/456 (안정적) 스폰지 모양 * wired life 23/3678 (혼돈스러움) 약간 오래 가는 life * 1 life 13/3 작은 막대 패턴과 진동자들 * drill 245678/3 막대가 나오는 듯한 패턴 * h tree 012345678/1 결정 또는 나무 모양으로 성장함 * rats in maze 1234/37 미로 안쪽에서 움직이는 세포들 * repilcater2 02468/1357 (폭발적) 복제자 패턴과 비슷함 * wired life 37 23/37 () 일반 라이프보다 이상한 희귀 패턴이나 펄사가 매우 자주 나옴 Life32/game of life 프로그램에 따름. * Life Lexicon * Conway's Game of Life applet software home page * Eric Weisstein's Treasure Trove of the Life C.A. - Dr. Eric Weisstein의 홈페이지. 여러 가지 라이프게임의 패턴들과 설명이 실려 있다. * Conway's Game of Life simulator for Microsoft Windows * Winlife32 Conway's Game of Life simulator * Game of Life on JavaScript 분류:세포 자동자 분류:인공 생명 분류:자기조직화
도조 히데키
[ "Introduction", "생애와 경력", "처형", "사후", "평가", "가계", "도조 히데키를 그린 작품", "각주", "외부 링크" ]
[ "\n\n'''도조 히데키'''(, 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쇼와 천황 재위기에 활동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쟁범죄자이다. 1941년 10월 18일에 군인의 신분으로 행정수반인 총리대신을 되었으며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육군대신, 내무대신, 참모총장을 겸임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여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공포정치의 일종인 ‘헌병정치’를 실시하여 군부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n\n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이 점차 미국의 반격에 밀려 전세가 기울자 1944년 7월 18일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패전 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n\n군인가문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후 군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일국의 총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미국을 이길수 없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전진훈(戰陣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 훈령을 내려 많은 군인들에게 목숨바쳐 전투에 임할 것을 독려했으나 정작 자신은 패전후 비굴한 처신으로 일관했다. 고의성 짙은 자살미수사건을 벌인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책임을 회피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함으로 사무라이 후예로서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n", "청년기의 도조\n1884년 도쿄부 고지정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토세(千歳)이며 본적지는 이와테현으로, 그의 두 형은 도조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는 1909년에 이토 가쓰코(伊藤勝子)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n\n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하였다.\n\n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육군 보병 대위가 되어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19년 스위스에 주재 무관으로 급파되었고, 1920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소좌로 승진되었다. 1921년에는 다시 해외로 파견돼 독일에서 주재하였다. 도조는 1922년 육군대학교의 교관을 맡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1929년 중좌로 승진되었다.\n\n1920년대, 그는 군 파벌에 연루되어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그리고 나가타 데쓰잔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를 표방했던 파벌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인 파벌 황도파를 이끄는 아라키 사다오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조는 후에 나가타 데쓰잔 사망 이후 통제파의 1인자로서 일본 육군을 주도하게 되었다.\n\n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붙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는데, 이는 그의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n\n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의 확대를 유도하였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 일본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돼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연임하였다. 도조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해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참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허용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준비를 추진하였다.\n\n총리 시절의 도조\n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던 와중에는 도조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어 자살공격을 통한 옥쇄(玉碎)를 부추였다.\n\n도조는 이로써 내각을 장악해 군사 국가 체제로 일본 제국 전역을 군사강국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의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n\n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해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n", "파일:Tojo at IMTFE.png|200px|섬네일|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증언하는 도조 히데키\n도조 히데키 자살 실패 후 사진\n도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48년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아 그 해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n\n도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지 않았으며 요코하마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유회와 함께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를 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고,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옮겨져 숨겨졌다.\n", "1958년 무덤을 새로 만들자는 계획이 부상해 1960년 아이치현의 산가네 산(三ヶ根山) 꼭대기에 이장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순국 칠사묘가 축조되어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n\n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고, 1978년 합사되었다.\n", "우지 도시히코는 자신의 책에서 도조는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해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의 전쟁으로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n\n장성훈은 그의 저서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를 통하여 도조 히데키를 비겁한 사무라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도조 히데키는 전통적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의 정예 엘리트로서 군내 요직을 두루 거친 핵심요원이다.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다는 강경파의 선봉으로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총리에 임명된후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직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다. 특히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사무라이의 후예답게 명예롭게 죽으라는 '전진훈(戰陣訓)'과 하찮은 기와로 온전하게 남기보다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죽으라는 '와전옥쇄(瓦全玉碎)'의 영을 내린 장본인이다.\n\n이 훈령에 의해 일본의 무수한 젊은이들은 조국을 위해 하나뿐인 자신을 목숨을 던지며 전장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이 항복한후 고의성이 짙은 '자살미수 소동'을 일으켰으며, 전범으로 체포된후 벌어진 재판에서 전임자의 결정을 단순히 집행한것 뿐이라고 책임을 회피한채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할복 등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독려할 수는 없으나 사무라이 정신이 넘치는 일본군인의 대표로서 모범이 되어야 할 자가 지극히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사무라이 후예로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며, 도조 히데키을 비롯한 A급전범들의 예에서 보듯이 일본이 지나치게 사무라이 정신을 미화하고 있다고 장성훈은 주장하였다.\n", "* 장남 도조 히데타카(東條英隆)\n** 손녀 도조 유코(東條由布子)\n* 차남 도조 데루오(東條輝雄)\n* 삼남 도조 도시오(東條敏夫)\n* 장녀 도조 고즈에(東條光枝)\n* 차녀 도조 마키에(東條満喜枝)\n* 삼녀 도조 유키에(東條幸枝)\n* 사녀 도조 기미에(東條君枝)\n", "=== 소설 ===\n* 《왼손잡이 독재자 - 도조 히데키의 비극》(左利きの独裁者―東条英機の悲劇)\n* 《도조 히데키 - 대일본제국에 순직한 남자》 (東条英機―大日本帝国に殉じた男)\n\n=== 영화 ===\n* 대동아전쟁과 국제 재판 (大東亜戦争と国際裁判, 1959년)\n* 격동의 쇼와사 군벌 (激動の昭和史 軍閥, 1970년)\n* 전쟁과 인간 (戦争と人間, 1973년)\n* 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1982년)\n* 프라이드·운명의 순간 (プライド・運命の瞬間, 1998년)\n* 스파이·조르게 (スパイ・ゾルゲ, 2003년)\n* 난징의 진실 제1부 칠인의 사형수 (南京の真実 第一部「七人の死刑囚」, 2008년)\n\n=== 다큐멘터리 드라마 ===\n*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 개전과 도조 히데키 (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 2008년)\n", "\n", "\n* 도조 히데키의 생애\n* 제2차 세계 대전 데이터베이스: 도조 히데키\n* 역대 총리의 사진과 경력 - 도조 히데키(수상관저 홈페이지)\n\n\n\n\n\n\n\n\n\n\n\n\n\n\n\n\n\n \n분류:1884년 출생\n분류:1948년 사망\n분류: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수\n분류: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n분류:일본 육군 대장\n분류:일본의 반공주의자\n분류:교수형된 사람\n분류:관동군 관련자\n분류:대량 살인자\n분류:A급 전범\n분류:통제파\n분류:일본의 외무대신\n분류:일본의 상공대신\n분류:일본의 내무대신\n분류:일본의 문부대신\n분류:일본의 육군대신\n분류:순국칠사\n분류:공2급 금치훈장 수훈자\n분류:인도에 반한 죄 사형수\n분류:일본의 인도에 반한 죄 기결수\n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n분류:훈1등 서보장 수훈자\n분류:도쿄도 구부 출신" ]
'''도조 히데키'''(, 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쇼와 천황 재위기에 활동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쟁범죄자이다. 1941년 10월 18일에 군인의 신분으로 행정수반인 총리대신을 되었으며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육군대신, 내무대신, 참모총장을 겸임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여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며, 공포정치의 일종인 ‘헌병정치’를 실시하여 군부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듬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이 점차 미국의 반격에 밀려 전세가 기울자 1944년 7월 18일 그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패전 후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군인가문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후 군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일국의 총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미국을 이길수 없다는 의견을 무시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전진훈(戰陣訓)과 '와전옥쇄(瓦全玉碎) 훈령을 내려 많은 군인들에게 목숨바쳐 전투에 임할 것을 독려했으나 정작 자신은 패전후 비굴한 처신으로 일관했다. 고의성 짙은 자살미수사건을 벌인후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책임을 회피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함으로 사무라이 후예로서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청년기의 도조 1884년 도쿄부 고지정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토세(千歳)이며 본적지는 이와테현으로, 그의 두 형은 도조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는 1909년에 이토 가쓰코(伊藤勝子)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낳았다.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육군 보병 대위가 되어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19년 스위스에 주재 무관으로 급파되었고, 1920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소좌로 승진되었다. 1921년에는 다시 해외로 파견돼 독일에서 주재하였다. 도조는 1922년 육군대학교의 교관을 맡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1929년 중좌로 승진되었다. 1920년대, 그는 군 파벌에 연루되어 우가키 가즈시게, 스기야마 하지메, 고이소 구니아키, 우메즈 요시지로, 그리고 나가타 데쓰잔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를 표방했던 파벌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인 파벌 황도파를 이끄는 아라키 사다오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조는 후에 나가타 데쓰잔 사망 이후 통제파의 1인자로서 일본 육군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붙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는데, 이는 그의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의 확대를 유도하였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 일본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돼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연임하였다. 도조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 대신과 협력해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참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허용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준비를 추진하였다. 총리 시절의 도조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던 와중에는 도조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어 자살공격을 통한 옥쇄(玉碎)를 부추였다. 도조는 이로써 내각을 장악해 군사 국가 체제로 일본 제국 전역을 군사강국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의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해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파일:Tojo at IMTFE.png|200px|섬네일|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증언하는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 자살 실패 후 사진 도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48년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아 그 해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지 않았으며 요코하마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유회와 함께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를 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고,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옮겨져 숨겨졌다. 1958년 무덤을 새로 만들자는 계획이 부상해 1960년 아이치현의 산가네 산(三ヶ根山) 꼭대기에 이장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순국 칠사묘가 축조되어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고, 1978년 합사되었다. 우지 도시히코는 자신의 책에서 도조는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해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의 전쟁으로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장성훈은 그의 저서 《사무라이 정신은 없다》를 통하여 도조 히데키를 비겁한 사무라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도조 히데키는 전통적인 군인 집안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의 정예 엘리트로서 군내 요직을 두루 거친 핵심요원이다.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다는 강경파의 선봉으로 군인신분을 유지한채 총리에 임명된후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직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다. 특히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사무라이의 후예답게 명예롭게 죽으라는 '전진훈(戰陣訓)'과 하찮은 기와로 온전하게 남기보다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죽으라는 '와전옥쇄(瓦全玉碎)'의 영을 내린 장본인이다. 이 훈령에 의해 일본의 무수한 젊은이들은 조국을 위해 하나뿐인 자신을 목숨을 던지며 전장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이 항복한후 고의성이 짙은 '자살미수 소동'을 일으켰으며, 전범으로 체포된후 벌어진 재판에서 전임자의 결정을 단순히 집행한것 뿐이라고 책임을 회피한채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할복 등의 자살을 미화하거나 독려할 수는 없으나 사무라이 정신이 넘치는 일본군인의 대표로서 모범이 되어야 할 자가 지극히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사무라이 후예로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며, 도조 히데키을 비롯한 A급전범들의 예에서 보듯이 일본이 지나치게 사무라이 정신을 미화하고 있다고 장성훈은 주장하였다. * 장남 도조 히데타카(東條英隆) ** 손녀 도조 유코(東條由布子) * 차남 도조 데루오(東條輝雄) * 삼남 도조 도시오(東條敏夫) * 장녀 도조 고즈에(東條光枝) * 차녀 도조 마키에(東條満喜枝) * 삼녀 도조 유키에(東條幸枝) * 사녀 도조 기미에(東條君枝) === 소설 === * 《왼손잡이 독재자 - 도조 히데키의 비극》(左利きの独裁者―東条英機の悲劇) * 《도조 히데키 - 대일본제국에 순직한 남자》 (東条英機―大日本帝国に殉じた男) === 영화 === * 대동아전쟁과 국제 재판 (大東亜戦争と国際裁判, 1959년) * 격동의 쇼와사 군벌 (激動の昭和史 軍閥, 1970년) * 전쟁과 인간 (戦争と人間, 1973년) * 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1982년) * 프라이드·운명의 순간 (プライド・運命の瞬間, 1998년) * 스파이·조르게 (スパイ・ゾルゲ, 2003년) * 난징의 진실 제1부 칠인의 사형수 (南京の真実 第一部「七人の死刑囚」, 2008년) === 다큐멘터리 드라마 === *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 개전과 도조 히데키 (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 2008년) * 도조 히데키의 생애 * 제2차 세계 대전 데이터베이스: 도조 히데키 * 역대 총리의 사진과 경력 - 도조 히데키(수상관저 홈페이지) 분류:1884년 출생 분류:1948년 사망 분류: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수 분류: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 분류:일본 육군 대장 분류:일본의 반공주의자 분류:교수형된 사람 분류:관동군 관련자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A급 전범 분류:통제파 분류:일본의 외무대신 분류:일본의 상공대신 분류:일본의 내무대신 분류:일본의 문부대신 분류:일본의 육군대신 분류:순국칠사 분류:공2급 금치훈장 수훈자 분류:인도에 반한 죄 사형수 분류:일본의 인도에 반한 죄 기결수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훈1등 서보장 수훈자 분류:도쿄도 구부 출신
한국철도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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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n\n\n\n'''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 , 약칭 '''한국철도''' 또는 '''철도공사''' 또는 '''코레일'''())는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본사는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소제동 철도기관 공동사옥)에 있으며 한국철도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n", "* 2003년 7월 29일: 철도산업발전기본법 제정\n* 2003년 12월 31일: 한국철도공사법 제정\n* 2005년 1월 1일: '''한국철도공사 설립'''\n* 2005년 8월 1일: KTX특송서비스 본격 시행\n* 2006년 7월 1일: 철도공사 조직개편(기능통합형 17개 지사체제, 3개 철도차량관리단)\n* 2006년 12월 22일: 철도교통관제센터 개통(5개 지역관제실을 관제센터로 통합)\n* 2009년 3월 26일: 간선형 전기동차(EMU, 150km/h) 최초 도입\n* 2010년 3월 2일: 한국형고속철도 KTX-산천 상업운행 개시\n* 2012년 2월 28일: 경춘선 준고속열차 ITX-청춘 운행개시\n* 2014년 10월 25일: 전국호환교통카드 레일플러스 출시\n* 2015년 3월 24일: KTX, 대한민국 브랜드스타 4년 연속 1위 달성\n* 2015년 9월 24일: KTX 이용객 5억명 돌파\n* 2017년 1월 11일: 광명역~사당역간 KTX 셔틀버스(8507번) 운행 개시\n* 2018년 1월 17일: 광명역 도심공항터미널 영업 개시\n* 2019년 1월 15일: 도심공항터미널 개장 1년 만에 이용객 8만 명 돌파\n* 2020년 8월 18일: 코레일톡 승무원 호출서비스 제공 개시\n* 2021년 1월 15일: KTX-이음 개통\n* 2023년 9월 1일: ITX-마음 개통\n* 2024년 5월 1일: KTX-청룡 개통 예정\n", "* 본사: 7본부 10실 7단 62처\n* 소속기관(현업): 8지역본부 및 4지역관리단 20부속기관\n* 정원: 32,286명 (2020)\n\n=== 본사 ===\n* '''비서실'''\n* '''감사실'''\n** 감사기획처\n** 종합감사처\n** 경영감사처\n** 청렴조사처\n* '''안전기술총괄본부장'''\n** 안전본부\n*** 안전계획처\n*** 산업안전처\n*** 시민안전처\n*** 안전분석처\n*** 환경경영처\n*** 비상계획처\n*** 관제실\n*** 철도교통관제센터\n** 차랑본부\n** 차량계획처\n** 고속차량처\n** 일반차량처\n** 전동차량처\n** 철도차량정비단\n** 차량기술센터\n* 시설본부\n** 시설계획처\n** 선로관리처\n** 건설시설처\n** 철도시설안전합동혁신단\n** 고속시설사업단\n* 전기본부\n** 전기계획처\n** 전철전력처\n** 통신처\n** 신호제어처\n** 고속전기사업단\n** 서울정보통신사무소\n* '''부사장'''\n** 법무실\n* '''기획조정본부'''\n** ESG경영처\n** 전략기획처\n** 기획예산처\n** 경영평가처\n** 재무경영실\n*** 재무회계실\n*** 자금물자처\n*** 상생계약처\n** 회계통합센터\n* 인재경영본부\n** 총무처\n** 인사기획처\n** 인사운영처\n** 노사상생처\n** 복지후생처\n** 인제개발원\n* 디지털 융합본부\n** 디지털기획처\n** 디지털경영처(정보보안센터)\n** IT운영센터\n** 철도연구원\n* 여객사업본부\n** 여객계획처\n** 역운영처\n** 여객서비스처\n** 고객마케팅단\n** 열차운영단\n** 특별동차운영단\n* 물류사업본부\n** 물류계획처\n** 물류마케팅처\n** 물류수송처\n* 광역철도본부\n** 광역계획처\n** 광역마케팅처\n** 광역운영처\n* 신성장 사업본부\n** 신성장기획처\n** 자산운영처\n** 신성장개발처\n** 해외남북철도사업단\n*** 국제협력처\n*** 해외사업1처\n*** 해외사업2처\n\n=== 지역본부 ===\n* 서울본부: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n* 수도권동부본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한천로 472\n* 수도권서부본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영로 115\n* 충북북부: 충청북도 제천시 의림대로 1\n* 전북본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대로 153\n* 전남본부: 전라남도 순천시 팔마로 119\n* 광주본부: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n* 경북본부: 경상북도 영주시 시청로2번길 30\n* 대구본부: 대구광역시 동구 동대구로 550\n* 부산경남본부: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06\n\n=== 소속기관 ===\n* 연구원: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n* 인재개발원: 경기도 의왕시 철도박물관로 157\n* IT운영센터: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 철도빌딩\n* 회계통합센터: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한국철도공사 9층\n* 철도교통관제센터: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일로8길 150\n* 시설장비사무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평촌2길 59\n* 서울정보통신사무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21나길 7 철도회관 8층\n* 경주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경주고속철도전기사무소: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경주역로 80\n* 오송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오송고속철도전기사무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정중연제로 384\n\n=== 철도차량정비단 ===\n*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08-1\n* 대전철도차량정비단: 대전광역시 대덕구 벚꽃길 150\n* 부산철도차량정비단: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신천대로 215\n* 호남철도차량정비단: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봉로258번길\n\n=== 계열사 ===\n* 코레일로지스: 철도물류수송 담당\n* 코레일유통: 철도기반 전문유통기업\n* 코레일관광개발: 철도관광, 승무사업 등 담당\n* 코레일네트웍스: 철도역무, 회원관리, 주차장 등 담당\n* 코레일테크: 철도차량, 시설 유지보수 담당\n\n=== 스포츠단 ===\n*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n* 한국철도 유도단\n* 한국철도 사이클단\n", "* 여객열차: KTX, KTX-산천, KTX-이음, ITX-마음, ITX-새마을, ITX-청춘,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운행.\n** 관광열차: 정선아리랑열차, 백두대간협곡열차, 남도해양열차, 동해산타열차, 서해금빛열차, 레일크루즈 해랑 운행.\n* 광역철도\n** 수도권 전철: 1호선, 3호선, 4호선, 경의·중앙선, 경춘선, 과천선, 안산선, 일산선, 수인·분당선, 경강선, 서해선 광역전철 운행.\n** 부산 도시철도: 동해선 광역전철 운행.\n* 물류\n* 자산 개발\n* 시설 유지·보수\n* 버스: 광명역 - 인천국제공항 셔틀버스 6770번을 직영으로 운행.\n", "* 역 현황: 688개 (2023년 1월 1일 기준)\n** 보통역: 337개\n** 배치간이역: 2개\n** 무배치간이역: 308개\n** 조차장: 2개\n** 신호장: 32개\n** 신호소: 7개\n\n* 열차 운행 현황: 3,396회 (2022년 12월 31일 기준, 주중 편도기준)\n** 고속열차: KTX 306회\n** 간선여객열차: 399회(ITX청춘 36회 포함)\n** 광역철도: 2,510회\n** 화물열차: 181회\n\n* 철도수송분담율\n** 여객: 12.8% (인 Km 기준, 2020년)\n** 화물: 4.4% (톤 Km 기준, 2018년)\n\n* 영업거리: 4,131.2km (100개 노선) (2022년 12월 31일 기준)\n** 고속선: 595.9km\n** 준고속선: 326.1km\n** 일반선: 3,209.2km\n** 복선거리: 2,885.4km (69.8%)\n** 전철거리: 3,231km (78.2%)\n\n=== 보유 차량 ===\n여객객차 및 발전차,화차는 2022년 기준 나머지는 2024년 기준이다.\n* 고속열차: 137편성 1750량\n** KTX: 46편성 920량\n** KTX-산천: 24편성 240량\n** KTX-산천: 14편성 140량(사고로 1개 편성 폐차)\n** SRT: 32편성 320량\n** KTX-이음: 19편성 114량\n** KTX-청룡: 2편성 16량\n* ITX-새마을: 23편성 138량\n* ITX-마음: 27편성 108량\n* ITX-청춘: 8편성 64량\n* 누리로: 7편성 28량 (사고로 1개 편성 폐차)\n* 통근형 전동차: 304편성 2486량\n* 기관차 : 388량\n** 디젤 기관차: 214량 (4400호대: 59량, 7300호대~7500호대: 130량, 7600호대: 25량)\n** 전기 기관차: 174량 (8000호대: 4량, 8100호대~8200호대: 83량, 8500호대: 87량)\n* 여객객차: 626량\n* 발전차: 89량\n* 화차: 9124량\n", "한국철도공사에서는 2011년 2월 7일 \"철도문화재 관리 지침\"을 제정하여 사(社) 소유의 철도 유물을 철도기념물과 준철도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n\n=== 철도기념물 ===\n철도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철도유물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다만, 문화재청장이 이미 등록한 문화재는 제외한다.\n\n\n\n\n\n\n'''번호'''\n\n'''사진'''\n\n'''명칭'''\n\n '''소재지'''\n\n '''제작자(단체)'''\n\n '''지정일'''\n\n '''제작시기'''\n\n\n\n1호\n\n\n\n증기기관차 터우 5형\n\n철도인재개발원\n\n서울공작창\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5년\n\n\n\n2호\n\n\n\n디젤전기기관차 4102호\n\n대전철도차량정비단\n\nGMC\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6년\n\n\n\n3호\n\n\n\n디젤전기기관차 4201호\n\n대전철도차량정비단\n\nGMC\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7년\n\n\n\n4호\n\n\n\n디젤전기기관차 5025호\n\n대전철도차량정비단\n\nGMC\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7년\n\n\n\n5호\n\n\n\n디젤전기기관차 6230호\n\n대전철도차량정비단\n\nGMC\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7년\n\n\n\n6호\n\n\n\n디젤전기기관차 7001호\n\n부산철도차량정비단\n\n현대정공 철차사업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86년\n\n\n\n7호\n\n150px\n\n전기기관차 8001호\n\n대전철도차량정비단\n\n알스톰 외\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72년\n\n\n\n8호\n\n\n\n새마을동차(PMC)126호(객차335호포함),새마을디젤동차(PMC)130호\n\n청도역, 대전철도차량정비단\n\n현대정공 철차사업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89년\n\n\n\n9호\n\n\n\n침대객차(무궁화)\n\n\n\n\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10호\n\n\n\n전호등\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0년대\n\n\n\n11호\n\n\n\n일면 후부 표지등\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0년대\n\n\n\n12호\n\n\n\n입실역사 기록물\n\n\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7년\n\n\n\n13호\n\n\n\n심천역사 기록물\n\n\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5년~1957년\n\n\n\n14호\n\n\n\n기관사 제복\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74년\n\n\n\n15호\n\n\n\n故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n\n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2년\n\n\n\n16호\n\n150px\n\n영암선 개통기념비\n\n승부역\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5년\n\n\n\n17호\n\n\n\n산업선전철준공기념비\n\n동해역\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75년\n\n\n\n18호\n\n150px\n\n경경선 전통기념비\n\n단성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42년\n\n\n\n19호\n\n150px\n\n경전선 전통기념비\n\n구. 하동역\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8년\n\n\n\n20호\n\n\n\n모터카 MB8901\n\n\n\n대동상공\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86년\n\n\n\n21호\n\n\n\n궤도안정기(DTS9201: Dynamic Track Stabilizer)\n\n\n\nPLASSER & THEURER\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92년\n\n\n\n22호\n\n\n\n수동핸드카\n\n승부역\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0년\n\n\n\n23호\n\n\n\n완목식신호기등\n\n\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0년\n\n\n\n24호\n\n\n\n통표폐색기(통표, 휴대기, 수수기 포함)\n\n\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6년\n\n\n\n25호\n\n\n\n자석식 전화교환기\n\n\n\n통감부 철도관리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07년\n\n\n\n26호\n\n\n\n공전식 전화교환기\n\n철도박물관\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25년\n\n\n\n27호\n\n\n\n완목식신호기(신호레바 포함)\n\n주평역\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6년\n\n\n\n28호\n\n\n\n철도역사용지도\n\n\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3년\n\n\n\n29호\n\n\n\n안성천안간 선로준공 종단면도\n\n\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22년\n\n\n\n30호\n\n\n\n선로조사도\n\n\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44년\n\n\n\n31호\n\n\n\n주주증권(조선철도주식회사)\n\n\n\n조선철도\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24년\n\n\n\n32호\n\n\n\n주주증권(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n\n\n\n조선경남철도\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20년\n\n\n\n33호\n\n\n\n주주증권(경춘철도주식회사)\n\n\n\n경춘철도\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6년\n\n\n\n34호\n\n150px\n\nDEC형 특별동차 1호(대통령 전용)\n\n철도박물관\n\n니혼샤료\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9년\n\n\n\n35호\n\n150px\n\nDEC형 특별동차 2호(경호용)\n\n철도박물관\n\n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85년\n\n\n\n36호\n\n150px\n\n경복호(PMC형 특별동차 1호, 대통령 전용)\n\n\n\n한국철도차량\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37호\n\n\n\n경복호(PMC형 특별동차 2호, 경호용)\n\n\n\n한국철도차량\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38호\n\n\n\n업무용 동차\n\n철도박물관\n\n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90년\n\n\n\n39호\n\n150px\n\n디젤전기기관차 7301호\n\n부산철도차량정비단\n\n현대정공 철차사업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89년\n\n\n\n40호\n\n\n\n전기기관차 8091호\n\n\n\n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86년\n\n\n\n41호\n\n150px\n\n경주역사\n\n경주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36년\n\n\n\n42호\n\n150px\n\n불국사역사\n\n불국사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36년\n\n\n\n43호\n\n\n\n철도안전수송비\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74~1975년\n\n\n\n44호\n\n\n\n통표폐색기\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0년대\n\n\n\n45호\n\n\n\n통표\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46호\n\n\n\n표지부 선로전환기(신호등 포함)\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47호\n\n\n\n완목식신호기 일체\n\n삼화역\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8년\n\n\n\n48호\n\n\n\n완목식신호기 일체\n\n장생포역\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0년대\n\n\n\n49호\n\n\n\n표지부 선로전환기 신호등\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50호\n\n\n\n정규도 및 표준도\n\n\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 준철도기념물 ===\n향후 역사적, 기술적, 교육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n\n\n\n\n\n\n'''번호'''\n\n'''사진'''\n\n'''명칭'''\n\n '''소재지'''\n\n '''제작자(단체)'''\n\n '''지정일'''\n\n '''제작시기'''\n\n\n\n1호\n\n\n\n객차(비둘기호)\n\n대전철도차량정비단\n\n인천공작창\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3년\n\n\n\n2호\n\n\n\n객차(통일호)\n\n국립대전현충원\n\n현대정공 철차사업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81년\n\n\n\n3호\n\n\n\n수화물용저울\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60년대\n\n\n\n4호\n\n\n\n승차권 날짜기계(일부인)\n\n\n\n신성기전\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5호\n\n\n\n승차권 개표가위\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6호\n\n\n\n집표도장\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7호\n\n\n\n승차권 체송함\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8호\n\n150px\n\n김유정역사(구 신남역)\n\n김유정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9년\n\n\n\n9호\n\n150px\n\n영월역사\n\n영월역\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6년\n\n\n\n10호\n\n\n\n풍기역 급수탑\n\n풍기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42년\n\n\n\n11호\n\n150px\n\n화본역 급수탑\n\n화본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7년\n\n\n\n12호\n\n150px\n\n수원역 급수탑\n\n수원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1년\n\n\n\n13호\n\n150px\n\n수원역 급수탑\n\n수원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31년\n\n\n\n14호\n\n\n\n보성역 급수탑\n\n보성역\n\n만철 경성관리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22년\n\n\n\n15호\n\n\n\n순천역 급수탑\n\n순천역\n\n만철 경성관리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22년\n\n\n\n16호\n\n\n\n경주역 급수탑\n\n경주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44년\n\n\n\n17호\n\n\n\n철도시발기념지비\n\n노량진역\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75년\n\n\n\n18호\n\n\n\n영등포역 위령비\n\n철도인재개발원\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48년\n\n\n\n19호\n\n\n\n테르밋트 용접기\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20호\n\n\n\n톱(침목절단용)\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21호\n\n\n\n단고마와 켄트게이지\n\n제천역\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22호\n\n\n\n선로게이지\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23호\n\n\n\n수동 레일천공기\n\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24호\n\n\n\n트렉젝크\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99년\n\n\n\n25호\n\n\n\n모터카 TMM9401 '''2021년 고철매각'''\n\n\n\n게이즈마\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94년\n\n\n\n26호\n\n\n\n휴대용 전화기(PT-93)\n\n\n\n범아공영\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27호\n\n\n\n휴대용 전화기(PT-65)\n\n\n\n범아실업\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80년\n\n\n\n28호\n\n\n\n자석식 전화기\n\n제천역\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29호\n\n\n\n표지부 선로전환기(신호등 포함)\n\n\n\n철도청\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30호\n\n\n\n금고(현금보관용)\n\n\n\n다케우치\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70년\n\n\n\n31호\n\n\n\n규정집(교통부소관국유재산취급규정)\n\n\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1954년\n\n\n\n32호\n\n\n\n관내지도(황해도 곡산군)\n\n\n\n교통부\n\n2012년 1월 31일 지정\n\n\n\n\n\n33호\n\n150px\n\n전기동차 1047-1247-1347-1147호\n\n구로차량사업소\n\n현대정공 철차사업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2020년 10월경 지정취소'''\n\n1987년\n\n\n\n34호\n\n\n\n통지낭\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35호\n\n\n\n전령자 완장\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0년대\n\n\n\n36호\n\n\n\n금낭\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37호\n\n\n\n개집표 가위\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38호\n\n\n\n2004년형 승차권 발매단말기(WTIM) 일체\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2004년\n\n\n\n39호\n\n\n\n2004년형 승차권 자동발매기 (ATIM)\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2004년\n\n\n\n40호\n\n150px\n\n장항선 원죽역 역명판(향나무 포함)\n\n원죽역\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0년대\n\n\n\n41호\n\n\n\n북전주역 명판\n\n북전주역\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8년\n\n\n\n42호\n\n\n\n가야역 역사 기록서\n\n\n\n가야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1~2001년\n\n\n\n43호\n\n\n\n거제역 역사 기록서\n\n\n\n거제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6~2006년\n\n\n\n44호\n\n\n\n군산역 역사 기록서\n\n\n\n군산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12년\n\n\n\n45호\n\n\n\n간치역 역사 기록서\n\n\n\n간치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5년\n\n\n\n46호\n\n\n\n남포역 역사 기록서\n\n\n\n남포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5년\n\n\n\n47호\n\n\n\n웅천역 역사 기록서\n\n\n\n웅천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5년\n\n\n\n48호\n\n\n\n웅천역 역세권 보고\n\n\n\n웅천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7년\n\n\n\n49호\n\n\n\n경주역 직원 사진첩\n\n\n\n경주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50호\n\n\n\n구열차운전시행절차\n\n\n\n교통성 등\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8년~\n\n\n\n51호\n\n\n\n열차운전시각표\n\n\n\n교통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2년~\n\n\n\n52호\n\n\n\n규정류찬(제3편 운수)\n\n\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1~1977년\n\n\n\n53호\n\n\n\n뱃지\n\n\n\n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0년대\n\n\n\n54호\n\n\n\n제모\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0년대\n\n\n\n55호\n\n\n\n하양역 화물상옥\n\n하양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0년\n\n\n\n56호\n\n150px\n\n덕산역사\n\n덕산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31년\n\n\n\n57호\n\n150px\n\n동래역사\n\n구.동래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34년\n\n\n\n58호\n\n150px\n\n포항역사\n\n구.포항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5년\n\n\n\n59호\n\n150px\n\n극락강역사\n\n극락강역\n\n교통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9년\n\n\n\n60호\n\n150px\n\n명봉역사\n\n명봉역\n\n교통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0년\n\n\n\n61호\n\n\n\n기장역 철도관사\n\n기장역\n\n조선총독부 철도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35년\n\n\n\n62호\n\n\n\n함평역 추모비\n\n함평역\n\n교통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1년\n\n\n\n63호\n\n\n\n모산건널목 사고 위령탑\n\n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71년\n\n\n\n64호\n\n\n\n일산역장 순직비\n\n일산역\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79년\n\n\n\n65호\n\n\n\n보선분소 직원 순직비\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67년\n\n\n\n66호\n\n\n\n선임시설장 직원 순직비\n\n\n\n동해시설관리사무소\n\n2013년 9월 5일 지정\n\n2002년\n\n\n\n67호\n\n\n\n기관사 직원 순직비\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99년\n\n\n\n68호\n\n\n\n통신 직원 순직비\n\n\n\n\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0년대\n\n\n\n69호\n\n\n\n기관사 직원 순직비\n\n\n\n교통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46년\n\n\n\n70호\n\n\n\n이리역 위령탑\n\n익산역\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77년\n\n\n\n71호\n\n\n\n명암터널 위령비\n\n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명서리\n\n교통부\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8년\n\n\n\n72호\n\n\n\n모터장착 핸드카\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73호\n\n\n\n토사적재트레일러(SLT9807-9809)\n\n\n\n태현\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99년\n\n\n\n74호\n\n\n\n초음파 레일탐상기(ASP7072)\n\n\n\n도쿄계기\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81년\n\n\n\n75호\n\n\n\n토오크렌치\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76호\n\n\n\n곡선정정계산기\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70년\n\n\n\n77호\n\n\n\n대곡자\n\n\n\n철도청\n\n2013년 9월 5일 지정\n\n\n\n\n\n78호\n\n\n\n휴대용전화기 상자 제작도\n\n\n\n교통성 등\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8년~\n\n\n\n79호\n\n\n\n한국교통동란기(속편)\n\n\n\n교통사편찬위원회\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3, 1956년\n\n\n\n80호\n\n\n\n철도창설 제59주년 기념 종합체육대회\n\n\n\n교통부부우회\n\n2013년 9월 5일 지정\n\n1958년\n\n\n", "현재 운행 중인 차량만을 기술하였다.\n\n* 기관차\n** 4400호대 디젤 기관차\n** 7300호대 디젤 기관차\n** 7400호대 디젤 기관차\n** 7500호대 디젤 기관차\n** 7600호대 디젤 기관차\n** 8000호대 전기 기관차\n** 8100호대 전기 기관차\n** 8200호대 전기 기관차\n** 8500호대 전기 기관차\n\n* 일반 여객 영업 동차\n** KTX(100000호대): 대한민국에 최초로 도입된 여객 영업용 고속철도 차량이다.\n** KTX-산천(110000호대): 기술 시험 차량인 HSR-350x를 토대로 국산화한 차량이다.\n** KTX-산천SRT : (120000호대)(130000호대)\n** KTX-산천(140000호대): 강릉선(원주~강릉 구간) 개통에 대비하여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이다.\n** KTX-이음(150000호대): 중앙선 서원주-봉양 구간과 도담-단양간 복선화, 안동역까지 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운행을 시작한 고속철도 차량이다. KTX-산천이 다녔던 강릉선도 운행중이다.\n** KTX-청룡(160000호대)\n** 200000호대 전동차: 누리로 등급이다.\n** 210000호대 전동차: 기존 새마을호를 대체하는 ITX-새마을 등급으로 2014년 5월 12일부터 운행되고 있다.\n** 220000호대 전동차: 기존 무궁화호를 대체하는 ITX-마음으로 2023년 9월 1일부터 운행하고 있다.\n** 368000호대 전동차: ITX-청춘 등급으로 경춘선에서만 운행하는 고상홈 대응 차량이다. 2012년 2월 28일 운행을 개시하였다.\n\n* 통근형 전동차\n** 수도권 전철\n*** 3000호대 전동차: 3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11000호대 · 312000호대 전동차: 1호선 금천구청 - 광명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19000호대 전동차: 1호선 (영등포 - 광명셔틀)구간에만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2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문산 - 도라산구간과 서울역 - 가좌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3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41000호대 전동차: 4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5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6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춘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7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강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39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서해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 부산 도시철도(부산·경남권)\n*** 381000호대 전동차: 동해선 광역전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n\n* 새마을호\n* 무궁화호\n* 발전차\n* 화차\n* 우편차\n", "철도청 시절이었던 1990년대까지는 종착역을 제외하면 별도의 음악 없이 육성으로만 녹음된 자동안내방송이 나왔으며 카세트테이프 방식으로 송출되었다. 2002년 이윤정, 브랜든 성우의 투입과 함께 1호선에 정차역, 환승역 음악이 처음 적용되었고 2003년 남은 국철, 3호선, 4호선, 분당선 전 구간에 성우 변경과 정차역, 환승역, 출발역 음악이 적용되었다. 철도청은 2002년 이후 카세트테이프 방식의 자동안내방송을 중단하였고, 2003년 전 구간 안내방송을 CD로 재녹음한 이래 CD 안내방송만을 사용했다. 2010년 이후에는 자동안내방송 시스템으로 방송한다.\n\n1993년부터 2003년까지는 김수희 성우가 정미나 성우가 광역전철과 통일호에서 각각 한국어와 영어 안내방송을 맡았다. 2002년 1호선 한정으로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의 안내방송으로 시험 변경되었고, 다음 해인 2003년 국철, 분당선, 3호선, 4호선 등 철도청 관할 광역전철 전 노선이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의 안내방송으로 변경되었다. 철도청은 KTX가 개통한 2004년에는 무궁화호, 새마을호의 안내방송까지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로 바꾸었는데 이는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외국인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영어 방송을 기존 한국인 성우에서 원어민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의 교체였다. 통일호 종운 이후 남은 통근열차에는 김수희, 유미나 성우의 안내방송이 2009년까지 적용되었다.\n=== 출발역, 정차역, 환승역, 종착역 시그널 음악 ===\n* 출발역\n** 광역철도, ITX-청춘: 한국철도공사 ID송\n**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마음: 봄소나기\n** KTX: 몽금포타령(대기음악), Jesus bleibet meine fleude(출발 후 방송음악)\n* 정차역\n** KTX: California Vibes\n** 광역철도, ITX-청춘: 미적용\n**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마음, 누리로: 어린달\n* 환승역\n** 광역철도: 얼씨구야\n** KTX,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ITX-마음: 미적용\n* 종착역\n** KTX\n*** 방송 전: Same road same reason\n*** 방송 후: 한국철도공사 로고송+Happiness\n** 광역철도, ITX-청춘: 한국철도공사 로고송\n**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누리로, ITX-마음: 날자꾸나\n\n==== 과거 ====\n* 출발역\n** 광역철도: 4음징글(~2002년), Last Mattinata (2003년~2010년)\n** KTX: Peaceful Rain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 꽃의 동화 (2006년~2008년), Let it be (2008년~2010년)\n** 무궁화호: What will I do (2002년~2004년), Dreamers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n**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2001년~2004년), Outlook (2004년~2008년), Dreamers (2008년~2011년)\n**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 방송, 4음징글\n* 정차역\n** 광역철도: 미적용\n** KTX: 4음 징글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2007년), 캐논변주곡 (2008년~2010년)\n** 무궁화호: 육성방송 (~2007년), 회전목마 (2008년~2010년),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1악장 (2012년~2014년)\n** 새마을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1악장 (2012년~2014년)\n**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 방송, 자동안내방송\n* 환승역\n** 광역철도: 육성방송, 뻐꾸기 효과음 (1993년~2003년) 모차르트 미뉴에트 (2002년~2010년)\n** KTX, 무궁화호, 새마을호, 통일호, 통근열차: 미적용\n* 종착역\n** 광역철도: 터키행진곡 (1993년~2003년) 모차르트 교향곡 17번곡 (2002~2010), 사랑을 전하세요 코레일(2008~2010)\n** KTX: Peaceful Rain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2007년), 캐논 변주곡 / Dreamers (2008년~2010년)\n** 무궁화호: What will I do (2002년~2004년), Let it be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n**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2001년~2007년), Let it be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n**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방송, 자동안내방송\n\n=== 성우 ===\n* 한국어\n** 광역철도: TTS\n** ITX 청춘: 조영미, 강희선 (승차권 공지사항)\n** 무궁화호, ITX-새마을: 조예신\n** KTX: 고구인\n** 누리로: 조예신(2016년 12월부터)\n* 영어\n** 광역철도: TTS\n**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KTX: 리사 켈리, 제니퍼 클라이드(ITX 청춘 승차권 공지사항)\n** 누리로: 리사 켈리(2016년 12월부터)\n==== 과거 ====\n* 한국어\n** 광역철도: 김수희 (1993년~2003년), 이윤정 (2002년~2010년) 한수림 (2008년~2010년)\n** 무궁화호: 이선 (2000년~2004년), 이윤정 (2004년~2012년)\n** 새마을호: 이선 (2000년~2004년), 이윤정 (2004년~2007년)\n** 누리로: 이윤정(2009년~2016년 11월)\n** 통일호 / 통근열차: 김수희 (1990년대~ 2009년)\n* 영어\n** 광역철도: 조미나 (1993년~2003년), 브랜든 (2002년~2010년)\n** 무궁화호: 브랜든 (2000년~2014년)\n** 새마을호: 브랜든 (2000년~2014년)\n** 누리로: 브랜든 (2009년~ 2016년 11월)\n** 통일호 / 통근열차: 조미나 (1990년대~2009년)\n\n=== 열차 접근음 ===\n* 상행선\n** 광역/도시철도: 실로폰\n** ITX 청춘: 실로폰\n** 수도권 전철 : 실로폰 멜로디\n* 하행선\n** 광역/도시철도: 트럼펫\n** ITX 청춘: 트럼펫\n** 수도권 전철 : 트럼펫 멜로디\n", "\n2006년 12월 착공한 '''한국철도공사''' 대전 본사는 2009년 8월 완공되었으며, 쌍둥이 빌딩 형식으로 서관에 '''한국철도공사''', 동관에 한국철도시설공단(現 국가철도공단)이 입주하였다. 본사는 연면적 23,507m2이며,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이다.\n", "* 임기는 3년이다.\n\n\n\n 대수 \n\n 이름 \n\n 임기 \n\n 비고\n\n\n\n1\n\n신광순\n\n2005년 1월 1일 ~ 2005년 5월 7일\n\n24대 철도청장\n\n\n\n2\n\n이철\n\n2005년 6월 29일 ~ 2008년 1월 25일\n\n 前 제12~14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 갑)\n\n\n\n대행\n\n박광석\n\n2008년 2월 ~ 2008년 6월\n\n \n\n\n\n3\n\n강경호\n\n2008년 6월 11일 ~ 2008년 11월 27일\n\n前 서울메트로 사장\n\n\n\n대행\n\n심혁윤\n\n2008년 11월 ~ 2009년 3월\n\n\n\n\n\n4\n\n허준영\n\n2009년 3월 19일 ~ 2011년 12월 22일\n\n12대 경찰청장\n\n\n\n대행\n\n팽정광\n\n2011년 12월 ~ 2012년 2월\n\n\n前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n\n\n\n5\n\n정창영\n\n2012년 2월 6일 ~ 2013년 6월 17일\n\n前 감사원 사무총장\n\n\n\n대행\n\n팽정광\n\n2013년 6월 18일 ~ 2013년 10월 1일\n\n前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n\n\n\n6\n\n최연혜\n\n2013년 10월 2일 ~ 2016년 3월 14일\n\n제20대 새누리당 국회의원(비례대표)첫 번째 여성 사장前 철도청 차장前 한국철도공사 부사장\n\n\n\n대행\n\n김영래\n\n2016년 3월 15일 ~ 2016년 5월 9일\n\n 前 한국철도공사 부사장前 한국철도차량엔지니어링 이사장\n\n\n\n7\n\n홍순만\n\n2016년 5월 10일 ~ 2017년 8월 4일\n\n前 인천광역시 경제부시장\n\n\n\n대행\n\n유재영\n\n2017년 8월 5일 ~ 2018년 2월 5일\n\n 한국철도공사 부사장\n\n\n\n8\n\n오영식\n\n2018년 2월 6일 ~ 2018년 12월 11일\n\n前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 前 제17, 19대 국회의원 (서울 강북 갑)\n\n\n\n대행\n\n정인수\n\n2018년 12월 12일 ~ 2019년 3월 26일\n\n 한국철도공사 부사장\n\n\n\n9\n\n손병석\n\n2019년 3월 27일 ~ 2021년 7월 16일\n\n前 국토교통부 철도국장前 국토교통부 제1차관\n\n\n\n대행\n\n정왕국\n\n2021년 7월 17일 ~ 2021년 11월 25일\n\n 한국철도공사 부사장\n\n\n\n10\n\n나희승\n\n2021년 11월 26일 ~ 2023년 3월 3일\n\n 前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원장\n\n\n\n대행\n\n고준영\n\n2023년 3월 4일 ~ 2023년 7월 23일\n\n前 한국철도공사 기술본부장, 한국철도공사 부사장\n\n\n\n11\n\n한문희\n\n2023년 7월 24일 ~ 현재\n\n 前 부산교통공사 사장\n\n\n\n\n", "=== 재무제표 ===\n(단위: 억원)\n\n\n\n\n\n구분\n\n2005년\n\n2010년\n\n2015년\n\n2020년\n\n2021년\n\n2022년\n\n\n\n자산\n\n140,554\n\n198,122\n\n178,690\n\n246,441\n\n245,937\n\n284,525\n\n\n\n부채\n\n57,994\n\n96,579\n\n132,078\n\n174,407\n\n181,452\n\n195,782\n\n\n\n자본\n\n82,560\n\n101,543\n\n46,611\n\n72,033\n\n64,485\n\n88,743\n\n\n\n\n=== 손익계산서 ===\n(단위: 억원)\n\n\n\n\n\n구분\n\n2005년\n\n2010년\n\n2015년\n\n2020년\n\n2021년\n\n2022년\n\n\n\n매출액\n\n34,029\n\n36,825\n\n52,207\n\n44,004\n\n51,427\n\n54,557\n\n\n\n영업이익\n\n(5,380)\n\n(5,287)\n\n1,143\n\n(11,684)\n\n(8,660)\n\n(4,363)\n\n\n\n당기순이익\n\n(6,069)\n\n3,807\n\n5,776\n\n(12,380)\n\n(11,081)\n\n(3,104)\n\n\n\n\n", "* 대한민국의 철도\n* 대한민국 철도청\n* 철도기관 공동사옥\n** 국가철도공단\n* 한국철도대학\n* 한국교통대학교\n* 한국철도기술연구원\n* 대전 코레일 FC\n* 국유 철도\n* 김행균\n* KTX 여승무원 고용 분쟁\n* 내일로\n* 코레일 멤버십 카드\n* 코레일체\n* 레일플러스\n", "\n", "\n* \n* 레츠코레일 웹사이트\n* \n* \n* \n* 한국철도TV - 유튜브\n\n\n\n\n\n\n \n분류:대한민국의 준시장형 공기업\n분류:대전광역시의 기업\n분류:2005년 설립된 기업\n분류:공공기관 (국토교통부 소관)\n분류:대한민국의 철도 기업\n분류:1963년 설립된 기업\n분류:대한민국의 브랜드\n분류:국영 철도 기업\n분류:대한민국의 공사\n분류:1963년 설립된 철도 기업" ]
'''한국철도공사'''(韓國鐵道公社, , 약칭 '''한국철도''' 또는 '''철도공사''' 또는 '''코레일'''())는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본사는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소제동 철도기관 공동사옥)에 있으며 한국철도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 * 2003년 7월 29일: 철도산업발전기본법 제정 * 2003년 12월 31일: 한국철도공사법 제정 * 2005년 1월 1일: '''한국철도공사 설립''' * 2005년 8월 1일: KTX특송서비스 본격 시행 * 2006년 7월 1일: 철도공사 조직개편(기능통합형 17개 지사체제, 3개 철도차량관리단) * 2006년 12월 22일: 철도교통관제센터 개통(5개 지역관제실을 관제센터로 통합) * 2009년 3월 26일: 간선형 전기동차(EMU, 150km/h) 최초 도입 * 2010년 3월 2일: 한국형고속철도 KTX-산천 상업운행 개시 * 2012년 2월 28일: 경춘선 준고속열차 ITX-청춘 운행개시 * 2014년 10월 25일: 전국호환교통카드 레일플러스 출시 * 2015년 3월 24일: KTX, 대한민국 브랜드스타 4년 연속 1위 달성 * 2015년 9월 24일: KTX 이용객 5억명 돌파 * 2017년 1월 11일: 광명역~사당역간 KTX 셔틀버스(8507번) 운행 개시 * 2018년 1월 17일: 광명역 도심공항터미널 영업 개시 * 2019년 1월 15일: 도심공항터미널 개장 1년 만에 이용객 8만 명 돌파 * 2020년 8월 18일: 코레일톡 승무원 호출서비스 제공 개시 * 2021년 1월 15일: KTX-이음 개통 * 2023년 9월 1일: ITX-마음 개통 * 2024년 5월 1일: KTX-청룡 개통 예정 * 본사: 7본부 10실 7단 62처 * 소속기관(현업): 8지역본부 및 4지역관리단 20부속기관 * 정원: 32,286명 (2020) === 본사 === * '''비서실''' * '''감사실''' ** 감사기획처 ** 종합감사처 ** 경영감사처 ** 청렴조사처 * '''안전기술총괄본부장''' ** 안전본부 *** 안전계획처 *** 산업안전처 *** 시민안전처 *** 안전분석처 *** 환경경영처 *** 비상계획처 *** 관제실 *** 철도교통관제센터 ** 차랑본부 ** 차량계획처 ** 고속차량처 ** 일반차량처 ** 전동차량처 ** 철도차량정비단 ** 차량기술센터 * 시설본부 ** 시설계획처 ** 선로관리처 ** 건설시설처 ** 철도시설안전합동혁신단 ** 고속시설사업단 * 전기본부 ** 전기계획처 ** 전철전력처 ** 통신처 ** 신호제어처 ** 고속전기사업단 ** 서울정보통신사무소 * '''부사장''' ** 법무실 * '''기획조정본부''' ** ESG경영처 ** 전략기획처 ** 기획예산처 ** 경영평가처 ** 재무경영실 *** 재무회계실 *** 자금물자처 *** 상생계약처 ** 회계통합센터 * 인재경영본부 ** 총무처 ** 인사기획처 ** 인사운영처 ** 노사상생처 ** 복지후생처 ** 인제개발원 * 디지털 융합본부 ** 디지털기획처 ** 디지털경영처(정보보안센터) ** IT운영센터 ** 철도연구원 * 여객사업본부 ** 여객계획처 ** 역운영처 ** 여객서비스처 ** 고객마케팅단 ** 열차운영단 ** 특별동차운영단 * 물류사업본부 ** 물류계획처 ** 물류마케팅처 ** 물류수송처 * 광역철도본부 ** 광역계획처 ** 광역마케팅처 ** 광역운영처 * 신성장 사업본부 ** 신성장기획처 ** 자산운영처 ** 신성장개발처 ** 해외남북철도사업단 *** 국제협력처 *** 해외사업1처 *** 해외사업2처 === 지역본부 === * 서울본부: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 * 수도권동부본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한천로 472 * 수도권서부본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영로 115 * 충북북부: 충청북도 제천시 의림대로 1 * 전북본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대로 153 * 전남본부: 전라남도 순천시 팔마로 119 * 광주본부: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 * 경북본부: 경상북도 영주시 시청로2번길 30 * 대구본부: 대구광역시 동구 동대구로 550 * 부산경남본부: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06 === 소속기관 === * 연구원: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 인재개발원: 경기도 의왕시 철도박물관로 157 * IT운영센터: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 철도빌딩 * 회계통합센터: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한국철도공사 9층 * 철도교통관제센터: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일로8길 150 * 시설장비사무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평촌2길 59 * 서울정보통신사무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21나길 7 철도회관 8층 * 경주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경주고속철도전기사무소: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경주역로 80 * 오송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오송고속철도전기사무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정중연제로 384 === 철도차량정비단 === *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08-1 * 대전철도차량정비단: 대전광역시 대덕구 벚꽃길 150 * 부산철도차량정비단: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신천대로 215 * 호남철도차량정비단: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봉로258번길 === 계열사 === * 코레일로지스: 철도물류수송 담당 * 코레일유통: 철도기반 전문유통기업 * 코레일관광개발: 철도관광, 승무사업 등 담당 * 코레일네트웍스: 철도역무, 회원관리, 주차장 등 담당 * 코레일테크: 철도차량, 시설 유지보수 담당 === 스포츠단 === * 대전 한국철도 축구단 * 한국철도 유도단 * 한국철도 사이클단 * 여객열차: KTX, KTX-산천, KTX-이음, ITX-마음, ITX-새마을, ITX-청춘,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운행. ** 관광열차: 정선아리랑열차, 백두대간협곡열차, 남도해양열차, 동해산타열차, 서해금빛열차, 레일크루즈 해랑 운행. * 광역철도 ** 수도권 전철: 1호선, 3호선, 4호선, 경의·중앙선, 경춘선, 과천선, 안산선, 일산선, 수인·분당선, 경강선, 서해선 광역전철 운행. ** 부산 도시철도: 동해선 광역전철 운행. * 물류 * 자산 개발 * 시설 유지·보수 * 버스: 광명역 - 인천국제공항 셔틀버스 6770번을 직영으로 운행. * 역 현황: 688개 (2023년 1월 1일 기준) ** 보통역: 337개 ** 배치간이역: 2개 ** 무배치간이역: 308개 ** 조차장: 2개 ** 신호장: 32개 ** 신호소: 7개 * 열차 운행 현황: 3,396회 (2022년 12월 31일 기준, 주중 편도기준) ** 고속열차: KTX 306회 ** 간선여객열차: 399회(ITX청춘 36회 포함) ** 광역철도: 2,510회 ** 화물열차: 181회 * 철도수송분담율 ** 여객: 12.8% (인 Km 기준, 2020년) ** 화물: 4.4% (톤 Km 기준, 2018년) * 영업거리: 4,131.2km (100개 노선) (2022년 12월 31일 기준) ** 고속선: 595.9km ** 준고속선: 326.1km ** 일반선: 3,209.2km ** 복선거리: 2,885.4km (69.8%) ** 전철거리: 3,231km (78.2%) === 보유 차량 === 여객객차 및 발전차,화차는 2022년 기준 나머지는 2024년 기준이다. * 고속열차: 137편성 1750량 ** KTX: 46편성 920량 ** KTX-산천: 24편성 240량 ** KTX-산천: 14편성 140량(사고로 1개 편성 폐차) ** SRT: 32편성 320량 ** KTX-이음: 19편성 114량 ** KTX-청룡: 2편성 16량 * ITX-새마을: 23편성 138량 * ITX-마음: 27편성 108량 * ITX-청춘: 8편성 64량 * 누리로: 7편성 28량 (사고로 1개 편성 폐차) * 통근형 전동차: 304편성 2486량 * 기관차 : 388량 ** 디젤 기관차: 214량 (4400호대: 59량, 7300호대~7500호대: 130량, 7600호대: 25량) ** 전기 기관차: 174량 (8000호대: 4량, 8100호대~8200호대: 83량, 8500호대: 87량) * 여객객차: 626량 * 발전차: 89량 * 화차: 9124량 한국철도공사에서는 2011년 2월 7일 "철도문화재 관리 지침"을 제정하여 사(社) 소유의 철도 유물을 철도기념물과 준철도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 철도기념물 === 철도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철도유물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다만, 문화재청장이 이미 등록한 문화재는 제외한다. '''번호''' '''사진''' '''명칭''' '''소재지''' '''제작자(단체)''' '''지정일''' '''제작시기''' 1호 증기기관차 터우 5형 철도인재개발원 서울공작창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5년 2호 디젤전기기관차 4102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6년 3호 디젤전기기관차 4201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7년 4호 디젤전기기관차 5025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7년 5호 디젤전기기관차 6230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7년 6호 디젤전기기관차 7001호 부산철도차량정비단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6년 7호 150px 전기기관차 8001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알스톰 외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2년 8호 새마을동차(PMC)126호(객차335호포함),새마을디젤동차(PMC)130호 청도역, 대전철도차량정비단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9년 9호 침대객차(무궁화) 2012년 1월 31일 지정 10호 전호등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대 11호 일면 후부 표지등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대 12호 입실역사 기록물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7년 13호 심천역사 기록물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5년~1957년 14호 기관사 제복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4년 15호 故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2년 16호 150px 영암선 개통기념비 승부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5년 17호 산업선전철준공기념비 동해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5년 18호 150px 경경선 전통기념비 단성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2년 19호 150px 경전선 전통기념비 구. 하동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8년 20호 모터카 MB8901 대동상공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6년 21호 궤도안정기(DTS9201: Dynamic Track Stabilizer) PLASSER & THEURER 2012년 1월 31일 지정 1992년 22호 수동핸드카 승부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 23호 완목식신호기등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0년 24호 통표폐색기(통표, 휴대기, 수수기 포함)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6년 25호 자석식 전화교환기 통감부 철도관리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07년 26호 공전식 전화교환기 철도박물관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5년 27호 완목식신호기(신호레바 포함) 주평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6년 28호 철도역사용지도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3년 29호 안성천안간 선로준공 종단면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2년 30호 선로조사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4년 31호 주주증권(조선철도주식회사) 조선철도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4년 32호 주주증권(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 조선경남철도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0년 33호 주주증권(경춘철도주식회사) 경춘철도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6년 34호 150px DEC형 특별동차 1호(대통령 전용) 철도박물관 니혼샤료 2013년 9월 5일 지정 1969년 35호 150px DEC형 특별동차 2호(경호용) 철도박물관 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85년 36호 150px 경복호(PMC형 특별동차 1호, 대통령 전용) 한국철도차량 2013년 9월 5일 지정 37호 경복호(PMC형 특별동차 2호, 경호용) 한국철도차량 2013년 9월 5일 지정 38호 업무용 동차 철도박물관 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90년 39호 150px 디젤전기기관차 7301호 부산철도차량정비단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89년 40호 전기기관차 8091호 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86년 41호 150px 경주역사 경주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6년 42호 150px 불국사역사 불국사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6년 43호 철도안전수송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4~1975년 44호 통표폐색기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45호 통표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46호 표지부 선로전환기(신호등 포함)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47호 완목식신호기 일체 삼화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8년 48호 완목식신호기 일체 장생포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대 49호 표지부 선로전환기 신호등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50호 정규도 및 표준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 준철도기념물 === 향후 역사적, 기술적, 교육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번호''' '''사진''' '''명칭''' '''소재지''' '''제작자(단체)''' '''지정일''' '''제작시기''' 1호 객차(비둘기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인천공작창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3년 2호 객차(통일호) 국립대전현충원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1년 3호 수화물용저울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대 4호 승차권 날짜기계(일부인) 신성기전 2012년 1월 31일 지정 5호 승차권 개표가위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6호 집표도장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7호 승차권 체송함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8호 150px 김유정역사(구 신남역) 김유정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9년 9호 150px 영월역사 영월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6년 10호 풍기역 급수탑 풍기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2년 11호 150px 화본역 급수탑 화본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7년 12호 150px 수원역 급수탑 수원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1년 13호 150px 수원역 급수탑 수원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1년 14호 보성역 급수탑 보성역 만철 경성관리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2년 15호 순천역 급수탑 순천역 만철 경성관리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2년 16호 경주역 급수탑 경주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4년 17호 철도시발기념지비 노량진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5년 18호 영등포역 위령비 철도인재개발원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8년 19호 테르밋트 용접기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0호 톱(침목절단용)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1호 단고마와 켄트게이지 제천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2호 선로게이지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3호 수동 레일천공기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4호 트렉젝크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99년 25호 모터카 TMM9401 '''2021년 고철매각''' 게이즈마 2012년 1월 31일 지정 1994년 26호 휴대용 전화기(PT-93) 범아공영 2012년 1월 31일 지정 27호 휴대용 전화기(PT-65) 범아실업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0년 28호 자석식 전화기 제천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9호 표지부 선로전환기(신호등 포함)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30호 금고(현금보관용) 다케우치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0년 31호 규정집(교통부소관국유재산취급규정)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4년 32호 관내지도(황해도 곡산군)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33호 150px 전기동차 1047-1247-1347-1147호 구로차량사업소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2020년 10월경 지정취소''' 1987년 34호 통지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35호 전령자 완장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36호 금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37호 개집표 가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38호 2004년형 승차권 발매단말기(WTIM) 일체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2004년 39호 2004년형 승차권 자동발매기 (ATIM)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2004년 40호 150px 장항선 원죽역 역명판(향나무 포함) 원죽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41호 북전주역 명판 북전주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8년 42호 가야역 역사 기록서 가야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1~2001년 43호 거제역 역사 기록서 거제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6~2006년 44호 군산역 역사 기록서 군산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12년 45호 간치역 역사 기록서 간치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46호 남포역 역사 기록서 남포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47호 웅천역 역사 기록서 웅천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48호 웅천역 역세권 보고 웅천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7년 49호 경주역 직원 사진첩 경주역 2013년 9월 5일 지정 50호 구열차운전시행절차 교통성 등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51호 열차운전시각표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2년~ 52호 규정류찬(제3편 운수)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1~1977년 53호 뱃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대 54호 제모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55호 하양역 화물상옥 하양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0년 56호 150px 덕산역사 덕산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1년 57호 150px 동래역사 구.동래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4년 58호 150px 포항역사 구.포항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59호 150px 극락강역사 극락강역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9년 60호 150px 명봉역사 명봉역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 61호 기장역 철도관사 기장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5년 62호 함평역 추모비 함평역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1년 63호 모산건널목 사고 위령탑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1년 64호 일산역장 순직비 일산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9년 65호 보선분소 직원 순직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7년 66호 선임시설장 직원 순직비 동해시설관리사무소 2013년 9월 5일 지정 2002년 67호 기관사 직원 순직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99년 68호 통신 직원 순직비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대 69호 기관사 직원 순직비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46년 70호 이리역 위령탑 익산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7년 71호 명암터널 위령비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명서리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72호 모터장착 핸드카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73호 토사적재트레일러(SLT9807-9809) 태현 2013년 9월 5일 지정 1999년 74호 초음파 레일탐상기(ASP7072) 도쿄계기 2013년 9월 5일 지정 1981년 75호 토오크렌치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76호 곡선정정계산기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0년 77호 대곡자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78호 휴대용전화기 상자 제작도 교통성 등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79호 한국교통동란기(속편) 교통사편찬위원회 2013년 9월 5일 지정 1953, 1956년 80호 철도창설 제59주년 기념 종합체육대회 교통부부우회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현재 운행 중인 차량만을 기술하였다. * 기관차 ** 4400호대 디젤 기관차 ** 7300호대 디젤 기관차 ** 7400호대 디젤 기관차 ** 7500호대 디젤 기관차 ** 7600호대 디젤 기관차 ** 8000호대 전기 기관차 ** 8100호대 전기 기관차 ** 8200호대 전기 기관차 ** 8500호대 전기 기관차 * 일반 여객 영업 동차 ** KTX(100000호대): 대한민국에 최초로 도입된 여객 영업용 고속철도 차량이다. ** KTX-산천(110000호대): 기술 시험 차량인 HSR-350x를 토대로 국산화한 차량이다. ** KTX-산천SRT : (120000호대)(130000호대) ** KTX-산천(140000호대): 강릉선(원주~강릉 구간) 개통에 대비하여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이다. ** KTX-이음(150000호대): 중앙선 서원주-봉양 구간과 도담-단양간 복선화, 안동역까지 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운행을 시작한 고속철도 차량이다. KTX-산천이 다녔던 강릉선도 운행중이다. ** KTX-청룡(160000호대) ** 200000호대 전동차: 누리로 등급이다. ** 210000호대 전동차: 기존 새마을호를 대체하는 ITX-새마을 등급으로 2014년 5월 12일부터 운행되고 있다. ** 220000호대 전동차: 기존 무궁화호를 대체하는 ITX-마음으로 2023년 9월 1일부터 운행하고 있다. ** 368000호대 전동차: ITX-청춘 등급으로 경춘선에서만 운행하는 고상홈 대응 차량이다. 2012년 2월 28일 운행을 개시하였다. * 통근형 전동차 ** 수도권 전철 *** 3000호대 전동차: 3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11000호대 · 312000호대 전동차: 1호선 금천구청 - 광명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19000호대 전동차: 1호선 (영등포 - 광명셔틀)구간에만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2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문산 - 도라산구간과 서울역 - 가좌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3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41000호대 전동차: 4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5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6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춘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7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강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9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서해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부산 도시철도(부산·경남권) *** 381000호대 전동차: 동해선 광역전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새마을호 * 무궁화호 * 발전차 * 화차 * 우편차 철도청 시절이었던 1990년대까지는 종착역을 제외하면 별도의 음악 없이 육성으로만 녹음된 자동안내방송이 나왔으며 카세트테이프 방식으로 송출되었다. 2002년 이윤정, 브랜든 성우의 투입과 함께 1호선에 정차역, 환승역 음악이 처음 적용되었고 2003년 남은 국철, 3호선, 4호선, 분당선 전 구간에 성우 변경과 정차역, 환승역, 출발역 음악이 적용되었다. 철도청은 2002년 이후 카세트테이프 방식의 자동안내방송을 중단하였고, 2003년 전 구간 안내방송을 CD로 재녹음한 이래 CD 안내방송만을 사용했다. 2010년 이후에는 자동안내방송 시스템으로 방송한다. 1993년부터 2003년까지는 김수희 성우가 정미나 성우가 광역전철과 통일호에서 각각 한국어와 영어 안내방송을 맡았다. 2002년 1호선 한정으로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의 안내방송으로 시험 변경되었고, 다음 해인 2003년 국철, 분당선, 3호선, 4호선 등 철도청 관할 광역전철 전 노선이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의 안내방송으로 변경되었다. 철도청은 KTX가 개통한 2004년에는 무궁화호, 새마을호의 안내방송까지 이윤정 성우와 브랜든 성우로 바꾸었는데 이는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외국인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영어 방송을 기존 한국인 성우에서 원어민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의 교체였다. 통일호 종운 이후 남은 통근열차에는 김수희, 유미나 성우의 안내방송이 2009년까지 적용되었다. === 출발역, 정차역, 환승역, 종착역 시그널 음악 === * 출발역 ** 광역철도, ITX-청춘: 한국철도공사 ID송 **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마음: 봄소나기 ** KTX: 몽금포타령(대기음악), Jesus bleibet meine fleude(출발 후 방송음악) * 정차역 ** KTX: California Vibes ** 광역철도, ITX-청춘: 미적용 **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마음, 누리로: 어린달 * 환승역 ** 광역철도: 얼씨구야 ** KTX,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ITX-마음: 미적용 * 종착역 ** KTX *** 방송 전: Same road same reason *** 방송 후: 한국철도공사 로고송+Happiness ** 광역철도, ITX-청춘: 한국철도공사 로고송 **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누리로, ITX-마음: 날자꾸나 ==== 과거 ==== * 출발역 ** 광역철도: 4음징글(~2002년), Last Mattinata (2003년~2010년) ** KTX: Peaceful Rain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 꽃의 동화 (2006년~2008년), Let it be (2008년~2010년) ** 무궁화호: What will I do (2002년~2004년), Dreamers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 **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2001년~2004년), Outlook (2004년~2008년), Dreamers (2008년~2011년) **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 방송, 4음징글 * 정차역 ** 광역철도: 미적용 ** KTX: 4음 징글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2007년), 캐논변주곡 (2008년~2010년) ** 무궁화호: 육성방송 (~2007년), 회전목마 (2008년~2010년),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1악장 (2012년~2014년) ** 새마을호: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1악장 (2012년~2014년) **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 방송, 자동안내방송 * 환승역 ** 광역철도: 육성방송, 뻐꾸기 효과음 (1993년~2003년) 모차르트 미뉴에트 (2002년~2010년) ** KTX, 무궁화호, 새마을호, 통일호, 통근열차: 미적용 * 종착역 ** 광역철도: 터키행진곡 (1993년~2003년) 모차르트 교향곡 17번곡 (2002~2010), 사랑을 전하세요 코레일(2008~2010) ** KTX: Peaceful Rain (2004년), 가야금 산조 (2005년~2007년), 캐논 변주곡 / Dreamers (2008년~2010년) ** 무궁화호: What will I do (2002년~2004년), Let it be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 ** 새마을호: Looking for you (2001년~2007년), Let it be (2008년~2012년), 국민의 철도 코레일 (2012년~2014년) ** 통일호, 통근열차: 육성방송, 자동안내방송 === 성우 === * 한국어 ** 광역철도: TTS ** ITX 청춘: 조영미, 강희선 (승차권 공지사항) ** 무궁화호, ITX-새마을: 조예신 ** KTX: 고구인 ** 누리로: 조예신(2016년 12월부터) * 영어 ** 광역철도: TTS **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KTX: 리사 켈리, 제니퍼 클라이드(ITX 청춘 승차권 공지사항) ** 누리로: 리사 켈리(2016년 12월부터) ==== 과거 ==== * 한국어 ** 광역철도: 김수희 (1993년~2003년), 이윤정 (2002년~2010년) 한수림 (2008년~2010년) ** 무궁화호: 이선 (2000년~2004년), 이윤정 (2004년~2012년) ** 새마을호: 이선 (2000년~2004년), 이윤정 (2004년~2007년) ** 누리로: 이윤정(2009년~2016년 11월) ** 통일호 / 통근열차: 김수희 (1990년대~ 2009년) * 영어 ** 광역철도: 조미나 (1993년~2003년), 브랜든 (2002년~2010년) ** 무궁화호: 브랜든 (2000년~2014년) ** 새마을호: 브랜든 (2000년~2014년) ** 누리로: 브랜든 (2009년~ 2016년 11월) ** 통일호 / 통근열차: 조미나 (1990년대~2009년) === 열차 접근음 === * 상행선 ** 광역/도시철도: 실로폰 ** ITX 청춘: 실로폰 ** 수도권 전철 : 실로폰 멜로디 * 하행선 ** 광역/도시철도: 트럼펫 ** ITX 청춘: 트럼펫 ** 수도권 전철 : 트럼펫 멜로디 2006년 12월 착공한 '''한국철도공사''' 대전 본사는 2009년 8월 완공되었으며, 쌍둥이 빌딩 형식으로 서관에 '''한국철도공사''', 동관에 한국철도시설공단(現 국가철도공단)이 입주하였다. 본사는 연면적 23,507m2이며,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이다. * 임기는 3년이다. 대수 이름 임기 비고 1 신광순 2005년 1월 1일 ~ 2005년 5월 7일 24대 철도청장 2 이철 2005년 6월 29일 ~ 2008년 1월 25일 前 제12~14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 갑) 대행 박광석 2008년 2월 ~ 2008년 6월 3 강경호 2008년 6월 11일 ~ 2008년 11월 27일 前 서울메트로 사장 대행 심혁윤 2008년 11월 ~ 2009년 3월 4 허준영 2009년 3월 19일 ~ 2011년 12월 22일 12대 경찰청장 대행 팽정광 2011년 12월 ~ 2012년 2월 前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 5 정창영 2012년 2월 6일 ~ 2013년 6월 17일 前 감사원 사무총장 대행 팽정광 2013년 6월 18일 ~ 2013년 10월 1일 前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 6 최연혜 2013년 10월 2일 ~ 2016년 3월 14일 제20대 새누리당 국회의원(비례대표)첫 번째 여성 사장前 철도청 차장前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대행 김영래 2016년 3월 15일 ~ 2016년 5월 9일 前 한국철도공사 부사장前 한국철도차량엔지니어링 이사장 7 홍순만 2016년 5월 10일 ~ 2017년 8월 4일 前 인천광역시 경제부시장 대행 유재영 2017년 8월 5일 ~ 2018년 2월 5일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8 오영식 2018년 2월 6일 ~ 2018년 12월 11일 前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 前 제17, 19대 국회의원 (서울 강북 갑) 대행 정인수 2018년 12월 12일 ~ 2019년 3월 26일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9 손병석 2019년 3월 27일 ~ 2021년 7월 16일 前 국토교통부 철도국장前 국토교통부 제1차관 대행 정왕국 2021년 7월 17일 ~ 2021년 11월 25일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10 나희승 2021년 11월 26일 ~ 2023년 3월 3일 前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원장 대행 고준영 2023년 3월 4일 ~ 2023년 7월 23일 前 한국철도공사 기술본부장,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11 한문희 2023년 7월 24일 ~ 현재 前 부산교통공사 사장 === 재무제표 === (단위: 억원) 구분 2005년 2010년 2015년 2020년 2021년 2022년 자산 140,554 198,122 178,690 246,441 245,937 284,525 부채 57,994 96,579 132,078 174,407 181,452 195,782 자본 82,560 101,543 46,611 72,033 64,485 88,743 === 손익계산서 === (단위: 억원) 구분 2005년 2010년 2015년 2020년 2021년 2022년 매출액 34,029 36,825 52,207 44,004 51,427 54,557 영업이익 (5,380) (5,287) 1,143 (11,684) (8,660) (4,363) 당기순이익 (6,069) 3,807 5,776 (12,380) (11,081) (3,104) * 대한민국의 철도 * 대한민국 철도청 * 철도기관 공동사옥 ** 국가철도공단 * 한국철도대학 * 한국교통대학교 * 한국철도기술연구원 * 대전 코레일 FC * 국유 철도 * 김행균 * KTX 여승무원 고용 분쟁 * 내일로 * 코레일 멤버십 카드 * 코레일체 * 레일플러스 * * 레츠코레일 웹사이트 * * * * 한국철도TV - 유튜브 분류:대한민국의 준시장형 공기업 분류:대전광역시의 기업 분류:2005년 설립된 기업 분류:공공기관 (국토교통부 소관) 분류:대한민국의 철도 기업 분류:1963년 설립된 기업 분류:대한민국의 브랜드 분류:국영 철도 기업 분류:대한민국의 공사 분류:1963년 설립된 철도 기업
대한민국의 교통
[ "Introduction", "도로 교통", "철도 교통", "해상 교통", "항공 교통", "각주" ]
[ "\n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교통'''에 대해 서술한다.\n", "한국의 도로 교통은 삼국시대의 역원제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경흥, 평해(지금의 울진), 동래, 제주, 강화 등 6개 방면으로 발달되었다. 1900년대 초에 옛길이 신작로(새길, 포장로)로 바뀌고 1911년에 관용 자동차가 도입되며 1912년 택시와 버스가, 1928년부터는 화물자동차가 등장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 버스가 등장하고, 이후로 전국 각지에 고속 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 거의 모든 도시 내부 및 도시간의 주요한 대중 교통 수단으로 각종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n\n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소비패턴이 변화함에 따라 자동차의 보유대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도로화율은 점차 둔화되고 있어 심각한 적체·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율 또한 해마다 질·양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총 1,449만 6,844대로 1998년 1,046만 9,599대에 비해 약 1.4배, 2000년 대비 1.2배 증가를 나타냈다. 업종별로는 영업용이 74만 5,912대로 전체 차량의 5.1%를, 비영업용이 1,375만 932대로 94.9%를 차지하고 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020만 2,813대, 버스 125만 6,728대, 화물자동차 299만 3,280대, 특수차량 4만 4,023대로 나타났다. 동년기준으로 운수업체 수는 총 29만 8,148사이며, 종별로는 시내버스 390사, 시외버스 159사, 고속버스 21사, 전세버스 462사, 택시 1,832사, 노선화물 23사, 구역화물 등화물 1,305사, 용달 605사, 장의자동차 404사 등이다. 운수업체 종사자수는 총 54만 6,214명이며, 이 중 운전자는 버스업종 7만8,823명, 택시업종 25만3,370명, 화물업종 16만명이고 정비원은 1만2,477명, 기타 3만8,898명이다.\n\n===도로===\n\n대한민국에서는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 등의 7종의 종류로 도로를 구분하며, 나열한 순서대로 등급을 설정하고 있다. 도로의 정의에 관해서는 《도로법》을, 도로에서의 안전 수칙 등과 관련해서는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n\n===버스 교통===\n\n대한민국의 버스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를 일컫는다. 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운송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시내 버스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현재 각급 버스의 인킬로는 48003105384.3725명킬로미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 기업체는 경기고속으로, 577개의 일반 시내버스, 15개의 광역버스, 340개의 시외버스, 56개의 고속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n\n===택시 교통===\n\n대한민국의 경우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하면, 택시는 정식적으로는 택시여객 자동차운송사업이라 말하며, 1개의 계약으로 승차 정원 6명 이하의 자동차를 이용, 승객을 운송하는 사업이라고 하며 특정한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택시를 운행할 수 없다. 운수회사에 속한 회사택시와 개인이 영업하는 개인택시가 있는데, 개인택시의 경우 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에 맞아야 한다. 지역별로 택시 색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n특히 2009년 12월4일 하이브리드택시가 서울에 도입되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모든 택시를 하이브리드카로 바꿀 예정이다.\n", "\n전통적인 장거리 대량운송 수단인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화, 서비스의 부재, 경영의 진부화 등으로 한때 심각한 재정악화와 퇴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지속적인 노후시설대체, 서비스개선, 경영합리화 작업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궤도 총연장 6,819km로 영업노선이 45개 노선에 3,101.2km고, 이 중 복선화율은 28.4%, 전철화율은 18%이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철도수송장비는 동력차가 총 2,851량으로 디젤기관차 482량, 전기기관차 96량, 디젤동차 610량, 전기동차 1,662량, 증기기관차 1량이며, 객차는 총 1,678량, 화차는 1만 4,113량으로 역(驛)은 총 631개이다.\n\n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은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거나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현재 9개의 광역전철과 지하철 노선이 있으며, 1개 노선이 건설 중, 여러 개의 경전철을 추가로 계획 중이다. 이 노선은 현재 한국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세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도권 지역의 것까지 합치면 현재 운영되고만 있는 것만 해도 11개, 지선과 건설되고 있는 것을 합치면 26개나 된다. 또한 수도권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지하철들이 건설되어 인천광역시 (2개 노선), 대구광역시 (3개 노선), 대전광역시 (1개 노선), 부산광역시 (6개 노선), 광주광역시 (1개 노선) 등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각각의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단 부산에 있는 부산김해경전철은 민간기업이 운영한다\n\n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코레일이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증기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몇몇 지방도시에서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다만 협궤 철도는 수인선이 공식적으로는 영업 정지 상태여서 철도 통계에는 존재한다. (현재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표준궤로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n\n=== 전차 ===\n과거에는 서울전차, 부산전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선되었다.\n", "\n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n", "\n\n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공항이 국내외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6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3월에 민영화 정책으로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1970년대 여객·수출입화물의 증가로 본궤도에 올라 고속성장을 지속해온 업종이었다. 1988년 대한항공의 독점을 마무리하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 항공이 국내선에 취역함으로써(국제선취역은 1990년 1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였다. 2002년 말 현재 항공기보유대수는 총 295대로 수송기 183대, 경비행기 28대, 헬리콥터 60대이었다. 국제항공노선은 26개국 63개 도시에 79개(16개 중복노선)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이 중 여객노선은 69개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n\n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진에어,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등 많은 저가항공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n\n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의 항공 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n", "\n\n\n\n\n " ]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교통'''에 대해 서술한다. 한국의 도로 교통은 삼국시대의 역원제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경흥, 평해(지금의 울진), 동래, 제주, 강화 등 6개 방면으로 발달되었다. 1900년대 초에 옛길이 신작로(새길, 포장로)로 바뀌고 1911년에 관용 자동차가 도입되며 1912년 택시와 버스가, 1928년부터는 화물자동차가 등장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 버스가 등장하고, 이후로 전국 각지에 고속 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 거의 모든 도시 내부 및 도시간의 주요한 대중 교통 수단으로 각종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소비패턴이 변화함에 따라 자동차의 보유대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도로화율은 점차 둔화되고 있어 심각한 적체·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율 또한 해마다 질·양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총 1,449만 6,844대로 1998년 1,046만 9,599대에 비해 약 1.4배, 2000년 대비 1.2배 증가를 나타냈다. 업종별로는 영업용이 74만 5,912대로 전체 차량의 5.1%를, 비영업용이 1,375만 932대로 94.9%를 차지하고 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020만 2,813대, 버스 125만 6,728대, 화물자동차 299만 3,280대, 특수차량 4만 4,023대로 나타났다. 동년기준으로 운수업체 수는 총 29만 8,148사이며, 종별로는 시내버스 390사, 시외버스 159사, 고속버스 21사, 전세버스 462사, 택시 1,832사, 노선화물 23사, 구역화물 등화물 1,305사, 용달 605사, 장의자동차 404사 등이다. 운수업체 종사자수는 총 54만 6,214명이며, 이 중 운전자는 버스업종 7만8,823명, 택시업종 25만3,370명, 화물업종 16만명이고 정비원은 1만2,477명, 기타 3만8,898명이다. ===도로=== 대한민국에서는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 등의 7종의 종류로 도로를 구분하며, 나열한 순서대로 등급을 설정하고 있다. 도로의 정의에 관해서는 《도로법》을, 도로에서의 안전 수칙 등과 관련해서는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버스 교통=== 대한민국의 버스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를 일컫는다. 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운송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시내 버스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현재 각급 버스의 인킬로는 48003105384.3725명킬로미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 기업체는 경기고속으로, 577개의 일반 시내버스, 15개의 광역버스, 340개의 시외버스, 56개의 고속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택시 교통=== 대한민국의 경우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하면, 택시는 정식적으로는 택시여객 자동차운송사업이라 말하며, 1개의 계약으로 승차 정원 6명 이하의 자동차를 이용, 승객을 운송하는 사업이라고 하며 특정한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택시를 운행할 수 없다. 운수회사에 속한 회사택시와 개인이 영업하는 개인택시가 있는데, 개인택시의 경우 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에 맞아야 한다. 지역별로 택시 색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2009년 12월4일 하이브리드택시가 서울에 도입되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모든 택시를 하이브리드카로 바꿀 예정이다. 전통적인 장거리 대량운송 수단인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화, 서비스의 부재, 경영의 진부화 등으로 한때 심각한 재정악화와 퇴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지속적인 노후시설대체, 서비스개선, 경영합리화 작업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궤도 총연장 6,819km로 영업노선이 45개 노선에 3,101.2km고, 이 중 복선화율은 28.4%, 전철화율은 18%이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철도수송장비는 동력차가 총 2,851량으로 디젤기관차 482량, 전기기관차 96량, 디젤동차 610량, 전기동차 1,662량, 증기기관차 1량이며, 객차는 총 1,678량, 화차는 1만 4,113량으로 역(驛)은 총 631개이다.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은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거나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현재 9개의 광역전철과 지하철 노선이 있으며, 1개 노선이 건설 중, 여러 개의 경전철을 추가로 계획 중이다. 이 노선은 현재 한국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세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도권 지역의 것까지 합치면 현재 운영되고만 있는 것만 해도 11개, 지선과 건설되고 있는 것을 합치면 26개나 된다. 또한 수도권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지하철들이 건설되어 인천광역시 (2개 노선), 대구광역시 (3개 노선), 대전광역시 (1개 노선), 부산광역시 (6개 노선), 광주광역시 (1개 노선) 등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각각의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단 부산에 있는 부산김해경전철은 민간기업이 운영한다 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코레일이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증기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몇몇 지방도시에서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다만 협궤 철도는 수인선이 공식적으로는 영업 정지 상태여서 철도 통계에는 존재한다. (현재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표준궤로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 전차 === 과거에는 서울전차, 부산전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선되었다.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공항이 국내외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6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3월에 민영화 정책으로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1970년대 여객·수출입화물의 증가로 본궤도에 올라 고속성장을 지속해온 업종이었다. 1988년 대한항공의 독점을 마무리하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 항공이 국내선에 취역함으로써(국제선취역은 1990년 1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였다. 2002년 말 현재 항공기보유대수는 총 295대로 수송기 183대, 경비행기 28대, 헬리콥터 60대이었다. 국제항공노선은 26개국 63개 도시에 79개(16개 중복노선)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이 중 여객노선은 69개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진에어,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등 많은 저가항공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의 항공 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존 맥스웰 쿳시
[ "Introduction", "경력", "작품", "각주" ]
[ "\n존 맥스웰 쿳시\n'''존 맥스웰 쿳시'''(, 1940년 2월 9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n",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이며, 아프리칸스어도 사용했으나, 영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작품도 영어로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영어식인 존 맥스웰 쿳시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n\n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대 초 영국으로 이주하여 IBM을 거쳐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인 IC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이 때의 경험은 《Youth》(2002)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 1971년 뉴욕주 버펄로의 뉴욕 주립 대학교 버펄로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버펄로에서 첫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을 착수하였다. 그 사이 그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허락되지 않자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2001년까지 재직했다.\n\n1974년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등단한 이후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야만스러운 서구 문명에 그 근본 원인을 찾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83년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로 영어권 작가에게 수여하는 영국의 유명 문학상인 맨 부커 상을 받았다. 1999년 《추락(Disgrace)》으로 다시 부커상을 받아,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부커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문학 활동을 한 이래 거의 은둔하며 지냈기 때문에 두 차례 모두 수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커먼웰스상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상, 프랑스의 페미나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n\n두 차례 부커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외자의 놀라운 관여를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였으며,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네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는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정년퇴임 후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영문학부 명예 연구원이 되었고, 2003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교환교수를 겸임했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도 취득했다.\n", "* 1974 《어둠의 땅(Dusklands)》 \n* 1977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n* 1980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 \n* 1983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 \n* 1986 《포(Foe)》 \n* 1990 《철의 시대(Age of Iron)》 \n* 1994 《페테르부르크의 대가(The Master of Petersburg)》 \n* 1999 《추락(Disgrace)》 \n* 1999 《동물로 산다는 것(The Lives of Animals)》 \n* 1997 《소년시절(Boyhood: Scenes from Provincial Life)》 \n* 2002 《Youth: Scenes from Provincial Life II》\n* 2003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 \n* 200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Diary of a Bad Year)》 \n* 2009 《슬로우 맨(Slow Man)》 \n", "\n\n\n\n\n\n\n\n분류:1940년 출생\n분류:살아있는 사람\n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설가\n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n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n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노벨상 수상자\n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노벨상 수상자\n분류: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동문\n분류:케이프타운 대학교 동문\n분류:하버드 대학교 교수\n분류:맨부커상 수상자\n분류:뉴욕 주립 대학교 교수\n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n분류:네덜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n분류:독일계 오스트레일리아인\n분류:폴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n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n분류: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n분류:독일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n분류:폴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n분류:미국에 거주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인\n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무신론자\n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무신론자\n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번역가\n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간 사람" ]
존 맥스웰 쿳시 '''존 맥스웰 쿳시'''(, 1940년 2월 9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이며, 아프리칸스어도 사용했으나, 영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작품도 영어로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영어식인 존 맥스웰 쿳시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대 초 영국으로 이주하여 IBM을 거쳐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인 IC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이 때의 경험은 《Youth》(2002)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 1971년 뉴욕주 버펄로의 뉴욕 주립 대학교 버펄로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버펄로에서 첫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을 착수하였다. 그 사이 그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허락되지 않자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2001년까지 재직했다. 1974년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등단한 이후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야만스러운 서구 문명에 그 근본 원인을 찾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83년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로 영어권 작가에게 수여하는 영국의 유명 문학상인 맨 부커 상을 받았다. 1999년 《추락(Disgrace)》으로 다시 부커상을 받아,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부커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문학 활동을 한 이래 거의 은둔하며 지냈기 때문에 두 차례 모두 수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커먼웰스상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상, 프랑스의 페미나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부커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외자의 놀라운 관여를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였으며,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네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는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정년퇴임 후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영문학부 명예 연구원이 되었고, 2003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교환교수를 겸임했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도 취득했다. * 1974 《어둠의 땅(Dusklands)》 * 1977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 * 1980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 * 1983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 * 1986 《포(Foe)》 * 1990 《철의 시대(Age of Iron)》 * 1994 《페테르부르크의 대가(The Master of Petersburg)》 * 1999 《추락(Disgrace)》 * 1999 《동물로 산다는 것(The Lives of Animals)》 * 1997 《소년시절(Boyhood: Scenes from Provincial Life)》 * 2002 《Youth: Scenes from Provincial Life II》 * 2003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 * 200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Diary of a Bad Year)》 * 2009 《슬로우 맨(Slow Man)》 분류:1940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설가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동문 분류:케이프타운 대학교 동문 분류:하버드 대학교 교수 분류:맨부커상 수상자 분류:뉴욕 주립 대학교 교수 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 분류:네덜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독일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폴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독일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폴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미국에 거주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무신론자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무신론자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번역가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간 사람
수도권
[ "Introduction", "세계의 수도권", "같이 보기", "각주" ]
[ "\n\n'''수도권'''(首都圈, ) 또는 '''수도 지역'''(首都 地域), '''수도 지구'''(首都 地區)란 수도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주변 도시권 지역을 하나로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각국의 주요 기능(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다. 또한 수도권은 어느 한 나라의 수도와 함께 가까운 지역이 수도권에 포함된다. 그리고 수도권이나 수도에는 법정구역이 대부분 있다.\n\n수도권이 아닌 지역은 '''비수도권'''으로 부른다.\n", "* 수도권: 도쿄도 등 간토 지방(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지바현, 사이타마현 포함)\n* 수도권: 베이징, 톈진 및 허베이성 일원\n* 수도권: 타이베이시 및 신베이시 일원\n* 수도권: 메트로 마닐라 및 라구나 주, 카비테 주, 리살 주, 불라칸 주 일원\n* 수도권: 자와섬 일원\n* 수도권: 쿠알라룸푸르 및 푸트라자야, 슬랑오르주 일원\n* 수도권: 델리 국가수도직할구 경제권 (뉴델리와 델리 일원)\n* 수도권: 이슬라마바드 수도권\n* 수도권: 모스크바와 모스크바주 일원(모스콥스카야 지역 포함)\n* 수도권: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n* 수도권: 브라질리아 시 일원\n* 수도권: 멕시코 시티 및 멕시코주, 모렐로스주 일원\n* 수도권: 국가 지구\n* 수도권: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n* 수도권: 워싱턴 D.C,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웨스트버지니아주 일원\n* 수도권: 오타와 및 가티노 일원\n* 수도권: 그레이터 런던\n* 수도권: 일드프랑스\n* 수도권: 베를린 및 브란덴부르크주 일원\n* 수도권: 베른주 북서부 일원\n* 수도권: 브뤼셀 수도 지역\n* 수도권: 덴마크 수도 지역\n* 수도권: 알 카히라\n* 수도권: 연방 수도 지구\n* 수도권: 리베르타도르 시와 차카오, 수크레 (베네수엘라), 바르타, 엘아티요 및 신베이시 일원\n\n=== 대한민국의 수도권 ===\n\n대한민국의 경우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지방의 전역을 수도권으로 분류한다.\n\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권 ===\n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순천시, 평성시, 황해북도 중화군, 상원군 일대를 수도권으로 분류한다.\n", "* 수도권대기환경청\n", "\n\n분류:수도\n분류:도시권\n분류:행정 구역 단위" ]
'''수도권'''(首都圈, ) 또는 '''수도 지역'''(首都 地域), '''수도 지구'''(首都 地區)란 수도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주변 도시권 지역을 하나로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각국의 주요 기능(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다. 또한 수도권은 어느 한 나라의 수도와 함께 가까운 지역이 수도권에 포함된다. 그리고 수도권이나 수도에는 법정구역이 대부분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은 '''비수도권'''으로 부른다. * 수도권: 도쿄도 등 간토 지방(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지바현, 사이타마현 포함) * 수도권: 베이징, 톈진 및 허베이성 일원 * 수도권: 타이베이시 및 신베이시 일원 * 수도권: 메트로 마닐라 및 라구나 주, 카비테 주, 리살 주, 불라칸 주 일원 * 수도권: 자와섬 일원 * 수도권: 쿠알라룸푸르 및 푸트라자야, 슬랑오르주 일원 * 수도권: 델리 국가수도직할구 경제권 (뉴델리와 델리 일원) * 수도권: 이슬라마바드 수도권 * 수도권: 모스크바와 모스크바주 일원(모스콥스카야 지역 포함) * 수도권: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 * 수도권: 브라질리아 시 일원 * 수도권: 멕시코 시티 및 멕시코주, 모렐로스주 일원 * 수도권: 국가 지구 * 수도권: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 수도권: 워싱턴 D.C,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웨스트버지니아주 일원 * 수도권: 오타와 및 가티노 일원 * 수도권: 그레이터 런던 * 수도권: 일드프랑스 * 수도권: 베를린 및 브란덴부르크주 일원 * 수도권: 베른주 북서부 일원 * 수도권: 브뤼셀 수도 지역 * 수도권: 덴마크 수도 지역 * 수도권: 알 카히라 * 수도권: 연방 수도 지구 * 수도권: 리베르타도르 시와 차카오, 수크레 (베네수엘라), 바르타, 엘아티요 및 신베이시 일원 === 대한민국의 수도권 === 대한민국의 경우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지방의 전역을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순천시, 평성시, 황해북도 중화군, 상원군 일대를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 수도권대기환경청 분류:수도 분류:도시권 분류:행정 구역 단위
특별시
[ "Introduction",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민국",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특별시'''(特別市, )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이다.\n", "\n대한민국의 특별시는 서울특별시가 유일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켜 경기도에서 분리하였으며, 대한민국 출범 후 1949년에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개칭하였다. 광역시 및 특별자치시 및 도와 동급인 광역지방자치단체이지만, 특별시장은 차관급인 광역시장 및 도지사보다 더 높은 장관급이다.\n\n=== 사건 및 논란 ===\n==== 세종특별시 승격 추진 ====\n2017년 4월 27일 오전 이경희 한국국민당 대선후보가 세종특별자치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종시를 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을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n\n==== 대전특별시 승격 추진 ====\n2017년 4월 17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거리에서 대전을 특별시로 승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충청의 중심 대전이 충청의 중심으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며 반드시 대통령이 돼서 충청의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n\n==== 전주특별시 승격 추진 ====\n2017년 3월 22일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전라북도의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안희정 후보는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하고 전주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문화전통의 도시로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하겠다며,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n\n==== 새만금특별시 신설 추진 ====\n2017년 5월 1일 오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전주시 전동성당 인근에서 거점유세를 열고 \"전국의 모든 첨단산업을 새만금으로 모아보자\"며 \"새만금특별법을 통과시켜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홍준표 후보는 새만금 개발 추진에 조건이 있다며 \"전북에서 20% 이상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해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새만금을 홍콩 식으로 개발을 해보겠다\"며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난 뒤에 1국2체제 형식으로 운영했다. 홍콩의 자본주의를 손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서 모든 규제를 싹 없애버리고 환경, 경찰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1국 2체제로 개발하자는 것\"이라며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끌어내서 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n\n==== 부산특별시 승격 추진 ====\n부산의 특별시 승격 주장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수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서도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공회의소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n\n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공회의소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1949년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n\n부산시는 한국 전쟁 중에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의 시세(市勢)가 강해졌고 부산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부산시를 특별시로 지정해야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후에 서울특별시와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4.19 이후 다시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주장되었으나 장면 내각은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경부축을 발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박정희의 의지로 부산시는 특별시보다 한 단계 낮은 직할시로 지정되었다.\n\n2003년 2월 17일 부산의 6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옛 부산경제가꾸기 시민연대)´가 올해 ´부산의 특별시 승격´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2003년 전개할 시민경제운동 10대 사업을 발표하면서 ´특별시 승격운동을 신규사업으로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새 정부가 주요 국정지표로 내세운 분권적 차원에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세계경쟁력을 강화하는 국가전략 투자도시로서 부산을 특별시로 승격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부산발전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또 ´부산특별시´승격을 전제로 한 경상남도 양산시 및 진해시 웅동지역의 발전적 통합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n\n2003년 6월 23일 홍성철 진해문화원 이사는 창원대학교 국제홀에서 지방분권운동경남본부(상임대표 안홍준) 주최로 열린 ‘부산광역시의 대도시 패권주의 대응 토론회’에서 ‘진해신항 건설에 따른 경제적 효과 분석’을 주제 발표하고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진해는 물론 김해·양산까지 부산에 편입시켜 서울에 버금가는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은 진해 용원동 일대에 건설되는 진해신항의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독식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또 경남과 부산이 함께 발전하려면 경남 땅의 부산 편입 논리에 벗어나 양산·김해를 지켜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진해시민과 전체 경상남도민이 힘을 모아 부산의 진해 신항 편입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 이사는 “현재 부산항은 컨테이너 선석 21개만으로도 항만관련 매출액이 연간 20조원을 웃돈다”며 “신항만은 부산항의 1.5배인 30선석으로 어느 자치단체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이익의 향배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산항의 20조원 매출은 부산 부가가치의 40%며 항만의 고용효과도 전체의 27%”라며 “신항의 30선석 가운데 18선석만 소속돼도 개당 1만5000원인 컨테이너세가 도세 수입으로 연간 724억원”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산은 이처럼 항만의 가치를 잘 알고 신항만을 한 손에 틀어쥐려고 끈질기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양산·김해·진해를 부산에 집어넣어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도 핵심은 진해 땅에 있다”고 못박았다.\n\n이에 대해 앞서 토론한 박동철 경남신문 편집국장도 “부산의 목적은 신항만 독자 운영을 위한 진해권역 편입”이라며 “부산은 진해 웅동·용원동 일대만 손에 넣어도 크게 만족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n\n2004년 11월 26일 YTN은 부산광역시청이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양 관련 산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중앙정부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양특별시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해양특별시가 되면 항만시설을 비롯해 해양자원개발사업 시행자와 관련기업에 대한 조세감면은 물론 정부의 예산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n\n이에 대해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독자적으로 해양개발에 나설 수 있고 해양부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부산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최우용 동아대학교 교수는 \"해양특별시 법률안의 제정방안은 국가균형발전과 해양도시의 국가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추진에 난항이 예상된다.\n\n2004년 12월 3일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은 \"해양수도로서 부산특별시를 설치하며 국가가 부산시를 국제해양수도로 개발하기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추진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특히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국가나 특별시로 승격되는 부산시가 항만시설과 해양자원, 해양산업의 개발사업자 등에 대해 조세와 각종 부담금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또 부산 여행객이 지정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할 경우 면세와 환급특례를 부여하고 카지노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관광진흥법에 특례를 두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n\n유 의원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차등적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유수한 경쟁 항만들의 독주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부산이 살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n\n2009년 7월 16일 민주당 조경태 의원이 부산 국제신문사 대강당에서 ‘부산해양특별시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 김인세 부산대학교 총장,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박경문 전 경성대학교 총장, 신정택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오거돈 한국해양대학교 총장, 범어사 주지 정여스님, 정홍섭 신라대학교 총장, 조규향 동아대학교 총장 등 지역 내 유력인사들이 추진위 상임고문을 맡고, 조 의원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조 의원은 국회에서 와 만나 “정치권의 이념적, 정략적 접근을 떠나 해양특별시를 바라는 부산시민들의 염원을 이뤄내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실천적 행동”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해양특별시로 부산의 차세대 성장 동력인 해양물류와 해양관광을 적극 육성하고, 장기적으론 우리나라의 경제수도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이라며 “미국, 호주,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정치수도와 경제수도로 이원화돼 있는데,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각 전문가 150여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에서 부산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동시에 구체적 실무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약 1년6개월 후엔 특별법 발의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n\n2012년 7월 27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부산을 해양거점도시로 만들고, 부산특별시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이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산·울산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이 같이 밝히며 \"세종시도 특별시, 제주도도 특별자치도다. 가능하냐고 물어보겠지만 확실히 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부산의 그린벨트도 지금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것을 시가 직접 관리하도록 바꾸고, 도시계획과 여러 규제도 시로 위임하겠다\"며 \"부산을 좀 더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n\n===== 부산·울산 통합 특별시 승격 추진 =====\n2007년 2월 13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가칭 동북아 부산포럼(대표 조관홍 동아대학교 교수) 초청특강에서 \"국토 동남지역 광역경제권을 수도권에 상응하는 규모로 활성화하고 해양물류도시로서 상해, 천진 등 인근 항만 도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산·울산·거제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해 특별시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손학규 측 관계자도 \"100만과 400만의 도시 규모로는 국제적인 경제에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해양특별시를 염원하는 부산과 산업특별시를 추구하는 울산을 통합하여 광역경제권을 형성하고 수도권 중심의 1극체제가 아닌 양극체제로 우리나라 경제권을 편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산과 울산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보완적 성격으로 통합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이며, 수도권·중부권·호남권·동남권의 4대 경제권과 강원도와 제주도의 2개 경제권을 부르짖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4+2체제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n\n이와 관련하여 울산광역시청은 '정치인의 주장으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울산 상공계에서도 \"부산과 울산을 통합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부산을 염두에 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정치적인 면은 제쳐두고라도 인구만 봐도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울산이 부산과 대등한 통합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에 하나 양도시가 통합된다면 울산은 부산을 먹여 살리는 생산기지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n\n===== 해운대관광특별시 승격 추진 =====\n2011년 6월 28일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창조도시 전략세미나에서 배덕광 해운대구청장은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을 민선 5기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청장은 \"지난 7년 동안 3선 구청장으로서 구정을 운영해오면서 지방재정에서부터 인사 등 모든 권한이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어 지방분권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해운대의 무궁무진한 인프라와 역량을 이용해 관광 특별시를 조성한다면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해운대구청은 내부적으로 T/F팀을 구성하고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지난 2006년 제주도청이 제주특별자치도청으로 지정된 것처럼 해운대를 영상과 컨벤션, 관광산업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해운대구청은 해운대특별자치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 2012년도에 계획된 지방행정체제 개편 방안에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n\n한편, 해운대구청은 한발 나아가 관광특별시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인근 구군과의 통합을 제안할 계획이지만 해당 지역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련 지방자치단체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해운대구청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는 기장군의 오규석 군수는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묻고 싶다\"며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지자체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n\n박현욱 수영구청장 또한 \"주변 지방자치단체와의 통합을 논하기 하기 전에 해운대구 안에서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의 독단적인 관광특별시 발표에 불쾌함을 나타냈다. 더욱이 최근 수년 동안 논란이 되어온 부산지역의 동서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서부산시민협의회 김영주 공동대표는 \"부산지역 내 동서 간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운대구가 관광특별시 조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며 \"이같은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부산에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n\n==== 경주특별시 승격 추진 ====\n2002년 8월 15일 경주신문은 문화재보호에 따른 경주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주발전 전략의 한 방안으로 거론되던 '경주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키자'는 운동이 지역의 한 민간단체에 의해 본격 추진된다고 보도하였다.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 전 국회의원)는 최근 경주 특별시 승격추진 계획 건의서를 한나라당을 비롯한 각 정당과 경주시청 등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문화특별시 승격 추진 논의는 1990년대 후반 지역내 일부 교수들에 의해 처음제기됐으나 그동안 경주시청과 경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주지역출신 국회의원 등이 주로 고도보존특별법 제정운동에 주력하는 바람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n\n2002년 11월 2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시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대선후보에게 요구하기로 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중앙정부 주도로 경주의 문화재를 종합정비하고 예산의 집중배정 등으로 외국인 유치에 노력하고 시민들의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n\n2002년 11월 4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의 국무총리 산하 문화특별시 지정을 골자로 성타(性陀) 불국사 회주스님, 백상승 경주시장, 이진구 경주시의회 의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을 비롯해 경주시의원 18명 등이 연대서명한 ‘경주 문화특별시 승격 건의서’를 각 정당 16대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불국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개 지구를 비롯 2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도시인 경주가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도굴과 훼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라며 “이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시 지정과 함께 이미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고도보존법의 조속한 통과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특히, “세계각국은 문화재 관리로 인해 시민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법률을 제정해 문화재 보호와 사유재산권 행사를 조화롭게 해결해 오고 있는 추세”라며 “지금까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시민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지금 시민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경주발전협의회는 밝혔다.\n경주발전협의회 황윤기 회장은 “경주 특별시 지정이 대선공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각 정당을 순회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n\n2008년 11월 1일 경주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2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의 특별강연에서 경북대학교 문경현 명예교수는 ‘경주시의 문화특별시 지정 당위성’이라는 주제로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경주가 세계적 유물과 유적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에 이같은 고적보존과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개발을 해야됨에도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으로는 재정감당이 안돼 수많은 유적지가 훼손일로에 있으므로 하루빨리 특별시로 승격시켜 국가가 특별예산지원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n\n==== 남해안해양특별시 신설 추진 ====\n2013년 1월 10일 미디어워치에 따르면 일각에서 망국적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신설되는 해양수산부 주도로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남해안해양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남해안해양특별시’는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계획으로 단순히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n\n‘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공동대표 한나라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의원)은 지난 2011년 12월 27일 ‘남해안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도시들 묶어 인구 130여만명의 ‘섬진광역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가칭 ‘섬진광역시’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및 경상남도 남해군, 하동군, 사천시가 포함되며, 교육과 관광, 미래 첨단기술과 성장동력 산업을 결합시킨 미래 친환경 복지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n\n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 '남해안해양특별시'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권 이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선산업 관리기능 이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및 해양수산부)의 도서 및 해양과 이어진 육지부분 개발권 이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행정구역개편 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라선특별시와 남포특별시, 개성특별시가 특별시로 설치되어 있다. 라선시는 2010년 1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특급시'에서 특별시로 승격시킴으로써 생겨났다.\n", "\n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인구 백만명이 넘는 난징, 상하이, 베이징, 톈진, 칭다오, 충칭, 시안, 광저우, 한커우(현재 우한시의 일부), 선양, 하얼빈시의 11개 도시를 특별시로 지정했다. 이후 \"원할시\"로 개칭하면서 특별시라는 이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n", "* 광역시\n* 특별자치시\n* 도\n* 특별자치도\n* 특례시\n* 자치구\n* 특할시\n", "\n", "* 서울특별시행정에 관한 특별법 - 국가기록원\n\n \n분류:1946년 설치\n \n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
'''특별시'''(特別市, )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이다. 대한민국의 특별시는 서울특별시가 유일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켜 경기도에서 분리하였으며, 대한민국 출범 후 1949년에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개칭하였다. 광역시 및 특별자치시 및 도와 동급인 광역지방자치단체이지만, 특별시장은 차관급인 광역시장 및 도지사보다 더 높은 장관급이다. === 사건 및 논란 === ==== 세종특별시 승격 추진 ==== 2017년 4월 27일 오전 이경희 한국국민당 대선후보가 세종특별자치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종시를 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을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 대전특별시 승격 추진 ==== 2017년 4월 17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거리에서 대전을 특별시로 승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충청의 중심 대전이 충청의 중심으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며 반드시 대통령이 돼서 충청의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 전주특별시 승격 추진 ==== 2017년 3월 22일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전라북도의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안희정 후보는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하고 전주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문화전통의 도시로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하겠다며,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 새만금특별시 신설 추진 ==== 2017년 5월 1일 오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전주시 전동성당 인근에서 거점유세를 열고 "전국의 모든 첨단산업을 새만금으로 모아보자"며 "새만금특별법을 통과시켜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홍준표 후보는 새만금 개발 추진에 조건이 있다며 "전북에서 20% 이상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해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새만금을 홍콩 식으로 개발을 해보겠다"며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난 뒤에 1국2체제 형식으로 운영했다. 홍콩의 자본주의를 손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서 모든 규제를 싹 없애버리고 환경, 경찰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1국 2체제로 개발하자는 것"이라며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끌어내서 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 부산특별시 승격 추진 ==== 부산의 특별시 승격 주장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수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서도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공회의소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 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공회의소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1949년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부산시는 한국 전쟁 중에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의 시세(市勢)가 강해졌고 부산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부산시를 특별시로 지정해야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후에 서울특별시와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4.19 이후 다시 '부산특별시 승격안'이 주장되었으나 장면 내각은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경부축을 발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박정희의 의지로 부산시는 특별시보다 한 단계 낮은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2003년 2월 17일 부산의 6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옛 부산경제가꾸기 시민연대)´가 올해 ´부산의 특별시 승격´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2003년 전개할 시민경제운동 10대 사업을 발표하면서 ´특별시 승격운동을 신규사업으로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새 정부가 주요 국정지표로 내세운 분권적 차원에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세계경쟁력을 강화하는 국가전략 투자도시로서 부산을 특별시로 승격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부산발전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또 ´부산특별시´승격을 전제로 한 경상남도 양산시 및 진해시 웅동지역의 발전적 통합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2003년 6월 23일 홍성철 진해문화원 이사는 창원대학교 국제홀에서 지방분권운동경남본부(상임대표 안홍준) 주최로 열린 ‘부산광역시의 대도시 패권주의 대응 토론회’에서 ‘진해신항 건설에 따른 경제적 효과 분석’을 주제 발표하고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진해는 물론 김해·양산까지 부산에 편입시켜 서울에 버금가는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은 진해 용원동 일대에 건설되는 진해신항의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독식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또 경남과 부산이 함께 발전하려면 경남 땅의 부산 편입 논리에 벗어나 양산·김해를 지켜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진해시민과 전체 경상남도민이 힘을 모아 부산의 진해 신항 편입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 이사는 “현재 부산항은 컨테이너 선석 21개만으로도 항만관련 매출액이 연간 20조원을 웃돈다”며 “신항만은 부산항의 1.5배인 30선석으로 어느 자치단체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이익의 향배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산항의 20조원 매출은 부산 부가가치의 40%며 항만의 고용효과도 전체의 27%”라며 “신항의 30선석 가운데 18선석만 소속돼도 개당 1만5000원인 컨테이너세가 도세 수입으로 연간 724억원”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산은 이처럼 항만의 가치를 잘 알고 신항만을 한 손에 틀어쥐려고 끈질기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양산·김해·진해를 부산에 집어넣어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도 핵심은 진해 땅에 있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앞서 토론한 박동철 경남신문 편집국장도 “부산의 목적은 신항만 독자 운영을 위한 진해권역 편입”이라며 “부산은 진해 웅동·용원동 일대만 손에 넣어도 크게 만족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26일 YTN은 부산광역시청이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양 관련 산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중앙정부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양특별시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해양특별시가 되면 항만시설을 비롯해 해양자원개발사업 시행자와 관련기업에 대한 조세감면은 물론 정부의 예산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독자적으로 해양개발에 나설 수 있고 해양부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부산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최우용 동아대학교 교수는 "해양특별시 법률안의 제정방안은 국가균형발전과 해양도시의 국가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추진에 난항이 예상된다. 2004년 12월 3일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은 "해양수도로서 부산특별시를 설치하며 국가가 부산시를 국제해양수도로 개발하기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추진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특히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국가나 특별시로 승격되는 부산시가 항만시설과 해양자원, 해양산업의 개발사업자 등에 대해 조세와 각종 부담금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또 부산 여행객이 지정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할 경우 면세와 환급특례를 부여하고 카지노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관광진흥법에 특례를 두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유 의원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차등적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유수한 경쟁 항만들의 독주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부산이 살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2009년 7월 16일 민주당 조경태 의원이 부산 국제신문사 대강당에서 ‘부산해양특별시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 김인세 부산대학교 총장,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박경문 전 경성대학교 총장, 신정택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오거돈 한국해양대학교 총장, 범어사 주지 정여스님, 정홍섭 신라대학교 총장, 조규향 동아대학교 총장 등 지역 내 유력인사들이 추진위 상임고문을 맡고, 조 의원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조 의원은 국회에서 와 만나 “정치권의 이념적, 정략적 접근을 떠나 해양특별시를 바라는 부산시민들의 염원을 이뤄내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실천적 행동”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해양특별시로 부산의 차세대 성장 동력인 해양물류와 해양관광을 적극 육성하고, 장기적으론 우리나라의 경제수도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이라며 “미국, 호주,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정치수도와 경제수도로 이원화돼 있는데,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각 전문가 150여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에서 부산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동시에 구체적 실무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약 1년6개월 후엔 특별법 발의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2012년 7월 27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부산을 해양거점도시로 만들고, 부산특별시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이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산·울산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이 같이 밝히며 "세종시도 특별시, 제주도도 특별자치도다. 가능하냐고 물어보겠지만 확실히 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부산의 그린벨트도 지금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것을 시가 직접 관리하도록 바꾸고, 도시계획과 여러 규제도 시로 위임하겠다"며 "부산을 좀 더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 부산·울산 통합 특별시 승격 추진 ===== 2007년 2월 13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가칭 동북아 부산포럼(대표 조관홍 동아대학교 교수) 초청특강에서 "국토 동남지역 광역경제권을 수도권에 상응하는 규모로 활성화하고 해양물류도시로서 상해, 천진 등 인근 항만 도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산·울산·거제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해 특별시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손학규 측 관계자도 "100만과 400만의 도시 규모로는 국제적인 경제에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해양특별시를 염원하는 부산과 산업특별시를 추구하는 울산을 통합하여 광역경제권을 형성하고 수도권 중심의 1극체제가 아닌 양극체제로 우리나라 경제권을 편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산과 울산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보완적 성격으로 통합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이며, 수도권·중부권·호남권·동남권의 4대 경제권과 강원도와 제주도의 2개 경제권을 부르짖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4+2체제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울산광역시청은 '정치인의 주장으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울산 상공계에서도 "부산과 울산을 통합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부산을 염두에 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정치적인 면은 제쳐두고라도 인구만 봐도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울산이 부산과 대등한 통합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에 하나 양도시가 통합된다면 울산은 부산을 먹여 살리는 생산기지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 해운대관광특별시 승격 추진 ===== 2011년 6월 28일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창조도시 전략세미나에서 배덕광 해운대구청장은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을 민선 5기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청장은 "지난 7년 동안 3선 구청장으로서 구정을 운영해오면서 지방재정에서부터 인사 등 모든 권한이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어 지방분권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해운대의 무궁무진한 인프라와 역량을 이용해 관광 특별시를 조성한다면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해운대구청은 내부적으로 T/F팀을 구성하고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지난 2006년 제주도청이 제주특별자치도청으로 지정된 것처럼 해운대를 영상과 컨벤션, 관광산업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해운대구청은 해운대특별자치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 2012년도에 계획된 지방행정체제 개편 방안에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해운대구청은 한발 나아가 관광특별시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인근 구군과의 통합을 제안할 계획이지만 해당 지역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련 지방자치단체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해운대구청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는 기장군의 오규석 군수는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묻고 싶다"며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지자체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현욱 수영구청장 또한 "주변 지방자치단체와의 통합을 논하기 하기 전에 해운대구 안에서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의 독단적인 관광특별시 발표에 불쾌함을 나타냈다. 더욱이 최근 수년 동안 논란이 되어온 부산지역의 동서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서부산시민협의회 김영주 공동대표는 "부산지역 내 동서 간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운대구가 관광특별시 조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며 "이같은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부산에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경주특별시 승격 추진 ==== 2002년 8월 15일 경주신문은 문화재보호에 따른 경주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주발전 전략의 한 방안으로 거론되던 '경주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키자'는 운동이 지역의 한 민간단체에 의해 본격 추진된다고 보도하였다.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 전 국회의원)는 최근 경주 특별시 승격추진 계획 건의서를 한나라당을 비롯한 각 정당과 경주시청 등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문화특별시 승격 추진 논의는 1990년대 후반 지역내 일부 교수들에 의해 처음제기됐으나 그동안 경주시청과 경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주지역출신 국회의원 등이 주로 고도보존특별법 제정운동에 주력하는 바람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2002년 11월 2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시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대선후보에게 요구하기로 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중앙정부 주도로 경주의 문화재를 종합정비하고 예산의 집중배정 등으로 외국인 유치에 노력하고 시민들의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11월 4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의 국무총리 산하 문화특별시 지정을 골자로 성타(性陀) 불국사 회주스님, 백상승 경주시장, 이진구 경주시의회 의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을 비롯해 경주시의원 18명 등이 연대서명한 ‘경주 문화특별시 승격 건의서’를 각 정당 16대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불국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개 지구를 비롯 2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도시인 경주가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도굴과 훼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라며 “이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시 지정과 함께 이미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고도보존법의 조속한 통과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특히, “세계각국은 문화재 관리로 인해 시민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법률을 제정해 문화재 보호와 사유재산권 행사를 조화롭게 해결해 오고 있는 추세”라며 “지금까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시민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지금 시민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경주발전협의회는 밝혔다. 경주발전협의회 황윤기 회장은 “경주 특별시 지정이 대선공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각 정당을 순회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8년 11월 1일 경주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2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의 특별강연에서 경북대학교 문경현 명예교수는 ‘경주시의 문화특별시 지정 당위성’이라는 주제로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경주가 세계적 유물과 유적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에 이같은 고적보존과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개발을 해야됨에도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으로는 재정감당이 안돼 수많은 유적지가 훼손일로에 있으므로 하루빨리 특별시로 승격시켜 국가가 특별예산지원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 남해안해양특별시 신설 추진 ==== 2013년 1월 10일 미디어워치에 따르면 일각에서 망국적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신설되는 해양수산부 주도로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남해안해양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남해안해양특별시’는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계획으로 단순히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공동대표 한나라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의원)은 지난 2011년 12월 27일 ‘남해안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도시들 묶어 인구 130여만명의 ‘섬진광역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가칭 ‘섬진광역시’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및 경상남도 남해군, 하동군, 사천시가 포함되며, 교육과 관광, 미래 첨단기술과 성장동력 산업을 결합시킨 미래 친환경 복지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 '남해안해양특별시'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권 이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선산업 관리기능 이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및 해양수산부)의 도서 및 해양과 이어진 육지부분 개발권 이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행정구역개편 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라선특별시와 남포특별시, 개성특별시가 특별시로 설치되어 있다. 라선시는 2010년 1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특급시'에서 특별시로 승격시킴으로써 생겨났다.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인구 백만명이 넘는 난징, 상하이, 베이징, 톈진, 칭다오, 충칭, 시안, 광저우, 한커우(현재 우한시의 일부), 선양, 하얼빈시의 11개 도시를 특별시로 지정했다. 이후 "원할시"로 개칭하면서 특별시라는 이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 광역시 * 특별자치시 * 도 * 특별자치도 * 특례시 * 자치구 * 특할시 * 서울특별시행정에 관한 특별법 - 국가기록원 분류:1946년 설치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팔도
[ "Introduction", "행정구역 목록", "같이 보기", "각주" ]
[ "\n\n\n \n'''팔도의 위치'''\n\n\n\n\n\n\n\n\n\n'''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 구역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시행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눈 13도제가 시행되었다.\n\n'팔도'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는데, 예를 들어 '팔도 아리랑'이나 '팔도 김치'와 같은 식이다. 그러므로 '팔도'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n\n참고로 각 도의 이름은, 그 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도시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들었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수도(京) 사방 500리 이내로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땅'이란 뜻으로 '기(畿)'라는 이름이 붙었다.\n\n아래의 표는 도청 소재지와 지방 이름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및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따라서 정리한 것이다.\n\n\n", "\n\n\n\n\n 이름 \n\n 이름의 유래 \n\n 지방 \n\n위치\n\n 방언 \n\n 수부(首部) 감영 위치 \n\n 13도제 (1896년) \n\n 현재의 행정 구역\n\n\n\n\n '''경기도'''京畿道\n\n 수도권 \n\n 기전(畿甸)\n\n203x203픽셀\n\n 경기 방언 \n\n 한성 (돈의문 밖) \n\n 경기도 \n\n 경기도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서해 5도 제외) 개성시\n\n\n\n\n '''강원도'''江原道\n\n 강릉 + 원주 \n\n 관동 \n\n203x203픽셀\n\n 영동: 영동 방언영서: 경기 방언 \n\n 원주 \n\n 강원도 \n\n 강원특별자치도 경상북도 울진군, 울릉군 강원도 (원산권 제외)\n\n\n\n\n '''황해도'''黃海道\n\n 황주 + 해주 \n\n 해서\n\n203x203픽셀\n\n 황해도 방언 \n\n 해주 \n\n 황해도 \n\n 황해남도 황해북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일부 (서해 5도)\n\n\n\n\n '''충청도'''忠淸道\n\n 충주 + 청주 \n\n 호서 \n\n203x203픽셀\n\n 충청 방언 \n\n 충주 (1602년) → 공주 \n\n 충청남도충청북도 \n\n 충청남도 (금산군 제외) 충청북도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n\n\n\n\n '''전라도'''全羅道\n\n 전주 + 나주 \n\n 호남 \n\n203x203픽셀\n\n 서남 방언제주도: 제주 방언 \n\n 전주 \n\n 전라남도전라북도 \n\n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 광주광역시 충청남도 금산군\n\n\n\n\n '''경상도'''慶尙道\n\n 경주 + 상주 \n\n 영남 \n\n203x203픽셀\n\n 동남 방언 \n\n 상주 (1601년) → 대구 \n\n 경상남도경상북도 \n\n 경상남도 경상북도 (울진군, 울릉군 제외)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n\n\n\n\n '''평안도'''平安道\n\n 평양 + 안주 \n\n 관서 \n\n203x203픽셀\n\n 서북 방언 \n\n 평양 \n\n 평안남도평안북도 \n\n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량강도 일부 평양시 남포시\n\n\n\n\n '''함경도'''咸鏡道\n\n 함흥 + 경성 \n\n 관북 \n\n203x203픽셀\n\n 동북 방언 \n\n 함흥 (1600년) → 영흥 \n\n 함경남도함경북도 \n\n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대부분 라선시 강원도 원산권\n\n\n", "* 이십삼부 (1895)\n* 십삼도 (1896)\n* 한국의 지방 구분\n* 한국의 행정 구역\n*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n", "\n\n\n\n\n\n\n \n분류:1413년 설치\n분류:1895년 폐지\n분류:명수 8" ]
'''팔도의 위치''' '''팔도'''(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 구역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시행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눈 13도제가 시행되었다. '팔도'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는데, 예를 들어 '팔도 아리랑'이나 '팔도 김치'와 같은 식이다. 그러므로 '팔도'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각 도의 이름은, 그 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도시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들었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수도(京) 사방 500리 이내로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땅'이란 뜻으로 '기(畿)'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래의 표는 도청 소재지와 지방 이름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및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따라서 정리한 것이다. 이름 이름의 유래 지방 위치 방언 수부(首部) 감영 위치 13도제 (1896년) 현재의 행정 구역 '''경기도'''京畿道 수도권 기전(畿甸) 203x203픽셀 경기 방언 한성 (돈의문 밖) 경기도 경기도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서해 5도 제외) 개성시 '''강원도'''江原道 강릉 + 원주 관동 203x203픽셀 영동: 영동 방언영서: 경기 방언 원주 강원도 강원특별자치도 경상북도 울진군, 울릉군 강원도 (원산권 제외) '''황해도'''黃海道 황주 + 해주 해서 203x203픽셀 황해도 방언 해주 황해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일부 (서해 5도) '''충청도'''忠淸道 충주 + 청주 호서 203x203픽셀 충청 방언 충주 (1602년) → 공주 충청남도충청북도 충청남도 (금산군 제외) 충청북도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전라도'''全羅道 전주 + 나주 호남 203x203픽셀 서남 방언제주도: 제주 방언 전주 전라남도전라북도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 광주광역시 충청남도 금산군 '''경상도'''慶尙道 경주 + 상주 영남 203x203픽셀 동남 방언 상주 (1601년) → 대구 경상남도경상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울진군, 울릉군 제외)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평안도'''平安道 평양 + 안주 관서 203x203픽셀 서북 방언 평양 평안남도평안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량강도 일부 평양시 남포시 '''함경도'''咸鏡道 함흥 + 경성 관북 203x203픽셀 동북 방언 함흥 (1600년) → 영흥 함경남도함경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대부분 라선시 강원도 원산권 * 이십삼부 (1895) * 십삼도 (1896) * 한국의 지방 구분 * 한국의 행정 구역 *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분류:1413년 설치 분류:1895년 폐지 분류:명수 8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 "Introduction", "행정 구역 단위 구분", "행정 구역 별 인구 및 면적", "행정 구역 현황", "역사",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역",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대한민국의 광역행정구역 지도\n시, 군, 구 전체 지도\n'''대한민국의 행정 구역'''(大韓民國의 行政 區域)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6개의 도, 3개의 특별자치도, 1개의 특별자치시로 구성된다. 이상 총 17개의 행정구역은 광역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n\n특별시는 자치구로, 광역시는 자치구와 군으로, 도와 강원특별자치도와 전북특별자치도는 자치시와 군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이상의 행정구역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제주특별자치도와 특별자치시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으며, 제주특별자치도에는 자치시가 아닌 행정시를 둔다. 행정시는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직속으로 그 역할을 하며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 8개 도와 6개 광역시에는 총 75개의 자치시와 82개의 자치군이 설치되어 있으며, 특별시와 6개 광역시에는 총 69개의 자치구가 설치되어 있다.\n\n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명 이상의 자치시에는 일반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어, 특별·광역시에 설치된 자치구와 구별된다. 일반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보(補)하고 시장이 임명한다. 구청장은 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 및 지방자치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n\n시(자치시, 행정시)와 구(자치구, 일반구)는 읍·면·행정동으로, 군은 읍·면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다시 읍·면은 리로, 행정동은 통으로 나뉜다. 통 및 행정리는 말단 행정 구역인 반으로 나뉜다. 통과 반은 실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n", "\n\n\n\n\n\n 광역지방자치단체 \n\n 기초지방자치단체 \n\n 비자치구역\n\n\n\n '''특별시''' \n\n 자치'''구''' \n\n\n\n 행정'''동''' \n\n '''통''' \n\n '''반'''\n\n\n\n '''광역시'''\n\n\n\n 자치'''구''', '''군''' \n\n'''읍''', '''면''', 행정'''동''' \n\n '''리'''\n\n\n\n '''특별자치시''' \n\n \n\n '''리''', '''통'''\n\n\n\n '''도''' \n\n 자치'''시''' (특례'''시''') \n\n 일반'''구'''\n\n\n\n '''군'''\n\n \n\n '''읍''', '''면''' \n\n '''리'''\n\n\n\n '''특별자치도''' \n\n 자치'''시''', '''군'''\n\n 행정'''시''' \n\n '''읍''', '''면''', 행정'''동''' \n\n '''리''', '''통'''\n\n\n", "\n\n\n\n\n 행정구역 \n\n 넓이 (km2) \n\n 인구(명)\n\n 시·도청 소재지 \n\n 시 \n\n 군 \n\n 구 \n\n 비고\n\n\n\n 서울특별시 \n\n 605.20 \n\n 9,770,638 \n\n 중구 \n\n \n\n \n\n 25\n\n\n\n\n\n 부산광역시 \n\n 769.89 \n\n 3,436,230 \n\n 연제구 \n\n \n\n 1 \n\n 15\n\n\n\n\n\n 대구광역시 \n\n 883.57 \n\n 2,458,138 \n\n 중구 \n\n \n\n 2\n\n 7\n\n\n\n\n\n 인천광역시 \n\n 1,062.60 \n\n 2,956,063 \n\n 남동구 \n\n \n\n 2 \n\n 8\n\n\n\n\n\n 광주광역시 \n\n 501.24 \n\n 1,459,208 \n\n 서구 \n\n \n\n \n\n 5\n\n\n\n\n\n 대전광역시 \n\n 539.35 \n\n 1,487,605 \n\n 서구 \n\n \n\n \n\n 5\n\n\n\n\n\n 울산광역시 \n\n 1,060.79 \n\n 1,153,735 \n\n 남구 \n\n \n\n 1 \n\n 4\n\n\n\n\n\n 세종특별자치시 \n\n 464.87 \n\n 320,326 \n\n 보람동 \n\n \n\n \n\n \n\n\n\n\n\n 경기도 \n\n 10,183.46 \n\n 13,104,696 \n\n 수원시, 의정부시 \n\n 28 \n\n 3 \n\n (17)\n\n\n\n\n\n 강원특별자치도 \n\n 16,875.03 \n\n 1,540,445 \n\n 춘천시 \n\n 7 \n\n 11 \n\n \n\n\n\n\n\n 충청북도 \n\n 7,407.29 \n\n 1,598,868 \n\n 청주시 \n\n 3 \n\n 8 \n\n (4)\n\n\n\n\n\n 충청남도 \n\n 8,226.14 \n\n 2,125,372 \n\n 홍성군 \n\n 8 \n\n 7 \n\n (2)\n\n\n\n\n\n 전북특별자치도 \n\n 8,069.05 \n\n 1,832,227 \n\n 전주시 \n\n 6 \n\n 8 \n\n (2)\n\n\n\n\n\n 전라남도 \n\n 12,318.79 \n\n 1,875,862 \n\n 무안군, 순천시\n\n 5 \n\n 17 \n\n \n\n\n\n\n\n 경상북도 \n\n 19,031.42 \n\n 2,671,587 \n\n 안동시, 포항시 \n\n 10 \n\n 12 \n\n (2)\n\n\n\n\n\n 경상남도 \n\n 10,539.56 \n\n 3,371,016 \n\n 창원시, 진주시 \n\n 8 \n\n 10 \n\n (5)\n\n\n\n\n\n 제주특별자치도 \n\n 1,849.15 \n\n 667,522 \n\n 제주시 \n\n(2) \n\n \n\n \n\n\n\n\n\n 계 \n\n 100,387.4 \n\n 51,829,538 \n\n \n\n 75 \n\n 82 \n\n 101\n\n\n\n\n자료: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주민등록 인구 (2019년 2월 기준)\n", "\n===서울특별시===\n\n300px\n* 자치구\n** 종로구\n** 중구\n** 용산구\n** 성동구\n** 광진구\n** 동대문구\n** 중랑구\n** 성북구\n** 강북구\n** 도봉구\n** 노원구\n** 은평구\n** 서대문구\n** 마포구\n** 양천구\n** 강서구\n** 구로구\n** 금천구\n** 영등포구\n** 동작구\n** 관악구\n** 서초구\n** 강남구\n** 송파구\n** 강동구\n\n\n===부산광역시===\n\n300px\n* 자치구\n** 중구\n** 서구\n** 동구\n** 영도구\n** 부산진구\n** 동래구\n** 남구\n** 북구\n** 강서구\n** 해운대구\n** 사하구\n** 금정구\n** 연제구\n** 수영구\n** 사상구\n\n* 군\n** 기장군\n\n\n===대구광역시===\n\n300px\n군위군은 원래 경상북도의 행정 구역이였지만 2023년 7월 1일부터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n* 자치구\n** 중구\n** 동구\n** 서구\n** 남구\n** 북구\n** 수성구\n** 달서구\n\n* 군\n** 달성군\n** 군위군\n\n\n===인천광역시===\n\n300px\n* 자치구\n** 중구\n** 동구\n** 미추홀구\n** 연수구\n** 남동구\n** 부평구\n** 계양구\n** 서구\n\n* 군\n** 강화군\n** 옹진군\n\n\n===광주광역시===\n\n300px\n* 자치구\n** 동구\n** 서구\n** 남구\n** 북구\n** 광산구\n\n\n===대전광역시===\n\n\n300px\n* 자치구\n** 동구\n** 중구\n** 서구\n** 유성구\n** 대덕구\n\n\n===울산광역시===\n\n300px\n* 자치구\n** 중구\n** 남구\n** 동구\n** 북구\n* 군\n** 울주군\n\n\n===세종특별자치시===\n\n\n300px\n세종특별자치시 시내동구역도\n* 세종특별자치시는 하위 행정구역으로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자치단체이다.\n\n*행정구역\n** 조치원읍\n** 연기면\n** 연동면\n** 부강면\n** 금남면\n** 장군면\n** 연서면\n** 전의면\n** 전동면\n** 소정면\n** 한솔동\n** 새롬동\n** 나성동\n** 다정동\n** 도담동\n** 어진동\n** 해밀동\n** 아름동\n** 종촌동\n** 고운동\n** 보람동\n** 대평동\n** 소담동\n** 반곡동\n\n\n===경기도===\n\n300px\n경기도는 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8시 3군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남부는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 경기북부는 의정부시에 소재한 경기도청북부청사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부천시는 2016년 7월 4일에 책임동제를 도입하여 행정구(소사구, 원미구, 오정구)를 폐지하였다가 2024년 1월 1일에 복원하였다.\n\n*\n** 수원시\n*** 장안구\n*** 권선구\n*** 팔달구\n*** 영통구\n** 성남시\n*** 수정구\n*** 중원구\n*** 분당구\n** 의정부시\n** 안양시\n*** 만안구\n*** 동안구\n** 부천시\n*** 원미구\n*** 소사구\n*** 오정구\n** 광명시\n** 동두천시\n** 평택시\n** 안산시\n*** 상록구\n*** 단원구\n** 고양시\n*** 덕양구\n*** 일산동구\n*** 일산서구\n** 과천시\n** 구리시\n** 남양주시\n** 오산시\n** 시흥시\n** 군포시\n** 의왕시\n** 하남시\n** 용인시\n*** 처인구\n*** 기흥구\n*** 수지구\n** 파주시\n** 이천시\n** 안성시\n** 김포시\n** 화성시\n** 광주시\n** 양주시\n** 포천시\n** 여주시\n\n*군\n** 연천군\n** 가평군\n** 양평군\n\n\n===강원특별자치도===\n\n\n300px\n*자치시\n** 춘천시\n** 원주시\n** 강릉시\n** 동해시\n** 태백시\n** 속초시\n** 삼척시\n\n*군\n** 홍천군\n** 횡성군\n** 영월군\n** 평창군\n** 정선군\n** 철원군\n** 화천군\n** 양구군\n** 인제군\n** 고성군\n** 양양군\n\n===충청북도===\n\n300px\n*자치시\n** 청주시\n*** 상당구\n*** 흥덕구\n*** 서원구\n*** 청원구\n** 충주시\n** 제천시\n\n*군\n** 보은군\n** 옥천군\n** 영동군\n** 증평군\n** 진천군\n** 괴산군\n** 음성군\n** 단양군\n\n\n===충청남도===\n\n300px\n*자치시\n** 천안시\n*** 동남구\n*** 서북구\n** 공주시\n** 보령시\n** 아산시\n** 서산시\n** 논산시\n** 계룡시\n** 당진시\n\n*군\n** 금산군\n** 부여군\n** 서천군\n** 청양군\n** 홍성군\n** 예산군\n** 태안군\n\n\n===전북특별자치도===\n\n300px\n*자치시\n** 전주시\n*** 완산구\n*** 덕진구\n** 군산시\n** 익산시\n** 정읍시\n** 남원시\n** 김제시\n\n*군\n** 완주군\n** 진안군\n** 무주군\n** 장수군\n** 임실군\n** 순창군\n** 고창군\n** 부안군\n\n\n===전라남도===\n\n300px\n*자치시\n** 목포시\n** 여수시\n** 순천시\n** 나주시\n** 광양시\n\n*군\n** 담양군\n** 곡성군\n** 구례군\n** 고흥군\n** 보성군\n** 화순군\n** 장흥군\n** 강진군\n** 해남군\n** 영암군\n** 무안군\n** 함평군\n** 영광군\n** 장성군\n** 완도군\n** 진도군\n** 신안군\n\n\n===경상북도===\n\n300px\n*자치시\n** 포항시\n*** 남구\n*** 북구\n** 경주시\n** 김천시\n** 안동시\n** 구미시\n** 영주시\n** 영천시\n** 상주시\n** 문경시\n** 경산시\n\n*군\n** 의성군\n** 청송군\n** 영양군\n** 영덕군\n** 청도군\n** 고령군\n** 성주군\n** 칠곡군\n** 예천군\n** 봉화군\n** 울진군\n** 울릉군\n\n\n===경상남도===\n\n300px\n*자치시\n** 창원시\n*** 의창구\n*** 성산구\n*** 마산합포구\n*** 마산회원구\n*** 진해구\n** 진주시\n** 통영시\n** 사천시\n** 김해시\n** 밀양시\n** 거제시\n** 양산시\n\n*군\n** 의령군\n** 함안군\n** 창녕군\n** 고성군\n** 남해군\n** 하동군\n** 산청군\n** 함양군\n** 거창군\n** 합천군\n\n\n===제주특별자치도===\n\n\n300px\n제주특별자치도는 하위 행정구역으로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지방자치단체이다. 행정시는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아니다.\n* 행정시\n** 제주시\n** 서귀포시\n", "=== 미군정기 ===\n* 1945년 11월 2일 :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의 8도로 구성 (군정법령 21호)\n* 1946년 8월 1일 : 제주도 신설 (군정법령 제94호)\n* 1946년 9월 28일 : 서울시 설치 (군정법령 제106호)\n\n=== 정부 수립 이후===\n* 1949년 8월 15일 : 서울시를 서울특별시로 개편 (지방자치법, 법률 제32호)\n* 1963년 1월 1일 : 부산시 설치 (부산시정부직할에관한법률, 법률 제1173호)\n* 1981년 4월 4일 : 부산시를 부산직할시로 개편 (지방자치에관한임시조치법, 법률 제3412호)\n* 1981년 7월 1일 : 대구직할시, 인천직할시 설치 (대구직할시및인천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 3424호)\n* 1986년 11월 1일 : 광주직할시 설치 (광주직할시및송정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3808호)\n* 1988년 1월 1일 : 전라남도 광산군과 송정시를 광주직할시에 편입\n* 1989년 1월 1일 : 충청남도 대전시와 대덕군에 대전직할시 설치,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 (대전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4049호)\n* 1995년 1월 1일 : 직할시의 명칭을 광역시로 변경 (지방자치법, 법률 제4789호), 도농복합도시 설치로 시와 군 통합\n*1995년 3월 1일 : 경기도 강화군을 인천광역시로, 경상북도 달성군을 대구광역시로, 경상남도 양산군 일부(옛 동래군 지역)를 부산광역시로 편입.\n*1996년 3월 1일 : 충청남도 논산군을 논산시로 승격. 논산읍을 취암동과 부창동으로 분리.\n* 1997년 7월 15일 : 울산광역시 설치 (울산광역시설치등에관한법률, 법률 제5243호)\n* 2003년 9월 19일 : 충청남도 논산시 두마면 일원에 계룡시 설치 (충청남도 계룡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n* 2006년 7월 1일 : 제주도를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 북제주군을 제주시로, 남제주군을 서귀포시로 편입 및 자시시 폐지(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법률 제7849호)\n*2010년 7월 1일 : 경상남도 마산시, 진해시, 창원시 통합. 통합시 명칭은 창원시가 됨.\n* 2012년 7월 1일 :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법률 제10419호)\n* 2014년 7월 1일 : 충청북도 청주시와 청원군 통합. 통합시 명칭은 청주시가 됨 (충청북도 청주시 설치 및 지원특례에 관한 법률, 볍률 제17893호)\n* 2023년 6월 11일 : 강원도를 강원특별자치도로 개편 (강원특별자치도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법률 제18875호)\n* 2023년 7월 1일 : 경상북도 군위군을 대구광역시로 편입(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 간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 법률 제19155호)\n*2024년 1월 18일 : 전라북도를 전북특별자치도로 개편(전북특별자치도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안(대안))\n", "\n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산하에 이북5도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도지사 및 시장·군수, 읍·면장을 임명하고 있다.\n이북 5도의 지도\n\n\n\n\n\n 깃발 \n\n 행정 구역 \n\n 넓이 (km2) \n\n 도청 소재지 \n\n 시 수 \n\n 군 수\n\n\n\n 100px \n\n 함경북도 \n\n 20,346\n\n 청진시 \n\n 3 \n\n 11\n\n\n\n 100px \n\n 함경남도 \n\n 31,977\n\n 함흥시 \n\n 3 \n\n 16\n\n\n\n 100px \n\n 평안북도 \n\n 28,443\n\n 신의주시 \n\n 1 \n\n 19\n\n\n\n 100px \n\n 평안남도 \n\n 14,939\n\n 평양시 \n\n 2 \n\n 14\n\n\n\n 100px \n\n 황해도 \n\n 16,737 \n\n 해주시 \n\n 3 \n\n 17\n\n\n\n100px \n\n (휴전선 이북) 경기도 \n\n 1,280 \n\n (수원시) \n\n 1 \n\n 2\n\n\n\n100px \n\n (휴전선 이북) 강원도 \n\n11,091\n\n (춘천시) \n\n \n\n 5\n\n\n\n\n", "* 대한민국의 주소\n*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n* 대한민국의 지방관청\n* 한국의 행정 구역\n* 일제강점기의 행정 구역\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n*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목록\n*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목록\n* 대한민국의 도청 소재지\n* 특별시\n* 광역시\n* 대한민국의 도\n* 대한민국의 구\n* 대한민국의 군\n* 특별자치도\n* 특별자치시\n* 특례시\n* 행정동\n* 법정동\n* ISO 3166-2:KR\n* 도농복합시\n* 출장소\n* 광역지방자치단체\n* 기초지방자치단체\n", "\n", "* \n* 구서 시그니처s \n\n\n\n\n\n\n\n \n분류:1948년 설치\n분류:행정구역" ]
대한민국의 광역행정구역 지도 시, 군, 구 전체 지도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大韓民國의 行政 區域)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6개의 도, 3개의 특별자치도, 1개의 특별자치시로 구성된다. 이상 총 17개의 행정구역은 광역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시는 자치구로, 광역시는 자치구와 군으로, 도와 강원특별자치도와 전북특별자치도는 자치시와 군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이상의 행정구역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제주특별자치도와 특별자치시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으며, 제주특별자치도에는 자치시가 아닌 행정시를 둔다. 행정시는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직속으로 그 역할을 하며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 8개 도와 6개 광역시에는 총 75개의 자치시와 82개의 자치군이 설치되어 있으며, 특별시와 6개 광역시에는 총 69개의 자치구가 설치되어 있다.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명 이상의 자치시에는 일반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어, 특별·광역시에 설치된 자치구와 구별된다. 일반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보(補)하고 시장이 임명한다. 구청장은 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 및 지방자치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 시(자치시, 행정시)와 구(자치구, 일반구)는 읍·면·행정동으로, 군은 읍·면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다시 읍·면은 리로, 행정동은 통으로 나뉜다. 통 및 행정리는 말단 행정 구역인 반으로 나뉜다. 통과 반은 실생활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광역지방자치단체 기초지방자치단체 비자치구역 '''특별시''' 자치'''구''' 행정'''동''' '''통''' '''반''' '''광역시''' 자치'''구''', '''군''' '''읍''', '''면''', 행정'''동''' '''리''' '''특별자치시''' '''리''', '''통''' '''도''' 자치'''시''' (특례'''시''') 일반'''구''' '''군''' '''읍''', '''면''' '''리''' '''특별자치도''' 자치'''시''', '''군''' 행정'''시''' '''읍''', '''면''', 행정'''동''' '''리''', '''통''' 행정구역 넓이 (km2) 인구(명) 시·도청 소재지 시 군 구 비고 서울특별시 605.20 9,770,638 중구 25 부산광역시 769.89 3,436,230 연제구 1 15 대구광역시 883.57 2,458,138 중구 2 7 인천광역시 1,062.60 2,956,063 남동구 2 8 광주광역시 501.24 1,459,208 서구 5 대전광역시 539.35 1,487,605 서구 5 울산광역시 1,060.79 1,153,735 남구 1 4 세종특별자치시 464.87 320,326 보람동 경기도 10,183.46 13,104,696 수원시, 의정부시 28 3 (17) 강원특별자치도 16,875.03 1,540,445 춘천시 7 11 충청북도 7,407.29 1,598,868 청주시 3 8 (4) 충청남도 8,226.14 2,125,372 홍성군 8 7 (2) 전북특별자치도 8,069.05 1,832,227 전주시 6 8 (2) 전라남도 12,318.79 1,875,862 무안군, 순천시 5 17 경상북도 19,031.42 2,671,587 안동시, 포항시 10 12 (2) 경상남도 10,539.56 3,371,016 창원시, 진주시 8 10 (5) 제주특별자치도 1,849.15 667,522 제주시 (2) 계 100,387.4 51,829,538 75 82 101 자료: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주민등록 인구 (2019년 2월 기준) ===서울특별시=== 300px * 자치구 ** 종로구 ** 중구 ** 용산구 ** 성동구 ** 광진구 ** 동대문구 ** 중랑구 ** 성북구 ** 강북구 ** 도봉구 ** 노원구 ** 은평구 ** 서대문구 ** 마포구 ** 양천구 ** 강서구 ** 구로구 ** 금천구 ** 영등포구 ** 동작구 ** 관악구 ** 서초구 ** 강남구 ** 송파구 ** 강동구 ===부산광역시=== 300px * 자치구 ** 중구 ** 서구 ** 동구 ** 영도구 ** 부산진구 ** 동래구 ** 남구 ** 북구 ** 강서구 ** 해운대구 ** 사하구 ** 금정구 ** 연제구 ** 수영구 ** 사상구 * 군 ** 기장군 ===대구광역시=== 300px 군위군은 원래 경상북도의 행정 구역이였지만 2023년 7월 1일부터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 자치구 ** 중구 ** 동구 ** 서구 ** 남구 ** 북구 ** 수성구 ** 달서구 * 군 ** 달성군 ** 군위군 ===인천광역시=== 300px * 자치구 ** 중구 ** 동구 ** 미추홀구 ** 연수구 ** 남동구 ** 부평구 ** 계양구 ** 서구 * 군 ** 강화군 ** 옹진군 ===광주광역시=== 300px * 자치구 ** 동구 ** 서구 ** 남구 ** 북구 ** 광산구 ===대전광역시=== 300px * 자치구 ** 동구 ** 중구 ** 서구 ** 유성구 ** 대덕구 ===울산광역시=== 300px * 자치구 ** 중구 ** 남구 ** 동구 ** 북구 * 군 ** 울주군 ===세종특별자치시=== 300px 세종특별자치시 시내동구역도 * 세종특별자치시는 하위 행정구역으로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자치단체이다. *행정구역 ** 조치원읍 ** 연기면 ** 연동면 ** 부강면 ** 금남면 ** 장군면 ** 연서면 ** 전의면 ** 전동면 ** 소정면 ** 한솔동 ** 새롬동 ** 나성동 ** 다정동 ** 도담동 ** 어진동 ** 해밀동 ** 아름동 ** 종촌동 ** 고운동 ** 보람동 ** 대평동 ** 소담동 ** 반곡동 ===경기도=== 300px 경기도는 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8시 3군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남부는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 경기북부는 의정부시에 소재한 경기도청북부청사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부천시는 2016년 7월 4일에 책임동제를 도입하여 행정구(소사구, 원미구, 오정구)를 폐지하였다가 2024년 1월 1일에 복원하였다. * ** 수원시 *** 장안구 *** 권선구 *** 팔달구 *** 영통구 ** 성남시 *** 수정구 *** 중원구 *** 분당구 ** 의정부시 ** 안양시 *** 만안구 *** 동안구 ** 부천시 *** 원미구 *** 소사구 *** 오정구 ** 광명시 ** 동두천시 ** 평택시 ** 안산시 *** 상록구 *** 단원구 ** 고양시 *** 덕양구 *** 일산동구 *** 일산서구 ** 과천시 ** 구리시 ** 남양주시 ** 오산시 ** 시흥시 ** 군포시 ** 의왕시 ** 하남시 ** 용인시 *** 처인구 *** 기흥구 *** 수지구 ** 파주시 ** 이천시 ** 안성시 ** 김포시 ** 화성시 ** 광주시 ** 양주시 ** 포천시 ** 여주시 *군 ** 연천군 ** 가평군 ** 양평군 ===강원특별자치도=== 300px *자치시 ** 춘천시 ** 원주시 ** 강릉시 ** 동해시 ** 태백시 ** 속초시 ** 삼척시 *군 ** 홍천군 ** 횡성군 ** 영월군 ** 평창군 ** 정선군 ** 철원군 ** 화천군 ** 양구군 ** 인제군 ** 고성군 ** 양양군 ===충청북도=== 300px *자치시 ** 청주시 *** 상당구 *** 흥덕구 *** 서원구 *** 청원구 ** 충주시 ** 제천시 *군 ** 보은군 ** 옥천군 ** 영동군 ** 증평군 ** 진천군 ** 괴산군 ** 음성군 ** 단양군 ===충청남도=== 300px *자치시 ** 천안시 *** 동남구 *** 서북구 ** 공주시 ** 보령시 ** 아산시 ** 서산시 ** 논산시 ** 계룡시 ** 당진시 *군 ** 금산군 ** 부여군 ** 서천군 ** 청양군 ** 홍성군 ** 예산군 ** 태안군 ===전북특별자치도=== 300px *자치시 ** 전주시 *** 완산구 *** 덕진구 ** 군산시 ** 익산시 ** 정읍시 ** 남원시 ** 김제시 *군 ** 완주군 ** 진안군 ** 무주군 ** 장수군 ** 임실군 ** 순창군 ** 고창군 ** 부안군 ===전라남도=== 300px *자치시 ** 목포시 ** 여수시 ** 순천시 ** 나주시 ** 광양시 *군 ** 담양군 ** 곡성군 ** 구례군 ** 고흥군 ** 보성군 ** 화순군 ** 장흥군 ** 강진군 ** 해남군 ** 영암군 ** 무안군 ** 함평군 ** 영광군 ** 장성군 ** 완도군 ** 진도군 ** 신안군 ===경상북도=== 300px *자치시 ** 포항시 *** 남구 *** 북구 ** 경주시 ** 김천시 ** 안동시 ** 구미시 ** 영주시 ** 영천시 ** 상주시 ** 문경시 ** 경산시 *군 ** 의성군 ** 청송군 ** 영양군 ** 영덕군 ** 청도군 ** 고령군 ** 성주군 ** 칠곡군 ** 예천군 ** 봉화군 ** 울진군 ** 울릉군 ===경상남도=== 300px *자치시 ** 창원시 *** 의창구 *** 성산구 *** 마산합포구 *** 마산회원구 *** 진해구 ** 진주시 ** 통영시 ** 사천시 ** 김해시 ** 밀양시 ** 거제시 ** 양산시 *군 ** 의령군 ** 함안군 ** 창녕군 ** 고성군 ** 남해군 ** 하동군 ** 산청군 ** 함양군 ** 거창군 ** 합천군 ===제주특별자치도=== 300px 제주특별자치도는 하위 행정구역으로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지방자치단체이다. 행정시는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아니다. * 행정시 ** 제주시 ** 서귀포시 === 미군정기 === * 1945년 11월 2일 :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의 8도로 구성 (군정법령 21호) * 1946년 8월 1일 : 제주도 신설 (군정법령 제94호) * 1946년 9월 28일 : 서울시 설치 (군정법령 제106호) === 정부 수립 이후=== * 1949년 8월 15일 : 서울시를 서울특별시로 개편 (지방자치법, 법률 제32호) * 1963년 1월 1일 : 부산시 설치 (부산시정부직할에관한법률, 법률 제1173호) * 1981년 4월 4일 : 부산시를 부산직할시로 개편 (지방자치에관한임시조치법, 법률 제3412호) * 1981년 7월 1일 : 대구직할시, 인천직할시 설치 (대구직할시및인천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 3424호) * 1986년 11월 1일 : 광주직할시 설치 (광주직할시및송정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3808호) * 1988년 1월 1일 : 전라남도 광산군과 송정시를 광주직할시에 편입 * 1989년 1월 1일 : 충청남도 대전시와 대덕군에 대전직할시 설치,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 (대전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 법률 제4049호) * 1995년 1월 1일 : 직할시의 명칭을 광역시로 변경 (지방자치법, 법률 제4789호), 도농복합도시 설치로 시와 군 통합 *1995년 3월 1일 : 경기도 강화군을 인천광역시로, 경상북도 달성군을 대구광역시로, 경상남도 양산군 일부(옛 동래군 지역)를 부산광역시로 편입. *1996년 3월 1일 : 충청남도 논산군을 논산시로 승격. 논산읍을 취암동과 부창동으로 분리. * 1997년 7월 15일 : 울산광역시 설치 (울산광역시설치등에관한법률, 법률 제5243호) * 2003년 9월 19일 : 충청남도 논산시 두마면 일원에 계룡시 설치 (충청남도 계룡시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 * 2006년 7월 1일 : 제주도를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 북제주군을 제주시로, 남제주군을 서귀포시로 편입 및 자시시 폐지(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법률 제7849호) *2010년 7월 1일 : 경상남도 마산시, 진해시, 창원시 통합. 통합시 명칭은 창원시가 됨. * 2012년 7월 1일 :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법률 제10419호) * 2014년 7월 1일 : 충청북도 청주시와 청원군 통합. 통합시 명칭은 청주시가 됨 (충청북도 청주시 설치 및 지원특례에 관한 법률, 볍률 제17893호) * 2023년 6월 11일 : 강원도를 강원특별자치도로 개편 (강원특별자치도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법률 제18875호) * 2023년 7월 1일 : 경상북도 군위군을 대구광역시로 편입(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 간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 법률 제19155호) *2024년 1월 18일 : 전라북도를 전북특별자치도로 개편(전북특별자치도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안(대안))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헌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산하에 이북5도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도지사 및 시장·군수, 읍·면장을 임명하고 있다. 이북 5도의 지도 깃발 행정 구역 넓이 (km2) 도청 소재지 시 수 군 수 100px 함경북도 20,346 청진시 3 11 100px 함경남도 31,977 함흥시 3 16 100px 평안북도 28,443 신의주시 1 19 100px 평안남도 14,939 평양시 2 14 100px 황해도 16,737 해주시 3 17 100px (휴전선 이북) 경기도 1,280 (수원시) 1 2 100px (휴전선 이북) 강원도 11,091 (춘천시) 5 * 대한민국의 주소 *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 * 대한민국의 지방관청 * 한국의 행정 구역 * 일제강점기의 행정 구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목록 * 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목록 * 대한민국의 도청 소재지 * 특별시 * 광역시 * 대한민국의 도 * 대한민국의 구 * 대한민국의 군 * 특별자치도 * 특별자치시 * 특례시 * 행정동 * 법정동 * ISO 3166-2:KR * 도농복합시 * 출장소 * 광역지방자치단체 * 기초지방자치단체 * * 구서 시그니처s 분류:1948년 설치 분류:행정구역
노벨 문학상
[ "Introduction", "역대 수상자", "기타", "각주", "외부 링크" ]
[ "\n\n'''노벨 문학상'''( - 文學賞, , )은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중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 때때로 작가 개인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특정 작품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에서 \"기여\"란 한 작가가 쓴 작품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특정 년도에 상을 받을 사람을 결정하며 수상자의 이름을 10월 초에 발표한다.\n", "\n", "* 노벨 문학상은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수여한다.\n* '문학'상이라는 번역에서 따라나오는 일반적인 오해로서, 역사가나 철학자에게 수여한 경우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Literature가 문학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닌, 어원이 라틴어 Litera(문자, 글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쓰는 행위' 일반에 대한 것이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베르그송과 몸젠 같은 철학자나 역사가가 그들의 유려한 문체와 사상으로써 이 상을 수여받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는 대개 문학가에 국한하여 수여하고 있다.\n* 초기에는 노벨이 명시한 이상적라는 기준을 문학적 이상주의라는 협의로서 해석하여 수상 여부를 결정하였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광의의 '이상'으로서의 기준을 적용하게 되었다.\n* 1914년, 1918년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고, 1935년은 기타 사유로 인해 수상자가 없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다.\n*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수상을 거절했으며 1989년에 그의 아들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의 노벨 문학상 메달을 대신 받았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폴 사르트르는 수상을 거부했다.\n* 2018년에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 스캔들의 여파로 인해 수상자 선정이 보류되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 한림원 측은 2019년에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동시에 발표하였다.\n", "\n\n", "* http://www.nobel.se/literature/laureates/index.html \n\n\n\n\n\n\n\n \n분류:1901년 설립" ]
'''노벨 문학상'''( - 文學賞, , )은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중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 때때로 작가 개인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특정 작품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에서 "기여"란 한 작가가 쓴 작품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특정 년도에 상을 받을 사람을 결정하며 수상자의 이름을 10월 초에 발표한다. * 노벨 문학상은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수여한다. * '문학'상이라는 번역에서 따라나오는 일반적인 오해로서, 역사가나 철학자에게 수여한 경우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Literature가 문학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닌, 어원이 라틴어 Litera(문자, 글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쓰는 행위' 일반에 대한 것이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베르그송과 몸젠 같은 철학자나 역사가가 그들의 유려한 문체와 사상으로써 이 상을 수여받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는 대개 문학가에 국한하여 수여하고 있다. * 초기에는 노벨이 명시한 이상적라는 기준을 문학적 이상주의라는 협의로서 해석하여 수상 여부를 결정하였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광의의 '이상'으로서의 기준을 적용하게 되었다. * 1914년, 1918년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고, 1935년은 기타 사유로 인해 수상자가 없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다. *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수상을 거절했으며 1989년에 그의 아들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의 노벨 문학상 메달을 대신 받았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폴 사르트르는 수상을 거부했다. * 2018년에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 스캔들의 여파로 인해 수상자 선정이 보류되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 한림원 측은 2019년에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동시에 발표하였다. * http://www.nobel.se/literature/laureates/index.html 분류:1901년 설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 "Introduction", "생애", "연보", "작품 목록", "수상 경력", "일화", "사망에 대하여",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n\n'''가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6월 14일~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n\n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잠든 미녀()』, 『고도()\n』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n",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군(西成郡)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n\n고등학교 시절의 가와바타 야스나리(1917년).\n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n\n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n\n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 「석일(원제: )」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신조()』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n\n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다.\n\n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n\n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n", "\n", "* 이즈의 무희()\n* 설국()\n* 고도()\n* 단포포()\n* 산소리()\n* 여자라는 것()\n* 명인()\n* 이즈의 여로()\n* 무희()\n\n이 외 다수.\n", "* 1937년 - 「설국」으로 문예간담회상 수상\n* 1944년 - 「고향」, 「석양」 등으로 기쿠치간상 수상\n* 1952년 -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芸術院賞) 수상\n* 1954년 -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野間文芸賞) 수상\n* 1958년 - 도쿄 국제 펜클럽에서 활약한 데에 대한 노고 치하로서 제6회 기쿠치간상 수상\n* 1962년 -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 수상\n* 1968년 - 노벨 문학상 수상\n",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n\n* 부립 이바라키 중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다만 수필 등에서 나오듯이 가와바타의 관심은 입학한 뒤에 곧장 예술이나 어른들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고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졸업 성적표에 보면 가와바타의 작문 성적은 53점으로 전학생 88명 가운데 86등이었다.\n\n* 교토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양조장 사사키 주조(佐々木酒造)에서 만든 일본술을 맛보고 \"이 술의 풍미야말로 교토의 맛이다\"라며 작품 이름을 「고도」라 지었다. 만년에 가와바타는 숙박지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 교토대 명예교수)와 면회했을 때에 \"고도라는 술을 알고 계신가?\" 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대답한 구와바라에게 그 술을 맛보여 주고자 추운 밤에 직접 30분 걸리는 길을 걸어서 사러 갔다고, 구와바라는 회상하고 있다.\n\n* 일본 기원(日本棋院) 내에 있는 대국용 방에는 가와바타가 쓴 「심오유현(深奥幽玄)」이란 족자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여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김소운(金素雲)이 가와바타의 집에 갔다가 바둑판을 발견하고 \"바둑을 얼마나 두십니까?\" 라고 묻자 가와바타는 \"그저 조금 두지요.\"라고 대답했고, 당시 8, 9급 수준도 되지 못했던 김소운은 자신 정도의 실력이려니 짐작하고 \"언제 한 수 배울까요?\" 하고 그에게 대국을 제안했고 가와바타는 \"네, 연락 드리지요.\" 하고 승락했다. 하지만 돌아와서야 가와바타가 명인전(名人戰)의 기보(棋譜)까지 쓸 정도의 아마추어 최상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수했음을 깨달았고, 마침 가와바타가 전화를 걸어 지난 번 약속대로 바둑을 두자고 하는 것에 다른 핑계를 대고 빠져버린 뒤, 『분게이슌주』에 수필을 실어서 가와바타에게 답했다고 한다.\n\n* 전쟁 중에 가노야 해군항공대(鹿屋海軍航空隊)에 첩보반으로서 부임하고 있었을 무렵, 부대 소속의 소위 스기야마 유키테루(杉山幸照)는 그에게 예전 연료 보급을 위해서 착륙한 스즈카에서 오랜 비행으로 지쳐 얼굴이 창백한 와중에도 사관 식당에서 나온 카레라이스를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에서 깨끗이 비웠던 경험을 말하며 '특공의 비인간성'에 대해 가와바타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당시 스기야마는 원래 특공대 쇼와대 소속으로, 전속 명령이 나와 가와바타와 함께 야타베의 해군 기지로 가는 중이었다). 스기야마는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가와바타가 끝까지 특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이었다고 적고 있다. 가와바타는 부임전에 일본군 본영의 보도부 소속 다카도(高戸) 대위로부터 \"특공을 잘 봐 두십시오. 다만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으셔도 좋다. 언젠가는 이 전쟁의 실상을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통고를 받았던 것이다. 후에 다카도는 \"섬세한 신경이었기에 (특공에 관해서) 붓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n",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n\n=== 자살설 ===\n# 교제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때 가와바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미시마의 장례식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n#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민주당 후보 하타노 아키라(秦野章)의 지원 활동에 떠밀려 나간 것에 대한 수치(하타노는 낙선했다. 다만 가와바타가 본래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형적은 없다)\n# 늙음(창작 의욕의 감소)에 대한 공포 등으로 인한 강한 정신적 동요\n# 가와바타가 좋아했던 가정부의 퇴직(이는 1977년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도 각색되었으나 유족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합의 조건으로 절판).\n\n이상이 가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n\n=== 사고사설 ===\n# 이전부터 가와바타는 줄곧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심야에 집필하는 일이 많은 작가들에게서 수면제 복용은 드문 것이 아니다).\n# 유서가 없었다.\n# 보통 스스로 조작한적 없는 난방 기구의 사용 착오(가스 스토브의 미연소 가스가 방에 가득했다고 여겨진다).\n# 가와바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있을 때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고지로(芹沢光治良)는 추도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川端康成の死)」에서 자살은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의 증언에서 가와바타가 자살했음을 암시해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는 것이다(가와바타 자신도 그 해 가을에 개최된 국제 펜클럽 대회의 준비에서 책임자로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n", "\n* 미시마 유키오\n* 오에 겐자부로\n", "\n* Hanami Web - Kawabata Yasunari\n\n\n\n\n\n\n \n분류:1899년 출생\n분류:1972년 사망\n분류:일본의 소설가\n분류:일본의 작가\n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n분류:일본의 노벨상 수상자\n분류:오사카시 출신\n분류:도쿄 대학 동문\n분류:자살한 작가\n분류:일본의 자살한 사람\n분류:기쿠치 간상 수상자\n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n분류:1972년 자살" ]
'''가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6월 14일~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잠든 미녀()』, 『고도()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군(西成郡)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가와바타 야스나리(1917년).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 「석일(원제: )」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신조()』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 이즈의 무희() * 설국() * 고도() * 단포포() * 산소리() * 여자라는 것() * 명인() * 이즈의 여로() * 무희() 이 외 다수. * 1937년 - 「설국」으로 문예간담회상 수상 * 1944년 - 「고향」, 「석양」 등으로 기쿠치간상 수상 * 1952년 -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芸術院賞) 수상 * 1954년 -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野間文芸賞) 수상 * 1958년 - 도쿄 국제 펜클럽에서 활약한 데에 대한 노고 치하로서 제6회 기쿠치간상 수상 * 1962년 -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 수상 * 1968년 - 노벨 문학상 수상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 부립 이바라키 중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다만 수필 등에서 나오듯이 가와바타의 관심은 입학한 뒤에 곧장 예술이나 어른들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고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졸업 성적표에 보면 가와바타의 작문 성적은 53점으로 전학생 88명 가운데 86등이었다. * 교토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양조장 사사키 주조(佐々木酒造)에서 만든 일본술을 맛보고 "이 술의 풍미야말로 교토의 맛이다"라며 작품 이름을 「고도」라 지었다. 만년에 가와바타는 숙박지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 교토대 명예교수)와 면회했을 때에 "고도라는 술을 알고 계신가?" 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대답한 구와바라에게 그 술을 맛보여 주고자 추운 밤에 직접 30분 걸리는 길을 걸어서 사러 갔다고, 구와바라는 회상하고 있다. * 일본 기원(日本棋院) 내에 있는 대국용 방에는 가와바타가 쓴 「심오유현(深奥幽玄)」이란 족자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여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김소운(金素雲)이 가와바타의 집에 갔다가 바둑판을 발견하고 "바둑을 얼마나 두십니까?" 라고 묻자 가와바타는 "그저 조금 두지요."라고 대답했고, 당시 8, 9급 수준도 되지 못했던 김소운은 자신 정도의 실력이려니 짐작하고 "언제 한 수 배울까요?" 하고 그에게 대국을 제안했고 가와바타는 "네, 연락 드리지요." 하고 승락했다. 하지만 돌아와서야 가와바타가 명인전(名人戰)의 기보(棋譜)까지 쓸 정도의 아마추어 최상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수했음을 깨달았고, 마침 가와바타가 전화를 걸어 지난 번 약속대로 바둑을 두자고 하는 것에 다른 핑계를 대고 빠져버린 뒤, 『분게이슌주』에 수필을 실어서 가와바타에게 답했다고 한다. * 전쟁 중에 가노야 해군항공대(鹿屋海軍航空隊)에 첩보반으로서 부임하고 있었을 무렵, 부대 소속의 소위 스기야마 유키테루(杉山幸照)는 그에게 예전 연료 보급을 위해서 착륙한 스즈카에서 오랜 비행으로 지쳐 얼굴이 창백한 와중에도 사관 식당에서 나온 카레라이스를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에서 깨끗이 비웠던 경험을 말하며 '특공의 비인간성'에 대해 가와바타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당시 스기야마는 원래 특공대 쇼와대 소속으로, 전속 명령이 나와 가와바타와 함께 야타베의 해군 기지로 가는 중이었다). 스기야마는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가와바타가 끝까지 특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이었다고 적고 있다. 가와바타는 부임전에 일본군 본영의 보도부 소속 다카도(高戸) 대위로부터 "특공을 잘 봐 두십시오. 다만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으셔도 좋다. 언젠가는 이 전쟁의 실상을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통고를 받았던 것이다. 후에 다카도는 "섬세한 신경이었기에 (특공에 관해서) 붓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 자살설 === # 교제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때 가와바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미시마의 장례식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민주당 후보 하타노 아키라(秦野章)의 지원 활동에 떠밀려 나간 것에 대한 수치(하타노는 낙선했다. 다만 가와바타가 본래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형적은 없다) # 늙음(창작 의욕의 감소)에 대한 공포 등으로 인한 강한 정신적 동요 # 가와바타가 좋아했던 가정부의 퇴직(이는 1977년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도 각색되었으나 유족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합의 조건으로 절판). 이상이 가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 사고사설 === # 이전부터 가와바타는 줄곧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심야에 집필하는 일이 많은 작가들에게서 수면제 복용은 드문 것이 아니다). # 유서가 없었다. # 보통 스스로 조작한적 없는 난방 기구의 사용 착오(가스 스토브의 미연소 가스가 방에 가득했다고 여겨진다). # 가와바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있을 때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고지로(芹沢光治良)는 추도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川端康成の死)」에서 자살은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의 증언에서 가와바타가 자살했음을 암시해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는 것이다(가와바타 자신도 그 해 가을에 개최된 국제 펜클럽 대회의 준비에서 책임자로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 미시마 유키오 * 오에 겐자부로 * Hanami Web - Kawabata Yasunari 분류:1899년 출생 분류:1972년 사망 분류:일본의 소설가 분류:일본의 작가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오사카시 출신 분류:도쿄 대학 동문 분류:자살한 작가 분류:일본의 자살한 사람 분류:기쿠치 간상 수상자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1972년 자살
보사노바
[ "Introduction", "유명 뮤지션", "각주", "외부 링크" ]
[ "\n\n\n'''보사노바'''(, 새로운 성향)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한 형식으로 1960년대에 브라질의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보사 노바의 신이라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가 발전시켰다.\n\n삼바(Samba)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different beat'로 특성화되어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1960년대에 미국,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다.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Negro)》(수록곡 카니발의 아침(Manhã de Carnaval))가 1960년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스탠 겟츠(Stan Getz)와 조아웅 지우베르뚜가 함께 녹음한 앨범 Getz/Gilberto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며 아스트루지 지우베르뚜(Astrud Gilberto)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1965년 미국 빌보드,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보사 노바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n\n독일 재즈 평론가 요아힘 E 베렌트는 저서 '재즈북'에서 \"보사 노바는 삼바와 쿨 재즈가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n", "* 브라질 뮤지션 이름의 발음에 관하여: 포루투갈어의 R은 단어의 앞에 쓰일 경우 ㅎ발음을 한다, AL로 끝나는 이름은 아우로 발음한다\n\n*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통 조빙(Tom Jobim)이라고도 부른다.\n*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n*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n* 호베르투 메네스카우(Roberto Menescal)\n* 카를루스 리라(Carlos Lyra)\n* 도리바우 카이미(Dorival Caymmi)\n* 호자 파수스(Rosa Passos)\n* 아스트루지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n* 오노 리사(小野リサ)\n* 마르쿠스 발리(Marcos Valle)\n* 가우 코스타(Gal Costa)\n* 루이스 봉파(Luiz Bonfa)\n* 스탠 게츠(Stan Getz)\n*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n* 세르지우 멘지스(Sergio Mendes)\n\n", "\n", "\n* Aderbal Duarte Bossa Nova\n\n\n\n \n분류:재즈 장르\n분류:포르투갈어계 외래어" ]
'''보사노바'''(, 새로운 성향)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한 형식으로 1960년대에 브라질의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보사 노바의 신이라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가 발전시켰다. 삼바(Samba)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different beat'로 특성화되어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1960년대에 미국,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다.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Negro)》(수록곡 카니발의 아침(Manhã de Carnaval))가 1960년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스탠 겟츠(Stan Getz)와 조아웅 지우베르뚜가 함께 녹음한 앨범 Getz/Gilberto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며 아스트루지 지우베르뚜(Astrud Gilberto)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1965년 미국 빌보드,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보사 노바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독일 재즈 평론가 요아힘 E 베렌트는 저서 '재즈북'에서 "보사 노바는 삼바와 쿨 재즈가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 브라질 뮤지션 이름의 발음에 관하여: 포루투갈어의 R은 단어의 앞에 쓰일 경우 ㅎ발음을 한다, AL로 끝나는 이름은 아우로 발음한다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통 조빙(Tom Jobim)이라고도 부른다. *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 *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 * 호베르투 메네스카우(Roberto Menescal) * 카를루스 리라(Carlos Lyra) * 도리바우 카이미(Dorival Caymmi) * 호자 파수스(Rosa Passos) * 아스트루지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 오노 리사(小野リサ) * 마르쿠스 발리(Marcos Valle) * 가우 코스타(Gal Costa) * 루이스 봉파(Luiz Bonfa) * 스탠 게츠(Stan Getz) *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 세르지우 멘지스(Sergio Mendes) * Aderbal Duarte Bossa Nova 분류:재즈 장르 분류:포르투갈어계 외래어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Introduction", "대표적 작품", "앨범" ]
[ "\n\n\n'''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1927년 1월 25일 ~ 1994년 12월 8일)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n\n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와 엘리스 헤지나, 세르지우 멘데스,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스탠 게츠,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n\n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n\n조빙이 브라질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시인이자 외교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1956년 연극 《Orfeu de Conceição》의 음악을 맡았을 때였다.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은 〈Se todos fossem iguais a você〉(내 삶을 밝혀줄 누구)였다. 이후 이 연극을 원작으로 프랑스 제작자인 Sacha Gordine가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de Negro)를 만들 때 Gordine은 새로운 곡으로만 영화를 채우고 싶어 했고, 모라이스와 조빙에게 새로운 곡을 써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모라이스는 제작당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머물고 있었고, 둘은 전화를 통해서 단지 3개의 곡만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A Felicidade〉, 〈Frevo〉, 〈O Nosso Amor〉이다.\n\n이 둘의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모라이스는 조빙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의 가사를 써 주었다. 편곡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클라우스 오거만(Claus Ogerman)은 조빙의 많은 곡들을 편곡해 주었다. 조빙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1963년 《게츠/질베르투》(GETZ/GILBERTO) 앨범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앨범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투가 부른 대히트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빙은 수많은 아름다운 앨범을 작곡한다.\n\n조빙과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재즈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와 프랑크 시나트라는 각각 《Ella Abraça Jobim》 (1981) 와《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1967)란 앨범에서 조빙의 곡들을 불렀다. 조빙의 앨범인 《Wave: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1996)은 오스카 피터슨,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투츠 틸레망 등의 연주를 수록하고 있다.\n\n조빙은 세계적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4년 12월 8일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계속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앨범인 《Antonio Brasileiro》은 사후 발매되었다.\n\n조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조앙 바치스타(São João Batista) 묘지에 묻혔으며,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의 이름은 1999년 그를 기념하여 갈레앙-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공항(Galeão - Antônio Carlos Jobim)으로 바꾸었다.\n\n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패럴림픽 마스코트인 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n", "* \"Chega de Saudade\" (1957) 보사노바의 대표적인 곡\n* \"Água de Beber\"\n* \"Desafinado\" (1959), 그래미상 3개 수상\n* \"Samba de Uma Nota Só\" (1959)\n* \"A Felicidade\" e \"O Nosso Amor\", 영화 \"흑인 오르페\"\" Orfeu Negro (1959)\n* \"Insensatez\" (How Insensitive)(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0)\n* \"Garota de Ipanema\" (The Girl from Ipanema)(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3)\n* \"Fotografia\" (1965)\n* \"Triste\" (1967)\n* \"Wave\" (1967)\n* \"Águas de Março\" (1970)\n* \"Luiza\"\n* \"Corcovado\"\n* \"Dindi\"\n* \"Retrato em Branco e Preto\" (시꾸 부아르끼 Chico Buarque와 공동작곡)\n* \"Samba do Avião\"\n* \"Anos Dourados\"\n* \"Meditação\"\n* \"Só Tinha de Ser com Você\" (1974)\n* \"Sabiá\"\n* \"Eu sei que vou te amar\"\n* \"Falando de amor\"\n* \"Ela é carioca\"\n* \"Bebel\"\n* \"O Grande Amor\"\n* \"Voce Vai Ver\" (You'll See)\n* \"O Morro Não Tem Vez\" (일명 \"Favela\")\n* \"Inútil Paisagem\" (Useless Landscape)\n* \"Vivo Sonhando\" (Dreamer)\n* \"Se Todos Fossem Iguais A Voce\"\n* \"Só danço samba \"\n* \"Amor em paz\" (Once i loved)\n", "=== 솔로 앨범 ===\n* The Composer of Desafinado, Plays (Verve, 1963)\n* Antonio Carlos Jobim (Elenco, 1964)\n* The Wonderful World of Antonio Carlos Jobim (Warner, 1964)\n* A Certain Mr. Jobim (Warner, 1965)\n* Wave (A&M/CTI, 1967)\n* Stone Flower (CTI, 1970)\n* Tide (A&M/CTI, 1970)\n* Matita Perê (Philips, 1973)\n* Jobim (MCA, 1973)\n* Urubu (Warner, 1975)\n* Terra Brasilis (Warner, 1980)\n* Passarim (PolyGram, 1987)\n* Antonio Brasileiro (Columbia, 1994)\n* Inédito (BMG, 1995)\n\n=== 참여 앨범 ===\n* O Pequeno Príncipe (Festa, 1957)\n* Sinfonia do Rio de Janeiro (Continental, 1954), (Billy Blanco 공동)\n* Orfeu da Conceição (Odeon, 1956)\n* Canção do Amor Demais - Elizete Cardoso (Festa, 1958)\n* Amor de gente moça - Silvia Telles (Odeon, 1959)\n* Chega de Saudade - João Gilberto (Odeon, 1959)\n* Por tôda a minha vida - Lenita Bruno (Festa, 1959)\n* Brasília - Sinfonia da Alvorada (Columbia, 1960)\n* O Amor, o Sorriso e a Flor - João Gilberto (Odeon, 1960)\n* João Gilberto - João Gilberto (Odeon, 1961)\n* Getz/Gilberto - Stan Getz, João Gilberto (Verve, 1963)\n* Jazz Samba Encore! (MGM/Verve, 1963)\n* Caymmi Visita Tom (Elenco, 1965) (Dorival Caymmi , Danilo Caymmi, Dori Caymmi, Nana Caymmi 공동)\n* Garota de Ipanema - vários intérpretes (Philips, 1967)\n* 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67)\n* The Adventurers (Paramount, 1970)\n* Sinatra & Company - Frank Sinatra e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71)\n* Elis & Tom (PolyGram, 1974) ( Elis Regina 공동)\n* Miucha & Antonio Carlos Jobim - vol. I (RCA, 1977) ( Miúcha 공동)\n* Miucha & Tom Jobim - vol. II (RCA, 1979) (Miúcha 공동)\n* Edu & Tom (PolyGram, 1981) ( Edu Lobo 공동)\n* Gabriela (RCA, 1983), 영화 \" Gabriela, Cravo & Canela \" 사운드 트랙\n* O Tempo e o Vento (Som Livre, 1985)\n=== 미니 앨범 ===\n* Disco de bolso - O Tom de Tom Jobim e o tal de João Bosco (Zen Editora, 1972)\n=== 라이브 앨범 ===\n* Tom, Vinicius, Toquinho, Miucha - 리우의 Canecão 극장 라이브 (Som Livre, 1977)\n* Rio Revisited - Tom Jobim & Gal Costa (Verve/Polygram, 1989)\n* Tom Canta Vinícius (Universal, 2000)\n* Em Minas ao Vivo: Piano e Voz (Biscoito Fino, 2004)\n* Ao Vivo em Montreal (Biscoito Fino, 2007)\n* Um encontro no Au bon gourmet (Doxy, 2015)\n\n=== 컴필레이션 앨범 ===\n* Antonio Carlos Jobim: Composer (Warner, 1995)\n* Sinatra-Jobim Sessions (WEA, 1979)\n* Meus Primeiros Passos e Compassos (Revivendo, 1997)\n* Raros Compassos (Revivendo, 2000)\n\n=== 트리뷰트 앨범 ===\n*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 (Verve, 1994) - Ella Fitzgerald, Oscar Peterson ,Dizzy Gillespie 와 Getz/Gilberto에 참여한 음악가들의 레코딩\n\n\n\n\n\n분류:1927년 출생\n분류:1994년 사망\n분류:브라질의 작곡가\n분류:브라질의 음악 프로듀서\n분류:브라질의 재즈 기타 연주자\n분류:브라질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n분류:재즈 프로듀서\n분류:보사노바 음악가\n분류:리우데자네이루 출신\n분류:포르투갈계 브라질인\n분류: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n분류:미국에 거주한 브라질인\n분류:20세기 작곡가\n분류:포르투갈어 가수\n분류:브라질의 재즈 가수\n분류:그래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1927년 1월 25일 ~ 1994년 12월 8일)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와 엘리스 헤지나, 세르지우 멘데스,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스탠 게츠,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 조빙이 브라질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시인이자 외교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1956년 연극 《Orfeu de Conceição》의 음악을 맡았을 때였다.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은 〈Se todos fossem iguais a você〉(내 삶을 밝혀줄 누구)였다. 이후 이 연극을 원작으로 프랑스 제작자인 Sacha Gordine가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de Negro)를 만들 때 Gordine은 새로운 곡으로만 영화를 채우고 싶어 했고, 모라이스와 조빙에게 새로운 곡을 써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모라이스는 제작당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머물고 있었고, 둘은 전화를 통해서 단지 3개의 곡만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A Felicidade〉, 〈Frevo〉, 〈O Nosso Amor〉이다. 이 둘의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모라이스는 조빙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의 가사를 써 주었다. 편곡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클라우스 오거만(Claus Ogerman)은 조빙의 많은 곡들을 편곡해 주었다. 조빙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1963년 《게츠/질베르투》(GETZ/GILBERTO) 앨범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앨범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투가 부른 대히트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빙은 수많은 아름다운 앨범을 작곡한다. 조빙과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재즈가수 엘라 피츠제럴드와 프랑크 시나트라는 각각 《Ella Abraça Jobim》 (1981) 와《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1967)란 앨범에서 조빙의 곡들을 불렀다. 조빙의 앨범인 《Wave: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1996)은 오스카 피터슨,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투츠 틸레망 등의 연주를 수록하고 있다. 조빙은 세계적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4년 12월 8일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계속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앨범인 《Antonio Brasileiro》은 사후 발매되었다. 조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조앙 바치스타(São João Batista) 묘지에 묻혔으며,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의 이름은 1999년 그를 기념하여 갈레앙-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공항(Galeão - Antônio Carlos Jobim)으로 바꾸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패럴림픽 마스코트인 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 "Chega de Saudade" (1957) 보사노바의 대표적인 곡 * "Água de Beber" * "Desafinado" (1959), 그래미상 3개 수상 * "Samba de Uma Nota Só" (1959) * "A Felicidade" e "O Nosso Amor", 영화 "흑인 오르페"" Orfeu Negro (1959) * "Insensatez" (How Insensitive)(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0) * "Garota de Ipanema" (The Girl from Ipanema)(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3) * "Fotografia" (1965) * "Triste" (1967) * "Wave" (1967) * "Águas de Março" (1970) * "Luiza" * "Corcovado" * "Dindi" * "Retrato em Branco e Preto" (시꾸 부아르끼 Chico Buarque와 공동작곡) * "Samba do Avião" * "Anos Dourados" * "Meditação" * "Só Tinha de Ser com Você" (1974) * "Sabiá" * "Eu sei que vou te amar" * "Falando de amor" * "Ela é carioca" * "Bebel" * "O Grande Amor" * "Voce Vai Ver" (You'll See) * "O Morro Não Tem Vez" (일명 "Favela") * "Inútil Paisagem" (Useless Landscape) * "Vivo Sonhando" (Dreamer) * "Se Todos Fossem Iguais A Voce" * "Só danço samba " * "Amor em paz" (Once i loved) === 솔로 앨범 === * The Composer of Desafinado, Plays (Verve, 1963) * Antonio Carlos Jobim (Elenco, 1964) * The Wonderful World of Antonio Carlos Jobim (Warner, 1964) * A Certain Mr. Jobim (Warner, 1965) * Wave (A&M/CTI, 1967) * Stone Flower (CTI, 1970) * Tide (A&M/CTI, 1970) * Matita Perê (Philips, 1973) * Jobim (MCA, 1973) * Urubu (Warner, 1975) * Terra Brasilis (Warner, 1980) * Passarim (PolyGram, 1987) * Antonio Brasileiro (Columbia, 1994) * Inédito (BMG, 1995) === 참여 앨범 === * O Pequeno Príncipe (Festa, 1957) * Sinfonia do Rio de Janeiro (Continental, 1954), (Billy Blanco 공동) * Orfeu da Conceição (Odeon, 1956) * Canção do Amor Demais - Elizete Cardoso (Festa, 1958) * Amor de gente moça - Silvia Telles (Odeon, 1959) * Chega de Saudade - João Gilberto (Odeon, 1959) * Por tôda a minha vida - Lenita Bruno (Festa, 1959) * Brasília - Sinfonia da Alvorada (Columbia, 1960) * O Amor, o Sorriso e a Flor - João Gilberto (Odeon, 1960) * João Gilberto - João Gilberto (Odeon, 1961) * Getz/Gilberto - Stan Getz, João Gilberto (Verve, 1963) * Jazz Samba Encore! (MGM/Verve, 1963) * Caymmi Visita Tom (Elenco, 1965) (Dorival Caymmi , Danilo Caymmi, Dori Caymmi, Nana Caymmi 공동) * Garota de Ipanema - vários intérpretes (Philips, 1967) * 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67) * The Adventurers (Paramount, 1970) * Sinatra & Company - Frank Sinatra e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71) * Elis & Tom (PolyGram, 1974) ( Elis Regina 공동) * Miucha & Antonio Carlos Jobim - vol. I (RCA, 1977) ( Miúcha 공동) * Miucha & Tom Jobim - vol. II (RCA, 1979) (Miúcha 공동) * Edu & Tom (PolyGram, 1981) ( Edu Lobo 공동) * Gabriela (RCA, 1983), 영화 " Gabriela, Cravo & Canela " 사운드 트랙 * O Tempo e o Vento (Som Livre, 1985) === 미니 앨범 === * Disco de bolso - O Tom de Tom Jobim e o tal de João Bosco (Zen Editora, 1972) === 라이브 앨범 === * Tom, Vinicius, Toquinho, Miucha - 리우의 Canecão 극장 라이브 (Som Livre, 1977) * Rio Revisited - Tom Jobim & Gal Costa (Verve/Polygram, 1989) * Tom Canta Vinícius (Universal, 2000) * Em Minas ao Vivo: Piano e Voz (Biscoito Fino, 2004) * Ao Vivo em Montreal (Biscoito Fino, 2007) * Um encontro no Au bon gourmet (Doxy, 2015) === 컴필레이션 앨범 === * Antonio Carlos Jobim: Composer (Warner, 1995) * Sinatra-Jobim Sessions (WEA, 1979) * Meus Primeiros Passos e Compassos (Revivendo, 1997) * Raros Compassos (Revivendo, 2000) === 트리뷰트 앨범 === *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 (Verve, 1994) - Ella Fitzgerald, Oscar Peterson ,Dizzy Gillespie 와 Getz/Gilberto에 참여한 음악가들의 레코딩 분류:1927년 출생 분류:1994년 사망 분류:브라질의 작곡가 분류:브라질의 음악 프로듀서 분류:브라질의 재즈 기타 연주자 분류:브라질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 분류:재즈 프로듀서 분류:보사노바 음악가 분류:리우데자네이루 출신 분류:포르투갈계 브라질인 분류: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분류:미국에 거주한 브라질인 분류:20세기 작곡가 분류:포르투갈어 가수 분류:브라질의 재즈 가수 분류:그래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
A
[ "Introduction", "이름", "역사 (ngyeoksa)", "컴퓨터 부호", "쓰임", "기타", "외부 링크" ]
[ "\n\n\n\nA의 필기체\n'''A''', '''a'''(에이)는 로마자의 1번째 글자이다.\n", "* 라틴어·독일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베트남어·에스페란토: 아 aː\n*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아 a\n* 영어: 에이 eɪ\n**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아이 aɪ\n", "A는 소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에서부터 왔다. (A neun soreur ngyimihaneun neurim muncangeseopuTeo ngwassta.)\n\n\n\n\n\nEgyptian hieroglyphic ox head\n\nProto-semitic ox head\n\nPhoenician aleph\n\nGreek alpha\n\nEtruscan A\n\nRoman A\n\n\n\n이집트 상형문자수소 머리\n\n셈조어 문자수소 머리\n\n페니키아 문자 ''알레프''\n\n그리스 문자 ''알파''\n\n에트루리아 문자 A\n\n로마 문자 A\n\n\n", "\n\n\n\n\n\n\n 문자 \n\n A \n\n a\n\n\n\n 유니코드 이름\n\n \n\n \n\n\n\n\n\n 인코딩 \n\n 10진수 \n\n 16진수 \n\n 10진수 \n\n 16진수\n\n\n\n\n 유니코드 \n\n 65 \n\n U+0041 \n\n 97 \n\n U+0061\n\n\n\n\n UTF-8 \n\n 65 \n\n 41 \n\n 97 \n\n 61\n\n\n\n\n 수치 문자 참조 \n\n &#65; \n\n &#x41; \n\n &#97; \n\n &#x61;\n\n\n\n\n EBCDIC \n\n 193 \n\n C1 \n\n 129 \n\n 81\n\n\n\n\n ASCII \n\n 65 \n\n 41 \n\n 97 \n\n 61\n\n\n\n 문자 \n\n A \n\n a\n\n\n\n 유니코드 이름\n\n \n\n \n\n\n\n 인코딩 \n\n 10진수 \n\n 16진수 \n\n 10진수 \n\n 16진수\n\n\n\n\n 유니코드 \n\n 65313 \n\n U+FF21 \n\n 65345 \n\n U+FF41\n\n\n\n\n UTF-8 \n\n \n\n EF BC A1 \n\n \n\n EF BD 81\n\n\n\n\n 수치 문자 참조 \n\n &#65313; \n\n &#xFF21; \n\n &#65345; \n\n &#xFF41;\n\n\n", "\n* 자리의 밑가 십를 초과하는 위치 기수법법은 십을 A로 표기한다. 예 : AB(12) = 131(10), AB(16) = 171(10), AB(20) = 211(10).\n* a는 국제음성기호에서 전설 비원순 저모음을 나타낸다.\n* a는 면적의 단위인 아르의 기호이다.\n* A는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의 기호이다.\n", "\n상표 등에서는 A에서 가운데의 가로줄을 빼서 'Λ'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러면 그리스 문자 Λ나 키릴 문자 Л와 모양이 같아진다. 예를 들면 SΛMSUNG이나 KIΛ. 국제음성기호에서는 A와 비슷하되 다른 발음으로 Λ를 쓰기도 한다.\n", "\n* History of the Alphabet\n\n\n\n\n분류:로마자 낱자\n분류:모음자" ]
A의 필기체 '''A''', '''a'''(에이)는 로마자의 1번째 글자이다. * 라틴어·독일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베트남어·에스페란토: 아 aː *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아 a * 영어: 에이 eɪ **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아이 aɪ A는 소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에서부터 왔다. (A neun soreur ngyimihaneun neurim muncangeseopuTeo ngwassta.) Egyptian hieroglyphic ox head Proto-semitic ox head Phoenician aleph Greek alpha Etruscan A Roman A 이집트 상형문자수소 머리 셈조어 문자수소 머리 페니키아 문자 ''알레프'' 그리스 문자 ''알파'' 에트루리아 문자 A 로마 문자 A 문자 A a 유니코드 이름 인코딩 10진수 16진수 10진수 16진수 유니코드 65 U+0041 97 U+0061 UTF-8 65 41 97 61 수치 문자 참조 &#65; &#x41; &#97; &#x61; EBCDIC 193 C1 129 81 ASCII 65 41 97 61 문자 A a 유니코드 이름 인코딩 10진수 16진수 10진수 16진수 유니코드 65313 U+FF21 65345 U+FF41 UTF-8 EF BC A1 EF BD 81 수치 문자 참조 &#65313; &#xFF21; &#65345; &#xFF41; * 자리의 밑가 십를 초과하는 위치 기수법법은 십을 A로 표기한다. 예 : AB(12) = 131(10), AB(16) = 171(10), AB(20) = 211(10). * a는 국제음성기호에서 전설 비원순 저모음을 나타낸다. * a는 면적의 단위인 아르의 기호이다. * A는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의 기호이다. 상표 등에서는 A에서 가운데의 가로줄을 빼서 'Λ'처럼 쓰기도 하는데, 이러면 그리스 문자 Λ나 키릴 문자 Л와 모양이 같아진다. 예를 들면 SΛMSUNG이나 KIΛ. 국제음성기호에서는 A와 비슷하되 다른 발음으로 Λ를 쓰기도 한다. * History of the Alphabet 분류:로마자 낱자 분류:모음자
F
[ "Introduction", "이름", "쓰임", "역사", "컴퓨터 부호" ]
[ "\n\n\nF의 필기체\n'''F''', '''f'''는 로마자의 6번째 글자이다.\n", "* 라틴어·독일어·프랑스어·영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 에프 ɛf\n* 스페인어: 에페 'efe\n* 이탈리아어: 에페 effe\n* 웨일스어: 에브 ev\n* 에스페란토: 포 fo", "* f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순치 마찰음을 나타낸다.\n* f는 수학 약자 중 함수(function)의 약자로 쓰인다.\n* F는 플루오린을 나타내는 원소 기호이다.\n* F는 연필의 흑연 등급이다.\n* F는 아파트나 빌딩에 4층을 쓰지 않을 때 쓰는 four의 약자이다.\n", "F는 갈고리를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왔다.\n\n\n\n셈조어 문자\n\n페니키아 문자 와우\n\n그리스 문자 디감마\n\n에트루리아 문자 F\n\n로마 문자 F\n\n\n\n셈조어 문자\n\n페니키아 문자 와우\n\n그리스 문자 디감마\n\n에트루리아 문자 F\n\n로마 문자 F\n\n\n", "\n\n\n\n\n\n\nF" ]
F의 필기체 '''F''', '''f'''는 로마자의 6번째 글자이다. * 라틴어·독일어·프랑스어·영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 에프 ɛf * 스페인어: 에페 'efe * 이탈리아어: 에페 effe * 웨일스어: 에브 ev * 에스페란토: 포 fo* f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순치 마찰음을 나타낸다. * f는 수학 약자 중 함수(function)의 약자로 쓰인다. * F는 플루오린을 나타내는 원소 기호이다. * F는 연필의 흑연 등급이다. * F는 아파트나 빌딩에 4층을 쓰지 않을 때 쓰는 four의 약자이다. F는 갈고리를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왔다. 셈조어 문자 페니키아 문자 와우 그리스 문자 디감마 에트루리아 문자 F 로마 문자 F 셈조어 문자 페니키아 문자 와우 그리스 문자 디감마 에트루리아 문자 F 로마 문자 F F
K
[ "Introduction", "역사", "컴퓨터 부호", "쓰임", "관련 글자", "같이 보기", "각주" ]
[ "\n\n\nK의 필기체\n'''K''', '''k'''( )는 라틴 문자의 11번째 글자이다.\n", "K는 손바닥을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유래했다.\n\n\n\n+\n\n셈조어 문자 '손바닥'\n\n페니키아 문자 카프\n\n그리스 문자 카파\n\n에트루리아 문자 K\n\n로마 문자 K\n\n\n\n셈조어 문자 '손바닥'\n\n페니키아 문자 카프\n\n그리스 문자 카파\n\n에트루리아 문자 K\n\n로마 문자 K\n\n}", "\n\n\n", "* k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연구개 파열음을 나타낸다.\n* 야구에서 삼진 아웃을 나타낸다.\n* K는 칼륨을 나타내는 원소 기호이다.\n", "\n* 카프\n* Κ, κ(그리스 문자)\n* К, к(키릴 문자)\n", "* 기아 K 시리즈\n", "\n\n\n\n\nK" ]
K의 필기체 '''K''', '''k'''( )는 라틴 문자의 11번째 글자이다. K는 손바닥을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유래했다. + 셈조어 문자 '손바닥' 페니키아 문자 카프 그리스 문자 카파 에트루리아 문자 K 로마 문자 K 셈조어 문자 '손바닥' 페니키아 문자 카프 그리스 문자 카파 에트루리아 문자 K 로마 문자 K } * k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연구개 파열음을 나타낸다. * 야구에서 삼진 아웃을 나타낸다. * K는 칼륨을 나타내는 원소 기호이다. * 카프 * Κ, κ(그리스 문자) * К, к(키릴 문자) * 기아 K 시리즈 K
블로그
[ "Introduction", "개요", "역사", "종류", "다른 유사 서비스와 비교", "수익",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블로그'''()는 정보 공유나 의견 교환을 목적으로 올리는 글을 모아 월드 와이드 웹상에 게시하는 웹사이트의 일종이다.\n\n블로그라는 말은 웹(web)과 로그(log, 기록)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일기처럼 차곡차곡 적어 올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 다른 사람도 보고 읽을 수 있으며, 보통 시간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글부터 보인다. 그러나 글 쓴 시간을 수정할 수 있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시간을 고쳐 글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게시판(BBS)과는 달리 한 사람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올릴 수 있다. 블로그를 소유해 관리하는 사람은 '''블로거'''(blogger)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저작한 내용을 허가 없이 무단으로 복사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하는 사용자는 '''스플로거'''(splogger)로 부른다.\n\n블로그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어떤 대형 미디어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1인 미디어'라 부른다. 순화어는 '''누리사랑방'''이라고 지정되어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줄여 부르면 '''누사'''가 된다.\n", "블로그의 시초는 원래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던 것이며,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서비스와 환경이 제공됨으로써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처음에 나왔던 블로그에는 단순히 텍스트인 글을 올리고 읽는 기능만 있었으나, 사진,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또한, 블로그에 댓글(Reply)과 트랙백(Trackback)을 달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와 블로거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었다. RSS나 Atom으로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텍스트 중심에서 분화되어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도 발전하고 있다.\n", "1994년 미국의 저스틴 홀이 시작한 온라인 일기가 가장 초기의 블로그중 하나로 뉴욕 타임즈 등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웹페이지에는 새글(What's new)과 차례표(Index) 페이지가 있었으며 이때 차례표는 보통 가장 최신의 글이 위에서부터 게시되거나 순서대로 제목이 나열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자게시판 동호회의 것과 같다. 개인 블로그는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대체로 다른 뉴스를 베껴 온다. 그러나 매트 드러지가 만든 드러지 리포트 사이트는 전문 뉴스 채널 못지 않는 속보와 특종으로 유명하게 되었다.\n\n초기의 블로그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이나 HTML 편집만으로도 가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 워드프레스, 무버블 타입, 블로거 나 라이브 저널 같은 블로그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웹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에서도 이러한 블로그 기능이 추가되어 개인화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n\n그 후 2003년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폭격에 한 이라크인이 블로그를 통하여 평화를 주장하여 블로그는 대중화되었다.\n\n대한민국에서는 2002년 11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blog.co.kr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음에서 블로거뉴스라는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포털 첫화면에 신문 기사와 함께 개인 블로그 포스트를 노출시키면서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졌다.\n", "국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접속은 국가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블로그 분류에 국적을 고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티스토리 등 블로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회원가입 또는 웹호스팅이 필요한지 여부로 블로그를 분류한다.\n\n=== 가입형 블로그 ===\n\n가입형 블로그는 회원 가입만 하면 손쉽게 블로그를 생성할 수 있다. 포털, 신문사, 인터넷 서점,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 등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한다. 커뮤니티(관심, 즐겨찾기, 이웃 등) 형성, 콘텐츠(뉴스 기사, 책 정보 등) 퍼가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HTML, CSS를 고칠 수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n\n* 포털: 네이버, 싸이월드, 다음, 야후 등\n* 신문사: 오마이뉴스, 조인스닷컴, 한국경제, 조선닷컴, 한겨레 등\n* 인터넷 서점: 알라딘, YES24 등\n* 블로그 전문: 티스토리, 토트, 블로거닷컴, 워드프레스닷컴, 타이프패드, 라이브저널, 이글루스 등\n\n=== 설치형 블로그 ===\n설치형 블로그는 서버에 블로그 저작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다. 서버의 다른 공간에 위키나 게시판을 운영할 수도 있고 플러그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거나 웹호스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도의 비용이 생기며, 컴퓨터, 네트워크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형 블로그 소프트웨어로 텍스트큐브, 워드프레스, 텍스타일, 무버블 타입 등이 있다.\n", "블로그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들로 카페, 개인 홈페이지, SNS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 유형들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n\n=== 온라인 동호회 ===\n인터넷 이전 시대인 1980년대부터 유즈넷이나 상업적인 전자게시판 서비스를 통해 동호회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유료 PC 통신에서 여러 가지 동호회 기능을 서비스하고 이들 동호회에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보는 것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게시판에 글이 자주 올라왔고, 회원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자연스레 생김으로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회나 카페 등 커뮤니티는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블로그와 다르다.\n\n=== 개인 홈페이지 ===\n\nPC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서부터 시작해 다음의 카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기반 서비스’만이 평정해왔던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개인으로 처음 옮겨온 것은 네띠앙이다. 네띠앙은 개인 홈페이지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개인 홈페이지 사이의 관계 맺기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단점으로 인해 네띠앙은 점차 몰락한다. 블로그는 댓글, 트랙백, RSS 등 교류 기능을 기본적으로 제공해주고, 편리하게 내용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홈페이지는 편집이 어렵고 다른 사용자와 의견을 나누기도 까다롭다.\n\n=== SNS ===\n네띠앙이 쇠락하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홈피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을 통틀어 SNS라고 한다. SNS는 주로 오프라인 인맥에 기반하고 사생활들이 다뤄지기 때문에 대체로 블로그보다 폐쇄적이다. SNS도 댓글 기능이 있지만, 트랙백, RSS 기능은 없다. SNS 중에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yozm) 등과 같이 마이크로 블로그로 불리는 것들은 글자 수 제한이 있는 대신 RSS 기능이 제공된다. 미투데이와 요즘(yozm)은 각각 2014년, 2013년 서비스를 종료했다.\n", "블로그에 광고를 포함시켜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한다.\n", "\n* 네이버 블로그\n* 인스타그램\n* 트위터\n* 페이스북\n", "\n", "* 인터넷에 ‘나’만의 집을 짓는다, 한겨레21, 제622호, 2006년 8월 9일\n* 한국 블로그 문화의 현주소 (특집/기획회의 250호), capcold.net (블로그)\n\n\n\n \n분류:웹 2.0\n분류:1990년대 신조어" ]
'''블로그'''()는 정보 공유나 의견 교환을 목적으로 올리는 글을 모아 월드 와이드 웹상에 게시하는 웹사이트의 일종이다. 블로그라는 말은 웹(web)과 로그(log, 기록)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일기처럼 차곡차곡 적어 올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를 다른 사람도 보고 읽을 수 있으며, 보통 시간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글부터 보인다. 그러나 글 쓴 시간을 수정할 수 있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시간을 고쳐 글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게시판(BBS)과는 달리 한 사람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올릴 수 있다. 블로그를 소유해 관리하는 사람은 '''블로거'''(blogger)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저작한 내용을 허가 없이 무단으로 복사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게시하는 사용자는 '''스플로거'''(splogger)로 부른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어떤 대형 미디어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1인 미디어'라 부른다. 순화어는 '''누리사랑방'''이라고 지정되어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줄여 부르면 '''누사'''가 된다. 블로그의 시초는 원래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던 것이며,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서비스와 환경이 제공됨으로써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처음에 나왔던 블로그에는 단순히 텍스트인 글을 올리고 읽는 기능만 있었으나, 사진,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또한, 블로그에 댓글(Reply)과 트랙백(Trackback)을 달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와 블로거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었다. RSS나 Atom으로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텍스트 중심에서 분화되어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도 발전하고 있다. 1994년 미국의 저스틴 홀이 시작한 온라인 일기가 가장 초기의 블로그중 하나로 뉴욕 타임즈 등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웹페이지에는 새글(What's new)과 차례표(Index) 페이지가 있었으며 이때 차례표는 보통 가장 최신의 글이 위에서부터 게시되거나 순서대로 제목이 나열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자게시판 동호회의 것과 같다. 개인 블로그는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대체로 다른 뉴스를 베껴 온다. 그러나 매트 드러지가 만든 드러지 리포트 사이트는 전문 뉴스 채널 못지 않는 속보와 특종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초기의 블로그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이나 HTML 편집만으로도 가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 워드프레스, 무버블 타입, 블로거 나 라이브 저널 같은 블로그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웹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에서도 이러한 블로그 기능이 추가되어 개인화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03년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폭격에 한 이라크인이 블로그를 통하여 평화를 주장하여 블로그는 대중화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2년 11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blog.co.kr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음에서 블로거뉴스라는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포털 첫화면에 신문 기사와 함께 개인 블로그 포스트를 노출시키면서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졌다. 국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접속은 국가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블로그 분류에 국적을 고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티스토리 등 블로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회원가입 또는 웹호스팅이 필요한지 여부로 블로그를 분류한다. === 가입형 블로그 === 가입형 블로그는 회원 가입만 하면 손쉽게 블로그를 생성할 수 있다. 포털, 신문사, 인터넷 서점,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 등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한다. 커뮤니티(관심, 즐겨찾기, 이웃 등) 형성, 콘텐츠(뉴스 기사, 책 정보 등) 퍼가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HTML, CSS를 고칠 수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 포털: 네이버, 싸이월드, 다음, 야후 등 * 신문사: 오마이뉴스, 조인스닷컴, 한국경제, 조선닷컴, 한겨레 등 * 인터넷 서점: 알라딘, YES24 등 * 블로그 전문: 티스토리, 토트, 블로거닷컴, 워드프레스닷컴, 타이프패드, 라이브저널, 이글루스 등 === 설치형 블로그 === 설치형 블로그는 서버에 블로그 저작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다. 서버의 다른 공간에 위키나 게시판을 운영할 수도 있고 플러그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거나 웹호스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도의 비용이 생기며, 컴퓨터, 네트워크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형 블로그 소프트웨어로 텍스트큐브, 워드프레스, 텍스타일, 무버블 타입 등이 있다. 블로그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들로 카페, 개인 홈페이지, SNS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 유형들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 온라인 동호회 === 인터넷 이전 시대인 1980년대부터 유즈넷이나 상업적인 전자게시판 서비스를 통해 동호회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유료 PC 통신에서 여러 가지 동호회 기능을 서비스하고 이들 동호회에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보는 것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게시판에 글이 자주 올라왔고, 회원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자연스레 생김으로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회나 카페 등 커뮤니티는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블로그와 다르다. === 개인 홈페이지 === PC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서부터 시작해 다음의 카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기반 서비스’만이 평정해왔던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개인으로 처음 옮겨온 것은 네띠앙이다. 네띠앙은 개인 홈페이지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개인 홈페이지 사이의 관계 맺기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단점으로 인해 네띠앙은 점차 몰락한다. 블로그는 댓글, 트랙백, RSS 등 교류 기능을 기본적으로 제공해주고, 편리하게 내용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홈페이지는 편집이 어렵고 다른 사용자와 의견을 나누기도 까다롭다. === SNS === 네띠앙이 쇠락하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홈피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을 통틀어 SNS라고 한다. SNS는 주로 오프라인 인맥에 기반하고 사생활들이 다뤄지기 때문에 대체로 블로그보다 폐쇄적이다. SNS도 댓글 기능이 있지만, 트랙백, RSS 기능은 없다. SNS 중에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yozm) 등과 같이 마이크로 블로그로 불리는 것들은 글자 수 제한이 있는 대신 RSS 기능이 제공된다. 미투데이와 요즘(yozm)은 각각 2014년, 2013년 서비스를 종료했다. 블로그에 광고를 포함시켜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한다. * 네이버 블로그 * 인스타그램 * 트위터 * 페이스북 * 인터넷에 ‘나’만의 집을 짓는다, 한겨레21, 제622호, 2006년 8월 9일 * 한국 블로그 문화의 현주소 (특집/기획회의 250호), capcold.net (블로그) 분류:웹 2.0 분류:1990년대 신조어
구심력
[ "Introduction", "구심력의 크기", "구심력의 발생", "같이 보기" ]
[ "\n'''구심력'''(求心力, )은 원운동에서 운동의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여 물체의 경로를 바꾸는 힘이다. 힘의 방향은 물체의 순간의 운동방향과 늘 직교하며, 방향은 곡면의 중심이다.\n\n원운동은 운동방향이 늘 바뀌므로 등속도 운동이 아니다. 원운동 하는 물체의 경우 운동의 방향이 늘 바뀌므로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뉴턴의 운동 제1법칙에 따라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힘을 구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은 물체의 속도 벡터에 수직으로 작용하므로, 물체의 속도의 방향만을 변화시키고 속도의 크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구심력은 물체와 물체의 운동의 중심을 잇는 선과 그 작용선이 항상 평행하므로, 구심력에 의한 돌림힘은 0이 된다. 따라서 구심력 외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등속 원운동의 경우,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n\n원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구심력과 정반대 방향의 힘이 자신에게 구심력과 같이 작용하여 힘의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심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된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n", "질량이 ''m'' 인 물체가 ''v'' 의 속도로 반지름 ''r'' 의 원운동을 할 때 받는 구심력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n\n: \n\n는 구심 가속도이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받는 힘의 방향은 원의 중심이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속도가 2배가 되면 힘은 4배가 된다. 반지름이 힘에 반비례 하므로 반지름이 절반이 되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힘이 두배가 되어야 한다. 구심력은 각속도 ''ω''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각속도와 속도의 관계는\n\n: \n\n이므로 다음과 같다.\n\n: \n\n공전주기 ''T''를 이용하여 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공전주기와 각속도의 관계는\n\n: \n\n이므로 다음과 같다.\n\n: \n\n입자가속기에선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관성이 커지므로 똑같이 가속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n\n: \n\n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γ'''는\n\n: \n\n이며 로런츠 인자라 불린다.\n", "일정한 원운동을 하는 물체는 구심력을 필요로 한다. 구심력은 원의 중심을 향한다.\n줄 끝에 묶여있는 물체가 수평면을 따라서 원운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물체에 가해지는 구심력은 밧줄의 장력에 의해 가해진다. 이때 밧줄의 경우 끌어당기는 힘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벽의 수직항력에 의한 미는힘도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n\n뉴턴이 생각했던 구심력은 현대의 중심력에 해당한다. 어떤 인공위성이 행성의 주변에서 궤도운동을 할 때, 중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편심성 궤도의 경우 중력의 방향은 초점으로 향하지만, 구심력은 곡률중심을 향하지 않는다.\n\n구심력의 다른 예로는 자기장 내에서 나선운동하는 하전입자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자기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n", "* 원심력\n\n\n\n\n분류:역학\n분류:힘\n분류:가속도" ]
'''구심력'''(求心力, )은 원운동에서 운동의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여 물체의 경로를 바꾸는 힘이다. 힘의 방향은 물체의 순간의 운동방향과 늘 직교하며, 방향은 곡면의 중심이다. 원운동은 운동방향이 늘 바뀌므로 등속도 운동이 아니다. 원운동 하는 물체의 경우 운동의 방향이 늘 바뀌므로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뉴턴의 운동 제1법칙에 따라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힘을 구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은 물체의 속도 벡터에 수직으로 작용하므로, 물체의 속도의 방향만을 변화시키고 속도의 크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구심력은 물체와 물체의 운동의 중심을 잇는 선과 그 작용선이 항상 평행하므로, 구심력에 의한 돌림힘은 0이 된다. 따라서 구심력 외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등속 원운동의 경우,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구심력과 정반대 방향의 힘이 자신에게 구심력과 같이 작용하여 힘의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심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된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질량이 ''m'' 인 물체가 ''v'' 의 속도로 반지름 ''r'' 의 원운동을 할 때 받는 구심력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 는 구심 가속도이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받는 힘의 방향은 원의 중심이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속도가 2배가 되면 힘은 4배가 된다. 반지름이 힘에 반비례 하므로 반지름이 절반이 되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힘이 두배가 되어야 한다. 구심력은 각속도 ''ω''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각속도와 속도의 관계는 : 이므로 다음과 같다. : 공전주기 ''T''를 이용하여 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공전주기와 각속도의 관계는 : 이므로 다음과 같다. : 입자가속기에선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관성이 커지므로 똑같이 가속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 :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γ'''는 : 이며 로런츠 인자라 불린다. 일정한 원운동을 하는 물체는 구심력을 필요로 한다. 구심력은 원의 중심을 향한다. 줄 끝에 묶여있는 물체가 수평면을 따라서 원운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물체에 가해지는 구심력은 밧줄의 장력에 의해 가해진다. 이때 밧줄의 경우 끌어당기는 힘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벽의 수직항력에 의한 미는힘도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뉴턴이 생각했던 구심력은 현대의 중심력에 해당한다. 어떤 인공위성이 행성의 주변에서 궤도운동을 할 때, 중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편심성 궤도의 경우 중력의 방향은 초점으로 향하지만, 구심력은 곡률중심을 향하지 않는다. 구심력의 다른 예로는 자기장 내에서 나선운동하는 하전입자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자기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 원심력 분류:역학 분류:힘 분류:가속도
원심력
[ "Introduction", "원심력과 구심력", "관성좌표계와 원심력", "원심력과 관련된 잘못된 설명들", "같이 보기" ]
[ "\n\n'''원심력'''(遠心力, )은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관찰되는 관성력으로, 회전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된다. 하지만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실제 존재하는 힘은 아니다.\n\n가속하는 계(비관성좌표계) 안의 물체들은 관성에 따라 운동하려하기 때문에, 계를 기준으로 하여 계가 받는 가속도의 반대방향 가속도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힘이 관성력이다. 원심력은 관성력 중에서도 회전하고 있는 계 안의 관찰자가 느끼는 가상의 힘이다.\n\n관성좌표계에서 물체는 관성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원운동하는 좌표계는 가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원운동하는 계 안의 관찰자는 물체가 마치 바깥쪽으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이를 원심력이라 한다. 관성좌표계에서 이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 이 물체에 대해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은 없으며, 물체는 단지 관성에 따라 등속도로 운동하려는 것뿐이다.\n",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되는 원심력’은, ‘비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하기 위한 가상적인 힘이고, 실존하는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지만,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는 아니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원심력만 관찰될 뿐, 구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구심력과 이에 대한 반작용만 존재할 뿐,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즉, 좌표계에 따라 구심력과 원심력 중 하나만 관찰된다. 따라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 하나의 좌표계에서 (혹은 좌표계를 명시하지 않고)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오류이다.\n\n파동 함수와 원 운동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 오프셋은 x에 대한 최대 값이고, x = 기울기이고 각도가 0 일 때 파동이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서의 움직임은 두 개의 전체 사이클 (두 개의 파장)을 나타낸다.\n",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고, 구심력과 그 반작용만 존재한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이란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을 줄에 매달아 손으로 회전시키는 경우를 보자.\n\n관성좌표계에서 관찰시, 회전하는 공에는 줄을 통하여 구심력이 작용되고 이로 인해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반작용력은 손에 전달된다. 이 반작용력은 공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원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쉽게말해 원심력은 나가려는 힘, 구심력은 당기는 힘이다.\n", "* ‘원심력과 구심력은 서로 대응되는 힘이다’\n: 실제로 원심력은 가상의 힘이므로 대응된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운동 좌표계에서 관측할 때 작용/반작용처럼 보일 뿐이다.\n* ‘원심력은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이다’\n: 실제로는 이렇지 않다.\n* ‘원심력과 구심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어서 끈에 매달린 공이 안정적으로 회전운동을 하는 것이다’\n: 이것은 실제로 틀린 설명이다. 원심력은 애초에 가상의 힘으로써 운동 좌표계에서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된 것에 불과하다. 많은 경우 물체의 운동은 관성좌표계(정지좌표계)에서 설명하는 것이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관성좌표계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끈에 매달린 공은 관성 때문에 직선 운동을 하려 하나, 구심력이 작용하여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또한, ‘평형을 이루며 회전운동을 한다’는 것도 잘못된 개념이다. 만약 실제 존재하는 힘이 구심력과 평형을 이룬다면, 알짜힘은 0이 되어 물체는 직선운동하게 된다.\n\n*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원심력이 작용하여 물체가 직선으로 운동하게 된다’\n: 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할 때,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설명은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한다’이다.\n", "\n* 관성력\n* 코리올리 힘\n* 구심력\n\n\n\n분류:고전역학\n분류:가속도\n분류:힘" ]
'''원심력'''(遠心力, )은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관찰되는 관성력으로, 회전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된다. 하지만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실제 존재하는 힘은 아니다. 가속하는 계(비관성좌표계) 안의 물체들은 관성에 따라 운동하려하기 때문에, 계를 기준으로 하여 계가 받는 가속도의 반대방향 가속도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힘이 관성력이다. 원심력은 관성력 중에서도 회전하고 있는 계 안의 관찰자가 느끼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물체는 관성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원운동하는 좌표계는 가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원운동하는 계 안의 관찰자는 물체가 마치 바깥쪽으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이를 원심력이라 한다. 관성좌표계에서 이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 이 물체에 대해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은 없으며, 물체는 단지 관성에 따라 등속도로 운동하려는 것뿐이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되는 원심력’은, ‘비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하기 위한 가상적인 힘이고, 실존하는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지만,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는 아니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원심력만 관찰될 뿐, 구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구심력과 이에 대한 반작용만 존재할 뿐,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즉, 좌표계에 따라 구심력과 원심력 중 하나만 관찰된다. 따라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 하나의 좌표계에서 (혹은 좌표계를 명시하지 않고)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오류이다. 파동 함수와 원 운동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 오프셋은 x에 대한 최대 값이고, x = 기울기이고 각도가 0 일 때 파동이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서의 움직임은 두 개의 전체 사이클 (두 개의 파장)을 나타낸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고, 구심력과 그 반작용만 존재한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이란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을 줄에 매달아 손으로 회전시키는 경우를 보자. 관성좌표계에서 관찰시, 회전하는 공에는 줄을 통하여 구심력이 작용되고 이로 인해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반작용력은 손에 전달된다. 이 반작용력은 공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원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쉽게말해 원심력은 나가려는 힘, 구심력은 당기는 힘이다. * ‘원심력과 구심력은 서로 대응되는 힘이다’ : 실제로 원심력은 가상의 힘이므로 대응된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운동 좌표계에서 관측할 때 작용/반작용처럼 보일 뿐이다. * ‘원심력은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이다’ : 실제로는 이렇지 않다. * ‘원심력과 구심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어서 끈에 매달린 공이 안정적으로 회전운동을 하는 것이다’ : 이것은 실제로 틀린 설명이다. 원심력은 애초에 가상의 힘으로써 운동 좌표계에서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된 것에 불과하다. 많은 경우 물체의 운동은 관성좌표계(정지좌표계)에서 설명하는 것이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관성좌표계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끈에 매달린 공은 관성 때문에 직선 운동을 하려 하나, 구심력이 작용하여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또한, ‘평형을 이루며 회전운동을 한다’는 것도 잘못된 개념이다. 만약 실제 존재하는 힘이 구심력과 평형을 이룬다면, 알짜힘은 0이 되어 물체는 직선운동하게 된다. *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원심력이 작용하여 물체가 직선으로 운동하게 된다’ : 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할 때,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설명은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한다’이다. * 관성력 * 코리올리 힘 * 구심력 분류:고전역학 분류:가속도 분류:힘
유니코드
[ "Introduction", "기원 및 개발", "유니코드 목록", "유니코드 변환 형식과 국제 문자 세트", "각주", "외부 링크" ]
[ "\n\n\n\n'''유니코드'''(, 정식 명칭 '''The Unicode Standard''')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다. 유니코드는 유니코드 협회()가 제정한다. 또한 이 표준에는 ISO 10646 문자 집합, 문자 인코딩, 문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문자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 등을 포함하고 있다.\n\n또한 유니코드의 목적은 현존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들을 모두 유니코드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인코딩들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한정되어 있고, 다국어 환경에서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유니코드가 다양한 문자 집합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니코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와 지역화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의 기술인 XML, 자바, 그리고 최신 운영 체제 등에서도 지원하고 있다.\n\n유니코드에서 한국어 발음을 나타날 때는 예일 로마자 표기법의 변형인 ISO/TR 11941을 사용하고 있다.\n", "유니코드의 기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제록스의 조 베커와 애플의 리 콜린스, 마크 데이비스가 통일된 문자 집합을 만드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조 베커는 유니코드라는 이름의 국제/다언어 문자 인코딩 시스템(international/multilingual text character encoding system, tentatively called Unicode)를 위한 초안을 출판하였다.\n=== 버전 ===\n\n\n\n\n\n 유니코드 버전\n\n\n\n 버전\n\n 날짜\n\n 책\n\n 대응하는 ISO/IEC 10646 버전\n\n 문자 집합 수\n\n 글자들\n\n\n\n 전체\n\n 주요 추가 사항\n\n\n\n 1.0.0\n\n 1991년 10월\n\n (Vol.1)\n\n\n\n 24\n\n 7,161\n\n 가타카나, 구르무키 문자, 구자라트 문자, 그리스 문자, 데바나가리, 라오 문자, 라틴 문자, 말라얄람 문자, 벵골 문자, 아랍 문자, 아르메니아 문자, 오리야 문자, 조지아 문자, 주음부호, 칸나다 문자, 키릴 문자, 타밀 문자, 타이 문자, 텔루구 문자, 티베트 문자, 한글, 히라가나, 히브리 문자\n\n\n\n 1.0.1\n\n 1992년 6월\n\n (Vol.2)\n\n\n\n 25\n\n 28,359\n\n 20,902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가 지정됨.\n\n\n\n 1.1\n\n 1993년 6월\n\n\n\n ISO/IEC 10646-1:1993\n\n 24\n\n 34,233\n\n 기존 2,350자의 한글에 4,306자가 더 추가됨. 티베트 문자 삭제.\n\n\n\n 2.0\n\n 1996년 7월\n\n \n\n ISO/IEC 10646-1:1993과 개정 5, 6, 7\n\n 25\n\n 38,950\n\n 기존의 한글 글자마디를 삭제하고, 11,172자의 새 한글 완성자 영역을 새로 지정함. 티베트 문자 새 위치에 추가. 서러게이트 영역을 지정하였고, 제15, 제16평면을 사용자 정의 영역으로 지정함.\n\n\n\n 2.1\n\n 1998년 5월\n\n\n\n ISO/IEC 10646-1:1993과 개정 5, 6, 7, 18\n\n 25\n\n 38,952\n\n 유로 기호 추가.\n\n\n\n 3.0\n\n 1999년 9월\n\n \n\n ISO/IEC 10646-1:2000\n\n 38\n\n 49,259\n\n 룬 문자, 몽골 문자, 버마 문자, 시리아 문자, 신할라 문자, 에티오피아 문자, 오검, 이 문자, 점자, 체로키 문자, 캐나다 원주민 음절 문자, 크메르 문자, 타나 문자\n\n\n\n 3.1\n\n 2001년 3월\n\n\n\n ISO/IEC 10646-1:2000\nISO/IEC 10646-2:2001\n\n 41\n\n 94,205\n\n 고대 이탈리아 문자, 고트 문자, 데저렛 문자와 음악 기호, 42,711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n\n\n\n 3.2\n\n 2002년 3월\n\n\n\n ISO/IEC 10646-1:2000과 개정 1\nISO/IEC 10646-2:2001\n\n 45\n\n 95,221\n\n 부히드 문자, 하누노오 문자, 타갈로그 문자, 타그반와 문자 등 필리핀 문자\n\n\n\n 4.0\n\n 2003년 4월\n\n \n\n ISO/IEC 10646:2003\n\n 52\n\n 96,447\n\n 키프로스 문자, 림부 문자, 선형 B 문자, 오스마냐 문자, 샤비안 문자, 타이 러 문자, 우가리트 문자와 64괘\n\n\n\n 4.1\n\n 2005년 3월 31일\n\n\n\n ISO/IEC 10646:2003과 개정 1\n\n 59\n\n 97,720\n\n 부기 문자, 글라골 문자, 카로슈티 문자, 신 타이 르 문자, 고대 페르시아 문자, 실헤티 나가리, 티피나그 추가, 콥트 문자가 그리스 문자에서 분리. 고대 그리스 숫자와 고대 그리스 음악 기호 추가.\n\n\n\n 5.0\n\n 2006년 7월 18일\n\n \n\n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그리고 개정 3의 문자 4개\n\n 64\n\n 99,089\n\n 발리 문자, 쐐기 문자, 응코 문자, 파스파 문자, 페니키아 문자\n\n\n\n 5.1\n\n 2008년 4월 4일\n\n\n\n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3, 4\n\n 75\n\n 100,713\n\n 카리 문자, 참 문자, 카야흐 리 문자, 렙차 문자, 리키아 문자, 리디아 문자, 올치키 문자, 레장 문자, 사우라슈트라 문자, 순다 문자, 바이 문자, 파이스토스 원반의 기호, 마작 타일과 도미노 타일 추가, 대문자 ß 추가.\n\n\n\n 5.2\n\n 2009년 10월 1일\n\n \n\n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3, 4, 5, 6\n\n 90\n\n 107,361\n\n 문자 15종류 추가, 4149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CJK-C), 옛 한글 확장 자모 추가\n\n\n\n 6.0\n\n 2010년 10월 11일\n\n \n\n ISO/IEC 10646:2010과 인도 루피 기호\n\n 93\n\n 109,449\n\n 문자 3종류 추가, 플레잉카드 기호, 교통 및 지도 기호, 연금술 기호, 이모티콘과 에모지. 222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CJK-D) 추가.\n\n\n\n 6.1\n\n 2012년 1월 31일\n\n \n\n ISO/IEC 10646:2012\n\n 100\n\n 110,181\n\n 문자 7종류\n\n\n\n 6.2\n\n 2012년 9월 27일\n\n \n\n ISO/IEC 10646:2012와 터키 리라 기호\n\n 100\n\n 110,182\n\n 터키 리라 기호\n\n\n\n 6.3\n\n 2013년 9월 30일\n\n \n\n ISO/IEC 10646:2012와 여섯 문자\n\n 100\n\n 110,187\n\n 좌서/우서 형식 문자 5자\n\n\n\n 7.0\n\n 2014년 6월 16일\n\n \n\n ISO/IEC 10646:2012와 개정 1, 2, 루블 기호\n\n 123\n\n 113,021\n\n 문자 23종류와 딩뱃\n\n\n\n 8.0\n\n 2015년 6월 17일\n\n \n\n ISO/IEC 10646:2014와 개정 1, 2, 조지아 라리 기호, 한중일 통합 한자 9자와 에모지 41자\n\n 129\n\n 120,737\n\n 문자 6종류와 5771 한중일 통합 한자(CJK-E), 체로키 소문자, 피부색 조정자 5자\n\n\n\n 9.0\n\n 2016년 6월 21일\n\n \n\n ISO/IEC 10646:2014와 개정 1, 2, 아들람, 네와 문자, 일본 텔레비전 심벌, 74자의 에모지와 심벌\n\n 135\n\n 128,237\n\n 서하 문자 등 6종의 문자와 에모지 72자\n\n\n\n 10.0\n\n 2017년 6월 20일\n\n \n\n ISO/IEC 10646:2016과 개정 1, 2, 헨타이가나, 한중일 통합 한자 21자와 에모지 56자\n\n 139\n\n 136,755\n\n 소욤보문자 등 4종의 문자와 한중일 통합 한자(CJK-F)\n\n\n\n 11.0\n\n 2018년 6월 6일\n\n \n\n ISO/IEC 10646:2017과 개정 1, 2, 도그라 문자 등 8종, 한중일 통합 한자 5자와 에모지 145자\n\n 146\n\n 137,439\n\n 도그라 문자 등 8종의 문자와 에모지 145자\n\n\n\n 12.0\n\n 2019년 3월 5일\n\n \n\n ISO/IEC 10646:2017과 개정 1, 2와 62개 추가 문자\n\n 150\n\n 137,993\n\n 엘리마이스 문자 등 4종과 일본어 고어에 쓰인 소형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등, 에모지 61자\n\n\n\n 12.1\n\n 2019년 5월 7일\n\n \n\n ISO/IEC 10646:2017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n\n 150\n\n 137,994\n\n 레이와 연호 사각문자\n\n\n\n 13.0\n\n 2020년 3월 10일\n\n \n\n ISO/IEC 10646:2020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n\n 154\n\n 143,859\n\n 호라즘 문자, 디베스 아쿠루, 거란 문자 소문자, 예즈드 문자, 한중일 통합 한자(CJK-G), 하우사 문자, 월로프 문자, 힌디코 문자, 펀자브 문자, 에모지 55자\n\n\n\n 14.0\n\n 2021년 9월 22일\n\n \n\n ISO/IEC 10646:2021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n\n 159\n\n 144,697\n\n 토토 문자, 키프로 미노안, 비트쿠키 문자, 고대 위구르 문자, 라틴 문자(확장F, 확장G) 등\n\n\n\n 15.0\n\n 2022년 9월 13일\n\n \n\n ISO/IEC 10646:2022와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n\n 166\n\n 149,186\n\n 카위 문자, 나그 문다리, 카토빅 숫자, 아랍 문자(확장C), 데바나가리 문자(확장A), 한중일 통합 한자(CJK-H) 등\n\n\n\n 15.1\n\n 2023년 9월 12일\n\n \n\n ISO/IEC 10646:2023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n\n 167\n\n 149,813\n\n 한중일 통합 한자(CJK-I)\n\n\n", "\n\n", "유니코드는 2가지 매핑 방식이 있다: 유니코드 변환 형식(Unicode Transformation Format, UTF) 인코딩, 국제 문자 세트(Universal Coded Character Set, UCS) 인코딩.\n\nUTF 인코딩은 다음을 포함한다:\n* UTF-1\n* UTF-7\n* UTF-8\n* UTF-EBCDIC\n* UTF-16\n* UTF-32\n", "\n", "\n* 유니코드 협회\n* 유닉스/리눅스 사용자를 위한 UTF-8 유니코드 FAQ\n* 디코드유니코드(DecodeUnicode) - 유니코드 위키\n* graphemica : 문자 상세정보\n\n\n\n\n \n분류:문자 인코딩" ]
'''유니코드'''(, 정식 명칭 '''The Unicode Standard''')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다. 유니코드는 유니코드 협회()가 제정한다. 또한 이 표준에는 ISO 10646 문자 집합, 문자 인코딩, 문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문자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유니코드의 목적은 현존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들을 모두 유니코드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인코딩들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한정되어 있고, 다국어 환경에서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유니코드가 다양한 문자 집합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니코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와 지역화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의 기술인 XML, 자바, 그리고 최신 운영 체제 등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유니코드에서 한국어 발음을 나타날 때는 예일 로마자 표기법의 변형인 ISO/TR 11941을 사용하고 있다. 유니코드의 기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제록스의 조 베커와 애플의 리 콜린스, 마크 데이비스가 통일된 문자 집합을 만드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조 베커는 유니코드라는 이름의 국제/다언어 문자 인코딩 시스템(international/multilingual text character encoding system, tentatively called Unicode)를 위한 초안을 출판하였다. === 버전 === 유니코드 버전 버전 날짜 책 대응하는 ISO/IEC 10646 버전 문자 집합 수 글자들 전체 주요 추가 사항 1.0.0 1991년 10월 (Vol.1) 24 7,161 가타카나, 구르무키 문자, 구자라트 문자, 그리스 문자, 데바나가리, 라오 문자, 라틴 문자, 말라얄람 문자, 벵골 문자, 아랍 문자, 아르메니아 문자, 오리야 문자, 조지아 문자, 주음부호, 칸나다 문자, 키릴 문자, 타밀 문자, 타이 문자, 텔루구 문자, 티베트 문자, 한글, 히라가나, 히브리 문자 1.0.1 1992년 6월 (Vol.2) 25 28,359 20,902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가 지정됨. 1.1 1993년 6월 ISO/IEC 10646-1:1993 24 34,233 기존 2,350자의 한글에 4,306자가 더 추가됨. 티베트 문자 삭제. 2.0 1996년 7월 ISO/IEC 10646-1:1993과 개정 5, 6, 7 25 38,950 기존의 한글 글자마디를 삭제하고, 11,172자의 새 한글 완성자 영역을 새로 지정함. 티베트 문자 새 위치에 추가. 서러게이트 영역을 지정하였고, 제15, 제16평면을 사용자 정의 영역으로 지정함. 2.1 1998년 5월 ISO/IEC 10646-1:1993과 개정 5, 6, 7, 18 25 38,952 유로 기호 추가. 3.0 1999년 9월 ISO/IEC 10646-1:2000 38 49,259 룬 문자, 몽골 문자, 버마 문자, 시리아 문자, 신할라 문자, 에티오피아 문자, 오검, 이 문자, 점자, 체로키 문자, 캐나다 원주민 음절 문자, 크메르 문자, 타나 문자 3.1 2001년 3월 ISO/IEC 10646-1:2000 ISO/IEC 10646-2:2001 41 94,205 고대 이탈리아 문자, 고트 문자, 데저렛 문자와 음악 기호, 42,711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3.2 2002년 3월 ISO/IEC 10646-1:2000과 개정 1 ISO/IEC 10646-2:2001 45 95,221 부히드 문자, 하누노오 문자, 타갈로그 문자, 타그반와 문자 등 필리핀 문자 4.0 2003년 4월 ISO/IEC 10646:2003 52 96,447 키프로스 문자, 림부 문자, 선형 B 문자, 오스마냐 문자, 샤비안 문자, 타이 러 문자, 우가리트 문자와 64괘 4.1 2005년 3월 31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59 97,720 부기 문자, 글라골 문자, 카로슈티 문자, 신 타이 르 문자, 고대 페르시아 문자, 실헤티 나가리, 티피나그 추가, 콥트 문자가 그리스 문자에서 분리. 고대 그리스 숫자와 고대 그리스 음악 기호 추가. 5.0 2006년 7월 18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그리고 개정 3의 문자 4개 64 99,089 발리 문자, 쐐기 문자, 응코 문자, 파스파 문자, 페니키아 문자 5.1 2008년 4월 4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3, 4 75 100,713 카리 문자, 참 문자, 카야흐 리 문자, 렙차 문자, 리키아 문자, 리디아 문자, 올치키 문자, 레장 문자, 사우라슈트라 문자, 순다 문자, 바이 문자, 파이스토스 원반의 기호, 마작 타일과 도미노 타일 추가, 대문자 ß 추가. 5.2 2009년 10월 1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3, 4, 5, 6 90 107,361 문자 15종류 추가, 4149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CJK-C), 옛 한글 확장 자모 추가 6.0 2010년 10월 11일 ISO/IEC 10646:2010과 인도 루피 기호 93 109,449 문자 3종류 추가, 플레잉카드 기호, 교통 및 지도 기호, 연금술 기호, 이모티콘과 에모지. 222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CJK-D) 추가. 6.1 2012년 1월 31일 ISO/IEC 10646:2012 100 110,181 문자 7종류 6.2 2012년 9월 27일 ISO/IEC 10646:2012와 터키 리라 기호 100 110,182 터키 리라 기호 6.3 2013년 9월 30일 ISO/IEC 10646:2012와 여섯 문자 100 110,187 좌서/우서 형식 문자 5자 7.0 2014년 6월 16일 ISO/IEC 10646:2012와 개정 1, 2, 루블 기호 123 113,021 문자 23종류와 딩뱃 8.0 2015년 6월 17일 ISO/IEC 10646:2014와 개정 1, 2, 조지아 라리 기호, 한중일 통합 한자 9자와 에모지 41자 129 120,737 문자 6종류와 5771 한중일 통합 한자(CJK-E), 체로키 소문자, 피부색 조정자 5자 9.0 2016년 6월 21일 ISO/IEC 10646:2014와 개정 1, 2, 아들람, 네와 문자, 일본 텔레비전 심벌, 74자의 에모지와 심벌 135 128,237 서하 문자 등 6종의 문자와 에모지 72자 10.0 2017년 6월 20일 ISO/IEC 10646:2016과 개정 1, 2, 헨타이가나, 한중일 통합 한자 21자와 에모지 56자 139 136,755 소욤보문자 등 4종의 문자와 한중일 통합 한자(CJK-F) 11.0 2018년 6월 6일 ISO/IEC 10646:2017과 개정 1, 2, 도그라 문자 등 8종, 한중일 통합 한자 5자와 에모지 145자 146 137,439 도그라 문자 등 8종의 문자와 에모지 145자 12.0 2019년 3월 5일 ISO/IEC 10646:2017과 개정 1, 2와 62개 추가 문자 150 137,993 엘리마이스 문자 등 4종과 일본어 고어에 쓰인 소형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등, 에모지 61자 12.1 2019년 5월 7일 ISO/IEC 10646:2017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 150 137,994 레이와 연호 사각문자 13.0 2020년 3월 10일 ISO/IEC 10646:2020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 154 143,859 호라즘 문자, 디베스 아쿠루, 거란 문자 소문자, 예즈드 문자, 한중일 통합 한자(CJK-G), 하우사 문자, 월로프 문자, 힌디코 문자, 펀자브 문자, 에모지 55자 14.0 2021년 9월 22일 ISO/IEC 10646:2021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 159 144,697 토토 문자, 키프로 미노안, 비트쿠키 문자, 고대 위구르 문자, 라틴 문자(확장F, 확장G) 등 15.0 2022년 9월 13일 ISO/IEC 10646:2022와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 166 149,186 카위 문자, 나그 문다리, 카토빅 숫자, 아랍 문자(확장C), 데바나가리 문자(확장A), 한중일 통합 한자(CJK-H) 등 15.1 2023년 9월 12일 ISO/IEC 10646:2023과 개정 1, 2와 63개 추가 문자 167 149,813 한중일 통합 한자(CJK-I) 유니코드는 2가지 매핑 방식이 있다: 유니코드 변환 형식(Unicode Transformation Format, UTF) 인코딩, 국제 문자 세트(Universal Coded Character Set, UCS) 인코딩. UTF 인코딩은 다음을 포함한다: * UTF-1 * UTF-7 * UTF-8 * UTF-EBCDIC * UTF-16 * UTF-32 * 유니코드 협회 * 유닉스/리눅스 사용자를 위한 UTF-8 유니코드 FAQ * 디코드유니코드(DecodeUnicode) - 유니코드 위키 * graphemica : 문자 상세정보 분류:문자 인코딩
언어
[ "Introduction", "기원", "세계의 언어", "어족과 분류", "언어의 종류", "수화", "인공어", "기타", "목록",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언어'''(言語)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예의 일부이다.\n\n#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체계.\n# 사물, 행동, 생각, 그리고 상태를 나타내는 체계.\n#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의미들의 체계.\n# 문법적으로 맞는 말의 집합.\n# 언어 공동체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의 집합.\n\n언어학은 이러한 언어가 발현되는 부분, 즉 음성, 의미, 문법, 형태 등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언어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며 연구하는 학문, 즉 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유형론) 등까지를 포괄한다.\n\n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컴퓨터나 수학 등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상호 효과적인 의사교환을 위해 고안된 것을 인공어라고 한다.\n", "\n", "\n\n자연어 중에 세계적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모국어를 기준으로 사용하는 인구가\n많은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괄호 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나타낸다.\n\n* 관화(官話)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n:모어 인구 : 844,850,000명\n* 스페인어(Español) (스페인, 멕시코, 쿠바, 코스타리카,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등)\n:모어 인구 : 450,600,000명\n* 영어(English)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자메이카, 싱가포르, 인도 등)\n:모어 인구 : 344,500,000명\n* 힌디어(हिन्दी)/우르두어(اُردوُ) (인도, 파키스탄)\n:모어 인구 : 315,445,000명\n*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n:모어 인구 : 280,000,000명\n* 아랍어(العربية)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모로코 등)\n:모어 인구 : 231,500,000명\n* 포르투갈어(Português) (포르투갈, 브라질 등)\n:모어 인구 : 181,000,000명\n* 프랑스어(Français) (프랑스, 캐나다 퀘벡주, 벨기에, 스위스, 세네갈 등)\n:모어 인구 : 175,900,000명\n* 러시아어(Русский язык) (러시아 등)\n:모어 인구 : 152,500,000명\n* 벵골어(বাংলা) (방글라데시, 인도 등)\n:모어 인구 : 151,400,000명\n* 일본어(日本語) (일본, 팔라우 앙가우르 주)\n:모어 인구 : 127,500,000명\n* 베트남어(Tiếng Việt) (베트남, 미국, 캄보디아, 중화인민공화국, 프랑스 등)\n:모어 인구 : 97,000,000명\n* 독일어(Deutsch)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나미비아 등)\n:모어 인구(제1언어 사용 인구) : 95,200,000명\n* 우어(吳語) (중화인민공화국)\n:모어 인구 : 77,200,000명\n* 한국어(한국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등)\n:모어 인구 : 76,500,000명\n* 자와어(Basa Jaw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프랑스, 수리남)\n:모어 인구 : 75,550,000명\n* 펀자브어(ਪੰਜਾਬੀ, پنجابی) (파키스탄, 인도)\n:모어 인구 : 75,250,000명\n* 텔루구어(తెలుగు) (인도)\n:모어 인구 : 69,750,000명\n* 마라티어(मराठी) (인도)\n:모어 인구 : 68,050,000명\n* 타밀어(தமிழ்)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모리셔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n:모어 인구 : 65,850,000명\n* 이탈리아어(Italiano) (이탈리아, 스위스)\n:모어 인구 : 61,850,000명\n* 튀르키예어(Türkçe)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북키프로스)\n:모어 인구 : 54,500,000명\n* 히브리어(עברית) (이스라엘, 팔레스타인)\n:모어 인구 : 7,400,000명\n", "어족의 분포\n\n자연어는 어족 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은 고립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현재 고립어로 분류돼 있으며, 일본어 및 알타이어와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다.\n\n=== 유전적 분류 ===\n* 인도유럽어족\n* 데네캅카스어족\n** 중국티베트어족\n* (우랄알타이어족)\n** 우랄어족\n** (알타이어족)\n* 오스트로네시아어족\n* 아프로아시아어족\n* 니제르콩고어족\n* 나일사하라어족\n* 코이산어족\n\n=== 유형론적 분류 ===\n==== 어순에 따른 분류 ====\n* SVO형(주어-서술어-목적어) 언어\n* SOV형(주어-목적어-서술어) 언어\n* VSO형(서술어-주어-목적어) 언어\n\n==== 형태론적 분류 ====\n* 고립어\n* 교착어\n* 굴절어\n* 포합어\n\n==== 형태통사적 결합에 따른 분류 ====\n* 대격 언어\n* 능격 언어\n* 삼분법언어\n* 오스트로네시아형 결합\n* 활격 언어\n", "=== 표현하는 방식에 따른 언어의 종류 ===\n* 음성언어 : 음성으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식이다.\n* 문자언어 : 문자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백과사전\"이라는 문자로 표현하는 식이다.\n\n=== 현존여부에 따른 언어의 종류 ===\n* 활어(活語) : 현재 통용되는 언어이다. 한국어, 영어 등이 있다.\n* 사어(死語) : 현재 통용되지 않는 언어이다. 라틴어, 만주어 등이 있다.\n", "\n손의 모양으로 의사 소통하는 수화도 언어의 일종이며 음성언어와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n", "\n\n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인공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n\n* 실제 커뮤니케이션, 혹은 그 유사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 : 에스페란토 같은 국제어, 소설 등의 매체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어 등의 가공언어. 특히 인공어라는 단어가 요즈음에는 이 경우에 쓰이고 있다.\n* 형식 언어 : 수학에서 사용하는 언어\n* 프로그래밍 언어 :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언어\n",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n", "* 언어 목록 (분류)\n* 언어 목록 (문서)\n* 에스놀로그 - 언어, 위치, 인구, 기원의 목록\n* 공용어 목록\n", "* 언어의 기원\n* 언어별 기초 회화\n* 소리\n* 언어 행위\n", "\n", "\n\n* 네이버 캐스트 - 동물들은 왜 말을 못하나\n\n\n\n " ]
'''언어'''(言語)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예의 일부이다. #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체계. # 사물, 행동, 생각, 그리고 상태를 나타내는 체계. #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의미들의 체계. # 문법적으로 맞는 말의 집합. # 언어 공동체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의 집합. 언어학은 이러한 언어가 발현되는 부분, 즉 음성, 의미, 문법, 형태 등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언어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며 연구하는 학문, 즉 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유형론) 등까지를 포괄한다. 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컴퓨터나 수학 등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상호 효과적인 의사교환을 위해 고안된 것을 인공어라고 한다. 자연어 중에 세계적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모국어를 기준으로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괄호 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나타낸다. * 관화(官話)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 :모어 인구 : 844,850,000명 * 스페인어(Español) (스페인, 멕시코, 쿠바, 코스타리카,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등) :모어 인구 : 450,600,000명 * 영어(English)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자메이카, 싱가포르, 인도 등) :모어 인구 : 344,500,000명 * 힌디어(हिन्दी)/우르두어(اُردوُ) (인도, 파키스탄) :모어 인구 : 315,445,000명 *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모어 인구 : 280,000,000명 * 아랍어(العربية)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모로코 등) :모어 인구 : 231,500,000명 * 포르투갈어(Português) (포르투갈, 브라질 등) :모어 인구 : 181,000,000명 * 프랑스어(Français) (프랑스, 캐나다 퀘벡주, 벨기에, 스위스, 세네갈 등) :모어 인구 : 175,900,000명 * 러시아어(Русский язык) (러시아 등) :모어 인구 : 152,500,000명 * 벵골어(বাংলা) (방글라데시, 인도 등) :모어 인구 : 151,400,000명 * 일본어(日本語) (일본, 팔라우 앙가우르 주) :모어 인구 : 127,500,000명 * 베트남어(Tiếng Việt) (베트남, 미국, 캄보디아, 중화인민공화국, 프랑스 등) :모어 인구 : 97,000,000명 * 독일어(Deutsch)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나미비아 등) :모어 인구(제1언어 사용 인구) : 95,200,000명 * 우어(吳語) (중화인민공화국) :모어 인구 : 77,200,000명 * 한국어(한국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등) :모어 인구 : 76,500,000명 * 자와어(Basa Jaw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프랑스, 수리남) :모어 인구 : 75,550,000명 * 펀자브어(ਪੰਜਾਬੀ, پنجابی) (파키스탄, 인도) :모어 인구 : 75,250,000명 * 텔루구어(తెలుగు) (인도) :모어 인구 : 69,750,000명 * 마라티어(मराठी) (인도) :모어 인구 : 68,050,000명 * 타밀어(தமிழ்)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모리셔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모어 인구 : 65,850,000명 * 이탈리아어(Italiano) (이탈리아, 스위스) :모어 인구 : 61,850,000명 * 튀르키예어(Türkçe)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 북키프로스) :모어 인구 : 54,500,000명 * 히브리어(עברית)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모어 인구 : 7,400,000명 어족의 분포 자연어는 어족 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은 고립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현재 고립어로 분류돼 있으며, 일본어 및 알타이어와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다. === 유전적 분류 === * 인도유럽어족 * 데네캅카스어족 ** 중국티베트어족 * (우랄알타이어족) ** 우랄어족 ** (알타이어족) * 오스트로네시아어족 * 아프로아시아어족 * 니제르콩고어족 * 나일사하라어족 * 코이산어족 === 유형론적 분류 === ==== 어순에 따른 분류 ==== * SVO형(주어-서술어-목적어) 언어 * SOV형(주어-목적어-서술어) 언어 * VSO형(서술어-주어-목적어) 언어 ==== 형태론적 분류 ==== * 고립어 * 교착어 * 굴절어 * 포합어 ==== 형태통사적 결합에 따른 분류 ==== * 대격 언어 * 능격 언어 * 삼분법언어 * 오스트로네시아형 결합 * 활격 언어 === 표현하는 방식에 따른 언어의 종류 === * 음성언어 : 음성으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 문자언어 : 문자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백과사전"이라는 문자로 표현하는 식이다. === 현존여부에 따른 언어의 종류 === * 활어(活語) : 현재 통용되는 언어이다. 한국어, 영어 등이 있다. * 사어(死語) : 현재 통용되지 않는 언어이다. 라틴어, 만주어 등이 있다. 손의 모양으로 의사 소통하는 수화도 언어의 일종이며 음성언어와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인공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 실제 커뮤니케이션, 혹은 그 유사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 : 에스페란토 같은 국제어, 소설 등의 매체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어 등의 가공언어. 특히 인공어라는 단어가 요즈음에는 이 경우에 쓰이고 있다. * 형식 언어 : 수학에서 사용하는 언어 * 프로그래밍 언어 :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언어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 언어 목록 (분류) * 언어 목록 (문서) * 에스놀로그 - 언어, 위치, 인구, 기원의 목록 * 공용어 목록 * 언어의 기원 * 언어별 기초 회화 * 소리 * 언어 행위 * 네이버 캐스트 - 동물들은 왜 말을 못하나
심리학
[ "Introduction", "정의와 어원", "역사", "심리학의 연구방법론", "심리학의 분야", "주요 이론", "주요 심리학자",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n'''심리학'''(, )은 인간과 동물의 행동과 그 행동에 관련된 심리적, 생리적, 사회적 과정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학의 한 분야를 뜻한다. 인지심리학, 발달 심리학, 변질 심리학 따위의 여러 갈래로 나누며, 산업, 교육, 인문과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 등과 실생활에 널리 응용되고 있다. \n\n심리학은 연구 분야에 따라 크게 심리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다루는 '기초심리학'과 이러한 원리와 이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용심리학'으로 나뉘며,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우에는 14개 분과, 미국의 경우 본과 제외 56개 분과가 있다.\n\n고대로부터 철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었는데, 이런 이유는 마음이란 물질이 아니기에 과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철학에서 분화되어 독립적인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n\n오늘날 심리학은 과거 철학자들이 하던 사색의 방향을 떠나서 엄밀한 과학적 실험을 주된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심리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일부로 자처하기도 한다. 문제를 엄격한 연구법에 따라 경험적으로 접근하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에 사회과학 중에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엄격한 접근을 취하는 학문으로 여겨진다.\n\n심리학은 다양한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연구인 심리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정보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된 문제들이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에는 감각, 지각, 사고, 성격, 지능, 적성 등의 인간 특징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기저 원리를 밝히는 심리학은 미래 사회에서 점점 더 그 중요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n", "\n=== 정의 ===\n심리학의 다양성으로 인해 확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심리학자들 간에는 심리학의 정의, 목표, 연구방법을 설명하는 데 이견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심리학을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심리학은 인간행동의 포괄적인 설명에 목표를 두고 있다. 둘째, 심리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정의, 분명하게 규정된 절차, 그리고 결과의 항상성을 강조하는 일반화된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중요 요인을 고려한다면,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과정과 행동에 관한 과학적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n\n=== 어원 ===\n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단어는 영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psyche''와 어떤 주제를 연구한다는 의미의 ''logos''가 합쳐진 것으로, 초기에는 심리학을 ‘영혼에 대한 탐구’라고 하였다. 이것은 초기 심리학자들이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7세기 영국의 임상의학을 대표했던 토머스 윌리스(1621년 - 1675년)가 정신과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 철학 및 과학적인 바탕 ===\n기원전부터 심리학에 대한 탐구는 계속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심리학'이란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n\n파티마 칼리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은 1010년 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라틴어 이름: 루돌프 고클레니우스)는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릭은 조건을 사용한 그의 작업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n\n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Psychologia empirica and Psychologia rationalis'', 1732년-1734년)》을 출간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랑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n\n=== 심리학의 성립 ===\n\n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기존의 철학의 한 분야로 취급되던 심리학은 점차 철학에서 분화되어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아 나가게 되었다. 그 시작은 1879년,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 대학에 첫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실험실을 개설하면서 부터였다. 분트는 자신을 '심리학자'라고 했으며, 심리학이 독립된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활을 했다. 또한 그는 심리학을 직접경험 학문이라 정의했으며, 연구 방법론으로는 '내성법'을 주장하였다.\n\n비슷한 시기에 심리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실험이 이어졌는데, 독일의 에빙하우스가 베를린 대학에서 기억과 망각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수행하여 1885년 망각곡선 가설과 간격효과에 대해 발표했다. 1890년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당시 심리학에서 다루는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라는 책을 저술, 출간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다.\n\n근대 이전에 마음이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음은 영혼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으며, 물질이 아니므로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지 않았고 물질이 아닌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리학을 철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으나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되자 심리학은 체계적이며 과학적으로 연구가 가능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n\n=== 형태주의 심리학 ===\n\n형태주의 심리학(또는 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 Wertheimer)가 자신의 논문 (Experimental studies on the perception of movement)을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 에렌펠스, 칼 슈툼프(Carl Stumpf)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흐는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주장하여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슈툼프(Stumpf)는 분트(Wundt)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n\n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apparent motion)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phi)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코프카(Koffka)와 콜러(Kohler)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슈툼프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코프카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콜러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라 이름붙여 발표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n\n레빈(Lewin)은 여러 가지 이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이다. 레빈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차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다.\n\n===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심리학 ===\n189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과 의식,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이 중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의식'의 발견, 그리고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n\n프로이트 이후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유명한 학자로는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 등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곧 과학적 엄밀성의 결여, 경험적 증거의 부족, 이론체계의 반증불가능성 등으로 인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과학철학자 포퍼에 의해 유사과학의 세 가지 사례들 중 하나로 지적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칼포퍼가 주장한 반증 가능성과 경험적 증거가 과학의 주요한 속성이라는 주장이 속속히 반박당하고 오류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지적은 상당부분 수그러들었다. \n\n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들과 문제점,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발감 등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어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지 않으며, 그들은 미국 심리학회 단체들 중 가장 큰 단체인 APA의 10% 미만,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단체인 APS의 5% 미만을 차지한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기초심리학자들) 중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학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정신분석은 문학비평 등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라 할 수 있다.\n\n=== 행동주의 심리학 ===\n20세기 초 1920년대를 전후해서 왓슨, 손다이크, 헐(C. Hull), 톨먼(E. Tolman), 스키너 등에 의해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창되었다. 이들은 쥐, 비둘기 등의 동물을 이용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학습이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주장하였다. 이 자극 반응 이론(S-R 이론)으로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 여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특히 심리학의 과학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검증 가능한 것'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검증 가능한 것'들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 이전의 큰 심리학적 흐름이었던 정신분석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n\n그러나 행동주의자들은 '검증가능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정작 심리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심적, 내적 과정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한 결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인지혁명 이후 주된 패러다임의 자리를 인지심리학 등 다른 분야에 내주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과장된 비유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원래 뜻은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 본능이 행동으로 직결되며 이 외의 요소나 우연 등의 예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이나 언어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로 얻은 정보와 연관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성격을 확신하여 규명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뜻이다.\n\n=== 인본주의 심리학 ===\n1950년대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가 주창한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인본주의 심리학이 파급되었다. 주요 심리학자로는 욕구이론을 주창한 매슬로, 인간중심 심리치료를 주창한 로저스, 직관적이며 전체적 인지를 중시한 장 이론인 게슈탈트 심리학을 주창한 펄스(F. Perls) 등이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과 인본주의 심리학은 같다.)\n\n=== 인지주의 심리학 ===\n인지심리학은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으나 20세기 후반(196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지혁명'은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보았는데, 이로 인해 행동주의 심리학은 '블랙박스 심리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n\n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 측정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의 심적, 내적 과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러한 자극-반응이 어떠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거의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엄 촘스키 등 언어학자들과 앨런 튜링,폰 노이만 등의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지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촘스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내적 심리과정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n\n당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인지주의 심리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지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달리 내적인 심리과정을 중시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 특히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접 학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로 인해 인지심리학은 흔히 인간정보처리론(human information processing)이라고도 불린다. 인지심리학은 현재 인접 학문들-철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언어학 등-과 협력하여 인간 인지과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크게 간학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지주의 심리학의 거장으로는 알버트 엘리스, 아론 벡등이 거론된다.\n", "심리학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질적 연구방법과 양적 연구방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전자는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후자는 주로 기초 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나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도 많다. 양적 연구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성을 수치화, 계량화하기 용이한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연구방법이 적합한 사례로는 반응시간(response time)연구, 지능 연구와 같은 것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은 통계학의 지식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의 특성을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n\n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적 연구방법론에는 IRT(문항반응이론), 다층 모형(Multilevel model), 구조방정식모형(Structural equation model), 경로분석(path analysis), 요인분석(Factor analysis)등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론의 가장 큰 강점은 일반화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질적 연구방법은 이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례를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임상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상담, 질문지 작성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내담자나 연구대상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있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은 심리학을 경험과학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n", "=== 기초 심리학 ===\n과학자형 모델로 대표되는 기초 심리학은 심리학의 학문적 바탕의 확립을 목표로 기초적 지식과 심리적 기제를 실험을 통해서 연구한다. 주로 인지 심리학, 학습 심리학, 발달심리학, 사회심리학, 생리심리학, 신경심리학 등이 포함되며 이는 귀납적 사고를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연역적 사고도 이용한다. 한편 이러한 주요한 과학자형 모델에는 구성개념을 전제로 하는 심리통계, 심리측정 및 검사 등의 수학적 접근이 포함된다.\n\n=== 응용 심리학 ===\n전문가형 모델로 대표되는 응용 심리학은 심리학의 실재 현장 장면의 적용을 목표로 적용 방법과 원리를 연구한다.\n심리학의 방법과 결과를 실제 생활이나 실제 문제에 응용하려는 학문으로 심리학의 한 분야이다. 산업 심리학, 임상 심리학, 교육 심리학, 범죄 심리학, 건강 심리학, 여성심리학등이 이에 속한다.\n\n==== 임상 심리학 ====\n임상 심리학은 정신건강에관한 정신적 이슈가 다루질 필요성에서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이다.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취약성-스트레스 모델등 통합적으로 의학적 조건(medical conditions)과 임상 과정(clinical process) 및 인지주의 또는 행동주의심리학등 여러 심리학적 접근을 다룬다.\n\n==== 상담 심리학 ====\n상담 심리학(Counseling Psychology)은 정신적 이슈를 가진 사람들을 진단하거나 심리적 부담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가진 심리학 분야이다. 상담 심리학 교육과정에는 검증된 상담이론을 비롯한 성격심리학•발달 심리학 등 다양한 이론 교육과 개인•집단상담 기법, 심리진단•평가, 사례 분석 등 다양한 실습 교육이 있다. \n\n약물 처방권을 가진 정신과 의사와 비교해서 상담심리사는 생리심리학이나 약물심리학 또는 건강심리학 등을 고려해 다양한 치료기법과 기술을 통해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특정상황을 고려한 정신건강의 이슈에따라 이의 개선을 위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가 병행되거나 약물치료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 또한 다른 심리학처럼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현재 상담 심리학은 기업, 학교, 기관 등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n", "* 무의식\n* 초자아\n* 트라우마\n* 방어기제\n* 정신분석\n* 게슈탈트 붕괴\n* 고전적 조건형성\n* 조작적 조건형성\n* 인지부조화\n* 바넘 효과\n* 심리 검사\n* 성격 검사\n* 초두효과\n* 설단 현상\n* 칵테일 파티 효과\n* 전경-배경 이론\n* 깨진 유리창 이론\n* 정보처리이론\n* 루시퍼 이펙트\n* 스탠퍼드 감옥 실험\n* 편안한 복제인간 증후군\n* 원인론\n* 목적론\n* 해석 수준 이론\n", "* 빌헬름 분트 심리학의 아버지\n* 헤르만 에빙하우스 망각곡선 연구\n* 찰스 다윈 진화심리학의 시조. 감정표현 연구의 선구자\n* 프랜시스 골턴 심리측정의 선구자\n* 제임스 카텔 미국 심리측정학의 대가\n* 비네 지능검사 고안자\n* 손다이크 교육심리학, 심리측정의 대가\n* 르윈 게슈탈트 심리학자, 인지심리학자, 사회심리학자.\n*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창시자,의식-무의식 개념\n* 카를 융 집단무의식\n* 장 피아제 발달 이론의 대부, 지능을 수식으로 표현\n* 벌루스 스키너 보상 처벌 이론, 처벌 금지 법안\n* 데이비드 로젠한 논문 \"제 정신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On Being Sane in Insane Places)\"\n* 스탠리 밀그램 밀그램 실험, 권위에의 복종\n*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감옥 실험, 루시퍼 이펙트\n* 에이브러햄 매슬로 욕구 제단계 이론\n* 칼 로저스 인본주의 심리학의 아버지\n* 에드워드 톨먼 잠재학습 연구\n* 노엄 촘스키 언어 심리학자\n* 율릭 나이서 인지심리학의 초창기 공헌자\n* 레프 세메노비치 비고츠키 언어로 사회-문화적 맥락에 관련지어 설명\n* 대니얼 카너먼, 아모스 트버스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편향과 추단법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 수상\n* 라몬 이 카할, 골지 뉴런 연구의 선구자\n* 폴 브로카, 베르니케 브로카 영역, 베르니케 영역의 발견\n* 도널드 헵 헵의 법칙 발견\n* 콘라드 로렌츠 각인 현상의 발견자\n* 에릭 에릭슨\n", "* 심리치료\n* 재난심리학(disaster psychology)\n* 군사심리학(:en:Military psychology)\n* 군중심리학\n** 자살 예방(:en:Suicide prevention)\n* 환경심리학(:en:Environmental psychology)\n** 깨진 유리창 이론\n** 범죄예방 환경설계\n* 심리역사학(:en:Psychohistory)\n** 로이드 드마우스(:en:Lloyd deMause)\n* 의상심리학(clothing psychology)\n* 의사소통(휴먼 커뮤니케이션)\n* 대인간 커뮤니케이션(:en:Interpersonal communication)\n** 잔소리 (심리)(:en:Nagging)\n* 편집성 인격 장애\n* 폭력 / 가정폭력\n* 아동학대 / 동물학대\n* 힐가드와 애트킨슨의 심리학 원론(Atkinson & Hilgard's Introduction to Psychology)\n* 볼더 모델\n* 찰스 다윈\n", "\n", "\n; 대한민국의 심리학회\n* 한국 심리학회\n* 한국 임상심리학회\n* 한국 상담심리학회\n* 한국 산업 및 조직심리학회\n* 한국 사회 및 성격심리학회\n* 한국 발달심리학회\n* 한국 인지 및 생물심리학회\n* 한국 사회문제심리학회\n* 한국 건강심리학회\n* 한국 소비자광고심리학회\n* 한국 학교심리학회\n* 한국 중독심리학회\n; 미국의 심리학회\n* 미국 심리학회\n\n\n\n\n\n \n분류:행동과학" ]
'''심리학'''(, )은 인간과 동물의 행동과 그 행동에 관련된 심리적, 생리적, 사회적 과정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학의 한 분야를 뜻한다. 인지심리학, 발달 심리학, 변질 심리학 따위의 여러 갈래로 나누며, 산업, 교육, 인문과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 등과 실생활에 널리 응용되고 있다. 심리학은 연구 분야에 따라 크게 심리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다루는 '기초심리학'과 이러한 원리와 이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용심리학'으로 나뉘며,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우에는 14개 분과, 미국의 경우 본과 제외 56개 분과가 있다. 고대로부터 철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었는데, 이런 이유는 마음이란 물질이 아니기에 과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철학에서 분화되어 독립적인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오늘날 심리학은 과거 철학자들이 하던 사색의 방향을 떠나서 엄밀한 과학적 실험을 주된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심리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일부로 자처하기도 한다. 문제를 엄격한 연구법에 따라 경험적으로 접근하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에 사회과학 중에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엄격한 접근을 취하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심리학은 다양한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연구인 심리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정보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된 문제들이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에는 감각, 지각, 사고, 성격, 지능, 적성 등의 인간 특징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기저 원리를 밝히는 심리학은 미래 사회에서 점점 더 그 중요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정의 === 심리학의 다양성으로 인해 확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심리학자들 간에는 심리학의 정의, 목표, 연구방법을 설명하는 데 이견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여 심리학을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심리학은 인간행동의 포괄적인 설명에 목표를 두고 있다. 둘째, 심리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정의, 분명하게 규정된 절차, 그리고 결과의 항상성을 강조하는 일반화된 과학적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중요 요인을 고려한다면, 심리학은 ‘인간의 정신과정과 행동에 관한 과학적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어원 ===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단어는 영혼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psyche''와 어떤 주제를 연구한다는 의미의 ''logos''가 합쳐진 것으로, 초기에는 심리학을 ‘영혼에 대한 탐구’라고 하였다. 이것은 초기 심리학자들이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7세기 영국의 임상의학을 대표했던 토머스 윌리스(1621년 - 1675년)가 정신과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심리학(psychology)'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철학 및 과학적인 바탕 === 기원전부터 심리학에 대한 탐구는 계속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심리학'이란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은 1010년 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라틴어 이름: 루돌프 고클레니우스)는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릭은 조건을 사용한 그의 작업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Psychologia empirica and Psychologia rationalis'', 1732년-1734년)》을 출간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랑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심리학의 성립 ===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기존의 철학의 한 분야로 취급되던 심리학은 점차 철학에서 분화되어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아 나가게 되었다. 그 시작은 1879년,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 대학에 첫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실험실을 개설하면서 부터였다. 분트는 자신을 '심리학자'라고 했으며, 심리학이 독립된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활을 했다. 또한 그는 심리학을 직접경험 학문이라 정의했으며, 연구 방법론으로는 '내성법'을 주장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심리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실험이 이어졌는데, 독일의 에빙하우스가 베를린 대학에서 기억과 망각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수행하여 1885년 망각곡선 가설과 간격효과에 대해 발표했다. 1890년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당시 심리학에서 다루는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라는 책을 저술, 출간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다. 근대 이전에 마음이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음은 영혼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으며, 물질이 아니므로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지 않았고 물질이 아닌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리학을 철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으나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되자 심리학은 체계적이며 과학적으로 연구가 가능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 형태주의 심리학 === 형태주의 심리학(또는 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 Wertheimer)가 자신의 논문 (Experimental studies on the perception of movement)을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 에렌펠스, 칼 슈툼프(Carl Stumpf)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흐는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주장하여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슈툼프(Stumpf)는 분트(Wundt)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apparent motion)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phi)운동'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코프카(Koffka)와 콜러(Kohler)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슈툼프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코프카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콜러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라 이름붙여 발표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레빈(Lewin)은 여러 가지 이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이다. 레빈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차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다. ===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심리학 === 189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과 의식,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이 중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의식'의 발견, 그리고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후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유명한 학자로는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융,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 등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곧 과학적 엄밀성의 결여, 경험적 증거의 부족, 이론체계의 반증불가능성 등으로 인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과학철학자 포퍼에 의해 유사과학의 세 가지 사례들 중 하나로 지적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칼포퍼가 주장한 반증 가능성과 경험적 증거가 과학의 주요한 속성이라는 주장이 속속히 반박당하고 오류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지적은 상당부분 수그러들었다.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들과 문제점,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발감 등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어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지 않으며, 그들은 미국 심리학회 단체들 중 가장 큰 단체인 APA의 10% 미만,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단체인 APS의 5% 미만을 차지한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기초심리학자들) 중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학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정신분석은 문학비평 등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라 할 수 있다. === 행동주의 심리학 === 20세기 초 1920년대를 전후해서 왓슨, 손다이크, 헐(C. Hull), 톨먼(E. Tolman), 스키너 등에 의해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창되었다. 이들은 쥐, 비둘기 등의 동물을 이용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학습이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주장하였다. 이 자극 반응 이론(S-R 이론)으로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 여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특히 심리학의 과학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검증 가능한 것'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검증 가능한 것'들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 이전의 큰 심리학적 흐름이었던 정신분석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행동주의자들은 '검증가능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정작 심리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심적, 내적 과정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한 결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인지혁명 이후 주된 패러다임의 자리를 인지심리학 등 다른 분야에 내주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과장된 비유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원래 뜻은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 본능이 행동으로 직결되며 이 외의 요소나 우연 등의 예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이나 언어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로 얻은 정보와 연관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성격을 확신하여 규명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뜻이다. === 인본주의 심리학 === 1950년대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가 주창한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인본주의 심리학이 파급되었다. 주요 심리학자로는 욕구이론을 주창한 매슬로, 인간중심 심리치료를 주창한 로저스, 직관적이며 전체적 인지를 중시한 장 이론인 게슈탈트 심리학을 주창한 펄스(F. Perls) 등이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과 인본주의 심리학은 같다.) === 인지주의 심리학 === 인지심리학은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장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으나 20세기 후반(196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지혁명'은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보았는데, 이로 인해 행동주의 심리학은 '블랙박스 심리학'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 측정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의 심적, 내적 과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러한 자극-반응이 어떠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거의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엄 촘스키 등 언어학자들과 앨런 튜링,폰 노이만 등의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지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촘스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내적 심리과정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당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인지주의 심리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지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달리 내적인 심리과정을 중시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 특히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접 학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로 인해 인지심리학은 흔히 인간정보처리론(human information processing)이라고도 불린다. 인지심리학은 현재 인접 학문들-철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언어학 등-과 협력하여 인간 인지과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크게 간학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지주의 심리학의 거장으로는 알버트 엘리스, 아론 벡등이 거론된다. 심리학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질적 연구방법과 양적 연구방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전자는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후자는 주로 기초 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나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도 많다. 양적 연구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성을 수치화, 계량화하기 용이한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연구방법이 적합한 사례로는 반응시간(response time)연구, 지능 연구와 같은 것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은 통계학의 지식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의 특성을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적 연구방법론에는 IRT(문항반응이론), 다층 모형(Multilevel model), 구조방정식모형(Structural equation model), 경로분석(path analysis), 요인분석(Factor analysis)등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론의 가장 큰 강점은 일반화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질적 연구방법은 이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례를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임상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상담, 질문지 작성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내담자나 연구대상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있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은 심리학을 경험과학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기초 심리학 === 과학자형 모델로 대표되는 기초 심리학은 심리학의 학문적 바탕의 확립을 목표로 기초적 지식과 심리적 기제를 실험을 통해서 연구한다. 주로 인지 심리학, 학습 심리학, 발달심리학, 사회심리학, 생리심리학, 신경심리학 등이 포함되며 이는 귀납적 사고를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연역적 사고도 이용한다. 한편 이러한 주요한 과학자형 모델에는 구성개념을 전제로 하는 심리통계, 심리측정 및 검사 등의 수학적 접근이 포함된다. === 응용 심리학 === 전문가형 모델로 대표되는 응용 심리학은 심리학의 실재 현장 장면의 적용을 목표로 적용 방법과 원리를 연구한다. 심리학의 방법과 결과를 실제 생활이나 실제 문제에 응용하려는 학문으로 심리학의 한 분야이다. 산업 심리학, 임상 심리학, 교육 심리학, 범죄 심리학, 건강 심리학, 여성심리학등이 이에 속한다. ==== 임상 심리학 ==== 임상 심리학은 정신건강에관한 정신적 이슈가 다루질 필요성에서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이다.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취약성-스트레스 모델등 통합적으로 의학적 조건(medical conditions)과 임상 과정(clinical process) 및 인지주의 또는 행동주의심리학등 여러 심리학적 접근을 다룬다. ==== 상담 심리학 ==== 상담 심리학(Counseling Psychology)은 정신적 이슈를 가진 사람들을 진단하거나 심리적 부담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가진 심리학 분야이다. 상담 심리학 교육과정에는 검증된 상담이론을 비롯한 성격심리학•발달 심리학 등 다양한 이론 교육과 개인•집단상담 기법, 심리진단•평가, 사례 분석 등 다양한 실습 교육이 있다. 약물 처방권을 가진 정신과 의사와 비교해서 상담심리사는 생리심리학이나 약물심리학 또는 건강심리학 등을 고려해 다양한 치료기법과 기술을 통해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특정상황을 고려한 정신건강의 이슈에따라 이의 개선을 위해 약물치료와 상담치료가 병행되거나 약물치료가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 또한 다른 심리학처럼 심리검사 및 심리평가뿐만아니라 심리연구를 포함하는 과학자-전문가 모델을 전제한다. 현재 상담 심리학은 기업, 학교, 기관 등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 무의식 * 초자아 * 트라우마 * 방어기제 * 정신분석 * 게슈탈트 붕괴 * 고전적 조건형성 * 조작적 조건형성 * 인지부조화 * 바넘 효과 * 심리 검사 * 성격 검사 * 초두효과 * 설단 현상 * 칵테일 파티 효과 * 전경-배경 이론 * 깨진 유리창 이론 * 정보처리이론 * 루시퍼 이펙트 * 스탠퍼드 감옥 실험 * 편안한 복제인간 증후군 * 원인론 * 목적론 * 해석 수준 이론 * 빌헬름 분트 심리학의 아버지 * 헤르만 에빙하우스 망각곡선 연구 * 찰스 다윈 진화심리학의 시조. 감정표현 연구의 선구자 * 프랜시스 골턴 심리측정의 선구자 * 제임스 카텔 미국 심리측정학의 대가 * 비네 지능검사 고안자 * 손다이크 교육심리학, 심리측정의 대가 * 르윈 게슈탈트 심리학자, 인지심리학자, 사회심리학자. *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창시자,의식-무의식 개념 * 카를 융 집단무의식 * 장 피아제 발달 이론의 대부, 지능을 수식으로 표현 * 벌루스 스키너 보상 처벌 이론, 처벌 금지 법안 * 데이비드 로젠한 논문 "제 정신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On Being Sane in Insane Places)" * 스탠리 밀그램 밀그램 실험, 권위에의 복종 *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감옥 실험, 루시퍼 이펙트 * 에이브러햄 매슬로 욕구 제단계 이론 * 칼 로저스 인본주의 심리학의 아버지 * 에드워드 톨먼 잠재학습 연구 * 노엄 촘스키 언어 심리학자 * 율릭 나이서 인지심리학의 초창기 공헌자 * 레프 세메노비치 비고츠키 언어로 사회-문화적 맥락에 관련지어 설명 * 대니얼 카너먼, 아모스 트버스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편향과 추단법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 수상 * 라몬 이 카할, 골지 뉴런 연구의 선구자 * 폴 브로카, 베르니케 브로카 영역, 베르니케 영역의 발견 * 도널드 헵 헵의 법칙 발견 * 콘라드 로렌츠 각인 현상의 발견자 * 에릭 에릭슨 * 심리치료 * 재난심리학(disaster psychology) * 군사심리학(:en:Military psychology) * 군중심리학 ** 자살 예방(:en:Suicide prevention) * 환경심리학(:en:Environmental psychology) ** 깨진 유리창 이론 ** 범죄예방 환경설계 * 심리역사학(:en:Psychohistory) ** 로이드 드마우스(:en:Lloyd deMause) * 의상심리학(clothing psychology) * 의사소통(휴먼 커뮤니케이션) * 대인간 커뮤니케이션(:en:Interpersonal communication) ** 잔소리 (심리)(:en:Nagging) * 편집성 인격 장애 * 폭력 / 가정폭력 * 아동학대 / 동물학대 * 힐가드와 애트킨슨의 심리학 원론(Atkinson & Hilgard's Introduction to Psychology) * 볼더 모델 * 찰스 다윈 ; 대한민국의 심리학회 * 한국 심리학회 * 한국 임상심리학회 * 한국 상담심리학회 * 한국 산업 및 조직심리학회 * 한국 사회 및 성격심리학회 * 한국 발달심리학회 * 한국 인지 및 생물심리학회 * 한국 사회문제심리학회 * 한국 건강심리학회 * 한국 소비자광고심리학회 * 한국 학교심리학회 * 한국 중독심리학회 ; 미국의 심리학회 * 미국 심리학회 분류:행동과학
[ "Introduction", "사람의 잠",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n\n파일:A child sleeping.jpg|섬네일|300px|잠자는 어린이의 모습.\n파일:Sleeping cat on her back.jpg|섬네일|300px|잠자는 길고양이의 모습.\n\n'''잠'''() 또는 '''수면'''(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n\n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 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n", "=== 단계와 주기 ===\n\n\n\n 항목\n\n NREM(숙면)\n\n REM(역설 수면)\n\n\n\n 안전도\n\n 0\n\n 40~60/min\n\n\n\n 뇌전도\n\n 낮은 주파수\n\n 높은 주파수\n\n\n\n 심전도\n\n 느림\n\n 빠름\n\n\n\n 근전도\n\n 적정수준 긴장\n\n 마비\n\n\n\n=== NREM 수면(비램수면)의 4단계 ===\n* 제1단계: 뇌파는 베타파에서 알파파로 바뀌며, 이는 수면의 초기 단계로, 이때 뇌파는 알파파(8-13Hz)에서 세타파(4-7Hz)로 전환된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이 쉽게 깨어날 수 있으며, 일부는 잠을 자고 있었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n* 제2단계: 이 단계에서는 몸이 더 깊은 이완 상태에 들어가며, 뇌파 활동이 세타파로 지배되고, 수면 방추(수면 스핀들)와 K-복합파가 나타난다. 수면 스핀들은 학습과 기억에 중요할 수 있다.\n* 제3단계 및 제4단계: 이 단계들은 델타파(0.5-4Hz)가 특징이며, 느리고 큰 진폭의 뇌파가 나타난다. 이는 심한 이완 상태로, 깨우기 어렵고, 신체와 뇌의 회복에 필수적인 단계이다.\n\n=== REM 수면의 기능 ===\n\n렘(REM, 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고 있는 역설수면이다.\n역설수면(逆說睡眠)은 몸은 잠을 자고 있으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波)를 보이는 수면 상태이다. 자율신경성 활동이 불규칙적인 수면의 시기로, 보통 안구가 신속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기에 렘수면으로 언급된다. 한편 영아기에는 렘수면이 수면의 50%를 차지하다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n\n=== 수면 시간 ===\n사람은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잔다. 성인은 하루에 대략 5시간~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한다.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6시간 15분 정도, 미국은 7시간 정도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를 느끼고 감정이 날카로워져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쉬워진다. 또한, 잠이 부족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 등 여러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건강에 유익하고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 7시간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은데, 5시간~6시간 30분을 잘 때 수명이 가장 길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적절한 수면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다. 연령대별로 얼마만큼 자야 적당한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수면재단에 따르면 26-64세 성인은 7-9시간을 권장하며, 6-10시간이면 적당하고, 6시간 이하 또는 10시간 이상이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취침 시간, 수면 시간이 매일 달라지면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n", "\n* 꿈\n* 겨울잠\n* 불면증\n* 기면증\n* 졸림\n* 수면 부채\n* 잠꼬대\n* 벼락치기 공부\n", "\n", "\n\n* 네이버 캐스트 - 잠, 창의성의 보물창고\n\n\n\n\n\n \n분류:신경과학의 미해결 문제" ]
파일:A child sleeping.jpg|섬네일|300px|잠자는 어린이의 모습. 파일:Sleeping cat on her back.jpg|섬네일|300px|잠자는 길고양이의 모습. '''잠'''() 또는 '''수면'''(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 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 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 === 단계와 주기 === 항목 NREM(숙면) REM(역설 수면) 안전도 0 40~60/min 뇌전도 낮은 주파수 높은 주파수 심전도 느림 빠름 근전도 적정수준 긴장 마비 === NREM 수면(비램수면)의 4단계 === * 제1단계: 뇌파는 베타파에서 알파파로 바뀌며, 이는 수면의 초기 단계로, 이때 뇌파는 알파파(8-13Hz)에서 세타파(4-7Hz)로 전환된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이 쉽게 깨어날 수 있으며, 일부는 잠을 자고 있었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 제2단계: 이 단계에서는 몸이 더 깊은 이완 상태에 들어가며, 뇌파 활동이 세타파로 지배되고, 수면 방추(수면 스핀들)와 K-복합파가 나타난다. 수면 스핀들은 학습과 기억에 중요할 수 있다. * 제3단계 및 제4단계: 이 단계들은 델타파(0.5-4Hz)가 특징이며, 느리고 큰 진폭의 뇌파가 나타난다. 이는 심한 이완 상태로, 깨우기 어렵고, 신체와 뇌의 회복에 필수적인 단계이다. === REM 수면의 기능 === 렘(REM, 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되고 있는 역설수면이다. 역설수면(逆說睡眠)은 몸은 잠을 자고 있으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波)를 보이는 수면 상태이다. 자율신경성 활동이 불규칙적인 수면의 시기로, 보통 안구가 신속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기에 렘수면으로 언급된다. 한편 영아기에는 렘수면이 수면의 50%를 차지하다가 점차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수면 시간 === 사람은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잔다. 성인은 하루에 대략 5시간~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한다.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6시간 15분 정도, 미국은 7시간 정도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를 느끼고 감정이 날카로워져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쉬워진다. 또한, 잠이 부족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 등 여러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건강에 유익하고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 7시간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은데, 5시간~6시간 30분을 잘 때 수명이 가장 길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적절한 수면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다. 연령대별로 얼마만큼 자야 적당한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수면재단에 따르면 26-64세 성인은 7-9시간을 권장하며, 6-10시간이면 적당하고, 6시간 이하 또는 10시간 이상이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취침 시간, 수면 시간이 매일 달라지면 당뇨병 등의 대사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 꿈 * 겨울잠 * 불면증 * 기면증 * 졸림 * 수면 부채 * 잠꼬대 * 벼락치기 공부 * 네이버 캐스트 - 잠, 창의성의 보물창고 분류:신경과학의 미해결 문제
마약
[ "Introduction", "역사", "종류", "나라별 법률", "각주", "외부 링크" ]
[ "\n\n파일:Bayer Heroin bottle.jpg|섬네일|오른쪽|마약의 일종인 헤로인.\n\n'''마약'''(痲藥, )은 향정신성 의약품의 일종이다.\n\n좁은 의미로는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만을, 즉 \"아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약이다.\"라고 말해진다.\n\n일반인들은 주로 마약이란 단어를 거의 대부분의 향정신성 약품 및 중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 모두를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n\n대한민국에서는 관례적으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물질으로서, 사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물질로 분류되지 않은 민간제조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 등을 뜻하며, 이들은 거의 대부분 진정쌍떡잎식물군에 속한 식물이기도 하다. \n\n일부 국내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물질 중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등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쓰인다. \n\n하지만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할 경우 중독 증상에 신체 손상을 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사망을 유발하게 되므로 마약 및 항정신성의약품의 복용은 크게 제한되어있다.\n\n게다가 마약을 복용하면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n\n대한민국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n\n대한민국이 대외적으로 마약 청정국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최근 인터넷 등을 통하여 2030세대에서의 마약 구입이 급증하고 있다. \n\n마약류 사범은 중독성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단속과 처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처벌보다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치료보호제도 및 치료명령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지만 높은 재범률로 인하여 \"일반 형사사건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n", "최초의 마약은 그리스의 의사 갈렌이 만든 마비와 감각 상실을 유발하는 약이었다. 갈렌은 이 약을 맨드레이크 뿌리, 알테쿠스(에클라타), 씨앗, 양귀비차를 마약의 재료로 하여 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n마약은 아토피오이드 수용체와 결합하는 물질로 정의할 수 있다.\n마약은 본래 고통을 줄이고, 감각을 둔하게 하거나, 수면제 같은 역할을 하는 모든 약품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n\n마약의 첫 사용은 1600년이지만 마약은 1926년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다. \n마약의 종류는 다양하다. 마약의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형태는 모르핀과 코데인이며, 통증을 줄이기 위해 아편의 염기로 만들어진 합성 마약은 펜타닐, 옥시코돈, 트라마돌, 페티딘, 하이드로코돈, 메타돈, 하이드로모르폰등 이 존재한다.\n\n미국에서 마약은 아편, 아편 유도체를 가리킨다.\n",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면서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을 의미한다. \n\n같은 종류의 약물이라도 약물에 따라 작용부위 및 작용기전이 달라 다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여 여러 분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n\n=== CNS(중추 신경계) 흥분제 ===\n흥분제로 중추 신경계(이하 CNS)를 흥분시켜 감각 및 운동기능을 항진시키는 약물이다.\n소량 투여시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분이 약간 고양되며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올라간다.\n과량 투여시 환각 및 다행감 또는 신경이 예민해져 불안감을 유발하여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n기분 고조로 인해 주관적으로는 강해진 것 같고 우월감을 느끼게되며 객관적으로는 말이 많아지고 초조해하며 불안해지고 과민상태가 된다.\n\n* '''코카인 :''' 코카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 한 때 코카콜라에 들어간 적이 있으며 (아직 코카콜라에 매우약간(성분표에 표기가 안돼있을 정도로 적개) 들어있다.) 진통제로 쓰인 적이 있다.\n* '''암페타민 :''' 대표적인 메스암페타민제제인 필로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치료 약물로 쓰이는 덱스트로암페타민 등이 있다.\n* '''메틸페니데이트 :'''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치료 약물로 쓰이는 콘서타 등이 있다.\n* '''니코틴 :''' 담배에 들어있어 의존성을 유발한다.\n* '''카페인 :''' 커피에 들어있으며 청량음료, 이온음료 및 피로회복제에 들어간다.\n* '''잔틴 :''' 초콜릿에 들어있다.\n\n=== 중추신경억제제 ===\n진정제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며, 진통 효과가 있다.\n\n* '''헤로인 : '''모르핀을 아세틸화하여 만든 합성 물질이다.\n* '''라벤더 : '''진정제의 특징이 있다.\n* '''모르핀 : '''아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n* '''바비트레이트산염 : '''진정 및 항 경련 효과가 있다.\n* '''벤조디아제핀 : '''신경안정의 효과가 있다.\n* '''알코올 : '''행동을 억제하는 신 피질을 억제, 판단력의 저하(탈 억제)를 가져온다.\n* '''덱스트로메토르판 : '''대표적으로 러미라로 알려진 진해거담제에 들어있는 아편계열 알칼로이드이다.\n* '''펜타닐 : '''헤로인보다 몇 배나 더 강한 합성 물질이다.\n\n=== 환각제 ===\n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의 감각을 왜곡하여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n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상태로 느끼는 반면 불쾌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n\n* '''LSD : '''플래시백 현상이 나타난다.\n* '''펜시클리딘 :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며,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다.\n* '''뷰테인, 본드, 벤젠, 폴리페놀, 타닌, 톨루엔 : '''몸을 녹이게 하는 느낌에 빠지게 한다. 본드의 경우 뇌세포를 파괴하며, 질식사할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한 환각제이다.\n* '''엑스터시 : '''정신착란과 사망에 이르게 한다.\n* '''유칼립투스 : '''유칼립투스오일에 중독성은 상복부 작열감, 오심, 구토, 현기증, 무기력, 피부창백, 맥박이 가늘고 빨리 뛰며 의식몽롱기면증이 있으며 심할 때는 일시적으로 정신착란과 경련을 일으킨다. 또한 유칼립투스잎에는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코알라가 유칼립투스 잎을 먹고 무려 18시간에서 많으면 24시간 잠에 취해 있다고 한다.\n* '''(바니 스테리오 포시스 카피) (야혜) : '''아와야스카라는 강력한 환각물질을 가지고 있다.\n", "=== 대한민국 법률상 마약 ===\n현재 대한민국 법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마약류'''는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를 뜻한다.\n'''마약'''은 양귀비, 아편, 코카잎 및 그의 알칼로이드와 화학적 합성품을, '''향정신성의약품'''은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오남용시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질을 뜻하며 '''대마'''는 대마초{칸나비스 사티바 엘(''Cannabis sativa L.'')}와 그 수지(수지) 및 대마초 또는 그 수지를 원료로 하여 제조된 모든 제품을 말하나, 대마초의 종자(종자)·뿌리 및 성숙한 대마초의 줄기와 그 제품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편을 제외한 마약은 마약류관리법에서 다루나 아편은 형법에서 규정 중이다.\n마약류 등\n \n\n=== 중화인민공화국 형법상 마약 처벌 ===\n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형법 조항은 형법 347조인데, 50g 이상의 마약을 제조 판매했을 때 15년 이상의 징역, 최고 사형까지 선고된다. 특히 1kg 이상의 마약을 유통하다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한다.\n\n=== 독일의 마약 규제 ===\n\n독일의 경우 스스로 마약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침해에 대해서는 형법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를 위해 무허가로 마약을 소지하는 것은 마약법 제29조 제1항에 의해 처벌 대상으로 규제한다.\n\n=== 미국의 마약성 약물 규제 ===\n미국 정부는 의료계에서 사용되는 마약성 약물을 5가지 항목으로 분류하여 관리한다.\n\n1. 남용가능성이 높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되지 않은 약물이다. 아편의 일부 유도체(헤로인), 마리화나, 합성 아편제, 환각제 등이다.\n\n2. 남용가능성이 높으나 의학적 사용이 허가된 약물이다. 일부 아편제제, 암페타민(ADHD 치료제의 성분), 합성마약류, 코카인 등이다. 응급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로는 모르핀과 메페리딘이 있다.\n\n3. 남용가능성이 낮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된 약물이다.일부 마약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예로는 코데인, 곧 다른 진통제의 진통 효과를 상승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약이다. 이 혼합물을 사용한 예는 코데인 함유 아세트나미노펜이다.\n\n4. 남용가능성은 낮으나 신체적, 정신적 의존성을 일으킬 수 있는 약품이다. 바륨이 들어간 항우울제, 흥분제 및 진정제가 이에 속한다.\n\n5. 남용가능성이 가장 낮은 약품이다. 코데인을 함유한 진해제, 아편을 함유한 지사제 등이 이에 속한다.\n", "\n", "* \n* \n* 공익광고협의회, https://www.kobaco.co.kr/websquare/websquare.jsp?w2xPath=/kobaco/businessintro/about/about_tv_detail.xml&nowPage=1&Subject=%b0%f8%c1%df%ba%b8%b0%c7%2f%ba%b9%c1%f6&Matter=&searchG=&searchT=&seqNo=41\n\n\n\n \n분류:오피오이드" ]
파일:Bayer Heroin bottle.jpg|섬네일|오른쪽|마약의 일종인 헤로인. '''마약'''(痲藥, )은 향정신성 의약품의 일종이다. 좁은 의미로는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만을, 즉 "아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약이다."라고 말해진다. 일반인들은 주로 마약이란 단어를 거의 대부분의 향정신성 약품 및 중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 모두를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관례적으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물질으로서, 사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물질로 분류되지 않은 민간제조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 등을 뜻하며, 이들은 거의 대부분 진정쌍떡잎식물군에 속한 식물이기도 하다. 일부 국내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물질 중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등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쓰인다. 하지만 일반인이 마약을 복용할 경우 중독 증상에 신체 손상을 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사망을 유발하게 되므로 마약 및 항정신성의약품의 복용은 크게 제한되어있다. 게다가 마약을 복용하면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대외적으로 마약 청정국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최근 인터넷 등을 통하여 2030세대에서의 마약 구입이 급증하고 있다. 마약류 사범은 중독성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단속과 처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처벌보다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치료보호제도 및 치료명령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지만 높은 재범률로 인하여 "일반 형사사건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최초의 마약은 그리스의 의사 갈렌이 만든 마비와 감각 상실을 유발하는 약이었다. 갈렌은 이 약을 맨드레이크 뿌리, 알테쿠스(에클라타), 씨앗, 양귀비차를 마약의 재료로 하여 제작했다고 알려져있다. 마약은 아토피오이드 수용체와 결합하는 물질로 정의할 수 있다. 마약은 본래 고통을 줄이고, 감각을 둔하게 하거나, 수면제 같은 역할을 하는 모든 약품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약의 첫 사용은 1600년이지만 마약은 1926년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었다. 마약의 종류는 다양하다. 마약의 가장 일반적인 두 가지 형태는 모르핀과 코데인이며, 통증을 줄이기 위해 아편의 염기로 만들어진 합성 마약은 펜타닐, 옥시코돈, 트라마돌, 페티딘, 하이드로코돈, 메타돈, 하이드로모르폰등 이 존재한다. 미국에서 마약은 아편, 아편 유도체를 가리킨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면서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약물이라도 약물에 따라 작용부위 및 작용기전이 달라 다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여 여러 분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 === CNS(중추 신경계) 흥분제 === 흥분제로 중추 신경계(이하 CNS)를 흥분시켜 감각 및 운동기능을 항진시키는 약물이다. 소량 투여시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분이 약간 고양되며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올라간다. 과량 투여시 환각 및 다행감 또는 신경이 예민해져 불안감을 유발하여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기분 고조로 인해 주관적으로는 강해진 것 같고 우월감을 느끼게되며 객관적으로는 말이 많아지고 초조해하며 불안해지고 과민상태가 된다. * '''코카인 :''' 코카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 한 때 코카콜라에 들어간 적이 있으며 (아직 코카콜라에 매우약간(성분표에 표기가 안돼있을 정도로 적개) 들어있다.) 진통제로 쓰인 적이 있다. * '''암페타민 :''' 대표적인 메스암페타민제제인 필로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치료 약물로 쓰이는 덱스트로암페타민 등이 있다. * '''메틸페니데이트 :'''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치료 약물로 쓰이는 콘서타 등이 있다. * '''니코틴 :''' 담배에 들어있어 의존성을 유발한다. * '''카페인 :''' 커피에 들어있으며 청량음료, 이온음료 및 피로회복제에 들어간다. * '''잔틴 :''' 초콜릿에 들어있다. === 중추신경억제제 === 진정제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며, 진통 효과가 있다. * '''헤로인 : '''모르핀을 아세틸화하여 만든 합성 물질이다. * '''라벤더 : '''진정제의 특징이 있다. * '''모르핀 : '''아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 * '''바비트레이트산염 : '''진정 및 항 경련 효과가 있다. * '''벤조디아제핀 : '''신경안정의 효과가 있다. * '''알코올 : '''행동을 억제하는 신 피질을 억제, 판단력의 저하(탈 억제)를 가져온다. * '''덱스트로메토르판 : '''대표적으로 러미라로 알려진 진해거담제에 들어있는 아편계열 알칼로이드이다. * '''펜타닐 : '''헤로인보다 몇 배나 더 강한 합성 물질이다. === 환각제 === 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의 감각을 왜곡하여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상태로 느끼는 반면 불쾌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 '''LSD : '''플래시백 현상이 나타난다. * '''펜시클리딘 :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며,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다. * '''뷰테인, 본드, 벤젠, 폴리페놀, 타닌, 톨루엔 : '''몸을 녹이게 하는 느낌에 빠지게 한다. 본드의 경우 뇌세포를 파괴하며, 질식사할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한 환각제이다. * '''엑스터시 : '''정신착란과 사망에 이르게 한다. * '''유칼립투스 : '''유칼립투스오일에 중독성은 상복부 작열감, 오심, 구토, 현기증, 무기력, 피부창백, 맥박이 가늘고 빨리 뛰며 의식몽롱기면증이 있으며 심할 때는 일시적으로 정신착란과 경련을 일으킨다. 또한 유칼립투스잎에는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코알라가 유칼립투스 잎을 먹고 무려 18시간에서 많으면 24시간 잠에 취해 있다고 한다. * '''(바니 스테리오 포시스 카피) (야혜) : '''아와야스카라는 강력한 환각물질을 가지고 있다. === 대한민국 법률상 마약 === 현재 대한민국 법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마약류'''는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를 뜻한다. '''마약'''은 양귀비, 아편, 코카잎 및 그의 알칼로이드와 화학적 합성품을, '''향정신성의약품'''은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오남용시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질을 뜻하며 '''대마'''는 대마초{칸나비스 사티바 엘(''Cannabis sativa L.'')}와 그 수지(수지) 및 대마초 또는 그 수지를 원료로 하여 제조된 모든 제품을 말하나, 대마초의 종자(종자)·뿌리 및 성숙한 대마초의 줄기와 그 제품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편을 제외한 마약은 마약류관리법에서 다루나 아편은 형법에서 규정 중이다. 마약류 등 === 중화인민공화국 형법상 마약 처벌 ===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형법 조항은 형법 347조인데, 50g 이상의 마약을 제조 판매했을 때 15년 이상의 징역, 최고 사형까지 선고된다. 특히 1kg 이상의 마약을 유통하다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한다. === 독일의 마약 규제 === 독일의 경우 스스로 마약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침해에 대해서는 형법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를 위해 무허가로 마약을 소지하는 것은 마약법 제29조 제1항에 의해 처벌 대상으로 규제한다. === 미국의 마약성 약물 규제 === 미국 정부는 의료계에서 사용되는 마약성 약물을 5가지 항목으로 분류하여 관리한다. 1. 남용가능성이 높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되지 않은 약물이다. 아편의 일부 유도체(헤로인), 마리화나, 합성 아편제, 환각제 등이다. 2. 남용가능성이 높으나 의학적 사용이 허가된 약물이다. 일부 아편제제, 암페타민(ADHD 치료제의 성분), 합성마약류, 코카인 등이다. 응급의학에서 사용하는 약물로는 모르핀과 메페리딘이 있다. 3. 남용가능성이 낮고 의학적 사용이 승인된 약물이다.일부 마약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예로는 코데인, 곧 다른 진통제의 진통 효과를 상승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약이다. 이 혼합물을 사용한 예는 코데인 함유 아세트나미노펜이다. 4. 남용가능성은 낮으나 신체적, 정신적 의존성을 일으킬 수 있는 약품이다. 바륨이 들어간 항우울제, 흥분제 및 진정제가 이에 속한다. 5. 남용가능성이 가장 낮은 약품이다. 코데인을 함유한 진해제, 아편을 함유한 지사제 등이 이에 속한다. * * * 공익광고협의회, https://www.kobaco.co.kr/websquare/websquare.jsp?w2xPath=/kobaco/businessintro/about/about_tv_detail.xml&nowPage=1&Subject=%b0%f8%c1%df%ba%b8%b0%c7%2f%ba%b9%c1%f6&Matter=&searchG=&searchT=&seqNo=41 분류:오피오이드
고전적 조건형성
[ "Introduction", "개요", "소거와 자발적 회복", "자극일반화와 변별", "미각혐오학습", "출처", "같이 보기", "각주" ]
[ "\n파일:Ivan_Pavlov_research_on_dog's_reflex_setup.jpg|섬네일|right|265px|이반 파블로프의 조건형성 실험 구성\n\n'''고전적 조건형성'''(古典的條件形成, Classical Conditioning)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으로, 특정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자극(중성자극)이 그 반응을 무조건적으로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반복적으로 연합되면서 그 반응을 유발하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n\n특정 자극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중에서, 그 자극과 이에 상응한 반응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능과는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습을 통해 조건반사 반응이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n\n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가 개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처음으로 증명하였다. 그의 이런 연구는 마음이란 물질이 아니기에 과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 19세기 후반의 학계의 지배적 사고를 바꾸어 놓았고,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화되어 독립적인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는데 일조하였으며 행동주의 심리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n", "\n=== 조건 형성과 반응 ===\n생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반응을 〈무조건 반응〉이라고 하고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을 〈무조건 자극〉이라고 한다.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자극을 〈중성 자극〉이라고 하고, 중성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반응을 〈비상관 반응〉이라고 한다. 중성 자극 직후에 무조건 자극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n\n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자극을 〈조건 자극〉이라고 하며,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반응을 〈조건 반응〉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조건형성이 학습된 개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조건 자극이며, 이 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는 것은 조건 반응이다.\n\n=== 조건 형성 과정 ===\n이반 파블로프는 조건 형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건 형성이란 평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자극(중성자극)이 무조건적인 반응(무조건반응)을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 자극이 되어 조건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을 이반 파블로프의 조건 형성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n\n* '''조건 형성 이전'''\n# 개는 음식을 보면 무조건 침을 흘린다.\n# 여기서 음식은 '''무조건자극'''(US)이 되고, 침을 흘리는 반응은 '''무조건반응'''(UR)이 된다.\n# 또한 종소리를 들려주면 개는 반응이 없다.\n# 여기서 종소리는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NS)이 된다.\n\n* '''조건 형성 과정'''\n# 개에게 음식을 줄 때마다(US) 반복적으로 종소리를 같이 들려준다(NS).\n# 이 과정을 무조건자극과 중성자극의 연합, 혹은 조건 형성이라고 표현한다.\n\n* '''조건 형성 이후'''\n# 조건 형성이 된 후에는 중성자극인 종소리(NS)만 들려주어도 침을 흘리게 된다.\n# 여기서 조건 형성이 된 후의 종소리는 '''조건자극'''(CS)이 되고, 조건 형성이 된 후에 침을 흘리는 반사는 '''조건반응'''(CR)이 된다.\n이런 고전적 조건 형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유기체가 조건자극(CS)을 제공받으면 곧이어 무조건자극(US)도 함께 제공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이 제공된다는 신호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조건 형성을 실험한 예는 위의 예 말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던 아이가 흰쥐에게 다가가거나 만질 때마다 갑작스런 큰 소리를 들려주자 결국 아이는 흰 쥐를 무서워하게 되었다.\n\n사람은 원래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는 반응을 한다. 여기서 큰 소리는 무조건자극이 되고, 놀라는 반응은 무조건반응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흰쥐(중성자극)와 큰소리(무조건자극)를 지속적으로 연합하면 흰 쥐(조건자극)만 보아도 놀라는 반응(조건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고전적 조건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은 행동주의 심리학자 존 B 왓슨이 어린 알버트를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내용이다.\n\n=== 이차적 조건 형성 ===\n조건자극은 본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이었다. 그러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무조건자극과 같이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렇게 조건 형성이 된 자극은 다른 중성자극도 조건 형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위의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 형성이 된 종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을 보여주면 파란 불빛만 봐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n\n이런 현상을 '''이차적 조건 형성'''(Second-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하며 그 이상의 조건 형성을 삼차적 조건 형성, 사차적 조건 형성 등등 '''고차적 조건 형성'''(Higher-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삼차적 조건 형성 이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런 고차적 조건 형성에서는 조건자극들이 연달아 제공되고,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소거'''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n", "\n=== '''소거''' ===\n'''소거'''(Extinction)는 조건 형성이 풀어져 조건자극이 다시 중성자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자극인 종소리만 들려주고 계속해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개는 조건자극인 종소리를 듣고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건자극과 함께 무조건자극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수반성을 제거한다면 조건반응은 잘 형성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수반성은 일관성과 관계있다.\n\n그러나 소거가 되었다고 해서 조건반응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종소리(조건자극)를 갑자기 제시하면 침(조건반응)을 흘린다. 이런 과정을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고 한다. 이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 영속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배운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두뇌에서 아예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n\n또한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다시 함께 종소리와 음식을 제공한다면 종소리는 중성자극에서 다시 조건자극으로 회복되며 종소리(조건자극)와 음식(무조건자극)의 연결은 더욱 단단해지게 될수도 있다.\n\n한편 수반성은 자극 제시의 시간간격과 횟수에서 일관성이 없는 경우에서도 약화될 수 있지만 여러 자극의 강도 차에서도 수반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확률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있다.\n\n=== '''자발적 회복''' ===\n소거절차가 이루어진 후에도 음식물과 연합시키지 않은 채 다시 종소리만 반복적으로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소거되었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반응이 재훈련 없이 다시 나타난다. 이를 조건반응의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 한다. 이때 반응의 강도는 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n", "'''자극일반화'''(Stimulus Generalization)란, 조건자극과 유사한 다른 자극에 동일한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우리 속담이 가지는 의미와 같다. 갈치구이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적이 있는 아이가 식사 때마다 생선을 피하려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시가 많지 않거나 씹어 먹으면 되는 생선통조림을 우연히 먹은 아이는 다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변별'''(Discrimination)이라고 한다. 자극을 구분하여 반응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극일반화는 자극 변별에 실패한 상태라 할 수 있다.\n", "이렇게 고전적 조건 형성은 보통 수차례 반복이 되어야 자극 간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르시아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쥐에게 먹이를 주고 어느 정도 후에 열을 가해 매스꺼움과 구토등을 유발시켰더니 그 후에도 그러한 종류의 먹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차례 반복을 통한 연합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바로 조건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n", "* 정보화시대의 신세대를 위한 실기교육방법론 p 81 (자발적 회복, 변별)\n", "\n* 조작적 조건화\n* 관찰학습\n* 행동주의\n* 이반 파블로프\n* 고전적 조건화의 행동적 연구\n* 행동준비성\n* 존 브로더스 왓슨\n", "\n\n\n\n\n\n분류:학습\n분류:행동주의\n분류:교육심리학\n분류:실험심리학\n분류:러시아의 발명품" ]
파일:Ivan_Pavlov_research_on_dog's_reflex_setup.jpg|섬네일|right|265px|이반 파블로프의 조건형성 실험 구성 '''고전적 조건형성'''(古典的條件形成, Classical Conditioning)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으로, 특정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자극(중성자극)이 그 반응을 무조건적으로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반복적으로 연합되면서 그 반응을 유발하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특정 자극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현상중에서, 그 자극과 이에 상응한 반응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능과는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학습을 통해 조건반사 반응이 새롭게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가 개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처음으로 증명하였다. 그의 이런 연구는 마음이란 물질이 아니기에 과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 19세기 후반의 학계의 지배적 사고를 바꾸어 놓았고, 심리학이 철학에서 분화되어 독립적인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는데 일조하였으며 행동주의 심리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 조건 형성과 반응 === 생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반응을 〈무조건 반응〉이라고 하고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을 〈무조건 자극〉이라고 한다.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자극을 〈중성 자극〉이라고 하고, 중성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반응을 〈비상관 반응〉이라고 한다. 중성 자극 직후에 무조건 자극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자극을 〈조건 자극〉이라고 하며,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반응을 〈조건 반응〉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조건형성이 학습된 개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조건 자극이며, 이 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는 것은 조건 반응이다. === 조건 형성 과정 === 이반 파블로프는 조건 형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건 형성이란 평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자극(중성자극)이 무조건적인 반응(무조건반응)을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 자극이 되어 조건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을 이반 파블로프의 조건 형성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조건 형성 이전''' # 개는 음식을 보면 무조건 침을 흘린다. # 여기서 음식은 '''무조건자극'''(US)이 되고, 침을 흘리는 반응은 '''무조건반응'''(UR)이 된다. # 또한 종소리를 들려주면 개는 반응이 없다. # 여기서 종소리는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NS)이 된다. * '''조건 형성 과정''' # 개에게 음식을 줄 때마다(US) 반복적으로 종소리를 같이 들려준다(NS). # 이 과정을 무조건자극과 중성자극의 연합, 혹은 조건 형성이라고 표현한다. * '''조건 형성 이후''' # 조건 형성이 된 후에는 중성자극인 종소리(NS)만 들려주어도 침을 흘리게 된다. # 여기서 조건 형성이 된 후의 종소리는 '''조건자극'''(CS)이 되고, 조건 형성이 된 후에 침을 흘리는 반사는 '''조건반응'''(CR)이 된다. 이런 고전적 조건 형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유기체가 조건자극(CS)을 제공받으면 곧이어 무조건자극(US)도 함께 제공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이 제공된다는 신호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조건 형성을 실험한 예는 위의 예 말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던 아이가 흰쥐에게 다가가거나 만질 때마다 갑작스런 큰 소리를 들려주자 결국 아이는 흰 쥐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사람은 원래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는 반응을 한다. 여기서 큰 소리는 무조건자극이 되고, 놀라는 반응은 무조건반응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흰쥐(중성자극)와 큰소리(무조건자극)를 지속적으로 연합하면 흰 쥐(조건자극)만 보아도 놀라는 반응(조건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고전적 조건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은 행동주의 심리학자 존 B 왓슨이 어린 알버트를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내용이다. === 이차적 조건 형성 === 조건자극은 본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이었다. 그러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무조건자극과 같이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렇게 조건 형성이 된 자극은 다른 중성자극도 조건 형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위의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 형성이 된 종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을 보여주면 파란 불빛만 봐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차적 조건 형성'''(Second-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하며 그 이상의 조건 형성을 삼차적 조건 형성, 사차적 조건 형성 등등 '''고차적 조건 형성'''(Higher-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삼차적 조건 형성 이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런 고차적 조건 형성에서는 조건자극들이 연달아 제공되고,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소거'''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 '''소거''' === '''소거'''(Extinction)는 조건 형성이 풀어져 조건자극이 다시 중성자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자극인 종소리만 들려주고 계속해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개는 조건자극인 종소리를 듣고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건자극과 함께 무조건자극을 계속해서 제공하는 수반성을 제거한다면 조건반응은 잘 형성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수반성은 일관성과 관계있다. 그러나 소거가 되었다고 해서 조건반응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종소리(조건자극)를 갑자기 제시하면 침(조건반응)을 흘린다. 이런 과정을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고 한다. 이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 영속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배운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두뇌에서 아예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소거가 일어난 이반 파블로프의 개에게 다시 함께 종소리와 음식을 제공한다면 종소리는 중성자극에서 다시 조건자극으로 회복되며 종소리(조건자극)와 음식(무조건자극)의 연결은 더욱 단단해지게 될수도 있다. 한편 수반성은 자극 제시의 시간간격과 횟수에서 일관성이 없는 경우에서도 약화될 수 있지만 여러 자극의 강도 차에서도 수반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확률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 '''자발적 회복''' === 소거절차가 이루어진 후에도 음식물과 연합시키지 않은 채 다시 종소리만 반복적으로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소거되었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반응이 재훈련 없이 다시 나타난다. 이를 조건반응의 '''자발적 회복'''(Spontaneous Recovery)이라 한다. 이때 반응의 강도는 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자극일반화'''(Stimulus Generalization)란, 조건자극과 유사한 다른 자극에 동일한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우리 속담이 가지는 의미와 같다. 갈치구이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적이 있는 아이가 식사 때마다 생선을 피하려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시가 많지 않거나 씹어 먹으면 되는 생선통조림을 우연히 먹은 아이는 다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변별'''(Discrimination)이라고 한다. 자극을 구분하여 반응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극일반화는 자극 변별에 실패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고전적 조건 형성은 보통 수차례 반복이 되어야 자극 간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르시아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쥐에게 먹이를 주고 어느 정도 후에 열을 가해 매스꺼움과 구토등을 유발시켰더니 그 후에도 그러한 종류의 먹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차례 반복을 통한 연합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바로 조건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 정보화시대의 신세대를 위한 실기교육방법론 p 81 (자발적 회복, 변별) * 조작적 조건화 * 관찰학습 * 행동주의 * 이반 파블로프 * 고전적 조건화의 행동적 연구 * 행동준비성 * 존 브로더스 왓슨 분류:학습 분류:행동주의 분류:교육심리학 분류:실험심리학 분류:러시아의 발명품
학습
[ "Introduction", "학습의 종류", "주요한 인간의 학습", "같이 보기", "참고 문헌", "각주", "외부 링크" ]
[ "\n\n미래의 학교 상상도. (1901년 또는 1910년)\n\n'''학습'''(學習, ) 또는 '''배움'''은 본능적인 변화인 성숙과는 달리, 직간접적 경험이나 훈련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인지하며, 변화시키는 행동 변화이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생체의 일반적 적응과 신체적인 피로, 손상 등 일시적인 동기 부여 등에서 초래된 행동의 변화와는 구별된다. 학습과 공부가 대비되는 점은 학습이 외부적인 교육이나 현상에 대해 영향을 받는 데 비해 공부는 자발적인 면이 강하다. 미리 학습하는 것은 '''예습'''(豫習)이라고 한다. 현재 인공지능은 암기적 학습에 있어서 인간을 훨씬 추월했으나 한계가 있다.\n\n고전적 조건형성과 도구적 조건형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따라서 학습한 문제와 비학습한 문제의 풀이는 큰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과거 서울대 본고사 문제도 그렇게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었지만 당시 열악한 환경상 수재들도 0점을 맞거나 적절한 점수 획득에 실패하여 입시에 떨어졌으며 고득점자들도 사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미리 학습이 가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n", "* 습관화\n* 각인\n* 공간학습\n* 연합 학습\n* 인공지능의 학습\n** 지도학습\n*** 예측과 분류\n** 비지도학습\n*** 군집과 연관성\n** 강화 학습\n*** 보상과 행위 강화\n* 자기주도적 학습\n*** 조작적 조건화\n*** 고전적 조건형성\n* 사회학습\n** 놀이\n** 문화화(문화전통)\n", "* 일화적 학습: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발생하는 행동의 변화\n* 멀티미디어 학습: 청각적, 시각적 자극을 둘 다 이용하여 정보를 학습하는 과정 (Mayer 2001)\n* 전자 학습 및 증강 학습: 컴퓨터 강화 학습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포괄적인 용어\n* 암기 학습\n* 유의미 학습: 학습된 지식이 다른 지식과 관계되는 정도로까지 완전히 이해되었다는 개념\n* 비정형 학습\n* 정형 학습\n* 비형식 학습\n* 대화적 학습: 대화에 기반한 학습\n* 우발 학습(우연 학습): 선생이나 학생에 의해 계획되지 않고, 경험, 관찰, 자기고찰, 상호작용, 특별한 사건, 일반적인 일과 같은 다른 활동의 분산물로서 발생\n* 능동 학습: 자신의 학습 경험을 통제할 때 발생\n* 기계 학습:인공지능의 한 갈래로서 데이터로부터 학습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구성과 연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기계 학습 시스템은 이메일 메시지가 스팸인지 스팸이 아닌지를 구별하기 위해 훈련을 받을 수 있다.\n", "\n* 추론\n* 학습 영역\n* 학습지도\n* 교육학\n* 벼락치기 공부\n* 성적\n* 탐구학습\n", "* \n", "\n", "\n* \n\n\n\n\n \n분류:교육학\n분류:발달심리학\n분류:교육심리학\n분류:시스템 과학" ]
미래의 학교 상상도. (1901년 또는 1910년) '''학습'''(學習, ) 또는 '''배움'''은 본능적인 변화인 성숙과는 달리, 직간접적 경험이나 훈련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인지하며, 변화시키는 행동 변화이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생체의 일반적 적응과 신체적인 피로, 손상 등 일시적인 동기 부여 등에서 초래된 행동의 변화와는 구별된다. 학습과 공부가 대비되는 점은 학습이 외부적인 교육이나 현상에 대해 영향을 받는 데 비해 공부는 자발적인 면이 강하다. 미리 학습하는 것은 '''예습'''(豫習)이라고 한다. 현재 인공지능은 암기적 학습에 있어서 인간을 훨씬 추월했으나 한계가 있다. 고전적 조건형성과 도구적 조건형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따라서 학습한 문제와 비학습한 문제의 풀이는 큰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과거 서울대 본고사 문제도 그렇게 어려운 난이도는 아니었지만 당시 열악한 환경상 수재들도 0점을 맞거나 적절한 점수 획득에 실패하여 입시에 떨어졌으며 고득점자들도 사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미리 학습이 가능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 습관화 * 각인 * 공간학습 * 연합 학습 * 인공지능의 학습 ** 지도학습 *** 예측과 분류 ** 비지도학습 *** 군집과 연관성 ** 강화 학습 *** 보상과 행위 강화 * 자기주도적 학습 *** 조작적 조건화 *** 고전적 조건형성 * 사회학습 ** 놀이 ** 문화화(문화전통) * 일화적 학습: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발생하는 행동의 변화 * 멀티미디어 학습: 청각적, 시각적 자극을 둘 다 이용하여 정보를 학습하는 과정 (Mayer 2001) * 전자 학습 및 증강 학습: 컴퓨터 강화 학습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포괄적인 용어 * 암기 학습 * 유의미 학습: 학습된 지식이 다른 지식과 관계되는 정도로까지 완전히 이해되었다는 개념 * 비정형 학습 * 정형 학습 * 비형식 학습 * 대화적 학습: 대화에 기반한 학습 * 우발 학습(우연 학습): 선생이나 학생에 의해 계획되지 않고, 경험, 관찰, 자기고찰, 상호작용, 특별한 사건, 일반적인 일과 같은 다른 활동의 분산물로서 발생 * 능동 학습: 자신의 학습 경험을 통제할 때 발생 * 기계 학습:인공지능의 한 갈래로서 데이터로부터 학습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구성과 연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기계 학습 시스템은 이메일 메시지가 스팸인지 스팸이 아닌지를 구별하기 위해 훈련을 받을 수 있다. * 추론 * 학습 영역 * 학습지도 * 교육학 * 벼락치기 공부 * 성적 * 탐구학습 * * 분류:교육학 분류:발달심리학 분류:교육심리학 분류:시스템 과학
발달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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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n\n\n'''발달 심리학'''(發達 心理學, )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 동안 연령 및 환경에 따른 정신과정과 행동상의 변화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n\n개인의 지적·정서적·사회적 과정의 전개에 관심을 둔다. 발달 원리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행동 유형이 형성되는 생후 20세까지의 시기에 적용되는 것과 함께 이러한 발달의 향상적인 기간뿐만 아니라 이후 발달의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면까지도 발달과정으로 보는 전생애적인 발달과정을 다루는 것이 발달심리학의 관심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체성, 인간관계, 창의력 등을 삶의 중요한 세 영역으로 본다.\n\n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별로 형성되는 특성을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접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n\n연구 영역은 신체적·지적·정의적(情意的)·사회적 발달로 나누기도 하고, 태아기·영아기·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중년기·노년기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어떤 특수 영역, 예를 들어 뇌의 발달, 양심의 발달, 성격의 발달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n\n운동능력의 발달, 인지발달, 성격 발달 등 심리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방법과 주제를 포괄하기도 한다. 변화는 크게 질적 변화(구조적 변화, 단계적 변화)와 양적 변화(연속적 변화, 비단계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발달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반응의 범위 모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n", "프로이트는 리비도에 초점을 두며 아동의 발달을 설명하고자 하였다.\n\n# 구강기(출생-1.5세)\n# 항문기(1.5-3세)\n# 남근기(3-6세)\n# 잠복기(6-사춘기 전)\n# 생식기(청소년기)\n", "장 피아제는 그의 인지발달론에서 동화와 조절의 개념으로 적응을 설명하면서 발달의 중요한 면을 언급한바있다.\n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신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있어서 동화는 자신에게 맞추어 환경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라면 조절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으로 기술된다.\n", "\n에릭슨의 성격 발달 이론은 전생애에 걸친 발달을 강조한다.\n\n1)신뢰감 대 불신감(영아기, 0-1세)\n\n2)자율성 대 수치와 회의 (1-3세)\n\n3)주도성 대 죄책감(유치기, 3-6세)\n\n4)근면성 대 열등감(아동기, 6-11세)\n\n5)정체감 대 정체감 혼란(청소년기, 11-18세)\n\n6)친밀성 대 고립감(청년기, 18-40)\n\n7)생산성 대 침체감(중년기, 40-65)\n\n8)통합성 대 절망(노년기, 65세 이상)\n", "* 행동주의\n* 인지주의\n* 정신분석이론\n* 사회문화이론\n* 정신물리학\n* 동물행동학 이론\n* 정보처리이론\n", "\n* 하워드 가드너\n** 다중지능이론\n* 자존감\n* 유아심리학\n* 발달(development)\n", "\n", "* 한국발달심리학회\n\n\n\n\n\n\n \n분류:심리학의 분과\n분류:행동과학" ]
'''발달 심리학'''(發達 心理學, )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 동안 연령 및 환경에 따른 정신과정과 행동상의 변화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개인의 지적·정서적·사회적 과정의 전개에 관심을 둔다. 발달 원리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행동 유형이 형성되는 생후 20세까지의 시기에 적용되는 것과 함께 이러한 발달의 향상적인 기간뿐만 아니라 이후 발달의 복합적이고 지속적인 면까지도 발달과정으로 보는 전생애적인 발달과정을 다루는 것이 발달심리학의 관심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체성, 인간관계, 창의력 등을 삶의 중요한 세 영역으로 본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별로 형성되는 특성을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접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연구 영역은 신체적·지적·정의적(情意的)·사회적 발달로 나누기도 하고, 태아기·영아기·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년기·중년기·노년기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어떤 특수 영역, 예를 들어 뇌의 발달, 양심의 발달, 성격의 발달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운동능력의 발달, 인지발달, 성격 발달 등 심리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방법과 주제를 포괄하기도 한다. 변화는 크게 질적 변화(구조적 변화, 단계적 변화)와 양적 변화(연속적 변화, 비단계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발달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반응의 범위 모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에 초점을 두며 아동의 발달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 구강기(출생-1.5세) # 항문기(1.5-3세) # 남근기(3-6세) # 잠복기(6-사춘기 전) # 생식기(청소년기) 장 피아제는 그의 인지발달론에서 동화와 조절의 개념으로 적응을 설명하면서 발달의 중요한 면을 언급한바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신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있어서 동화는 자신에게 맞추어 환경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라면 조절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으로 기술된다. 에릭슨의 성격 발달 이론은 전생애에 걸친 발달을 강조한다. 1)신뢰감 대 불신감(영아기, 0-1세) 2)자율성 대 수치와 회의 (1-3세) 3)주도성 대 죄책감(유치기, 3-6세) 4)근면성 대 열등감(아동기, 6-11세) 5)정체감 대 정체감 혼란(청소년기, 11-18세) 6)친밀성 대 고립감(청년기, 18-40) 7)생산성 대 침체감(중년기, 40-65) 8)통합성 대 절망(노년기, 65세 이상) * 행동주의 * 인지주의 * 정신분석이론 * 사회문화이론 * 정신물리학 * 동물행동학 이론 * 정보처리이론 * 하워드 가드너 ** 다중지능이론 * 자존감 * 유아심리학 * 발달(development) * 한국발달심리학회 분류:심리학의 분과 분류:행동과학
피아제의 인지 발달론
[ "Introduction", "인지 발달론의 주요 개념", "인지 발달의 단계", "사회문화적 발달", "같이 보기", "참고" ]
[ "\n\n\n파일:Jean Piaget.jpg|섬네일|오른쪽|270px|장 피아제의 흉상\n'''인지 발달론'''(認知發達理論, 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은 인간의 인지 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한 피아제의 이론이며, 심리학의 인지이론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비고츠키와 유사성도 있으며 그들에 의하면 대부분 부모가 자식을 대충 교육하기 때문에 자식들은 부모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복잡한 세상을 학습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인지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알아서 발달시키게 된다.\n\n피아제는 심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인식론은 인간이 발생학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론 또한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n\n피아제는 한 사람의 아동기가 사람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지 발달은 신체적 성숙과 환경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과정의 점진적 재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지 발달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으며 언어는 인지 발달을 통해 습득된 지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n\n한편 알프레드 비네의 실험실에서 아동지능검사와 관련하여 일한바 있다고 알려져있다.\n", "\n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은 파란 신호일 때 길을 건너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되, 그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제는 도식과 적응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n\n* '''도식'''(Schema) : 도식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말한다. 쉽게 말해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유사한 환경 안에서, 반복에 의해 변화되고 일반화된 행동의 구조 또는 조직화를 의미한다.\n\n예를 들어 5세 유아가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라고 배웠다고 생각해 보자. 이를 통해 이 아이는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와 같다\"는 도식을 보유하게 된다.\n\n몇 가지의 도식은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빨기 도식이나 잡기 도식과 같은 것인데, 빨기 도식의 경우 그러나 그 기능면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서 적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발전하게 된다.\n\n* '''적응''' : 적응은 환경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도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두 가지의 상호보완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바로 동화와 조절이라는 수단이다.\n\n적응은 우리에게도, 또 동식물에게도 흔히 찾을 수 있다. 홍관조의 수컷은 선명한 붉은색인 반면에 암컷은 눈에 띄지 않게 엷은 갈색을 띠면서 종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줄인다.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지적으로는 도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새로운 도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도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n\n* '''동화와 조절''': '''동화'''는 기존의 도식에 맞추어서 새로운 경험을 일반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쉽게 말해 새로운 경험을 기존에 가지고 있는 도식에 맞추어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의 도식에 맞는다면 유기체는 인지적으로 평형 상태가 된다.\n\n위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물체를 새라고 배운 아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것이 털도 없고, 날개도 펄럭이지 않는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새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되면서 불평형의 상태가 된다.\n\n피아제에게 동화는 외부적 요소를 생활 또는 환경,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의 구조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 도식에 맞추는 과정이다. 새로운 경험에서의 동화는 기존의 개념에 맞추거나 조절하기 위해 재해석되며 동화는 사람들이 새롭거나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직면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학습한 정보를 언급하는 것이다.\n조절은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에 맞지 않을 때, 유기체는 불평형의 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을 변경하거나 새롭게 만들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n\n불평형의 상태가 되었던 아이는 이제 새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을 '''조절'''이라고 한다. 혹은 누군가가 그것은 새가 아니라 비행기라고 일러 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조절이라고 하는데, 조절의 과정에서는 도식의 형태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n\n'''조절'''은 특정 환경에서 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고 기존의 도식을 새 정보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식(지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새 대상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변화되길 요구한다. 피아제는 사람의 두뇌는 평형화를 위한 진화를 통해 짜여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화와 조절을 통한 내/외부적 과정에 의한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n\n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기존의 정신 도식에 동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대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조절해야 한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알게 되기(동화시키기) 위하여 그 대상의 외양에 집중(조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대상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발달은 두 기능 사이의 평형화를 증대시킨다.\n\n* '''조직화''' : 조직화는 유기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도식을 새롭고, 더욱 복잡한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도식을 어떤 새롭고 복잡한 구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n\n아까 새와 비행기를 구분하게 되었던 아이는 이제 날아다니는 대상의 하위 범주로 새와 비행기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직화를 거듭함으로써 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화는 인지적 발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n",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은 네 단계를 통하게 되며, 질적으로 다른 이 단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된다고 한다(Piaget,1954).\n\n=== (감각운동기(0-2세) ===\n'''감각적''' '''동작('''Sensorimotor Stage)의 시기 : 출생 직후 ~ 2세\n\n감각운동기에는 신생아의 단순한 반사들이 나타나는 출생에서 초기의 유아적 언어가 나타나고,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2세 경에 끝난다. 이 단계에서 아동의 행동은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과 운동기술을 사용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게 된다.\n\n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대상영속성'''(Object permanence)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아동은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8개월 무렵부터).\n\n또 이 시기가 지나면 모방이나 기억이 가능한,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게 되며 초기의 단순한 반사행동은 사라지고 점차 자신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목적행동'''으로 바뀌게 된다\n\n=== 전조작기(2 - 6,7세) ===\n'''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의 시기 : 2세 ~ 6, 7세\n\n조작이란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전조작기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전의 단계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는 대략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표상을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전조작기 사고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n\n* '''상징적 사고''' : 감각운동기까지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나 감각에 의존하여 생활한다. 그러나 감각운동기의 말기가 되면 점점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정신적 표상은 언어의 발달이 가속화하는 특징이 있다. 전조작기 아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표상들을 그림이나 언어 등의 형태로 표현한다.\n\n: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가상놀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꿉놀이나 병원놀이와 같은 것으로 가상적인 사물과 상황을 실제 사물이나 상황처럼 상징하곤 한다.\n\n* '''자기중심적 사고'''(Egocentrism):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 피아제는 그 원인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찾는다. 전조작기의 아이들은 타인의 생각, 감정, 지각, 관점 등이 자신과 동일하리라고 생각하는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유명한 '''세 산 실험'''(three mountain problem)의 결과에서 그 내용을 찾을 수 있다.\n\n:아동들에게 비대칭적인 산 모양을 보여준 후, 아동이 앉아 있는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서 관찰자가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무엇을 볼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일반적으로 3, 4세의 아동은 타인도 자기가 보았던 것을 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 타인의 시각에서 보는 조망을 추론할 수 있는 '''조망수용능력'''(Perspective Taking)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n\n* '''직관적 사고'''(Intuitive Thinking) : 크기, 모양, 색깔과 같은 한 가지 두드러진 속성에 근거하여 대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를 말한다. 즉, 지각적인 특성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의 특성으로 전조작기 아동은 보존개념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n\n:예를 들어 A, B의 두 비커에 같은 양의 물을 담았다고 생각해 보자. A비커와 B비커는 모두 넓고 낮은 모양이므로 두 비커에 든 물의 양은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B비커의 물을 좁고 높은 모양의 C비커에 담는다면 물이 늘어났다고 여기게 된다. 즉, 눈에 보이는 모양만을 보고 물의 양을 판단하게 되는 직관적 사고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n\n* '''물활론적 사고''' : 모든 사물에 모두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사고를 말한다.\n\n* '''인공론적 사고''' : 모든 것을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말한다.\n\n=== 구체적 조작기(7~11세) ===\nconcrete operational stage\n\n* '''보존 개념'''\n보존 개념(conservation)이란, 모양이 넓은 같은 모양의 컵에 같은 양의 우유를 보여준 뒤, 한 컵의 우유를 모양이 다른 긴 컵에 부어도 긴 컵과 넓은 컵의 우유의 양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n즉, 동일성, 보상, 역조작의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n또한 수의 개념에서도 달걀과 컵을 나란히 놓은 뒤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면 컵과 달걀의 수가 같다고 대답하지만\n달걀이나 컵을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달걀과 컵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전조작기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된다.\n전조작기 아동은 같은 양의 진흙으로 만든 두 개의 공을 보여준 뒤 아동 앞에서 하나를 핫도그처럼 길게 만들면 어느새 양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보존개념을 획득한 구체적 조작기에는 모양이 달라져도 그 양이나 수는 보존된다는 개념을 획득한다.\n\n* '''유목화''' (classification process)\n같은 모양의 구슬을 보고 쇠구슬과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 있게 됨\n* '''서열화'''\n연역적 사고가 가능하게 됨\n* '''관계화'''\n분류,서열 등 집합적 관계에서뿐만아니라 공간적이거나 인과적인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n\n=== 형식적 조작기(11, 12세 이후) 또는 추상적 조작기 ===\nFormal operational stage\n\n* '''가설적 사고'''\n새로운 상황에 직면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가설적 상황을 설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n* '''과학적 사고'''\n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시험하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n* '''추상적 사고'''\n현실 상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는 없는 개념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n* '''체계적 사고'''\n자신과 다른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n* '''명제적 사고'''\n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언어적 진술에 의한 명제의 논리를 평가할 수 있다.\n* '''연역적 사고'''\n* '''결합적 분석'''\n* '''추상적 추론'''\n", "한편 이러한 맥락의 연대기적인 개인 연령수준에서의 인지 발달론 유형과는 대조적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 상호간의 섬세하고 협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 전달 측면에서 인지 발달을 다루는 레프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이론이 언급되고있다.\n", "* 근접 발달 영역(ZPD)\n* 에릭 에릭슨\n* 성심리 발전단계\n", "\n*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n피아제(Jean Piaget)와 비고츠키(Lev S. Vygotsky)의 인지발달이론을 중심으로,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제18권 제3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542663 (송지성, 이성애. (2012).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8(3), 215-227.)\n* (Piaget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른 유아체육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한국체육교육학회지 제20권 제4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644983 (김현우, 오광수, 양웅비. (2016). Piaget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른 유아체육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 한국체육교육학회지, 20(4), 85-99.)\n\n분류:인지심리학\n분류:단계 이론\n분류:발생신경과학" ]
파일:Jean Piaget.jpg|섬네일|오른쪽|270px|장 피아제의 흉상 '''인지 발달론'''(認知發達理論, 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은 인간의 인지 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한 피아제의 이론이며, 심리학의 인지이론에 있어서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비고츠키와 유사성도 있으며 그들에 의하면 대부분 부모가 자식을 대충 교육하기 때문에 자식들은 부모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복잡한 세상을 학습하여 이해할 수 있는 인지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알아서 발달시키게 된다. 피아제는 심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인식론은 인간이 발생학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론 또한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피아제는 한 사람의 아동기가 사람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지 발달은 신체적 성숙과 환경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과정의 점진적 재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지 발달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으며 언어는 인지 발달을 통해 습득된 지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알프레드 비네의 실험실에서 아동지능검사와 관련하여 일한바 있다고 알려져있다.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은 파란 신호일 때 길을 건너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되, 그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제는 도식과 적응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 '''도식'''(Schema) : 도식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말한다. 쉽게 말해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유사한 환경 안에서, 반복에 의해 변화되고 일반화된 행동의 구조 또는 조직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5세 유아가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라고 배웠다고 생각해 보자. 이를 통해 이 아이는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와 같다"는 도식을 보유하게 된다. 몇 가지의 도식은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빨기 도식이나 잡기 도식과 같은 것인데, 빨기 도식의 경우 그러나 그 기능면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서 적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발전하게 된다. * '''적응''' : 적응은 환경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도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두 가지의 상호보완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바로 동화와 조절이라는 수단이다. 적응은 우리에게도, 또 동식물에게도 흔히 찾을 수 있다. 홍관조의 수컷은 선명한 붉은색인 반면에 암컷은 눈에 띄지 않게 엷은 갈색을 띠면서 종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줄인다.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지적으로는 도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새로운 도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도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동화와 조절''': '''동화'''는 기존의 도식에 맞추어서 새로운 경험을 일반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쉽게 말해 새로운 경험을 기존에 가지고 있는 도식에 맞추어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의 도식에 맞는다면 유기체는 인지적으로 평형 상태가 된다. 위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물체를 새라고 배운 아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것이 털도 없고, 날개도 펄럭이지 않는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새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되면서 불평형의 상태가 된다. 피아제에게 동화는 외부적 요소를 생활 또는 환경,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의 구조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 도식에 맞추는 과정이다. 새로운 경험에서의 동화는 기존의 개념에 맞추거나 조절하기 위해 재해석되며 동화는 사람들이 새롭거나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직면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학습한 정보를 언급하는 것이다. 조절은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에 맞지 않을 때, 유기체는 불평형의 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을 변경하거나 새롭게 만들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불평형의 상태가 되었던 아이는 이제 새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을 '''조절'''이라고 한다. 혹은 누군가가 그것은 새가 아니라 비행기라고 일러 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조절이라고 하는데, 조절의 과정에서는 도식의 형태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조절'''은 특정 환경에서 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고 기존의 도식을 새 정보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식(지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새 대상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변화되길 요구한다. 피아제는 사람의 두뇌는 평형화를 위한 진화를 통해 짜여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화와 조절을 통한 내/외부적 과정에 의한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기존의 정신 도식에 동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대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조절해야 한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알게 되기(동화시키기) 위하여 그 대상의 외양에 집중(조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대상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발달은 두 기능 사이의 평형화를 증대시킨다. * '''조직화''' : 조직화는 유기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도식을 새롭고, 더욱 복잡한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도식을 어떤 새롭고 복잡한 구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아까 새와 비행기를 구분하게 되었던 아이는 이제 날아다니는 대상의 하위 범주로 새와 비행기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직화를 거듭함으로써 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화는 인지적 발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은 네 단계를 통하게 되며, 질적으로 다른 이 단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된다고 한다(Piaget,1954). === (감각운동기(0-2세) === '''감각적''' '''동작('''Sensorimotor Stage)의 시기 : 출생 직후 ~ 2세 감각운동기에는 신생아의 단순한 반사들이 나타나는 출생에서 초기의 유아적 언어가 나타나고,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2세 경에 끝난다. 이 단계에서 아동의 행동은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과 운동기술을 사용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대상영속성'''(Object permanence)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아동은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8개월 무렵부터). 또 이 시기가 지나면 모방이나 기억이 가능한,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게 되며 초기의 단순한 반사행동은 사라지고 점차 자신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목적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 전조작기(2 - 6,7세) === '''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의 시기 : 2세 ~ 6, 7세 조작이란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전조작기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전의 단계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는 대략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표상을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전조작기 사고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상징적 사고''' : 감각운동기까지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나 감각에 의존하여 생활한다. 그러나 감각운동기의 말기가 되면 점점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정신적 표상은 언어의 발달이 가속화하는 특징이 있다. 전조작기 아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표상들을 그림이나 언어 등의 형태로 표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가상놀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꿉놀이나 병원놀이와 같은 것으로 가상적인 사물과 상황을 실제 사물이나 상황처럼 상징하곤 한다. * '''자기중심적 사고'''(Egocentrism):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 피아제는 그 원인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찾는다. 전조작기의 아이들은 타인의 생각, 감정, 지각, 관점 등이 자신과 동일하리라고 생각하는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유명한 '''세 산 실험'''(three mountain problem)의 결과에서 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아동들에게 비대칭적인 산 모양을 보여준 후, 아동이 앉아 있는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서 관찰자가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무엇을 볼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일반적으로 3, 4세의 아동은 타인도 자기가 보았던 것을 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 타인의 시각에서 보는 조망을 추론할 수 있는 '''조망수용능력'''(Perspective Taking)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직관적 사고'''(Intuitive Thinking) : 크기, 모양, 색깔과 같은 한 가지 두드러진 속성에 근거하여 대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를 말한다. 즉, 지각적인 특성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의 특성으로 전조작기 아동은 보존개념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A, B의 두 비커에 같은 양의 물을 담았다고 생각해 보자. A비커와 B비커는 모두 넓고 낮은 모양이므로 두 비커에 든 물의 양은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B비커의 물을 좁고 높은 모양의 C비커에 담는다면 물이 늘어났다고 여기게 된다. 즉, 눈에 보이는 모양만을 보고 물의 양을 판단하게 되는 직관적 사고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 '''물활론적 사고''' : 모든 사물에 모두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사고를 말한다. * '''인공론적 사고''' : 모든 것을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말한다. === 구체적 조작기(7~11세) === concrete operational stage * '''보존 개념''' 보존 개념(conservation)이란, 모양이 넓은 같은 모양의 컵에 같은 양의 우유를 보여준 뒤, 한 컵의 우유를 모양이 다른 긴 컵에 부어도 긴 컵과 넓은 컵의 우유의 양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동일성, 보상, 역조작의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수의 개념에서도 달걀과 컵을 나란히 놓은 뒤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면 컵과 달걀의 수가 같다고 대답하지만 달걀이나 컵을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달걀과 컵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전조작기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조작기 아동은 같은 양의 진흙으로 만든 두 개의 공을 보여준 뒤 아동 앞에서 하나를 핫도그처럼 길게 만들면 어느새 양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보존개념을 획득한 구체적 조작기에는 모양이 달라져도 그 양이나 수는 보존된다는 개념을 획득한다. * '''유목화''' (classification process) 같은 모양의 구슬을 보고 쇠구슬과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 있게 됨 * '''서열화''' 연역적 사고가 가능하게 됨 * '''관계화''' 분류,서열 등 집합적 관계에서뿐만아니라 공간적이거나 인과적인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 형식적 조작기(11, 12세 이후) 또는 추상적 조작기 === Formal operational stage * '''가설적 사고''' 새로운 상황에 직면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가설적 상황을 설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 '''과학적 사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시험하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 '''추상적 사고''' 현실 상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는 없는 개념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 '''체계적 사고''' 자신과 다른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 '''명제적 사고''' 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언어적 진술에 의한 명제의 논리를 평가할 수 있다. * '''연역적 사고''' * '''결합적 분석''' * '''추상적 추론''' 한편 이러한 맥락의 연대기적인 개인 연령수준에서의 인지 발달론 유형과는 대조적으로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 상호간의 섬세하고 협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 전달 측면에서 인지 발달을 다루는 레프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이론이 언급되고있다. * 근접 발달 영역(ZPD) * 에릭 에릭슨 * 성심리 발전단계 *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피아제(Jean Piaget)와 비고츠키(Lev S. Vygotsky)의 인지발달이론을 중심으로,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제18권 제3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542663 (송지성, 이성애. (2012). 인지발달적 상호작용이 유아 디자인교육에 미치는 영향.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18(3), 215-227.) * (Piaget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른 유아체육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한국체육교육학회지 제20권 제4호)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644983 (김현우, 오광수, 양웅비. (2016). Piaget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른 유아체육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 한국체육교육학회지, 20(4), 85-99.) 분류:인지심리학 분류:단계 이론 분류:발생신경과학
생태계
[ "Introduction", "개관", "기능", "생태계의 예",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파일:Blue Linckia Starfish.JPG|섬네일|산호초는 해양 생태계의 좋은 예이다.\n'''생태계'''(生態系, )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생태학(ecology)이라고 한다.\n\n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루면 이를 '생태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곧 상호의존성과 완결성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뜻이다.\n\n하나의 생태계 안에 사는 유기체들은 먹이사슬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물질이 여러 유기체에 걸쳐 순환하고 에너지도 같이 이동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생겨난다.\n", "'생태계'라는 용어가 서구 사회에 정립된 것은 1930년 로이 클라팸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환경 전반의 유기체와 생물들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탄스리가 앞서 정리한 로이의 연구 결과를 정제하여 발표한 것이 현재의 생태계(Ecosystem)이다. 생태계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n\n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든 자연환경 상에 있어 모든 생물이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의 생태학적 개념이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거대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이 서로 밀접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한다. 생태계의 예로는 크게 육상 생태계, 연안 생태계, 육지 생태계로 나뉜다.\n", "인류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계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자 상품과 용역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재나 유제품과 같은 제품들이다. 야생동물에서 얻은 육류는 생태학적 관념을 적용하면 훨씬 더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 수초를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케냐와 남아프리카 일대의 연구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야생 생태계의 구조를 이용한 상업구조는 이렇다 할 성과가 많이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생태 관광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산업이 가장 성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생태 관광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자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이라고 여겨진다.\n", "\n* 농생태계\n* 수생 생태계\n* 산호초\n* 사막\n* 숲\n* 인간 생태계\n* 해양 생태계\n* 연못 생태계\n* 프레리\n* 우림\n* 사바나\n* 스텝\n* 타이가\n* 툰드라\n* 도시 생태계\n* 아마존\n\n파일:Panorama presa las niñas mogan gran canaria.jpg|섬네일|1000px|center|카나리아 제도의 그란 카나리아의 민물 생태계\n", "* 생물지구화학적 순환\n", "\n", "\n* 생태계\n\n\n\n\n\n\n \n분류:공생\n분류:초개체" ]
파일:Blue Linckia Starfish.JPG|섬네일|산호초는 해양 생태계의 좋은 예이다. '''생태계'''(生態系, )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생태학(ecology)이라고 한다.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루면 이를 '생태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곧 상호의존성과 완결성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 사는 유기체들은 먹이사슬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물질이 여러 유기체에 걸쳐 순환하고 에너지도 같이 이동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생겨난다. '생태계'라는 용어가 서구 사회에 정립된 것은 1930년 로이 클라팸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환경 전반의 유기체와 생물들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탄스리가 앞서 정리한 로이의 연구 결과를 정제하여 발표한 것이 현재의 생태계(Ecosystem)이다. 생태계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든 자연환경 상에 있어 모든 생물이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의 생태학적 개념이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거대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이 서로 밀접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한다. 생태계의 예로는 크게 육상 생태계, 연안 생태계, 육지 생태계로 나뉜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계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자 상품과 용역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재나 유제품과 같은 제품들이다. 야생동물에서 얻은 육류는 생태학적 관념을 적용하면 훨씬 더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 수초를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케냐와 남아프리카 일대의 연구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야생 생태계의 구조를 이용한 상업구조는 이렇다 할 성과가 많이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생태 관광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산업이 가장 성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생태 관광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자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이라고 여겨진다. * 농생태계 * 수생 생태계 * 산호초 * 사막 * 숲 * 인간 생태계 * 해양 생태계 * 연못 생태계 * 프레리 * 우림 * 사바나 * 스텝 * 타이가 * 툰드라 * 도시 생태계 * 아마존 파일:Panorama presa las niñas mogan gran canaria.jpg|섬네일|1000px|center|카나리아 제도의 그란 카나리아의 민물 생태계 *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 생태계 분류:공생 분류:초개체
유전자
[ "Introduction", "역사", "같이 읽기", "각주", "외부 링크" ]
[ "\n파일:Gene.png|250px|섬네일|염색체(오른쪽 위)는 DNA가 실타래처럼 감겨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전자'''는 DNA의 이중 나선 한 구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미노산 정보를 가지는 엑손 구간과 정보를 가지지 않는 인트론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n'''유전자'''(遺傳子, 영어: gene)는 유전의 기본단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n\n현대 유전학에서 유전자는 \"게놈 서열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구간으로서 유전형질의 단위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게놈 서열 안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의 일부분을 이루며 조절 구간, 전사 구간, 기타 기능이 부여된 구간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대립형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형질은 유전자 서열에 의해 나타나는 유전형질의 한 종류이다.\n\n유전자의 개념은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히 특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멘델의 특질은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50년대 DNA가 발견되면서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해명되었다.\n\n모든 생물은 유전자에 의한 다양한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난다. 눈 색깔, 혈액형과 같은 것을 비롯하여 특정한 유전적 질환과 같은 것도 유전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수 천 가지의 생화학 작용도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소수의 경우, 유전자가 세포주기의 간기때 유전정보가 잘못복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인해 기존의 형질과 다른 새로운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n\n세포 내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 가운데 정보를 갖는 부분을 뜻한다. DNA의 대부분은 정보가 없는 무작위 서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비부호화 DNA 서열이라 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99%가 비부호화 DNA 서열에 해당한다. 한편, 생쥐의 비부호화 DNA 가운데 80%가 인간의 것과 상동성을 보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두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유전자는 \"부호화된 DNA 서열\"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의해 진행되는 전사 (생물학) 등의 과정을 통해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유전자 발현이라 한다.\n\n유전자의 발현은 개체의 발생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개체와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에 발현된 특징을 발현형질이라 한다. 발현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n", "\n1850년대 그레고어 멘델이 완두콩 실험을 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였다. 완두콩 시험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하나의 유전형질이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하지 않는 개체를 순종으로, 이 순종들의 교배를 통해 형질변화가 일어나는 개체를 잡종으로 불렀다. 잡종의 1세대에는 두 부모 개체의 대립형질 가운데 한 가지만이 발현되었는데 이를 우성, 1세대에 발현되지 않는 특성은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잡종 교배 시험을 통해 1세대에 열성이 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며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다시 발현한다는 것과 발현의 빈도가 통계적으로 분명한 법칙에 의한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의 발견으로서 멘델은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n\n초창기 멘델의 발견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 휘호 더프리스가 《세포간 범생설》(''Intracellular Pangenesis'')을 출간하면서 멘델의 이론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프리스는 멘델이 제시한 유전학 개념의 용어를 정리하여 유전형질, 발현형질과 같은 용어를 고안하였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최초로 사용하였다.\n\n1900년대에 이르러 멘델의 법칙은 다시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유전자가 염색체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건은 특정한 유전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1928년 모건은 초파리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지도를 제작하였다.\n\n1928년 영국의 의사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페렴쌍구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피스 실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시험을 통해 그리피스는 유전형질이 세균 사이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매끈한 균주를 형성하는 S형과 거친 균주를 형성하는 R형 두 종류의 폐렴쌍구균을 이용하여 실험하였다. S형을 생쥐에 주사하면 쥐는 하루 만에 죽지만 R형은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피스는 폐렴 백신을 만들기 위해 S형 균을 열처리하여 죽인다음 생쥐에 주사하였다. 죽은 S형 균은 병을 유발하지 않아 생쥐는 생존하였다. 그다음 그는 죽은 S형 균과 살아있는 R형 균을 혼합하여 주사하였는데 생쥐는 폐렴으로 죽었다. 죽은 생쥐의 혈액을 관찰한 결과 모든 균이 S형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S형 균의 무엇인가가 R형 균을 S형 균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피스는 이 현상을 형질변환이라 불렀다.\n\n1941년 조지 웰스 비들과 에드워드 로리 테이툼은 돌연변이가 대사회로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를 연구하여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여 생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n\n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 콜린 먼로 매클라우드, 매클라인 매카시는 DNA에 유전자 정보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피스가 관찰한 형질변환은 바로 이 DNA의 이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었다. 이로써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는 하나의 유전자는 사실상 DNA의 염기서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DNA의 염기서열이 RNA에 의해 전사되고 리보솜에 전달되면 그로부터 지정된 아미노산 서열의 결합이 이루어져 효소와 같은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n\n1972년 월터 피어스의 연구팀은 박테리오파지 MS2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서열을 판독하였다.\n\n유전자 전체의 서열을 게놈이라 한다. 2007년 8월 햅맵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 지도를 판독하였다. 개체차를 반영한 인간의 게놈 판독 결과는 2008년 네이처에 발표되었다.\n", "\n\n\n=== 유전학 ===\n* 유전\n* 유전학\n* 유전형질\n* 대립형질\n* 유전자 부동\n* 유전자 이동\n* 수평적 유전자 이동\n* 멘델의 유전법칙\n* 집단유전학\n\n\n=== 진화 이론 ===\n* 진화\n* 슈도진\n* 중립 진화 이론\n\n=== 인물 ===\n* 그레고어 멘델\n* 휘호 더프리스\n* 오스왈드 에이버리\n* 제임스 D. 왓슨\n* 프랜시스 크릭\n\n", "\n", "\n* 네이버 캐스트 - 유전자 재조합\n\n\n\n\n *" ]
파일:Gene.png|250px|섬네일|염색체(오른쪽 위)는 DNA가 실타래처럼 감겨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전자'''는 DNA의 이중 나선 한 구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미노산 정보를 가지는 엑손 구간과 정보를 가지지 않는 인트론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전자'''(遺傳子, 영어: gene)는 유전의 기본단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현대 유전학에서 유전자는 "게놈 서열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구간으로서 유전형질의 단위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게놈 서열 안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의 일부분을 이루며 조절 구간, 전사 구간, 기타 기능이 부여된 구간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대립형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형질은 유전자 서열에 의해 나타나는 유전형질의 한 종류이다. 유전자의 개념은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히 특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멘델의 특질은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50년대 DNA가 발견되면서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해명되었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에 의한 다양한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난다. 눈 색깔, 혈액형과 같은 것을 비롯하여 특정한 유전적 질환과 같은 것도 유전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수 천 가지의 생화학 작용도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소수의 경우, 유전자가 세포주기의 간기때 유전정보가 잘못복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인해 기존의 형질과 다른 새로운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세포 내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 가운데 정보를 갖는 부분을 뜻한다. DNA의 대부분은 정보가 없는 무작위 서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비부호화 DNA 서열이라 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99%가 비부호화 DNA 서열에 해당한다. 한편, 생쥐의 비부호화 DNA 가운데 80%가 인간의 것과 상동성을 보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두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유전자는 "부호화된 DNA 서열"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의해 진행되는 전사 (생물학) 등의 과정을 통해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유전자 발현이라 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개체의 발생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개체와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에 발현된 특징을 발현형질이라 한다. 발현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1850년대 그레고어 멘델이 완두콩 실험을 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였다. 완두콩 시험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하나의 유전형질이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하지 않는 개체를 순종으로, 이 순종들의 교배를 통해 형질변화가 일어나는 개체를 잡종으로 불렀다. 잡종의 1세대에는 두 부모 개체의 대립형질 가운데 한 가지만이 발현되었는데 이를 우성, 1세대에 발현되지 않는 특성은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잡종 교배 시험을 통해 1세대에 열성이 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며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다시 발현한다는 것과 발현의 빈도가 통계적으로 분명한 법칙에 의한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의 발견으로서 멘델은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초창기 멘델의 발견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 휘호 더프리스가 《세포간 범생설》(''Intracellular Pangenesis'')을 출간하면서 멘델의 이론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프리스는 멘델이 제시한 유전학 개념의 용어를 정리하여 유전형질, 발현형질과 같은 용어를 고안하였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1900년대에 이르러 멘델의 법칙은 다시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유전자가 염색체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건은 특정한 유전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1928년 모건은 초파리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지도를 제작하였다. 1928년 영국의 의사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페렴쌍구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피스 실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시험을 통해 그리피스는 유전형질이 세균 사이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매끈한 균주를 형성하는 S형과 거친 균주를 형성하는 R형 두 종류의 폐렴쌍구균을 이용하여 실험하였다. S형을 생쥐에 주사하면 쥐는 하루 만에 죽지만 R형은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피스는 폐렴 백신을 만들기 위해 S형 균을 열처리하여 죽인다음 생쥐에 주사하였다. 죽은 S형 균은 병을 유발하지 않아 생쥐는 생존하였다. 그다음 그는 죽은 S형 균과 살아있는 R형 균을 혼합하여 주사하였는데 생쥐는 폐렴으로 죽었다. 죽은 생쥐의 혈액을 관찰한 결과 모든 균이 S형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S형 균의 무엇인가가 R형 균을 S형 균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피스는 이 현상을 형질변환이라 불렀다. 1941년 조지 웰스 비들과 에드워드 로리 테이툼은 돌연변이가 대사회로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를 연구하여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여 생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 콜린 먼로 매클라우드, 매클라인 매카시는 DNA에 유전자 정보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피스가 관찰한 형질변환은 바로 이 DNA의 이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었다. 이로써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는 하나의 유전자는 사실상 DNA의 염기서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DNA의 염기서열이 RNA에 의해 전사되고 리보솜에 전달되면 그로부터 지정된 아미노산 서열의 결합이 이루어져 효소와 같은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1972년 월터 피어스의 연구팀은 박테리오파지 MS2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서열을 판독하였다. 유전자 전체의 서열을 게놈이라 한다. 2007년 8월 햅맵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 지도를 판독하였다. 개체차를 반영한 인간의 게놈 판독 결과는 2008년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 유전학 === * 유전 * 유전학 * 유전형질 * 대립형질 * 유전자 부동 * 유전자 이동 * 수평적 유전자 이동 * 멘델의 유전법칙 * 집단유전학 === 진화 이론 === * 진화 * 슈도진 * 중립 진화 이론 === 인물 === * 그레고어 멘델 * 휘호 더프리스 * 오스왈드 에이버리 * 제임스 D. 왓슨 * 프랜시스 크릭 * 네이버 캐스트 - 유전자 재조합 *
DNA
[ "Introduction", "구조", "기능", "게놈과 염색체", "발견의 역사", "관련 주제",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 "\n\nDNA의 이중나선(안쪽 보라색계열이 염기 쌍(Base pair)이며 바깥쪽 빨간색 계열이 당과 인산 백본(BackBone)이다)\n'''DNA'''(, '''데옥시리보핵산''', '''디옥시리보 핵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인 두 개의 긴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이다. 세포 핵에서 발견되어 핵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이 핵 이외의 세포소기관도 독립된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n\nDNA는 4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중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닥은 사이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은 독특한 핵염기(nucleobase)로 구분되기 때문에 흔히 DNA 염기서열이라고 부른다. DNA 염기서열은 유전정보를 나타내는 유전자 구간과 그렇지 않은 비부호화 DNA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기능을 가진 유전자였더라도 돌연변이를 통해 기능을 상실한 슈도진이 되면 비부호화 DNA가 된다.\n\nDNA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정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게 한다. 유전자는 DNA 사슬의 특정 구간으로 실제 단백질 형성과 같은 발현에 관여하는 엑손 구간과 그렇지 않은 인트론을 포함한다. DNA가 직접 유전자 발현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발현 과정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mRNA)가 지닌 코돈에 의해 진행된다. 코돈은 세 개의 염기서열이 묶인 유전단위로 시작 코돈과 종결 코돈 그리고 그 사이에 실제 아미노산 결합을 지시하는 코돈들로 이루어져 있다. mRNA는 리보솜에서 효소와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한다.\n\n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DNA는 유전의 원인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어 왔으며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이 확인되었고 1952년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의 허시-체이스 실험으로 확정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네이처지에 실은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그러나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DNA의 X선 회절 사진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것이었으며, 그녀와 앙숙이었던 동료 과학자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하고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연구가 가능했기에 이후 그들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프랭클린은 암으로 인해 1958년에 사망하여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였다.\n",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중합체 두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인산염이 결합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4 종류의 핵염기 가운데 하나가 결합되어 있다. 디옥시리보스와 인산기가 중합 과정을 통해 사슬 한 가닥의 뼈대를 이루고 핵염기들이 서로 상보적인 수소 결합을 통해 염기쌍을 이루며 이중나선을 만든다. 한편 이러한 DNA의 상보성은 한쪽만으로 상대편을 예측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n\n이중나선 구조는 DNA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이다.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유전정보를 저장하는데 수소 결합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쉽게 풀렸다 닫힐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을 위해 일부분이 풀렸다가 닫힐 수도 있고 세포 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풀리면서 복제될 수도 있다. 일부 또는 전체가 풀린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이 종료되거나 복제가 끝나면 다시 닫히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인이 된다.\n\n=== 뉴클레오타이드 ===\n\n아데노신일인산의 구조. 가운데의 오각형이 리보스, 왼쪽이 인산, 오른쪽이 핵염기인 아데닌이다.\n\n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은 인산염이 다른 한 쪽은 핵염기(nucleobase)가 결합되어 있는 DNA의 단위체이다. 생체에는 여러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으며 저마다 독자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아데노신은 결합된 인산염의 수에 따라 아데노신일인산, 아데노신이인산, 아데노신삼인산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아데노신삼인산은 인체의 모든 세포에 화학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세포의 에너지 동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데노신삼인산에서 인산염 하나가 분리되어 아데노신이인산이 되면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DNA를 이루는 것은 이것보다 인산염 하나가 더 적은 아데노신일인산이다.\n\n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시토신(C), 구아닌(G), 아데닌(A), 티민(타이민)(T)의 네 종류이다. 이들 핵염기와 연결된 뉴클레오타이드는 마치 레고 블럭처럼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아데닌은 티민과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염기쌍을 이룬다. 염기의 모양과 화학구조 때문에 상보적인 두 핵염기만이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DNA 가닥의 한쪽 염기서열만 알면 다른쪽은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쪽 가닥의 염기서열이 -A-C-G-T- 라면 다른 쪽 가닥의 염기서열은 -T-G-C-A- 가 된다.\n\n아데닌(A)과 티민(T)은 두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 수소결합의 개수 때문에 A-T 결합은 G-C 결합보다 결합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쉽다. 생명체가 죽으면 DNA 역시 여러 이유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A-T 쪽이 먼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티민은 계속적인 손상을 입어 우라실로 대체되며 이렇게 손상을 입은 DNA는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n\n\n파일:GMP chemical structure.png | 구아노신일인산\n파일:TMP chemical structure.png | 티미딘일인산\n파일:CMP chemical structure.png | 시티딘일인산\n파일:Base pair GC.svg | 구아닌과 시토신의 상보 결합\n파일:Base pair AT.svg | 아데닌과 티민의 상보 결합\n\n\n대부분의 생물은 위 네 핵염기만이 DNA의 단위체이지만 바이러스의 일종인 일부 박테리오파지는 우라실도 단위체로 사용된다. 박실루스 슈브틸리스(''Bacillus subtilis'') 종에 속하는 박테리오파지 PBS1과 PBS2 그리고 예르시니아(''Yersinia'') 박테리오파지 piR1-37의 DNA는 티민이 우라실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생물에서 우라실은 RNA의 단위체로서만 관여한다.\n\n=== 이중나선 ===\nDNA가 나선 모양으로 꼬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의 중합 형성으로 생기는 구조 때문이다. 리보스와 디옥시리보스는 모두 탄소 5개로 이루어진 오탄당으로 단원자 산소를 매개로 오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단원자 산소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탄소마다 1번에서 5번까지 번호를 붙여 위치를 나타낸다. 뉴클레오타이드에서 디옥시리보스의 1번 탄소는 핵염기와 결합하고, 2번과 3번은 하이드록시기('''-OH''')와 결합하며 4번 탄소와 연결된 5번 탄소가 인산염과 결합한다. 그리고 다른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하는 것은 5번 탄소에 연결된 인산염이다. 따라서 DNA 염기서열 사슬은 언제나 인산염을 사이에 두고 5번 탄소와 3번 탄소가 연결되게 된다. 이를 5' → 3' 연결 방향성이라고 부른다. 인산염의 결합 위치때문에 DNA 가닥은 3차원에서 나선 구조를 지니며 꼬이게 된다. 한편, 두 가닥의 염기서열 뼈대에 연결된 핵염기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한 쪽 가닥 말단이 3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5번 탄소이게 되고 그 반대로 한 쪽의 말단이 5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3번이게 된다. 그 결과 A-T 및 G-C 두 염기서열 뼈대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란한 역평행성과 상보성을 보인다. 이와 같이 하여 DNA는 두 개의 염기서열 뼈대가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가 되고 두 사슬의 핵염기가 마치 사다리처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n\n\n파일:DeoxyriboseLabeled.png | (디옥시)리보스의 구조\n파일:DNAn+1 C.svg | 5' → 3' 연결\n파일:5-3 DNA chain antiparallel.png | DNA 사슬의 역평행성\n파일:Adn25.png | DNA 이중나선\n\n\n=== 이중나선의 종류 ===\nDNA 이중나선의 종류. 왼쪽부터 A형, B형, Z형\n\nDNA 이중나선은 대개 오른 나사 방향으로 꼬이는 B형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널리 알려진 유형으로는 A-DNA, B-DNA, Z-DNA가 있다. DNA 이중나선은 나선 사이에 홈이 패이게 되는데 넓게 패이는 주홈과 좁게 패이는 부홈을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B-DNA의 경우 한 번 감긴 나선 마다 10개의 염기쌍이 놓인다. 그런데 A-DNA는 나선의 기울기가 수직축을 기준으로 30°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더 큰 폭으로 회전한다. 이 경우 나선 사이의 홈도 비슷하게 패여서 주홈과 부홈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며 나선 하나에 놓이는 염기쌍도 11개로 B형 보다 1개 더 많다. 한편 Z-DNA는 나사의 회전 방향이 B-DNA와 거울상 대칭을 보이고 나선 하나에 12개의 염기쌍이 놓이게 된다. 그 결과 Z-DNA는 B-DNA보다 길고 홀쭉하게 보이게 된다.\n\nDNA는 대부분 B형을 보이지만 매우 긴 DNA 사슬은 여러 형태의 DNA 사슬구조가 섞여 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반복하여 염기서열을 이룰 때 Z형 나선을 이루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자와 인접한 Z형 나선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n\n=== 환형 DNA와 초나선 DNA ===\n가운데가 환형 DNA이고 양쪽은 거울상 대칭을 보이는 초나선 DNA이다.\n오랫동안 DNA 이중나선은 기다란 끈 모양으로 여겨져 왔지만, 전자현미경 관찰을 통해 많은 경우 양 끝이 공유결합을 통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환형 DNA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DNA 이중나선 역시 다시 한 번 꼬여서 초나선을 이룰 수 있다. DNA가 이렇게 고리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슬의 방향성 때문에 한쪽 끝의 3' 말단이 반대편 끝의 5'말단과 공유결합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려면 DNA 사슬 자체가 1 회 이상 더 회전하여야 한다.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나선을 더 단단히 조이는 효과가 일어나고 이를 양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반대로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함으로 인해서 고리를 만든다면 DNA 나선을 풀어주는 효과가 나타나고 이를 음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실제 DNA는 그것의 나선 1회전 당 염기쌍 수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변형하여 초나선에 의한 영향에 맞선다. 예를 들어 B-DNA는 나선축이 휘어져 나선 1회 당 10개의 염기쌍 주기를 유지한다.\n\nDNA의 위상적 구조가 갖는 생물학적 기능은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DNA 구조는 늘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풀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변한다. DNA 회전효소는 초나선 현상을 완화하는 효소로, 공유결합된 말단을 풀어 고리를 끊고 너무 꼬여버린 줄을 풀어준다음 다시 연결한다.\n", "DNA에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담겨있다. 그러나 DNA의 염기서열 모두가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염기서열을 유전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비부호화 DNA라고 한다. 비부호화 DNA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유전자로 기능하였으나 돌연변이 등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슈도진이 포함되어 있다.\n\n유전자가 직접 생물을 이루는 물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전자에는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한 정보만이 담겨있다. 따라서 DNA는 생물의 설계도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요리책처럼 해야할 작업을 순서대로 적은 레시피에 가깝다. DNA의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고 처리되어 최종 결과물 생성에 관여하게 된다.\n\n따라서 DNA의 기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n*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n* DNA는 유전정보를 보관한다.\n\n=== 유전자 발현===\n\n유전자는 DNA의 일정 구간에 걸쳐 있는 염기 서열이다. 유전자에는 실제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엑손 구간과 발현에 관여하지 않는 인트론 구간이 있다. 엑손 구간의 시작은 촉진유전자(Promoter, 프로모터)에서 시작한다. 촉진유전자는 DNA 나선 두 가닥 중 어느쪽이든 있을 수 있다.\n\nDNA에 있는 유전자는 정보만을 지정하고 실제 단백질의 형성과 같은 일은 리보솜과 같이 세포 핵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 이 정보 전달은 전령 RNA(messenger RNA, mRNA)라고 불리는 \"전령\"이 담당한다. 촉진유전자는 바로 이 전령이 생성되는 시작점으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DNA의 두 가닥 가운데 어느 쪽을 이용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읽어야 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지정한다. 촉진유전자의 염기 서열 자체가 한 방향으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거꾸로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n\n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인 mRNA는 RNA 중합효소에 의해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위치인 촉진유전자에 결합하는데 촉진유전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RNA 중합효소가 정확히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단의 염기서열이 있다. RNA 중합효소는 이 유도 표지를 따라 접근하여 정확한 시작위치에 결합한 다음 DNA 사슬을 풀고 DNA와 상보적으로 형성되는 RNA 사슬을 엮는다. DNA와 달리 RNA는 아데닌의 상보적 핵염기로 우라실(U)이 사용된다. RNA 중합효소가 지나가면 DNA는 스스로 다시 감긴다. RNA 중합효소는 계속하여 mRNA를 결합하다가 종결 위치를 만나면 전사를 멈춘다. 종결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한 종류 이상이다.\n\nRNA 중합효소(RNAP)에 의해 전령 RNA가 형성되는 과정\n\n유전자가 전사된 mRNA는 염기서열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데 실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코돈이다. 코돈은 시작 코돈, 아미노산 지정 코돈, 종결코돈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라실 셋이 모인 코돈 UUU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네개의 염기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 경우의 수는 이므로 모두 64가지의 코돈이 있지만, 코돈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아미노산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지정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이다. 또한 코돈에는 한 개의 시작 코돈과 세 개의 종결 코돈이 있다.\n\n진핵생물의 경우 전사는 두 단계를 거친다. DNA에서 곧바로 전사된 1차 전사체는 엑손 부분과 인트론 부분이 함께 전사되며 있다. 최종 형성되는 mRNA는 이 가운데 인트론 부분을 잘라내 버린다. 대개의 경우 인트론 전사체 RNA의 절단은 전사가 종결된 뒤 핵 안에서 이루어지고, 핵 안에는 잘려진 다양한 크기의 RNA 분자가 남게 된다. RNA 절단에 관여하는 소자는 스프라이소좀으로 유전자 서열 자체에 어느 부분이 절단될 것인지를 지정하는 염기서열이 따로 있어서 매우 정교하게 잘라내어 접합한다. 잘려나가는 부위는 때로 전체 전사체의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n\n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n이렇게 형성된 mRNA는 리보솜으로 옮겨가 번역된다. 리보솜은 세포내의 \"공장\"으로 실제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한 조립공처럼 일한다. mRNA에는 리보솜 결합 부위라는 번역 개시 신호가 있어 어디서부터 아미노산 결합을 시작할 지 지시한다. 리보솜은 mRNA를 \"읽어\"들이고 그에 맞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는 운반 RNA(transfer RNA, tRNA)를 받아들인 후 아미노산은 펩티드 결합에 사용하고 tRNA는 방출한 다음 다음 코돈을 읽는다. 이런 과정을 종결 코돈이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비유하자면 mRNA는 작업지시서, tRNA는 운반도구, tRNA에 결합한 아미노산은 재료가 되는 셈이다.\n\ntRNA는 독특한 접합이 있는 RNA로 한쪽 끝엔 mRNA와 상보적인 안티코돈이 있고 다른 한쪽엔 특정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구간을 지니고 있다. DNA에는 tRNA를 만들 수 있는 전사 구간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역시 유전자의 하나이다. tRNA는 세포 내에서 자신과 짝을 이루는 아미노산과 결합해 있다가 근처의 리보솜에 끌려들어가 아미노산 합성에 참여하고 방출된 뒤에는 다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 이 과정은 세포 내 물질의 밀도에 의존한다.\n\n유전자 발현에서 단백질 합성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은 대부분 체내에서 합성되어 있다가 mRNA가 전달한 정보에 따라 단백질로 결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전체를 모두 체내에서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있다. 사람의 경우 20개의 아미노산 가운데 트립토판, 메티오닌, 발린, 트레오닌, 페닐알라닌, 류신, 이소류신, 리신의 8 개는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한다. 이들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우유, 계란, 고기 등에 풍부하므로 육식을 할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의 경우엔 콩이나 두부, 기타 여러 곡물 등을 혼합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 지지 않도록 식단에 주의하여야 한다.\n\n결국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 mRNA와 DNA의 다른 구간에서 형성된 tRNA가 재료인 아미노산을 이용하여 리보솜에서 아미노산 사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전자 발현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 사슬은 단백질 접힘과정을 거쳐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이 된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효소가 있다. 효소는 체내의 생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로서 3차원 구조가 기능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소가 작용하는 부위를 효소의 활성자리라고 하는데 효소의 구조가 변하면 이 활성 자리 역시 바뀌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n\n=== 돌연변이 ===\n\n유전자의 염기서열 어느 한 곳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돌연변이의 결과 코돈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최종 형성되는 아미노산 역시 바뀌게 된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개의 아미노산 변형은 자식에게 유전된다. 돌연변이는 자연적으로 계속하여 생성되며 방사선을 쬐거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생물은 DNA 수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돌연변이를 계속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돌연변이를 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유전정보의 변이가 발생한다. DNA에는 유난히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나는 구간이 있으며 메틸화된 핵염기를 치환하면서 오류를 보인다. 유전 정보를 담지 않는 비부호 염기서열도 동일하게 이러한 돌연변이를 겪을 수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절 부위는 별다른 유전자 발현을 하지 않으면서 돌연변이가 빈번하여 집단의 친연관계를 추적하는 도구로 이용된다.\n\n이런 과정을 거쳐 유전자의 동일한 위치를 놓고 원래의 유전정보 A와 변형된 유전정보 A'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즉 어느 유전자가 후손에게서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 가 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이렇게 발생한 대립형질에 우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n\n한편, 환경이 어느 한 쪽 형질에 유리할 경우 점차 유리한 형질만이 살아남게 되어 생물 집단 전체의 유전형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진화의 기본 조건은 계속하여 발생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n\n=== 복제 ===\n\n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생물은 생장과 발달을 포함한 생애 전 단계에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필요로 한다. 세포가 분열될 때에는 그 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 정보 역시 빠짐 없이 나누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DNA 복제가 일어난다.\n\nDNA 사슬이 어떻게 풀리고 복제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1957년 메튜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의 실험을 통해 두 가닥이 풀린 후 각 가닥마다 새로운 상보적 염기서열이 형성되어 두 개의 DNA가 형성되는 반보존적 복제가 이루어짐을 확인하였다. 즉, 복제된 DNA 두 개는 각자 원래의 DNA 가닥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게 된다.\n\nDNA 복제 모식도\n\nDNA 회전효소가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생기는 과도한 꼬임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나선에 결합한다. 그 후 헬리카아제가 실제 이중나선의 결합을 푼다. 이중나선이 풀리면 DNA 중합효소가 복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DNA 복제에는 RNA로 이루어진 프라이머가 필요하다. DNA 복제를 진행하는 DNA 중합효소가 DNA의 시작점부터 직접 복제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소의 하나인 프리마아제가 열려진 DNA의 한쪽 가닥에 프라이머를 결합시킨 뒤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DNA 중합효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이중나선을 만들기 시작한다.\n\n한편, 새로운 DNA 이중나선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성된다. 원래의 DNA 나선에 DNA 회전효소가 지나가며 지퍼를 열듯이 나선을 분리하면 이렇게 열리는 방향과 같이 진행되는 선도 사슬(Leading strand)는 진행 방향을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사슬(Lagging strand)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의 DNA 이중나선이 풀리고 충분한 길이의 새로운 염기서열이 확보 되어야 계속해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리마아제가 헬리카아제의 뒤에 연결되어 임시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프리미어 RNA를 만들고 뒤에 거꾸로 향하는 DNA 중합효소가 절편을 만들며 잇는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 오카자키 절편이라 한다.\n\n이러한 복제 과정을 거치면 지연 사슬의 끝은 더 이상 프리미어를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그 결과 DNA 사슬의 말단 일부는 복제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때문에 복제가 거듭되면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은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n\n한편,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자식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감수분열을 한다. 정자와 난자같은 생식세포는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는 감수분열을 통해 성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 정보의 절반을 갖게 된다. 진핵생물의 세포에는 DNA와 핵 이외에도 여러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대개의 세포소기관은 난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관행적으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n, 수정 이후의 유전 정보를 2n으로 표기하여 동수의 유전정보가 암수에게서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포유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2n이 되도록 하거나 난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발생을 유도한 실험 모두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정자를 통해 와야하고 또 다른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난자를 통해 유전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n", "\nDNA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사슬은 염색체를 형성한다.\n\n=== 게놈 ===\n\n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하여 명명한 낱말로 1920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 한스 빙클러가 제안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어로는 유전체(遺傳體)가 쓰인다. 게놈의 길이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먼저 게놈이 해독된 예쁜꼬마선충의 경우 게놈의 크기는 1억 쌍의 염기서열 정도이지만,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완료된 인간 게놈의 경우 DNA 한 가닥당 3,234.83 Mb(메가베이스)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어 두 가닥을 합친 총 염기서열 양은 6,469.66 Mb이 된다. 각각의 세포마다 들어있는 게놈의 길이는 약 1.8 m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의 세포 핵의 크기는 5 μm에 불과하기 때문에 DNA는 매우 가늘고 긴 사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의 경우 매우 거대한 게놈을 갖기도 한다. 백합의 게놈은 인간보다 18배나 더 크다.\n\n게놈이 해독되었다고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n\n=== 염색체 ===\n DNA를 감은 히스톤과 그로 이루어진 염색체\nalt=아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죄송합니다 \n\nDNA는 평소 세포 핵 내부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색질을 이룬다. 염색질은 매우 가늘고 긴 실과 같으므로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포분열 과정에선 염색체 단위로 뭉치게 되어 광학현미경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생물 종마다 수와 크기가 다르다. 인간의 경우 22 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가 있다. 상염색체는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와 같이 번호로 불리고 성염색체는 x 염색체와 y 염색체 등으로 불린다.\n\n성염색체는 동물마다 달라 어류는 ZO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결정은 XX인 경우가 암, XY인 경우가 수로 수컷이형을 보이지만, ZO 성결정 체계는 Z 유전자 하나만 있을 경우 암, ZZ인 경우 수로 암컷이형을 보인다. XY 성결정 체계와 달리 ZO 성결정 체계는 암수의 유전적 구별이 보다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류의 경우 400여 종에서 생애 주기에 따라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감성돔은 모두 수컷으로 태어나지만 2~3년이 지나면 암컷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5~6년생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된다. 한편 조류의 경우엔 ZW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n\n염색체는 DNA 사슬이 염색질을 단위로 뭉친 것이다. DNA 사슬은 단백질의 일종인 히스톤을 실패삼아 감긴다. 히스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히스톤 H2A, H2B, H3, H4 가 각 한 쌍씩 8개가 팔량체를 이뤄 실제 실패와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히스톤 실패에 감긴 DNA를 뉴클레오좀이라 하는데 이것이 DNA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146개의 염기쌍이 히스톤 실패를 1.65번 감는다. 한편 실패를 이루지 않는 히스톤 H1은 실패 밖에서 DNA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n\n뉴클레오좀은 다시 꼬여서 더 두꺼운 코일을 형성하는데 나선 1회전에 6 개의 뉴클레오좀이 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일은 또다시 접혀져 루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차례 겹쳐 만들어진 루프가 염색체를 이룬다.\n\n염색체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 개의 염색분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된다. 이 염색분체들은 세포분열 말기에 각자 다른 딸 세포의 극으로 끌려가 새로운 세포 핵을 형성하게 된다. 염색체는 동원체를 중심으로 긴 팔과 짧은 팔이 구분되데 긴 쪽을 q 팔, 짧은 쪽을 p 팔이라고 한다. q와 p는 염색체 위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정할 때 기준이 된다. 동원체에서 가까운 쪽에서부터 q1 또는 p1과 같이 번호를 붙이며 멀수록 p20 또는 q40과 같이 큰 번호가 부여된다. 1p1은 1번 염색체의 짧은 팔에서 동심원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ABL2 효소 합성을 지시하는 ABL2 유전자는 1번 염색체의 1q25.2 에 위치해 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n\n\n 인간 1번 염색체의 다이어그램\n\n염색체 위의 유전자 위치를 밝혀내는 지도 작성은 매우 길고 복잡한 DNA 염기서열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거대한 염기서열 전체를 한 번에 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지도 작성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 DNA 절편을 이용한다. 자잘하게 잘린 절편들은 겔 전기 영동법과 같은 방법으로 분리되어 염기서열이 해독된다. 동일한 정보를 갖는 여러 가닥의 DNA를 사용하면 직소 퍼즐을 맞추듯이 서도 들어 맞는 절편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나의 절편은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대량으로 복제하여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해독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1983년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 고안되어 소량의 시료로부터 라이브러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삽입한 핵염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광자를 직접 검출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더욱 빠른 해독이 가능해졌다.\n\n=== 세포소기관의 독립적 DNA ===\n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DNA를 갖는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에는 2 개의 RNA 유전자, 22 개의 tRNA 유전자, 13 개의 단백질 합성 유전자가 있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별개의 생물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진핵 생물의 조상과 공생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엽록체 DNA는 보통 120~150여개의 유전자가 배열되어 있으며 염기서열은 약 150 kb 내외이다.\n", "초파리의 성염색체와 연관된 유전 발현. 열성인 흰눈이 발현된 초파리는 모두 수컷이었다.\n=== 핵산과 염색체의 발견 ===\n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미셔가 핵산을 발견한 직후 세포 핵에서 막대모양의 구조를 매우 진하게 염색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염색질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세포 분열 과정에서 뭉쳐저 염색체가 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셔의 뉴클레인과 플레밍의 염색질은 동일한 물질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염색질이 유전에 관여한다고 추측하였고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n\n=== 유전자의 발견 ===\n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염색체와 유전의 관계를 입증하였다. 그는 애초에 초파리의 짧은 세대 주기를 이용해 진화를 재현할 생각으로 2년간 실험했지만 실패하였다. 초파리를 빛이 들지 않는 암실에서 70세대 이상 사육하였으나 초파리의 눈이 퇴화한다거나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초파리의 눈이 하얗게 변하는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그는 정상인 붉은눈 초파리와 돌연변이 흰눈 초파리를 교배하여 2세대에서 모두 붉은눈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한 다음 3세대에서는 붉은눈과 흰눈이 섞여 나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른 우성/열성 유전형질 발현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흰눈 초파리가 모두 수컷이었다. 그는 초파리의 눈을 희게 만든 열성인자가 초파리의 성염색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실험을 계속하여 여러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였다.\n\n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를 놓고 가설을 세웠다. 영국의 아치볼드 게로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효소를 지정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하였고, 1941년 조지 비들과 E. L. 테이텀이 붉은빵곰팡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였다. 이들은 곰팡이에 엑스선을 쬐어 특정한 아미노산을 형성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점돌연변이 때문에 돌연변이 곰팡이는 다른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합성하지 못하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효소를 만들지 못했다.\n\n=== DNA의 역할 확인 ===\n프레더릭 그리피스는 1928년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폐렴쌍구균은 면역반응에 걸려 병을 유발하지 못하는 R형과 폐렴을 유발하는 S형이 있는데, S형이라 할지라도 열을 가해 균을 죽이면 폐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S형 균을 R형 균에 섞어 넣었더니 R형이 모두 S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S형의 어떤 요소가 R형에게 전달되어 형질변환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Downie AW (1972). \"Pneumococcal transformation—a backward view. Fourth Griffith Memorial Lecture\". J. Gen. Microbiol. 73 (1): 1–11. PMID 4143929.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 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n\n에이버리의 실험 이후에도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DNA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강력한 후보였으나 단백질 역시 만만찮은 후보였다. DNA와 단백질 가운데 어떤것이 유전 요인인지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알프레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더욱 정교한 통제 조건으로 허시-체이스 실험를 실시하였다.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과 DNA에 방사성 동위원소 표식을 달아 대장균에 주입한 후 무엇이 유전에 관여하는 지를 관찰하고 그것이 DNA임을 확정하였다.\n\n=== DNA의 구조 발견 ===\n1953년 프랜시스 크릭이 연필로 스케치한 DNA 이중나선의 구조의 초안\nDNA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DNA의 구조 역시 오랫동안 여러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었다. 1935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피버스 레빈은 뉴클레오타이드가 인산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분자 화합물인 DNA의 크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실제로는 핵염기의 구성비 역시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레빈은 DNA를 이루는 핵염기 4종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짝을 이루는 사각형 구조를 가설로 제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DNA의 핵염기 비율은 4종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레빈의 가설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n\n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의 핵염기가 모두 동일한 양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은 언제나 동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샤가프 스스로는 이 발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DNA 핵염기의 상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n\n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이끄는 캐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는 1948년부터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구조를 직접 관찰하고자 하였다. X선도 일종의 빛이기 때문에 굴절, 반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회절은 작은 물질을 지나가는 빛이 물질의 그림자 영역까지 애돌아 나가는 현상이다. 결정의 모양에 따라 회절 모양도 달라지게 되므로 역으로 이용하면 물질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X선을 결정에 조사하면 브래그 법칙을 만족하는 방향으로만 X선이 회절되어 결정구조가 반영된 패턴을 남긴다. 195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이후 DNA의 구조 파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진 51을 촬영하였다.\n\n프랭클린의 사진 51은 프랜시스 크릭을 거쳐 제임스 왓슨에게 전달되었고 둘은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사진 51은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데이터로서 1953년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지에 사진 51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둘이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핵염기들이 A-T, G-C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며 두 가닥의 사슬이 서로 꼬여 이중나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n\n=== 복제 메커니즘의 발견 ===\nDNA는 구조가 규명되자 마자 그것이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임을 암시하였다. 핵염기는 오직 하나의 상보적 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NA 사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닥이 분리되면 곧바로 새로운 이중나선을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 콘버그는 이러한 DNA의 복제가 효소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1953년 DNA 중합효소를 발견하였다.\n\nDNA 사슬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제된다. DNA 이중나선이 풀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선도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진행이 있다. 선도 진행이 연속적인 복제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지연진행은 DNA 이중나선의 물리적 특징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1968년 부부였던 오카자키 레이지, 오카자키 츠네코를 비롯한 일본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지연 진행되는 DNA 사슬이 일정한 크기의 절편 단위로 복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카자키 절편은 DNA 복제 과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이다.\n", "=== 유전자 가위 ===\n\n1970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해밀턴 O. 스미스는 DNA의 특정 부위를 절단하는 제한 효소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제한 효소는 훗날 HindII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DNA 염기서열에서 GTYRAC 구간을 찾아내 절단한다. Y는 T또는 C, R은 A또는 G가 될 수 있다. 이 효소는 1세대 유전자 가위가 되어 분자생물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유전자 가위로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효소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크리스퍼가 유전자 가위로 쓰인다.\n\n유전자 가위로 DNA의 원하는 부분을 절단하면 그것을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DNA에 주입하여 대량으로 복제시킬 수 있다. 이렇게 원하는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클로닝이라고 한다. 클로닝은 DNA 감식,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용도에 두루 활용된다.\n\n=== 유전자 편집 ===\n유전자 변형으로 색상을 바꾼 장미\n유전자 가위와 클로닝 기술은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곡물이나 구근 식물은 농업의 주요 품종으로 여러 이유에서 유전자 변형이 연구되었으며 2002년 말 16개국에서 유채, 옥수수, 감자 등 15작물 68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생물의 안전성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n\n한편 유전자 편집은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도 적용 가능하다. 실험 동물에 특정한 유전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2018년 중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n\n=== 줄기 세포 ===\n\nDNA 염기서열에 있는 수 많은 유전자들이 발생의 어느 시점에서 발현하고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고정되는 가 하는 주제는 발생유전학의 중요 관심사이다. 다세포 생물은 발생과 발달 과정에서 일정 시기를 지나면 세포 마다 발현될 특징이 결정된다. 피부에선 피부 세포만이 발현되고 간에선 간 세포만이 발현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분화가 결정된 세포는 때어내어 다른 곳에 이식하여도 결정된 대로 발달한다. 줄기 세포는 아직 그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 무엇으로든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이다. 배아의 발생단계에서 미분화한 배아줄기세포와 성체가 되었지만 일부 계속해서 남아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한 배아의 세포에서, 성체줄기세포는 혈액, 골수 등에서 얻는다. 줄기세포는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분화한 줄기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n\n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황우석 사건으로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황우석은 복제된 배반포에서 배아줄기세포를 획득하였다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실험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어 논문이 철회되었다.\n\n=== DNA 감식 ===\n\nDNA는 매우 큰 정보량을 갖고 있으며 개인 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DNA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다. DNA 감식에는 보통 STR 분석이 쓰이는데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반복구간이 개인마다 다른 점을 이용한다. 유전자 감식은 각종 사건 사고의 신원확인, 실종자 확인과 같은 수사에 이용되며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의 유해 감식에도 쓰인다.\n\nDNA 감식은 범죄의 증거로도 채택된다. 감식의 결과 동일인으로 판정되면 충분히 해당 개인을 특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죄 확정된 범죄자의 DNA 시료를 채취하여 등록하고 있다.\n\n=== 유전성 질환 ===\n\n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질병을 유전성 질환이라고 한다. 유전성 질환은 자식 세대에 유전되는데 우성/열성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고 유전 인자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유전성 질환으로는 백색증, 혈우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과 같은 것들이 있다.\n", "* 핵산\n* RNA\n* 뉴클레오타이드\n* DNA 수선\n* PCR\n", "\n", "* \n* \n* \n* \n", "* \n* \n\n\n\n\n\n\n\n\n\n \n분류:나선" ]
DNA의 이중나선(안쪽 보라색계열이 염기 쌍(Base pair)이며 바깥쪽 빨간색 계열이 당과 인산 백본(BackBone)이다) '''DNA'''(, '''데옥시리보핵산''', '''디옥시리보 핵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인 두 개의 긴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이다. 세포 핵에서 발견되어 핵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이 핵 이외의 세포소기관도 독립된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DNA는 4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중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닥은 사이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은 독특한 핵염기(nucleobase)로 구분되기 때문에 흔히 DNA 염기서열이라고 부른다. DNA 염기서열은 유전정보를 나타내는 유전자 구간과 그렇지 않은 비부호화 DNA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기능을 가진 유전자였더라도 돌연변이를 통해 기능을 상실한 슈도진이 되면 비부호화 DNA가 된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정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게 한다. 유전자는 DNA 사슬의 특정 구간으로 실제 단백질 형성과 같은 발현에 관여하는 엑손 구간과 그렇지 않은 인트론을 포함한다. DNA가 직접 유전자 발현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발현 과정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mRNA)가 지닌 코돈에 의해 진행된다. 코돈은 세 개의 염기서열이 묶인 유전단위로 시작 코돈과 종결 코돈 그리고 그 사이에 실제 아미노산 결합을 지시하는 코돈들로 이루어져 있다. mRNA는 리보솜에서 효소와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한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DNA는 유전의 원인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어 왔으며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이 확인되었고 1952년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의 허시-체이스 실험으로 확정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네이처지에 실은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그러나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가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인 DNA의 X선 회절 사진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것이었으며, 그녀와 앙숙이었던 동료 과학자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하고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함으로써 왓슨과 크릭의 연구가 가능했기에 이후 그들은 "프랭클린의 영광을 도둑질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프랭클린은 암으로 인해 1958년에 사망하여 노벨상 후보에 오르지 못하였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중합체 두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인산염이 결합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4 종류의 핵염기 가운데 하나가 결합되어 있다. 디옥시리보스와 인산기가 중합 과정을 통해 사슬 한 가닥의 뼈대를 이루고 핵염기들이 서로 상보적인 수소 결합을 통해 염기쌍을 이루며 이중나선을 만든다. 한편 이러한 DNA의 상보성은 한쪽만으로 상대편을 예측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중나선 구조는 DNA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이다.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유전정보를 저장하는데 수소 결합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쉽게 풀렸다 닫힐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을 위해 일부분이 풀렸다가 닫힐 수도 있고 세포 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풀리면서 복제될 수도 있다. 일부 또는 전체가 풀린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이 종료되거나 복제가 끝나면 다시 닫히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인이 된다. === 뉴클레오타이드 === 아데노신일인산의 구조. 가운데의 오각형이 리보스, 왼쪽이 인산, 오른쪽이 핵염기인 아데닌이다.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은 인산염이 다른 한 쪽은 핵염기(nucleobase)가 결합되어 있는 DNA의 단위체이다. 생체에는 여러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으며 저마다 독자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아데노신은 결합된 인산염의 수에 따라 아데노신일인산, 아데노신이인산, 아데노신삼인산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아데노신삼인산은 인체의 모든 세포에 화학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세포의 에너지 동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데노신삼인산에서 인산염 하나가 분리되어 아데노신이인산이 되면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DNA를 이루는 것은 이것보다 인산염 하나가 더 적은 아데노신일인산이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시토신(C), 구아닌(G), 아데닌(A), 티민(타이민)(T)의 네 종류이다. 이들 핵염기와 연결된 뉴클레오타이드는 마치 레고 블럭처럼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아데닌은 티민과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염기쌍을 이룬다. 염기의 모양과 화학구조 때문에 상보적인 두 핵염기만이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DNA 가닥의 한쪽 염기서열만 알면 다른쪽은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쪽 가닥의 염기서열이 -A-C-G-T- 라면 다른 쪽 가닥의 염기서열은 -T-G-C-A- 가 된다. 아데닌(A)과 티민(T)은 두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 수소결합의 개수 때문에 A-T 결합은 G-C 결합보다 결합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쉽다. 생명체가 죽으면 DNA 역시 여러 이유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A-T 쪽이 먼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티민은 계속적인 손상을 입어 우라실로 대체되며 이렇게 손상을 입은 DNA는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 파일:GMP chemical structure.png | 구아노신일인산 파일:TMP chemical structure.png | 티미딘일인산 파일:CMP chemical structure.png | 시티딘일인산 파일:Base pair GC.svg | 구아닌과 시토신의 상보 결합 파일:Base pair AT.svg | 아데닌과 티민의 상보 결합 대부분의 생물은 위 네 핵염기만이 DNA의 단위체이지만 바이러스의 일종인 일부 박테리오파지는 우라실도 단위체로 사용된다. 박실루스 슈브틸리스(''Bacillus subtilis'') 종에 속하는 박테리오파지 PBS1과 PBS2 그리고 예르시니아(''Yersinia'') 박테리오파지 piR1-37의 DNA는 티민이 우라실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생물에서 우라실은 RNA의 단위체로서만 관여한다. === 이중나선 === DNA가 나선 모양으로 꼬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의 중합 형성으로 생기는 구조 때문이다. 리보스와 디옥시리보스는 모두 탄소 5개로 이루어진 오탄당으로 단원자 산소를 매개로 오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단원자 산소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탄소마다 1번에서 5번까지 번호를 붙여 위치를 나타낸다. 뉴클레오타이드에서 디옥시리보스의 1번 탄소는 핵염기와 결합하고, 2번과 3번은 하이드록시기('''-OH''')와 결합하며 4번 탄소와 연결된 5번 탄소가 인산염과 결합한다. 그리고 다른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하는 것은 5번 탄소에 연결된 인산염이다. 따라서 DNA 염기서열 사슬은 언제나 인산염을 사이에 두고 5번 탄소와 3번 탄소가 연결되게 된다. 이를 5' → 3' 연결 방향성이라고 부른다. 인산염의 결합 위치때문에 DNA 가닥은 3차원에서 나선 구조를 지니며 꼬이게 된다. 한편, 두 가닥의 염기서열 뼈대에 연결된 핵염기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한 쪽 가닥 말단이 3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5번 탄소이게 되고 그 반대로 한 쪽의 말단이 5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3번이게 된다. 그 결과 A-T 및 G-C 두 염기서열 뼈대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란한 역평행성과 상보성을 보인다. 이와 같이 하여 DNA는 두 개의 염기서열 뼈대가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가 되고 두 사슬의 핵염기가 마치 사다리처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파일:DeoxyriboseLabeled.png | (디옥시)리보스의 구조 파일:DNAn+1 C.svg | 5' → 3' 연결 파일:5-3 DNA chain antiparallel.png | DNA 사슬의 역평행성 파일:Adn25.png | DNA 이중나선 === 이중나선의 종류 === DNA 이중나선의 종류. 왼쪽부터 A형, B형, Z형 DNA 이중나선은 대개 오른 나사 방향으로 꼬이는 B형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널리 알려진 유형으로는 A-DNA, B-DNA, Z-DNA가 있다. DNA 이중나선은 나선 사이에 홈이 패이게 되는데 넓게 패이는 주홈과 좁게 패이는 부홈을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B-DNA의 경우 한 번 감긴 나선 마다 10개의 염기쌍이 놓인다. 그런데 A-DNA는 나선의 기울기가 수직축을 기준으로 30°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더 큰 폭으로 회전한다. 이 경우 나선 사이의 홈도 비슷하게 패여서 주홈과 부홈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며 나선 하나에 놓이는 염기쌍도 11개로 B형 보다 1개 더 많다. 한편 Z-DNA는 나사의 회전 방향이 B-DNA와 거울상 대칭을 보이고 나선 하나에 12개의 염기쌍이 놓이게 된다. 그 결과 Z-DNA는 B-DNA보다 길고 홀쭉하게 보이게 된다. DNA는 대부분 B형을 보이지만 매우 긴 DNA 사슬은 여러 형태의 DNA 사슬구조가 섞여 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반복하여 염기서열을 이룰 때 Z형 나선을 이루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자와 인접한 Z형 나선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 환형 DNA와 초나선 DNA === 가운데가 환형 DNA이고 양쪽은 거울상 대칭을 보이는 초나선 DNA이다. 오랫동안 DNA 이중나선은 기다란 끈 모양으로 여겨져 왔지만, 전자현미경 관찰을 통해 많은 경우 양 끝이 공유결합을 통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환형 DNA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DNA 이중나선 역시 다시 한 번 꼬여서 초나선을 이룰 수 있다. DNA가 이렇게 고리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슬의 방향성 때문에 한쪽 끝의 3' 말단이 반대편 끝의 5'말단과 공유결합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려면 DNA 사슬 자체가 1 회 이상 더 회전하여야 한다.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나선을 더 단단히 조이는 효과가 일어나고 이를 양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반대로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함으로 인해서 고리를 만든다면 DNA 나선을 풀어주는 효과가 나타나고 이를 음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실제 DNA는 그것의 나선 1회전 당 염기쌍 수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변형하여 초나선에 의한 영향에 맞선다. 예를 들어 B-DNA는 나선축이 휘어져 나선 1회 당 10개의 염기쌍 주기를 유지한다. DNA의 위상적 구조가 갖는 생물학적 기능은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DNA 구조는 늘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풀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변한다. DNA 회전효소는 초나선 현상을 완화하는 효소로, 공유결합된 말단을 풀어 고리를 끊고 너무 꼬여버린 줄을 풀어준다음 다시 연결한다. DNA에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담겨있다. 그러나 DNA의 염기서열 모두가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염기서열을 유전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비부호화 DNA라고 한다. 비부호화 DNA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유전자로 기능하였으나 돌연변이 등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슈도진이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가 직접 생물을 이루는 물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전자에는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한 정보만이 담겨있다. 따라서 DNA는 생물의 설계도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요리책처럼 해야할 작업을 순서대로 적은 레시피에 가깝다. DNA의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고 처리되어 최종 결과물 생성에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DNA의 기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 DNA는 유전정보를 보관한다. === 유전자 발현=== 유전자는 DNA의 일정 구간에 걸쳐 있는 염기 서열이다. 유전자에는 실제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엑손 구간과 발현에 관여하지 않는 인트론 구간이 있다. 엑손 구간의 시작은 촉진유전자(Promoter, 프로모터)에서 시작한다. 촉진유전자는 DNA 나선 두 가닥 중 어느쪽이든 있을 수 있다. DNA에 있는 유전자는 정보만을 지정하고 실제 단백질의 형성과 같은 일은 리보솜과 같이 세포 핵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 이 정보 전달은 전령 RNA(messenger RNA, mRNA)라고 불리는 "전령"이 담당한다. 촉진유전자는 바로 이 전령이 생성되는 시작점으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DNA의 두 가닥 가운데 어느 쪽을 이용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읽어야 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지정한다. 촉진유전자의 염기 서열 자체가 한 방향으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거꾸로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인 mRNA는 RNA 중합효소에 의해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위치인 촉진유전자에 결합하는데 촉진유전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RNA 중합효소가 정확히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단의 염기서열이 있다. RNA 중합효소는 이 유도 표지를 따라 접근하여 정확한 시작위치에 결합한 다음 DNA 사슬을 풀고 DNA와 상보적으로 형성되는 RNA 사슬을 엮는다. DNA와 달리 RNA는 아데닌의 상보적 핵염기로 우라실(U)이 사용된다. RNA 중합효소가 지나가면 DNA는 스스로 다시 감긴다. RNA 중합효소는 계속하여 mRNA를 결합하다가 종결 위치를 만나면 전사를 멈춘다. 종결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한 종류 이상이다. RNA 중합효소(RNAP)에 의해 전령 RNA가 형성되는 과정 유전자가 전사된 mRNA는 염기서열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데 실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코돈이다. 코돈은 시작 코돈, 아미노산 지정 코돈, 종결코돈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라실 셋이 모인 코돈 UUU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네개의 염기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 경우의 수는 이므로 모두 64가지의 코돈이 있지만, 코돈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아미노산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지정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이다. 또한 코돈에는 한 개의 시작 코돈과 세 개의 종결 코돈이 있다. 진핵생물의 경우 전사는 두 단계를 거친다. DNA에서 곧바로 전사된 1차 전사체는 엑손 부분과 인트론 부분이 함께 전사되며 있다. 최종 형성되는 mRNA는 이 가운데 인트론 부분을 잘라내 버린다. 대개의 경우 인트론 전사체 RNA의 절단은 전사가 종결된 뒤 핵 안에서 이루어지고, 핵 안에는 잘려진 다양한 크기의 RNA 분자가 남게 된다. RNA 절단에 관여하는 소자는 스프라이소좀으로 유전자 서열 자체에 어느 부분이 절단될 것인지를 지정하는 염기서열이 따로 있어서 매우 정교하게 잘라내어 접합한다. 잘려나가는 부위는 때로 전체 전사체의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 이렇게 형성된 mRNA는 리보솜으로 옮겨가 번역된다. 리보솜은 세포내의 "공장"으로 실제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한 조립공처럼 일한다. mRNA에는 리보솜 결합 부위라는 번역 개시 신호가 있어 어디서부터 아미노산 결합을 시작할 지 지시한다. 리보솜은 mRNA를 "읽어"들이고 그에 맞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는 운반 RNA(transfer RNA, tRNA)를 받아들인 후 아미노산은 펩티드 결합에 사용하고 tRNA는 방출한 다음 다음 코돈을 읽는다. 이런 과정을 종결 코돈이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비유하자면 mRNA는 작업지시서, tRNA는 운반도구, tRNA에 결합한 아미노산은 재료가 되는 셈이다. tRNA는 독특한 접합이 있는 RNA로 한쪽 끝엔 mRNA와 상보적인 안티코돈이 있고 다른 한쪽엔 특정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구간을 지니고 있다. DNA에는 tRNA를 만들 수 있는 전사 구간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역시 유전자의 하나이다. tRNA는 세포 내에서 자신과 짝을 이루는 아미노산과 결합해 있다가 근처의 리보솜에 끌려들어가 아미노산 합성에 참여하고 방출된 뒤에는 다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 이 과정은 세포 내 물질의 밀도에 의존한다. 유전자 발현에서 단백질 합성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은 대부분 체내에서 합성되어 있다가 mRNA가 전달한 정보에 따라 단백질로 결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전체를 모두 체내에서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있다. 사람의 경우 20개의 아미노산 가운데 트립토판, 메티오닌, 발린, 트레오닌, 페닐알라닌, 류신, 이소류신, 리신의 8 개는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한다. 이들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우유, 계란, 고기 등에 풍부하므로 육식을 할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의 경우엔 콩이나 두부, 기타 여러 곡물 등을 혼합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 지지 않도록 식단에 주의하여야 한다. 결국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 mRNA와 DNA의 다른 구간에서 형성된 tRNA가 재료인 아미노산을 이용하여 리보솜에서 아미노산 사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전자 발현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 사슬은 단백질 접힘과정을 거쳐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이 된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효소가 있다. 효소는 체내의 생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로서 3차원 구조가 기능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소가 작용하는 부위를 효소의 활성자리라고 하는데 효소의 구조가 변하면 이 활성 자리 역시 바뀌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 돌연변이 === 유전자의 염기서열 어느 한 곳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돌연변이의 결과 코돈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최종 형성되는 아미노산 역시 바뀌게 된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개의 아미노산 변형은 자식에게 유전된다. 돌연변이는 자연적으로 계속하여 생성되며 방사선을 쬐거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생물은 DNA 수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돌연변이를 계속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돌연변이를 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유전정보의 변이가 발생한다. DNA에는 유난히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나는 구간이 있으며 메틸화된 핵염기를 치환하면서 오류를 보인다. 유전 정보를 담지 않는 비부호 염기서열도 동일하게 이러한 돌연변이를 겪을 수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절 부위는 별다른 유전자 발현을 하지 않으면서 돌연변이가 빈번하여 집단의 친연관계를 추적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전자의 동일한 위치를 놓고 원래의 유전정보 A와 변형된 유전정보 A'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즉 어느 유전자가 후손에게서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 가 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이렇게 발생한 대립형질에 우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환경이 어느 한 쪽 형질에 유리할 경우 점차 유리한 형질만이 살아남게 되어 생물 집단 전체의 유전형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진화의 기본 조건은 계속하여 발생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 복제 ===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생물은 생장과 발달을 포함한 생애 전 단계에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필요로 한다. 세포가 분열될 때에는 그 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 정보 역시 빠짐 없이 나누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DNA 복제가 일어난다. DNA 사슬이 어떻게 풀리고 복제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1957년 메튜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의 실험을 통해 두 가닥이 풀린 후 각 가닥마다 새로운 상보적 염기서열이 형성되어 두 개의 DNA가 형성되는 반보존적 복제가 이루어짐을 확인하였다. 즉, 복제된 DNA 두 개는 각자 원래의 DNA 가닥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게 된다. DNA 복제 모식도 DNA 회전효소가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생기는 과도한 꼬임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나선에 결합한다. 그 후 헬리카아제가 실제 이중나선의 결합을 푼다. 이중나선이 풀리면 DNA 중합효소가 복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DNA 복제에는 RNA로 이루어진 프라이머가 필요하다. DNA 복제를 진행하는 DNA 중합효소가 DNA의 시작점부터 직접 복제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소의 하나인 프리마아제가 열려진 DNA의 한쪽 가닥에 프라이머를 결합시킨 뒤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DNA 중합효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이중나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운 DNA 이중나선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성된다. 원래의 DNA 나선에 DNA 회전효소가 지나가며 지퍼를 열듯이 나선을 분리하면 이렇게 열리는 방향과 같이 진행되는 선도 사슬(Leading strand)는 진행 방향을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사슬(Lagging strand)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의 DNA 이중나선이 풀리고 충분한 길이의 새로운 염기서열이 확보 되어야 계속해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리마아제가 헬리카아제의 뒤에 연결되어 임시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프리미어 RNA를 만들고 뒤에 거꾸로 향하는 DNA 중합효소가 절편을 만들며 잇는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 오카자키 절편이라 한다. 이러한 복제 과정을 거치면 지연 사슬의 끝은 더 이상 프리미어를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그 결과 DNA 사슬의 말단 일부는 복제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때문에 복제가 거듭되면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은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편,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자식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감수분열을 한다. 정자와 난자같은 생식세포는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는 감수분열을 통해 성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 정보의 절반을 갖게 된다. 진핵생물의 세포에는 DNA와 핵 이외에도 여러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대개의 세포소기관은 난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관행적으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n, 수정 이후의 유전 정보를 2n으로 표기하여 동수의 유전정보가 암수에게서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포유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2n이 되도록 하거나 난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발생을 유도한 실험 모두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정자를 통해 와야하고 또 다른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난자를 통해 유전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DNA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사슬은 염색체를 형성한다. === 게놈 ===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하여 명명한 낱말로 1920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 한스 빙클러가 제안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어로는 유전체(遺傳體)가 쓰인다. 게놈의 길이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먼저 게놈이 해독된 예쁜꼬마선충의 경우 게놈의 크기는 1억 쌍의 염기서열 정도이지만,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완료된 인간 게놈의 경우 DNA 한 가닥당 3,234.83 Mb(메가베이스)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어 두 가닥을 합친 총 염기서열 양은 6,469.66 Mb이 된다. 각각의 세포마다 들어있는 게놈의 길이는 약 1.8 m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의 세포 핵의 크기는 5 μm에 불과하기 때문에 DNA는 매우 가늘고 긴 사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의 경우 매우 거대한 게놈을 갖기도 한다. 백합의 게놈은 인간보다 18배나 더 크다. 게놈이 해독되었다고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 염색체 === DNA를 감은 히스톤과 그로 이루어진 염색체 alt=아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죄송합니다 DNA는 평소 세포 핵 내부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색질을 이룬다. 염색질은 매우 가늘고 긴 실과 같으므로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포분열 과정에선 염색체 단위로 뭉치게 되어 광학현미경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생물 종마다 수와 크기가 다르다. 인간의 경우 22 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가 있다. 상염색체는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와 같이 번호로 불리고 성염색체는 x 염색체와 y 염색체 등으로 불린다. 성염색체는 동물마다 달라 어류는 ZO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결정은 XX인 경우가 암, XY인 경우가 수로 수컷이형을 보이지만, ZO 성결정 체계는 Z 유전자 하나만 있을 경우 암, ZZ인 경우 수로 암컷이형을 보인다. XY 성결정 체계와 달리 ZO 성결정 체계는 암수의 유전적 구별이 보다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류의 경우 400여 종에서 생애 주기에 따라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감성돔은 모두 수컷으로 태어나지만 2~3년이 지나면 암컷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5~6년생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된다. 한편 조류의 경우엔 ZW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염색체는 DNA 사슬이 염색질을 단위로 뭉친 것이다. DNA 사슬은 단백질의 일종인 히스톤을 실패삼아 감긴다. 히스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히스톤 H2A, H2B, H3, H4 가 각 한 쌍씩 8개가 팔량체를 이뤄 실제 실패와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히스톤 실패에 감긴 DNA를 뉴클레오좀이라 하는데 이것이 DNA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146개의 염기쌍이 히스톤 실패를 1.65번 감는다. 한편 실패를 이루지 않는 히스톤 H1은 실패 밖에서 DNA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좀은 다시 꼬여서 더 두꺼운 코일을 형성하는데 나선 1회전에 6 개의 뉴클레오좀이 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일은 또다시 접혀져 루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차례 겹쳐 만들어진 루프가 염색체를 이룬다. 염색체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 개의 염색분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된다. 이 염색분체들은 세포분열 말기에 각자 다른 딸 세포의 극으로 끌려가 새로운 세포 핵을 형성하게 된다. 염색체는 동원체를 중심으로 긴 팔과 짧은 팔이 구분되데 긴 쪽을 q 팔, 짧은 쪽을 p 팔이라고 한다. q와 p는 염색체 위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정할 때 기준이 된다. 동원체에서 가까운 쪽에서부터 q1 또는 p1과 같이 번호를 붙이며 멀수록 p20 또는 q40과 같이 큰 번호가 부여된다. 1p1은 1번 염색체의 짧은 팔에서 동심원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ABL2 효소 합성을 지시하는 ABL2 유전자는 1번 염색체의 1q25.2 에 위치해 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인간 1번 염색체의 다이어그램 염색체 위의 유전자 위치를 밝혀내는 지도 작성은 매우 길고 복잡한 DNA 염기서열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거대한 염기서열 전체를 한 번에 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지도 작성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 DNA 절편을 이용한다. 자잘하게 잘린 절편들은 겔 전기 영동법과 같은 방법으로 분리되어 염기서열이 해독된다. 동일한 정보를 갖는 여러 가닥의 DNA를 사용하면 직소 퍼즐을 맞추듯이 서도 들어 맞는 절편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나의 절편은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대량으로 복제하여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해독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1983년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 고안되어 소량의 시료로부터 라이브러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삽입한 핵염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광자를 직접 검출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더욱 빠른 해독이 가능해졌다. === 세포소기관의 독립적 DNA ===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DNA를 갖는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에는 2 개의 RNA 유전자, 22 개의 tRNA 유전자, 13 개의 단백질 합성 유전자가 있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별개의 생물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진핵 생물의 조상과 공생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엽록체 DNA는 보통 120~150여개의 유전자가 배열되어 있으며 염기서열은 약 150 kb 내외이다. 초파리의 성염색체와 연관된 유전 발현. 열성인 흰눈이 발현된 초파리는 모두 수컷이었다. === 핵산과 염색체의 발견 ===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미셔가 핵산을 발견한 직후 세포 핵에서 막대모양의 구조를 매우 진하게 염색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염색질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세포 분열 과정에서 뭉쳐저 염색체가 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셔의 뉴클레인과 플레밍의 염색질은 동일한 물질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염색질이 유전에 관여한다고 추측하였고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 유전자의 발견 === 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염색체와 유전의 관계를 입증하였다. 그는 애초에 초파리의 짧은 세대 주기를 이용해 진화를 재현할 생각으로 2년간 실험했지만 실패하였다. 초파리를 빛이 들지 않는 암실에서 70세대 이상 사육하였으나 초파리의 눈이 퇴화한다거나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초파리의 눈이 하얗게 변하는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그는 정상인 붉은눈 초파리와 돌연변이 흰눈 초파리를 교배하여 2세대에서 모두 붉은눈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한 다음 3세대에서는 붉은눈과 흰눈이 섞여 나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른 우성/열성 유전형질 발현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흰눈 초파리가 모두 수컷이었다. 그는 초파리의 눈을 희게 만든 열성인자가 초파리의 성염색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실험을 계속하여 여러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였다. 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를 놓고 가설을 세웠다. 영국의 아치볼드 게로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효소를 지정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하였고, 1941년 조지 비들과 E. L. 테이텀이 붉은빵곰팡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였다. 이들은 곰팡이에 엑스선을 쬐어 특정한 아미노산을 형성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점돌연변이 때문에 돌연변이 곰팡이는 다른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합성하지 못하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효소를 만들지 못했다. === DNA의 역할 확인 ===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1928년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폐렴쌍구균은 면역반응에 걸려 병을 유발하지 못하는 R형과 폐렴을 유발하는 S형이 있는데, S형이라 할지라도 열을 가해 균을 죽이면 폐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S형 균을 R형 균에 섞어 넣었더니 R형이 모두 S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S형의 어떤 요소가 R형에게 전달되어 형질변환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Downie AW (1972). "Pneumococcal transformation—a backward view. Fourth Griffith Memorial Lecture". J. Gen. Microbiol. 73 (1): 1–11. PMID 4143929.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 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에이버리의 실험 이후에도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DNA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강력한 후보였으나 단백질 역시 만만찮은 후보였다. DNA와 단백질 가운데 어떤것이 유전 요인인지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알프레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더욱 정교한 통제 조건으로 허시-체이스 실험를 실시하였다.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과 DNA에 방사성 동위원소 표식을 달아 대장균에 주입한 후 무엇이 유전에 관여하는 지를 관찰하고 그것이 DNA임을 확정하였다. === DNA의 구조 발견 === 1953년 프랜시스 크릭이 연필로 스케치한 DNA 이중나선의 구조의 초안 DNA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DNA의 구조 역시 오랫동안 여러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었다. 1935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피버스 레빈은 뉴클레오타이드가 인산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분자 화합물인 DNA의 크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실제로는 핵염기의 구성비 역시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레빈은 DNA를 이루는 핵염기 4종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짝을 이루는 사각형 구조를 가설로 제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DNA의 핵염기 비율은 4종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레빈의 가설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의 핵염기가 모두 동일한 양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은 언제나 동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샤가프 스스로는 이 발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DNA 핵염기의 상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이끄는 캐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는 1948년부터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구조를 직접 관찰하고자 하였다. X선도 일종의 빛이기 때문에 굴절, 반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회절은 작은 물질을 지나가는 빛이 물질의 그림자 영역까지 애돌아 나가는 현상이다. 결정의 모양에 따라 회절 모양도 달라지게 되므로 역으로 이용하면 물질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X선을 결정에 조사하면 브래그 법칙을 만족하는 방향으로만 X선이 회절되어 결정구조가 반영된 패턴을 남긴다. 195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이후 DNA의 구조 파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진 51을 촬영하였다. 프랭클린의 사진 51은 프랜시스 크릭을 거쳐 제임스 왓슨에게 전달되었고 둘은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사진 51은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데이터로서 1953년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지에 사진 51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둘이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핵염기들이 A-T, G-C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며 두 가닥의 사슬이 서로 꼬여 이중나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 복제 메커니즘의 발견 === DNA는 구조가 규명되자 마자 그것이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임을 암시하였다. 핵염기는 오직 하나의 상보적 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NA 사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닥이 분리되면 곧바로 새로운 이중나선을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 콘버그는 이러한 DNA의 복제가 효소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1953년 DNA 중합효소를 발견하였다. DNA 사슬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제된다. DNA 이중나선이 풀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선도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진행이 있다. 선도 진행이 연속적인 복제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지연진행은 DNA 이중나선의 물리적 특징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1968년 부부였던 오카자키 레이지, 오카자키 츠네코를 비롯한 일본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지연 진행되는 DNA 사슬이 일정한 크기의 절편 단위로 복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카자키 절편은 DNA 복제 과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이다. === 유전자 가위 === 1970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해밀턴 O. 스미스는 DNA의 특정 부위를 절단하는 제한 효소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제한 효소는 훗날 HindII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DNA 염기서열에서 GTYRAC 구간을 찾아내 절단한다. Y는 T또는 C, R은 A또는 G가 될 수 있다. 이 효소는 1세대 유전자 가위가 되어 분자생물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유전자 가위로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효소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크리스퍼가 유전자 가위로 쓰인다. 유전자 가위로 DNA의 원하는 부분을 절단하면 그것을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DNA에 주입하여 대량으로 복제시킬 수 있다. 이렇게 원하는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클로닝이라고 한다. 클로닝은 DNA 감식,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용도에 두루 활용된다. === 유전자 편집 === 유전자 변형으로 색상을 바꾼 장미 유전자 가위와 클로닝 기술은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곡물이나 구근 식물은 농업의 주요 품종으로 여러 이유에서 유전자 변형이 연구되었으며 2002년 말 16개국에서 유채, 옥수수, 감자 등 15작물 68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생물의 안전성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유전자 편집은 식물 뿐만 아니라 동물도 적용 가능하다. 실험 동물에 특정한 유전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2018년 중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 줄기 세포 === DNA 염기서열에 있는 수 많은 유전자들이 발생의 어느 시점에서 발현하고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고정되는 가 하는 주제는 발생유전학의 중요 관심사이다. 다세포 생물은 발생과 발달 과정에서 일정 시기를 지나면 세포 마다 발현될 특징이 결정된다. 피부에선 피부 세포만이 발현되고 간에선 간 세포만이 발현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분화가 결정된 세포는 때어내어 다른 곳에 이식하여도 결정된 대로 발달한다. 줄기 세포는 아직 그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 무엇으로든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이다. 배아의 발생단계에서 미분화한 배아줄기세포와 성체가 되었지만 일부 계속해서 남아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한 배아의 세포에서, 성체줄기세포는 혈액, 골수 등에서 얻는다. 줄기세포는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분화한 줄기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황우석 사건으로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황우석은 복제된 배반포에서 배아줄기세포를 획득하였다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실험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어 논문이 철회되었다. === DNA 감식 === DNA는 매우 큰 정보량을 갖고 있으며 개인 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DNA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다. DNA 감식에는 보통 STR 분석이 쓰이는데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반복구간이 개인마다 다른 점을 이용한다. 유전자 감식은 각종 사건 사고의 신원확인, 실종자 확인과 같은 수사에 이용되며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의 유해 감식에도 쓰인다. DNA 감식은 범죄의 증거로도 채택된다. 감식의 결과 동일인으로 판정되면 충분히 해당 개인을 특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죄 확정된 범죄자의 DNA 시료를 채취하여 등록하고 있다. === 유전성 질환 ===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질병을 유전성 질환이라고 한다. 유전성 질환은 자식 세대에 유전되는데 우성/열성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고 유전 인자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유전성 질환으로는 백색증, 혈우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핵산 * RNA * 뉴클레오타이드 * DNA 수선 * PCR * * * * * * 분류:나선
RNA
[ "Introduction", "DNA와의 비교", "구조", "종류", "역할", "단백질 형성과정", "전사와 mRNA 생성", "tRNA", "각주" ]
[ "\n\n\n섬네일\n'''리보핵산'''(RNA)은 유전자의 코딩, 디코딩, 조절 및 발현에서 다양한 생물학적 역할에 필수적인 고분자 분자이다. RNA와 디옥시리보핵산(DNA)은 핵산이다. 지질, 단백질 및 탄수화물과 함께 핵산은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필수적인 4가지 주요 거대분자 중 하나를 구성한다.\n\nDNA와 마찬가지로 RNA는 뉴클레오타이드 사슬로 조립되지만 DNA와 달리 RNA는 한 쌍의 이중 가닥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접힌 단일 가닥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세포 유기체는 유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메신저 RNA(mRNA)를 사용한다(G, U, A, C로 표시되는 구아닌, 우라실, 아데닌, 사이토신의 질소 염기를 사용).\n\n또한 특정 단백질의 합성을 지시하기도 한다. 많은 바이러스는 RNA 게놈을 사용하여 유전 정보를 암호화한다.\n", "RNA의 화학 구조는 DNA의 화학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세 가지 주요 방식에서 다르다.\n\n* 이중 가닥 DNA와 달리 RNA는 많은 생물학적 역할에서 단일 가닥 분자이며 훨씬 더 짧은 뉴클레오타이드 사슬로 구성된다. 그러나 단일 RNA 분자는 상보적인 염기쌍에 의해 tRNA에서와 같이 가닥 내 이중 나선을 형성할 수 있다.\n* DNA의 당-인산염 등뼈에는 디옥시리보스가 포함되어 있지만 RNA에는 대신 리보스가 포함되어 있다. 리보스는 2' 위치에서 오탄당 고리에 부착된 하이드록실 그룹을 가지고 있지만 디옥시리보스는 그렇지 않다. 리보스 골격의 하이드록실 그룹은 가수분해의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어 RNA를 DNA보다 화학적으로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n", "RNA의 화학적 구조\nRNA는 오탄당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사슬구조를 이룬다.\n\n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리보스에 있는 다섯개의 탄소에 번호를 붙였을 때 1번 탄소가 핵염기와 연결되며(이 그림의 경우 구아닌) 3번과 5번은 인산에 연결된다. 1번 탄소에 연결되는 핵염기는 구아닌 이외에도 아데닌, 우라실, 시토신이 있다.\n\n인산은 당과 당 사이를 연결하여 사슬을 이룬다.\n\n핵염기는 보통 다음과 같은 약자로 쓰인다.\n* A - 아데닌\n* G - 구아닌\n* U - 우라실\n* C - 시토신 (사이토신)\n\n핵염기는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을 이루어 결합할 수 있다. 아데닌은 우라실(DNA의 경우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n\nRNA는 DNA와 달리 1개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단일 가닥이며, 자체적으로 상보적 염기쌍을 형성해 접힘으로써 고유의 입체 구조를 가질 수 있다.\n\nRNA에 존재하는 리보스의 2번 탄소에 결합된 하이드록시기는 당-인산 골격의 인산이에스터 결합을 분해하는데 관여한다. 따라서 RNA는 DNA보다 빠르게 가수 분해되어 덜 안정하다.\n", "RNA는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기능에 따라 9가지로 나뉜다.\n* rRNA(리보솜 RNA ''ribosomal RNA''): 리보솜을 구성하는 RNA이다.\n* mRNA(전령 RNA ''messenger RNA''): DNA의 유전 정보를 옮겨적은 일종의 청사진 역할을 한다. 이를 기본으로 하여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합성하게 된다.\n* tRNA(운반 RNA ''transfer RNA''): mRNA의 코돈에 대응하는 안티코돈을 가지고 있다. 꼬리쪽에는 tRNA의 안티코돈과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연결해 주는 효소가 있다. 따라서, tRNA의 안티코돈에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다.\n* miRNA(마이크로 RNA ''micro RNA''): 생물의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작은 RNA로, mRNA와 상보적으로 결합해 세포 내 유전자 발현과정에서 중추적인 조절인자로 작용한다.\n* snRNA(소형 핵 RNA ''small nuclear RNA''): 핵 안에서 RNA를 스플라이싱 하는 기능이 있다.\n* snoRNA(소형 인 RNA ''small nucleolar RNA''): 핵 안에서 RNA의 변형을 일으킨다.\n* aRNA(안티센스 RNA ''antisense RNA''): RNA에서 리보솜으로의 번역을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n* siRNA(소형 방해 RNA ''small interfering RNA''): RNA 방해를 유발한다. 특정 단백질의 생산을 억제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방해한다.\n* piRNA\n\n이외에도 형태에 따라 단일 가닥은 ssRNA, 이중 가닥은 dsRNA라는 약자로 표기하기도 한다.\n", "바이러스와 같은 일부 미생물에서 RNA는 유전자로서 기능한다.\n\n그러나, 대부분의 진핵생물과 다세포생물은 DNA가 유전자의 역할을 하고 RNA는 세포에서 단백질 형성 과정에서 DNA와 리보솜 사이의 통신을 맡는 역할을 한다.\n", "\n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n세포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의 형성에는 RNA, DNA, 리보솜, 효소 등이 관여한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n# DNA에서 mRNA가 전사된다. 동시에 세포 내에서는 아미노산 활성화 효소에 의해 tRNA에 아미노산(amino acid)이 부착된다.\n# mRNA의 뉴클레오타이드는 3개씩 짝을 이뤄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예를 들어 UUU(우라실-우라실-우라실)는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n# 전사된 mRNA가 리보솜의 소단위체(small subunit)에 부착된다.\n# 1번에서 아미노산이 부착된 tRNA가 mRNA의 지정된 염기서열의 뉴클레오타이드에 부착된다.(오른쪽 그림의 첫 단계)\n# 리보솜의 큰 단위체(large subunit)가 소단위체(small subunit)와 결합한다.\n# mRNA의 다음 염기서열과 짝을 이루는 tRNA가 리보솜에 들어오고 여기에 부착된 아미노산은 앞의 tRNA에 부착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오른쪽 그림의 두 번째 단계)\n# mRNA의 염기서열이 끝날 때까지 위 과정이 반복되면 긴 아미노산 사슬이 형성된다. 이것이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효소에 의해 접혀 적절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오른쪽 그림의 끝 단계)\n# 세포 내에는 수많은 리보솜이 있어 하나의 mRNA를 이용하여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n", "\nDNA에서 전사된 RNA\nDNA의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상보적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순서대로 연결하여 RNA 사슬을 형성하는 중합반응을 전사라 한다.\n\n전사의 과정에는 RNA 중합 효소가 관여한다. RNA 중합효소는 DNA 염기서열 중 전사를 시작할 곳을 찾아 DNA의 이중나선을 열고 두 가닥 중 한쪽을 사용하여 상보적인 염기서열대로 mRNA를 전사한다. 전사의 종료를 알리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전사를 마치고 DNA 이중나선을 닫는다.\n\n전사의 시작 지점을 알리는 DNA의 위치는 프로모터()라 하는데 전사 시작을 알리는 특정 염기서열과 첫 번째로 전사될 염기 및 전사를 조절하는 염기서열로 구성되어 있다.\n\n=== 코돈 ===\n\n코돈은 mRNA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세개의 뉴클리오드 염기 순열이다. 생물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으로 이를 지정하는 mRNA의 코돈은 아래의 표와 같다.\n\n\n\n 아미노산\n\n 코돈\n\n 아미노산\n\n 코돈\n\n\n\n 페닐알라닌 \n\n UUU, UUC \n\n 류신 \n\n UUA, UUG, CUU, CUC, CUA, CUG\n\n\n\n 이소류신 \n\n AUU, AUC, AUA \n\n 메티오닌 \n\n AUG\n\n\n\n 발린 \n\n GUU, GUC, GUA, GUG \n\n 세린 \n\n UCU, UCC, UCA, UCG, AGU, AGC\n\n\n\n 프롤린 \n\n CCU, CCC, CCA, CCG \n\n 트레오닌 \n\n ACU, ACC, ACA, ACG\n\n\n\n 알라닌 \n\n GCU, GCC, GCA, GCG \n\n 티로신 \n\n UAU, UAC\n\n\n\n 히스티딘 \n\n CAU, CAC \n\n 글루타민 \n\n CAA, CAG\n\n\n\n 아스파라긴 \n\n AAU, AAC \n\n 리신 \n\n AAA, AAG\n\n\n\n 아스파르트산 \n\n GAU, GAC \n\n 글루탐산 \n\n GAA, GAG\n\n\n\n 시스테인 \n\n UGU, UGC \n\n 트립토판 \n\n UGG\n\n\n\n 아르기닌 \n\n CGU, CGC, CGA, CGG, AGA, AGG \n\n 글리신 \n\n GGU, GGC, GGA, GGG\n\n\n\nmRNA 순열중 UAA, UAG, UGA는 아미노산 연결 종료를 지시한다.\n", "페닐알라닌과 아스파르트산의 tRNA\ntRNA는 75 - 95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작은 RNA 분자이다. 비교적 짧은 RNA 사슬이 접혀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n\ntRNA의 주요 역할은 리보솜에 들어온 mRNA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20종 이므로 세포 속에 있는 tRNA의 종류도 20종이다.\n\ntRNA의 말단은 아미노산과 연결되어 있고 접혀있는 특정 부분은 안티코돈이 된다. 예를 들어 왼쪽 그림의 페닐알라닌 tRNA의 안티코돈은 AAG로 리보솜에서 mRNA의 UUC코돈과 연결된다. (RNA 핵염기의 상보성은 A(아데닌)-U(우라실), G(구아닌)-C(사이토신)이다.)\n\n\n", "\n\n* David P. Clark 저 이명석 역,알기쉽고재미있는분자생물학, (주)라이프사이언스, 서울, PP427–436\n\n\n\n\n\n\n\n\n\n \n분류:RNA 스플라이싱" ]
섬네일 '''리보핵산'''(RNA)은 유전자의 코딩, 디코딩, 조절 및 발현에서 다양한 생물학적 역할에 필수적인 고분자 분자이다. RNA와 디옥시리보핵산(DNA)은 핵산이다. 지질, 단백질 및 탄수화물과 함께 핵산은 알려진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 필수적인 4가지 주요 거대분자 중 하나를 구성한다. DNA와 마찬가지로 RNA는 뉴클레오타이드 사슬로 조립되지만 DNA와 달리 RNA는 한 쌍의 이중 가닥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접힌 단일 가닥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세포 유기체는 유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메신저 RNA(mRNA)를 사용한다(G, U, A, C로 표시되는 구아닌, 우라실, 아데닌, 사이토신의 질소 염기를 사용). 또한 특정 단백질의 합성을 지시하기도 한다. 많은 바이러스는 RNA 게놈을 사용하여 유전 정보를 암호화한다. RNA의 화학 구조는 DNA의 화학 구조와 매우 유사하지만 세 가지 주요 방식에서 다르다. * 이중 가닥 DNA와 달리 RNA는 많은 생물학적 역할에서 단일 가닥 분자이며 훨씬 더 짧은 뉴클레오타이드 사슬로 구성된다. 그러나 단일 RNA 분자는 상보적인 염기쌍에 의해 tRNA에서와 같이 가닥 내 이중 나선을 형성할 수 있다. * DNA의 당-인산염 등뼈에는 디옥시리보스가 포함되어 있지만 RNA에는 대신 리보스가 포함되어 있다. 리보스는 2' 위치에서 오탄당 고리에 부착된 하이드록실 그룹을 가지고 있지만 디옥시리보스는 그렇지 않다. 리보스 골격의 하이드록실 그룹은 가수분해의 활성화 에너지를 낮추어 RNA를 DNA보다 화학적으로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 RNA의 화학적 구조 RNA는 오탄당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사슬구조를 이룬다. 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리보스에 있는 다섯개의 탄소에 번호를 붙였을 때 1번 탄소가 핵염기와 연결되며(이 그림의 경우 구아닌) 3번과 5번은 인산에 연결된다. 1번 탄소에 연결되는 핵염기는 구아닌 이외에도 아데닌, 우라실, 시토신이 있다. 인산은 당과 당 사이를 연결하여 사슬을 이룬다. 핵염기는 보통 다음과 같은 약자로 쓰인다. * A - 아데닌 * G - 구아닌 * U - 우라실 * C - 시토신 (사이토신) 핵염기는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을 이루어 결합할 수 있다. 아데닌은 우라실(DNA의 경우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 RNA는 DNA와 달리 1개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단일 가닥이며, 자체적으로 상보적 염기쌍을 형성해 접힘으로써 고유의 입체 구조를 가질 수 있다. RNA에 존재하는 리보스의 2번 탄소에 결합된 하이드록시기는 당-인산 골격의 인산이에스터 결합을 분해하는데 관여한다. 따라서 RNA는 DNA보다 빠르게 가수 분해되어 덜 안정하다. RNA는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기능에 따라 9가지로 나뉜다. * rRNA(리보솜 RNA ''ribosomal RNA''): 리보솜을 구성하는 RNA이다. * mRNA(전령 RNA ''messenger RNA''): DNA의 유전 정보를 옮겨적은 일종의 청사진 역할을 한다. 이를 기본으로 하여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합성하게 된다. * tRNA(운반 RNA ''transfer RNA''): mRNA의 코돈에 대응하는 안티코돈을 가지고 있다. 꼬리쪽에는 tRNA의 안티코돈과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연결해 주는 효소가 있다. 따라서, tRNA의 안티코돈에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다. * miRNA(마이크로 RNA ''micro RNA''): 생물의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작은 RNA로, mRNA와 상보적으로 결합해 세포 내 유전자 발현과정에서 중추적인 조절인자로 작용한다. * snRNA(소형 핵 RNA ''small nuclear RNA''): 핵 안에서 RNA를 스플라이싱 하는 기능이 있다. * snoRNA(소형 인 RNA ''small nucleolar RNA''): 핵 안에서 RNA의 변형을 일으킨다. * aRNA(안티센스 RNA ''antisense RNA''): RNA에서 리보솜으로의 번역을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 siRNA(소형 방해 RNA ''small interfering RNA''): RNA 방해를 유발한다. 특정 단백질의 생산을 억제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방해한다. * piRNA 이외에도 형태에 따라 단일 가닥은 ssRNA, 이중 가닥은 dsRNA라는 약자로 표기하기도 한다. 바이러스와 같은 일부 미생물에서 RNA는 유전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핵생물과 다세포생물은 DNA가 유전자의 역할을 하고 RNA는 세포에서 단백질 형성 과정에서 DNA와 리보솜 사이의 통신을 맡는 역할을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 세포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의 형성에는 RNA, DNA, 리보솜, 효소 등이 관여한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 DNA에서 mRNA가 전사된다. 동시에 세포 내에서는 아미노산 활성화 효소에 의해 tRNA에 아미노산(amino acid)이 부착된다. # mRNA의 뉴클레오타이드는 3개씩 짝을 이뤄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예를 들어 UUU(우라실-우라실-우라실)는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 전사된 mRNA가 리보솜의 소단위체(small subunit)에 부착된다. # 1번에서 아미노산이 부착된 tRNA가 mRNA의 지정된 염기서열의 뉴클레오타이드에 부착된다.(오른쪽 그림의 첫 단계) # 리보솜의 큰 단위체(large subunit)가 소단위체(small subunit)와 결합한다. # mRNA의 다음 염기서열과 짝을 이루는 tRNA가 리보솜에 들어오고 여기에 부착된 아미노산은 앞의 tRNA에 부착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오른쪽 그림의 두 번째 단계) # mRNA의 염기서열이 끝날 때까지 위 과정이 반복되면 긴 아미노산 사슬이 형성된다. 이것이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효소에 의해 접혀 적절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오른쪽 그림의 끝 단계) # 세포 내에는 수많은 리보솜이 있어 하나의 mRNA를 이용하여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 DNA에서 전사된 RNA DNA의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상보적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순서대로 연결하여 RNA 사슬을 형성하는 중합반응을 전사라 한다. 전사의 과정에는 RNA 중합 효소가 관여한다. RNA 중합효소는 DNA 염기서열 중 전사를 시작할 곳을 찾아 DNA의 이중나선을 열고 두 가닥 중 한쪽을 사용하여 상보적인 염기서열대로 mRNA를 전사한다. 전사의 종료를 알리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전사를 마치고 DNA 이중나선을 닫는다. 전사의 시작 지점을 알리는 DNA의 위치는 프로모터()라 하는데 전사 시작을 알리는 특정 염기서열과 첫 번째로 전사될 염기 및 전사를 조절하는 염기서열로 구성되어 있다. === 코돈 === 코돈은 mRNA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세개의 뉴클리오드 염기 순열이다. 생물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으로 이를 지정하는 mRNA의 코돈은 아래의 표와 같다. 아미노산 코돈 아미노산 코돈 페닐알라닌 UUU, UUC 류신 UUA, UUG, CUU, CUC, CUA, CUG 이소류신 AUU, AUC, AUA 메티오닌 AUG 발린 GUU, GUC, GUA, GUG 세린 UCU, UCC, UCA, UCG, AGU, AGC 프롤린 CCU, CCC, CCA, CCG 트레오닌 ACU, ACC, ACA, ACG 알라닌 GCU, GCC, GCA, GCG 티로신 UAU, UAC 히스티딘 CAU, CAC 글루타민 CAA, CAG 아스파라긴 AAU, AAC 리신 AAA, AAG 아스파르트산 GAU, GAC 글루탐산 GAA, GAG 시스테인 UGU, UGC 트립토판 UGG 아르기닌 CGU, CGC, CGA, CGG, AGA, AGG 글리신 GGU, GGC, GGA, GGG mRNA 순열중 UAA, UAG, UGA는 아미노산 연결 종료를 지시한다. 페닐알라닌과 아스파르트산의 tRNA tRNA는 75 - 95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작은 RNA 분자이다. 비교적 짧은 RNA 사슬이 접혀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tRNA의 주요 역할은 리보솜에 들어온 mRNA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20종 이므로 세포 속에 있는 tRNA의 종류도 20종이다. tRNA의 말단은 아미노산과 연결되어 있고 접혀있는 특정 부분은 안티코돈이 된다. 예를 들어 왼쪽 그림의 페닐알라닌 tRNA의 안티코돈은 AAG로 리보솜에서 mRNA의 UUC코돈과 연결된다. (RNA 핵염기의 상보성은 A(아데닌)-U(우라실), G(구아닌)-C(사이토신)이다.) * David P. Clark 저 이명석 역,알기쉽고재미있는분자생물학, (주)라이프사이언스, 서울, PP427–436 분류:RNA 스플라이싱
리보솜
[ "Introduction", "개요", "분류", "생성", "구조", "단백질 생성과정", "같이 보기", "각주" ]
[ "\n3-리보솜\n'''리보솜'''(), 또는 '''리보좀'''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리보솜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리보솜은 대단위체와 소단위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두 단위체가 결합하여 단백질 합성을 수행한다.\n", "리보솜은 지름이 약 20nm(200Å)이고 65%의 리보솜 RNA와 35%의 리보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고균, 진정세균 및 진핵생물의 리보솜은 서로 다른 다양한 단백질과 RNA로 구성되어 있다. 리보솜은 전령 RNA(mRNA)의 코돈을 번역하여 운반 RNA(tRNA)에 연결된 아미노산을 배열하여 단백질을 형성한다. 리보솜은 별도의 막이 없는 세포소기관이다.\n\n단백질과 RNA로 이루어진 리보솜과 조금 다른 리보자임은 효소처럼 작용하는 RNA분자이다. 이것에 의해 RNA 세계 기원설이 제기됐다.\n\n단백질을 형성하지 않는 동안 RNA는 내부 원형질인(세포기질 cytosol) 때에는 RNA로부터 구성되는데, 이는 RNA 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n\n리보솜은 1950년대 중반 루마니아 생물학자인 게오르그 에밀 팔라데에 의해 최초로 관찰되었다. 팔라데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를 관찰하던 중 리보솜을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보솜이라는 이름은 1958년 리처드 B. 로버트가 명명하였다.\n\n\n\n20세기 중반에 리보솜의 분자 구조와 기능이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아다 요나트(이스라엘),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미국)과 토머스 A. 스타이츠(미국)는 리보솜의 기능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20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n", "리보솜은 크게 단백질을 합성하는 자유 리보솜(free-ribosome)과, 소포체(endoplasmic reticulum, ER) 표면에 붙어서 막단백질이나 분비단백질을 등을 합성하는 ER-리보솜, 두가지로 나뉜다. 이 둘은 상호전환이 가능하며, ER-리보솜이 자유 리보솜이 될 수도, 자유 리보솜이 거친면 소포체로 들어가 ER-리보솜이 되는 경우도 있다.\n", "세균의 리보솜은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인 오페론을 전사하여 생성된다. 진핵생물의 경우 세포핵 안에 있는 핵소체에서 4 종류의 리보솜 RNA가 만들어지며 리보솜 단백질과 결합되어 리보솜이 생성된다.\n", "리보솜은 크게 2개의 소단위체(subunit)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대 리보솜 소단위체 (large subunit, LSU)와 소 리보솜 소단위체 (small subunit, SSU)이다. 리보솜은 스베드버그(Svedberg) 침강 계수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원핵세포의 리보솜과 진핵세포의 리보솜이 다르다. 이때 리보솜의 크기를 스베드버그의 이름 약자를 따서 S라는 단위로 센다.\n\n원핵세포의 경우 전체가 70S 리보솜이고 각각 50S 및 3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 진핵세포의 리보솜은 전체가 80S 리보솜이고 각각 60S 및 4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n",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n\n리보솜이 mRNA의 코돈을 인식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이라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생성과정은 다음과 같다.\n\n* 준비\n** 리보솜의 소단위체와 대단위체가 결합한다. 리보솜에는 운반 RNA가 들어설 수 있는 부위가 두 곳이 있는데 운반 RNA가 들어오는 쪽을 A 자리, 나가는 쪽을 P 자리라 한다.\n\n* 초기화\n** 소단위체에 전령 RNA가 결합하고, 시작 코돈이 확인되면 대단위체의 A 자리에 메티오닌과 결합한 운반 RNA가 도입되면서 단백질 생성이 시작된다.\n\n* 연장 과정\n** 코돈 인식 : 폴리펩타이드를 달고 있는 P 자리의 운반 RNA가 코돈에 붙어있다. A 자리에 있는 전령 RNA의 코돈과 상보성을 갖는 안티코돈을 가진 운반 RNA가 아미노산을 가져와 결합한다.\n** 펩타이드 결합 형성 : P 자리에 있는 기존의 폴리펩타이드와 A 자리에 있는 새로운 운반 RNA의 아미노산 사이에 펩타이드 결합이 형성된다. 이때 아미노아실 결합이 P 자리의 운반 RNA에서 새로운 폴리펩타이드 쪽으로 옮겨간다.\n** 변환 : P 자리에서 자유로워진 운반 RNA가 빠져나간다. 이제 전령 RNA가 한칸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코돈이 바뀐다.\n** 반복 : A 자리의 폴리펩타이드-운반 RNA 중합분자가 P 자리로 옮겨가면서 A 자리가 비워진다. 비워진 A 자리에는 바뀐 코돈과 상보적인 운반 RNA가 새롭게 결합된다. 위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폴리펩타이드 사슬이 길어진다.\n\n* 종료\n** 종료 코돈에 종결 운반 RNA가 결합되면 합성되던 폴리펩타이드가 떨어져 나가면서 단백질 합성이 끝난다.\n\n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의 에너지원은 GTP의 가수분해이다.\n\n\n\n\n 250px\n\n\n\n 단백질 형성의 진행\n\n\n", "\n* ARDRA\n", "\n\n\n\n\n\n\n \n분류:세포소기관\n분류:리보자임\n분류:단백질 생합성" ]
3-리보솜 '''리보솜'''(), 또는 '''리보좀'''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리보솜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리보솜은 대단위체와 소단위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두 단위체가 결합하여 단백질 합성을 수행한다. 리보솜은 지름이 약 20nm(200Å)이고 65%의 리보솜 RNA와 35%의 리보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고균, 진정세균 및 진핵생물의 리보솜은 서로 다른 다양한 단백질과 RNA로 구성되어 있다. 리보솜은 전령 RNA(mRNA)의 코돈을 번역하여 운반 RNA(tRNA)에 연결된 아미노산을 배열하여 단백질을 형성한다. 리보솜은 별도의 막이 없는 세포소기관이다. 단백질과 RNA로 이루어진 리보솜과 조금 다른 리보자임은 효소처럼 작용하는 RNA분자이다. 이것에 의해 RNA 세계 기원설이 제기됐다. 단백질을 형성하지 않는 동안 RNA는 내부 원형질인(세포기질 cytosol) 때에는 RNA로부터 구성되는데, 이는 RNA 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리보솜은 1950년대 중반 루마니아 생물학자인 게오르그 에밀 팔라데에 의해 최초로 관찰되었다. 팔라데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를 관찰하던 중 리보솜을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보솜이라는 이름은 1958년 리처드 B. 로버트가 명명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리보솜의 분자 구조와 기능이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아다 요나트(이스라엘),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미국)과 토머스 A. 스타이츠(미국)는 리보솜의 기능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20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리보솜은 크게 단백질을 합성하는 자유 리보솜(free-ribosome)과, 소포체(endoplasmic reticulum, ER) 표면에 붙어서 막단백질이나 분비단백질을 등을 합성하는 ER-리보솜, 두가지로 나뉜다. 이 둘은 상호전환이 가능하며, ER-리보솜이 자유 리보솜이 될 수도, 자유 리보솜이 거친면 소포체로 들어가 ER-리보솜이 되는 경우도 있다. 세균의 리보솜은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인 오페론을 전사하여 생성된다. 진핵생물의 경우 세포핵 안에 있는 핵소체에서 4 종류의 리보솜 RNA가 만들어지며 리보솜 단백질과 결합되어 리보솜이 생성된다. 리보솜은 크게 2개의 소단위체(subunit)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대 리보솜 소단위체 (large subunit, LSU)와 소 리보솜 소단위체 (small subunit, SSU)이다. 리보솜은 스베드버그(Svedberg) 침강 계수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원핵세포의 리보솜과 진핵세포의 리보솜이 다르다. 이때 리보솜의 크기를 스베드버그의 이름 약자를 따서 S라는 단위로 센다. 원핵세포의 경우 전체가 70S 리보솜이고 각각 50S 및 3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 진핵세포의 리보솜은 전체가 80S 리보솜이고 각각 60S 및 40S의 대 리보솜 소단위체 및 소 리보솜 소단위체로 나누어진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 리보솜이 mRNA의 코돈을 인식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이라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생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 준비 ** 리보솜의 소단위체와 대단위체가 결합한다. 리보솜에는 운반 RNA가 들어설 수 있는 부위가 두 곳이 있는데 운반 RNA가 들어오는 쪽을 A 자리, 나가는 쪽을 P 자리라 한다. * 초기화 ** 소단위체에 전령 RNA가 결합하고, 시작 코돈이 확인되면 대단위체의 A 자리에 메티오닌과 결합한 운반 RNA가 도입되면서 단백질 생성이 시작된다. * 연장 과정 ** 코돈 인식 : 폴리펩타이드를 달고 있는 P 자리의 운반 RNA가 코돈에 붙어있다. A 자리에 있는 전령 RNA의 코돈과 상보성을 갖는 안티코돈을 가진 운반 RNA가 아미노산을 가져와 결합한다. ** 펩타이드 결합 형성 : P 자리에 있는 기존의 폴리펩타이드와 A 자리에 있는 새로운 운반 RNA의 아미노산 사이에 펩타이드 결합이 형성된다. 이때 아미노아실 결합이 P 자리의 운반 RNA에서 새로운 폴리펩타이드 쪽으로 옮겨간다. ** 변환 : P 자리에서 자유로워진 운반 RNA가 빠져나간다. 이제 전령 RNA가 한칸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코돈이 바뀐다. ** 반복 : A 자리의 폴리펩타이드-운반 RNA 중합분자가 P 자리로 옮겨가면서 A 자리가 비워진다. 비워진 A 자리에는 바뀐 코돈과 상보적인 운반 RNA가 새롭게 결합된다. 위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폴리펩타이드 사슬이 길어진다. * 종료 ** 종료 코돈에 종결 운반 RNA가 결합되면 합성되던 폴리펩타이드가 떨어져 나가면서 단백질 합성이 끝난다. 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의 에너지원은 GTP의 가수분해이다. 250px 단백질 형성의 진행 * ARDRA 분류:세포소기관 분류:리보자임 분류:단백질 생합성
바이러스
[ "Introduction", "바이러스의 발견과 연구의 역사", "바이러스의 기원<ref>{{서적 인용|url=|제목=생명과학개론 13판|성=생명과학교재편찬위원회|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분류", "구조", "특징", "바이러스 복제", "바이러스가 원인인 주요 질병", "바이러스의 이로운 사용", "같이 보기",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
[ "\n\n\n\n'''바이러스'''(, , ) 또는 '''여과성 미생물'''(濾過性微生物), '''병독'''(病毒)은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전염성 감염원이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비세포성 반생물)이다. 초현미경적, 여과성 병원체이기도 하다. 기생과 증식을 위해서는 숙주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동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러시아의 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노프스키(Dmitri Iosifovich Ivanovsky)의 1892년 연구가 다루었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 이래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 안에 있지 않거나 세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 있는 동안 독립적인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온이라고도 하는 이 바이러스 입자들은 DNA나 RNA로 만들어진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 외피와 단백질 외피를 둘러싸는 긴 분자인 이 바이러스 입자들의 모양은 몇몇 바이러스 종들을 위한 단순한 나선형과 타원형 형태에서부터 다른 종들을 위한 더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종들은 너무 작아서 광학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 평균적인 바이러스는 평균적인 박테리아 크기의 약 100분의 1이다.\n\n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서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고, 세포들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DNA의 플라스미드 조각들로부터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진화 과정에서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을 운반하고, 생식하고,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체로 분류하는데 필요한 주요 특성(예를 들어 세포 구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체\" 및 복제 물질로 묘사되어 왔다.\n",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병원체를 찾을 수 없어서 현미경을 이용하여 매우 작은 병원균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1884년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찰스 챔버랜드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구멍을 지닌 필터를 발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필터를 통해 박테리아를 포함한 용액을 통과시켜 이 용액으로부터 이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Ivanovskii, D. I.)는 이 필터를 이용하여 현재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감염된 담배잎으로부터 으깬 잎 추출물이 필터 과정을 거쳤더라도 감염성이 유지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바놉스키는 이 감염이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독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생각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당시, 모든 감염체들은 필터를 통해 존속되어 영양배지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는 질병의 배종설(매균설)의 일부가 되었다. 1898년에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 마루티누스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는 이 실험을 되풀이하였고 필터 처리된 용액에 새로운 형태의 감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 감염체가, 분리된 세포에서만 증식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contagium vivum fluidum''로 불렀으며 이 낱말을 바이러스(''virus'')라 하였다. 베이젠리크는 바이러스가 자연 상에서는 액체 상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은 나중에 웬들 스탠리가 바이러스가 미립자성을 띠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뢰플러와 프로시는 최초의 동물성 바이러스(구제역을 일으키는 아프타바이러스)를 비슷한 필터를 통해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n", "19세기 후반 바이러스 발견 직후 생물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세포로 진화하지 못한 원형질체의 일부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바이러스와 숙주세포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정되었다.\n\n두 번째 가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핵산을 필요로 하는 세포내 기생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내로 들어가면 핵산을 비롯하여 바이러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숙주세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n\n세번째 가설은 바이러스가 세포로부터 방출되었기 때문에 복제를 위해 숙주세포로 되돌아가야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다.\n", "\n바이러스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서 식물 바이러스·동물 바이러스 및 세균 바이러스(파지)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 증식의 근원이 핵산에 있으므로 핵산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게 되었다. 즉, 2종류의 핵산 중에서 어느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DNA바이러스 아문과 RNA바이러스 아문으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강·목·과로 세분화된다.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면서 숙주가 가진 것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천연두나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대장균에 기생하는 T파지는 DNA바이러스이다. 이에 대해, 유행성 이하선염(항아리손님)·홍역·광견병·소아마비·일본뇌염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RNA바이러스이다.\n\n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는 바이러스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n* I: dsDNA 바이러스(겹가닥 DNA 바이러스) - 아데노바이러스, 헤르페스바이러스, 마마바이러스 등\n* II: ssDNA 바이러스(외가닥 DNA 바이러스) - 파르보바이러스 등\n* III: dsRNA 바이러스(겹가닥 RNA 바이러스) - 레오바이러스 등\n* IV: (+)ssRNA 바이러스(양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코로나바이러스, 피코르나바이러스, 토가바이러스등\n* V: (−)ssRNA 바이러스(음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오르토믹소바이러스, 라브도바이러스 등\n* VI: ssRNA-RT 바이러스(외가닥 RNA-RT 바이러스) - 레트로바이러스 등\n* VII: dsDNA-RT 바이러스(겹가닥 DNA-RT 바이러스) - 헤파드나바이러스 등\n", "바이러스는 RNA나 DNA의 유전물질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캡시드)로 구성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진다. 단백질 껍질(캡시드)은 구슬 모양의 단백질(capsomere, 캡소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이외에 지질로 이루어진 막을 가지기도 한다. 위의 그림에서 하단의 바이러스가 지질로 이루어진 층을 가지는 Enveloped Virus(외피로 둘러싸인 바이러스)이다. 이 지질층은 숙주세포의 세포막에서 유래한 것이다.\n",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영양 배지에서는 배양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증 ·증식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기 위해서, 미생물학자들은 1900년대 초, 페트리 접시에서 자라는 세포층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세포배양)을 개발하였다. 발견 초기에는 누구나 바이러스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바이러스가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인 생물학 차원에서 무생물(비생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n\n; 생물적 특성\n* (숙주 세포의 효소를 이용한) 물질 대사가 가능하다.\n* 증식, 유전, 적응 등의 생명 현상을 나타낸다.\n* 자기복제가 가능해 돌연변이가 나타날 수 있다.\n\n; 무생물적 특성\n* 핵이 없고 세포막 등의 세포 기관도 없다.\n* 독립적인 효소가 없어 독립적 물질대사가 불가능하다.\n* 생물체 밖에서는 결정체로 존재한다.\n", "\n바이러스 감염주기는 용균성(lytic) 또는 용원성(lysogenic)으로 분류된다.\n\n* 용균주기: 새로운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서 터져나와 숙주를 죽이게 된다.\n* 용원주기: 바이러스 DNA가 숙주 유전체에 통합되어 잠복해 있다가 숙주 세포가 복제될 때 같이 복제된다.\n\n\n바이러스 복제 방법은 크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n# 부착(Attachment): 바이러스의 표면단백질이 숙주 세포의 특이 수용체에 부착된다.\n#*특정 숙주 세포의 수용체에 대한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의 친화성이 바이러스에 감수성이 있는 숙주의 범위와 숙주 내에서 감염이 일어나는 특정부위를 결정한다.\n# 투과(Penetration): 외피보유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의 외피와 세포의 외막 융합(fusion)을 통해 세포내로 침투한다.\n#탈외각(Uncoating): 바이러스의 단백질이 제거되고 핵산이 유리되는 과정이다.\n#복제(Replication): 바이러스의 mRNA가 합성된 후 바이러스 단백질이 합성된다.\n#*핵산의 복제 전에 바이러스의 핵산 복제 과정에 필요한 효소가 합성되고(초기 단백질), 이후 핵산 복제 후에 후기 단백질인 구조에 관여하는 단백질이 합성된다.\n#조립(Assembly): 바이러스의 핵산과 캡시드 단백질로 자손 바이러스가 조립된다.\n#방출(Release): 일반적으로 바이러스 입자는 2가지 방법(용원, 용균)으로 방출된다.\n", "파일:Reconstructed Spanish Flu Virus.jpg|섬네일|전자 현미경(TEM)으로 관찰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사진|alt=An electron micrograph of the virus that caused Spanish influenza\n* 독감 :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n* 감기 : 리노 바이러스 또는 아데노 바이러스가 원인\n* 에이즈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가 원인\n* 담배 모자이크 병 :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MV)가 원인\n* 천연두 : 천연두 바이러스가 원인\n* 소아마비\n* 구제역\n* 에볼라 출혈열 : 에볼라 바이러스가 원인\n* 상추 모자이크 병: 상추 모자이크 바이러스가 원인\n* 메르스\n* 지카 바이러스\n*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COVID-19)\n",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숙주 세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항생제의 급격한 사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면(파지 요법)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파지 요법 연구가 중단되었지만,항생제 때문에 요즘 다시 파지 요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n", "* 바이러스학\n* 바이러스 분류\n", "\n", "\n* Ricki Lewis 외,《LIFE》,6th Ed.,Mc Graw Hill(2009)\n* \n\n", "\n* ViralZone A Swiss Institute of Bioinformatics resource for all viral families, providing general molecular and epidemiological information\n* \"A Gazillion Tiny Avatars\", article on viruses by Olivia Judson, NY Times, Dec 15, 2009\n* ''Viruses'' – an Open Access journal\n\n\n\n\n\n \n분류:바이러스학\n분류:독일어 낱말\n분류:감염병" ]
'''바이러스'''(, , ) 또는 '''여과성 미생물'''(濾過性微生物), '''병독'''(病毒)은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전염성 감염원이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비세포성 반생물)이다. 초현미경적, 여과성 병원체이기도 하다. 기생과 증식을 위해서는 숙주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동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러시아의 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노프스키(Dmitri Iosifovich Ivanovsky)의 1892년 연구가 다루었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 이래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 안에 있지 않거나 세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 있는 동안 독립적인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온이라고도 하는 이 바이러스 입자들은 DNA나 RNA로 만들어진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 외피와 단백질 외피를 둘러싸는 긴 분자인 이 바이러스 입자들의 모양은 몇몇 바이러스 종들을 위한 단순한 나선형과 타원형 형태에서부터 다른 종들을 위한 더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종들은 너무 작아서 광학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 평균적인 바이러스는 평균적인 박테리아 크기의 약 100분의 1이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서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고, 세포들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DNA의 플라스미드 조각들로부터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진화 과정에서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을 운반하고, 생식하고,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체로 분류하는데 필요한 주요 특성(예를 들어 세포 구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체" 및 복제 물질로 묘사되어 왔다.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병원체를 찾을 수 없어서 현미경을 이용하여 매우 작은 병원균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1884년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찰스 챔버랜드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구멍을 지닌 필터를 발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필터를 통해 박테리아를 포함한 용액을 통과시켜 이 용액으로부터 이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Ivanovskii, D. I.)는 이 필터를 이용하여 현재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감염된 담배잎으로부터 으깬 잎 추출물이 필터 과정을 거쳤더라도 감염성이 유지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바놉스키는 이 감염이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독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생각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당시, 모든 감염체들은 필터를 통해 존속되어 영양배지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는 질병의 배종설(매균설)의 일부가 되었다. 1898년에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 마루티누스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는 이 실험을 되풀이하였고 필터 처리된 용액에 새로운 형태의 감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 감염체가, 분리된 세포에서만 증식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contagium vivum fluidum''로 불렀으며 이 낱말을 바이러스(''virus'')라 하였다. 베이젠리크는 바이러스가 자연 상에서는 액체 상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은 나중에 웬들 스탠리가 바이러스가 미립자성을 띠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뢰플러와 프로시는 최초의 동물성 바이러스(구제역을 일으키는 아프타바이러스)를 비슷한 필터를 통해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후반 바이러스 발견 직후 생물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세포로 진화하지 못한 원형질체의 일부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바이러스와 숙주세포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정되었다. 두 번째 가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핵산을 필요로 하는 세포내 기생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내로 들어가면 핵산을 비롯하여 바이러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숙주세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가설은 바이러스가 세포로부터 방출되었기 때문에 복제를 위해 숙주세포로 되돌아가야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서 식물 바이러스·동물 바이러스 및 세균 바이러스(파지)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 증식의 근원이 핵산에 있으므로 핵산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게 되었다. 즉, 2종류의 핵산 중에서 어느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DNA바이러스 아문과 RNA바이러스 아문으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강·목·과로 세분화된다.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면서 숙주가 가진 것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천연두나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대장균에 기생하는 T파지는 DNA바이러스이다. 이에 대해, 유행성 이하선염(항아리손님)·홍역·광견병·소아마비·일본뇌염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RNA바이러스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는 바이러스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 I: dsDNA 바이러스(겹가닥 DNA 바이러스) - 아데노바이러스, 헤르페스바이러스, 마마바이러스 등 * II: ssDNA 바이러스(외가닥 DNA 바이러스) - 파르보바이러스 등 * III: dsRNA 바이러스(겹가닥 RNA 바이러스) - 레오바이러스 등 * IV: (+)ssRNA 바이러스(양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코로나바이러스, 피코르나바이러스, 토가바이러스등 * V: (−)ssRNA 바이러스(음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오르토믹소바이러스, 라브도바이러스 등 * VI: ssRNA-RT 바이러스(외가닥 RNA-RT 바이러스) - 레트로바이러스 등 * VII: dsDNA-RT 바이러스(겹가닥 DNA-RT 바이러스) - 헤파드나바이러스 등 바이러스는 RNA나 DNA의 유전물질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캡시드)로 구성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진다. 단백질 껍질(캡시드)은 구슬 모양의 단백질(capsomere, 캡소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이외에 지질로 이루어진 막을 가지기도 한다. 위의 그림에서 하단의 바이러스가 지질로 이루어진 층을 가지는 Enveloped Virus(외피로 둘러싸인 바이러스)이다. 이 지질층은 숙주세포의 세포막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영양 배지에서는 배양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증 ·증식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기 위해서, 미생물학자들은 1900년대 초, 페트리 접시에서 자라는 세포층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세포배양)을 개발하였다. 발견 초기에는 누구나 바이러스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바이러스가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인 생물학 차원에서 무생물(비생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 생물적 특성 * (숙주 세포의 효소를 이용한) 물질 대사가 가능하다. * 증식, 유전, 적응 등의 생명 현상을 나타낸다. * 자기복제가 가능해 돌연변이가 나타날 수 있다. ; 무생물적 특성 * 핵이 없고 세포막 등의 세포 기관도 없다. * 독립적인 효소가 없어 독립적 물질대사가 불가능하다. * 생물체 밖에서는 결정체로 존재한다. 바이러스 감염주기는 용균성(lytic) 또는 용원성(lysogenic)으로 분류된다. * 용균주기: 새로운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서 터져나와 숙주를 죽이게 된다. * 용원주기: 바이러스 DNA가 숙주 유전체에 통합되어 잠복해 있다가 숙주 세포가 복제될 때 같이 복제된다. 바이러스 복제 방법은 크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부착(Attachment): 바이러스의 표면단백질이 숙주 세포의 특이 수용체에 부착된다. #*특정 숙주 세포의 수용체에 대한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의 친화성이 바이러스에 감수성이 있는 숙주의 범위와 숙주 내에서 감염이 일어나는 특정부위를 결정한다. # 투과(Penetration): 외피보유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의 외피와 세포의 외막 융합(fusion)을 통해 세포내로 침투한다. #탈외각(Uncoating): 바이러스의 단백질이 제거되고 핵산이 유리되는 과정이다. #복제(Replication): 바이러스의 mRNA가 합성된 후 바이러스 단백질이 합성된다. #*핵산의 복제 전에 바이러스의 핵산 복제 과정에 필요한 효소가 합성되고(초기 단백질), 이후 핵산 복제 후에 후기 단백질인 구조에 관여하는 단백질이 합성된다. #조립(Assembly): 바이러스의 핵산과 캡시드 단백질로 자손 바이러스가 조립된다. #방출(Release): 일반적으로 바이러스 입자는 2가지 방법(용원, 용균)으로 방출된다. 파일:Reconstructed Spanish Flu Virus.jpg|섬네일|전자 현미경(TEM)으로 관찰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사진|alt=An electron micrograph of the virus that caused Spanish influenza * 독감 :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 * 감기 : 리노 바이러스 또는 아데노 바이러스가 원인 * 에이즈 :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가 원인 * 담배 모자이크 병 :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MV)가 원인 * 천연두 : 천연두 바이러스가 원인 * 소아마비 * 구제역 * 에볼라 출혈열 : 에볼라 바이러스가 원인 * 상추 모자이크 병: 상추 모자이크 바이러스가 원인 * 메르스 * 지카 바이러스 *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COVID-19)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숙주 세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항생제의 급격한 사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면(파지 요법)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파지 요법 연구가 중단되었지만,항생제 때문에 요즘 다시 파지 요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 바이러스학 * 바이러스 분류 * Ricki Lewis 외,《LIFE》,6th Ed.,Mc Graw Hill(2009) * * ViralZone A Swiss Institute of Bioinformatics resource for all viral families, providing general molecular and epidemiological information * "A Gazillion Tiny Avatars", article on viruses by Olivia Judson, NY Times, Dec 15, 2009 * ''Viruses'' – an Open Access journal 분류:바이러스학 분류:독일어 낱말 분류:감염병
김성수 (언론인)
[ "Introduction", "생애", "기타 이력", "평가와 비판", "상훈", "저서", "사상과 신념", "성격", "일화", "가족 관계", "김성수를 연기한 배우들", "같이 보기", "관련 서적", "관련 문화재", "역대 선거 결과", "주해",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 "\n\n'''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민족고려대(民族高麗大)를 구상한 고려대학교 창립자이자 동아일보 창업자 중 한명으로 저명하다.\n\n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n\n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n\n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n\n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n\n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n\n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n", "=== 생애 초기 ===\n==== 출생과 가계 ====\n파일:지산 김경중.png|섬네일|130px|왼쪽|생부 지산 김경중\n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n\n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n\n파일:Kimkijung.jpg|섬네일|120px|오른쪽|양아버지 원파 김기중, 그의 교육, 계몽 사업의 후원자이기도 했다.\n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n\n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n\n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n\n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n\n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n==== 유년기 ====\n부안 줄포리 생가 전경(1900년대 초 김성수, 김연수 형제의 생가)\n파일:Kimss-Kimysteenager1.jpg|섬네일|오른쪽|160px|일본 유학시절의 김성수(왼쪽 앉은 이)와 김연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간 김성수는 법적으로는 김연수의 사촌 형이었다.\n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유년기의 김성수는 장난기가 심한 소년이었다 한다. 엽전을 삼켰다며 병이 나으려면 호두를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집안 일가가 호두를 가져오자 엽전을 먹은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머니였노라고 하기도 하였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7세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선행가언을 배우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7세 때 훈장을 모셔와 사설 서당을 차려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리 아이들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소년 판석은 어린아이임에도 동네 아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이 어려워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리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비하, 모욕을 주지 않았다.\n\n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n=== 청소년기 ===\n==== 5살 연상과 결혼 ====\n부안군 줄포리 인촌 김성수 생가\n파일:송진우.gif|섬네일|오른쪽|180픽셀|오랜 친구 송진우. 김성수의 죽마고우인 그는 죽기 전까지 앞장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다.\n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규장각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그는 장학재단인 호남학회(湖南學會)의 발기인에 참여하여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정주는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n\n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 장인 고정주는 특별히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영학숙을 열고 자신의 아들 고광준(高光駿, 고재욱의 부)과 사위 김성수 등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 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는 김성수를 마음에 들어해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n==== 송진우와의 만남 ====\n파일:Kim Seong-soo and Song Jin-woo.jpg|섬네일|왼쪽|150px|친구 송진우와 함께\n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n\n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n\n후일 김성수는 송진우의 첫인상을 두고 이르기를, 쉽게 속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나 심지가 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였다.\n\n\n\n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n\n==== 수학과 서구 문물 수용 ====\n1906년 겨울 다시 전북 고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친구인 송진우와 친분을 쌓은 뒤 김성수는 이를 부모에게 보고하였다. 담양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양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송진우라는 친구를 얻었다고 했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가 모두 고창군 인촌리에서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주하면서 함께 이주했다.\n\n1907년 당시 부안군 내소사 청련암\n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한편 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n\n1907년 봄 김성수의 가족은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했다. 1907년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의 청련암(淸蓮庵)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했다.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가 다시 찾아왔다. 내소사 청련암에서는 백관수도 함께 수학했다. 백관수는 내소사 남쪽 20리쯤에 위치한 부안군 덕흥 출신으로 집안 어른들끼리 교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송진우, 백관수와 더욱 우의를 두텁게 했고 이러한 우정은 평생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촌은 백관수에게서는 한문의 힘을 빌었고, 송진우에게서는 식견(識見)의 힘을 빌렸지만, 김성수 역시도 백관수에게는 신학문의 영향을 주었고, 송진우에게도 실천하는 힘의 영향을 깨우쳐 주었다.\n\n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n\n=== 학창시절과 교육활동 ===\n==== 도일 유학 ====\n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동경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n\n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n\n==== 대학 재학 시절 ====\n모교 와세다 대학교\n파일:Jangdeoksu 1945.jpg|섬네일|오른쪽|180픽셀|장덕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만난 친구로, 동아일보와 한민당을 함께 운영한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다.\n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n\n공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는 정치강연회가 있으면 먼길이라도 찾아서 참석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n\n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n\n==== 교육·계몽 활동 ====\n인촌 김성수\n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n\n중앙학교 인수 무렵\n이때 경영난에 빠졌던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의 생부모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양아버지 김기중만이 그의 의견에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n\n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n\n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n\n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n\n=== 일제 강점기 활동 ===\n==== 기업 경영과 독립운동 ====\n===== 기업 활동과 민족자본 육성 활동 =====\n식민지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n\n파일:豊田紡織機.PNG|섬네일|오른쪽|200px|일본에서 도입한 도요타 방직기,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그는 기계의 성능을 직접 시험하였다.\n\n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n\n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n\n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n\n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n\n===== 독립운동 준비와 만세운동 계획 수립 =====\n파일:1918 Joong Ang High School.jpg|섬네일|왼쪽|140px|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3.1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중앙고등학교 숙직실\n\n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n\n상하이에서 한인청년단이 1919년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측 대표자를 파견한다는 것을 접하고, 범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계의 참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김규식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호응하여 사건을 벌여야 된다고 하자 이를 입수한 그는 송진우와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의 포섭과 협력을 주선했다.\n\n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n\n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n\n===== 3·1 운동 전후 =====\n파일:Songjinwoo1919.jpg|섬네일|왼쪽|140px|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수감 중인 송진우 \n\n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측 대표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n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n\n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 속을 뒤적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n\n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n\n1919년 10월 3.1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한 이아주(李娥珠)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이아주의 문병을 갔다. 이 인연으로 후일 이아주와 재혼하게 되었다. 이아주는 용인이씨 이봉섭(李鳳涉)과 김해김씨의 딸로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아주는 후에 2005년 3월 7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n\n===== 의류사업 확장과 경성방직회사 창업 =====\n파일:경성방직1927.jpg|섬네일|오른쪽|160px|1927년의 경성방직회사\n\n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n\n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n\n한편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n\n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n\n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n\n==== 언론 활동 및 교육활동 ====\n===== 민족개량주의 =====\n동아일보 창간호\n동아일보 창간 무렵\n\n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n\n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n\n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n\n===== 언론과 계몽운동 =====\n인촌 김성수\n송진우 출감 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n\n1923년 5월 송진우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920년 10월초 유근이 출옥하자, 출옥한 유근을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추진한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을 주도하며 일경의 눈총을 샀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n\n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 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n\n===== 물산장려운동과 국산품 애용 운동 =====\n경성 방직 주식 회사의 국산품 애용 선전 광고.\n\n1920년초부터 그는 강연 활동을 다니며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n\n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병로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n\n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n\n==== 실력 양성 운동 ====\n===== 민립대학 설립 운동 =====\n파일:1923년 민립대학 기성회 광고.jpg|섬네일|오른쪽|200px|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n\n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n\n파일:태극성 광목.jpg|섬네일|왼쪽|130px|태극성 광목 포스터\n\n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었다.\n\n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n\n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n\n===== 자치, 실력양성 운동 =====\n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n\n1925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활란 등과 자주 만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논의하곤 했다. 11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 아들의 활동에 짐이 될 것과 손자들의 건강을 우려해 귀국하였다. 인천까지의 배삯은 마련하였으나, 의지할 데가 없던 곽낙원은 차비 마련이 어려웠다. 곽낙원은 고심하다가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서울에 갈 차표와 차비를 구하였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송진우가 곽낙원과 손자의 차비를 지불해주었다. 곽낙원의 동아일보 인천지국 및 본사 방문 소식을 접한 김성수는 직접 찾아가 곽 여사에게 생활에 쓰시라며 봉투를 건넸다.\n\n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n\n1926년 6월 11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n\n===== 간디의 영향, 세계 일주 =====\n파일:Kimss-kandi 01.jpg|섬네일|오른쪽|140px|1927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서 받은 편지\n파일:Yuns1925.jpg|섬네일|230px|왼쪽|1929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n\n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n\n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신간회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n\n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n\n===== 브나로드 운동 =====\n브나로드 운동 포스터\n\n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n\n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n\n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n\n===== 보성전문학교 인수와 사업 경영난 =====\n파일:In cheon 1934.jpg|섬네일|오른쪽|230px|1934년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에서, 당시 그는 양부 원파 김기중의 상중이었다.\n파일:보성전문학교 학생 교련 훈련.jpg|섬네일|오른쪽|200px|보성전문학교 학생의 교련 훈련 장면\n\n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n\n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n\n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부친 상중에도 그는 친히 현장을 와서 현장감독들을 독려하곤 했다. 1934년 4월 길에서 문일평을 만났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한 집에 하숙하였고, 함께 하숙집 주인의 딸을 연모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문일평의 손을 잡고 \"어찌하여 세상 일이 여기에 이르렀소,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끝내 보기 어려운 것이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문일평 등에게도 따로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안창호 등에게도 자금을 보냈다. 1934년 동생 김연수와 함께 해동은행의 대주주였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n\n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n\n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n\n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다.\n\n==== 일제 강점기 후반 ====\n===== 일장기 말소 사건과 교육활동 =====\n\n파일: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jpg|섬네일|180px|오른쪽|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 말소 사건'\n파일:김성수와 장덕수.jpg|섬네일|왼쪽|150px|친구 장덕수와 함께 (1930년대 후반)\n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통치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n\n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미술품과 작품의 외국 반출을 막아야 된다며 거금을 치르고서라도 미술품, 서예 작품을 매입해들였고, 전형필, 송진우, 장택상 등도 그의 견해애 동조하여 거액을 들여서라도 미술품 입찰에 가서 그림, 서화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 보고 귀국했다.\n\n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n\n\n\n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 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n\n고려대학교\n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n\n===== 1930년대 후반 =====\n파일:Chang sihn song.PNG|섬네일|왼쪽|150px|1936년 영국 런던에서(좌측 김성수, 두 번째 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n\n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n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n\n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n\n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n\n===== 태평양 전쟁 전후 =====\n파일:USSArizona PearlHarbor.jpg|섬네일|왼쪽|태평양 전쟁|220x220픽셀\n\n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n\n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은 모면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김선기 등이 김성수를 찾아갔더니 그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며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며 이극로의 안부를 걱정했다. 잡혀간 이극로는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의 책임자로 있던 김성수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 술 한 잔 사겠다는 이유로 김성수를 술집 청향원으로 불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는 이극로의 자백을 들려주며 추궁하였는데 김성수는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했고 일본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n\n==== 광복 직전 ====\n파일:Kim Seong-soo Chairman of Boseong Callege.jpg|섬네일|오른쪽|200px|보성전문학교 교장 시절\n\n\n\n\n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n\n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n\n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n\n국내 각지를 순찰하던 그는 경기도 전곡(全谷)의 농장을 거쳐서 경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n\n==== 친일 행적 논란 ====\n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통치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n\n\n\n\n\n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n\n\n\n그러나 김성수의 성명으로 발표된 것이 자의에 의한 발표인지, 단순 명의 도용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n\n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n\n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n\n1993년 7월 8일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인물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김성수를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n\n=== 해방 이후 ===\n==== 광복과 군정기 ====\n===== 한민당 창당 조직 =====\n\n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n\n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n\n파일:Kim Seongsu1946.jpg|섬네일|오른쪽|150픽셀|한국민주당 간부 시절의 김성수\n10월초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미 군정을 세우자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한 뒤,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였다.\n\n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n\n=====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n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n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n\n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반탁독립투쟁위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였다.\n\n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6년 2월 민주의원이 창립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기금을 냈다.\n\n46년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지명되었다.\n\n=====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위 반대 =====\n파일:Seoul-Deoksugung-10.jpg|섬네일|230px|오른쪽|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n\n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n\n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n\n파일:Yuncy&Kimss 19470221.jpg|섬네일|왼쪽|180픽셀|1947년 2월 21일 AP도쿄 지국장을 만난 김성수와 윤치영\n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n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n\n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n\n1947년 1월 18일 김구,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성수는 김구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n\n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n\n==== 광복 초기 정치활동 ====\n=====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n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 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끝내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n\n장덕수\n1947년 우익정당의 통합 논의에서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1947년 12월 한국독립당 김석황계열에 의한 장덕수의 암살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n\n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n\n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n\n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조소앙 등은 방북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n\n===== 암살 미수와 김구와의 결별 =====\n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강점기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n\n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 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났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김규식이 일방적으로 김구가 송진우도 암살하고 김성수도 암살하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영어 못하는 점을 악용해서 보고 했으나, 김구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그는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한민당측은 김성수 암살 기도의 실패 이후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n\n===== 총리 인준 부결과 야당화 =====\n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n\n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n\n7월 29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김성수는 한민당 당원으로 민족청년단의 간부 훈련을 받은 조영규(曺泳珪)를 통해 방문 연락을 제의했고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7월 29일 저녁 만찬에서 김성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각의 각료배석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n\n===== 내각 책임제 =====\n인촌 김성수(1950년 무렵)\n\n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n\n그는 이승만을 찾아 내각 책임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n\n\n\n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n\n==== 부통령 취임 이후 ====\n===== 정치 활동 =====\n파일:3731124494 a20ba4f3 c1-2.jpg|섬네일|140px|오른쪽|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n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n\n1948년 8월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농지개혁 조항인 헌법 제86조가 대규모의 농토를 갖고 있던 인촌의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의 호남 지역에 소유한 농지가 무려 3,247 정보로 최대의 지주여서 농지개혁법 제86조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n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n\n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 당시 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 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n\n===== 제2대 부통령 =====\n====== 민국당 조직과 전란 ======\n파일:김성수 1949.JPG|섬네일|130px|왼쪽|민국당 창당 무렵의 김성수 (1949년)\n김성수 초상화\n\n1949년까지 그는 한국민주당을 이끌어 오다가 2월 10일 한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제2공화국 집권여당 민주당의 전신)을 창당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이었다. 그해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다. 8월 20일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자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였다.\n\n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n\n부산피난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쟁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n\n9.28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에 친 자식처럼 보살피던 이인수를 잃고 고통스러워했다. 이인수는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중앙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쳤고 고려대 교수로 유능한 교육자였는데, 6.25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밀려들어와서 강압적으로 반미 선전에 동원하여 마지못해 가담한 이력을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인촌은 이인수를 구명하려고 이승만을 찾아갔는데 얼른 재빨리 처형한 북한 앞잡이 신성모 국방 장관이 늦었다고 하여 항의를 하기도 했다.\n\n====== 제2대 부통령 ======\n파일:Kim Seong-su and Syngman Rhee.jpg|섬네일|오른쪽|230px|부산 피난지에서 이승만과 함께(1951년)\n5.10 총선을 적극 동조했는데,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의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민족이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하여 여러번 출마를 사양하였다.\n\n5월 17일 국회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65표, 이갑성은 53표, 함태영은 17표로 과반수가 넘지 못하여 결선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김성수 78표, 이갑성 75표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갑성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공화구락부가 민국당에 합세하여 민국당의 부통령후보였던 그를 밀어준 결과였다.\n\n5월 17일 제2대 부통령(副統領)에 취임하였다.\n\n\n\n김성수는 처음에 부통령직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n\n====== 부통령 사퇴 ======\n파일:Kim Seong-soo-South Korean Vicepresident 1951.jpg|섬네일|왼쪽|180px|부통령 재직 시절의 김성수\n\n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를 혐오하였다. 자신을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한민당, 민국당원들에게도 자제하라고 경고를 주었다.\n\n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여 그는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내용을 준비하여 연설을 하려 하였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다.\n\n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n\n1952년 8월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어 직선제로 바뀌자 대통령으로 출마했다. 이때 조봉암이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 김성수는 김창숙·이동하·신익희·장면 등 8명이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성명을 낼 때 참여하였다. 1953년초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친구인 최두선의 회갑연에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문하였다.\n\n==== 야당 결성 운동 ====\n파일:조봉암.jpg|섬네일|왼쪽|120px|조봉암\n1954년부터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년의 김성수는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중풍과 여러 질병으로 김성수는 신당 창당 활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성수는 병상에서 혁신계의 조봉암을 신당 운동에 참가시키는 민주세력의 대동 단결을 호소하였다.\n\n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기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60명과 기타 자유당 탈당파 장면 등이 호헌동지회를 구성할 때 김성수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n\n중앙고등학교에 김성수 동상.\n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n\n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하는 서상일, 박기출, 장택상과 반대하는 장면, 김준연, 김도연, 조병옥 등으로 나뉘었을 때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논쟁이 벌어졌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하였다.\n\n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n\n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n\n=== 사망 ===\n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n\n\n\n김성수의 데드마스크\n그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초 병세에 호전을 보이던 그는 보행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었다. 치료 끝에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2월 15일 밤 11시경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 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n\n김성수 임종 장면 (1955년 2월 18일)\n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던 그는 2월 18일 오전 11시경에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혼수상태에서 의사의 지시로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전 11시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라 하였다\n\n파일:인촌 김성수 국민장.JPG|섬네일|오른쪽|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국민장\n허정은 김성수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조국이 그를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꼭 있어야 할 인물인 그가 이 나라를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원망과 질책이 어린 슬픔이요 아쉬움이었다. 65세라는 원숙한 나이를 생각할 때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룩했을 것인가\"라며 탄식했다.\n\n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133번지 자택에서 심근염(心筋炎) 등이 악화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김성수의 나이 만 65세였다. 곧 범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례위원으로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변영만,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다.\n\n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치러졌다.\n\n=== 사후 ===\n인촌 김성수 국민장 장례식장\n파일:Donga kim.JPG|섬네일|오른쪽|240px|동아일보 사옥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인촌 김성수 동상.\n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n\n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n\n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소와 고려대 경내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n\n1991년 6월 29일 각계 인사 840여 명이 모여 '인촌선생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n\n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n\n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은 발간되었고,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에서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n", "* 1914년 귀국 직후 고향과 경성을 오가며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최두선, 안재홍 등과 교류하며 정치담론을 토론하였다.\n* 1917년 3월 30일~1918년 3월 중앙중학교 교장\n* 1924년 양어머니 전주 이씨 사망\n* 1926년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논문 필화사건으로 서무부장 김철중(金鐵中)과 함께 총독부 경무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하였다.\n* 1926년 6월 6.10 만세운동 직후 송진우와 함께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려다가 실패했다.\n* 1928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직 사퇴\n*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n* 192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범태평양회의에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참여하였다.\n* 1929년 39세에 늑막염으로 한동안 입원하기도 했다.\n* 1930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모략이라 생각, 중국 영사관에 5천원의 위문금을 보냈다. 광복 후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친인선린'(親仁善隣)이라는 글자가 각자된 은패(銀牌)를 선물로 받았다.\n* 193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네숀의 주필이 보내온 축사를 게재하였다가 총독부에서 이것을 트집잡아 5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를 정간시켰다.\n* 1930년~1931년 출국, 세계 일주를 다녀왔다.\n* 1931년 9월 1일 중앙고등보통학교장(~1932년 5월 9일)\n* 1932년 3월 26일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동학교 주무이사에 취임.\n* 1932년 6월 4일 제10대 보성전문학교장(~1935년 5월)\n* 1932년 7월 대전 감옥에 수감된 여운형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n* 1933년 도산 안창호가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면담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김성수는 그 치료비를 부담하였다.\n*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신사불참배사건을 옹호하였다가 총독부 경찰에 소환되었다.\n* 1935년 3월 15일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초대 관장에 취임\n*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기자가 손기정 일장기 말소 게재, 김성수는 두 번째 일장기 말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송진우, 장덕수 등이 총독부 기자실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정간처분을 취소시키지는 못하였다.\n* 1936년 일제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이사직에서 사임.\n* 1937년 5월 26일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1946년)\n*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n*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n*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 사퇴\n* 1942년 창씨개명 요구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태평양 전쟁 권고 협조가 들어왔으나 그는 병으로 거절하고 피신해 다녔다.\n* 1950년 7월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다.\n* 1952년 이화여전 이사에서 사퇴\n", "=== 평가 ===\n일제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평하였다.\n\n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는 것이다.\n\n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n\n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도 평가하였다.\n\n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 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n\n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n\n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n\n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n\n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n\n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n·사업을 자신속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김성곤은 인촌을 본받아 자신도 금성방직,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고, 고향의 현풍학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한다.\n\n=== 비판 ===\n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n\n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n\n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n", "*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018년 박탈\n", "* 《인촌문집》(열락당, 1999)\n", "=== 실력 양성론 ===\n김성수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부르짖었다.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은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는 교육, 물산 장려, 언론 육성을 제시하였다.\n교육을 통하여 문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일본이나 주변국보다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길러내 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육성을 위해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사립 전문학교 설립을 여러 번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스스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데 있다. 이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n\n물산 장려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원료와 자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생산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장려하여 국가의 산업자본과 경제력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면과 마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 면직물과 마직물을 생산하는 회사 설립을 추진하여 경성직뉴를 인수한 뒤, 경성방직회사로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국산품을 애용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올바른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보의 전달과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었다.\n\n=== 종교적 측면 ===\n임종 직전에 장면의 권고로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그는 별다른 종교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가훈을 이어 유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나 유학 이후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시적으로 전도 권고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세례명: 바오로)\n\n=== 각하 명칭 삭제 ===\n그는 제2대 부통령 재임 중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각하 라는 호칭은 다시 부활했고, 1960년 제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각하 라는 경칭은 5.16 군사 정변 이후 다시 부활, 198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공약, 당선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할 때까지 항상 각하 라는 경칭이 계속 통용되었다.\n\n=== 소탈함 ===\n그는 억지로 꾸밈이 없었고, 부유함을 내세워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겉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였다. 화려한 것 보다는 내실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외양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속이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n\n허정은 후일 회고담에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고 평하였다.\n\n\n\n\n\n=== 신념 ===\n공선사후(公先私後) 또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주장하였다. 개인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였다. 또한 신의일관(信義一貫)도 그의 좌우명이었다. 또한 '''쓸 곳에 쓴다''', '''돈은 잃어도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좌우명도 있었다.\n",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다. 또한 그는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억지로 겉치레를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우, 장덕수가 연이어 암살당하면서 정계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n\n사람을 대할 때 조건을 제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였다. 허정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사람의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호남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검소하였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다.\n\n그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뒤에서 돕기를 좋아했다. 허정은 이것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과 이타심(利他心)이 없으면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도 어려운 인촌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했다.\n\n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주저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뒤에 숨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인촌은 이해로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도를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를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고 평하였다.\n\n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허정은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했다. 술이 건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던 인촌 김성수라고 회고하였다.\n\n그는 사심이 없었는데, 허정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는 실제로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독립운동과 보성전문학교, 중앙학교, 동아일보 등에 대부분 투자했다.\n",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n\n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n\n부통령 재임 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n\n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n\n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며 응대하였다.\n\n조선 총독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철승의 징병 거부 면담을 하면서 이철승의 스승을 물어보며 \"김성수 군은 물샐틈 없는 인물이지..\" 하며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n\n=== 우익 정당 통합 운동 ===\n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n\n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라고 회고했다.\n\n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n\n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 다.\n\n=== 김구의 김성수 암살 기도 사건 ===\n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n\n미 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n\n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n\n=== 동상 수난 사태 ===\n1989년 3월 부정입학과 학내 등록금 인상 문제로 본관을 점거한 1천명의 고대생들이 인촌 김성수 동상을 검은 천으로 싸서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 며칠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재단측의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n\n1989년 4월 고려대학교 경내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에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이 올라가 하얗고 굵은 광목 끈으로 칭칭 동여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상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계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었고, 교내 운동권을 탄압하는 재단과의 물리적인 갈등의 성격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성수의 동상은 친일파라 하여 민족고대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이 쓰러뜨리려 시도했으나 재단과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선배들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때마다 재단측이 창립자의 동상을 훼손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여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n\n1989년 4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교사 내외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김성수의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졸업생이 나타나 김성수를 변호했고, 일부 학생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상 수난 사태는 유야무야 종결되었다.\n\n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해에 고대 사상 처음으로 가 꾸려지기도 했다. 2005년 3월 9일에는 한승조 사태와 관련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한승조 교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성수의 동상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다. 유병문 총학생회장은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동상이 학교 정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립 1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대로 고대의 친일 문제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n", "* 할아버지: 김요협(金堯莢, 호는 낙재, 1833년~1909년, 조선 고종때 선공감 감역 역임)\n* 할머니: 증 정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1831년~1911년)\n** 생부: 김경중(1863년~1945년 4월 27일) - 통정대부 비서원승 역임\n* 외할아버지: 고제방(高濟邦)\n** 생모: 장흥 고씨\n** 양부: 김기중(金祺中, 1859년~1933년) - 가선대부 동복군수 역임\n** 양모: 전주 이씨(全州李氏)\n*** 형: 요절\n*** 형: 요절\n*** 형: 요절\n*** 남동생: 김연수(金秊洙, 1896년 8월 25일~1979년 12월 4일) - 삼양그룹 창업자\n*** 제수: 박하진\n*** 누나: 김수남(金壽男, 1885년~1915년 8월 21일)\n*** 매형: 정익원(鄭翼源, 1884년~?)\n*** 여동생: 김영수(金榮洙, 1900년 4월 9일~1984년 10월 15일)\n*** 매제: 김오진(金吾鎭, 1902년 7월 9일~1922년 8월 13일)\n*** 여동생: 김점효(金点効, 1901년 6월 1일~1995년 6월 26일)\n*** 매제: 김용완(金容完, 1904년 4월 9일~1996년 1월 17일), 경방 일가\n** 서모: 공주김씨 김영희(金永熙, 1875년~1963년)\n*** 서제: 김재수(金在洙, 1899년~1954년)\n**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년~1943년, 호는 춘강(春崗), 첫 부인 고광석의 친정아버지)\n*** 처: 고광석(高光錫, 1886년~1919년)\n**** 아들: 김상만(金相万, 1910년 1월 19일~1994년 1월 26일, 전 동아일보 회장·명예회장)\n***** 손자: 김병관(金炳琯, 1934년 7월 24일~2008년 2월 25일, 전 동아일보 회장)\n*** 둘째 처남: 고광준\n** 장인: 이봉섭(李鳳涉, 본관은 용인, 둘째 부인 이아주의 친정아버지)\n*** 처: 이아주(李娥珠, 1899년 음력 7월 19일~1968년 9월 11일)\n**** 아들: 김남(金楠),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n**** 아들: 김상석(金相晳)\n**** 며느리: 윤성선(尹成善, 1924년 8월 11일~,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내무장관 윤치영과 정치인 이은혜의 딸\n***** 손자: 김병기(金炳基, 교육자·고려대학교 교수)\n**** 아들: 김상기(金相琪, 1918년 4월 14일~2011년 7월 3일)\n**** 아들: 김상흠(金相欽, 1919년 10월 27일~1991년 11월 2일, 국회의원)\n**** 딸: 김상현(金相玹, 1926년 9월~)\n**** 사위 이한직李漢稷(전의인,父 총독부학무국장 李軫鎬)\n***** 손자: 이상교(1961년 3월~)\n**** 아들: 김상종(金相淙, 1929년 1월~1997년 10월, 우진토건 회장)\n**** 셋째 딸\n**** 셋째 사위: 이병린(李秉麟), 이활(李活)의 장남\n*** 사돈: 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1945년 12월 30일)\n*** 사돈: 이한동, 전 국무총리, 증손주며느리 이정원(李晶媛)의 친정아버지\n\n=== 기타 ===\n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n\n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고창의 어른''', '''전북의 어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n\n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n\n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 하였다.\n", "* 정욱 - 1981년(제1공화국), MBC 드라마\n* 김동훈 - 1982년(그 여름의 이틀), KBS1 드라마\n* 신구 - 1982년(종로부루스), 영화\n* 맹호림 - 1985년(새벽), KBS1 드라마\n* 허기호 - 2002년(야인시대), SBS 드라마\n", "\n\n* 김인후\n* 김요협\n* 김경중\n* 김기중\n* 동아일보\n* 동아일보사\n* 물산장려운동\n* 브나로드 운동\n* 민립대학기성회\n* 보성전문학교\n* 김병로\n* 송진우\n* 경방\n* 김연수\n* 장덕수\n* 백관수\n* 백남훈\n* 안재홍\n* 원세훈\n* 국민대회준비위원회\n* 한국민주당\n* 민주국민당\n\n* 민주당\n* 김구\n* 김규식\n* 여운형\n* 이승만\n* 실력 양성론\n* 외교 독립론\n* 이아주\n* 장면\n* 신익희\n* 조봉암\n* 김상만\n* 김상협\n* 김준연\n* 김도연\n* 유진오\n* 이순탁\n* 이활\n* 조만식\n* 김활란\n* 정인보\n* 신탁 통치 반대 운동\n\n* 반탁국민회의\n* 박순천\n* 조병옥\n* 안창호\n* 윤보선\n* 윤치영\n* 윤치소\n* 윤치호\n* 임영신\n* 장택상\n* 주요한\n* 함태영\n* 이시영\n* 김규식\n* 이광수\n* 정일형\n* 고려대학교\n* 중앙대학교\n* 중앙고등보통학교\n* 중앙학회\n* 최두선\n* 현상윤\n\n* 흥사단\n* 김용완\n* 친일파\n* 한국전쟁\n* 한국독립당\n* 제1공화국\n* 마하트마 간디\n* 김도연\n* 이윤영\n* 이범석\n* 김병기\n* 김대중\n* 김영삼\n* 박헌영\n* 여운홍\n* 조소앙\n* 주요섭\n* 한근조\n* 한기악\n* 한만년\n*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n", "=== 동아일보사 ===\n* 최시중, 《인촌 김성수:겨레의 길잡이 시대의 선각자》(동아일보사, 1986)\n*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88)\n*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n* 신일철 외, 《평전 인촌 김성수》(신일철 외 지음, 동아일보사, 1991)\n* 동아일보사 편집부, 《한국의 선택(2천년대를향한)》(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91)\n* 김성주,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 (동아일보사, 1991)\n* 백남주, 高敞의 빛: 仁村金性洙先生, 芹村白寬洙先生銅像除幕 (동아, 1983)\n*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평전》(인촌기념회, 동아일보사, 1991)\n\n=== 인촌 기념 관련 단체 ===\n* 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n* 인촌기념회, 《인촌기념회사 1956-1991》(인촌기념회, 1992)\n*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 인촌을 생각한다》(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2005)\n=== 고려대학교 및 그 외 대학 ===\n* 인촌기념회, 《인촌기념강좌》(고려대학교, 2002)\n* 유진오, 양호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7)\n* 홍일식, 《고려대학의사람들》 1~3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6)\n* 이희승, 《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n* 한승옥, 《이광수(문학의 이해와감상31)》(한승옥, 건국대학교출판부, 2008)\n\n=== 기타 ===\n* 김성수, 《인촌선생문집》(열락당, 1999)\n* 김중순,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김중순, 류석춘 역, 일조각, 1998)\n*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생각의나무, 2002)\n* 황명수, 《한국기업경영의 역사적 성격》(황명수, 신양사, 1993)\n* 배병휴, 《한국의 기업인은 누구인가》(배병휴, 좋은이웃집, 2000)\n* 박태균, 《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43~44쪽.\n* \n\n* 임종국,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민족문제연구소 편, 2007)\n*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n* 김지하, 《흰 그늘의 길 1》(김지하 회고록) (김지하, 학고재, 2003)\n*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n*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n*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n*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n* 류일석, 《미답의 세계》(류일석, 시사랑음악사랑, 2008)\n* 정운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정운현, 삼인, 2008)\n* 주익종, 《대군의 척후: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김연수》(푸른역사, 2008)\n* 이현희,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연구-나남신서(나남신서)(1429)》(이현희, 나남 펴냄, 2009)\n* 서울신문사 사업부, 재벌가 맥(상) (서울신문사 사업부, 무한 펴냄, 2006)\n*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이영훈, 에디터, 2006)\n* 김교식, 한국의 인물:김성수 (계성출판사, 1984)\n*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풀빛, 1982)\n* 송남헌, 해방30년사 1(한국사료연구소, 1976)\n*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n* 카터 J. 에커트, 《제국의 후예: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 식민지 기원 1876-1945》(주익종 역, 푸른역사, 2008)\n* Choong Soon Kim, Sŏng-su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SUNY Press, 1998)\n", "* 인촌선생 생가 -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n* 부안 김상만 가옥 - 국가민속문화재 제150호\n\n=== 신문 기사 ===\n* \n* \n* \n* \n* \n* \n* \n* \n* \n* \n* \n* \n", "\n\n\n\n\n선거명\n\n직책명\n\n대수\n\n정당\n\n1차 득표율\n\n1차 득표수\n\n2차 득표율\n\n2차 득표수\n\n3차 득표율\n\n3차 득표수\n\n결과\n\n당락\n\n\n\n제2대 부통령 선거\n\n부통령\n\n2대\n\n민주국민당\n\n 43.71%\n\n66표\n\n 45.03%\n\n68표\n\n 51.32%\n\n78표\n\n1위\n\n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당선\n\n\n", "\n", "\n", "* \n", "* \n* \n\n\n\n\n\n\n\n\n \n분류:1891년 출생\n분류:1955년 사망\n분류:울산 김씨\n분류:고창군 출신\n분류:일제강점기의 언론인\n분류:동아일보 사람\n분류:일제강점기의 교육인\n분류: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n분류:대학 설립자\n분류:일제강점기의 기업인\n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n분류:대한민국의 부통령\n분류:반공주의자\n분류: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n분류:호헌동지회\n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n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n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n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n분류:한국민주당 당원\n분류: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n분류:개신교를 이탈한 사람\n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n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n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n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n분류:와세다 대학 동문\n분류:암살 미수 생존자\n분류:병사한 사람\n분류:19세기 한국 사람\n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1955년 2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교육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민족고려대(民族高麗大)를 구상한 고려대학교 창립자이자 동아일보 창업자 중 한명으로 저명하다.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 파일:지산 김경중.png|섬네일|130px|왼쪽|생부 지산 김경중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 파일:Kimkijung.jpg|섬네일|120px|오른쪽|양아버지 원파 김기중, 그의 교육, 계몽 사업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 유년기 ==== 부안 줄포리 생가 전경(1900년대 초 김성수, 김연수 형제의 생가) 파일:Kimss-Kimysteenager1.jpg|섬네일|오른쪽|160px|일본 유학시절의 김성수(왼쪽 앉은 이)와 김연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간 김성수는 법적으로는 김연수의 사촌 형이었다. 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유년기의 김성수는 장난기가 심한 소년이었다 한다. 엽전을 삼켰다며 병이 나으려면 호두를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집안 일가가 호두를 가져오자 엽전을 먹은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머니였노라고 하기도 하였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7세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선행가언을 배우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7세 때 훈장을 모셔와 사설 서당을 차려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리 아이들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소년 판석은 어린아이임에도 동네 아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이 어려워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리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비하, 모욕을 주지 않았다.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 === 청소년기 === ==== 5살 연상과 결혼 ==== 부안군 줄포리 인촌 김성수 생가 파일:송진우.gif|섬네일|오른쪽|180픽셀|오랜 친구 송진우. 김성수의 죽마고우인 그는 죽기 전까지 앞장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다. 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규장각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그는 장학재단인 호남학회(湖南學會)의 발기인에 참여하여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정주는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 장인 고정주는 특별히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영학숙을 열고 자신의 아들 고광준(高光駿, 고재욱의 부)과 사위 김성수 등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 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는 김성수를 마음에 들어해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 송진우와의 만남 ==== 파일:Kim Seong-soo and Song Jin-woo.jpg|섬네일|왼쪽|150px|친구 송진우와 함께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 후일 김성수는 송진우의 첫인상을 두고 이르기를, 쉽게 속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나 심지가 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였다.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 수학과 서구 문물 수용 ==== 1906년 겨울 다시 전북 고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친구인 송진우와 친분을 쌓은 뒤 김성수는 이를 부모에게 보고하였다. 담양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양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송진우라는 친구를 얻었다고 했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가 모두 고창군 인촌리에서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주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1907년 당시 부안군 내소사 청련암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한편 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 1907년 봄 김성수의 가족은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했다. 1907년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의 청련암(淸蓮庵)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했다.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가 다시 찾아왔다. 내소사 청련암에서는 백관수도 함께 수학했다. 백관수는 내소사 남쪽 20리쯤에 위치한 부안군 덕흥 출신으로 집안 어른들끼리 교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송진우, 백관수와 더욱 우의를 두텁게 했고 이러한 우정은 평생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촌은 백관수에게서는 한문의 힘을 빌었고, 송진우에게서는 식견(識見)의 힘을 빌렸지만, 김성수 역시도 백관수에게는 신학문의 영향을 주었고, 송진우에게도 실천하는 힘의 영향을 깨우쳐 주었다.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 학창시절과 교육활동 === ==== 도일 유학 ====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동경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 대학 재학 시절 ==== 모교 와세다 대학교 파일:Jangdeoksu 1945.jpg|섬네일|오른쪽|180픽셀|장덕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만난 친구로, 동아일보와 한민당을 함께 운영한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다.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는 정치강연회가 있으면 먼길이라도 찾아서 참석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人材培養), '경제자립'(經濟自立), '언론창달'(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 교육·계몽 활동 ==== 인촌 김성수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중앙학교 인수 무렵 이때 경영난에 빠졌던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의 생부모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양아버지 김기중만이 그의 의견에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기업 경영과 독립운동 ==== ===== 기업 활동과 민족자본 육성 활동 ===== 식민지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파일:豊田紡織機.PNG|섬네일|오른쪽|200px|일본에서 도입한 도요타 방직기,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그는 기계의 성능을 직접 시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 ===== 독립운동 준비와 만세운동 계획 수립 ===== 파일:1918 Joong Ang High School.jpg|섬네일|왼쪽|140px|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3.1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중앙고등학교 숙직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상하이에서 한인청년단이 1919년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측 대표자를 파견한다는 것을 접하고, 범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계의 참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김규식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호응하여 사건을 벌여야 된다고 하자 이를 입수한 그는 송진우와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의 포섭과 협력을 주선했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 3·1 운동 전후 ===== 파일:Songjinwoo1919.jpg|섬네일|왼쪽|140px|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수감 중인 송진우 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측 대표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부터, 한양이라는 이름을 미리 짓고 전문학교(전문대학)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계획은 무산되고 차선으로 언론사 설립을 계획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총독부 당국에 비협조적이었고, 총독부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였다. 그의 자금송금은 후일 안창호, 김구 등이 알게 되었다. 익명으로 임시정부에서 밀파한 독립단(獨立團)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한번은 그의 서울 계동 자택에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는 대답없이 자신의 금고문을 열고 속을 뒤적거리며 일부러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보고 온다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독립단원들은 품에 안을 만큼의 자금을 품은 뒤 사라졌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장이던 고하를 통해 김좌진 장군에게 3백~4백 명 규모였던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비밀리에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 원정도씩 네 차례나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1919년 10월 3.1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한 이아주(李娥珠)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는 이아주의 문병을 갔다. 이 인연으로 후일 이아주와 재혼하게 되었다. 이아주는 용인이씨 이봉섭(李鳳涉)과 김해김씨의 딸로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아주는 후에 2005년 3월 7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의류사업 확장과 경성방직회사 창업 ===== 파일:경성방직1927.jpg|섬네일|오른쪽|160px|1927년의 경성방직회사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한편 김성수는 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 ==== 언론 활동 및 교육활동 ==== ===== 민족개량주의 ===== 동아일보 창간호 동아일보 창간 무렵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 언론과 계몽운동 ===== 인촌 김성수 송진우 출감 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3년 5월 송진우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920년 10월초 유근이 출옥하자, 출옥한 유근을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추진한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을 주도하며 일경의 눈총을 샀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 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 물산장려운동과 국산품 애용 운동 ===== 경성 방직 주식 회사의 국산품 애용 선전 광고. 1920년초부터 그는 강연 활동을 다니며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병로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 실력 양성 운동 ==== ===== 민립대학 설립 운동 ===== 파일:1923년 민립대학 기성회 광고.jpg|섬네일|오른쪽|200px|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달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파일:태극성 광목.jpg|섬네일|왼쪽|130px|태극성 광목 포스터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었다. 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 ===== 자치, 실력양성 운동 =====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5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활란 등과 자주 만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논의하곤 했다. 11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 아들의 활동에 짐이 될 것과 손자들의 건강을 우려해 귀국하였다. 인천까지의 배삯은 마련하였으나, 의지할 데가 없던 곽낙원은 차비 마련이 어려웠다. 곽낙원은 고심하다가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서울에 갈 차표와 차비를 구하였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송진우가 곽낙원과 손자의 차비를 지불해주었다. 곽낙원의 동아일보 인천지국 및 본사 방문 소식을 접한 김성수는 직접 찾아가 곽 여사에게 생활에 쓰시라며 봉투를 건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1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 간디의 영향, 세계 일주 ===== 파일:Kimss-kandi 01.jpg|섬네일|오른쪽|140px|1927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서 받은 편지 파일:Yuns1925.jpg|섬네일|230px|왼쪽|1929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 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신간회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 브나로드 운동 ===== 브나로드 운동 포스터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 보성전문학교 인수와 사업 경영난 ===== 파일:In cheon 1934.jpg|섬네일|오른쪽|230px|1934년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에서, 당시 그는 양부 원파 김기중의 상중이었다. 파일:보성전문학교 학생 교련 훈련.jpg|섬네일|오른쪽|200px|보성전문학교 학생의 교련 훈련 장면 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부친 상중에도 그는 친히 현장을 와서 현장감독들을 독려하곤 했다. 1934년 4월 길에서 문일평을 만났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한 집에 하숙하였고, 함께 하숙집 주인의 딸을 연모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문일평의 손을 잡고 "어찌하여 세상 일이 여기에 이르렀소,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끝내 보기 어려운 것이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문일평 등에게도 따로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안창호 등에게도 자금을 보냈다. 1934년 동생 김연수와 함께 해동은행의 대주주였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다. ==== 일제 강점기 후반 ==== ===== 일장기 말소 사건과 교육활동 ===== 파일: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jpg|섬네일|180px|오른쪽|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 말소 사건' 파일:김성수와 장덕수.jpg|섬네일|왼쪽|150px|친구 장덕수와 함께 (193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통치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미술품과 작품의 외국 반출을 막아야 된다며 거금을 치르고서라도 미술품, 서예 작품을 매입해들였고, 전형필, 송진우, 장택상 등도 그의 견해애 동조하여 거액을 들여서라도 미술품 입찰에 가서 그림, 서화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 보고 귀국했다. 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 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 ===== 1930년대 후반 ===== 파일:Chang sihn song.PNG|섬네일|왼쪽|150px|1936년 영국 런던에서(좌측 김성수, 두 번째 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 태평양 전쟁 전후 ===== 파일:USSArizona PearlHarbor.jpg|섬네일|왼쪽|태평양 전쟁|220x220픽셀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은 모면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김선기 등이 김성수를 찾아갔더니 그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며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며 이극로의 안부를 걱정했다. 잡혀간 이극로는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의 책임자로 있던 김성수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 술 한 잔 사겠다는 이유로 김성수를 술집 청향원으로 불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는 이극로의 자백을 들려주며 추궁하였는데 김성수는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했고 일본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광복 직전 ==== 파일:Kim Seong-soo Chairman of Boseong Callege.jpg|섬네일|오른쪽|200px|보성전문학교 교장 시절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국내 각지를 순찰하던 그는 경기도 전곡(全谷)의 농장을 거쳐서 경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 친일 행적 논란 ====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통치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그러나 김성수의 성명으로 발표된 것이 자의에 의한 발표인지, 단순 명의 도용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 1993년 7월 8일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인물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김성수를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 === 해방 이후 === ==== 광복과 군정기 ==== ===== 한민당 창당 조직 =====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파일:Kim Seongsu1946.jpg|섬네일|오른쪽|150픽셀|한국민주당 간부 시절의 김성수 10월초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미 군정을 세우자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한 뒤,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 ===== 광복 직후의 정치활동 =====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반탁독립투쟁위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였다. 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6년 2월 민주의원이 창립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기금을 냈다. 46년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지명되었다. =====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위 반대 ===== 파일:Seoul-Deoksugung-10.jpg|섬네일|230px|오른쪽|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 파일:Yuncy&Kimss 19470221.jpg|섬네일|왼쪽|180픽셀|1947년 2월 21일 AP도쿄 지국장을 만난 김성수와 윤치영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1947년 1월 18일 김구,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성수는 김구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 광복 초기 정치활동 ==== =====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 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 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끝내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 장덕수 1947년 우익정당의 통합 논의에서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1947년 12월 한국독립당 김석황계열에 의한 장덕수의 암살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조소앙 등은 방북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 ===== 암살 미수와 김구와의 결별 ===== 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강점기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 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났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김규식이 일방적으로 김구가 송진우도 암살하고 김성수도 암살하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영어 못하는 점을 악용해서 보고 했으나, 김구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그는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한민당측은 김성수 암살 기도의 실패 이후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 총리 인준 부결과 야당화 =====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 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월 29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김성수는 한민당 당원으로 민족청년단의 간부 훈련을 받은 조영규(曺泳珪)를 통해 방문 연락을 제의했고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7월 29일 저녁 만찬에서 김성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각의 각료배석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 내각 책임제 ===== 인촌 김성수(1950년 무렵)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승만을 찾아 내각 책임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 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 부통령 취임 이후 ==== ===== 정치 활동 ===== 파일:3731124494 a20ba4f3 c1-2.jpg|섬네일|140px|오른쪽|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1948년 8월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농지개혁 조항인 헌법 제86조가 대규모의 농토를 갖고 있던 인촌의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의 호남 지역에 소유한 농지가 무려 3,247 정보로 최대의 지주여서 농지개혁법 제86조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 당시 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 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 ===== 제2대 부통령 ===== ====== 민국당 조직과 전란 ====== 파일:김성수 1949.JPG|섬네일|130px|왼쪽|민국당 창당 무렵의 김성수 (1949년) 김성수 초상화 1949년까지 그는 한국민주당을 이끌어 오다가 2월 10일 한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제2공화국 집권여당 민주당의 전신)을 창당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이었다. 그해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다. 8월 20일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자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였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피난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쟁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9.28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에 친 자식처럼 보살피던 이인수를 잃고 고통스러워했다. 이인수는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중앙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쳤고 고려대 교수로 유능한 교육자였는데, 6.25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밀려들어와서 강압적으로 반미 선전에 동원하여 마지못해 가담한 이력을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인촌은 이인수를 구명하려고 이승만을 찾아갔는데 얼른 재빨리 처형한 북한 앞잡이 신성모 국방 장관이 늦었다고 하여 항의를 하기도 했다. ====== 제2대 부통령 ====== 파일:Kim Seong-su and Syngman Rhee.jpg|섬네일|오른쪽|230px|부산 피난지에서 이승만과 함께(1951년) 5.10 총선을 적극 동조했는데,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의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민족이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하여 여러번 출마를 사양하였다. 5월 17일 국회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65표, 이갑성은 53표, 함태영은 17표로 과반수가 넘지 못하여 결선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김성수 78표, 이갑성 75표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갑성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공화구락부가 민국당에 합세하여 민국당의 부통령후보였던 그를 밀어준 결과였다. 5월 17일 제2대 부통령(副統領)에 취임하였다. 김성수는 처음에 부통령직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 부통령 사퇴 ====== 파일:Kim Seong-soo-South Korean Vicepresident 1951.jpg|섬네일|왼쪽|180px|부통령 재직 시절의 김성수 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를 혐오하였다. 자신을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한민당, 민국당원들에게도 자제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여 그는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내용을 준비하여 연설을 하려 하였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다. 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 8월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어 직선제로 바뀌자 대통령으로 출마했다. 이때 조봉암이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 김성수는 김창숙·이동하·신익희·장면 등 8명이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성명을 낼 때 참여하였다. 1953년초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친구인 최두선의 회갑연에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문하였다. ==== 야당 결성 운동 ==== 파일:조봉암.jpg|섬네일|왼쪽|120px|조봉암 1954년부터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년의 김성수는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중풍과 여러 질병으로 김성수는 신당 창당 활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성수는 병상에서 혁신계의 조봉암을 신당 운동에 참가시키는 민주세력의 대동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기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60명과 기타 자유당 탈당파 장면 등이 호헌동지회를 구성할 때 김성수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중앙고등학교에 김성수 동상.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하는 서상일, 박기출, 장택상과 반대하는 장면, 김준연, 김도연, 조병옥 등으로 나뉘었을 때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논쟁이 벌어졌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 사망 === 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 김성수의 데드마스크 그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초 병세에 호전을 보이던 그는 보행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었다. 치료 끝에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2월 15일 밤 11시경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 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김성수 임종 장면 (1955년 2월 18일)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던 그는 2월 18일 오전 11시경에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혼수상태에서 의사의 지시로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전 11시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라 하였다 파일:인촌 김성수 국민장.JPG|섬네일|오른쪽|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국민장 허정은 김성수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조국이 그를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꼭 있어야 할 인물인 그가 이 나라를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원망과 질책이 어린 슬픔이요 아쉬움이었다. 65세라는 원숙한 나이를 생각할 때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룩했을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133번지 자택에서 심근염(心筋炎) 등이 악화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김성수의 나이 만 65세였다. 곧 범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례위원으로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변영만,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다.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치러졌다. === 사후 === 인촌 김성수 국민장 장례식장 파일:Donga kim.JPG|섬네일|오른쪽|240px|동아일보 사옥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인촌 김성수 동상. 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소와 고려대 경내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91년 6월 29일 각계 인사 840여 명이 모여 '인촌선생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은 발간되었고,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에서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14년 귀국 직후 고향과 경성을 오가며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최두선, 안재홍 등과 교류하며 정치담론을 토론하였다. * 1917년 3월 30일~1918년 3월 중앙중학교 교장 * 1924년 양어머니 전주 이씨 사망 * 1926년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논문 필화사건으로 서무부장 김철중(金鐵中)과 함께 총독부 경무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하였다. * 1926년 6월 6.10 만세운동 직후 송진우와 함께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려다가 실패했다. * 1928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직 사퇴 *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 * 192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범태평양회의에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참여하였다. * 1929년 39세에 늑막염으로 한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 1930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모략이라 생각, 중국 영사관에 5천원의 위문금을 보냈다. 광복 후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친인선린'(親仁善隣)이라는 글자가 각자된 은패(銀牌)를 선물로 받았다. * 193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네숀의 주필이 보내온 축사를 게재하였다가 총독부에서 이것을 트집잡아 5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를 정간시켰다. * 1930년~1931년 출국, 세계 일주를 다녀왔다. * 1931년 9월 1일 중앙고등보통학교장(~1932년 5월 9일) * 1932년 3월 26일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동학교 주무이사에 취임. * 1932년 6월 4일 제10대 보성전문학교장(~1935년 5월) * 1932년 7월 대전 감옥에 수감된 여운형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 1933년 도산 안창호가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면담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김성수는 그 치료비를 부담하였다. *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신사불참배사건을 옹호하였다가 총독부 경찰에 소환되었다. * 1935년 3월 15일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초대 관장에 취임 *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기자가 손기정 일장기 말소 게재, 김성수는 두 번째 일장기 말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송진우, 장덕수 등이 총독부 기자실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정간처분을 취소시키지는 못하였다. * 1936년 일제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이사직에서 사임. * 1937년 5월 26일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1946년) *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 *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 사퇴 * 1942년 창씨개명 요구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태평양 전쟁 권고 협조가 들어왔으나 그는 병으로 거절하고 피신해 다녔다. * 1950년 7월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다. * 1952년 이화여전 이사에서 사퇴 === 평가 === 일제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평하였다. 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는 것이다. 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도 평가하였다.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 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 ·사업을 자신속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김성곤은 인촌을 본받아 자신도 금성방직,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고, 고향의 현풍학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한다. === 비판 === 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 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 *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018년 박탈 * 《인촌문집》(열락당, 1999) === 실력 양성론 === 김성수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부르짖었다.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은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는 교육, 물산 장려, 언론 육성을 제시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문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일본이나 주변국보다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길러내 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육성을 위해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사립 전문학교 설립을 여러 번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스스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데 있다. 이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산 장려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원료와 자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생산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장려하여 국가의 산업자본과 경제력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면과 마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 면직물과 마직물을 생산하는 회사 설립을 추진하여 경성직뉴를 인수한 뒤, 경성방직회사로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국산품을 애용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올바른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보의 전달과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었다. === 종교적 측면 === 임종 직전에 장면의 권고로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그는 별다른 종교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가훈을 이어 유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나 유학 이후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시적으로 전도 권고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세례명: 바오로) === 각하 명칭 삭제 === 그는 제2대 부통령 재임 중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각하 라는 호칭은 다시 부활했고, 1960년 제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각하 라는 경칭은 5.16 군사 정변 이후 다시 부활, 198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공약, 당선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할 때까지 항상 각하 라는 경칭이 계속 통용되었다. === 소탈함 === 그는 억지로 꾸밈이 없었고, 부유함을 내세워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겉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였다. 화려한 것 보다는 내실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외양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속이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 허정은 후일 회고담에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고 평하였다. === 신념 === 공선사후(公先私後) 또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주장하였다. 개인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였다. 또한 신의일관(信義一貫)도 그의 좌우명이었다. 또한 '''쓸 곳에 쓴다''', '''돈은 잃어도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좌우명도 있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다. 또한 그는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억지로 겉치레를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우, 장덕수가 연이어 암살당하면서 정계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 조건을 제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였다. 허정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사람의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다. 호남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검소하였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뒤에서 돕기를 좋아했다. 허정은 이것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과 이타심(利他心)이 없으면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도 어려운 인촌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주저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뒤에 숨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인촌은 이해로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도를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를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허정은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했다. 술이 건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던 인촌 김성수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사심이 없었는데, 허정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는 실제로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독립운동과 보성전문학교, 중앙학교, 동아일보 등에 대부분 투자했다.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 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 부통령 재임 시 '각하'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며 응대하였다. 조선 총독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철승의 징병 거부 면담을 하면서 이철승의 스승을 물어보며 "김성수 군은 물샐틈 없는 인물이지.." 하며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우익 정당 통합 운동 === 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 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 다. === 김구의 김성수 암살 기도 사건 ===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 동상 수난 사태 === 1989년 3월 부정입학과 학내 등록금 인상 문제로 본관을 점거한 1천명의 고대생들이 인촌 김성수 동상을 검은 천으로 싸서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 며칠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재단측의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1989년 4월 고려대학교 경내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에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이 올라가 하얗고 굵은 광목 끈으로 칭칭 동여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상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계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었고, 교내 운동권을 탄압하는 재단과의 물리적인 갈등의 성격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성수의 동상은 친일파라 하여 민족고대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이 쓰러뜨리려 시도했으나 재단과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선배들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때마다 재단측이 창립자의 동상을 훼손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여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89년 4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교사 내외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김성수의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졸업한 졸업생이 나타나 김성수를 변호했고, 일부 학생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상 수난 사태는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해에 고대 사상 처음으로 가 꾸려지기도 했다. 2005년 3월 9일에는 한승조 사태와 관련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한승조 교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성수의 동상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다. 유병문 총학생회장은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동상이 학교 정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립 1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대로 고대의 친일 문제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 * 할아버지: 김요협(金堯莢, 호는 낙재, 1833년~1909년, 조선 고종때 선공감 감역 역임) * 할머니: 증 정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1831년~1911년) ** 생부: 김경중(1863년~1945년 4월 27일) - 통정대부 비서원승 역임 * 외할아버지: 고제방(高濟邦) ** 생모: 장흥 고씨 ** 양부: 김기중(金祺中, 1859년~1933년) - 가선대부 동복군수 역임 ** 양모: 전주 이씨(全州李氏) *** 형: 요절 *** 형: 요절 *** 형: 요절 *** 남동생: 김연수(金秊洙, 1896년 8월 25일~1979년 12월 4일) - 삼양그룹 창업자 *** 제수: 박하진 *** 누나: 김수남(金壽男, 1885년~1915년 8월 21일) *** 매형: 정익원(鄭翼源, 1884년~?) *** 여동생: 김영수(金榮洙, 1900년 4월 9일~1984년 10월 15일) *** 매제: 김오진(金吾鎭, 1902년 7월 9일~1922년 8월 13일) *** 여동생: 김점효(金点効, 1901년 6월 1일~1995년 6월 26일) *** 매제: 김용완(金容完, 1904년 4월 9일~1996년 1월 17일), 경방 일가 ** 서모: 공주김씨 김영희(金永熙, 1875년~1963년) *** 서제: 김재수(金在洙, 1899년~1954년) **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년~1943년, 호는 춘강(春崗), 첫 부인 고광석의 친정아버지) *** 처: 고광석(高光錫, 1886년~1919년) **** 아들: 김상만(金相万, 1910년 1월 19일~1994년 1월 26일, 전 동아일보 회장·명예회장) ***** 손자: 김병관(金炳琯, 1934년 7월 24일~2008년 2월 25일, 전 동아일보 회장) *** 둘째 처남: 고광준 ** 장인: 이봉섭(李鳳涉, 본관은 용인, 둘째 부인 이아주의 친정아버지) *** 처: 이아주(李娥珠, 1899년 음력 7월 19일~1968년 9월 11일) **** 아들: 김남(金楠),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 **** 아들: 김상석(金相晳) **** 며느리: 윤성선(尹成善, 1924년 8월 11일~,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내무장관 윤치영과 정치인 이은혜의 딸 ***** 손자: 김병기(金炳基, 교육자·고려대학교 교수) **** 아들: 김상기(金相琪, 1918년 4월 14일~2011년 7월 3일) **** 아들: 김상흠(金相欽, 1919년 10월 27일~1991년 11월 2일, 국회의원) **** 딸: 김상현(金相玹, 1926년 9월~) **** 사위 이한직李漢稷(전의인,父 총독부학무국장 李軫鎬) ***** 손자: 이상교(1961년 3월~) **** 아들: 김상종(金相淙, 1929년 1월~1997년 10월, 우진토건 회장) **** 셋째 딸 **** 셋째 사위: 이병린(李秉麟), 이활(李活)의 장남 *** 사돈: 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1945년 12월 30일) *** 사돈: 이한동, 전 국무총리, 증손주며느리 이정원(李晶媛)의 친정아버지 === 기타 ===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고창의 어른''', '''전북의 어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 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 하였다. * 정욱 - 1981년(제1공화국), MBC 드라마 * 김동훈 - 1982년(그 여름의 이틀), KBS1 드라마 * 신구 - 1982년(종로부루스), 영화 * 맹호림 - 1985년(새벽), KBS1 드라마 * 허기호 - 2002년(야인시대), SBS 드라마 * 김인후 * 김요협 * 김경중 * 김기중 * 동아일보 * 동아일보사 * 물산장려운동 * 브나로드 운동 * 민립대학기성회 * 보성전문학교 * 김병로 * 송진우 * 경방 * 김연수 * 장덕수 * 백관수 * 백남훈 * 안재홍 * 원세훈 * 국민대회준비위원회 *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민주당 * 김구 * 김규식 * 여운형 * 이승만 * 실력 양성론 * 외교 독립론 * 이아주 * 장면 * 신익희 * 조봉암 * 김상만 * 김상협 * 김준연 * 김도연 * 유진오 * 이순탁 * 이활 * 조만식 * 김활란 * 정인보 * 신탁 통치 반대 운동 * 반탁국민회의 * 박순천 * 조병옥 * 안창호 * 윤보선 * 윤치영 * 윤치소 * 윤치호 * 임영신 * 장택상 * 주요한 * 함태영 * 이시영 * 김규식 * 이광수 * 정일형 * 고려대학교 * 중앙대학교 * 중앙고등보통학교 * 중앙학회 * 최두선 * 현상윤 * 흥사단 * 김용완 * 친일파 * 한국전쟁 * 한국독립당 * 제1공화국 * 마하트마 간디 * 김도연 * 이윤영 * 이범석 * 김병기 * 김대중 * 김영삼 * 박헌영 * 여운홍 * 조소앙 * 주요섭 * 한근조 * 한기악 * 한만년 *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 === 동아일보사 === * 최시중, 《인촌 김성수:겨레의 길잡이 시대의 선각자》(동아일보사, 1986) *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88) *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 신일철 외, 《평전 인촌 김성수》(신일철 외 지음, 동아일보사, 1991) * 동아일보사 편집부, 《한국의 선택(2천년대를향한)》(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91) * 김성주,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 (동아일보사, 1991) * 백남주, 高敞의 빛: 仁村金性洙先生, 芹村白寬洙先生銅像除幕 (동아, 1983) *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평전》(인촌기념회, 동아일보사, 1991) === 인촌 기념 관련 단체 === * 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 * 인촌기념회, 《인촌기념회사 1956-1991》(인촌기념회, 1992) *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 인촌을 생각한다》(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2005) === 고려대학교 및 그 외 대학 === * 인촌기념회, 《인촌기념강좌》(고려대학교, 2002) * 유진오, 양호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7) * 홍일식, 《고려대학의사람들》 1~3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6) * 이희승, 《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 한승옥, 《이광수(문학의 이해와감상31)》(한승옥, 건국대학교출판부, 2008) === 기타 === * 김성수, 《인촌선생문집》(열락당, 1999) * 김중순,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김중순, 류석춘 역, 일조각, 1998) *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생각의나무, 2002) * 황명수, 《한국기업경영의 역사적 성격》(황명수, 신양사, 1993) * 배병휴, 《한국의 기업인은 누구인가》(배병휴, 좋은이웃집, 2000) * 박태균, 《한국전쟁》(책과함께, 2005) 43~44쪽. * * 임종국,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민족문제연구소 편, 2007)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 김지하, 《흰 그늘의 길 1》(김지하 회고록) (김지하, 학고재, 2003)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 류일석, 《미답의 세계》(류일석, 시사랑음악사랑, 2008) * 정운현,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정운현, 삼인, 2008) * 주익종, 《대군의 척후: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김연수》(푸른역사, 2008) * 이현희,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연구-나남신서(나남신서)(1429)》(이현희, 나남 펴냄, 2009) * 서울신문사 사업부, 재벌가 맥(상) (서울신문사 사업부, 무한 펴냄, 2006) *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이영훈, 에디터, 2006) * 김교식, 한국의 인물:김성수 (계성출판사, 1984) *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풀빛, 1982) * 송남헌, 해방30년사 1(한국사료연구소, 1976)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카터 J. 에커트, 《제국의 후예: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 식민지 기원 1876-1945》(주익종 역, 푸른역사, 2008) * Choong Soon Kim, Sŏng-su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SUNY Press, 1998) * 인촌선생 생가 -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 * 부안 김상만 가옥 - 국가민속문화재 제150호 === 신문 기사 === * * * * * * * * * * * *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1차 득표율 1차 득표수 2차 득표율 2차 득표수 3차 득표율 3차 득표수 결과 당락 제2대 부통령 선거 부통령 2대 민주국민당 43.71% 66표 45.03% 68표 51.32% 78표 1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당선 * * * 분류:1891년 출생 분류:1955년 사망 분류:울산 김씨 분류:고창군 출신 분류: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분류:동아일보 사람 분류:일제강점기의 교육인 분류: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분류:대학 설립자 분류:일제강점기의 기업인 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 분류:대한민국의 부통령 분류:반공주의자 분류:한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호헌동지회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한국민주당 당원 분류:민주국민당 (1949년) 당원 분류:개신교를 이탈한 사람 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 분류: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 동문 분류:와세다 대학 동문 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19세기 한국 사람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심근 경색
[ "Introduction", "원인", "증상", "치료", "개의 심근경색",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심근 경색'''(心筋梗塞, , ) 또는 대중적으로 '''심장 마비'''(心臟痲痺, )는 허혈성 심질환의 하나이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하나, 이는 심근 경색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n", "심장 근육은 관상동맥이라 부르는 3가닥의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일생 동안 혈액을 전신으로 펌프질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따라서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심장 근육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n\n관상동맥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가장 안쪽 층을 내피세포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피세포가 건강한 경우에는 혈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흡연 등에 의해서 내피세포가 손상을 받게 되어 죽상경화증이 진행되고, 관상동맥 안을 흐르던 혈액 내의 혈소판이 활성화되면서 급성으로 혈전이 잘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혈전이 혈관의 70% 이상을 막아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파괴(괴사)되는 경우가 심근경색증이고, 괴사되지는 않지만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것이 협심증이다.\n\n이 같은 상황을 잘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들은 다음과 같다.\n\n# 고령\n# 흡연\n# 음주\n# 고혈압 : 혈압 ≥ 140/90mmHg 이거나 항고혈압제를 복용하고 있는 경우\n# 당뇨병\n# 가족력 : 부모형제 중 남자 55세 이하, 여자 65세 이하의 연령에서 허혈성 심질환을 앓은 경우\n# 그 외 비만, 운동부족 등\n", "환자는 대부분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대개 '가슴을 쥐어짠다', '가슴이 쎄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하며 주로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없이도 '명치가 아프다' 또는 '턱끝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흉통 없이 구역, 구토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화가 안 된다', '속이 쓰리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흉통은 호흡곤란과 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왼쪽 어깨 또는 왼쪽 팔의 안쪽으로 통증이 퍼지는(방사) 경우도 있다. 흉통은 대개 30분 이상 지속되며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혀 밑에 투여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n때에 따라서는 흉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급성으로 심근경색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n", "심근경색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태로 구별할 수 있다.\n\n#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 관동맥이 100% 막혀서 응급으로 혈관 재개통이 필요한 심근경색증\n# 비(非)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 관동맥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심근경색증\n심근경색증의 치료는 크게 막힌 혈관을 넓히는 관혈적 치료와 이후 약물치료로 나뉜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넓히는 시술 또는 약물이 요구된다. 비 ST절 상승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 쇼크가 동반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약물 치료 후 안정화된 상태에서 시술할 수도 있다.\n\n최근에는 여러 대형 병원에서 응급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 혈전용해술을 시행하여 경과 및 예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은 노동맥 또는 넙다리동맥을 통하여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여 막힌 혈관을 찾아낸 후, 혈관 안으로 도관을 삽입하여 풍선으로 넓히고 스텐트라는 철망을 삽입하여 혈관을 수리하는 시술이다.심근경색증에 의한 합병증이 없다면 대부분 병원에서 1주일 이내에 퇴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술 직후 흔히 재관류에 의해 심장 근육에 2단계 충격이 오기 때문에 시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경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을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다혈관 질환일 경우에는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n\n심근경색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향후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실의 변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스텐트를 삽입한 경우에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겨서 혈관이 다시 막히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약물 치료 목적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스텐트 혈전증의 치사율이 5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혈전 억제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포함하여 심장 보호 효과가 부가적으로 있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며, 고지혈증 약물 그리고 당뇨가 있는 경우에는 경구 혈당 강하제, 인슐린을 처방받게 된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혈관 확장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n\n아직까지는 심근경색증 치료 중에 죽은 심장 근육을 획기적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의 연구팀들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 근육을 재생시키는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현재도 대규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개선된 프로토콜로 임상시험에 환자를 등록하고 있어서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에서 시행하는 매직셀(MAGIC-CELL)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골수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이토카인을 이용해서 골수 줄기세포를 말초혈액으로 동원한 후 이를 말초혈액에서 쉽게 채취하는 방법으로서, 환자 부담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심기능 호전 효과가 뚜렷하여, 2004년도 Lancet, 2005년도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2006년도 Circulation, 2007년도 American Heart Journal, 2008년도 Heart와 같이 심혈관계의 세계 최고 권위지에 매직셀 프로그램의 장기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n점점 그 추이가 늘고있다.\n", "개도 물론 심근경색에 걸릴 수도 있다. 강아지 심근 경색의 원인은 가족력, 면역력, 스트레스, 과로, 운동 후유증, 지속되는 분리불안증 등이다.\n", "* 심정지\n* 심장학\n* 심장대사(cardio metabolism)\n* 대사 증후군(메터볼릭 증후군)\n* 인슐린 저항성(IR)\n", "\n", "* \n* \n\n\n\n\n분류:사인별 죽음\n분류:심장혈관 질환\n분류:급성 통증" ]
'''심근 경색'''(心筋梗塞, , ) 또는 대중적으로 '''심장 마비'''(心臟痲痺, )는 허혈성 심질환의 하나이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하나, 이는 심근 경색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심장 근육은 관상동맥이라 부르는 3가닥의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일생 동안 혈액을 전신으로 펌프질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따라서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심장 근육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상동맥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가장 안쪽 층을 내피세포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피세포가 건강한 경우에는 혈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흡연 등에 의해서 내피세포가 손상을 받게 되어 죽상경화증이 진행되고, 관상동맥 안을 흐르던 혈액 내의 혈소판이 활성화되면서 급성으로 혈전이 잘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혈전이 혈관의 70% 이상을 막아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파괴(괴사)되는 경우가 심근경색증이고, 괴사되지는 않지만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것이 협심증이다. 이 같은 상황을 잘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들은 다음과 같다. # 고령 # 흡연 # 음주 # 고혈압 : 혈압 ≥ 140/90mmHg 이거나 항고혈압제를 복용하고 있는 경우 # 당뇨병 # 가족력 : 부모형제 중 남자 55세 이하, 여자 65세 이하의 연령에서 허혈성 심질환을 앓은 경우 # 그 외 비만, 운동부족 등 환자는 대부분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대개 '가슴을 쥐어짠다', '가슴이 쎄한 느낌이 든다'고 호소하며 주로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없이도 '명치가 아프다' 또는 '턱끝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흉통 없이 구역, 구토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화가 안 된다', '속이 쓰리다'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흉통은 호흡곤란과 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왼쪽 어깨 또는 왼쪽 팔의 안쪽으로 통증이 퍼지는(방사) 경우도 있다. 흉통은 대개 30분 이상 지속되며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혀 밑에 투여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흉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급성으로 심근경색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심근경색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태로 구별할 수 있다. #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 관동맥이 100% 막혀서 응급으로 혈관 재개통이 필요한 심근경색증 # 비(非)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 관동맥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심근경색증 심근경색증의 치료는 크게 막힌 혈관을 넓히는 관혈적 치료와 이후 약물치료로 나뉜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넓히는 시술 또는 약물이 요구된다. 비 ST절 상승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 쇼크가 동반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약물 치료 후 안정화된 상태에서 시술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대형 병원에서 응급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 혈전용해술을 시행하여 경과 및 예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은 노동맥 또는 넙다리동맥을 통하여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여 막힌 혈관을 찾아낸 후, 혈관 안으로 도관을 삽입하여 풍선으로 넓히고 스텐트라는 철망을 삽입하여 혈관을 수리하는 시술이다.심근경색증에 의한 합병증이 없다면 대부분 병원에서 1주일 이내에 퇴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술 직후 흔히 재관류에 의해 심장 근육에 2단계 충격이 오기 때문에 시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경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을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다혈관 질환일 경우에는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향후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실의 변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스텐트를 삽입한 경우에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겨서 혈관이 다시 막히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약물 치료 목적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스텐트 혈전증의 치사율이 5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혈전 억제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포함하여 심장 보호 효과가 부가적으로 있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며, 고지혈증 약물 그리고 당뇨가 있는 경우에는 경구 혈당 강하제, 인슐린을 처방받게 된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혈관 확장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심근경색증 치료 중에 죽은 심장 근육을 획기적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의 연구팀들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 근육을 재생시키는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현재도 대규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개선된 프로토콜로 임상시험에 환자를 등록하고 있어서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에서 시행하는 매직셀(MAGIC-CELL)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골수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이토카인을 이용해서 골수 줄기세포를 말초혈액으로 동원한 후 이를 말초혈액에서 쉽게 채취하는 방법으로서, 환자 부담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심기능 호전 효과가 뚜렷하여, 2004년도 Lancet, 2005년도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2006년도 Circulation, 2007년도 American Heart Journal, 2008년도 Heart와 같이 심혈관계의 세계 최고 권위지에 매직셀 프로그램의 장기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점점 그 추이가 늘고있다. 개도 물론 심근경색에 걸릴 수도 있다. 강아지 심근 경색의 원인은 가족력, 면역력, 스트레스, 과로, 운동 후유증, 지속되는 분리불안증 등이다. * 심정지 * 심장학 * 심장대사(cardio metabolism) * 대사 증후군(메터볼릭 증후군) * 인슐린 저항성(IR) * * 분류:사인별 죽음 분류:심장혈관 질환 분류:급성 통증
대구광역시
[ "Introduction", "상징", "역사", "지리", "행정 구역", "행정", "인구", "교육", "문화", "교통", "경제", "산업", "생활", "기업", "스포츠", "군사 기지", "역대 시장", "출신 인물", "교류",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n'''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는 대한민국의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청송군, 서쪽으로 구미시,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북쪽으로 의성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한다.\n\n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 소재지로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였다. 2023년 7월 1일에 군위군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n", "=== 시조 ===\n* 독수리 : 대구의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자적 시민정신을 나타낸다.\n\n=== 시목 ===\n* 전나무 : 많은 나무들 가운데 전나무는 대구 시민의 강직성과 영원성, 그리고 곧게 뻗어가는 기상을 상징하는 나무이다.\n\n=== 시화 ===\n* 목련 : 목련은 귀족적이며 순결하며 희생정신의 시민기질을 나타낸다.\n\n=== 로고 ===\n\n파일:Symbol of Daegu.svg|대구광역시 로고\n파일:Daegu character.jpg|대구광역시 캐릭터\n\n\n대구광역시의 로고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친환경적인 도시를 표현한다.\n\n=== 브랜드 슬로건 ===\n자유와 활력이 넘치는 파워풀 대구\n", "=== 선사시대 ===\n*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에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 석기가 포함된 유적의 발굴로 미루어 대략 2만~1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n* 대구의 옛 이름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 이름인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며, 이 가운데 물론 달구벌과 대구(大丘)가 가장 유명하다.\n* 달구벌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신라의 계림사상에서 기원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하였다는 연구자료가 있다. 그래서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n* 선사시대 달구화(達句火), '''달구벌'''(達句伐), 달불(達弗), 달성(達城)으로 성읍이 형성되었다.\n* 청동기시대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n\n=== 신라 ===\n*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n* 261년(신라 첨해이사금 15년) 달벌성이 축조되었다. (244년 축성 시작)\n* 5세기말 - 6세기초 달구벌을 '''달구화현'''(達句火縣, 達弗城)이라 칭하였다.\n* 689년(신라 신문왕 9년)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n*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위화군(喟火郡)을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達句伐)이라 칭하던 것을 '''대구현'''으로 개칭하였다. 양주 관하에 두었다.\n*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사이의 공산 전투가 현재의 팔공산 일대에서 있었다. \n\n=== 고려 ===\n* 940년(고려 태조 23년) 수창군을 수성군으로 개칭하였다.\n* 1018년(고려 현종 9년) 수성군·장산군·해안현(解顔縣)과 대구현·화원현(花園縣)·팔리현(八里縣)·하빈현(河濱縣)으로 행정 계통이 양분되었다. 대구현 등은 성주군 관하에 두었다.\n* 1143년(고려 인종 21년) 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하여 하빈현, 화원현을 영속하였다.\n* 1203년(고려 신종 6년) 무신정권기에 부인사 승려의 반무신란이 있었다.\n* 1232년(고려 고종 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팔공산 부인사의 대장경을 소실하였다.\n* 1255년(고려 고종 42년) 공산성에서 항몽 투쟁하였다.\n\n=== 조선 ===\n\n\n조선 시대에는 대구도호부의 영역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서구, 동구(안심동 제외), 북구(옛 칠곡동 지역 제외), 수성구(고산동 제외), 달서구, 달성군(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제외),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n* 1394년(조선 태조 3년) 대구현이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을 영속하였다.\n* 1419년(조선 세종 원년) 5월 대구현·수성현·해안현·하빈현 이상 4개 현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n* 1466년(조선 세조 12년) 대구군을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다.\n* 1590년(조선 선조 23년) 대구읍성이 토성으로 축성되었다.\n*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중 대구읍성은 파괴되었다.\n* 1601년(조선 선조 34년) 경상도 감영을 대구부로 이전, 설치하였다. 화원현·경산현·하양현을 편입하였다.\n* 1607년(조선 선조 40년) 경산현·하양현은 대구도호부 관할에서 분리되었다.\n* 1684년(조선 숙종 10년) 풍각현의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이 대구도호부에 편입되었다.\n* 1658년(조선 효종 9년) 약령시가 경상감영 안의 객사 주변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하였다.\n* 1736년(조선 영조 12년) 대구읍성이 석성으로 4월에 축조에 들어가 이듬해 6월 완공하고, 11월 선화당에서 준공식을 가졌다.\n* 1750년(조선 영조 26년) 유생 이양채가 '구(丘)'자가 대성 공자의 휘자에 저촉되므로 피해야 한다(피휘)며,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개칭할 것을 상소하였다.\n** 정조·헌종 때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로 혼용하다가 철종 이후에는 대구('''大邱''')만 사용하였다.\n* 1895년 6월 23일(조선 고종 32년 음력 윤5월 1일) 8도(道)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대구도호부'''가''' '''대구부''' 대구군으로 강등되었다.\n*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13도제가 실시되어, 경상북도 '''대구군'''이 되었다.\n\n=== 대한제국 ===\n* 1899년(광무 3년) (광무 3년) 7월 대구 최초 근대 중등교육기관 달성학교(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승, 1950년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로 분리, 1970년 경북중학교 폐교, 현 경운중학교 계승)가 설립되었다.\n* 1902년(광무 6년) 애덤스 선교사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가 여성교육기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n* 1905년(광무 9년) 달성공원이 조성되었다.\n* 1906년(광무 10년) 9월 24일 대구군 소속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은 청도군으로 이속하였다.\n* 1906년(광무 10년) 10월 대구읍성 성벽이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에 의해 황제의 윤허없이 철거되었다. 또한, 경상감영의 선화당 정남쪽에 위치했던 포정문(布政門)의 문루인 관풍루를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옮겼다.\n* 1906년(광무 10년) 일제 통감부 이사청이 설치되었다.\n* 1907년(광무 11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n* 1907년(광무 11년) 대구 첫 영화관 금좌(錦座)가 현재 태평로2가에 문을 열어 12년 동안 번창하였다.\n* 1907년(광무 11년) 애덤스 선교사의 부인 부르엔(Marda Bruen)에 의해 여자중등학교로 신명여학교가 문을 열였다.\n* 1908년(융희 2년) 경상감영의 객사와 주요 건물이 파괴되었고, 약령시를 현재 남성로로 이전하였다.\n* 1909년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은 이른바 십자도로(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n=== 일제강점기 ===\n대구부 휘장\n일제강점기에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불렀다.\n*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n* 1910년 10월 1일 대구군을 '''대구부'''로 개칭하였다.\n* 1911년 11월 14일 일본 제국은 동상면과 서상면을 통합해 대구면을 설치하였다.\n* 1913년 대구역이 건립되었다. 322호에 전기가 들어왔다.\n* 1914년 4월 1일 대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대구면만 '''대구부'''로 남기고, 대구면을 제외한 대구부의 나머지 면과 현풍군이 달성군으로 개편되었다.\n* 1915년 1월 15일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 인사들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다.\n* 1917년 4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과 봉덕동의 각일부를 대구부에 편입해 대봉정을 신설하였다.\n* 1919년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n* 1920년 7월 1일 시내버스가 운행되었다. 대구역을 기점으로 시내 각 방향으로 물론이고 팔달교 및 동촌까지 운행하였다.\n* 1923년 서문시장이 현재의 자리로 이동하였다.\n* 1923년 대구자혜의원은 경북도립 대구의원이 되었다. 이것이 경북대병원의 전신이다.\n*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었다.\n* 1932년 대구 최초의 백화점 이비시야 백화점이 등장하였다. 현재의 동성로 성내1동 LG패션자리이다.\n* 1938년 10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달서면 일부(감삼동 제외), 성북면 일부(동변동·서변동·연경동 제외)을 대구부에 편입하였다.\n* 1938년 11월 2일 옛 수성면, 옛 달서면, 옛 성북면 지역에 대구부 동부출장소·서부출장소·북부출장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3출장소)\n* 1941년 대구 약령시가 폐쇄되었다.\n* 1942년 대구공립상업고등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n\n=== 미군정기 ===\n* 1945년 9월 29일 대구역에서 열차끼리 충돌하여 73명이 사망하고 120여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났다.\n*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났다.\n* 1947년 4월 1일 일본식 동명이 한국식 동명으로 개정되었다.\n\n:\n\n\n 동의명칭변경에관한규정\n\n\n\n 구 행정구역 (법정동) \n\n 신 행정구역\n\n\n\n 대구부 명치정1·2정목, 본정1·2정목, 서성정1·2정목, 경정1·2정목, 원정1·2정목, 금정1·2정목, 동성정1~3정목 \n\n 대구부 계산동1·2가, 서문로1·2가, 서성로1·2가·종로1·2가·북성로1·2가·태평로2·3가·동성로1~3가\n\n\n\n 대구부 팔운정, 수정(壽), 시장정, 북내정, 횡정, 시장북통, 서내정, 남성정, 수정(竪), 달성정, 팔중원정, 덕산정, 대화정, 동천대전정, 서천대전정, 동운정, 행정, 궁정, 삼립정, 남용강정, 북용강정, 남정, 동본정, 남욱정, 북욱정, 전정(田), 전정(前), 영정, 봉산정, 촌상정, 칠성정, 상정, 동문정, 상서정, 하서정, 신정, 남산정, 대봉정 \n\n 대구부 수창동, 수동, 동산동, 북내동, 서야동, 시장북로, 서내동, 남성로, 인교동, 달성동, 도원동, 덕산동, 대안동, 동일동, 장관동, 동인동, 태평로1가, 사일동, 삼덕동, 공평동, 완전동, 남일동, 교동, 문화동, 상덕동, 화전동, 전동, 용덕동, 봉산동, 향촌동, 칠성동, 포정동, 동문동, 상서동, 하서동, 대신동, 남산동, 대봉동\n\n\n\n\n=== 대한민국 ===\n미국의 대한군사원조(AFAK)를 통한 자재 원조로 지어진 대구시청사 감사식(1955년)\n* 1949년 8월 15일 대구부에서 '''대구시'''로 개칭하였다.\n* 1950년 7월 16일 6.25전쟁으로 인해 8월 17일까지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본부 주한 미8군 사령부가 이전 설치되었다.\n* 1951년 6월 9일 대구시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4출장소)\n* 1952년 1월 16일 동인동, 삼덕동, 칠성동이 분동하였다. (87법정동)\n* 1953년 4월 1일 대구시 중부출장소·종로출장소를 설치하였다. (6출장소)\n* 1958년 1월 1일 달성군 동촌면, 월배면, 성서면, 가창면, 공산면을 편입하였다. 동촌출장소 등을 설치하였다.\n*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는 4.19의거로 연결되었다.\n* 1963년 1월 1일 대구시 공산출장소(서변동·동변동 제외)가 달성군 공산면으로, 가창출장소(파동 제외)가 가창면으로, 성서출장소가 성서면으로, 월배출장소가 월배면으로 환원되었다.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부출장소 등이 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로 승격하였다.\n※ 이후의 행정구역 변경에 대한 내용은 각 구별 문서로 대신한다.\n* 1965년 2월 1일 동 행정구역 개편으로 행정동의 수가 89개로 줄었다. (5구 89행정동 106법정동)\n* 1976년 8월 1일 동구 동촌출장소가 대구시 동촌출장소로 승격하였다.\n* 1980년 4월 1일 수성구가 동구에서 분리·신설되었고, 동촌출장소를 폐지하였다. (6구)\n* 1981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및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 일원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가 설치되었다.\n* 1983년 11월 15일 어린이회관을 개관하였다.\n* 1984년 6월 27일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n* 1984년 7월 중순 대구 인구 200만명 돌파\n* 1988년 1월 1일 서구 및 남구의 일부를 관할로 달서구가 설치되었다. (7구)\n* 1991년 3월 26일 성서 초등학생 5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n* 1991년 7월 8일 지방자치제도의 부활로 대구직할시의회가 개원하였다.\n* 대구광역시 의회1991년 12월 7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기공\n* 1992년 11월 27일 동화사 남북통일발원 약사여래 석조대불이 완공되었다.\n* 1995년 1월 1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대구광역시'''로 개칭하였다.\n*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였다. 시역은 885.6 km2로 확장되었다. (7구 1군)\n*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 101명이 사망하였다.\n* 1996년 9월 1일 달성군 논공면이 논공읍으로 승격\n* 1996년 12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기공\n* 1996년 12월 대구 인구 250만명 돌파\n* 1997년 11월 1일 달성군 다사면이 다사읍으로 승격\n* 1997년 11월 26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진천~중앙로) 개통 - 대구의 지하철 시대 개막\n* 1998년 5월 2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중앙로~안심)이 완전 개통되었다.\n* 2002년 5월 10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진천)이 연장 개통되었다.\n* 2002년 6월 10일 한일월드컵 미국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n* 2002년 6월 29일 한일월드컵 터키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 (한일월드컵 3, 4위 전)\n*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발생으로 192명의 사망자와 14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n* 2003년 8월 21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개막하여, 8월 31일 폐막하였다.\n* 2005년 10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문양~사월)이 개통되었다.\n* 2008년 4월 25일 동구 등 6개 지구의 대구광역시, 구미시 등 5개 지구의 경상북도에 경제자유구역을 지정받았다.\n* 2009년 7월 24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기공\n* 2011년 8월 27일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개막하여, 9월 4일 폐막하였다. 이는 1991년 일본 도쿄, 2007년 일본 오사카에 이어 아시아 국가로서는 2번째로 개최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일본, 독일에 이어 FIFA 월드컵, 하계 올림픽,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국제 스포츠 3대 이벤트를 모두 개최하는 7번째 국가가 됨으로써 세계적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n220x220px\n* 2012년 9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이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영남대학교까지의 연장구간이 개통하였다. (사월 ~ 영남대)\n* 2012년 10월 11일부터 10월 17일까지 제93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n* 2012년 11월 6일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이 종료되었다.\n* 2013년 10월 13일 ~ 10월 17일 세계에너지총회가 열렸다.\n* 2015년 4월 12일 ~ 4월 17일 제7차 세계 물 포럼이 열렸다.\n* 2015년 4월 23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칠곡경대병원~용지)이 개통되었다.\n* 2016년 9월 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설화명곡)이 연장 개통되었다.\n* 2018년 3월 1일 : 유가면이 유가읍으로 승격\n* 2018년 11월 1일 달성군 옥포면, 현풍면이 옥포읍, 현풍읍으로 승격\n* 2023년 7월 1일 군위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였다. (7구 2군)\n", "대구광역시는 한반도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구는 영남 지방 내륙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의성군, 칠곡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계를 접한다.\n\n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n\n\n\n=== 지형 ===\n없음\n\n대구는 높고 규모가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북쪽에는 팔공산(1,193m)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비슬산(1,084m)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금호강과 합쳐진다. 대구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n\n=== 기후 ===\n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이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이다. 1942년에 기록한 40도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에 속한다. 이러한 여름 기온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언론, 방송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대구의 기후는 온대 하우 기후(Cwa)를 띄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n\n\n=== 지질 ===\n\n", "\n파일:대구시청 본관 전경.jpg|대체글=대구광역시청 본관 전경|섬네일|383x383px|대구광역시청 동인청사\n대구광역시의 행정구역\n대구광역시는 7개 구와 2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2022년 12월 31일 주민등록 인구는 1,070,873세대 2,417,055명이다.\n\n\n\n\n 자치구·군 \n\n 한자 \n\n 세대 \n\n 인구 (명) \n\n 면적 (km2)\n\n\n\n '''중구''' \n\n 中區 \n\n 40,749 \n\n 80,965 \n\n 7.06\n\n\n\n '''동구''' \n\n 東區 \n\n 159,422 \n\n 341,326 \n\n 182.15\n\n\n\n '''서구''' \n\n 西區 \n\n 81,116 \n\n 159,827 \n\n 17.32\n\n\n\n '''남구''' \n\n 南區 \n\n 76,401 \n\n 141,519 \n\n 17.43\n\n\n\n '''북구''' \n\n 北區 \n\n 192,697 \n\n 436,173 \n\n 93.99\n\n\n\n '''수성구''' \n\n 壽城區 \n\n 171,480 \n\n 413,180 \n\n 76.53\n\n\n\n '''달서구''' \n\n 達西區 \n\n 235,883 \n\n 547,387 \n\n 62.37\n\n\n\n '''달성군''' \n\n 達城郡 \n\n 113,125 \n\n 268,788 \n\n 428.36\n\n\n\n '''군위군''' \n\n 軍威郡 \n\n 13,693\n\n 23,796 \n\n 614.31\n\n\n\n '''대구광역시''' \n\n 大邱廣域市 \n\n 1,084,566 \n\n 2,412,961 \n\n 1,499.52\n\n\n\n 2023년 기준\n\n\n\n=== 경북권 ===\n\n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1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구미시, 영천시, 경산시, 의성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의 창녕군이 경북권으로 규정되어 있다.\n\n=== 주거 지구 ===\n범물지구\n택지개발사업은 대구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공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주택 시민에게 양질의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도로·수도·전기·통신·도시가스·난방 등 생활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고, 공원·학교·녹지·운동장 등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n\n\n\n\n대구도시공사 시행\n\n대한주택공사 시행\n\n한국토지공사 시행\n\n한국토지주택공사 시행\n\n\n\n지산지구 (1992년)범물지구 (1993년)상인지구 (1994년)노변지구 (1995년)시지지구 (1997년)용산지구 (1998년)장기지구 (1999년)동서변지구 (2002년)죽곡1지구 (2007년)죽곡2지구 (2010년)등촌지구 (2014년)각산지구 (2015년)\n\n불로지구 (1986년)송현지구 (1987년)월배지구 (1987년)안심1지구 (1987년)천내1지구 (1988년)천내2지구 (1990년)월성지구 (1992년)칠곡1지구 (1993년)칠곡2지구 (1994년)안심2지구 (1994년)\n\n성서지구 (1997년)대곡지구 (1997년)칠곡3지구 (2000년)명곡1지구 (2001년)동호지구 (2002년)명곡2지구 (2002년)본리지구 (2004년)칠곡4지구 (2005년)율하1지구 (2008년)매천지구 (2008년)\n\n율하2지구 (2009년)''''금호지구신서지구''''옥포지구 (2016년)''''연경지구 (2018년)\n\n\n", "\n대구광역시의 일반행정은 대구광역시청이, 유·초·중등교육행정은 대구광역시교육청이 담당한다.\n\n시청은 동인청사와 산격청사로 나눠져 있는데, 동인청사의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 1가이고, 산격청사는 산격동의 옛 경상북도청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n\n=== 두드리소 ===\n두드리소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감이 느껴지면서, 민원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대구광역시의 민원 서비스이다. 두드리소( (http://dudeuriso.daegu.go.kr ) 인터넷, 모바일, 콜센터, SNS로 신청한 모든 민원과 제안의 처리과정을 신청방법과 상관없이 한 곳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n없음\n=== 120달구벌콜센터 ===\n120달구벌콜센터는 대구시에 관한 민원이나 궁금한 사항을 상담해주는 콜센터이다. 전화, 문자상담, 온라인상담, 예약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외국어상담(영어, 중국어, 일본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외국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n없음\n\n=== 로봇 ===\n‘스마트시티 아시태평양 어워드 2018’에서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 된 뚜봇은 자가학습을 통해 자동 답변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공지능 자동상담시스템이다. 24시간 여권, 차량등록, 지역축제, 시정 등 다양한 분야의 민원을 채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n없음\n=== 미래비전 2030 ===\n\n\n\n+\n대구광역시 미래비전 2030\n\n비전\n\nWorld Smart Leader, DAEGU\n\n\n\n목표\n\nAgain! 대한민국 대도약의 심장\n첨단기술과 휴머니즘의 도시\n\n글로벌 Top 30 도시\n\n\n\n추진방향\n\n글로벌 미래산업 허브\n\n월드클래스 대도시권의 중심\n\n시민이 행복한 도시 공동체\n\n\n\n핵심사업\n\n\n* 제조업 스마트 혁신\n* 5+α 신산업 연구·생산기지\n* 4차 산업혁명 생태계 조성\n\n\n* 글로벌 게이트웨이\n* 1,000만 대구대도시권 구축\n* 대도시권 중심도시 역량 강화\n\n\n* 대구 케어 프로젝트\n* 스마트 & 세이프 시티\n* 시민 학습문화도시\n\n\n", "대구광역시의 연도별 인구 추이\n\n\n\n\n\n\n연도\n\n총인구\n\n인구그래프\n\n비고\n\n\n\n1925년\n\n\n\n\n\n\n\n\n1930년\n\n\n\n\n\n\n\n\n1935년\n\n\n\n\n\n\n\n\n1940년\n\n\n\n\n 1938년 달성군 수성면·달서면·성북면이 대구부로 편입\n\n\n\n1944년\n\n\n\n\n\n\n\n\n1949년\n\n\n\n\n\n\n\n\n1955년\n\n\n\n\n\n\n\n\n1960년\n\n\n\n\n 1958년 달성군 동촌면·성서면·월배면·가창면·공산면이 대구시로 편입\n\n\n\n1966년\n\n\n\n\n 1963년 옛 달성군 성서면·월배면·가창면·공산면에 해당하는 법정동이 달성군으로 환원 (가창면 파동 제외)\n\n\n\n1970년\n\n\n\n\n\n\n\n\n1975년\n\n\n\n\n\n\n\n\n1980년\n\n\n\n\n1981년 대구직할시로 승격\n\n\n\n1985년\n\n\n\n\n 1981년 7월 1일 달성군 성서읍·월배읍·공산면, 경산군 안심읍·고산면, 칠곡군 칠곡읍이 대구직할시로 편입\n\n\n\n1990년\n\n\n\n\n\n\n\n\n1991년\n\n\n\n\n 1990년까지는 상주인구조사 결과, 1991년 이후는 주민등록인구통계(외국인 포함)\n\n\n\n1992년\n\n\n\n\n\n\n\n\n1993년\n\n\n\n\n\n\n\n\n1994년\n\n\n\n\n\n\n\n\n1995년\n\n\n\n\n 경상북도 달성군 편입\n\n\n\n1996년\n\n\n\n\n\n\n\n\n1998년\n\n\n\n\n\n\n\n\n1999년\n\n\n\n\n\n\n\n\n2000년\n\n\n\n\n\n\n\n\n2001년\n\n\n\n\n\n\n\n\n2002년\n\n\n\n\n\n\n\n\n2003년\n\n\n\n\n\n\n\n\n2004년\n\n\n\n\n\n\n\n\n2005년\n\n\n\n\n\n\n\n\n2006년\n\n\n\n\n\n\n\n\n2007년\n\n\n\n\n\n\n\n\n2008년\n\n\n\n\n\n\n\n\n2009년\n\n\n\n\n\n\n\n\n2010년\n\n\n\n\n\n\n\n\n2011년\n\n\n\n\n\n\n\n\n2012년\n\n\n\n\n\n\n\n\n2013년\n\n\n\n\n\n\n\n\n2014년\n\n\n\n\n\n\n\n\n2015년\n\n\n\n\n\n\n\n\n2016년\n\n\n\n\n\n\n\n\n2017년\n\n\n\n\n\n\n\n\n2018년\n\n\n\n\n\n\n\n\n2019년\n\n\n\n\n\n\n\n\n2020년\n\n\n\n\n\n\n\n\n2021년\n\n\n\n\n\n\n\n", "* 대학교(국공립, 사립)\n** 경북대학교 - 북구, 중구, 군위군\n** 계명대학교 - 달서구, 남구\n** 대구교육대학교 - 남구\n**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 달성군\n* 전문대학(국공립, 사립)\n** 계명문화대학교 - 달서구\n** 대구공업대학교 - 달서구\n** 대구과학대학교 - 북구\n** 대구보건대학교 - 북구\n** 수성대학교- 수성구\n** 영남이공대학교 - 남구\n** 영진전문대학교 - 북구\n** 한국폴리텍Ⅵ대학 대구캠퍼스 - 서구\n** 한국폴리텍대학 섬유패션캠퍼스 - 동구\n* 직업훈련기관\n** 한국폴리텍Ⅵ대학 남대구캠퍼스 - 달성군\n* 고등학교\n\n\n* 대구국제학교\n* 교육청\n** 대구광역시교육청\n*** 남부교육지원청\n*** 달성교육지원청\n*** 동부교육지원청\n*** 서부교육지원청\n*** 군위교육지원청\n\n\n\n\n\n\n 대구광역시 교육기관 (2022년)\n\n\n\n학교별\n\n 계 \n\n 대학교 \n\n 전문대학 \n\n 고등학교\n\n중학교\n\n 초등학교\n\n유치원\n\n 특수학교\n\n기타\n\n\n\n학교수\n\n805 \n\n 4 \n\n 8 \n\n 94\n\n125\n\n 233\n\n327\n\n 11\n\n3\n\n\n\n학생수\n\n383,550 \n\n 60,657 \n\n 46,077 \n\n 58,653\n\n61,847\n\n 121,515\n\n32,850\n\n 1,829\n\n122\n\n\n\n교원수\n\n 27,843 \n\n 2,188 \n\n 950 \n\n 6,436\n\n5,435\n\n 9,097\n\n2,942\n\n 708\n\n87\n\n\n\n 자료 : 2023 시정현황\n\n\n", "2020년 4월, 한국관광공사는 야간관광 100선으로 대구의 ‘아양기찻길’, ‘앞산공원’, ‘수성못’, ‘서문시장 야시장’을 선정하였다. 대구시는 대한민국 관광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선정된 5개 장소를 비롯하여 숨겨진 야간 관광 자원들을 적극 발굴해 육성하기로 했다.\n\n=== 축제 ===\n대구광역시 대표 축제에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오페라축제, 치맥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n파일:대구광역시 컬러풀페스티벌.jpg|alt=컬러풀대구페스티벌|컬러풀대구페스티벌\n파일:치맥페스티벌.jpg|alt=대구치맥페스티벌|대구치맥페스티벌\n파일:대구광역시 제11회 뮤지컬페스티벌(투란도트 공연장면).jpg|alt=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n파일:제15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jpg|alt=대구국제오페라축제|대구국제오페라축제\n\n\n* 대구광역시의 축제 목록\n\n=== 문화재 ===\n\n\n\n+ 대구광역시 문화재 현황(2018) \n\n종별\n\n총계\n\n국가지정문화재\n\n시지정문화재\n\n\n\n\n\n\n\n소계\n\n국보\n\n보물\n\n사적\n\n천연기념물\n\n국가민속문화재\n\n국가무형문화재\n\n소계\n\n유형문화재\n\n무형문화재\n\n기념물\n\n민속분화재\n\n등록문화재\n\n문화재자료\n\n\n\n계\n\n265\n\n87\n\n3\n\n66\n\n9\n\n2\n\n5\n\n2\n\n114\n\n76\n\n17\n\n17\n\n4\n\n11\n\n53\n\n\n\n*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n* 대구광역시의 무형문화재\n* 대구광역시의 기념물\n* 대구광역시의 민속문화재\n*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n\n=== 관광코스 ===\n대구광역시의 테마별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팔공산 힐링 코스'이 4가지 권역별 관광코스가 있다.\n\n*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서문시장 → 삼성상회 옛터(이병철 고택) → 대구 근대골목 → 약령시 → 동성로 →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방천시장\n*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 앞산 전망대 케이블카 → 수성못 → 들안길 → 스파밸리 → 힐크레스트 → 대구 미술관 → 대구 스타디움 → 녹동서원/달성한일우호관\n*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 디아크/강정보고령보 → 낙동강 자전거길 → 대구수목원 → 마비정 벽화마을 → 비슬산 암괴류 → 국립 대구과학관 → 도동서원\n* 팔공산 힐링 코스 : 갓바위 - 동화사 - 대구방짜유기 박물관 - 팔공산 벚꽃길 - 대구시민 안전테마파크\n\n=== 시티투어 ===\n\n대구시의 관광자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00년 12월 2일 시작된 시티투어는 각종 문화유적, 관광지, 시정현장 등을 순회하며 대구의 문화와 역사, 관광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체험 프로그램이다.\n\n==== 순환코스 ====\n* 동대구역 →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구암 팜스테이 → 갓바위 → 방짜유기박물관 → 동화사 → 팔공산동화집단시설기구 →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 팔공산온천관광호텔\n\n==== 정기코스 ====\n* 1코스(팔공산권) :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동화사 → 방짜유기박물관 → 신숭겸 장군 유적지\n* 2코스(비슬산권) : 현풍곽씨12정려각 → 도동서원 → 비슬산자연휴양림 →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 → 현풍 석빙고\n* 3코스(화원권) : 월곡역사박물관 → 대구수목원 → 화원동산 → 남평문씨리세거지 → 용연사\n* 4코스(시지·가창권) : 녹동서원 → 힐크레스트(구 허브힐즈) → 대구스타디움 → 대구 스포츠기념관 → 둔산동경주 최씨종가\n* 5코스(다사권) : 환경시설공단 →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 계명한학촌 → 매곡정수장 → 육선사\n* 6코스(도심권) : 약령시한의약문화권 → 달성공원 → 대구향교 → 국립대구박물관 → 구암서원\n\n=== 공원 ===\n두류공원\n\n\n\n공원명\n\n위치\n\n주요시설\n\n\n\n달성공원\n\n중구 달성동\n\nㆍ달구벌 토성, 향토역사관, 동물원, 관풍루, 최재우동상\nㆍ달성서씨, 유허비, 어린이 헌장비 등\n\n\n\n경상감영공원\n\n중구 포정동\n\nㆍ조선조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nㆍ선화당, 징청각, 통일종각\n\n\n\n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n\n중구 동인동\n\nㆍ달구벌대종, 도서관, 영상시설, 화합의 광장, 명언의 오솔길\nㆍ국채보상운동기념관\n\n\n\n2·28기념 중앙공원\n\n중구 동인동\n\nㆍ중앙분수, 실개천, 청소년광장\n\n\n\n앞산공원\n\n남구 대명동\n\nㆍ낙동강 승전기념관, 충혼탑, 안일사, 은적사\nㆍ케이블카, 승마장, 심신수련장\n\n\n\n두류공원\n\n달서구 성당동\n\nㆍ야외공연장, 문화예술회관, 관광정보센터, 도서관, 이월드\nㆍ인물동산, 야구장, 수영장, 유도관, 테니스장\n\n\n\n팔공산자연공원\n\n동구 도학동\n\nㆍ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갓바위, 북지장사, 야영장(3개소)\nㆍ통일약사대불, 팔공스카이라인, 집단시설지구(3개소) , 시민안전테마파크 등\n\n\n\n비슬산자연공원\n\n달성군 유가읍\n\nㆍ용연사, 유가사, 대견사, 대견봉\nㆍ참꽃군락지, 처연기념물 제435호 비슬산 암괴류\n\n\n\n=== 대구 12경 ===\n대구광역시가 선정한 대구 12경으로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 있다. \n파일:1경 팔공산.jpg|alt=1경 팔공산|1경 팔공산\n파일:2경 비슬산.jpg|alt=2경 비슬산|2경 비슬산\n파일:3경 강정고령보.jpg|alt=3경 강정고령보(디아크)|3경 강정고령보(디아크)\n파일:4경 신천.jpg|alt=4경 신천|4경 신천\n파일:5경 수성못.jpg|alt=5경 수성못|5경 수성못\n파일:6경 달성토성.jpg|alt=6경 달성토성|6경 달성토성\n파일:7경 경상감영.jpg|alt=7경 경상감영공원|7경 경상감영공원\n파일:8경 국채보상기념공원.jpg|alt=8경 국채보상기념공원|8경 국채보상기념공원\n파일:9경 동성로.jpg|alt=9경 동성로|9경 동성로\n파일:10경 서문시장.jpg|10경 서문시장\n파일:11경 83타워.jpg|11경 83타워\n파일:12경 대구스타디움.jpg|alt=12경 대구스타디움|12경 대구스타디움\n\n\n=== 요리 ===\n한우육회, 납작만두, 야끼우동, 중화비빔밥, 석쇠불고기(북성로), 뭉티기, 막창구이, 곱창구이(안지랑) 등이 대구광역시에서 유명한 음식이다.\n\n==== 대구 10미 ====\n대구광역시 10미에는 육개장, 막창 구이, 뭉티기(소 생고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가 있다.\n파일:1미-육개장.jpg|alt=1미 육개장|1미 육개장\n파일:2미-막창구이.jpg|alt=2미-막창구이|2미 막창구이\n파일:3미-뭉티기.jpg|alt=3미-뭉티기|3미 뭉티기\n파일:4미-동인동찜갈비.jpg|alt=4미-동인동찜갈비|4미 동인동찜갈비\n파일:5미-논메기매운탕.jpg|alt=5미-논메기매운탕|5미 논메기매운탕\n파일:6미-복어불고기.jpg|alt=6미-복어불고기|6미 복어불고기\n파일:7미-누른국수.jpg|alt=7미-누른국수|7미 누른국수\n파일:8미-무침회.jpg|alt=8미-무침회|8미 무침회\n파일:9미-야끼우동.jpg|alt=9미-야끼우동|9미 야끼우동\n파일:10미-납작만두.jpg|alt=10-납작만두|10미 납작만두\n\n", "대구는 버스와 도시철도가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외부 지역 및 국가와는 철도, 버스, 항공 등으로 연결된다.\n\n=== 도로 ===\n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중앙고속도로, 영천상주고속도로, 대구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난다.\n이상 7개 고속도로 노선 및 5개 국도 노선이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천대로, 앞산순환로, 신천동로, 대구외곽순환고속도로 등 도시고속화도로로 확충되어 있다. 2023년 7월 군위군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면서 영천상주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n* 분기점 : 금호 분기점, 도동 분기점, 동대구 분기점, 옥포 분기점, 현풍 분기점\n* 나들목 : 군위 나들목, 동군위 나들목, 서군위 나들목, 남대구 나들목, 동대구 나들목, 북대구 나들목, 서대구 나들목, 성서 나들목, 수성 나들목, 칠곡 나들목, 유천 나들목, 화원옥포 나들목, 달성 나들목, 북현풍 나들목, 현풍 나들목, 팔공산 나들목\n\n=== 버스 ===\n* 시외버스 : 두 개의 고속버스 터미널과 다섯 개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전국 각지로 가는 버스가 운행된다. 버스 등급은 급행·순환·간선·지선·출근 등급이다.\n* 시내버스 : 수입금의 분배는 대구광역시에서 맡아 하고, 버스의 운행은 개별 회사가 맡아 하는 준공영제로 운영된다. 도시 규모에 비해 도시철도망이 부족한 대구의 대중교통에서 시내버스의 역할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버스 운임은 다음과 같다. 일반/좌석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4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250원, 청소년 850원, 어린이 400원이다. 급행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800원, 청소년 1,300원, 어린이 8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650원, 청소년 1,100원, 어린이 650원이다. 교통카드를 이용하여 버스와 도시철도 모두 최초 교통 수단의 하차부터 30분 이내에 다음 교통 수단으로 갈아탈 경우 무료/할인 환승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대구광역시 버스노선 안내 시스템)\n\n=== 도시철도 ===\n\n* 대구 도시철도 : 도시철도는 대구교통공사가 관리하고 운행한다. 대구광역시 북동~남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과 동서로 관통하는 과 남동~북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모노레일 노선인 이 운행되고 있다.\n대구 도시철도 노선도(2018년)\n\n=== 택시 ===\n중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4,0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10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1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소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8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5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경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2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2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2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n* 나드리콜 : 대구시에서 중증장애인, 만65세이상의 사람으로서 대중교통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는 콜택시이다. 기본요금이 1,000원이고 거리당 요금이 책정되며, 시내는 최대 3,300원 시외는 최대 6,600원이 한도이다.\n\n=== 철도 ===\n대구역과 동대구역에서 경부선, 경북선, 대구선, 동해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KTX와 SRT는 동대구역과 서대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다. 2023년 7월 1일부터 군위군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면서 화본역에서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n* 대구권 광역철도 : 2018년 4월 구미 ~ 경산 구간 공사에 들어가고 2024년에 개통한다. 2, 3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밀양과 김천까지 공사를 할 계획이고 서대구역을 복합환승센터로 건설해 KTX와 SRT가 개통된다.\n파일:동대구역.jpg|대체글=동대구역 광장|섬네일|동대구역|351x351px|없음\n\n=== 공항 ===\n대구국제공항\n동구 지저동에 대구국제공항이 있다. 대구국제공항의 항공편은 매년 동계항공기간이 끝나면 대폭 늘어난다. 대구공항에서는 국내선 제주․김포 2개 노선이 매주 215편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베이징, 싼야) 24편, 일본(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오키나와, 구마모토, 사가) 177편, 동남아(홍콩, 세부, 방콕, 타이베이, 다낭, 마카오, 하노이) 148편, 대양주(괌) 14편,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14편이 운항되고 있다.\n\n( 대구국제공항)\n\n\n\n+항공노선\n\n구분\n\n노선명\n\n운항편수\n\n취항 항공사\n\n비고\n\n\n\n국내선(3)\n\n대구-인천\n\n4편/일\n\n대한항공\n\n\n\n\n\n대구-제주\n\n32편/일\n\n대한, 아시아나, 티웨이, 제주, 에어부산\n\n\n\n\n\n대구-김포\n\n2편/일\n\n에어부산\n\n\n\n\n\n국제선(23)\n\n중국\n\n대구-상하이\n\n7편/주\n\n中동방항공\n\n\n\n\n\n대구-베이징\n\n3편/주\n\n제주항공\n\n\n\n\n\n대구-선양\n\n2편/주\n\n대한항공\n\n\n\n\n\n대구-싼야\n\n4편/주\n\n에어부산\n\n\n\n\n\n일본\n\n대구-구마모토\n\n3편/주\n\n티웨이항공항공\n\n\n\n\n\n대구-가고시마\n\n3편/주\n\n제주항공\n\n\n\n\n\n대구-도쿄\n\n35편/주\n\n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n\n\n\n\n\n대구-오사카\n\n36편/주\n\n티웨이항공, 에어부산\n\n\n\n\n\n대구-후쿠오카\n\n28편/주\n\n티웨이항공, 에어부산\n\n\n\n\n\n대구-삿포로\n\n14편/주\n\n에어부산\n\n\n\n\n\n대구-오키나와\n\n8편/주\n\n티웨이항공\n\n\n\n\n\n동남아\n\n대구-홍콩\n\n6편/주\n\n티웨이항공\n\n\n\n\n\n대구-타이베이\n\n23편/주\n\n티웨이항공, 에어부산, 타이거에어, 제주항공\n\n\n\n\n\n대구-세부\n\n12편/주\n\n티웨이항공\n\n\n\n\n\n대구-다낭\n\n42편/주\n\n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 비엣젯항공\n\n\n\n\n\n대구-나트랑\n\n2편/주\n\n제주항공\n\n\n\n\n\n대구-클라크\n\n3편/주\n\n티웨이항공\n\n\n\n\n\n대구-하노이\n\n7편/주\n\n티웨이항공\n\n\n\n\n\n대구-마카오\n\n5편/주\n\n제주항공\n\n\n\n\n\n대구-방콕\n\n14편/주\n\n티웨이항공\n\n\n\n\n\n대양주\n\n대구-괌\n\n7편/주\n\n티웨이항공\n\n\n\n\n\n유럽\n\n대구-블라디보스톡\n\n3편/주\n\n티웨이항공\n\n\n\n\n", "2012년 대구의 지역내 총생산(GRDP)은 38조 7,00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4%이다. 2013년 대구광역시의 1인당 개인소득은 16개 시도 중 6번째로 상위권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지역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1인당 개인소득은 1,538만원으로 울산 1,916만원, 서울 1,869만원, 부산 1,618만원, 대전 1,576만원, 제주 1,564만원에 이어 16개 시ㆍ도중 6번째로 높았다. 시ㆍ도 전체 명목 개인소득은 796조원으로 1년 전보다 30조원(3.9%)이 늘었다. 실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경제성장률)도 3.8%로 전국 5위를 나타냈다. 이밖에 대구의 지역 총소득은 52조 6,000억원으로 전국의 3.7%를 차지했으며 지역 내 총생산 대비 지역 총소득 비율은 117.3 수준이었다.\n\n2018년 대구의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는 50조 8,000억원으로 전국의 2.9%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개인소득은 2,060만원으로 증가했다.\n", "\n=== 농업 ===\n대구의 농업은 1995년 달성군과의 도농 통합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2015년 기준 농가호수는 16,571호, 농가인구는 44,542명, 농경지면적은 8.291ha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n\n=== 상업 ===\n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미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이름을 떨쳤다. 2017년 기준 대구에는 9개의 백화점과 21개의 대형마트, 7개의 쇼핑센터, 151개소의 등록시장, 1개의 종합유통단지가 있다.\n\n\n\n+\n대구광역시 유통시설\n\n계(단위: 개소)\n\n백화점\n\n쇼핑센터\n\n대형마트\n\n전문점\n\n등록시장\n\n그밖의\n대규모점포\n\n\n\n207\n\n9\n\n7\n\n21\n\n4\n\n151\n\n15\n\n\n\n\n\n+주요 전통시장\n\n시장명\n\n소재지\n\n점포수(단위: 개)\n\n\n\n서문시장\n\n중구 국채보상로 380일원\n\n3,817\n\n\n\n칠성시장\n\n북구 칠성시장로 28일원\n\n996\n\n\n\n팔달시장\n\n북구 팔달로 37길 11일원\n\n900\n\n\n\n서남(신)시장\n\n달서구 달구벌대로 329길 17일원\n\n196\n\n\n\n봉덕(신)시장\n\n남구 봉덕로 27길 16일원\n\n323\n\n\n\n\n\n+종합유통단지\n\n구분\n\n계\n\n전시컨벤션센터\n\n도매단지\n\n기업관\n\n물류단지\n\n지원시설\n\n공공시설용지\n\n\n\n면적(㎡)\n\n837,721.1\n\n79,966.0\n\n165,102.6\n\n56,449.2\n\n160,588.3\n\n50,470.8\n\n325,144.2\n\n\n\n업체수\n\n2,977\n\n32\n\n2,538\n\n217\n\n108\n\n82\n\n -\n\n\n\n\n\n=== 공업 ===\n대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을 통해 지속 성장해 왔다. 과거 섬유업체 수가 전채 사업체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였으나. 2017년 대구시 전체 산업단지 내 업체 수는 기계·금속공장이 3,882개소로 섬유공장 1,736개소보다 비중이 크다.\n\n==== 산업 단지 ====\n\n\n\n 산업단지 명 \n\n 위치(구·군) \n\n 면적(천m2) \n\n 업체수 \n\n 등급 \n\n 비고\n\n\n\n 성서산업단지\n\n 달서구, 달성군 다사읍\n\n 10,835\n\n 2,566\n\n 지방 \n\n 1, 2, 3, 4, 5차\n\n\n\n 달성산업단지\n\n 달성군 논공읍, 구지면\n\n 6,820\n\n 316\n\n 지방 \n\n 1, 2차\n\n\n\n 대구염색산업단지\n\n 서구 비산7동\n\n 855\n\n 124\n\n 지방 \n\n 비산염색공단\n\n\n\n 검단산업단지\n\n 북구 검단동\n\n 796\n\n 323\n\n 지방 \n\n \n\n\n\n 옥포농공단지\n\n 달성군 옥포읍\n\n 160\n\n 38\n\n 농공 \n\n \n\n\n\n 구지농공단지\n\n 달성군 구지면\n\n 193\n\n 23\n\n 농공 \n\n \n\n\n\n 제3공단\n\n 북구 노원동\n\n 1,094\n\n 991\n\n 일반 \n\n\n\n\n\n 서대구공단\n\n 서구 상중이동\n\n 2,417\n\n 533\n\n 일반 \n\n\n\n\n\n 현풍공단\n\n 달성군 현풍읍\n\n 265\n\n 8\n\n 일반 \n\n\n\n\n\n 대구 사이언스 파크\n\n 달성군 구지면\n\n 265\n\n 8\n\n 국가 \n\n\n\n\n\n 대구 첨단의료복합단지\n\n 동구 신서동\n\n 1,030\n\n 0\n\n 국가 \n\n 2009~2038년\n\n\n\n=== 미래 신성장 산업 ===\n대구는 미래첨단의료 선도도시, 미래형 자동차 선도도시, ICT․IoT 기반의 스마트시티 조성,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통한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n\n==== 첨단 의료 ====\n의료산업 분야는 2018년까지 국책연구기관 15개, 의료기업 130개, 양질의 일자리 창출 4,300개, 의료관광객 유치 25,000명을 목표로 「메디시티 대구」 조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첨단의료복합단지의 글로벌 수준 발전과 의료관광의 확대 등을 통해 대구를 세계적인 메디시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n대구 소재 한국뇌연구원-첨단장비센터\n\n\n\n\n+의료기관 현황(2017년)\n\n계\n\n상급종합\n\n종합병원\n\n병원\n\n요양병원\n\n정신병원\n\n의원\n\n치과병원\n\n치과의원\n\n한방병원\n\n한의원\n\n조산원\n\n부설의원\n\n\n\n3,667\n\n4\n\n8\n\n112\n\n61\n\n1\n\n1,714\n\n18\n\n868\n\n2\n\n871\n\n -\n\n8\n\n\n\n==== 미래형 자동차 ====\n미래형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전기상용차 생산공장 건립 투자협약, 대동공업-르노삼성 컨소시엄을 통한 1톤급 전기상용차 개발 및 생산 확정,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단지 지정(국토부),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인프라 구축 등 미래형자동차 선도도시로서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n2017년 대구국제미래자동차엑스포\n\n==== 스마트시티 ====\n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혁신플랫폼인 ‘대구형 스마트시티’ 조성하기 위하여 ICT·IoT(사물인터넷) 융합기술 경쟁력확보, SW융합 산업육성, ICT융복합스포츠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n\n대구시는 스마트시티 조성을 위한 인프라 건설과 운영체계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2020년 1월 22일 영국 왕립 표준협회(BSI)로부터 스마트시티국제표준 인증서 ISO 37106 인증을 받았다.\n\n스마트시티국제표준은 2018년 ‘ 국제표준화기구 (ISO)’가 마련한 기준으로, BSI가 비전, 시민중심, 디지털, 개방 및 협력 등 4개 기준에 맞는 도시에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n한국 내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대구가 처음으로 ISO인증을 받았다.\n대구 2017 대한민국ICT융합엑스포\n\n==== 신재생 에너지 ====\n대구광역시는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203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보급률 20% 이상, 에너지 소비 15% 절감 목표로 에너지 신사업 Test-bed 구축. 분산전원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지역에너지 관련 산업 육성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n대구 2017 국제그린에너지엑스포\n", "=== 안전 도시 ===\n2020년 대구는 코로나19 범유행 시국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철저한 방역과 치료를 통해 코로나19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세계 부부의 날 위원회는 ‘2020 세계 부부의 날 국가 기념 행사’에서 대구시민 일동과 대구시 의료진(대구시의사회, 대구시간호사회)에게 ‘2020 올해의 특별 가족상’을 수상하였으며, “대구시민과 의료진 등 모든 구성원들이 선진 시민 의식을 발휘해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쳐 코로나19를 극복해 전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적을 창출했기에 특별 가족상의 취지와 부합한다”라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n\n=== 청결 도시 ===\n2020년 6월 11일 대구상수도사업본부는 시민들이 믿고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수돗물을 가정집 수도꼭지까지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해 대구 시내 수도관 전체를 세척할 계획을 발표했다.\n", "=== 건설 ===\n* 화성산업\n* 서한\n* 태왕E&C\n* SM우방\n\n=== 금융 ===\n* 대구은행\n\n=== 방송 ===\n* KBS대구방송총국\n* 대구문화방송\n* TBC\n* 대구교통방송\n* 대구극동방송\n* 기독교대구방송\n* 대구가톨릭평화방송\n* 대구불교방송\n* 대구원음방송\n* 대구국악방송\n* CMB 대구방송\n* HCN 금호방송\n* LG헬로비전 대구방송\n* SK브로드밴드 대구방송\n* 한국케이블TV푸른방송\n\n=== 언론 ===\n* 매일신문\n* 영남일보\n* 대구신문\n* 대구일보\n\n=== 유통 ===\n* 대구백화점\n",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n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K리그1 대구 FC, KBL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가 있다.\n\n\n\n+\n\n\n\n리그명\n\n팀명\n\n창단연도\n\n홈 경기장\n\n\n\nKBO 리그\n\n삼성 라이온즈\n\n1982년\n\n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n\n\n\nK리그1\n\n대구 FC\n\n2002년\n\nDGB대구은행파크\n\n\n\nKBL\n\n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n\n1994년\n\n대구실내체육관\n\n\n", "한강 이남에서는 대전권(대전, 계룡, 논산, 세종)과 함께 주요 국방 도시이기도 하다. 제2작전사령부, 제50보병사단, 제5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육군 부대와 공군 1방공유도탄여단, K2 공군비행장에 공군공중전투사령부, 중앙방공통제소, 공군군수사령부, 제11전투비행단 등과 주한 미군 부대 캠프 워커, 캠프 헨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n\n수성구의 고산지구 개발을 위해 제50보병사단, 제2작전사령부, 제5군수지원사령부를 칠곡군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n", "\n", "\n\n", "대구광역시는 다음 도시와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었다.\n\n\n=== 자매결연도시 ===\n\n\n\n 국가 \n\n 도시 \n\n 자매결연시기\n\n\n\n \n\n 25px 조지아주 25px 애틀랜타 \n\n 1981.11.10\n\n\n\n \n\n25px 알마티 \n\n 1990.11.26\n\n\n\n \n\n 산둥성(山东省) 칭다오시(青岛市) \n\n 1993.12.4\n\n\n\n \n\n 25px 미나스제라이스주 \n\n 1994.6.21\n\n\n\n \n\n 25px 히로시마현 25px 히로시마시 \n\n 1997.5.2\n\n\n\n \n\n 25px 상트페테르부르크 \n\n 1997.11.3\n\n\n\n \n\n 25px 플로브디프 \n\n 2002.10.24\n\n\n\n \n\n25px 타이베이시 \n\n 2010.11.4\n\n\n\n \n\n 저장성(浙江省) 닝보시(宁波市) \n\n 2013.6.8\n\n\n\n \n\n 25px 밀라노 \n\n 2015.7.2\n\n\n\n \n\n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 \n\n 2015.11.10\n\n\n\n \n\n 25px 위스콘신주 25px 밀워키 \n\n 2017.9.20\n\n\n\n \n\n 다낭 \n\n 2018.8.3\n\n\n\n\n=== 자매우호도시 ===\n\n\n\n국가\n\n도시\n\n자매우호시기\n\n\n\n\n\n장쑤성(江苏省) 양저우시(扬州市)\n\n2003.3.21\n\n\n\n장쑤성 옌청시(盐城市)\n\n2003.12.7\n\n\n\n랴오닝성(辽宁省) 선양시(沈阳市)\n\n2003.12.9\n\n\n\n\n\n25px 효고현 25px 고베시\n\n2010.7.23\n\n\n\n\n\n호찌민시\n\n2015.5.29\n\n\n\n\n\n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绍兴市)\n\n2015.10.26\n\n\n\n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武汉市)\n\n2016.3.24\n\n\n\n\n\n25px 방콕\n\n2017.8.17\n\n\n\n\n\n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长沙市)\n\n2018.7.31\n\n\n\n\n\n25px 가오슝시\n\n2018.9.13\n\n\n\n\n\n박닌성(北寧省)\n\n2019.2.22\n\n\n\n\n=== 달빛 동맹 ===\n‘달구벌’(대구)과 ‘빛고을’(광주)에서 이름을 딴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를 놓고 지자체 간 갈등이 심해지자 소모적인 경쟁 대신 어느 곳이 선정돼도 연구개발 사업을 공동으로 하기로 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대구-광주 내륙철도사업, 대구에 광주시민의 숲을, 광주에 대구 시민의 숲을 조성하는 등 문화·예술·민간까지 교류·협력이 확산됐다. 두 지역 통기타 뮤지션들의 모임인 ‘달빛통맹’도 있고, 양 지자체가 두 지역 미혼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달빛오작교’ 행사도 매년 열리고 있다. 2020년에는 광주광역시에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병상 부족이 현실화하자 대구가 광주에 병상나눔을 제안하였다.\n", "* 대구광역시의 마천루 목록\n* 군위군의 대구광역시 편입\n", "\n", "\n\n* \n* 대구광역시청\n* 대구광역시의회 \n* 대구광역시교육청 \n* 대구교통공사\n* 대구지방검찰청\n* 대구지방경찰청\n* 대구지방법원\n* 대구경북연구원 \n* 대국광역시 버스정보시스템\n* 대구광역시 공식 블로그\n* 대구통계\n\n\n\n\n\n\n \n분류:대한민국의 옛 임시 수도\n분류:1995년 설치" ]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 )는 대한민국의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청송군, 서쪽으로 구미시,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북쪽으로 의성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한다.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 소재지로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였다. 2023년 7월 1일에 군위군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 시조 === * 독수리 : 대구의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자적 시민정신을 나타낸다. === 시목 === * 전나무 : 많은 나무들 가운데 전나무는 대구 시민의 강직성과 영원성, 그리고 곧게 뻗어가는 기상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 시화 === * 목련 : 목련은 귀족적이며 순결하며 희생정신의 시민기질을 나타낸다. === 로고 === 파일:Symbol of Daegu.svg|대구광역시 로고 파일:Daegu character.jpg|대구광역시 캐릭터 대구광역시의 로고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친환경적인 도시를 표현한다. === 브랜드 슬로건 === 자유와 활력이 넘치는 파워풀 대구 === 선사시대 === *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에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 석기가 포함된 유적의 발굴로 미루어 대략 2만~1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대구의 옛 이름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 이름인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며, 이 가운데 물론 달구벌과 대구(大丘)가 가장 유명하다. * 달구벌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신라의 계림사상에서 기원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하였다는 연구자료가 있다. 그래서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 선사시대 달구화(達句火), '''달구벌'''(達句伐), 달불(達弗), 달성(達城)으로 성읍이 형성되었다. * 청동기시대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 신라 === *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 261년(신라 첨해이사금 15년) 달벌성이 축조되었다. (244년 축성 시작) * 5세기말 - 6세기초 달구벌을 '''달구화현'''(達句火縣, 達弗城)이라 칭하였다. * 689년(신라 신문왕 9년)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위화군(喟火郡)을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達句伐)이라 칭하던 것을 '''대구현'''으로 개칭하였다. 양주 관하에 두었다. *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사이의 공산 전투가 현재의 팔공산 일대에서 있었다. === 고려 === * 940년(고려 태조 23년) 수창군을 수성군으로 개칭하였다. * 1018년(고려 현종 9년) 수성군·장산군·해안현(解顔縣)과 대구현·화원현(花園縣)·팔리현(八里縣)·하빈현(河濱縣)으로 행정 계통이 양분되었다. 대구현 등은 성주군 관하에 두었다. * 1143년(고려 인종 21년) 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하여 하빈현, 화원현을 영속하였다. * 1203년(고려 신종 6년) 무신정권기에 부인사 승려의 반무신란이 있었다. * 1232년(고려 고종 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팔공산 부인사의 대장경을 소실하였다. * 1255년(고려 고종 42년) 공산성에서 항몽 투쟁하였다. === 조선 === 조선 시대에는 대구도호부의 영역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서구, 동구(안심동 제외), 북구(옛 칠곡동 지역 제외), 수성구(고산동 제외), 달서구, 달성군(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제외),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 1394년(조선 태조 3년) 대구현이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을 영속하였다. * 1419년(조선 세종 원년) 5월 대구현·수성현·해안현·하빈현 이상 4개 현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 * 1466년(조선 세조 12년) 대구군을 '''대구도호부'''로 승격하였다. * 1590년(조선 선조 23년) 대구읍성이 토성으로 축성되었다. *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중 대구읍성은 파괴되었다. * 1601년(조선 선조 34년) 경상도 감영을 대구부로 이전, 설치하였다. 화원현·경산현·하양현을 편입하였다. * 1607년(조선 선조 40년) 경산현·하양현은 대구도호부 관할에서 분리되었다. * 1684년(조선 숙종 10년) 풍각현의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이 대구도호부에 편입되었다. * 1658년(조선 효종 9년) 약령시가 경상감영 안의 객사 주변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하였다. * 1736년(조선 영조 12년) 대구읍성이 석성으로 4월에 축조에 들어가 이듬해 6월 완공하고, 11월 선화당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 1750년(조선 영조 26년) 유생 이양채가 '구(丘)'자가 대성 공자의 휘자에 저촉되므로 피해야 한다(피휘)며,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개칭할 것을 상소하였다. ** 정조·헌종 때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로 혼용하다가 철종 이후에는 대구('''大邱''')만 사용하였다. * 1895년 6월 23일(조선 고종 32년 음력 윤5월 1일) 8도(道)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대구도호부'''가''' '''대구부''' 대구군으로 강등되었다. *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13도제가 실시되어, 경상북도 '''대구군'''이 되었다. === 대한제국 === * 1899년(광무 3년) (광무 3년) 7월 대구 최초 근대 중등교육기관 달성학교(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승, 1950년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로 분리, 1970년 경북중학교 폐교, 현 경운중학교 계승)가 설립되었다. * 1902년(광무 6년) 애덤스 선교사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가 여성교육기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 1905년(광무 9년) 달성공원이 조성되었다. * 1906년(광무 10년) 9월 24일 대구군 소속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은 청도군으로 이속하였다. * 1906년(광무 10년) 10월 대구읍성 성벽이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에 의해 황제의 윤허없이 철거되었다. 또한, 경상감영의 선화당 정남쪽에 위치했던 포정문(布政門)의 문루인 관풍루를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 1906년(광무 10년) 일제 통감부 이사청이 설치되었다. * 1907년(광무 11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 1907년(광무 11년) 대구 첫 영화관 금좌(錦座)가 현재 태평로2가에 문을 열어 12년 동안 번창하였다. * 1907년(광무 11년) 애덤스 선교사의 부인 부르엔(Marda Bruen)에 의해 여자중등학교로 신명여학교가 문을 열였다. * 1908년(융희 2년) 경상감영의 객사와 주요 건물이 파괴되었고, 약령시를 현재 남성로로 이전하였다. * 1909년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은 이른바 십자도로(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 일제강점기 === 대구부 휘장 일제강점기에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불렀다. *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 1910년 10월 1일 대구군을 '''대구부'''로 개칭하였다. * 1911년 11월 14일 일본 제국은 동상면과 서상면을 통합해 대구면을 설치하였다. * 1913년 대구역이 건립되었다. 322호에 전기가 들어왔다. * 1914년 4월 1일 대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대구면만 '''대구부'''로 남기고, 대구면을 제외한 대구부의 나머지 면과 현풍군이 달성군으로 개편되었다. * 1915년 1월 15일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 인사들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다. * 1917년 4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과 봉덕동의 각일부를 대구부에 편입해 대봉정을 신설하였다. * 1919년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1920년 7월 1일 시내버스가 운행되었다. 대구역을 기점으로 시내 각 방향으로 물론이고 팔달교 및 동촌까지 운행하였다. * 1923년 서문시장이 현재의 자리로 이동하였다. * 1923년 대구자혜의원은 경북도립 대구의원이 되었다. 이것이 경북대병원의 전신이다. *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었다. * 1932년 대구 최초의 백화점 이비시야 백화점이 등장하였다. 현재의 동성로 성내1동 LG패션자리이다. * 1938년 10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달서면 일부(감삼동 제외), 성북면 일부(동변동·서변동·연경동 제외)을 대구부에 편입하였다. * 1938년 11월 2일 옛 수성면, 옛 달서면, 옛 성북면 지역에 대구부 동부출장소·서부출장소·북부출장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3출장소) * 1941년 대구 약령시가 폐쇄되었다. * 1942년 대구공립상업고등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 미군정기 === * 1945년 9월 29일 대구역에서 열차끼리 충돌하여 73명이 사망하고 120여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났다. *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났다. * 1947년 4월 1일 일본식 동명이 한국식 동명으로 개정되었다. : 동의명칭변경에관한규정 구 행정구역 (법정동) 신 행정구역 대구부 명치정1·2정목, 본정1·2정목, 서성정1·2정목, 경정1·2정목, 원정1·2정목, 금정1·2정목, 동성정1~3정목 대구부 계산동1·2가, 서문로1·2가, 서성로1·2가·종로1·2가·북성로1·2가·태평로2·3가·동성로1~3가 대구부 팔운정, 수정(壽), 시장정, 북내정, 횡정, 시장북통, 서내정, 남성정, 수정(竪), 달성정, 팔중원정, 덕산정, 대화정, 동천대전정, 서천대전정, 동운정, 행정, 궁정, 삼립정, 남용강정, 북용강정, 남정, 동본정, 남욱정, 북욱정, 전정(田), 전정(前), 영정, 봉산정, 촌상정, 칠성정, 상정, 동문정, 상서정, 하서정, 신정, 남산정, 대봉정 대구부 수창동, 수동, 동산동, 북내동, 서야동, 시장북로, 서내동, 남성로, 인교동, 달성동, 도원동, 덕산동, 대안동, 동일동, 장관동, 동인동, 태평로1가, 사일동, 삼덕동, 공평동, 완전동, 남일동, 교동, 문화동, 상덕동, 화전동, 전동, 용덕동, 봉산동, 향촌동, 칠성동, 포정동, 동문동, 상서동, 하서동, 대신동, 남산동, 대봉동 === 대한민국 === 미국의 대한군사원조(AFAK)를 통한 자재 원조로 지어진 대구시청사 감사식(1955년) * 1949년 8월 15일 대구부에서 '''대구시'''로 개칭하였다. * 1950년 7월 16일 6.25전쟁으로 인해 8월 17일까지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본부 주한 미8군 사령부가 이전 설치되었다. * 1951년 6월 9일 대구시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4출장소) * 1952년 1월 16일 동인동, 삼덕동, 칠성동이 분동하였다. (87법정동) * 1953년 4월 1일 대구시 중부출장소·종로출장소를 설치하였다. (6출장소) * 1958년 1월 1일 달성군 동촌면, 월배면, 성서면, 가창면, 공산면을 편입하였다. 동촌출장소 등을 설치하였다. *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는 4.19의거로 연결되었다. * 1963년 1월 1일 대구시 공산출장소(서변동·동변동 제외)가 달성군 공산면으로, 가창출장소(파동 제외)가 가창면으로, 성서출장소가 성서면으로, 월배출장소가 월배면으로 환원되었다.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부출장소 등이 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로 승격하였다. ※ 이후의 행정구역 변경에 대한 내용은 각 구별 문서로 대신한다. * 1965년 2월 1일 동 행정구역 개편으로 행정동의 수가 89개로 줄었다. (5구 89행정동 106법정동) * 1976년 8월 1일 동구 동촌출장소가 대구시 동촌출장소로 승격하였다. * 1980년 4월 1일 수성구가 동구에서 분리·신설되었고, 동촌출장소를 폐지하였다. (6구) * 1981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및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 일원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가 설치되었다. * 1983년 11월 15일 어린이회관을 개관하였다. * 1984년 6월 27일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 1984년 7월 중순 대구 인구 200만명 돌파 * 1988년 1월 1일 서구 및 남구의 일부를 관할로 달서구가 설치되었다. (7구) * 1991년 3월 26일 성서 초등학생 5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1991년 7월 8일 지방자치제도의 부활로 대구직할시의회가 개원하였다. * 대구광역시 의회1991년 12월 7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기공 * 1992년 11월 27일 동화사 남북통일발원 약사여래 석조대불이 완공되었다. * 1995년 1월 1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대구광역시'''로 개칭하였다. *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였다. 시역은 885.6 km2로 확장되었다. (7구 1군) *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 101명이 사망하였다. * 1996년 9월 1일 달성군 논공면이 논공읍으로 승격 * 1996년 12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기공 * 1996년 12월 대구 인구 250만명 돌파 * 1997년 11월 1일 달성군 다사면이 다사읍으로 승격 * 1997년 11월 26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진천~중앙로) 개통 - 대구의 지하철 시대 개막 * 1998년 5월 2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중앙로~안심)이 완전 개통되었다. * 2002년 5월 10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진천)이 연장 개통되었다. * 2002년 6월 10일 한일월드컵 미국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 * 2002년 6월 29일 한일월드컵 터키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 (한일월드컵 3, 4위 전) *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발생으로 192명의 사망자와 14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2003년 8월 21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개막하여, 8월 31일 폐막하였다. * 2005년 10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문양~사월)이 개통되었다. * 2008년 4월 25일 동구 등 6개 지구의 대구광역시, 구미시 등 5개 지구의 경상북도에 경제자유구역을 지정받았다. * 2009년 7월 24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기공 * 2011년 8월 27일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개막하여, 9월 4일 폐막하였다. 이는 1991년 일본 도쿄, 2007년 일본 오사카에 이어 아시아 국가로서는 2번째로 개최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일본, 독일에 이어 FIFA 월드컵, 하계 올림픽,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국제 스포츠 3대 이벤트를 모두 개최하는 7번째 국가가 됨으로써 세계적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20x220px * 2012년 9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이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영남대학교까지의 연장구간이 개통하였다. (사월 ~ 영남대) * 2012년 10월 11일부터 10월 17일까지 제93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 2012년 11월 6일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이 종료되었다. * 2013년 10월 13일 ~ 10월 17일 세계에너지총회가 열렸다. * 2015년 4월 12일 ~ 4월 17일 제7차 세계 물 포럼이 열렸다. * 2015년 4월 23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칠곡경대병원~용지)이 개통되었다. * 2016년 9월 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설화명곡)이 연장 개통되었다. * 2018년 3월 1일 : 유가면이 유가읍으로 승격 * 2018년 11월 1일 달성군 옥포면, 현풍면이 옥포읍, 현풍읍으로 승격 * 2023년 7월 1일 군위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였다. (7구 2군) 대구광역시는 한반도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구는 영남 지방 내륙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의성군, 칠곡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계를 접한다.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 지형 === 없음 대구는 높고 규모가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북쪽에는 팔공산(1,193m)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비슬산(1,084m)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금호강과 합쳐진다. 대구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 기후 === 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이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이다. 1942년에 기록한 40도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에 속한다. 이러한 여름 기온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언론, 방송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대구의 기후는 온대 하우 기후(Cwa)를 띄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 지질 === 파일:대구시청 본관 전경.jpg|대체글=대구광역시청 본관 전경|섬네일|383x383px|대구광역시청 동인청사 대구광역시의 행정구역 대구광역시는 7개 구와 2개 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2022년 12월 31일 주민등록 인구는 1,070,873세대 2,417,055명이다. 자치구·군 한자 세대 인구 (명) 면적 (km2) '''중구''' 中區 40,749 80,965 7.06 '''동구''' 東區 159,422 341,326 182.15 '''서구''' 西區 81,116 159,827 17.32 '''남구''' 南區 76,401 141,519 17.43 '''북구''' 北區 192,697 436,173 93.99 '''수성구''' 壽城區 171,480 413,180 76.53 '''달서구''' 達西區 235,883 547,387 62.37 '''달성군''' 達城郡 113,125 268,788 428.36 '''군위군''' 軍威郡 13,693 23,796 614.31 '''대구광역시''' 大邱廣域市 1,084,566 2,412,961 1,499.52 2023년 기준 === 경북권 === 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1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구미시, 영천시, 경산시, 의성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의 창녕군이 경북권으로 규정되어 있다. === 주거 지구 === 범물지구 택지개발사업은 대구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공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주택 시민에게 양질의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도로·수도·전기·통신·도시가스·난방 등 생활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고, 공원·학교·녹지·운동장 등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대구도시공사 시행 대한주택공사 시행 한국토지공사 시행 한국토지주택공사 시행 지산지구 (1992년)범물지구 (1993년)상인지구 (1994년)노변지구 (1995년)시지지구 (1997년)용산지구 (1998년)장기지구 (1999년)동서변지구 (2002년)죽곡1지구 (2007년)죽곡2지구 (2010년)등촌지구 (2014년)각산지구 (2015년) 불로지구 (1986년)송현지구 (1987년)월배지구 (1987년)안심1지구 (1987년)천내1지구 (1988년)천내2지구 (1990년)월성지구 (1992년)칠곡1지구 (1993년)칠곡2지구 (1994년)안심2지구 (1994년) 성서지구 (1997년)대곡지구 (1997년)칠곡3지구 (2000년)명곡1지구 (2001년)동호지구 (2002년)명곡2지구 (2002년)본리지구 (2004년)칠곡4지구 (2005년)율하1지구 (2008년)매천지구 (2008년) 율하2지구 (2009년)''''금호지구신서지구''''옥포지구 (2016년)''''연경지구 (2018년) 대구광역시의 일반행정은 대구광역시청이, 유·초·중등교육행정은 대구광역시교육청이 담당한다. 시청은 동인청사와 산격청사로 나눠져 있는데, 동인청사의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 1가이고, 산격청사는 산격동의 옛 경상북도청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 두드리소 === 두드리소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감이 느껴지면서, 민원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대구광역시의 민원 서비스이다. 두드리소( (http://dudeuriso.daegu.go.kr ) 인터넷, 모바일, 콜센터, SNS로 신청한 모든 민원과 제안의 처리과정을 신청방법과 상관없이 한 곳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없음 === 120달구벌콜센터 === 120달구벌콜센터는 대구시에 관한 민원이나 궁금한 사항을 상담해주는 콜센터이다. 전화, 문자상담, 온라인상담, 예약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외국어상담(영어, 중국어, 일본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외국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없음 === 로봇 === ‘스마트시티 아시태평양 어워드 2018’에서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 된 뚜봇은 자가학습을 통해 자동 답변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공지능 자동상담시스템이다. 24시간 여권, 차량등록, 지역축제, 시정 등 다양한 분야의 민원을 채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없음 === 미래비전 2030 === + 대구광역시 미래비전 2030 비전 World Smart Leader, DAEGU 목표 Again! 대한민국 대도약의 심장 첨단기술과 휴머니즘의 도시 글로벌 Top 30 도시 추진방향 글로벌 미래산업 허브 월드클래스 대도시권의 중심 시민이 행복한 도시 공동체 핵심사업 * 제조업 스마트 혁신 * 5+α 신산업 연구·생산기지 * 4차 산업혁명 생태계 조성 * 글로벌 게이트웨이 * 1,000만 대구대도시권 구축 * 대도시권 중심도시 역량 강화 * 대구 케어 프로젝트 * 스마트 & 세이프 시티 * 시민 학습문화도시 대구광역시의 연도별 인구 추이 연도 총인구 인구그래프 비고 1925년 1930년 1935년 1940년 1938년 달성군 수성면·달서면·성북면이 대구부로 편입 1944년 1949년 1955년 1960년 1958년 달성군 동촌면·성서면·월배면·가창면·공산면이 대구시로 편입 1966년 1963년 옛 달성군 성서면·월배면·가창면·공산면에 해당하는 법정동이 달성군으로 환원 (가창면 파동 제외) 1970년 1975년 1980년 1981년 대구직할시로 승격 1985년 1981년 7월 1일 달성군 성서읍·월배읍·공산면, 경산군 안심읍·고산면, 칠곡군 칠곡읍이 대구직할시로 편입 1990년 1991년 1990년까지는 상주인구조사 결과, 1991년 이후는 주민등록인구통계(외국인 포함)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경상북도 달성군 편입 1996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 대학교(국공립, 사립) ** 경북대학교 - 북구, 중구, 군위군 ** 계명대학교 - 달서구, 남구 ** 대구교육대학교 - 남구 **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 달성군 * 전문대학(국공립, 사립) ** 계명문화대학교 - 달서구 ** 대구공업대학교 - 달서구 ** 대구과학대학교 - 북구 ** 대구보건대학교 - 북구 ** 수성대학교- 수성구 ** 영남이공대학교 - 남구 ** 영진전문대학교 - 북구 ** 한국폴리텍Ⅵ대학 대구캠퍼스 - 서구 ** 한국폴리텍대학 섬유패션캠퍼스 - 동구 * 직업훈련기관 ** 한국폴리텍Ⅵ대학 남대구캠퍼스 - 달성군 * 고등학교 * 대구국제학교 * 교육청 ** 대구광역시교육청 *** 남부교육지원청 *** 달성교육지원청 *** 동부교육지원청 *** 서부교육지원청 *** 군위교육지원청 대구광역시 교육기관 (2022년) 학교별 계 대학교 전문대학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 특수학교 기타 학교수 805 4 8 94 125 233 327 11 3 학생수 383,550 60,657 46,077 58,653 61,847 121,515 32,850 1,829 122 교원수 27,843 2,188 950 6,436 5,435 9,097 2,942 708 87 자료 : 2023 시정현황 2020년 4월, 한국관광공사는 야간관광 100선으로 대구의 ‘아양기찻길’, ‘앞산공원’, ‘수성못’, ‘서문시장 야시장’을 선정하였다. 대구시는 대한민국 관광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선정된 5개 장소를 비롯하여 숨겨진 야간 관광 자원들을 적극 발굴해 육성하기로 했다. === 축제 === 대구광역시 대표 축제에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오페라축제, 치맥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파일:대구광역시 컬러풀페스티벌.jpg|alt=컬러풀대구페스티벌|컬러풀대구페스티벌 파일:치맥페스티벌.jpg|alt=대구치맥페스티벌|대구치맥페스티벌 파일:대구광역시 제11회 뮤지컬페스티벌(투란도트 공연장면).jpg|alt=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파일:제15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jpg|alt=대구국제오페라축제|대구국제오페라축제 * 대구광역시의 축제 목록 === 문화재 === + 대구광역시 문화재 현황(2018) 종별 총계 국가지정문화재 시지정문화재 소계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국가민속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소계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분화재 등록문화재 문화재자료 계 265 87 3 66 9 2 5 2 114 76 17 17 4 11 53 *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 * 대구광역시의 무형문화재 *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 대구광역시의 민속문화재 *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 관광코스 === 대구광역시의 테마별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팔공산 힐링 코스'이 4가지 권역별 관광코스가 있다. *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서문시장 → 삼성상회 옛터(이병철 고택) → 대구 근대골목 → 약령시 → 동성로 →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방천시장 *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 앞산 전망대 케이블카 → 수성못 → 들안길 → 스파밸리 → 힐크레스트 → 대구 미술관 → 대구 스타디움 → 녹동서원/달성한일우호관 *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 디아크/강정보고령보 → 낙동강 자전거길 → 대구수목원 → 마비정 벽화마을 → 비슬산 암괴류 → 국립 대구과학관 → 도동서원 * 팔공산 힐링 코스 : 갓바위 - 동화사 - 대구방짜유기 박물관 - 팔공산 벚꽃길 - 대구시민 안전테마파크 === 시티투어 === 대구시의 관광자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00년 12월 2일 시작된 시티투어는 각종 문화유적, 관광지, 시정현장 등을 순회하며 대구의 문화와 역사, 관광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체험 프로그램이다. ==== 순환코스 ==== * 동대구역 →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구암 팜스테이 → 갓바위 → 방짜유기박물관 → 동화사 → 팔공산동화집단시설기구 →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 팔공산온천관광호텔 ==== 정기코스 ==== * 1코스(팔공산권) :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동화사 → 방짜유기박물관 → 신숭겸 장군 유적지 * 2코스(비슬산권) : 현풍곽씨12정려각 → 도동서원 → 비슬산자연휴양림 →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 → 현풍 석빙고 * 3코스(화원권) : 월곡역사박물관 → 대구수목원 → 화원동산 → 남평문씨리세거지 → 용연사 * 4코스(시지·가창권) : 녹동서원 → 힐크레스트(구 허브힐즈) → 대구스타디움 → 대구 스포츠기념관 → 둔산동경주 최씨종가 * 5코스(다사권) : 환경시설공단 →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 계명한학촌 → 매곡정수장 → 육선사 * 6코스(도심권) : 약령시한의약문화권 → 달성공원 → 대구향교 → 국립대구박물관 → 구암서원 === 공원 === 두류공원 공원명 위치 주요시설 달성공원 중구 달성동 ㆍ달구벌 토성, 향토역사관, 동물원, 관풍루, 최재우동상 ㆍ달성서씨, 유허비, 어린이 헌장비 등 경상감영공원 중구 포정동 ㆍ조선조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 ㆍ선화당, 징청각, 통일종각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중구 동인동 ㆍ달구벌대종, 도서관, 영상시설, 화합의 광장, 명언의 오솔길 ㆍ국채보상운동기념관 2·28기념 중앙공원 중구 동인동 ㆍ중앙분수, 실개천, 청소년광장 앞산공원 남구 대명동 ㆍ낙동강 승전기념관, 충혼탑, 안일사, 은적사 ㆍ케이블카, 승마장, 심신수련장 두류공원 달서구 성당동 ㆍ야외공연장, 문화예술회관, 관광정보센터, 도서관, 이월드 ㆍ인물동산, 야구장, 수영장, 유도관, 테니스장 팔공산자연공원 동구 도학동 ㆍ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갓바위, 북지장사, 야영장(3개소) ㆍ통일약사대불, 팔공스카이라인, 집단시설지구(3개소) , 시민안전테마파크 등 비슬산자연공원 달성군 유가읍 ㆍ용연사, 유가사, 대견사, 대견봉 ㆍ참꽃군락지, 처연기념물 제435호 비슬산 암괴류 === 대구 12경 === 대구광역시가 선정한 대구 12경으로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 있다. 파일:1경 팔공산.jpg|alt=1경 팔공산|1경 팔공산 파일:2경 비슬산.jpg|alt=2경 비슬산|2경 비슬산 파일:3경 강정고령보.jpg|alt=3경 강정고령보(디아크)|3경 강정고령보(디아크) 파일:4경 신천.jpg|alt=4경 신천|4경 신천 파일:5경 수성못.jpg|alt=5경 수성못|5경 수성못 파일:6경 달성토성.jpg|alt=6경 달성토성|6경 달성토성 파일:7경 경상감영.jpg|alt=7경 경상감영공원|7경 경상감영공원 파일:8경 국채보상기념공원.jpg|alt=8경 국채보상기념공원|8경 국채보상기념공원 파일:9경 동성로.jpg|alt=9경 동성로|9경 동성로 파일:10경 서문시장.jpg|10경 서문시장 파일:11경 83타워.jpg|11경 83타워 파일:12경 대구스타디움.jpg|alt=12경 대구스타디움|12경 대구스타디움 === 요리 === 한우육회, 납작만두, 야끼우동, 중화비빔밥, 석쇠불고기(북성로), 뭉티기, 막창구이, 곱창구이(안지랑) 등이 대구광역시에서 유명한 음식이다. ==== 대구 10미 ==== 대구광역시 10미에는 육개장, 막창 구이, 뭉티기(소 생고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가 있다. 파일:1미-육개장.jpg|alt=1미 육개장|1미 육개장 파일:2미-막창구이.jpg|alt=2미-막창구이|2미 막창구이 파일:3미-뭉티기.jpg|alt=3미-뭉티기|3미 뭉티기 파일:4미-동인동찜갈비.jpg|alt=4미-동인동찜갈비|4미 동인동찜갈비 파일:5미-논메기매운탕.jpg|alt=5미-논메기매운탕|5미 논메기매운탕 파일:6미-복어불고기.jpg|alt=6미-복어불고기|6미 복어불고기 파일:7미-누른국수.jpg|alt=7미-누른국수|7미 누른국수 파일:8미-무침회.jpg|alt=8미-무침회|8미 무침회 파일:9미-야끼우동.jpg|alt=9미-야끼우동|9미 야끼우동 파일:10미-납작만두.jpg|alt=10-납작만두|10미 납작만두 대구는 버스와 도시철도가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외부 지역 및 국가와는 철도, 버스, 항공 등으로 연결된다. === 도로 ===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중앙고속도로, 영천상주고속도로, 대구외곽순환고속도로가 지난다. 이상 7개 고속도로 노선 및 5개 국도 노선이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천대로, 앞산순환로, 신천동로, 대구외곽순환고속도로 등 도시고속화도로로 확충되어 있다. 2023년 7월 군위군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면서 영천상주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 분기점 : 금호 분기점, 도동 분기점, 동대구 분기점, 옥포 분기점, 현풍 분기점 * 나들목 : 군위 나들목, 동군위 나들목, 서군위 나들목, 남대구 나들목, 동대구 나들목, 북대구 나들목, 서대구 나들목, 성서 나들목, 수성 나들목, 칠곡 나들목, 유천 나들목, 화원옥포 나들목, 달성 나들목, 북현풍 나들목, 현풍 나들목, 팔공산 나들목 === 버스 === * 시외버스 : 두 개의 고속버스 터미널과 다섯 개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전국 각지로 가는 버스가 운행된다. 버스 등급은 급행·순환·간선·지선·출근 등급이다. * 시내버스 : 수입금의 분배는 대구광역시에서 맡아 하고, 버스의 운행은 개별 회사가 맡아 하는 준공영제로 운영된다. 도시 규모에 비해 도시철도망이 부족한 대구의 대중교통에서 시내버스의 역할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버스 운임은 다음과 같다. 일반/좌석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4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250원, 청소년 850원, 어린이 400원이다. 급행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800원, 청소년 1,300원, 어린이 8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650원, 청소년 1,100원, 어린이 650원이다. 교통카드를 이용하여 버스와 도시철도 모두 최초 교통 수단의 하차부터 30분 이내에 다음 교통 수단으로 갈아탈 경우 무료/할인 환승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대구광역시 버스노선 안내 시스템) === 도시철도 === * 대구 도시철도 : 도시철도는 대구교통공사가 관리하고 운행한다. 대구광역시 북동~남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과 동서로 관통하는 과 남동~북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모노레일 노선인 이 운행되고 있다. 대구 도시철도 노선도(2018년) === 택시 === 중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4,0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10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1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소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8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5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경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2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2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2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 나드리콜 : 대구시에서 중증장애인, 만65세이상의 사람으로서 대중교통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는 콜택시이다. 기본요금이 1,000원이고 거리당 요금이 책정되며, 시내는 최대 3,300원 시외는 최대 6,600원이 한도이다. === 철도 === 대구역과 동대구역에서 경부선, 경북선, 대구선, 동해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KTX와 SRT는 동대구역과 서대구역에서 이용할 수 있다. 2023년 7월 1일부터 군위군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면서 화본역에서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 대구권 광역철도 : 2018년 4월 구미 ~ 경산 구간 공사에 들어가고 2024년에 개통한다. 2, 3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밀양과 김천까지 공사를 할 계획이고 서대구역을 복합환승센터로 건설해 KTX와 SRT가 개통된다. 파일:동대구역.jpg|대체글=동대구역 광장|섬네일|동대구역|351x351px|없음 === 공항 === 대구국제공항 동구 지저동에 대구국제공항이 있다. 대구국제공항의 항공편은 매년 동계항공기간이 끝나면 대폭 늘어난다. 대구공항에서는 국내선 제주․김포 2개 노선이 매주 215편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베이징, 싼야) 24편, 일본(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오키나와, 구마모토, 사가) 177편, 동남아(홍콩, 세부, 방콕, 타이베이, 다낭, 마카오, 하노이) 148편, 대양주(괌) 14편,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14편이 운항되고 있다. ( 대구국제공항) +항공노선 구분 노선명 운항편수 취항 항공사 비고 국내선(3) 대구-인천 4편/일 대한항공 대구-제주 32편/일 대한, 아시아나, 티웨이, 제주, 에어부산 대구-김포 2편/일 에어부산 국제선(23) 중국 대구-상하이 7편/주 中동방항공 대구-베이징 3편/주 제주항공 대구-선양 2편/주 대한항공 대구-싼야 4편/주 에어부산 일본 대구-구마모토 3편/주 티웨이항공항공 대구-가고시마 3편/주 제주항공 대구-도쿄 35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 대구-오사카 36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대구-후쿠오카 28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대구-삿포로 14편/주 에어부산 대구-오키나와 8편/주 티웨이항공 동남아 대구-홍콩 6편/주 티웨이항공 대구-타이베이 23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타이거에어, 제주항공 대구-세부 12편/주 티웨이항공 대구-다낭 42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 비엣젯항공 대구-나트랑 2편/주 제주항공 대구-클라크 3편/주 티웨이항공 대구-하노이 7편/주 티웨이항공 대구-마카오 5편/주 제주항공 대구-방콕 14편/주 티웨이항공 대양주 대구-괌 7편/주 티웨이항공 유럽 대구-블라디보스톡 3편/주 티웨이항공 2012년 대구의 지역내 총생산(GRDP)은 38조 7,000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4%이다. 2013년 대구광역시의 1인당 개인소득은 16개 시도 중 6번째로 상위권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지역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1인당 개인소득은 1,538만원으로 울산 1,916만원, 서울 1,869만원, 부산 1,618만원, 대전 1,576만원, 제주 1,564만원에 이어 16개 시ㆍ도중 6번째로 높았다. 시ㆍ도 전체 명목 개인소득은 796조원으로 1년 전보다 30조원(3.9%)이 늘었다. 실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경제성장률)도 3.8%로 전국 5위를 나타냈다. 이밖에 대구의 지역 총소득은 52조 6,000억원으로 전국의 3.7%를 차지했으며 지역 내 총생산 대비 지역 총소득 비율은 117.3 수준이었다. 2018년 대구의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는 50조 8,000억원으로 전국의 2.9%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인당 개인소득은 2,060만원으로 증가했다. === 농업 === 대구의 농업은 1995년 달성군과의 도농 통합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2015년 기준 농가호수는 16,571호, 농가인구는 44,542명, 농경지면적은 8.291ha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 상업 === 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미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이름을 떨쳤다. 2017년 기준 대구에는 9개의 백화점과 21개의 대형마트, 7개의 쇼핑센터, 151개소의 등록시장, 1개의 종합유통단지가 있다. + 대구광역시 유통시설 계(단위: 개소) 백화점 쇼핑센터 대형마트 전문점 등록시장 그밖의 대규모점포 207 9 7 21 4 151 15 +주요 전통시장 시장명 소재지 점포수(단위: 개) 서문시장 중구 국채보상로 380일원 3,817 칠성시장 북구 칠성시장로 28일원 996 팔달시장 북구 팔달로 37길 11일원 900 서남(신)시장 달서구 달구벌대로 329길 17일원 196 봉덕(신)시장 남구 봉덕로 27길 16일원 323 +종합유통단지 구분 계 전시컨벤션센터 도매단지 기업관 물류단지 지원시설 공공시설용지 면적(㎡) 837,721.1 79,966.0 165,102.6 56,449.2 160,588.3 50,470.8 325,144.2 업체수 2,977 32 2,538 217 108 82 - === 공업 === 대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을 통해 지속 성장해 왔다. 과거 섬유업체 수가 전채 사업체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였으나. 2017년 대구시 전체 산업단지 내 업체 수는 기계·금속공장이 3,882개소로 섬유공장 1,736개소보다 비중이 크다. ==== 산업 단지 ==== 산업단지 명 위치(구·군) 면적(천m2) 업체수 등급 비고 성서산업단지 달서구, 달성군 다사읍 10,835 2,566 지방 1, 2, 3, 4, 5차 달성산업단지 달성군 논공읍, 구지면 6,820 316 지방 1, 2차 대구염색산업단지 서구 비산7동 855 124 지방 비산염색공단 검단산업단지 북구 검단동 796 323 지방 옥포농공단지 달성군 옥포읍 160 38 농공 구지농공단지 달성군 구지면 193 23 농공 제3공단 북구 노원동 1,094 991 일반 서대구공단 서구 상중이동 2,417 533 일반 현풍공단 달성군 현풍읍 265 8 일반 대구 사이언스 파크 달성군 구지면 265 8 국가 대구 첨단의료복합단지 동구 신서동 1,030 0 국가 2009~2038년 === 미래 신성장 산업 === 대구는 미래첨단의료 선도도시, 미래형 자동차 선도도시, ICT․IoT 기반의 스마트시티 조성,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통한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 첨단 의료 ==== 의료산업 분야는 2018년까지 국책연구기관 15개, 의료기업 130개, 양질의 일자리 창출 4,300개, 의료관광객 유치 25,000명을 목표로 「메디시티 대구」 조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첨단의료복합단지의 글로벌 수준 발전과 의료관광의 확대 등을 통해 대구를 세계적인 메디시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대구 소재 한국뇌연구원-첨단장비센터 +의료기관 현황(2017년) 계 상급종합 종합병원 병원 요양병원 정신병원 의원 치과병원 치과의원 한방병원 한의원 조산원 부설의원 3,667 4 8 112 61 1 1,714 18 868 2 871 - 8 ==== 미래형 자동차 ==== 미래형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전기상용차 생산공장 건립 투자협약, 대동공업-르노삼성 컨소시엄을 통한 1톤급 전기상용차 개발 및 생산 확정,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단지 지정(국토부),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인프라 구축 등 미래형자동차 선도도시로서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2017년 대구국제미래자동차엑스포 ==== 스마트시티 ==== 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혁신플랫폼인 ‘대구형 스마트시티’ 조성하기 위하여 ICT·IoT(사물인터넷) 융합기술 경쟁력확보, SW융합 산업육성, ICT융복합스포츠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시는 스마트시티 조성을 위한 인프라 건설과 운영체계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2020년 1월 22일 영국 왕립 표준협회(BSI)로부터 스마트시티국제표준 인증서 ISO 37106 인증을 받았다. 스마트시티국제표준은 2018년 ‘ 국제표준화기구 (ISO)’가 마련한 기준으로, BSI가 비전, 시민중심, 디지털, 개방 및 협력 등 4개 기준에 맞는 도시에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 한국 내 광역지자체 중에서는 대구가 처음으로 ISO인증을 받았다. 대구 2017 대한민국ICT융합엑스포 ==== 신재생 에너지 ==== 대구광역시는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203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보급률 20% 이상, 에너지 소비 15% 절감 목표로 에너지 신사업 Test-bed 구축. 분산전원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지역에너지 관련 산업 육성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대구 2017 국제그린에너지엑스포 === 안전 도시 === 2020년 대구는 코로나19 범유행 시국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철저한 방역과 치료를 통해 코로나19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세계 부부의 날 위원회는 ‘2020 세계 부부의 날 국가 기념 행사’에서 대구시민 일동과 대구시 의료진(대구시의사회, 대구시간호사회)에게 ‘2020 올해의 특별 가족상’을 수상하였으며, “대구시민과 의료진 등 모든 구성원들이 선진 시민 의식을 발휘해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쳐 코로나19를 극복해 전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적을 창출했기에 특별 가족상의 취지와 부합한다”라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 청결 도시 === 2020년 6월 11일 대구상수도사업본부는 시민들이 믿고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수돗물을 가정집 수도꼭지까지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해 대구 시내 수도관 전체를 세척할 계획을 발표했다. === 건설 === * 화성산업 * 서한 * 태왕E&C * SM우방 === 금융 === * 대구은행 === 방송 === * KBS대구방송총국 * 대구문화방송 * TBC * 대구교통방송 * 대구극동방송 * 기독교대구방송 * 대구가톨릭평화방송 * 대구불교방송 * 대구원음방송 * 대구국악방송 * CMB 대구방송 * HCN 금호방송 * LG헬로비전 대구방송 * SK브로드밴드 대구방송 * 한국케이블TV푸른방송 === 언론 === * 매일신문 * 영남일보 * 대구신문 * 대구일보 === 유통 === * 대구백화점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K리그1 대구 FC, KBL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가 있다. + 리그명 팀명 창단연도 홈 경기장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1982년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K리그1 대구 FC 2002년 DGB대구은행파크 KBL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1994년 대구실내체육관 한강 이남에서는 대전권(대전, 계룡, 논산, 세종)과 함께 주요 국방 도시이기도 하다. 제2작전사령부, 제50보병사단, 제5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육군 부대와 공군 1방공유도탄여단, K2 공군비행장에 공군공중전투사령부, 중앙방공통제소, 공군군수사령부, 제11전투비행단 등과 주한 미군 부대 캠프 워커, 캠프 헨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수성구의 고산지구 개발을 위해 제50보병사단, 제2작전사령부, 제5군수지원사령부를 칠곡군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다음 도시와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었다. === 자매결연도시 === 국가 도시 자매결연시기 25px 조지아주 25px 애틀랜타 1981.11.10 25px 알마티 1990.11.26 산둥성(山东省) 칭다오시(青岛市) 1993.12.4 25px 미나스제라이스주 1994.6.21 25px 히로시마현 25px 히로시마시 1997.5.2 25px 상트페테르부르크 1997.11.3 25px 플로브디프 2002.10.24 25px 타이베이시 2010.11.4 저장성(浙江省) 닝보시(宁波市) 2013.6.8 25px 밀라노 2015.7.2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 2015.11.10 25px 위스콘신주 25px 밀워키 2017.9.20 다낭 2018.8.3 === 자매우호도시 === 국가 도시 자매우호시기 장쑤성(江苏省) 양저우시(扬州市) 2003.3.21 장쑤성 옌청시(盐城市) 2003.12.7 랴오닝성(辽宁省) 선양시(沈阳市) 2003.12.9 25px 효고현 25px 고베시 2010.7.23 호찌민시 2015.5.29 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绍兴市) 2015.10.26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시(武汉市) 2016.3.24 25px 방콕 2017.8.17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长沙市) 2018.7.31 25px 가오슝시 2018.9.13 박닌성(北寧省) 2019.2.22 === 달빛 동맹 === ‘달구벌’(대구)과 ‘빛고을’(광주)에서 이름을 딴 대구와 광주의 ‘달빛동맹’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를 놓고 지자체 간 갈등이 심해지자 소모적인 경쟁 대신 어느 곳이 선정돼도 연구개발 사업을 공동으로 하기로 한 데서 시작됐다. 이후 대구-광주 내륙철도사업, 대구에 광주시민의 숲을, 광주에 대구 시민의 숲을 조성하는 등 문화·예술·민간까지 교류·협력이 확산됐다. 두 지역 통기타 뮤지션들의 모임인 ‘달빛통맹’도 있고, 양 지자체가 두 지역 미혼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달빛오작교’ 행사도 매년 열리고 있다. 2020년에는 광주광역시에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면서 병상 부족이 현실화하자 대구가 광주에 병상나눔을 제안하였다. * 대구광역시의 마천루 목록 * 군위군의 대구광역시 편입 * * 대구광역시청 * 대구광역시의회 * 대구광역시교육청 * 대구교통공사 * 대구지방검찰청 * 대구지방경찰청 * 대구지방법원 * 대구경북연구원 * 대국광역시 버스정보시스템 * 대구광역시 공식 블로그 * 대구통계 분류:대한민국의 옛 임시 수도 분류:1995년 설치
관상동맥
[ "Introduction" ]
[ "\n좌관상동맥(LCA)와 우관상동맥 (RCA)\n관상동맥 우회 수술중인 수술방\n'''관상동맥'''(冠狀動脈, )은 심장의 근육(심근)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들을 말한다. '''심장 동맥'''이라고도 한다.\n\n심장은 온몸에 피를 보내는 펌프로 인체에서 심장에 의해 피를 공급받지 않는 기관이나 조직은 없으며, 심장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관상동맥은 심장이 필요로 하는 피를 공급하는 동맥과 그 가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상동맥은 대동맥의 기시부에서 좌우 두갈래로 분지하며 심장 전체를 둘러싸는데, 둘러싸는 모양이 관(冠)과 같다 하여 관상동맥이라 불린다. 관상동맥은 대동맥, 오른관상동맥(RCA)과 왼관상동맥(LCA) 총 3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왼관상동맥은 왼앞내림동맥(LAD)과 휘돌이가지(LCx)로 나누어진다.\n\n관상동맥의 동맥경화는 관상동맥질환이라 불리며 협심증과 심근경색의 원인이 된다.\n\n\n\n\n\n분류:심장해부학\n분류:동맥" ]
좌관상동맥(LCA)와 우관상동맥 (RCA) 관상동맥 우회 수술중인 수술방 '''관상동맥'''(冠狀動脈, )은 심장의 근육(심근)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들을 말한다. '''심장 동맥'''이라고도 한다. 심장은 온몸에 피를 보내는 펌프로 인체에서 심장에 의해 피를 공급받지 않는 기관이나 조직은 없으며, 심장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관상동맥은 심장이 필요로 하는 피를 공급하는 동맥과 그 가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상동맥은 대동맥의 기시부에서 좌우 두갈래로 분지하며 심장 전체를 둘러싸는데, 둘러싸는 모양이 관(冠)과 같다 하여 관상동맥이라 불린다. 관상동맥은 대동맥, 오른관상동맥(RCA)과 왼관상동맥(LCA) 총 3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왼관상동맥은 왼앞내림동맥(LAD)과 휘돌이가지(LCx)로 나누어진다. 관상동맥의 동맥경화는 관상동맥질환이라 불리며 협심증과 심근경색의 원인이 된다. 분류:심장해부학 분류:동맥
선저우 5호
[ "Introduction", "외부 링크" ]
[ "\n섬네일\n'''선저우 5호''' (神舟五号)는 2003년 10월 15일,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된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다.\n\n선저우 5호는 현지 시각 9시(UTC +8) 정각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어, 9시 10분에 궤도로 진입했다. 이 우주선에는 전 전투기 조종사 양리웨이(楊利偉) 중령이 탑승했다.\n\n이 발사로 중국은 소련, 미국에 이어 사람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킨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n\n발사 장면은 생중계되지는 않았고, 발사 직후 CCTV를 통해 짧게 소개되었다.\n\n우주선은 지구 궤도를 14회 선회한 다음 발사된 지 21시간 만에 귀환했다.\n", "* http://space.com/missionlaunches/shenzhou5_launch_031014.html\n\n\n\n\n\n\n분류:선저우 계획\n분류:중국 국가항천국\n분류:중국의 우주 개발\n분류:2003년 10월\n분류:2003년 중국\n분류:2003년 발사한 우주선\n분류:유인 우주 비행 임무" ]
섬네일 '''선저우 5호''' (神舟五号)는 2003년 10월 15일,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된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다. 선저우 5호는 현지 시각 9시(UTC +8) 정각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어, 9시 10분에 궤도로 진입했다. 이 우주선에는 전 전투기 조종사 양리웨이(楊利偉) 중령이 탑승했다. 이 발사로 중국은 소련, 미국에 이어 사람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킨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 발사 장면은 생중계되지는 않았고, 발사 직후 CCTV를 통해 짧게 소개되었다. 우주선은 지구 궤도를 14회 선회한 다음 발사된 지 21시간 만에 귀환했다. * http://space.com/missionlaunches/shenzhou5_launch_031014.html 분류:선저우 계획 분류:중국 국가항천국 분류:중국의 우주 개발 분류:2003년 10월 분류:2003년 중국 분류:2003년 발사한 우주선 분류:유인 우주 비행 임무
나노미터
[ "Introduction", "역사", "나노미터 단위의 길이", "옹스트롬", "같이 보기", "각주" ]
[ "\n\n'''나노미터'''(, , 단위: '''nm''')는 미터의 십억분의 일에 해당하는 길이의 단위다. 1나노미터는 10-9m다.\n:\n", "나노미터의 과거 명칭은 밀리마이크로미터(millimicrometre), 더 간단히 말하면 밀리마이크론(millimicron)인데 이는 이것이 마이크론(마이크로미터)의 이었기 때문이다.\n", "* DNA 1가닥의 지름: 약 2,500 피코미터(pm)\n* 마이크로미터: (1,000,000pm)\n", "원자의 크기나 분자의 크기를 다루는 단위인 옹스트롬(Å)은 1Å = 약 0.1nm(나노미터)이다. 물(H2O)분자는 약 0.2nm , 염분(NaCl,소금) 분자는 약 3.7nm로 알려져 있다. 한편 염소 원자의 크기는 79 pm(피코미터) 이고 나트륨 원자의 크기는 190 pm이다.\n", "* 밀리미터\n* PPM\n", "\n\n\n\n\n분류:길이의 단위\n분류:크기 정도 (길이)" ]
'''나노미터'''(, , 단위: '''nm''')는 미터의 십억분의 일에 해당하는 길이의 단위다. 1나노미터는 10-9m다. : 나노미터의 과거 명칭은 밀리마이크로미터(millimicrometre), 더 간단히 말하면 밀리마이크론(millimicron)인데 이는 이것이 마이크론(마이크로미터)의 이었기 때문이다. * DNA 1가닥의 지름: 약 2,500 피코미터(pm) * 마이크로미터: (1,000,000pm) 원자의 크기나 분자의 크기를 다루는 단위인 옹스트롬(Å)은 1Å = 약 0.1nm(나노미터)이다. 물(H2O)분자는 약 0.2nm , 염분(NaCl,소금) 분자는 약 3.7nm로 알려져 있다. 한편 염소 원자의 크기는 79 pm(피코미터) 이고 나트륨 원자의 크기는 190 pm이다. * 밀리미터 * PPM 분류:길이의 단위 분류:크기 정도 (길이)
미터
[ "Introduction", "유래 및 역사", "미터에 적용된 SI 접두어", "참고 문헌",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n\n'''미터'''(, , , 기호: '''m''')는 길이나 거리의 SI 단위이다. 이 단위는 현재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에 측정 기술이 길이와 단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제안된 것으로, 시간의 경우에는 1013의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다.\n", "미터(m)라는 단어는 ‘’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단위’를 뜻하는 ‘’가 그 기원이다.\n\n1790년, 프랑스 정부에서 전 세계적인 단위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터법을 제정할 당시, 거리의 기준을 지구로 삼았다. 이에 따라 지구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10,000km, 이 거리의 4배인 지구 전체 자오선 길이인 40,000km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법이 제정되었다.\n참고로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인 10,000km를 십진법상의 표준이 된 이유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n\n결국 지리적으로 1m는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n1797년 처음 영어에서의 활용이 보고되었다.\n\n초기의 1m의 표준 원기는 금속 물질로 제작했으나,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의 환경에 따른 미세한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n\n* 1793년: 남북극과 적도 사이의 거리의 1/10,000,000.\n* 1795년: 황동으로 된 임시 미터 원기의 길이.\n* 1799년: 백금으로 된 표준 미터 원기의 길이.\n* 1889년: 단면이 X자이며,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된 국제 미터 원기 원형의 길이.\n* 1960년: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의 2p10과 5d5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 파장의 1650763.73배.\n* 1983년: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 (빛의 속력 참고)\n", "SI 접두어를 갖는 미터는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n\n\n\n\n 10n\n\n 이름\n\n 기호\n\n\n\n 10n\n\n 이름\n\n 기호\n\n\n\n100\n\n '''미터'''\n\n m\n\n \n\n \n\n \n\n \n\n\n\n101\n\n 데카미터\n\n dam\n\n\n\n10−1\n\n 데시미터\n\n dm\n\n\n\n102\n\n 헥토미터\n\n hm\n\n\n\n10−2\n\n 센티미터\n\n cm\n\n\n\n103\n\n 킬로미터\n\n km\n\n\n\n10−3\n\n 밀리미터\n\n mm\n\n\n\n106\n\n 메가미터\n\n Mm\n\n\n\n10−6\n\n 마이크로미터\n\n µm\n\n\n\n109\n\n 기가미터\n\n Gm\n\n\n\n10−9\n\n 나노미터\n\n nm\n\n\n\n1012\n\n 테라미터\n\n Tm\n\n\n\n10−12\n\n 피코미터\n\n pm\n\n\n\n1015\n\n 페타미터\n\n Pm\n\n\n\n10−15\n\n 펨토미터\n\n fm\n\n\n\n1018\n\n 엑사미터\n\n Em\n\n\n\n10−18\n\n 아토미터\n\n am\n\n\n\n1021\n\n 제타미터\n\n Zm\n\n\n\n10−21\n\n 젭토미터\n\n zm\n\n\n\n\n\n1024\n\n 요타미터\n\n Ym\n\n\n\n10−24\n\n 욕토미터\n\n ym\n\n\n\n1027\n\n 론나미터\n\n Rm\n\n\n\n10−27\n\n 론토미터\n\n rm\n\n\n\n1030\n\n 퀘타미터\n\n Qm\n\n\n\n10−30\n\n 퀙토미터\n\n qm\n\n\n\n\n", "* A Dictionary of Scientific Units - including dimensionless numbers and scales. 5th Edition 1986. H.G. Jerrard and D.B. McNeill.\n", "* 프랑스원정대의 자오선 측정보고서(French Geodesic Mission)\n* SI 단위계\n* 퀙토미터(10-30m)\n* 론토미터(10-27m)\n* 욕토미터(10-24m)\n* 젭토미터(10-21m)\n* 아토미터(10-18m)\n* 펨토미터(10-15m)\n* 피코미터(10-12m)\n* 나노미터(10-9m)\n* 마이크로미터(10-6m)\n* 밀리미터(10-3m)\n* 센티미터(10-2m)\n* 데시미터(10-1m)\n* 데카미터(101m)\n* 헥토미터(102m)\n* 킬로미터(103m)\n* 메가미터(106m)\n* 기가미터(109m)\n* 테라미터(1012m)\n* 페타미터(1015m)\n* 엑사미터(1018m)\n* 제타미터(1021m)\n* 요타미터(1024m)\n* 론나미터(1027m)\n* 퀘타미터(1030m)\n", "* History of the meter at the U.S.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NIST)\n* History of the meter at the International Bureau of Weights and Measures (BIPM)\n* Timeline of history of the metre at the NIST \n* Bureau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asures - Lengths\n\n\n\n\n\n분류:길이의 단위\n분류:SI 기본 단위" ]
'''미터'''(, , , 기호: '''m''')는 길이나 거리의 SI 단위이다. 이 단위는 현재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에 측정 기술이 길이와 단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제안된 것으로, 시간의 경우에는 1013의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다. 미터(m)라는 단어는 ‘’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단위’를 뜻하는 ‘’가 그 기원이다. 1790년, 프랑스 정부에서 전 세계적인 단위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터법을 제정할 당시, 거리의 기준을 지구로 삼았다. 이에 따라 지구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10,000km, 이 거리의 4배인 지구 전체 자오선 길이인 40,000km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법이 제정되었다. 참고로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인 10,000km를 십진법상의 표준이 된 이유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리적으로 1m는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1797년 처음 영어에서의 활용이 보고되었다. 초기의 1m의 표준 원기는 금속 물질로 제작했으나,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의 환경에 따른 미세한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 1793년: 남북극과 적도 사이의 거리의 1/10,000,000. * 1795년: 황동으로 된 임시 미터 원기의 길이. * 1799년: 백금으로 된 표준 미터 원기의 길이. * 1889년: 단면이 X자이며,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된 국제 미터 원기 원형의 길이. * 1960년: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의 2p10과 5d5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 파장의 1650763.73배. * 1983년: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 (빛의 속력 참고) SI 접두어를 갖는 미터는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10n 이름 기호 10n 이름 기호 100 '''미터''' m         101 데카미터 dam 10−1 데시미터 dm 102 헥토미터 hm 10−2 센티미터 cm 103 킬로미터 km 10−3 밀리미터 mm 106 메가미터 Mm 10−6 마이크로미터 µm 109 기가미터 Gm 10−9 나노미터 nm 1012 테라미터 Tm 10−12 피코미터 pm 1015 페타미터 Pm 10−15 펨토미터 fm 1018 엑사미터 Em 10−18 아토미터 am 1021 제타미터 Zm 10−21 젭토미터 zm 1024 요타미터 Ym 10−24 욕토미터 ym 1027 론나미터 Rm 10−27 론토미터 rm 1030 퀘타미터 Qm 10−30 퀙토미터 qm * A Dictionary of Scientific Units - including dimensionless numbers and scales. 5th Edition 1986. H.G. Jerrard and D.B. McNeill. * 프랑스원정대의 자오선 측정보고서(French Geodesic Mission) * SI 단위계 * 퀙토미터(10-30m) * 론토미터(10-27m) * 욕토미터(10-24m) * 젭토미터(10-21m) * 아토미터(10-18m) * 펨토미터(10-15m) * 피코미터(10-12m) * 나노미터(10-9m) * 마이크로미터(10-6m) * 밀리미터(10-3m) * 센티미터(10-2m) * 데시미터(10-1m) * 데카미터(101m) * 헥토미터(102m) * 킬로미터(103m) * 메가미터(106m) * 기가미터(109m) * 테라미터(1012m) * 페타미터(1015m) * 엑사미터(1018m) * 제타미터(1021m) * 요타미터(1024m) * 론나미터(1027m) * 퀘타미터(1030m) * History of the meter at the U.S.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NIST) * History of the meter at the International Bureau of Weights and Measures (BIPM) * Timeline of history of the metre at the NIST * Bureau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asures - Lengths 분류:길이의 단위 분류:SI 기본 단위
이토 히로부미
[ "Introduction", "생애", "저서", "가족 관계", "인간 관계", "학력", "사상과 신념", "참고 문헌", "일화", "관련 작품",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n\n'''이토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정치가이다. 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 , )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n\n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1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으로 시작하여 후작, 공작으로 승작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하였다. 전공은 화학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 받았다.\n\n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하였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n", "=== 생애 초기 ===\n==== 출생과 가계 ====\n파일:Hirobumi Ito as Governor of Korea.jpg|210px|섬네일|왼쪽|한복을 입은 이토. 한국 통감 시대, 전열, 왼쪽에서 두번째가 통감부인 이토 우메코\n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n\n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n\n==== 소년기 ====\n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n\n==== 청년기 ====\n===== 요시다의 문하생 =====\n파일:Shoin Yoshida.jpg|섬네일|200px|스승 요시다 쇼인\n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n\n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n\n===== 막부 타도와 존왕양이 운동 =====\n청년 지사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n스승 요시다 쇼인의 동상\n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n\n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n\n==== 영국 유학과 귀국 ====\n파일:Choshu Five.jpg|섬네일|120px|왼쪽|영국에 파견된 5명의 유학생 장주 5걸, 좌측 상단에 앉은 이가 이토 히로부미\n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옘병\n\n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n\n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 정책을 수행하였다.\n\n==== 막부 타도 운동 ====\n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n\n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n\n=== 정치 활동 ===\n==== 정계 입문 초기 ====\n\n파일:Iwakura mission members.jpg|210px|섬네일|오른쪽|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부터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야마구치 나오요시, 기도 다카요시.\n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n\n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n\n==== 권력 장악 ====\n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n\n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n\n==== 일본 제국 총리대신 ====\n파일:Meiji Emperor.jpg|섬네일|200px|일본 천황 메이지, 그는 이토를 신임하였고 그의 개혁 정책을 전폭 후원하였다.\n===== 1차 총리 취임과 퇴임 =====\n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n\n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n\n=====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 =====\n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n\n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n\n===== 2번째 총리직 =====\n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 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n\n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n\n==== 3번째 총리직 ====\n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n\n==== 4번째 총리직 ====\n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n\n===== 외교 활동 =====\n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n\n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n\n====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n파일:Prince Ito and Crown Prince of Korea.jpg|섬네일|오른쪽|180px|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함께 찍은 사진 (1905년)\n하세가와 대장과 함께 통감부로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 (앞쪽)\n\n\n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n\n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n\n통감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서 도로 개설을 역설하고 도로 건설에 착수한다. 1895년 5월에 제정된 여학교관제가 공포되지 못하여 관립여학교의 설립이 지연되고 있었는데, 1908년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여 고등여학교의 설립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최초의 여학교 설립은 아니었으나 같은해 4월에 공립 한성고등여학교를 설립한다.\n\n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n\n=== 생애 후반 ===\n==== 한국 고종 양위 주도 ====\n\n파일:Itô Hirobumi.jpg|섬네일|160px|왼쪽|조선통감 재직 시절\n\n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n\n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n\n파일:Gojong of the Korean Empire 01.jpg|섬네일|210px|오른쪽|대한제국 황제 고종(일본정부와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오자 이완용은 고종의 퇴진이 왕실과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n\n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n\n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n\n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n\n==== 한국 고종 양위 사건의 여파 ====\n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n\n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n\n==== 퇴직과 사망 ====\n\n파일:Ahn Joong Keun 1908.jpg|섬네일|오른쪽|170px|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한국인 저격조의 한 사람 안중근 의사.\n\n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n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n\n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n\n==== 사망에 이르는 과정 ====\n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역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 및 콴청쯔()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 및 (다음 역인)하얼빈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n\n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n\n=== 장례식 ===\n==== 시신 운구 작업 ====\n파일:이토 히로부미 장례 행렬.JPG|섬네일|300px|오른쪽|도쿄 가스미가세키 부근을 지나는 모습\n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제국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 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n\n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n\n==== 국장 거행 ====\n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n\n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n\n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렀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n\n파일:Grave of ito hirobumi nishioi shinagawa tokyo 2009.JPG|섬네일|오른쪽|140px|도쿄 시내에 소재한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n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n\n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임시증간호 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n\n==== 조선의 반응 ====\n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n\n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n\n=== 사후 ===\n파일:Series C 1K Yen Bank of Japan note - front.jpg|210px|섬네일|왼쪽|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그려진 유통된 일본 1000엔 지폐 (1963년부터 1984년까지 통용됨.)\n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n\n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n", "* 《일본 헌법 정의 해제》 (1882년)\n",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는 공작에 올랐다.\n\n* (증조부) 이토 야에몬()\n** (조부) 이토 스구에몬()\n** (조모) 모리타 미치타네()의 딸\n*** (부) 이토 주조(, 1816년 ~ 1896년)\n*** (모) 이토 고토코() - 아키야마 조자에몬()의 딸\n**** (부인) 이토 스미코()\n**** (부인) 이토 우메코(, 1848년 ~ 1924년)\n***** (양자) 이토 히로쿠니(, 1870년 ~ 1931년) - 친부는 조슈번사 이노우에 미쓰토(, 이노우에 가오루 후작의 형)\n***** (양자부) 이토 다마코() - 다카시마 가에몬(, 역술가)의 장녀\n****** (양손) 이토 히로요시(, 공작)\n****** (양손부) 이토 후쿠코() - 내각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손녀, 축구 선수 다카하시 도요지의 사촌\n******* (양증손녀) 센게 후미코() - 히로요시의 셋째 딸, 센게 다쓰히코(, 이즈모 국조가())의 부인\n***** (서장남) 이토 분키치(, 남작) - 본디 히로부미의 서자이나 기다 이쿠자부로()의 장남으로 길러졌고 후에 히로부미의 양자로서 호적에 올려졌다.\n***** (서장자부) 가쓰라 다로()의 다섯째 딸\n***** (서차남) 이토 신이치(, 1890년 ~ 1980년) - 어머니는 신바시의 게이샤\n***** (장녀) 이토 사다코() - 요절, 어머니는 우메코\n***** (차녀) 스에마쓰 이쿠코() - 어머니는 우메코, 스에마쓰 겐초(, 내무대신)의 부인\n***** (삼녀) 니시 아사코() - 어머니는 히로부미의 하녀(女中, 다마 지역 출신), 니시 겐시로(, 루마니아 공사)의 부인\n****** (외손녀) 후지이 세이코() - 니시 겐시로 부부의 딸, 후지이 게이노스케(, 체코슬로바키아 공사)의 부인\n******* (외증손녀) 다쓰케 미요코() - 후지이 게이노스케 부부의 장녀, 다쓰케 가게이치(, 덴마크 공사)의 부인\n******* (외증손녀) 후지사키 후사코() - 후지이 부부의 차녀, 후지사키 마사토(, 일본 최고재판소 판사)의 부인\n******** (외고손) 후지사키 이치로() - 후지사키 마사토 부부의 아들, 외무심의관\n******* (외증손녀) 쓰루미 쓰다코() - 후지이 부부의 셋째 딸, 쓰루미 기요히코(, 스위스 대사)의 부인\n******* (외증손녀) 마쓰모토 에쓰코() - 후지이 부부의 넷째 딸, 마쓰모토 주로(, 방위청 장관)의 부인\n******** (외고손) 마쓰모토 다케아키(, 1959년 ~ ) - 마쓰모토 주로 부부의 아들, 중의원 8선 의원, 외무대신, 총무대신\n***** (사녀, 서녀) 오타케 사와코() - 스에마쓰 겐초 부부의 양녀로 입적, 오다케 도라오(, 오다케 다케(, 기계공학자)의 아들)의 부인\n", "*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수양딸이자 제자로 삼았고 역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朴重陽)을 제자로 삼았다.\n", "*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n\n=== 명예 박사 학위 ===\n* 예일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n", "=== 개화론자로 전환 ===\n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n\n=== 여성 교육에 대한 입장 ===\n1886년 그는 한참 개항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토는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것은 인식하지 않고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이토는 우연히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86년 여자 교육 장려 회의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887년 이 단체를 한층 발전시켜 정식으로 일본 여성교육 장려 협회를 출범한다. 이후 그는 위원회를 주도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일본 각지에 홍보하고 다닌다. 이후 그의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와 에이치, 이와사키 등이 참가, 도쿄 여자 대학관(도쿄 여자 대학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여성 교육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이토는 일본 여자 대학의 창시자인 진조 나루세()로부터 여대 설립 계획에 협력을 요청을 받자,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n\n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n", "* 정일성, 《이토 히로부미: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지식산업사, 2002)\n* 이종각, 《이토 히로부미: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동아일보사, 2010)\n* 윤덕한,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중심, 1999)\n",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n이토 히로부미\n* 이토는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궁들에게 시계, 목걸이 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또 이때 선물한 초콜릿이 한국 최초의 초콜릿이란 설도 있다.\n\n* 이토를 사살한 대한제국의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평화의 파괴 원흉으로 규정하고, 근거로 총 15개 조를 제시했다. 재판, 신문 조서에서 밝혔던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n\n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n", "=== 다큐멘터리 ===\n;한국\n* 《역사스페셜 이토 저격 영상을 찾아라》 (2009년10월 24일) - KBS 다시보기 \n\n=== 영화 ===\n;한국\n* 《로스트 메모리즈》 (2002년) - 황영일\n* 《도마 안중근》 (2004년) - 윤주상, 정주환\n*《영웅》(2022) - 김승락\n;일본\n* 《바람의 검심: 전설의 최후편》 (2014년) - 오자와 유키요시\n\n=== 드라마 ===\n;한국\n* 대원군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 이묵원\n* 안중근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 박근형\n* 찬란한 여명 (1995년 - 1996년, KBS1) - 김성원\n* 명성황후 (2001년, KBS) - 윤주상\n\n;중국\n* 주향공화 (2003년, CCTV) - 히라타 야스유키\n\n;일본\n* 대하드라마 (NHK)\n** 세 자매 (1967년) - 후쿠다 요시유키\n** 료마가 간다 (1968년) - 나카무라 아츠오\n** 화신 (1977년) - 비토 이사오\n** 사자의 시대 (1980년) - 네즈 진파치\n** 봄의 물마루 (1985년) - 이타미 주조\n** 나는 듯이 (1990년) - 오구라 히사히로\n** 료마전 (2010년) - 오노에 히로유키\n** 야에의 벚꽃 (2013년) - 카토 토라노스케\n** 꽃 타오르다 (2015년) - 게키단 히토리\n\n=== 뮤지컬 ===\n;한국\n* 영웅 (2009년) - 조승룡, 이희정\n* 영웅 (2010년) - 조승룡\n* 영웅 (2011년) - 조승룡, 이희정\n* 영웅 (2012년) - 김도형, 이희정\n* 영웅 (2014년) - 김도형, 이희정\n* 영웅 (2015년) - 김도형, 조승룡\n* 영웅 (2017년) - 김도형, 이정열, 윤승욱\n", "* 박중양\n* 규장각 - 이토가 규장각에서 빼돌린 상당수의 고서들이 현재까지도 일본 궁내청 서릉부(일본왕실 도서관)에 있다\n", "\n", "\n* 이토 히로부미 \n* 이토 히로부미 : 일본 근대의 초상(일본 국립 도서관) \n* 일본은행권 1,000엔\n* 일본의 묘소 : 이토 히로부미\n* 이토 히로부미 기념자료관 \n* 이토 히로부미 가택\n* 역대 일본제국 총리 \n\n\n\n\n\n\n\n\n\n\n\n\n\n\n\n\n\n\n\n\n\n\n\n\n\n \n분류:1841년 출생\n분류:1909년 사망\n분류:메이지 유신 원로\n분류:일본의 원로\n분류:귀족원 의장\n분류:이토 공작가\n분류:일본의 공작\n분류:일본의 후작\n분류:일본의 백작\n분류:메이지 시대의 내각총리대신\n분류:일본의 내각총리대신\n분류:한국통감\n분류:일본의 외무대신\n분류:일본의 사법대신\n분류:일본의 내무대신\n분류:효고현지사\n분류:일본의 외교관\n분류:일본의 인물신 (일본 제국)\n분류:일본의 인물신 (막말)\n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n분류:바스 훈장\n분류:적수리 훈장 수훈자\n분류: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n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n분류:스뱌토고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수훈자\n분류:산마우리치오이라자로 훈장 수훈자\n분류:러시아 제국 백수리 훈장 수훈자\n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n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n분류: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훈장 수훈자\n분류:런던 대학교 동문\n분류:화기에 죽은 사람\n분류:일본의 암살된 정치인\n분류:일본의 암살자\n분류:을미사변 관련자\n분류:이와쿠라 사절단 관련자\n분류:청일 전쟁 관련자\n분류:시모노세키 전쟁 관련자\n분류:일본의 러일 전쟁 관련자\n분류:동양척식주식회사 관련자\n분류:제국주의\n분류:지폐의 인물\n분류:양자\n분류:시나가와구의 역사\n분류:히카리시의 역사\n분류:영국에 거주한 일본인" ]
'''이토 히로부미'''(,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정치가이다. 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 , )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1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으로 시작하여 후작, 공작으로 승작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하였다. 전공은 화학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 받았다. 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하였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 파일:Hirobumi Ito as Governor of Korea.jpg|210px|섬네일|왼쪽|한복을 입은 이토. 한국 통감 시대, 전열, 왼쪽에서 두번째가 통감부인 이토 우메코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 소년기 ====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 청년기 ==== ===== 요시다의 문하생 ===== 파일:Shoin Yoshida.jpg|섬네일|200px|스승 요시다 쇼인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 막부 타도와 존왕양이 운동 ===== 청년 지사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스승 요시다 쇼인의 동상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 영국 유학과 귀국 ==== 파일:Choshu Five.jpg|섬네일|120px|왼쪽|영국에 파견된 5명의 유학생 장주 5걸, 좌측 상단에 앉은 이가 이토 히로부미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옘병 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 정책을 수행하였다. ==== 막부 타도 운동 ====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 정치 활동 === ==== 정계 입문 초기 ==== 파일:Iwakura mission members.jpg|210px|섬네일|오른쪽|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부터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야마구치 나오요시, 기도 다카요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 권력 장악 ====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 일본 제국 총리대신 ==== 파일:Meiji Emperor.jpg|섬네일|200px|일본 천황 메이지, 그는 이토를 신임하였고 그의 개혁 정책을 전폭 후원하였다. ===== 1차 총리 취임과 퇴임 =====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 ===== 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 ===== 2번째 총리직 =====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 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 3번째 총리직 ====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 4번째 총리직 ====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 외교 활동 ===== 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 파일:Prince Ito and Crown Prince of Korea.jpg|섬네일|오른쪽|180px|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함께 찍은 사진 (1905년) 하세가와 대장과 함께 통감부로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 (앞쪽)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 통감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서 도로 개설을 역설하고 도로 건설에 착수한다. 1895년 5월에 제정된 여학교관제가 공포되지 못하여 관립여학교의 설립이 지연되고 있었는데, 1908년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여 고등여학교의 설립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최초의 여학교 설립은 아니었으나 같은해 4월에 공립 한성고등여학교를 설립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 생애 후반 === ==== 한국 고종 양위 주도 ==== 파일:Itô Hirobumi.jpg|섬네일|160px|왼쪽|조선통감 재직 시절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 파일:Gojong of the Korean Empire 01.jpg|섬네일|210px|오른쪽|대한제국 황제 고종(일본정부와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오자 이완용은 고종의 퇴진이 왕실과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 한국 고종 양위 사건의 여파 ====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 퇴직과 사망 ==== 파일:Ahn Joong Keun 1908.jpg|섬네일|오른쪽|170px|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한국인 저격조의 한 사람 안중근 의사.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 ==== 사망에 이르는 과정 ====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역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 및 콴청쯔()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 및 (다음 역인)하얼빈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 장례식 === ==== 시신 운구 작업 ==== 파일:이토 히로부미 장례 행렬.JPG|섬네일|300px|오른쪽|도쿄 가스미가세키 부근을 지나는 모습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제국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 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 국장 거행 ====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렀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파일:Grave of ito hirobumi nishioi shinagawa tokyo 2009.JPG|섬네일|오른쪽|140px|도쿄 시내에 소재한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임시증간호 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 조선의 반응 ====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 사후 === 파일:Series C 1K Yen Bank of Japan note - front.jpg|210px|섬네일|왼쪽|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그려진 유통된 일본 1000엔 지폐 (1963년부터 1984년까지 통용됨.)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일본 헌법 정의 해제》 (1882년)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는 공작에 올랐다. * (증조부) 이토 야에몬() ** (조부) 이토 스구에몬() ** (조모) 모리타 미치타네()의 딸 *** (부) 이토 주조(, 1816년 ~ 1896년) *** (모) 이토 고토코() - 아키야마 조자에몬()의 딸 **** (부인) 이토 스미코() **** (부인) 이토 우메코(, 1848년 ~ 1924년) ***** (양자) 이토 히로쿠니(, 1870년 ~ 1931년) - 친부는 조슈번사 이노우에 미쓰토(, 이노우에 가오루 후작의 형) ***** (양자부) 이토 다마코() - 다카시마 가에몬(, 역술가)의 장녀 ****** (양손) 이토 히로요시(, 공작) ****** (양손부) 이토 후쿠코() - 내각총리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손녀, 축구 선수 다카하시 도요지의 사촌 ******* (양증손녀) 센게 후미코() - 히로요시의 셋째 딸, 센게 다쓰히코(, 이즈모 국조가())의 부인 ***** (서장남) 이토 분키치(, 남작) - 본디 히로부미의 서자이나 기다 이쿠자부로()의 장남으로 길러졌고 후에 히로부미의 양자로서 호적에 올려졌다. ***** (서장자부) 가쓰라 다로()의 다섯째 딸 ***** (서차남) 이토 신이치(, 1890년 ~ 1980년) - 어머니는 신바시의 게이샤 ***** (장녀) 이토 사다코() - 요절, 어머니는 우메코 ***** (차녀) 스에마쓰 이쿠코() - 어머니는 우메코, 스에마쓰 겐초(, 내무대신)의 부인 ***** (삼녀) 니시 아사코() - 어머니는 히로부미의 하녀(女中, 다마 지역 출신), 니시 겐시로(, 루마니아 공사)의 부인 ****** (외손녀) 후지이 세이코() - 니시 겐시로 부부의 딸, 후지이 게이노스케(, 체코슬로바키아 공사)의 부인 ******* (외증손녀) 다쓰케 미요코() - 후지이 게이노스케 부부의 장녀, 다쓰케 가게이치(, 덴마크 공사)의 부인 ******* (외증손녀) 후지사키 후사코() - 후지이 부부의 차녀, 후지사키 마사토(, 일본 최고재판소 판사)의 부인 ******** (외고손) 후지사키 이치로() - 후지사키 마사토 부부의 아들, 외무심의관 ******* (외증손녀) 쓰루미 쓰다코() - 후지이 부부의 셋째 딸, 쓰루미 기요히코(, 스위스 대사)의 부인 ******* (외증손녀) 마쓰모토 에쓰코() - 후지이 부부의 넷째 딸, 마쓰모토 주로(, 방위청 장관)의 부인 ******** (외고손) 마쓰모토 다케아키(, 1959년 ~ ) - 마쓰모토 주로 부부의 아들, 중의원 8선 의원, 외무대신, 총무대신 ***** (사녀, 서녀) 오타케 사와코() - 스에마쓰 겐초 부부의 양녀로 입적, 오다케 도라오(, 오다케 다케(, 기계공학자)의 아들)의 부인 *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수양딸이자 제자로 삼았고 역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朴重陽)을 제자로 삼았다. *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 명예 박사 학위 === * 예일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개화론자로 전환 ===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 여성 교육에 대한 입장 === 1886년 그는 한참 개항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토는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것은 인식하지 않고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이토는 우연히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86년 여자 교육 장려 회의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887년 이 단체를 한층 발전시켜 정식으로 일본 여성교육 장려 협회를 출범한다. 이후 그는 위원회를 주도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일본 각지에 홍보하고 다닌다. 이후 그의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와 에이치, 이와사키 등이 참가, 도쿄 여자 대학관(도쿄 여자 대학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여성 교육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이토는 일본 여자 대학의 창시자인 진조 나루세()로부터 여대 설립 계획에 협력을 요청을 받자,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 * 정일성, 《이토 히로부미: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지식산업사, 2002) * 이종각, 《이토 히로부미: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동아일보사, 2010) * 윤덕한,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중심, 1999)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 이토 히로부미 * 이토는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궁들에게 시계, 목걸이 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또 이때 선물한 초콜릿이 한국 최초의 초콜릿이란 설도 있다. * 이토를 사살한 대한제국의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평화의 파괴 원흉으로 규정하고, 근거로 총 15개 조를 제시했다. 재판, 신문 조서에서 밝혔던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 === 다큐멘터리 === ;한국 * 《역사스페셜 이토 저격 영상을 찾아라》 (2009년10월 24일) - KBS 다시보기 === 영화 === ;한국 * 《로스트 메모리즈》 (2002년) - 황영일 * 《도마 안중근》 (2004년) - 윤주상, 정주환 *《영웅》(2022) - 김승락 ;일본 * 《바람의 검심: 전설의 최후편》 (2014년) - 오자와 유키요시 === 드라마 === ;한국 * 대원군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 이묵원 * 안중근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 박근형 * 찬란한 여명 (1995년 - 1996년, KBS1) - 김성원 * 명성황후 (2001년, KBS) - 윤주상 ;중국 * 주향공화 (2003년, CCTV) - 히라타 야스유키 ;일본 * 대하드라마 (NHK) ** 세 자매 (1967년) - 후쿠다 요시유키 ** 료마가 간다 (1968년) - 나카무라 아츠오 ** 화신 (1977년) - 비토 이사오 ** 사자의 시대 (1980년) - 네즈 진파치 ** 봄의 물마루 (1985년) - 이타미 주조 ** 나는 듯이 (1990년) - 오구라 히사히로 ** 료마전 (2010년) - 오노에 히로유키 ** 야에의 벚꽃 (2013년) - 카토 토라노스케 ** 꽃 타오르다 (2015년) - 게키단 히토리 === 뮤지컬 === ;한국 * 영웅 (2009년) - 조승룡, 이희정 * 영웅 (2010년) - 조승룡 * 영웅 (2011년) - 조승룡, 이희정 * 영웅 (2012년) - 김도형, 이희정 * 영웅 (2014년) - 김도형, 이희정 * 영웅 (2015년) - 김도형, 조승룡 * 영웅 (2017년) - 김도형, 이정열, 윤승욱 * 박중양 * 규장각 - 이토가 규장각에서 빼돌린 상당수의 고서들이 현재까지도 일본 궁내청 서릉부(일본왕실 도서관)에 있다 * 이토 히로부미 * 이토 히로부미 : 일본 근대의 초상(일본 국립 도서관) * 일본은행권 1,000엔 * 일본의 묘소 : 이토 히로부미 * 이토 히로부미 기념자료관 * 이토 히로부미 가택 * 역대 일본제국 총리 분류:1841년 출생 분류:1909년 사망 분류:메이지 유신 원로 분류:일본의 원로 분류:귀족원 의장 분류:이토 공작가 분류:일본의 공작 분류:일본의 후작 분류:일본의 백작 분류:메이지 시대의 내각총리대신 분류:일본의 내각총리대신 분류:한국통감 분류:일본의 외무대신 분류:일본의 사법대신 분류:일본의 내무대신 분류:효고현지사 분류:일본의 외교관 분류:일본의 인물신 (일본 제국) 분류:일본의 인물신 (막말) 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 분류:바스 훈장 분류:적수리 훈장 수훈자 분류: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 분류:스뱌토고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수훈자 분류:산마우리치오이라자로 훈장 수훈자 분류:러시아 제국 백수리 훈장 수훈자 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훈장 수훈자 분류:런던 대학교 동문 분류:화기에 죽은 사람 분류: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분류:일본의 암살자 분류:을미사변 관련자 분류:이와쿠라 사절단 관련자 분류:청일 전쟁 관련자 분류:시모노세키 전쟁 관련자 분류:일본의 러일 전쟁 관련자 분류:동양척식주식회사 관련자 분류:제국주의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양자 분류:시나가와구의 역사 분류:히카리시의 역사 분류:영국에 거주한 일본인
대한민국의 국기
[ "Introduction", "최초의 태극기", "도안과 상징", "규격", "올리는 날", "국기의 변화", "같이 보기", "각주", "인용", "외부 링크" ]
[ "\n\n\n\n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다. 흰색 배경 중앙에 파란색과 빨간색의 태극을, 네 귀퉁이에는 팔괘 중 상하가 대칭되는 사괘인 건(乾, ☰), 곤(坤, ☷), 감(坎, ☵), 리(離, ☲)를 그렸다. 이는 음양화합을 상징한다.\n\n1882년(고종 19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제안되어 고종에 의해 공포되었다. 대한제국이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한 이후 일제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국기로서의 정통성이 계승되었고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n", "=== 조선 ===\n조선 군주의 어기 '태극팔괘도'\n\n태극기는 1882년 조선의 고종이 도안하여 국기로 사용했다. 조선은 현대적인 의미의 국기가 없었으나,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조선 임금의 어기인 태극팔괘도가 있었다. 태극기는 조선군주의 어기인 '태극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고종이 직접 도안하여 제작하였다.\n\n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된다.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n\n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지만 국기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탓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제작법고시」를 통해 국기 제작 방법을 확정·발표했다.\n\n1882년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n\n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였다.\n\n그동안 태극기는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조약의 사후 처리로 3차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증기선 메이지마루에서 처음 도안하여 사용하였다고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기 문제가 논의된 때는 이보다 앞서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이며, 또한 박영효 이전에 미국 측 요청으로 김홍집의 주도 아래 이응준이 태극기를 만들어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사용했다.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사용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미 조선 왕조의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로서 “태극 팔괘도”가 규장각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태극기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태극팔괘도'를 변형하여,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다.\n\n=== 대한제국 ===\n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하였다.\n\n===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n일제강점기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자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사용하다가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n\n=== 군정기 ===\n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고, 태극기는 광복 해방된 한국의 당연한 국기로 인식되어 1946년 1월 14일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정권 수립 선포를 앞둔 1948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폐지하고 인공기로 교체하였다.\n\n=== 현대 ===\n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공식 제정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통용되어 통일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를 위해 정부가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안이 수렴되었으며, 여러 토론 끝에 '우리국기보양회'의 안이 채택되었다. 최종적으로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로서 현행과 같은 태극기 규격이 정해졌다. 1984년 2월 21일 대통령령으로 기존의 '국기제작법'과 '국기게양방법에 관한 건'으로 이원화된 것을 통합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고, 2007년 7월 27일부터 새로운 '대한민국 국기법'이 시행되어 태극기의 제작, 게양,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n", "세로로 늘여서 게양한 태극기\n태극기는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n\n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n\n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n\n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문양과 네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n\n* 건괘(乾卦) - 3개, 하늘\n* 이괘(離卦) - 4개, 불\n* 감괘(坎卦) - 5개, 물\n* 곤괘(坤卦) - 6개, 땅\n\n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낸다.\n\n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해낸 것이다.\n\n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다.\n\n=== 사괘 ===\n\n\n\n\n\n구분\n\n이름(卦名)\n\n자연(自然)\n\n천체(天體)\n\n계절(季節)\n\n방위(方位)\n\n사덕(四德)\n\n가정(家庭)\n\n의미(意味)\n\n성정(性情)\n\n\n\n56px\n\n건(乾) ☰\n\n하늘(天, 천)\n\n하늘(天, 천)\n\n봄(春, 춘)\n\n동쪽(東, 동)\n\n인(仁)\n\n아버지(父, 부)\n\n정의(正義)\n\n강건(健, 건)\n\n\n\n56px\n\n곤(坤) ☷\n\n흙(土, 토)\n\n땅(地, 지)\n\n여름(夏, 하)\n\n서쪽(西, 서)\n\n의(義)\n\n어머니(母, 모)\n\n생명력(生命力)\n\n유순(順, 순)\n\n\n\n56px\n\n감(坎) ☵\n\n물(水, 수)\n\n달(月, 월)\n\n겨울(冬, 동)\n\n북쪽(北, 북)\n\n지(智)\n\n아들(子, 자)\n\n지혜(智慧)\n\n함몰(陷, 함)\n\n\n\n56px\n\n리(離) ☲\n\n불(火, 화)\n\n태양(日, 일)\n\n가을(秋, 추)\n\n남쪽(南, 남)\n\n례(禮)\n\n딸(女, 녀)\n\n결실(結實)\n\n화려(麗, 려)\n\n\n\n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n\n=== 건곤감리 ===\n건곤감리는 태극기 네 모서리에 그려진 4괘(四卦)로, 각각 하늘(건·乾)과 땅(곤·坤), 물(감·坎), 불(리·離)을 상징한다.\n\n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이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데,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n\n태극기의 바탕인 흰색은 백의 민족으로 불리던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한다.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n\n한편, 태극기는 1882년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은 이후 점차 공식화된 것으로 알려졌다.\n\n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n\n건곤감리는 나누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나누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의 조합으로 구성된다(Lim, 1998). 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태극기 안에서 건곤감리는 양효나 음효가 셋을 이루거나 1대2 또는 2대1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고 있으며, 태극문양과 함께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n\n건곤감리는‘주역’의 기본 괘이자,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의 모서리에 표현되어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는 4개의 괘(卦)이다. ‘乾 건괘 건, 坤 곤괘 곤, 坎 감괘 감, 離 이괘 리’가 합쳐진 말로 태극기는 흰색 바탕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로 돼 있다.\n\n태극기를 달 때는 건곤감리의 위치를 기억하면 된다. 왼쪽 위 괘가 '건', 오른쪽 아래가 '곤', 오른쪽 위가 '감', 왼쪽 아래가 '리'이다.\n\n‘주역’에서는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팔괘를 기본으로 하여, 천지만물을 상징하는 육십사괘를 설정했다. 건괘(乾卦)는 하늘을 상징하며, 오행(五行)의 금(金)을 뜻한다. 곤괘(坤卦)는 땅을 의미하며, 오행의 토(土)를 뜻한다. 기본 괘 가운데서도 건괘와 곤괘는 모든 괘의 중심이며,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감괘(坎卦)는 달과 물을 상징하며, 오행의 수(水)를 뜻한다. 이괘(離卦)는 해와 불을 상징하며, 오행의 화(火)를 뜻한다.\n\n각각의 괘의 형상은 효(爻)로 표현되는데, 효는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끊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로 나뉜다. 괘의 형상은 이 양효와 음효가 홀로 셋을 이루거나 1 대 2 또는 2 대 1 등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는 것이다. 건괘는 양효만 세 줄로 표현되고,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표현되며,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표현된다.\n\n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에서 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한다. 네 모서리에 그려진 건곤감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양효와 음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4괘는 각각 하늘·땅·물·불을 상징하며,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룬다. 건괘는 기면(旗面)의 왼쪽 윗부분에, 곤괘는 오른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무궁한 정신을 나타낸다. 감괘는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이괘는 왼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광명의 정신을 나타낸다.\n", "태극기의 규격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n\n대한민국의 국기 규격\n\n=== 색상 ===\n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공식 색상은 2011년 5월 30일에 정해졌다.\n\n\n\n\n\n\n 색 표시 방법\n\n 먼셀 색 체계\n\n CIE 1931 색 공간\n\n 팬톤 색 체계\n\n 웹 색상\n\n RGB\n\n\n\n 빨간색\n\n6.0R 4.5/14\n\n0.5640, 0.3194, 15.3\n\n186 Coated\n\n#CD313A\n\n205-49-58\n\n\n\n 파란색\n\n5.0PB 3.0/12\n\n0.1556, 0.1354, 6.5\n\n294 Coated\n\n#0047A0\n\n0-71-160\n\n\n\n 검은색\n\n N 0.5\n\n N/A\n\n N/A\n\n #0E0E0E\n\n 14-14-14\n\n\n\n 하얀색\n\n N 9.6\n\n N/A\n\n N/A\n\n #FFFFFF\n\n 255-255-255\n\n\n",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한다.\n* 3월 1일: 3·1절\n* 6월 6일: 현충일 (조기 게양)\n* 7월 17일: 제헌절\n* 8월 15일: 광복절\n* 10월 1일: 국군의 날\n* 10월 3일: 개천절\n* 10월 9일: 한글날\n* 국가장(國家葬) 기간 (조기 게양)\n* 정부가 따로 지정하는 날\n*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로 정하는 날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한함)\n\n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n\n=== 국기 게양 시간 ===\n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해야 한다.\n\n==== 국기 게양과 강하시각 ====\n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n\n\n\n 기 간\n\n 게양 시각\n\n 강하 시각\n\n\n\n 3월 ~ 10월\n\n 06:00\n\n 19:00\n\n\n\n 11월 ~ 이듬해 2월\n\n 06:00\n\n 16:00\n\n\n", "=== 공식 국기 ===\n\n파일:Flag of Korea (November 1882).svg|조선정부 공식 반포 국기 (1883년).\n파일:Fla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svg|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 1945년)\n파일:Flag of South Korea (1945-1948).svg| 8·15 광복 당시 태극기. (1945년 ~ 1948년)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의 국기이기도 하였으나, 정부수립 이전 한반도에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n파일:Flag of South Korea (1948-1949).svg|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문교부 지침으로 규정된 태극기. (1948년 ~ 1949년)\n파일:Flag of South Korea (1949–1984).svg| (1949년 10월 15일 ~ 1984년 2월 20일) 태극기의 건곤감리 배치가 달라졌다.\n파일:Flag of South Korea (1984–1997).svg| (1984년 2월 21일 ~ 1997년 10월 14일) 태극의 색조가 수정되었다.\n파일:Flag of South Korea (1997–2011).svg| (1997년 10월 15일 ~ 2011년 5월 29일) 태극의 색조가 수정되었다.\n파일:Flag of South Korea.svg| 2011년 5월 30일부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현행 국기. 태극의 색조가 수정되었다.\n\n\n=== 기타 ===\n\n파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조선의 어기인 태극팔괘도\n파일:Flag of the King of Korea (1882–1907).svg| 조선의 어기인 태극팔괘도 (1882년 ~ 1907년)\n파일:Ensign of the Joseon Navy.svg| 조선 시대 군기인 좌독기\n파일:Flag of Korea 1882.svg| 1882년 7월 미국에서 제작한 《해양 국가들의 국기》이라는 제목의 책에 나온 태극기\n파일:大淸國屬 高麗國旗.png| 대청국속 고려국기 (1883년)\n파일:Flag of Korea (1884).svg|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제작한 태극기 (1884년)\n파일:Flag of Korea (1888, Denny Taegukgi).svg|데니 태극기 (1888년)\n파일:Flag of Korea (1893).svg| 태극기 (1893년)\n파일:Flag of Korea (1899).svg| 1899년 미국에서 제작한 《해양 국가들의 국기》에 나오는 태극기\n파일:Imperial banner of Korea.svg|대한황제폐하몸기(황제기)\n파일:Ahn's Taegukgi.png| 일제강점기의 태극기(안중근이 혈서로 대한독립이라고 씀)\n파일:Fla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svg|3·1 운동 당시의 태극기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양 숭실학교에서 제작된 국기이다.\n파일:Overrun countries Korea flag stamp.png|1944년 11월에 발표된 미국 우표에 그려진 태극기\n파일:Korea Independence Army Marching Flag.svg|독립군의 부대장이 보관하고 있던 진군기(進軍旗)\n\n\n===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태극기 ===\n*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1호\n* 데니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2호\n*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3호\n*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4호\n* 남상락 자수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6호\n*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7호\n* 김구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8호\n*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9호\n* 유관종 부대원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0호\n*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1호\n*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2호\n*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3호\n* 불원복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4호\n* 명신여학교 태극기·현판·완문 - 등록문화재 제468호\n* 강릉 선교장 소장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648호\n", "* 한국의 기 목록\n* 김구 서명문 태극기\n* 태극\n* 태극\n* 데니 태극기\n* 한반도기\n* 국기에 대한 맹세\n* 팔괘\n*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n* 태극이 포함된 국가 혹은 지역의 깃발\n** 몽골의 국기\n** 티베트의 기\n* 북한의 국기\n", "\n\n", "\n", "\n\n\n\n분류:국기\n국기\n \n " ]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다. 흰색 배경 중앙에 파란색과 빨간색의 태극을, 네 귀퉁이에는 팔괘 중 상하가 대칭되는 사괘인 건(乾, ☰), 곤(坤, ☷), 감(坎, ☵), 리(離, ☲)를 그렸다. 이는 음양화합을 상징한다. 1882년(고종 19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제안되어 고종에 의해 공포되었다. 대한제국이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한 이후 일제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었으나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국기로서의 정통성이 계승되었고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 조선 === 조선 군주의 어기 '태극팔괘도' 태극기는 1882년 조선의 고종이 도안하여 국기로 사용했다. 조선은 현대적인 의미의 국기가 없었으나,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조선 임금의 어기인 태극팔괘도가 있었다. 태극기는 조선군주의 어기인 '태극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고종이 직접 도안하여 제작하였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된다.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국기인 황룡기와 유사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했지만 국기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탓에 이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제작법고시」를 통해 국기 제작 방법을 확정·발표했다. 1882년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가면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였다. 그동안 태극기는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 조약의 사후 처리로 3차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 그들이 편승한 일본 증기선 메이지마루에서 처음 도안하여 사용하였다고 잘못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기 문제가 논의된 때는 이보다 앞서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이며, 또한 박영효 이전에 미국 측 요청으로 김홍집의 주도 아래 이응준이 태극기를 만들어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사용했다.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사용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미 조선 왕조의 군주를 상징하는 어기로서 “태극 팔괘도”가 규장각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태극기는 조선의 국왕을 상징하는 '태극팔괘도'를 변형하여,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태극기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다. === 대한제국 ===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 일제강점기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자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사용하다가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 군정기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고, 태극기는 광복 해방된 한국의 당연한 국기로 인식되어 1946년 1월 14일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정권 수립 선포를 앞둔 1948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폐지하고 인공기로 교체하였다. === 현대 ===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공식 제정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통용되어 통일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를 위해 정부가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안이 수렴되었으며, 여러 토론 끝에 '우리국기보양회'의 안이 채택되었다. 최종적으로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로서 현행과 같은 태극기 규격이 정해졌다. 1984년 2월 21일 대통령령으로 기존의 '국기제작법'과 '국기게양방법에 관한 건'으로 이원화된 것을 통합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고, 2007년 7월 27일부터 새로운 '대한민국 국기법'이 시행되어 태극기의 제작, 게양,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세로로 늘여서 게양한 태극기 태극기는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 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흰색 바탕에 가운데 태극문양과 네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있다. * 건괘(乾卦) - 3개, 하늘 * 이괘(離卦) - 4개, 불 * 감괘(坎卦) - 5개, 물 * 곤괘(坤卦) - 6개, 땅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그리고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낸다.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표현해낸 것이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즐겨 사용하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태극기는 우주와 더불어 끝없이 창조와 번영을 희구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이상을 담고 있다. === 사괘 === 구분 이름(卦名) 자연(自然) 천체(天體) 계절(季節) 방위(方位) 사덕(四德) 가정(家庭) 의미(意味) 성정(性情) 56px 건(乾) ☰ 하늘(天, 천) 하늘(天, 천) 봄(春, 춘) 동쪽(東, 동) 인(仁) 아버지(父, 부) 정의(正義) 강건(健, 건) 56px 곤(坤) ☷ 흙(土, 토) 땅(地, 지) 여름(夏, 하) 서쪽(西, 서) 의(義) 어머니(母, 모) 생명력(生命力) 유순(順, 순) 56px 감(坎) ☵ 물(水, 수) 달(月, 월) 겨울(冬, 동) 북쪽(北, 북) 지(智) 아들(子, 자) 지혜(智慧) 함몰(陷, 함) 56px 리(離) ☲ 불(火, 화) 태양(日, 일) 가을(秋, 추) 남쪽(南, 남) 례(禮) 딸(女, 녀) 결실(結實) 화려(麗, 려)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 건곤감리 === 건곤감리는 태극기 네 모서리에 그려진 4괘(四卦)로, 각각 하늘(건·乾)과 땅(곤·坤), 물(감·坎), 불(리·離)을 상징한다. 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이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데, 4괘는 태극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태극기의 바탕인 흰색은 백의 민족으로 불리던 우리의 민족성을 의미한다. 밝음과 순수,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태극기는 1882년 9월 박영효가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건곤감리 4괘를 그려 넣은 이후 점차 공식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건곤감리는 나누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나누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의 조합으로 구성된다(Lim, 1998). 각 괘를 살펴보면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윗부분에 위치하고 세 줄의 양효로 구성되었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위치한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나타나고, 왼쪽 아랫부분에 위치한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태극기 안에서 건곤감리는 양효나 음효가 셋을 이루거나 1대2 또는 2대1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고 있으며, 태극문양과 함께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곤감리는‘주역’의 기본 괘이자,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의 모서리에 표현되어 하늘과 땅, 물과 불을 상징하는 4개의 괘(卦)이다. ‘乾 건괘 건, 坤 곤괘 곤, 坎 감괘 감, 離 이괘 리’가 합쳐진 말로 태극기는 흰색 바탕 가운데 태극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로 돼 있다. 태극기를 달 때는 건곤감리의 위치를 기억하면 된다. 왼쪽 위 괘가 '건', 오른쪽 아래가 '곤', 오른쪽 위가 '감', 왼쪽 아래가 '리'이다. ‘주역’에서는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의 팔괘를 기본으로 하여, 천지만물을 상징하는 육십사괘를 설정했다. 건괘(乾卦)는 하늘을 상징하며, 오행(五行)의 금(金)을 뜻한다. 곤괘(坤卦)는 땅을 의미하며, 오행의 토(土)를 뜻한다. 기본 괘 가운데서도 건괘와 곤괘는 모든 괘의 중심이며,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감괘(坎卦)는 달과 물을 상징하며, 오행의 수(水)를 뜻한다. 이괘(離卦)는 해와 불을 상징하며, 오행의 화(火)를 뜻한다. 각각의 괘의 형상은 효(爻)로 표현되는데, 효는 끊어지지 않은 선(―)으로 표현되는 양효(陽爻)와 끊어진 선(--)으로 표현되는 음효(陰爻)로 나뉜다. 괘의 형상은 이 양효와 음효가 홀로 셋을 이루거나 1 대 2 또는 2 대 1 등의 비율로 짝을 이루어 표현되는 것이다. 건괘는 양효만 세 줄로 표현되고, 곤괘는 음효만 세 줄로 표현된다. 감괘는 맨 위와 아래가 음효이고 가운데가 양효로 표현되며, 이괘는 감괘와 반대로 맨 위와 아래가 양효이고 가운데가 음효로 표현된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에서 가운데 그려진 태극 문양은 음(파랑)과 양(빨강)의 조화를 상징한다. 네 모서리에 그려진 건곤감리의 4괘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양효와 음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4괘는 각각 하늘·땅·물·불을 상징하며, 태극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룬다. 건괘는 기면(旗面)의 왼쪽 윗부분에, 곤괘는 오른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무궁한 정신을 나타낸다. 감괘는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이괘는 왼쪽아랫부분에 위치하여 광명의 정신을 나타낸다. 태극기의 규격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국기 규격 === 색상 === 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공식 색상은 2011년 5월 30일에 정해졌다. 색 표시 방법 먼셀 색 체계 CIE 1931 색 공간 팬톤 색 체계 웹 색상 RGB 빨간색 6.0R 4.5/14 0.5640, 0.3194, 15.3 186 Coated #CD313A 205-49-58 파란색 5.0PB 3.0/12 0.1556, 0.1354, 6.5 294 Coated #0047A0 0-71-160 검은색 N 0.5 N/A N/A #0E0E0E 14-14-14 하얀색 N 9.6 N/A N/A #FFFFFF 255-255-255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한다. * 3월 1일: 3·1절 * 6월 6일: 현충일 (조기 게양) * 7월 17일: 제헌절 * 8월 15일: 광복절 * 10월 1일: 국군의 날 * 10월 3일: 개천절 * 10월 9일: 한글날 * 국가장(國家葬) 기간 (조기 게양) * 정부가 따로 지정하는 날 *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로 정하는 날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한함)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 국기 게양 시간 === 국기는 24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해야 한다. ==== 국기 게양과 강하시각 ==== 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 기 간 게양 시각 강하 시각 3월 ~ 10월 06:00 19:00 11월 ~ 이듬해 2월 06:00 16:00 === 공식 국기 === 파일:Flag of Korea (November 1882).svg|조선정부 공식 반포 국기 (1883년). 파일:Fla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svg|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 1945년) 파일:Flag of South Korea (1945-1948).svg| 8·15 광복 당시 태극기. (1945년 ~ 1948년)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의 국기이기도 하였으나, 정부수립 이전 한반도에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파일:Flag of South Korea (1948-1949).svg|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문교부 지침으로 규정된 태극기. (1948년 ~ 1949년) 파일:Flag of South Korea (1949–1984).svg| (1949년 10월 15일 ~ 1984년 2월 20일) 태극기의 건곤감리 배치가 달라졌다. 파일:Flag of South Korea (1984–1997).svg| (1984년 2월 21일 ~ 1997년 10월 14일) 태극의 색조가 수정되었다. 파일:Flag of South Korea (1997–2011).svg| (1997년 10월 15일 ~ 2011년 5월 29일) 태극의 색조가 수정되었다. 파일:Flag of South Korea.svg| 2011년 5월 30일부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현행 국기. 태극의 색조가 수정되었다. === 기타 === 파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조선의 어기인 태극팔괘도 파일:Flag of the King of Korea (1882–1907).svg| 조선의 어기인 태극팔괘도 (1882년 ~ 1907년) 파일:Ensign of the Joseon Navy.svg| 조선 시대 군기인 좌독기 파일:Flag of Korea 1882.svg| 1882년 7월 미국에서 제작한 《해양 국가들의 국기》이라는 제목의 책에 나온 태극기 파일:大淸國屬 高麗國旗.png| 대청국속 고려국기 (1883년) 파일:Flag of Korea (1884).svg|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제작한 태극기 (1884년) 파일:Flag of Korea (1888, Denny Taegukgi).svg|데니 태극기 (1888년) 파일:Flag of Korea (1893).svg| 태극기 (1893년) 파일:Flag of Korea (1899).svg| 1899년 미국에서 제작한 《해양 국가들의 국기》에 나오는 태극기 파일:Imperial banner of Korea.svg|대한황제폐하몸기(황제기) 파일:Ahn's Taegukgi.png| 일제강점기의 태극기(안중근이 혈서로 대한독립이라고 씀) 파일:Fla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svg|3·1 운동 당시의 태극기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양 숭실학교에서 제작된 국기이다. 파일:Overrun countries Korea flag stamp.png|1944년 11월에 발표된 미국 우표에 그려진 태극기 파일:Korea Independence Army Marching Flag.svg|독립군의 부대장이 보관하고 있던 진군기(進軍旗) ===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태극기 === *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1호 * 데니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2호 *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3호 *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4호 * 남상락 자수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6호 *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7호 * 김구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8호 *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9호 * 유관종 부대원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0호 *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1호 *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2호 *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3호 * 불원복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4호 * 명신여학교 태극기·현판·완문 - 등록문화재 제468호 * 강릉 선교장 소장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648호 * 한국의 기 목록 * 김구 서명문 태극기 * 태극 * 태극 * 데니 태극기 * 한반도기 * 국기에 대한 맹세 * 팔괘 *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 태극이 포함된 국가 혹은 지역의 깃발 ** 몽골의 국기 ** 티베트의 기 * 북한의 국기 분류:국기 국기
알고리즘
[ "Introduction", "이름", "정의", "구현", "분류", "예",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파일:Sorting quicksort anim.gif|thumb|퀵 정렬 알고리즘\n'''알고리즘'''()은 수학과 컴퓨터과학에서 사용되는, 문제 해결 방법을 정의한 '일련의 단계적 절차'이자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작들의 모임'이다. 계산을 실행하기 위한 단계적 '''규칙과 절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문제 풀이에 필요한 계산 절차 또는 처리 과정의 순서를 뜻한다. 프로그램명령어의 집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n\n알고리즘은 연산, 데이터 마이닝(기계 학습) 또는 자동화된 추론을 수행한다.\n", "산법(算法), 셈법, 계산절차(計算節次)라고도 한다.\n\n알고리즘은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인 무함마드 알콰리즈미의 이름을 라틴어화한 알고리스무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n\n영어로 의 발음 기호는 또는 이며 을 '알고리즘'으로 표기하는 것은 를 '지스'로, 을 '리즘'으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알고리즘이라는 표기가 알고리듬이라는 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n", "\n정지문제의 결과로 알고리즘을 멈추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n\n그러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단순한 직관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정의는 유한한 계산이다\n\n따라서 알고리즘의 공식적인 정의는 이다\n\n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유한한 수의 규칙에 따라 구별 가능한 기호들을 조작하여 입력 정수에서 출력 정수를 생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작업을 정의한다. 다음은 좋은 알고리즘의 특징이다.\n* 정밀성 : 변하지 않는 명확한 작업 단계를 가져야 한다.\n* 유일성 : 각 단계마다 명확한 다음 단계를 가져야 한다.\n* 타당성 : 구현할 수 있고 실용적이어야 한다.\n* 입력 : 정의된 입력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n* 출력 : 답으로 출력을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n* '''유한성''' : 특정 수의 작업 이후에 정지해야 한다.\n* 일반성 : 정의된 입력들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n", "알고리즘은 자연어, 의사코드, 순서도, 프로그래밍언어, 인터프리터가 작업하는 제어테이블, 유한상태기계의 상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음은 알고리즘 개발의 정형적인 단계이다.\n:문제 정의 → 모델 고안 → 명세 작성 → 설계 → 검증 → 분석 (복잡도 등) → 구현 → 테스트 → 문서화\n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기술에는 운용과학의 방법, 설계짜임새를 써먹는 방법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지만, 전기 회로나 생물학적 신경회로를 사용하기도 한다.\n", "* 구현 : 재귀적 알고리즘, 연역적 알고리즘, 결정론적 알고리즘, 근사 알고리즘, 양자 알고리즘 등.\n* 설계 : 무차별 대입 공격, 분할 정복 알고리즘, 그래프 순회, 분기 한정법, 확률적 알고리즘, 리덕션, 백트래킹 등.\n* 최적화 문제 : 선형 계획법, 동적 계획법, 탐욕 알고리즘, 휴리스틱 함수 등.\n* 이론적 분야 : 검색 알고리즘, 정렬 알고리즘, 수치 알고리즘, 그래프 알고리즘, 문자열 알고리즘, 암호학적 알고리즘, 기계 학습, 데이터 압축 등.\n\n=== 복잡성 ===\n\n입력값의 크기가 일 경우, 점근 표기법 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n* : 에 관계없이 일정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파일의 첫 번째 바이트가 널(null)인지 검사하는 것.\n\n*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이진 탐색.\n\n*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기수 정렬.\n\n* : 에 대략 비례할 수 있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정렬 알고리즘.\n\n*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최장 공통 부분 수열 문제.\n\n*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행렬 곱셈.\n\n* :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충족 가능성 문제.\n\n* : 즉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배열의 모든 순열을 검사하는 것.\n\n대문자 O 표기법의 정의상 아래의 복잡도는 그 위의 복잡도를 포함하므로,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의 수행 시간을 가진다.\n", "\n=== 알고리즘의 예시 ===\n가장 단순한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는 임의로 나열된 숫자들 가운데 가장 큰 수를 찾는 것이다. 다음은 목록 안에 있는 모든 수를 살펴보는 알고리즘이다.\n\n Input: A list of numbers ''L''.\n Output: The largest number in the list ''L''.\n\n '''if''' ''L.size'' = 0 '''return''' null\n ''largest'' ← ''L''0\n '''for each''' ''item'' '''in''' ''L'', '''do'''\n '''if''' ''item'' > ''largest'', '''then'''\n ''largest'' ← ''item''\n '''return''' ''largest''\n\n", "\n* Garbage in, garbage out\n* Introduction to Algorithms\n* 계산 이론\n* 고속 푸리에 변환\n* 라메의 정리\n* 람다 대수\n* 순서도\n* 알고리즘 트레이딩\n* 처치-튜링 명제\n* 추상 기계\n* 휴리스틱 이론\n* 기사의 여행\n* 스테인하우스-존슨-트로터 알고리즘\n", "\n", "* \n\n\n\n \n분류:이론 컴퓨터 과학\n분류:전산언어학" ]
파일:Sorting quicksort anim.gif|thumb|퀵 정렬 알고리즘 '''알고리즘'''()은 수학과 컴퓨터과학에서 사용되는, 문제 해결 방법을 정의한 '일련의 단계적 절차'이자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작들의 모임'이다. 계산을 실행하기 위한 단계적 '''규칙과 절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문제 풀이에 필요한 계산 절차 또는 처리 과정의 순서를 뜻한다. 프로그램명령어의 집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연산, 데이터 마이닝(기계 학습) 또는 자동화된 추론을 수행한다. 산법(算法), 셈법, 계산절차(計算節次)라고도 한다. 알고리즘은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인 무함마드 알콰리즈미의 이름을 라틴어화한 알고리스무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영어로 의 발음 기호는 또는 이며 을 '알고리즘'으로 표기하는 것은 를 '지스'로, 을 '리즘'으로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알고리즘이라는 표기가 알고리듬이라는 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정지문제의 결과로 알고리즘을 멈추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단순한 직관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정의는 유한한 계산이다 따라서 알고리즘의 공식적인 정의는 이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유한한 수의 규칙에 따라 구별 가능한 기호들을 조작하여 입력 정수에서 출력 정수를 생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작업을 정의한다. 다음은 좋은 알고리즘의 특징이다. * 정밀성 : 변하지 않는 명확한 작업 단계를 가져야 한다. * 유일성 : 각 단계마다 명확한 다음 단계를 가져야 한다. * 타당성 : 구현할 수 있고 실용적이어야 한다. * 입력 : 정의된 입력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출력 : 답으로 출력을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 * '''유한성''' : 특정 수의 작업 이후에 정지해야 한다. * 일반성 : 정의된 입력들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알고리즘은 자연어, 의사코드, 순서도, 프로그래밍언어, 인터프리터가 작업하는 제어테이블, 유한상태기계의 상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음은 알고리즘 개발의 정형적인 단계이다. :문제 정의 → 모델 고안 → 명세 작성 → 설계 → 검증 → 분석 (복잡도 등) → 구현 → 테스트 → 문서화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기술에는 운용과학의 방법, 설계짜임새를 써먹는 방법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지만, 전기 회로나 생물학적 신경회로를 사용하기도 한다. * 구현 : 재귀적 알고리즘, 연역적 알고리즘, 결정론적 알고리즘, 근사 알고리즘, 양자 알고리즘 등. * 설계 : 무차별 대입 공격, 분할 정복 알고리즘, 그래프 순회, 분기 한정법, 확률적 알고리즘, 리덕션, 백트래킹 등. * 최적화 문제 : 선형 계획법, 동적 계획법, 탐욕 알고리즘, 휴리스틱 함수 등. * 이론적 분야 : 검색 알고리즘, 정렬 알고리즘, 수치 알고리즘, 그래프 알고리즘, 문자열 알고리즘, 암호학적 알고리즘, 기계 학습, 데이터 압축 등. === 복잡성 === 입력값의 크기가 일 경우, 점근 표기법 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 : 에 관계없이 일정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파일의 첫 번째 바이트가 널(null)인지 검사하는 것. *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이진 탐색. *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기수 정렬. * : 에 대략 비례할 수 있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정렬 알고리즘. *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최장 공통 부분 수열 문제. * :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행렬 곱셈. * :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충족 가능성 문제. * : 즉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배열의 모든 순열을 검사하는 것. 대문자 O 표기법의 정의상 아래의 복잡도는 그 위의 복잡도를 포함하므로,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의 수행 시간을 가진다. === 알고리즘의 예시 ===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는 임의로 나열된 숫자들 가운데 가장 큰 수를 찾는 것이다. 다음은 목록 안에 있는 모든 수를 살펴보는 알고리즘이다. Input: A list of numbers ''L''. Output: The largest number in the list ''L''. '''if''' ''L.size'' = 0 '''return''' null ''largest'' ← ''L''0 '''for each''' ''item'' '''in''' ''L'', '''do''' '''if''' ''item'' > ''largest'', '''then''' ''largest'' ← ''item'' '''return''' ''largest'' * Garbage in, garbage out * Introduction to Algorithms * 계산 이론 * 고속 푸리에 변환 * 라메의 정리 * 람다 대수 * 순서도 * 알고리즘 트레이딩 * 처치-튜링 명제 * 추상 기계 * 휴리스틱 이론 * 기사의 여행 * 스테인하우스-존슨-트로터 알고리즘 * 분류:이론 컴퓨터 과학 분류:전산언어학
위키책
[ "Introduction", "위키주니어",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 "\n\n\n'''위키책'''(Wikibooks)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2003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n\n프로젝트는 공동으로 집필한 책 형태의 공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이트는 미디어위키 기반이며, 따라서 누구나 편집단추를 눌러 위키책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n\n프로젝트는 영어 위키백과 사용자인 Karl Wick가 고급교육의 기회를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비용과 제한이 없는 열린 콘텐츠의 생화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n\n프로젝트의 범위(교과서만 할 것인가,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와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이름, URL)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n\n버지니아 주의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생들은 위키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재를 직접 편집, 교재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교과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된다고 밝혔다.\n", "\n'''위키주니어'''(Wikijunior)는 위키책의 서브프로젝트(subproject)로서, 어린이용 책을 다루는 위키이다. 이 프로젝트는 잡지와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네덜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카탈루냐어, 튀르키예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핀란드어판 위키책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위키주니어는 벡 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n", "\n", "* \n* \n", "* \n* 위키책 대문\n* 한국어 위키책\n\n\n\n분류:위키미디어 프로젝트" ]
'''위키책'''(Wikibooks)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2003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는 공동으로 집필한 책 형태의 공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이트는 미디어위키 기반이며, 따라서 누구나 편집단추를 눌러 위키책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 프로젝트는 영어 위키백과 사용자인 Karl Wick가 고급교육의 기회를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비용과 제한이 없는 열린 콘텐츠의 생화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의 범위(교과서만 할 것인가,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와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이름, URL)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생들은 위키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재를 직접 편집, 교재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교과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위키주니어'''(Wikijunior)는 위키책의 서브프로젝트(subproject)로서, 어린이용 책을 다루는 위키이다. 이 프로젝트는 잡지와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네덜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카탈루냐어, 튀르키예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핀란드어판 위키책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위키주니어는 벡 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 * * * 위키책 대문 * 한국어 위키책 분류:위키미디어 프로젝트
MySQL
[ "Introduction", "인터페이스", "프로그래밍 언어", "사용", "버전", "역사",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MySQL'''(마이에스큐엘, )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n오픈 소스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이다. 다중 스레드, 다중 사용자, 구조질의어 형식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 오라클이 관리 및 지원하고 있으며, Qt처럼 이중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하나의 옵션은 GPL이며, GPL 이외의 라이선스로 적용시키려는 경우 전통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선스의 적용을 받는다.\n\n위와 같은 지원 방식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프로젝트에 저작권을 적용하는 방법과 비슷한 JBoss의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반코드가 개인의 소유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는 아파치 프로젝트와는 다르다.\n\nMySQL AB는 또한 MaxDB라고 불리는 MySQL AB와는 기반코드가 다른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을 판매했으나 2007년 이래로 MaxDB는 SAP AG가 소유하고 있다.\n\n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0억 달러에 인수되었으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며 같이 넘어갔다.\n", "파일:Mysqlwb-homepage.png|섬네일|오른쪽|윈도에서 작동하는 MySQL 워크벤치\nMySQL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거나 자료를 관리하기 위한 GUI 관리툴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용자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하고, 데이터를 백업하는데, 상태를 검사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생성하는데, 또는 데이터 레코더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MySQL 프론트엔드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나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한다. 공식적인 MySQL 프론트엔드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오라클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n\n=== 그래픽 ===\n공식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사용자에게 MySQL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그래픽적으로 지원하게 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조의 설계도 시각적으로 하게 해주는 MySQL AB에 의해 개발된 자유로운 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패키지 소프트웨어였던 MySQL GUI 툴즈를 대체하였다. 여타의 제3자 패키지와 유사하지만, MySQL 현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이용자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모델링, SQL 관리(MySQL 쿼리 브라우저 대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관리(MySQL Administrator 대체)까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n\nMySQL 워크벤치는 2가지 판이 존재하는데, MySQL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보통의 자유, 공개 소스인 ‘커뮤니티 판’(''Community Edition'')과 커뮤니티 판을 확장하여 개선시킨 유료의 ‘스탠더드 판’(''Standard Edition'')이 존재한다.\n", "응용 프로그램에서 MySQL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API를 사용할 수 있다. 이들 API는 언어에 종속적이다.\n\nMySQL은 공식적으로 아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n* C/C++\n* C#/F#\n* 볼랜드 델파이 (dbExpress를 통한)\n* 자바 (네이티브 자바 드라이버를 통한)\n* 파이썬\n* 루비\n* REALbasic (매킨토시 계열)\n* 프리베이직\n* 스몰토크\n* Eiffel\n* 리스프\n* 펄\n* Tcl\n* PHP PHP4 PHP5 PHP6\n* 델파이1 델파이2 델파이3 델파이4 델파이5델파이6델파이7델파이8\n* 델파이2007델파이2008델파이2009\n* 파파라치\n\nMySQL은 MyODBC라고 불리는 ODBC 인터페이스를 지원해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그 예로 ASP와 콜드퓨전을 들 수 있다. MySQL은 대부분 ANSI C로 구현되었다.\n", "MySQL은 미디어위키와 드루팔과 같은 인기있는 웹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된다. 그리고 LAMP, MAMP, WAMP (리눅스/매킨토시/윈도-아파치-MySQL-PHP/펄/파이썬)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구성체로서 작동하며 버그질라와 같은 오픈소스 버그 추적 도구에도 사용된다.\n\n웹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MySQL의 인기는 PHP의 인기도와 맞물려 있다. PHP는 종종 MySQL과 결합되며,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터넷 상의 여러 웹사이트, 혹은 서적을 통해서 MySQL과 PHP의 연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의 플랫폼에서는 이들의 연동을 자동으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n\n또한 SUN 인수 이후, 중소기업이나 개인용 사이트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키백과, 구글(검색 엔진은 제외), 페이스북, 트위터, 플리커, 노키아닷컴, 유튜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n", "\n\n\n\n\n 출시\n\n GA(General availability)\n\n 최신 마이너 버전\n\n 최신 릴리스\n\n 수명 종료\n\n\n\n \n\n \n\n 5.1.73\n\n 2013-12-03\n\n Dec 2013\n\n\n\n \n\n \n\n 5.5.62\n\n 2018-10-22\n\n Dec 2018\n\n\n\n \n\n \n\n 5.6.51\n\n 2021-01-20\n\n Feb 2021\n\n\n\n \n\n \n\n 5.7.41\n\n 2023-01-17\n\n Oct 2023\n\n\n\n \n\n \n\n 8.0.32\n\n 2023-01-17\n\n Apr 2026\n\n\n\n\n\nDefine $now = 12/11/2012\nDefine $begindate = 01/01/1999\nDefine $width = 700\nDefine $warning = 380 # $width - 120\nDefine $height = 750\nImageSize = width:$width height:$height\nPlotArea = left:40 right:10 bottom:100 top:20\nDateFormat = dd/mm/yyyy\nPeriod = from:$begindate till:$now\nTimeAxis = orientation:ver\nAlignbars = early\nLegend = orientation:vertical position:bottom columns:1\n\n##################################################\n# Color definitions #\n##################################################\nColors =\n id:col5.1 value:rgb(0.4,0.6,1) Legend:Active_Development\n id:col5.0 value:rgb(1,0.6,0.4) Legend:NO_Active_Development\n id:col2.0-l1 value:black\n id:col2.0-l2 value:gray(0.98)\n id:colbg value:gray(0.98)\n id:colgrmaj value:gray(0.5)\n id:colgrmin value:gray(0.8)\n id:lighttext value:rgb(0.5,0.5,0.5)\n\nScaleMajor = gridcolor:colgrmaj unit:year increment:1 start:$begindate\nScaleMinor = gridcolor:colgrmin unit:month increment:3 start:$begindate\nBackgroundColors = canvas:colbg\n\nPlotData=\n ##################################################\n # 3.23 filled bar #\n ##################################################\n bar:3.23 width:40 from:05/07/1999 till:11/09/2003 color:col5.0 mark:(line,col5.0)\n\n ##################################################\n # 3.23 line for all other versions #\n ##################################################\n bar:3.23 mark:(line,col2.0-l2)\n at: 08/07/1999 shift:(0,-15) # 3.23.1\n at: 09/08/1999 shift:(0,-15) # 3.23.2\n at: 13/09/1999 shift:(0,-15) # 3.23.3\n at: 28/09/1999 shift:(0,-15) # 3.23.4\n at: 20/10/1999 shift:(0,-15) # 3.23.5\n at: 15/12/1999 shift:(0,-15) # 3.23.6\n at: 10/12/1999 shift:(0,-15) # 3.23.7\n at: 02/01/2000 shift:(0,-15) # 3.23.8\n at: 29/01/2000 shift:(0,-15) # 3.23.9\n at: 30/01/2000 shift:(0,-15) # 3.23.10\n at: 16/02/2000 shift:(0,-15) # 3.23.11\n at: 07/03/2000 shift:(0,-15) # 3.23.12\n at: 14/03/2000 shift:(0,-15) # 3.23.13\n at: 09/04/2000 shift:(0,-15) # 3.23.14\n at: 08/05/2000 shift:(0,-15) # 3.23.15\n at: 16/05/2000 shift:(0,-15) # 3.23.16\n at: 07/06/2000 shift:(0,-15) # 3.23.16\n at: 11/06/2000 shift:(0,-15) # 3.23.17\n at: 11/07/2000 shift:(0,-15) # 3.23.18\n at: 04/07/2000 shift:(0,-15) # 3.23.21\n at: 31/07/2000 shift:(0,-15) # 3.23.22\n at: 01/09/2000 shift:(0,-15) # 3.23.23\n at: 08/09/2000 shift:(0,-15) # 3.23.24\n at: 29/09/2000 shift:(0,-15) # 3.23.25\n at: 18/10/2000 shift:(0,-15) # 3.23.26\n at: 24/10/2000 shift:(0,-15) # 3.23.27\n at: 06/12/2000 shift:(0,-15) # 3.23.29\n at: 04/01/2001 shift:(0,-15) # 3.23.30\n at: 22/01/2001 shift:(0,-15) # 3.23.32\n at: 09/02/2001 shift:(0,-15) # 3.23.33\n at: 10/03/2001 shift:(0,-15) # 3.23.34\n at: 11/03/2001 shift:(0,-15) # 3.23.34a\n at: 15/03/2001 shift:(0,-15) # 3.23.35\n at: 27/03/2001 shift:(0,-15) # 3.23.36\n at: 17/04/2001 shift:(0,-15) # 3.23.37\n at: 09/05/2001 shift:(0,-15) # 3.23.38\n at: 12/06/2001 shift:(0,-15) # 3.23.39\n at: 18/07/2001 shift:(0,-15) # 3.23.40\n at: 11/08/2001 shift:(0,-15) # 3.23.41\n at: 08/09/2001 shift:(0,-15) # 3.23.42\n at: 04/10/2001 shift:(0,-15) # 3.23.43\n at: 31/10/2001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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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filled bar #\n ##################################################\n bar:4.0 width:40 from:01/10/2001 till:12/02/2007 color:col5.0 mark:(line,col5.0)\n\n ##################################################\n # 4.0 line for all other versions #\n ##################################################\n bar:4.0 mark:(line,col2.0-l2)\n at: 23/12/2001 shift:(0,-15) # 4.0.1\n at: 01/07/2002 shift:(0,-15) # 4.0.2\n at: 29/09/2002 shift:(0,-15) # 4.0.4\n at: 13/11/2002 shift:(0,-15) # 4.0.5\n at: 20/12/2002 shift:(0,-15) # 4.0.7\n at: 07/01/2003 shift:(0,-15) # 4.0.8\n at: 09/01/2003 shift:(0,-15) # 4.0.9\n at: 29/01/2003 shift:(0,-15) # 4.0.10\n at: 20/02/2003 shift:(0,-15) # 4.0.11\n at: 16/05/2003 shift:(0,-15) # 4.0.13\n at: 18/07/2003 shift:(0,-15) # 4.0.14\n at: 03/09/2003 shift:(0,-15) # 4.0.15\n at: 17/10/2003 shift:(0,-15) # 4.0.16\n at: 14/12/2003 shift:(0,-15) # 4.0.18\n at: 04/05/2004 shift:(0,-15) # 4.0.19\n at: 17/05/2004 shift:(0,-15) # 4.0.20\n at: 06/09/2004 shift:(0,-15) # 4.0.21\n at: 27/10/2004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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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line for all other versions #\n ##################################################\n bar:4.1 mark:(line,col2.0-l2)\n at: 01/12/2003 shift:(0,-15) # 4.1.1\n at: 28/05/2004 shift:(0,-15) # 4.1.2\n at: 16/09/2004 shift:(0,-15) # 4.1.5\n at: 10/10/2004 shift:(0,-15) # 4.1.6\n at: 14/12/2004 shift:(0,-15) # 4.1.8\n at: 12/02/2005 shift:(0,-15) # 4.1.10\n at: 01/04/2005 shift:(0,-15) # 4.1.11\n at: 13/05/2005 shift:(0,-15) # 4.1.12\n at: 15/07/2005 shift:(0,-15) # 4.1.13\n at: 17/08/2005 shift:(0,-15) # 4.1.14\n at: 13/10/2005 shift:(0,-15) # 4.1.15\n at: 29/11/2005 shift:(0,-15) # 4.1.16\n at: 29/04/2006 shift:(0,-15) # 4.1.19\n at: 24/05/2006 shift:(0,-15) # 4.1.20\n at: 19/07/2006 shift:(0,-15) # 4.1.21\n at: 02/11/2006 shift:(0,-15) # 4.1.22\n\n ##################################################\n # 4.1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n ##################################################\n bar:4.1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red\n at: 03/04/2003 text:\"4.1.0 Alfa\" shift:(46,-3)\n at: 28/06/2004 shift:(48,-8) text:\"4.1.3 Beta\"\n at: 26/08/2004 shift:(45,-4) text:\"4.1.4 RC\"\n at: 23/10/2004 shift:(48,-2) text:\"4.1.7 FCS\"\n at: 11/01/2005 shift:(37,1) text:\"4.1.9\"\n at: 27/01/2006 shift:(40,-3) text:\"4.1.18\"\n at: 12/06/2007 shift:(40,-3) text:\"4.1.23\"\n at: 01/03/2008 shift:(40,-3) text:\"4.1.24\"\n at: 01/12/2008 text:\"4.1.25\" shift:(0,5)\n\n ##################################################\n # 5.0 filled bar #\n ##################################################\n bar:5.0 width:40 from:22/12/2003 till:21/03/2012 color:col5.0 mark:(line,col5.0)\n\n ##################################################\n # 5.0 line for all other versions #\n ##################################################\n bar:5.0 mark:(line,col2.0-l2)\n at: 01/12/2004 shift:(0,-15) # 5.0.2\n at: 16/04/2005 shift:(0,-15) # 5.0.4\n at: 26/05/2005 shift:(0,-15) # 5.0.6\n at: 10/06/2005 shift:(0,-15) # 5.0.7\n at: 05/07/2005 shift:(0,-15) # 5.0.9\n at: 27/07/2005 shift:(0,-15) # 5.0.10\n at: 06/08/2005 shift:(0,-15) # 5.0.11\n at: 02/09/2005 shift:(0,-15) # 5.0.12\n at: 10/11/2005 shift:(0,-15) # 5.0.16\n at: 14/12/2005 shift:(0,-15) # 5.0.17\n at: 21/12/2005 shift:(0,-15) # 5.0.18\n at: 31/03/2006 shift:(0,-15) # 5.0.20\n at: 18/04/2006 shift:(0,-15) # 5.0.20a\n at: 02/05/2006 shift:(0,-15) # 5.0.21\n at: 24/05/2006 shift:(0,-15) # 5.0.22\n at: 27/07/2006 shift:(0,-15) # 5.0.24\n at: 25/08/2006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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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filled bar #\n ##################################################\n bar:5.1 width:40 from:25/11/2005 till:$now color:col5.1 mark:(line,col5.1)\n\n ##################################################\n # 5.1 line for all other versions #\n ##################################################\n bar:5.1 mark:(line,col2.0-l2)\n at: 29/11/2005 shift:(0,-15) # 5.1.3\n at: 21/12/2005 shift:(0,-15) # 5.1.4\n at: 10/01/2006 shift:(0,-15) # 5.1.5\n at: 01/02/2006 shift:(0,-15) # 5.1.6\n at: 27/02/2006 shift:(0,-15) # 5.1.7\n at: 12/04/2006 shift:(0,-15) # 5.1.9\n at: 25/05/2006 shift:(0,-15) # 5.1.11\n at: 24/10/2006 shift:(0,-15) # 5.1.12\n at: 05/12/2006 shift:(0,-15) # 5.1.14\n at: 25/01/2007 shift:(0,-15) # 5.1.15\n at: 26/02/2007 shift:(0,-15) # 5.1.16\n at: 04/04/2007 shift:(0,-15) # 5.1.17\n at: 08/05/2007 shift:(0,-15) # 5.1.18\n at: 25/05/2007 shift:(0,-15) # 5.1.19\n at: 25/06/2007 shift:(0,-15) # 5.1.20\n at: 16/08/2007 shift:(0,-15) # 5.1.21\n at: 29/01/2008 shift:(0,-15) # 5.1.23\n at: 08/04/2008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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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filled bar #\n ##################################################\n bar:5.5 width:40 from:07/12/2009 till:$now color:col5.1 mark:(line,col5.1)\n\n ##################################################\n # 5.5 line for all other versions #\n ##################################################\n bar:5.5 mark:(line,col2.0-l2)\n at: 04/01/2010 shift:(0,-15) # 5.5.1\n at: 12/02/2010 shift:(0,-15) # 5.5.2\n at: 24/03/2010 shift:(0,-15) # 5.5.3\n at: 09/04/2010 shift:(0,-15) # 5.5.4\n at: 06/07/2010 shift:(0,-15) # 5.5.5\n at: 13/09/2010 shift:(0,-15) # 5.5.6\n at: 14/10/2010 shift:(0,-15) # 5.5.7\n at: 12/03/2010 shift:(0,-15) # 5.5.8\n at: 07/02/2011 shift:(0,-15) # 5.5.9\n at: 15/03/2011 shift:(0,-15) # 5.5.10\n at: 07/04/2011 shift:(0,-15) # 5.5.11\n at: 05/05/2011 shift:(0,-15) # 5.5.12\n at: 31/05/2011 shift:(0,-15) # 5.5.13\n at: 05/07/2011 shift:(0,-15) # 5.5.14\n at: 28/07/2011 shift:(0,-15) # 5.5.15\n at: 15/09/2011 shift:(0,-15) # 5.5.16\n at: 19/10/2011 shift:(0,-15) # 5.5.17\n at: 16/11/2011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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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line for all other versions #\n ##################################################\n bar:5.6 mark:(line,col2.0-l2)\n at: 11/04/2011 shift:(0,-15) # 5.6.2\n at: 03/10/2011 shift:(0,-15) # 5.6.3\n at: 20/12/2011 shift:(0,-15) # 5.6.4\n at: 10/04/2012 shift:(0,-15) # 5.6.5\n at: 07/08/2012 shift:(0,-15) # 5.6.6\n at: 29/09/2012 shift:(0,-15) # 5.6.7\n at: 07/11/2012 shift:(0,-15) # 5.6.8\n at: 12/11/2012 shift:(0,-15) # 5.6.9\n\n\n ##################################################\n # 5.6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n ##################################################\n bar:5.6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blue\n at: 11/04/2011 text:\"5.6.2 M5\" shift:(45,-3)\n at: 04/10/2012 text:\"5.6.5 M8\" shift:(45,-3)\n\n\n\n\n", "버전 별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n* 1994년 MySQL의 원 개발(마이클 위데니우스와 데이빗 액스마크에 의한)\n* 1995년 5월 최초의 국제화판\n* 3.19 판: 1996년 말, www.tcx.se에서\n* 3.20 판: 1997년 1월\n* 1998년 1월 8일 윈도 판(Windows 95와 NT) 출시\n* 3.21 판: 제품 출시 1998년 www.mysql.com 에서\n* 3.22 판: 1998년부터 알파, 베타판\n* 3.23 판: 2000년 7월 베타판으로부터, 2001년 1월 22일 제품 출시\n* 4.0 판: 2002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2003년 3월 제품 출시(unions)\n* 4.01 판: 2003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Jyoti 데이터베이스 트래킹용으로 MySQL 채택\n* '''4.1 판''': 2004년 6월 베타판으로부터, 2004년 10월 제품 출시 (R 트리와 B 트리, 서브쿼리, prepared statements 지원)\n* '''5.0 판''': 2005년 3월 베타판, 2005년 10월 제품 출시(커서, 저장 프로시저, 트리거, 뷰, XA 트랜잭션 지원)\n:페더레이티드 스토리지 엔진의 개발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Federated 스토리지 엔진은 proof-of-concept 스토리지 엔진이지만\", 주요 MySQL 5.0 판에 포함되어 기본값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MySQL Federated 테이블에 일부 단점들을 정리한 문서 : The Missing Manual\".\n*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2008년 MySQL AB를 인수했다.\n* '''5.1 판''': 2008년 11월 27일 출시(이벤트 스케줄러, 파티셔닝, 플러그인 API, 열 기반의 복제, 서버 로그 테이블)\n:5.1 판에는 5.0에 있던 35개의 현재의 버그 외에 20개의 알려진 크래싱, 그리고 잘못된 결과 버그를 포함하고 있다. ''(5.1.51판에는 거의 모두 픽스함)''.\n:MySQL 5.1과 6.0은 데이터 웨어하우징으로 사용할 때는 빈약한 성능을 보인다.  — 부분적으로 단일 쿼리를 진행할 때 다중 CPU 코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n* 오라클이 2010년 1월 27일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했다.\n* MySQL 서버 5.5는 현재 널리 사용가능하다(). 다음과 같은 성능 향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n** 기본 스토리지 엔진이 InnoDB이며, 이것은 트랜잭션과 참조 무결성 제한을 지원한다.\n** 개선된 InnoDB I/O 서브시스템\n** 향상된 SMP 지원\n** Semisynchronous 복제.\n** SQL 표준에 대응한 SIGNAL 과 RESIGNAL 구문.\n** 유니코드 문자셋 utf16, utf32, 그리고 utf8mb4 지원.\n** 사용자 정의 파티셔닝에 대한 새로운 옵션.\nMySQL 서버 6.0.11-알파가 6.0 라인의 최신 판으로 2009년 5월 22일 발표되었다. 이후의 MySQL 서버 개발은 새로운 릴리스 모델을 사용할 것이다. 6.0은 미리 출시판으로 통합될 것이다.\n\nMySQL 5.6은 새로운 출시판의 시금석이 될 예정으로 2011년 MySQL 이용자 컨퍼런스에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으로 쿼리 옵티마이저에 대한 성능 향상과 InnoDB의 고성능 트랜잰션 결과, 새로운 NoSQL-스타일 메모리 캐시된 API, 대용량 테이블의 조작과 퀘리를 위한 파티셔닝의 성능 향상, 복제와 성능 모니터링 개선을 PERFORMANCE_SCHEMA를 통해 데이터 확장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n", "* 마리아 DB\n", "\n", "\n* \n* MySQL 5.5 Reference Manual\n\n\n\n\n \n분류:자유 소프트웨어\n분류:자유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n분류:1995년 소프트웨어\n분류:오라클 소프트웨어\n분류:GPL 라이선스 소프트웨어\n분류: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n분류:자유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n분류:워드프레스\n분류: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소프트웨어" ]
'''MySQL'''(마이에스큐엘, )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오픈 소스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이다. 다중 스레드, 다중 사용자, 구조질의어 형식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 오라클이 관리 및 지원하고 있으며, Qt처럼 이중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하나의 옵션은 GPL이며, GPL 이외의 라이선스로 적용시키려는 경우 전통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선스의 적용을 받는다. 위와 같은 지원 방식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프로젝트에 저작권을 적용하는 방법과 비슷한 JBoss의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반코드가 개인의 소유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는 아파치 프로젝트와는 다르다. MySQL AB는 또한 MaxDB라고 불리는 MySQL AB와는 기반코드가 다른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을 판매했으나 2007년 이래로 MaxDB는 SAP AG가 소유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0억 달러에 인수되었으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며 같이 넘어갔다. 파일:Mysqlwb-homepage.png|섬네일|오른쪽|윈도에서 작동하는 MySQL 워크벤치 MySQL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거나 자료를 관리하기 위한 GUI 관리툴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용자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하고, 데이터를 백업하는데, 상태를 검사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생성하는데, 또는 데이터 레코더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MySQL 프론트엔드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나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한다. 공식적인 MySQL 프론트엔드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오라클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 그래픽 === 공식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사용자에게 MySQL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그래픽적으로 지원하게 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조의 설계도 시각적으로 하게 해주는 MySQL AB에 의해 개발된 자유로운 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패키지 소프트웨어였던 MySQL GUI 툴즈를 대체하였다. 여타의 제3자 패키지와 유사하지만, MySQL 현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이용자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모델링, SQL 관리(MySQL 쿼리 브라우저 대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관리(MySQL Administrator 대체)까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MySQL 워크벤치는 2가지 판이 존재하는데, MySQL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보통의 자유, 공개 소스인 ‘커뮤니티 판’(''Community Edition'')과 커뮤니티 판을 확장하여 개선시킨 유료의 ‘스탠더드 판’(''Standard Edition'')이 존재한다. 응용 프로그램에서 MySQL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API를 사용할 수 있다. 이들 API는 언어에 종속적이다. MySQL은 공식적으로 아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 C/C++ * C#/F# * 볼랜드 델파이 (dbExpress를 통한) * 자바 (네이티브 자바 드라이버를 통한) * 파이썬 * 루비 * REALbasic (매킨토시 계열) * 프리베이직 * 스몰토크 * Eiffel * 리스프 * 펄 * Tcl * PHP PHP4 PHP5 PHP6 * 델파이1 델파이2 델파이3 델파이4 델파이5델파이6델파이7델파이8 * 델파이2007델파이2008델파이2009 * 파파라치 MySQL은 MyODBC라고 불리는 ODBC 인터페이스를 지원해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그 예로 ASP와 콜드퓨전을 들 수 있다. MySQL은 대부분 ANSI C로 구현되었다. MySQL은 미디어위키와 드루팔과 같은 인기있는 웹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된다. 그리고 LAMP, MAMP, WAMP (리눅스/매킨토시/윈도-아파치-MySQL-PHP/펄/파이썬)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구성체로서 작동하며 버그질라와 같은 오픈소스 버그 추적 도구에도 사용된다. 웹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MySQL의 인기는 PHP의 인기도와 맞물려 있다. PHP는 종종 MySQL과 결합되며,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터넷 상의 여러 웹사이트, 혹은 서적을 통해서 MySQL과 PHP의 연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의 플랫폼에서는 이들의 연동을 자동으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SUN 인수 이후, 중소기업이나 개인용 사이트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키백과, 구글(검색 엔진은 제외), 페이스북, 트위터, 플리커, 노키아닷컴, 유튜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출시 GA(General availability) 최신 마이너 버전 최신 릴리스 수명 종료 5.1.73 2013-12-03 Dec 2013 5.5.62 2018-10-22 Dec 2018 5.6.51 2021-01-20 Feb 2021 5.7.41 2023-01-17 Oct 2023 8.0.32 2023-01-17 Apr 2026 Define $now = 12/11/2012 Define $begindate = 01/01/1999 Define $width = 700 Define $warning = 380 # $width - 120 Define $height = 750 ImageSize = width:$width height:$height PlotArea = left:40 right:10 bottom:100 top:20 DateFormat = dd/mm/yyyy Period = from:$begindate till:$now TimeAxis = orientation:ver Alignbars = early Legend = orientation:vertical position:bottom columns:1 ################################################## # Color definitions # ################################################## Colors = id:col5.1 value:rgb(0.4,0.6,1) Legend:Active_Development id:col5.0 value:rgb(1,0.6,0.4) Legend:NO_Active_Development id:col2.0-l1 value:black id:col2.0-l2 value:gray(0.98) id:colbg value:gray(0.98) id:colgrmaj value:gray(0.5) id:colgrmin value:gray(0.8) id:lighttext value:rgb(0.5,0.5,0.5) ScaleMajor = gridcolor:colgrmaj unit:year increment:1 start:$begindate ScaleMinor = gridcolor:colgrmin unit:month increment:3 start:$begindate BackgroundColors = canvas:colbg PlotDat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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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filled bar # ################################################## bar:5.1 width:40 from:25/11/2005 till:$now color:col5.1 mark:(line,col5.1) ################################################## # 5.1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5.1 mark:(line,col2.0-l2) at: 29/11/2005 shift:(0,-15) # 5.1.3 at: 21/12/2005 shift:(0,-15) # 5.1.4 at: 10/01/2006 shift:(0,-15) # 5.1.5 at: 01/02/2006 shift:(0,-15) # 5.1.6 at: 27/02/2006 shift:(0,-15) # 5.1.7 at: 12/04/2006 shift:(0,-15) # 5.1.9 at: 25/05/2006 shift:(0,-15) # 5.1.11 at: 24/10/2006 shift:(0,-15) # 5.1.12 at: 05/12/2006 shift:(0,-15) # 5.1.14 at: 25/01/2007 shift:(0,-15) # 5.1.15 at: 26/02/2007 shift:(0,-15) # 5.1.16 at: 04/04/2007 shift:(0,-15) # 5.1.17 at: 08/05/2007 shift:(0,-15) # 5.1.18 at: 25/05/2007 shift:(0,-15) # 5.1.19 at: 25/06/2007 shift:(0,-15) # 5.1.20 at: 16/08/2007 shift:(0,-15) # 5.1.21 at: 29/01/2008 shift:(0,-15) # 5.1.23 at: 08/04/2008 shift:(0,-15) # 5.1.24 at: 28/05/2008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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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8 at: 09/07/2010 shift:(0,-15) # 5.1.49 at: 28/09/2010 shift:(0,-15) # 5.1.49sp1 at: 03/08/2010 shift:(0,-15) # 5.1.50 at: 10/09/2010 shift:(0,-15) # 5.1.51 at: 11/10/2010 shift:(0,-15) # 5.1.52 at: 21/02/2011 shift:(0,-15) # 5.1.52sp1 at: 03/11/2010 shift:(0,-15) # 5.1.53 at: 26/11/2010 shift:(0,-15) # 5.1.54 at: 01/03/2011 shift:(0,-15) # 5.1.56 at: 05/05/2011 shift:(0,-15) # 5.1.57 at: 05/07/2011 shift:(0,-15) # 5.1.58 at: 15/09/2011 shift:(0,-15) # 5.1.59 at: 16/11/2011 shift:(0,-15) # 5.1.60 at: 10/01/2012 shift:(0,-15) # 5.1.61 at: 21/03/2012 shift:(0,-15) # 5.1.62 at: 07/05/2012 shift:(0,-15) # 5.1.63 at: 09/08/2012 shift:(0,-15) # 5.1.65 at: 28/09/2012 shift:(0,-15) # 5.1.66 ################################################## # 5.1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 ################################################## bar:5.1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blue at: 25/11/2005 text:"5.1.3" shift:(36,-8) at: 10/01/2006 text:"5.1.5" shift:(36,1) at: 25/01/2007 text:"5.1.15" shift:(40,-3) at: 24/09/2007 text:"5.1.22 RC" shift:(49,-3) at: 29/01/2008 text:"5.1.23" shift:(40,-3) at: 14/11/2008 text:"5.1.30 GA" shift:(49,-5) at: 19/01/2009 text:"5.1.31" shift:(40,0) at: 15/01/2010 text:"5.1.43" shift:(40,-3) at: 07/02/2011 text:"5.1.55" shift:(40,-3) at: 10/01/2012 text:"5.1.61" shift:(40,-3) ################################################## # 5.5 filled bar # ################################################## bar:5.5 width:40 from:07/12/2009 till:$now color:col5.1 mark:(line,col5.1) ################################################## # 5.5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5.5 mark:(line,col2.0-l2) at: 04/01/2010 shift:(0,-15) # 5.5.1 at: 12/02/2010 shift:(0,-15) # 5.5.2 at: 24/03/2010 shift:(0,-15) # 5.5.3 at: 09/04/2010 shift:(0,-15) # 5.5.4 at: 06/07/2010 shift:(0,-15) # 5.5.5 at: 13/09/2010 shift:(0,-15) # 5.5.6 at: 14/10/2010 shift:(0,-15) # 5.5.7 at: 12/03/2010 shift:(0,-15) # 5.5.8 at: 07/02/2011 shift:(0,-15) # 5.5.9 at: 15/03/2011 shift:(0,-15) # 5.5.10 at: 07/04/2011 shift:(0,-15) # 5.5.11 at: 05/05/2011 shift:(0,-15) # 5.5.12 at: 31/05/2011 shift:(0,-15) # 5.5.13 at: 05/07/2011 shift:(0,-15) # 5.5.14 at: 28/07/2011 shift:(0,-15) # 5.5.15 at: 15/09/2011 shift:(0,-15) # 5.5.16 at: 19/10/2011 shift:(0,-15) # 5.5.17 at: 16/11/2011 shift:(0,-15) # 5.5.18 at: 08/12/2011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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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5.6 mark:(line,col2.0-l2) at: 11/04/2011 shift:(0,-15) # 5.6.2 at: 03/10/2011 shift:(0,-15) # 5.6.3 at: 20/12/2011 shift:(0,-15) # 5.6.4 at: 10/04/2012 shift:(0,-15) # 5.6.5 at: 07/08/2012 shift:(0,-15) # 5.6.6 at: 29/09/2012 shift:(0,-15) # 5.6.7 at: 07/11/2012 shift:(0,-15) # 5.6.8 at: 12/11/2012 shift:(0,-15) # 5.6.9 ################################################## # 5.6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 ################################################## bar:5.6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blue at: 11/04/2011 text:"5.6.2 M5" shift:(45,-3) at: 04/10/2012 text:"5.6.5 M8" shift:(45,-3) 버전 별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 1994년 MySQL의 원 개발(마이클 위데니우스와 데이빗 액스마크에 의한) * 1995년 5월 최초의 국제화판 * 3.19 판: 1996년 말, www.tcx.se에서 * 3.20 판: 1997년 1월 * 1998년 1월 8일 윈도 판(Windows 95와 NT) 출시 * 3.21 판: 제품 출시 1998년 www.mysql.com 에서 * 3.22 판: 1998년부터 알파, 베타판 * 3.23 판: 2000년 7월 베타판으로부터, 2001년 1월 22일 제품 출시 * 4.0 판: 2002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2003년 3월 제품 출시(unions) * 4.01 판: 2003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Jyoti 데이터베이스 트래킹용으로 MySQL 채택 * '''4.1 판''': 2004년 6월 베타판으로부터, 2004년 10월 제품 출시 (R 트리와 B 트리, 서브쿼리, prepared statements 지원) * '''5.0 판''': 2005년 3월 베타판, 2005년 10월 제품 출시(커서, 저장 프로시저, 트리거, 뷰, XA 트랜잭션 지원) :페더레이티드 스토리지 엔진의 개발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Federated 스토리지 엔진은 proof-of-concept 스토리지 엔진이지만", 주요 MySQL 5.0 판에 포함되어 기본값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MySQL Federated 테이블에 일부 단점들을 정리한 문서 : The Missing Manual". *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2008년 MySQL AB를 인수했다. * '''5.1 판''': 2008년 11월 27일 출시(이벤트 스케줄러, 파티셔닝, 플러그인 API, 열 기반의 복제, 서버 로그 테이블) :5.1 판에는 5.0에 있던 35개의 현재의 버그 외에 20개의 알려진 크래싱, 그리고 잘못된 결과 버그를 포함하고 있다. ''(5.1.51판에는 거의 모두 픽스함)''. :MySQL 5.1과 6.0은 데이터 웨어하우징으로 사용할 때는 빈약한 성능을 보인다.  — 부분적으로 단일 쿼리를 진행할 때 다중 CPU 코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 오라클이 2010년 1월 27일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했다. * MySQL 서버 5.5는 현재 널리 사용가능하다(). 다음과 같은 성능 향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기본 스토리지 엔진이 InnoDB이며, 이것은 트랜잭션과 참조 무결성 제한을 지원한다. ** 개선된 InnoDB I/O 서브시스템 ** 향상된 SMP 지원 ** Semisynchronous 복제. ** SQL 표준에 대응한 SIGNAL 과 RESIGNAL 구문. ** 유니코드 문자셋 utf16, utf32, 그리고 utf8mb4 지원. ** 사용자 정의 파티셔닝에 대한 새로운 옵션. MySQL 서버 6.0.11-알파가 6.0 라인의 최신 판으로 2009년 5월 22일 발표되었다. 이후의 MySQL 서버 개발은 새로운 릴리스 모델을 사용할 것이다. 6.0은 미리 출시판으로 통합될 것이다. MySQL 5.6은 새로운 출시판의 시금석이 될 예정으로 2011년 MySQL 이용자 컨퍼런스에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으로 쿼리 옵티마이저에 대한 성능 향상과 InnoDB의 고성능 트랜잰션 결과, 새로운 NoSQL-스타일 메모리 캐시된 API, 대용량 테이블의 조작과 퀘리를 위한 파티셔닝의 성능 향상, 복제와 성능 모니터링 개선을 PERFORMANCE_SCHEMA를 통해 데이터 확장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 마리아 DB * * MySQL 5.5 Reference Manual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자유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분류:1995년 소프트웨어 분류:오라클 소프트웨어 분류:GPL 라이선스 소프트웨어 분류: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분류:자유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분류:워드프레스 분류: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소프트웨어
비주얼 베이직
[ "Introduction", "특징", "다른 언어와의 비교", "발전",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 "지원 중단", "예제 코드",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n'''비주얼 베이직'''(, )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의 하나이다. 비주얼 베이직은 사건 기반 프로그래밍의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에 따른 풍부한 구성 요소를 가진 통합 개발 환경 및 RAD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주얼 베이직은 초보자가 접근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각적인 개발 환경과 더불어 베이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n\n비주얼 베이직은 베이직의 영향을 받았으며, GUI 응용 프로그램의 RAD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며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을 데이터 액세스 오브젝트, 원격 데이터 오브젝트, 또는 ActiveX 데이터 오브젝트들, 그리고 Active X컨트롤과 개체의 생성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이나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와 같은 스크립트 언어들은 문법적으로 비주얼 베이직과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다르다.\n\n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제공하는 구성 요소를 응용 프로그램에 삽입할 수 있다. 또한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윈도우 API를 사용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외부 함수 선언이 필요하다.\n\n비주얼 베이직의 마지막 버전은 1998년에 출시된 비주얼 베이직 6.0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장 지원 기간은 2008년 3월에 끝났으며, 공식적인 후계 제품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이다.\n", "비주얼 베이직의 비어있는 폼.\n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비주얼 베이직은 쉽게 배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비주얼 베이직은 간단한 GUI 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그램의 개발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에서의 프로그래밍은 폼(Form)위에 놓인, 시적으로 정렬된 GUI 위젯(비주얼 베이직에서는 컨트롤이라고 한다)들의 조합이다. 이 컨트롤들은 특별한 속성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능의 확장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의 입력이 가능하다.\n\n기본적인 속성과 역할이 이들 컨트롤에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많은 코딩 없이 만들 수 있다.\n\n성능상의 문제가 이전 버전에서 많이 보고되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컴퓨터 성능 향상과 원시 코드(Native Code) 컴파일을 통해 이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n\n비주얼 베이직 5.0부터 원시 코드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 작성이 가능해졌지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된 실행 파일은 여전히 1메가바이트 정도 크기의 라이브러리 파일을 필요로 한다. 이 파일은 윈도우 2000과 이후 윈도 버전에서 기본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의 윈도우 95, 윈도우 98, 윈도우 NT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실행 파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라이브러리 파일 또한 함께 배포하여야 했다.\n\n폼은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커서를 통해 텍스트 상자, 단추 등과 같은 컨트롤들을 폼 위에 놓는다. 컨트롤들은 속성을 가지며 이벤트 처리자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기본값들은 컨트롤이 만들어질 때 함께 제공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많은 속성값들은 프로그램이 실행 중일 때 응용 프로그램의 사용자의 조작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으며, 이것은 동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의 'Resize(크기 변경)' 이벤트 처리자에 컨트롤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컨트롤이 계속해서 창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거나 창 전체를 다 채우는 등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 상자의 'KeyPress(키 눌림)' 이벤트 처리자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해당 응용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입력된 문자의 대소문자를 변환하거나 특정 문자의 삽입을 막을 수도 있다.\n\n비주얼 베이직은 실행 파일, ActiveX 컨트롤, DLL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주얼 베이직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 용도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용 응용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 조작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 덜 기능적인 대화 상자들은 팝업 능력에 사용된다.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코드를 적당한 이벤트 처리자에 삽입해야 하긴 하지만, 컨트롤들은 응용 프로그램에 기본적인 기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문자열의 입력이 가능한 드롭 다운 리스트 컨트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가진 목록을 보여주며 사용자가 항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사용자에 의해 항목이 선택될 때 이벤트 처리자가 호출되며, 이 이벤트 처리자는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으로 코딩한 코드를 처리하는데, 이때 사용자가 선택한 항목의 관련 항목의 출력과 같은, 사용자의 컨트롤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에 따른 처리를 할 수 있다.\n\n한편, 비주얼 베이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을 통한 Active X 개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서버 측면에서의 처리나 추가 모듈을 가능하게 해 준다.\n\n비주얼 베이직은 레퍼런스 카운팅을 통한 쓰레기 수집을 수행하며, 방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들과, 기본적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위젯들이 초기 프로젝트 구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대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달리, 비주얼 베이직은 일반적으로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으며, 대신에 키워드를 표준 대소문자 설정으로 변환한 뒤, 강제로 변수명의 대소문자를 기호 테이블의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문자열 비교에 관해서는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원한다면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n\n비주얼 베이직의 컴파일러는 다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C, C++)과 호환성이 있지만, IDE상의 제한으로 인해 윈도 모델 DLL이나 스레드의 사용 등은 불가능하다.\n", "비주얼 베이직은 C 언어 계열의 언어들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n\n* C 언어에서 가능한 다중 할당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에서 코드 A = B = C는 변수 A, B, C의 값을 같게 하지 않는다. \"Is B = C?\" 불린 결과값이 A에 들어간다. 결국 A에 들어가는 결과치는 거짓(0) 또는 참(-1)이 될 것이다.\n\n* 불린 상수 True는 숫자값 -1을 갖는다. 이렇게 처리하는 이유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불린 자료형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 형태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1은 16진수 1로 계산되고(불린 값은 True이다), 0은 16진수 0으로 계산된다.(불린 값은 False이다.) 이것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값 0인 Not 연산을 할 때 정수값 -1을 반환하는 것을 통해 명백하게 설명되는데, 다시 말해 True = Not False이다. 이러한 비주얼 베이직의 고유한 처리 방식은 And, Or, Xor, Not과 같은 정수 비트의 논리 연산에 유용하다. 이러한 True의 정의는 1970년대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들었던 베이직 제품에서의 처리와 일치하며, 이것은 당시의 CPU 명령어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n* 논리 및 비트 연산자가 통합되어 있다. 이것은 논리 연산자와 비트 연산자가 구분되어 있는 펄과 같은 C 언어 계열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 요소는 베이직 언어의 전통적인 특징이다.\n* 가변 배열 기반이다. 배열의 정의는 파스칼이나 포트란과 같이, 유사한 최대 인덱스(Upper Bound)와 최소 인덱스(Lower Bound)의 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Option Base 구문을 통해 최소 인덱스의 지정을 할 수 있다. Option Base 문의 사용은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볼 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데, 이것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제나 명시적으로 배열의 최소 인덱스를 지정하는 것이다. 이 최소 인덱스는 0 또는 1뿐만 아니라, 선언에 따라서는 다른 값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최소 인덱스와 최대 인덱스 모두 프로그래머의 제어가 가능하다. 대조적으로 서브스크립트 제한적 언어(Subscript-Limited Language)들에서 배열의 최소 인덱스는 가변적이지 않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에서도 나타나지만,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에는 없다.\n: OPTION BASE는 1970년대 후반 ANSI Minimal BASIC을 통해 표준으로 지정되었다.\n* 상대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및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과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다.\n* 실수를 정수로 바꿀 때, 기본적으로 Round함수를 통해 반올림을 한다. 반올림 방법으로는 Round-to-even 을 사용한다.\n* 일반적인 나누기 연산자인 /를 통해 자동적으로 정수가 실수로 변환되므로, 짝수 정수부에 의한 홀수 정수부는 직관적으로 올바른 연산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자동으로 반올림을 하는 정수 나누기 연산자인 \\도 있다.\n* 기본값으로, 만약 변수가 선언되지 않았거나 자료형이 선언되지 않을 경우, 변수는 Variant형으로 선언 된다. 그러나 이것은 DefInt, DefBool, DefVar, DefObj, DefStr와 같은 DefType 구문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6.0의 경우 12개의 DefType 구문이 지원된다. 기본 형은 특별한 접두어인 #를 통한 선언을 통해 Double형으로, !를 통해 Single형으로, &를 통해 Long 형으로, %형으로 Integer형으로, $를 통해 String형으로, @를 통해 Currency 형으로 오버라이드되거나, 예약어 As (type)를 통해 오버라이드 될 수 있다. 또한 무조건 명시적인 변수 선언만 허용하도록 할 수도 있는데, 이 때는 Option Explicit 명령을 사용한다.\n", "비주얼 베이직 1.0은 1991년 5월 발표되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있어서의 끌어다 놓기 방법은 앨런 쿠퍼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폼 제작기에서 온 것이며, 쿠퍼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트라이포드''라고 불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3.0용 프로그래밍 가능 폼 제작 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쿠퍼의 개발팀과 계약한 후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을 ''루비''라고 명명하였다. (루비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관계 없다.)\n\n트라이포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주얼 베이직을 만들기 위해 루비와 베이직 언어를 합치기로 결정했다.\n\n루비 인터페이스 개발기는 비주얼 베이직의 \"시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소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오메가\"용으로 설계된 \"EB\"(임베디드 베이직 엔진)와 합쳐졌다. 루비는 또한 훗날 비주얼 베이직 확장(VBX)이라고 명명될 추가적인 컨트롤들을 포함하기 위한 DLL 로드 기능을 지원하였다.\n\n버전 5.0에서 Win16 코드와의 호환성을 버리고 전반적인 기능을 강화했다. 버전 6.0에서는 인터넷 관련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n\n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기존 버전과 다르게, 닷넷의 일부분으로 동작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강화되었다. 또한 기존 버전과의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기존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닷넷 코드로 옮겨 주는 마법사가 있다.\n\n그러나 네이티브 비주얼 베이직은 버전 6.0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완전히 포기하여 사라진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11년 기준으로, 프로그래밍 입문 언어로서 시스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변수, 메모리 등)이 없이도 프로그래밍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액셀 등 오피스에서 사용되는 VBA의 문법이 비주얼 베이직 6.0 버전과 호환됨에 따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문용으로도 또 실무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n\n=== 개발 및 발전 과정 ===\n* '선더(Thunder)'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n* 1991년 5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컴덱스에서 윈도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매되었다.\n* 1992년 3월,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스 기반 베이직 컴파일러인 퀵베이직과 베이직 전문 개발 체계(BASIC Professional Development System)의 차기 버전으로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적인 특성 자체는 윈도우용 비주얼 베이직과 전혀 호환되지 않았다.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은 문자 기반 윈도(Character Oriented Windows)를 사용했으며, 확장 아스키문자를 통해 GUI를 구현해 내었다.\n* 1992년 11월, 비주얼 베이직 2.0이 발매되었다. 프로그래밍 환경이 더욱 쉽게 개선되었으며 속도 또한 향상되었다. 특히, 폼이 인스턴스적인 개체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본적인 클래스 모듈의 개념은 후에 비주얼 베이직 4.0에서 적용된다.\n* 1993년 7월, 비주얼 베이직 3.0이 발매되었다. 이 때는 스탠다드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구분되어 발매되었다. 이 비주얼 베이직 3.0은 제트(또는 액세스)1.x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제트 데이터베이스 엔진 1.1을 포함하고 있었다.\n* 1995년 8월, 비주얼 베이직 4.0이 발매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은 32비트와 16비트 윈도 프로그램 둘 다 개발할 수 있는 첫 번째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이었다. 또한 GUI가 없는 클래스를 비주얼 베이직에서 개발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 제품들간의 비호환성은 설치와 운영상의 문제를 낳았다. 이전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은 VBX 컨트롤을 써 왔었지만 비주얼 베이직 4.0은 OLE 컨트롤(확장자가 .OCX인 파일)을 썼다. 이 OLE 컨트롤은 훗날 ActiveX 컨트롤이라고 이름지어진다.\n* 1997년 2월 발매된 비주얼 베이직 5.0은 32비트 버전으로만 발매되었다. 16비트 프로그램의 개발을 계속 했던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 4.0의 소스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5.0으로 옮길 수 있었으며, 비주얼 베이직 5.0 프로그램이 비주얼 베이직 4.0으로 옮겨 가기도 쉬웠다. 비주얼 베이직 5.0은 또한 사용자 정의 컨트롤을 만들 수 있는 기능, 또한 원시 코드로 윈도용 실행 파일을 컴파일 할 수 있는 기능, 대량의 계산에서의 속도 향상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Active X 컨트롤의 개발을 위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무료 버전 또한 배포되었는데, 이 버전은 일종의 시험판으로, 일반적인 .exe 프로젝트가 IDE에서는 실행되었지만 컴파일되지는 않았다.\n* 1998년 6월, 많은 영역에서 개선을 이룬 비주얼 베이직 6.0이 발매되었다. 특히 비주얼 베이직 6.0은 웹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6.0은 2008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 안함\" 단계에 해당 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처럼 비주얼 베이직 6.0의 개발 환경은 더 이상 지원되지 않기는 하지만, 실행에 필요한 라이브러리는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그리고 윈도우 7에 계속 지원되고 있다.\n* 2005년 3월 31일,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 6.0의 주요 지원이 종료되었다. 확장 지원은 2008년 3월 종료되었다. 이에 대하여, 비주얼 베이직 유저 커뮤니티는 우려를 표현하고 제품의 계속적인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흐름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2005년)에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인 마이크로소프트 앤티스파이웨어는 비주얼 베이직 6.0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대체품인 윈도우 디펜더는 C++ 코드로 재작성되어 개발되었다.\n",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스크립트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자체는 베이직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n\n다음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에서 파생한 것이다:\n*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VBA)는 많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응용 프로그램들(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및 솔리드웍스, 오토캐드, 워드퍼펙트 오피스, 아크GIS, 그리고 ACCPAC와 같은 서드 파티 제품들에 포함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간에 약간의 불일치는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전체적으로 비주얼 베이직 6.0과 같은 언어이며, 같은 런타임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n*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의 기본 언어이다.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스크립팅과 클라이언트측 웹 페이지 스크립팅에도 사용된다. 비주얼 베이직과 문법적으로 닮아 있지만, 이 언어는 비주얼 베이직 런타임 라이브러리와 대립되는 vbscript.dll을 통해 실행된다는 점에서 두 언어는 구분 된다. ASP와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컴파일된 웹 페이지용 닷넷 프레임워크를 사용하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 닷넷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n*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비주얼 베이직 6.0의 후속작으로 설계된 제품이며, 마이크로소프트의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의 일부분이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닷넷 프레임워크를 통해 실행되며, 실행 파일을 컴파일한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비주얼 베이직 6.0과 하위 호환성이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NET Upgrade Assessment Tool를 이용하여 변환시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n* 스타 베이직은 선 마이크로시스템즈가 개발한 스타 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있는 인터프리터 언어이며, 비주얼 베이직과 호환성이 있다.\n*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GNU/리눅스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감바스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n*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리눅스, 매킨토시, 윈도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K베이직으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n", "MS는 무료 지원과 중요 업데이트 제공을 끝으로 2005년 3월 말 VB6에 대한 표준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서비스 모두 앞으로 3년 동안은 유료 서비스로 남아있게 된다. MS는 2000년 VB.NET을 내놓았으며 그 후 VB6 이하 버전을 사용하는 개발자들은 끊임없이 감소해왔다. 비주얼 베이직을 등지고 떠난 많은 개발자들은 VB.NET으로 옮겨가지 않고, MS의 언어가 아닌 자바로 옮겨갔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다. 2005년 현재, 북미 전체 개발자 중 비주얼 베이직 닷넷 개발자가 34%인데 비해 비주얼 베이직 개발자들은 45%다. 기존 VB6 응용 프로그램을 VB 닷넷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2008년 VB6 SP6에 대한 일부 취약한 보안 문제와 관련된 패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추후 공개할 윈도우 8부터 비주얼 베이직 및 기반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n", "다음은 이 언어의 예제 코드이다. 창이 호출되면 \"Hello, World!\" 메시지 상자를 표시한다:\n\nPrivate Sub Form_Load()\n ' Hello, World라는 내용의 메시지 상자를 띄웁니다.\n MsgBox (\"Hello, World!\")\nEnd Sub\n\n\n아래 코드는 Count 변수가 1초에 1씩 올라가도록 한다.(작동을 위해서는 타이머 컨트롤이 필요하다)\n\nOption Explicit\nDim Count As Integer\nPrivate Sub Form_Load()\n Count = 0\n Timer1.Interval = 1000 ' 밀리초 단위\nEnd Sub\nPrivate Sub Timer1_Timer()\n Count = Count + 1\n lblCount.Caption = Count\nEnd Sub\n\n", "\n\n\n* 비주얼 베이직 닷넷\n* 프로그래밍 언어의 비교\n* FreeBASIC – a programming language rooting from QBasic.\n* Gambas - Open source competitor to Visual Basic\n* IIf – a function in several editions of Visual Basic roughly equivalent to the ?: ternary operator of C and related languages.\n*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익스프레스 - a free scaled down version of Visual Basic .NET for independent developers.\n* 창 (컴퓨팅)\n* Power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n* Pure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n* REALbasic – Competitor to Visual Basic\n* DarkBASIC – harness DirectX from BASIC applications\n", "\n", "* VB 6.0 at MSDN\n* VB 6.0 at MSDN UK\n* Migrating from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2008 (MSDN UK)\n\n\n\n\n\n\n\n\n분류: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n베이직\n분류:1991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n분류:베이직 인터프리터\n분류:베이직 컴파일러\n분류: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n분류:객체 기반 프로그래밍 언어\n분류: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그래밍 언어" ]
'''비주얼 베이직'''(, )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의 하나이다. 비주얼 베이직은 사건 기반 프로그래밍의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에 따른 풍부한 구성 요소를 가진 통합 개발 환경 및 RAD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주얼 베이직은 초보자가 접근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각적인 개발 환경과 더불어 베이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비주얼 베이직은 베이직의 영향을 받았으며, GUI 응용 프로그램의 RAD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며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을 데이터 액세스 오브젝트, 원격 데이터 오브젝트, 또는 ActiveX 데이터 오브젝트들, 그리고 Active X컨트롤과 개체의 생성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이나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와 같은 스크립트 언어들은 문법적으로 비주얼 베이직과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다르다.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제공하는 구성 요소를 응용 프로그램에 삽입할 수 있다. 또한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윈도우 API를 사용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외부 함수 선언이 필요하다. 비주얼 베이직의 마지막 버전은 1998년에 출시된 비주얼 베이직 6.0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장 지원 기간은 2008년 3월에 끝났으며, 공식적인 후계 제품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이다. 비주얼 베이직의 비어있는 폼.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비주얼 베이직은 쉽게 배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비주얼 베이직은 간단한 GUI 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그램의 개발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에서의 프로그래밍은 폼(Form)위에 놓인, 시적으로 정렬된 GUI 위젯(비주얼 베이직에서는 컨트롤이라고 한다)들의 조합이다. 이 컨트롤들은 특별한 속성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능의 확장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의 입력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속성과 역할이 이들 컨트롤에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많은 코딩 없이 만들 수 있다. 성능상의 문제가 이전 버전에서 많이 보고되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컴퓨터 성능 향상과 원시 코드(Native Code) 컴파일을 통해 이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비주얼 베이직 5.0부터 원시 코드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 작성이 가능해졌지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된 실행 파일은 여전히 1메가바이트 정도 크기의 라이브러리 파일을 필요로 한다. 이 파일은 윈도우 2000과 이후 윈도 버전에서 기본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의 윈도우 95, 윈도우 98, 윈도우 NT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실행 파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라이브러리 파일 또한 함께 배포하여야 했다. 폼은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커서를 통해 텍스트 상자, 단추 등과 같은 컨트롤들을 폼 위에 놓는다. 컨트롤들은 속성을 가지며 이벤트 처리자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기본값들은 컨트롤이 만들어질 때 함께 제공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많은 속성값들은 프로그램이 실행 중일 때 응용 프로그램의 사용자의 조작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으며, 이것은 동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의 'Resize(크기 변경)' 이벤트 처리자에 컨트롤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컨트롤이 계속해서 창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거나 창 전체를 다 채우는 등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 상자의 'KeyPress(키 눌림)' 이벤트 처리자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해당 응용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입력된 문자의 대소문자를 변환하거나 특정 문자의 삽입을 막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실행 파일, ActiveX 컨트롤, DLL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주얼 베이직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 용도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용 응용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 조작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 덜 기능적인 대화 상자들은 팝업 능력에 사용된다.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코드를 적당한 이벤트 처리자에 삽입해야 하긴 하지만, 컨트롤들은 응용 프로그램에 기본적인 기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문자열의 입력이 가능한 드롭 다운 리스트 컨트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가진 목록을 보여주며 사용자가 항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사용자에 의해 항목이 선택될 때 이벤트 처리자가 호출되며, 이 이벤트 처리자는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으로 코딩한 코드를 처리하는데, 이때 사용자가 선택한 항목의 관련 항목의 출력과 같은, 사용자의 컨트롤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에 따른 처리를 할 수 있다. 한편, 비주얼 베이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을 통한 Active X 개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서버 측면에서의 처리나 추가 모듈을 가능하게 해 준다. 비주얼 베이직은 레퍼런스 카운팅을 통한 쓰레기 수집을 수행하며, 방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들과, 기본적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위젯들이 초기 프로젝트 구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대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달리, 비주얼 베이직은 일반적으로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으며, 대신에 키워드를 표준 대소문자 설정으로 변환한 뒤, 강제로 변수명의 대소문자를 기호 테이블의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문자열 비교에 관해서는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원한다면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의 컴파일러는 다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C, C++)과 호환성이 있지만, IDE상의 제한으로 인해 윈도 모델 DLL이나 스레드의 사용 등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은 C 언어 계열의 언어들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C 언어에서 가능한 다중 할당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에서 코드 A = B = C는 변수 A, B, C의 값을 같게 하지 않는다. "Is B = C?" 불린 결과값이 A에 들어간다. 결국 A에 들어가는 결과치는 거짓(0) 또는 참(-1)이 될 것이다. * 불린 상수 True는 숫자값 -1을 갖는다. 이렇게 처리하는 이유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불린 자료형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 형태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1은 16진수 1로 계산되고(불린 값은 True이다), 0은 16진수 0으로 계산된다.(불린 값은 False이다.) 이것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값 0인 Not 연산을 할 때 정수값 -1을 반환하는 것을 통해 명백하게 설명되는데, 다시 말해 True = Not False이다. 이러한 비주얼 베이직의 고유한 처리 방식은 And, Or, Xor, Not과 같은 정수 비트의 논리 연산에 유용하다. 이러한 True의 정의는 1970년대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들었던 베이직 제품에서의 처리와 일치하며, 이것은 당시의 CPU 명령어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 논리 및 비트 연산자가 통합되어 있다. 이것은 논리 연산자와 비트 연산자가 구분되어 있는 펄과 같은 C 언어 계열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 요소는 베이직 언어의 전통적인 특징이다. * 가변 배열 기반이다. 배열의 정의는 파스칼이나 포트란과 같이, 유사한 최대 인덱스(Upper Bound)와 최소 인덱스(Lower Bound)의 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Option Base 구문을 통해 최소 인덱스의 지정을 할 수 있다. Option Base 문의 사용은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볼 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데, 이것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제나 명시적으로 배열의 최소 인덱스를 지정하는 것이다. 이 최소 인덱스는 0 또는 1뿐만 아니라, 선언에 따라서는 다른 값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최소 인덱스와 최대 인덱스 모두 프로그래머의 제어가 가능하다. 대조적으로 서브스크립트 제한적 언어(Subscript-Limited Language)들에서 배열의 최소 인덱스는 가변적이지 않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에서도 나타나지만,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에는 없다. : OPTION BASE는 1970년대 후반 ANSI Minimal BASIC을 통해 표준으로 지정되었다. * 상대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및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과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다. * 실수를 정수로 바꿀 때, 기본적으로 Round함수를 통해 반올림을 한다. 반올림 방법으로는 Round-to-even 을 사용한다. * 일반적인 나누기 연산자인 /를 통해 자동적으로 정수가 실수로 변환되므로, 짝수 정수부에 의한 홀수 정수부는 직관적으로 올바른 연산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자동으로 반올림을 하는 정수 나누기 연산자인 \도 있다. * 기본값으로, 만약 변수가 선언되지 않았거나 자료형이 선언되지 않을 경우, 변수는 Variant형으로 선언 된다. 그러나 이것은 DefInt, DefBool, DefVar, DefObj, DefStr와 같은 DefType 구문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6.0의 경우 12개의 DefType 구문이 지원된다. 기본 형은 특별한 접두어인 #를 통한 선언을 통해 Double형으로, !를 통해 Single형으로, &를 통해 Long 형으로, %형으로 Integer형으로, $를 통해 String형으로, @를 통해 Currency 형으로 오버라이드되거나, 예약어 As (type)를 통해 오버라이드 될 수 있다. 또한 무조건 명시적인 변수 선언만 허용하도록 할 수도 있는데, 이 때는 Option Explicit 명령을 사용한다. 비주얼 베이직 1.0은 1991년 5월 발표되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있어서의 끌어다 놓기 방법은 앨런 쿠퍼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폼 제작기에서 온 것이며, 쿠퍼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트라이포드''라고 불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3.0용 프로그래밍 가능 폼 제작 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쿠퍼의 개발팀과 계약한 후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을 ''루비''라고 명명하였다. (루비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관계 없다.) 트라이포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주얼 베이직을 만들기 위해 루비와 베이직 언어를 합치기로 결정했다. 루비 인터페이스 개발기는 비주얼 베이직의 "시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소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오메가"용으로 설계된 "EB"(임베디드 베이직 엔진)와 합쳐졌다. 루비는 또한 훗날 비주얼 베이직 확장(VBX)이라고 명명될 추가적인 컨트롤들을 포함하기 위한 DLL 로드 기능을 지원하였다. 버전 5.0에서 Win16 코드와의 호환성을 버리고 전반적인 기능을 강화했다. 버전 6.0에서는 인터넷 관련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기존 버전과 다르게, 닷넷의 일부분으로 동작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강화되었다. 또한 기존 버전과의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기존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닷넷 코드로 옮겨 주는 마법사가 있다. 그러나 네이티브 비주얼 베이직은 버전 6.0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완전히 포기하여 사라진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11년 기준으로, 프로그래밍 입문 언어로서 시스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변수, 메모리 등)이 없이도 프로그래밍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액셀 등 오피스에서 사용되는 VBA의 문법이 비주얼 베이직 6.0 버전과 호환됨에 따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문용으로도 또 실무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 개발 및 발전 과정 === * '선더(Thunder)'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1991년 5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컴덱스에서 윈도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매되었다. * 1992년 3월,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스 기반 베이직 컴파일러인 퀵베이직과 베이직 전문 개발 체계(BASIC Professional Development System)의 차기 버전으로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적인 특성 자체는 윈도우용 비주얼 베이직과 전혀 호환되지 않았다.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은 문자 기반 윈도(Character Oriented Windows)를 사용했으며, 확장 아스키문자를 통해 GUI를 구현해 내었다. * 1992년 11월, 비주얼 베이직 2.0이 발매되었다. 프로그래밍 환경이 더욱 쉽게 개선되었으며 속도 또한 향상되었다. 특히, 폼이 인스턴스적인 개체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본적인 클래스 모듈의 개념은 후에 비주얼 베이직 4.0에서 적용된다. * 1993년 7월, 비주얼 베이직 3.0이 발매되었다. 이 때는 스탠다드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구분되어 발매되었다. 이 비주얼 베이직 3.0은 제트(또는 액세스)1.x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제트 데이터베이스 엔진 1.1을 포함하고 있었다. * 1995년 8월, 비주얼 베이직 4.0이 발매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은 32비트와 16비트 윈도 프로그램 둘 다 개발할 수 있는 첫 번째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이었다. 또한 GUI가 없는 클래스를 비주얼 베이직에서 개발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 제품들간의 비호환성은 설치와 운영상의 문제를 낳았다. 이전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은 VBX 컨트롤을 써 왔었지만 비주얼 베이직 4.0은 OLE 컨트롤(확장자가 .OCX인 파일)을 썼다. 이 OLE 컨트롤은 훗날 ActiveX 컨트롤이라고 이름지어진다. * 1997년 2월 발매된 비주얼 베이직 5.0은 32비트 버전으로만 발매되었다. 16비트 프로그램의 개발을 계속 했던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 4.0의 소스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5.0으로 옮길 수 있었으며, 비주얼 베이직 5.0 프로그램이 비주얼 베이직 4.0으로 옮겨 가기도 쉬웠다. 비주얼 베이직 5.0은 또한 사용자 정의 컨트롤을 만들 수 있는 기능, 또한 원시 코드로 윈도용 실행 파일을 컴파일 할 수 있는 기능, 대량의 계산에서의 속도 향상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Active X 컨트롤의 개발을 위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무료 버전 또한 배포되었는데, 이 버전은 일종의 시험판으로, 일반적인 .exe 프로젝트가 IDE에서는 실행되었지만 컴파일되지는 않았다. * 1998년 6월, 많은 영역에서 개선을 이룬 비주얼 베이직 6.0이 발매되었다. 특히 비주얼 베이직 6.0은 웹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6.0은 2008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 안함" 단계에 해당 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처럼 비주얼 베이직 6.0의 개발 환경은 더 이상 지원되지 않기는 하지만, 실행에 필요한 라이브러리는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서버 2008, 그리고 윈도우 7에 계속 지원되고 있다. * 2005년 3월 31일,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 6.0의 주요 지원이 종료되었다. 확장 지원은 2008년 3월 종료되었다. 이에 대하여, 비주얼 베이직 유저 커뮤니티는 우려를 표현하고 제품의 계속적인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흐름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2005년)에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인 마이크로소프트 앤티스파이웨어는 비주얼 베이직 6.0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대체품인 윈도우 디펜더는 C++ 코드로 재작성되어 개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스크립트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자체는 베이직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다음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에서 파생한 것이다: *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VBA)는 많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응용 프로그램들(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및 솔리드웍스, 오토캐드, 워드퍼펙트 오피스, 아크GIS, 그리고 ACCPAC와 같은 서드 파티 제품들에 포함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간에 약간의 불일치는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전체적으로 비주얼 베이직 6.0과 같은 언어이며, 같은 런타임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 *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의 기본 언어이다.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스크립팅과 클라이언트측 웹 페이지 스크립팅에도 사용된다. 비주얼 베이직과 문법적으로 닮아 있지만, 이 언어는 비주얼 베이직 런타임 라이브러리와 대립되는 vbscript.dll을 통해 실행된다는 점에서 두 언어는 구분 된다. ASP와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컴파일된 웹 페이지용 닷넷 프레임워크를 사용하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 닷넷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비주얼 베이직 6.0의 후속작으로 설계된 제품이며, 마이크로소프트의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의 일부분이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닷넷 프레임워크를 통해 실행되며, 실행 파일을 컴파일한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비주얼 베이직 6.0과 하위 호환성이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NET Upgrade Assessment Tool를 이용하여 변환시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 스타 베이직은 선 마이크로시스템즈가 개발한 스타 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있는 인터프리터 언어이며, 비주얼 베이직과 호환성이 있다. *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GNU/리눅스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감바스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 *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리눅스, 매킨토시, 윈도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K베이직으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 MS는 무료 지원과 중요 업데이트 제공을 끝으로 2005년 3월 말 VB6에 대한 표준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서비스 모두 앞으로 3년 동안은 유료 서비스로 남아있게 된다. MS는 2000년 VB.NET을 내놓았으며 그 후 VB6 이하 버전을 사용하는 개발자들은 끊임없이 감소해왔다. 비주얼 베이직을 등지고 떠난 많은 개발자들은 VB.NET으로 옮겨가지 않고, MS의 언어가 아닌 자바로 옮겨갔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다. 2005년 현재, 북미 전체 개발자 중 비주얼 베이직 닷넷 개발자가 34%인데 비해 비주얼 베이직 개발자들은 45%다. 기존 VB6 응용 프로그램을 VB 닷넷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2008년 VB6 SP6에 대한 일부 취약한 보안 문제와 관련된 패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추후 공개할 윈도우 8부터 비주얼 베이직 및 기반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다음은 이 언어의 예제 코드이다. 창이 호출되면 "Hello, World!" 메시지 상자를 표시한다: Private Sub Form_Load() ' Hello, World라는 내용의 메시지 상자를 띄웁니다. MsgBox ("Hello, World!") End Sub 아래 코드는 Count 변수가 1초에 1씩 올라가도록 한다.(작동을 위해서는 타이머 컨트롤이 필요하다) Option Explicit Dim Count As Integer Private Sub Form_Load() Count = 0 Timer1.Interval = 1000 ' 밀리초 단위 End Sub Private Sub Timer1_Timer() Count = Count + 1 lblCount.Caption = Count End Sub * 비주얼 베이직 닷넷 * 프로그래밍 언어의 비교 * FreeBASIC – a programming language rooting from QBasic. * Gambas - Open source competitor to Visual Basic * IIf – a function in several editions of Visual Basic roughly equivalent to the ?: ternary operator of C and related languages. *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익스프레스 - a free scaled down version of Visual Basic .NET for independent developers. * 창 (컴퓨팅) * Power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 * Pure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 * REALbasic – Competitor to Visual Basic * DarkBASIC – harness DirectX from BASIC applications * VB 6.0 at MSDN * VB 6.0 at MSDN UK * Migrating from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2008 (MSDN UK) 분류: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베이직 분류:1991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베이직 인터프리터 분류:베이직 컴파일러 분류: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 분류:객체 기반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그래밍 언어
디버그
[ "Introduction", "용어의 기원", "도구", "안티 디버깅", "같이 보기", "각주" ]
[ "\n\n'''디버깅'''() 또는 '''디버그'''()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단계 중에 발생하는 시스템의 논리적인 오류나 비정상적 연산(버그)을 찾아내고 수정하는 작업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디버깅을 하는 방법으로 체크를 통한 테스트, 기계를 사용하는 테스트,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테스트하는 법이 있다.\n", "버그(bug)와 디버깅(debugging)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그레이스 호퍼가 기원이다. 그러나 \"기술적 오류\"라는 문맥에서의 \"버그\"는 적어도 1878년과 토머스 에디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프트웨어 버그 문서 참고)\n", "\n디버거()는 디버그를 돕는 도구이다. 디버거는 주로 원하는 코드에 중단점을 지정하여 프로그램 실행을 정지하고,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살펴보며, 실행을 재개하거나, 코드를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등의 동작을 한다. 고급 디버거들은 메모리 충돌 감지, 메모리 누수 감지, 다중 스레드 관리 등의 기능도 지원한다.\n", "안티 디버깅(Anti-Debugging)이란 디버깅을 방해하고 분석을 방해하는 기술이다. \n\n디버깅을 당한다면 해당 디버거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거나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방해한다. 안티 디버깅 기술에는 수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를 우회하는 기술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n", "\n* 표명\n* 충돌 (컴퓨팅)\n* 디버거\n* 오류 정정\n* 컴퓨터 프로그래밍\n* 소프트웨어 테스트\n\n", "\n\n\n\n\n " ]
'''디버깅'''() 또는 '''디버그'''()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단계 중에 발생하는 시스템의 논리적인 오류나 비정상적 연산(버그)을 찾아내고 수정하는 작업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디버깅을 하는 방법으로 체크를 통한 테스트, 기계를 사용하는 테스트,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테스트하는 법이 있다. 버그(bug)와 디버깅(debugging)이라는 용어는 1940년대 그레이스 호퍼가 기원이다. 그러나 "기술적 오류"라는 문맥에서의 "버그"는 적어도 1878년과 토머스 에디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프트웨어 버그 문서 참고) 디버거()는 디버그를 돕는 도구이다. 디버거는 주로 원하는 코드에 중단점을 지정하여 프로그램 실행을 정지하고,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살펴보며, 실행을 재개하거나, 코드를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등의 동작을 한다. 고급 디버거들은 메모리 충돌 감지, 메모리 누수 감지, 다중 스레드 관리 등의 기능도 지원한다. 안티 디버깅(Anti-Debugging)이란 디버깅을 방해하고 분석을 방해하는 기술이다. 디버깅을 당한다면 해당 디버거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거나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방해한다. 안티 디버깅 기술에는 수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를 우회하는 기술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 표명 * 충돌 (컴퓨팅) * 디버거 * 오류 정정 * 컴퓨터 프로그래밍 * 소프트웨어 테스트
춘천시
[ "Introduction", "역사", "지리", "행정 구역", "인구", "정치", "행정", "경제", "문화·관광", "교통", "스포츠", "교육 기관", "방송 및 언론", "국방", "출신 인물", "자매 도시", "각주", "외부 링크" ]
[ "\n\n\n\n춘천시 전경\n파일:Panoramachuncheon.jpg|섬네일|오른쪽|300px|춘천시의 파노라마. 주위에 아파트 등이 우뚝 솟은 것으로 나와 있다.\n\n'''춘천시'''(春川市)는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서부에 있는 시이자 강원특별자치도청 소재지이다. 태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영서 지방의 거점 도시이다. 경춘선 철도의 시·종점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교차한다.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태백산맥 정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봉의산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충적지에 도심을 이룬다.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 등 호수가 많아 하류의 홍수 조절과 관광지 및 내륙수로 역할을 한다. 시청은 옥천동에 있고, 행정 구역은 1읍 9면 15동이다.\n", "\n\n춘천 지역은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로서 후일 고구려, 신라에 차례로 정복되었으며, 637년(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라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춘주(春州)라 칭하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안양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5번째 유수부로 춘천유수부(留守府)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n\n* 1895년 6월 23일 : 춘천부 춘천군\n* 1896년 8월 4일 : 강원도 춘천군\n* 1914년 4월 1일 : 면·리를 통폐합하였다.\n:12면 - 부내면, 신북면, 사북면, 서하면, 신남면, 남산외일작면, 남산외이작면, 동산외일작면, 동산외이작면, 서상면, 사내면, 북산외면\n* 1917년 : 부내면을 춘천면, 동내면으로 분면하고, 남산외일작면은 남면으로, 남산외이작면은 남산면으로, 동산외일작면은 동면으로, 동산외이작면은 동산면으로, 북산외면을 북산면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13면)\n* 1931년 4월 1일 : 춘천면을 춘천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2면)\n* 1934년 : 서상면, 서하면을 서면으로, 남산면, 남면을 남면으로 합면하고, 남면 의암리를 신동면에 편입하였다. (1읍 10면)\n* 1939년 10월 1일 : 신북면 일부 등을 춘천읍에 편입하고, 신남면과 동내면을 신동면으로 합면하였다. (1읍 9면)\n* 1945년 9월 2일 :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군역(郡域)의 대부분이 미군정 관할이 되었고, 38선 이북인 사내면 전부과 북산면·사북면의 일부는 소련군정 관할 아래 들어갔다. (1읍 9면 → 1읍 8면)\n** 11월 : 소련군정이 38선 이북의 사내면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다.\n* 1946년 6월 1일 : 춘천읍을 춘천부로 승격하였다. 춘천군은 춘성군(春城郡)으로 개칭하였다. (8면)\n* 1949년 8월 15일 : 춘천부를 춘천시로 개칭하였다.\n\n* 1950년 6월 22일 : 춘천지구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7연대는 6월 22일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하며 동시에 전 장병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 때문에 북한군 2만4천 명은 6월 25일 새벽 춘천을 기습공격했지만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국군 6사단은 3일간 적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확보했으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인민군은 27일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춘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n* 1953년 7월 27일 : 한국 전쟁의 결과, 춘천군의 전 지역을 수복하였다. (9면)\n* 1954년 11월 17일 : 수복지구에 대한 행정권이 회복되었고, 사내면을 화천군으로 이관하였다. (8면)\n* 1964년 2월 1일 :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설치하였다.\n* 1967년 12월 5일 : 남면 발산출장소를 설치하였다.\n* 1973년 7월 1일 : 신북면 신동리와 신동면 삼천리, 칠전리, 송암리, 서면 현암리 일부와 금산리 일부가 춘천시로 편입, 동산면 북방리가 홍천군 북방면으로, 풍천리가 홍천군 화촌면으로 편입되었다.\n* 1989년 4월 1일 :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동내면으로, 남면 발산출장소를 남면으로 각각 승격 분리하고 기존 남면은 남산면으로 개칭하였다. (10면)\n* 1992년 2월 1일 : 춘성군의 명칭을 춘천군(春川郡)으로 환원하였다.\n* 1995년 1월 1일 : 춘천군 일원과 춘천시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춘천시가 설치되었다.\n* 1995년 3월 2일 : 신북면을 신북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9면)\n* 1998년 10월 12일 : 5천미만의 동사무소를 통폐합했다. 이에 따라 중앙동, 소낙동, 소양동이 소양동으로, 근화동, 호반동이 근화동으로, 약사동, 죽림동이 약사명동으로, 온의동, 삼천동, 칠송동이 강남동으로, 사우동, 우두동, 사농동, 신동이 신사우동으로 통합되었으며, 동조례에 의거 서면 덕두원출장소, 사북면 용산출장소, 북산면 조교출장소가 폐지되었다.(1읍 9면 15행정동)\n* 1999년 : 춘천시 조례 제338호로 신동면 정족리 일부와 온의동 일부를 칠전동에 편입하였다.\n* 2016년: 본래 춘천시청을 철거하고 옛 춘천여자고등학교 부지를 2018년 4월까지 임시청사로 활용했다.\n* 2018년 5월 14일: 본래 춘천시청 자리에 춘천시청 신청사를 개청했다.\n", "춘천시는 강원특별자치도의 서북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인제군, 양구군, 서쪽으로 경기도 가평군, 북쪽으로 화천군, 남쪽으로 홍천군과 접한다. 춘천시가 포함된 춘천 분지는 전형적인 차별 침식 분지로, 시가는 호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水鄕) 도시를 이루며, '''호반의 도시'''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n\n=== 기후 ===\n춘천시의 기후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a)이다.\n\n", "\n춘천시의 행정 구역은 '''15동 1읍 9면'''이다. 면적은 1,116.35 km2이고, 이 중 시내 동 면적은 52.66 km2이다. 인구는 2017년 3월 31일 기준으로 116,273세대, 282,43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139,427명, 여성 144,092명이다.\n\n\n\n\n\n\n\n\n읍면동 \n\n 한자 \n\n 면적 \n\n 세대 \n\n 인구\n\n\n\n'''신북읍''' \n\n 新北邑 \n\n 57.23 \n\n 3,495 \n\n 8,121\n\n\n\n'''동면''' \n\n 東面 \n\n 134.2 \n\n 7,251 \n\n 19,435\n\n\n\n'''동산면''' \n\n 東山面 \n\n 80.81 \n\n 733 \n\n 1,504\n\n\n\n'''신동면''' \n\n 新東面 \n\n 48.19 \n\n 1,060 \n\n 2,542\n\n\n\n'''동내면''' \n\n 東內面 \n\n 36.62 \n\n 1,7000 \n\n 16,704\n\n\n\n'''남면''' \n\n 南面 \n\n 73.2 \n\n 629 \n\n 1,132\n\n\n\n'''남산면''' \n\n 南山面 \n\n 124.11 \n\n 1,924 \n\n 3,774\n\n\n\n'''서면''' \n\n 西面 \n\n 141.64 \n\n 1,975 \n\n 4,033\n\n\n\n'''사북면''' \n\n 史北面 \n\n 152.57 \n\n 1,394 \n\n 2,635\n\n\n\n'''북산면''' \n\n 北山面 \n\n 214.98 \n\n 588 \n\n 960\n\n\n\n'''소양동''' \n\n 昭陽洞 \n\n 1.26 \n\n 4,765 \n\n 11,042\n\n\n\n'''교동''' \n\n 校洞 \n\n 0.5 \n\n 2,227 \n\n 3,903\n\n\n\n'''조운동''' \n\n 朝雲洞 \n\n 0.32 \n\n 1,734 \n\n 3,312\n\n\n\n'''약사명동''' \n\n 藥司明洞 \n\n 0.52 \n\n 1,752 \n\n 3,668\n\n\n\n'''근화동''' \n\n 槿花洞 \n\n 9.59 \n\n 3,395 \n\n 7,410\n\n\n\n'''후평1동''' \n\n 後坪一洞 \n\n 1.86 \n\n 6,013 \n\n 12,862\n\n\n\n'''후평2동''' \n\n 後坪二洞 \n\n 0.67 \n\n 5,246 \n\n 13,187\n\n\n\n'''후평3동''' \n\n 後坪三洞 \n\n 1.21 \n\n 7,735 \n\n 18,956\n\n\n\n'''효자1동''' \n\n 孝子一洞 \n\n 0.65 \n\n 2,153 \n\n 5,222\n\n\n\n'''효자2동''' \n\n 孝子二洞 \n\n 1.16 \n\n 6,783 \n\n 12,183\n\n\n\n'''효자3동''' \n\n 孝子三洞 \n\n 0.85 \n\n 2,676 \n\n 5,070\n\n\n\n'''석사동''' \n\n 碩士洞 \n\n 4.08 \n\n 15,231 \n\n 39,045\n\n\n\n'''퇴계동''' \n\n 退溪洞 \n\n 4.13 \n\n 16,970 \n\n 44,653\n\n\n\n'''강남동''' \n\n 江南洞 \n\n 14.65 \n\n 7,238 \n\n 18,042\n\n\n\n'''신사우동''' \n\n 新史牛洞 \n\n 11.62 \n\n 7,724 \n\n 20,098\n\n\n\n'''합계''' \n\n '''春川市''' \n\n 1,163.35 \n\n 116,273 \n\n 282,439\n\n\n\n 700px\n\n\n\n=== 극점 ===\n* '''최동단 : '''강원 춘천시 북산면 대곡리 산 144-30\n* '''최서단 : '''강원 춘천시 남면 관천리\n* '''최남단 : '''강원 춘천시 남면 한덕리 산 130\n* '''최북단 : '''강원 춘천시 사북면 오탄리 산 61-32\n\n=== 춘천권 ===\n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춘천시, 홍천군, 화천군, 철원군, 양구군 등을 '''춘천권'''으로 규정하고 있다.\n", "춘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n\n\n\n\n\n\n연도\n\n총인구\n\n \n\n\n\n1965년\n\n191,576명\n\n\n\n\n\n1970년\n\n209,821명\n\n\n\n\n\n1975년\n\n204,246명\n\n\n\n\n\n1980년\n\n210,985명\n\n\n\n\n\n1985년\n\n213,198명\n\n\n\n\n\n1990년\n\n217,869명\n\n\n\n\n\n1995년\n\n234,528명\n\n\n\n\n\n2000년\n\n252,547명\n\n\n\n\n\n2005년\n\n260,887명\n\n\n\n\n\n2010년\n\n276,232명\n\n\n\n\n\n2015년\n\n281,596명\n\n\n\n\n\n2017년\n\n283,519명\n\n\n\n}", "=== 국회의원 ===\n\n* 제21대 국회의원은 허영(갑)과 한기호(을)(철원, 화천, 양구 포함)이다.\n\n=== 대통령 선거 ===\n춘천시·군(춘성군)의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은 여타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41,774표를 얻었고 박정희가 28,984표를 얻었다. 다만 춘성군 지역에서는 박정희에 투표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성향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 후보가 약 2천여표 차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다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48,607표를 얻고 김대중이 38,802표를 얻는 등 강원도의 일반적인 성향과 유사해지는 모습을 보였다.\n\n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1987년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65,431표를 얻었고 김영삼이 34,751표를 얻었으며 김대중이 12,220표를 얻어 전국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비등했던 과는 달리 노태우 후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46,580표를 얻었고 김대중이 18,716표를 얻었으며 정주영이 44,675표를 얻어 전국 개표 결과와는 달리 김영삼과 정주영이 거의 유사한 득표율을 보였다.\n\n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33,598표를 얻었고 이회창이 57,576표를 얻었으며 이인제가 38,011표를 얻어 이인제가 오히려 당선되었던 김대중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 64,221표를 얻었고 노무현 54,187표를 얻었으며 권영길이 6,523표를 얻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66,113표를 얻었고 정동영이 22,632표를 얻었으며 문국현이 9,591표를 얻었다.\n\n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가 93,414표를 얻었으며 민주통합당 문재인은 69,365표를 획득하였다.\n", "=== 춘천시장 ===\n\n\n* 현재 춘천 시장은 민선 7대로 당선된 제36대 이재수 시장이다.\n\n=== 춘천시의회 ===\n현재 시의원 선거구는 총 8개 선거구로 되어 있으며 한 선거구당 1~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되어있다. 2019년 기준으로 춘천시의회는 제10대 시의회이다. 1991년 초대 춘천시 · 춘성군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통합 시의회가 출범하였고 제2대 의회가 개원하였다.\n\n\n\n\n\n선거구\n\n지역\n\n\n\n가선거구 (2명)\n\n강남동, 약사명동, 효자1동\n\n\n\n나선거구 (2명)\n\n남면, 남산면, 동내면, 동산면, 신동면\n\n\n\n다선거구 (3명)\n\n석사동, 후평3동\n\n\n\n라선거구 (2명)\n\n동면, 후평1동\n\n\n\n마선거구 (2명)\n\n교동, 조운동, 후평2동, 효자3동\n\n\n\n바선거구 (2명)\n\n북산면, 사북면, 서면, 신북읍\n\n\n\n사선거구 (2명)\n\n근화동, 신사우동, 소양동\n\n\n\n아선거구 (3명)\n\n효자2동, 퇴계동\n\n\n\n비례대표 (3명)\n\n춘천시 전지역\n\n\n\n\n", "=== 농업 ===\n경지 면적 7,015ha 중 논 2,222ha, 밭 793ha이며, 농가 가구 5,878, 농가 인구 15,272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다.\n\n=== 공업 ===\n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군사구역 등 각종 규제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2008년에 거두리 농공단지, 2013년 수동 농공단지가 준공하였다.\n\n=== 광업 ===\n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n\n=== 상업 ===\n중앙시장·풍물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중 약사명동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며 최근 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약사천 복원사업으로 인해 약사동에 위치하였던 풍물시장이 온의동 경춘선 하부 공간으로 이전하였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하며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사농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퇴계동에 수산물 유통센터가 있어 신선한 농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n\n==== 백화점 ====\n* M백화점 (조양동)\n\n==== 아울렛 ====\n* 모다아울렛 춘천점 (온의동)\n\n==== 대형마트 ====\n* 이마트 춘천점 (온의동)\n* 롯데마트 춘천점 (온의동)\n* 롯데마트 석사점 (석사동)\n* 홈플러스 춘천점 (퇴계동)\n* ENTA2022 (석사동)\n", "소양2교소양2교\n소양강댐\n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n\n=== 영화관 ===\n* CGV 춘천\n* 롯데시네마 춘천\n* 메가박스 남춘천\n* 메가박스 석사점\n\n=== 공연장 ===\n* 강원대학교 백령아트센터\n* 봄내극장\n* 상상마당 춘천\n* 춘천문화예술회관\n* 춘천인형극장\n* 축제극장 몸짓\n* 한림대학교 일송아트홀\n\n=== 관광지 ===\n춘천은 의암호·춘천호·소양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0만여 명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n\n\n\n\n==== 유원지/휴양지 ====\n* 강원숲체험장\n* 강촌\n* 강촌 레일파크\n* 고슴도치섬\n* 공지천\n* 구곡폭포\n* 김유정문학촌\n* 강원도립화목원\n* 레고랜드 코리아: 중도에 있음.\n* 제이드가든 수목원\n* 집다리골 자연휴양림\n* 용화산 자연휴양림\n* 의암 류인석 유적지\n* 청평사\n* 추곡약수\n* 춘천숲 자연휴양림\n* 꿈자람 물놀이장\n* 어린이 글램핑장\n\n==== 섬/호수 ====\n* 남이섬\n* 춘천댐\n* 춘천호\n* 소양강댐\n* 소양호\n* 의암댐\n* 의암호\n* 의암호 스카이워크\n* 소양강 스카이워크\n\n==== 체험시설 ====\n* 대추나무골마을\n* 문배마을\n* 물레길 카누체험\n* 별관측소\n* 옥광산\n* 원평팜스테이\n* 춘천 섬배마을\n* 춘천 솔바우마을\n* 춘천 막국수 박물관\n\n\n==== 박물관/미술관 ====\n* 강원경찰박물관\n* 강원대학교중앙박물관\n* 강원대학교 미술관\n* 강원도산림박물관\n* 강원드라마갤러리\n* 국립춘천박물관\n* 권진규 미술관\n*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n* 모형항공기박물관\n* 애니메이션박물관\n* 이상원 미술관\n* 춘천미술관\n* 한림대학교박물관\n\n\n==== 기타 ====\n* 구봉산 전망대\n* 명동\n* 상상마당 춘천\n* 소양강처녀상\n* 엘리시안 강촌\n* 춘천향교\n* 춘천인형극장\n* 물레길\n* 봄내길\n* 자전거길\n\n\n==== 조성 중인 관광지 ====\n* 애견체험박물관 : 남산면에 조성 중으로 2017년 개장 예정\n* 영어 테마파크 : 서면에 조성 예정으로 2017년 개장할 예정\n* 헬로키티 아일랜드 : 삼천동에 건설 중으로 2018년 개장 예정\n* 숲체험 교육장 : 신북읍 삼한골에 어린이 글램핑장, 작은 천문대, 에코 어드벤처, 서바이벌장 등 다양한 체험시설을 조성할 예정으로 2018년 준공 예정\n* 삼악산 로프웨이 : 삼천동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삼악산과 연결되는 관광 삭도시설로 2019년 상반기 준공 예정\n\n\n\n\n\n=== 문화 및 향토 축제 ===\n* 김유정문학제\n* 춘천마임축제\n* 춘천아트페스티벌\n* 춘천古음악축제\n* 춘천인형극제\n* 춘천국제연극제\n* 춘천국제애니타운페스티벌\n* 월드디제이페스티벌\n* 춘천 닭갈비·막국수 축제\n* 소양강문화제\n* 의암제\n\n=== 레져스포츠 축제 ===\n* 춘천전국인라인마라톤대회 (매년 4월)\n* 함기용세계제패기념춘천호반마라톤대회 (매년 4월)\n* 코리아오픈 춘천국제태권도대회 (격년 6월)\n* 전국MTB강촌챌린지대회 (매년 9월)\n* 조선일보춘천마라톤대회 (매년 10월)\n* 춘천호반마라톤축제 (매년 10월)\n* 국제레저대회\n\n\n", "과거,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노선인 경춘선이 있어 수도권에 접근하는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으며,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개량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수도권 전철 노선으로 개편되면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2012년 2월 25일에는 ITX-청춘이 경춘선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춘천에서 출발하여 대구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까지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고, 2009년, 서울특별시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양양군으로 이어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타 지역과의 도로 연결망도 잘 갖추어진 편이다. 2016년 7월 8일 서울∼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사업이 최종 확정되어 기존 경춘선 복선전철이 연장되어 속초까지 이어질 예정이다.\n\n=== 철도 ===\n\n\n\n철도\n\n\n\n \n\n (가평군) ← '''굴봉산역''' - '''백양리역''' - '''강촌역''' - '''김유정역''' - '''남춘천역''' - '''춘천역'''\n\n\n\n 경춘선 (ITX-청춘)\n\n (가평군) ← '''강촌역''' - '''남춘천역''' - '''춘천역'''\n(단, 강촌역은 선택정차)\n\n\n\n=== 고속도로 ===\n\n\n\n고속도로\n\n\n\n 중앙고속도로\n\n '''춘천 나들목''' ↔ '''춘천 분기점''' ↔ 홍천 나들목\n\n\n\n 서울양양고속도로\n\n 설악 나들목 ↔ '''강촌 나들목''' ↔ '''남춘천 나들목''' ↔ '''동산 요금소''' ↔ '''조양 나들목''' ↔ '''춘천 분기점''' ↔ 동홍천 나들목\n\n\n\n\n\n=== 일반도로 ===\n\n\n\n일반 도로\n\n\n\n \n\n 공지로, 금강로, 소양로, 영서로\n\n \n\n 경춘로, 순환대로, 춘양로\n\n \n\n 사내천로, 가락재로\n\n\n\n \n\n 서상로, 김유정로\n\n \n\n 충효로, 소주고개로, 강촌로, 지내고탄로\n\n \n\n 춘화로\n\n\n\n=== 고속·시외버스 ===\n\n\n\n버스 터미널\n\n\n\n 25px 춘천고속버스터미널\n\n 고속 버스 운행 (온의동)\n\n 25px 춘천시외버스터미널\n\n 시외 버스 운행 (온의동)\n\n\n\n=== 시내버스 ===\n\n\n=== 마을버스 ===\n*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와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를 잇는 조교마을버스가 2013년 4월 29일 개통하였다. 4륜구동인 쌍용 코란도 투리스모 1대로 운영한다.\n", "* 강원 FC : 1부리그인 K리그1 소속으로 강릉종합운동장, 원주종합운동장, 속초종합운동장과 함께 춘천종합운동장을 경기장으로 사용한다.\n강원 FC는 2016년 12월 성남 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2017년부터는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후 스플릿 라운드부터 다시 송암레포츠타운을 홈구장으로 사용중이다.\n* 한화 이글스 : 1986년에 창단해 2015년부터 춘천 의암야구장을 제3경기장으로 사용한다.\n* 하이원 아이스하키단 : 프로 아이스하키팀으로 아시아리그에 참가하며 춘천 의암실내빙상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n* 춘천 FC : 4부리그 격인 K3 리그에 속한 축구단으로 홈 구장은 춘천송암레포츠타운 내에 위치한 송암주경기장이다.\n\n==== 체육 시설 ====\n* 강원대학교 백령스포츠센터\n* 춘천봄내체육관\n* 춘천호반체육관\n* 한림대학교 한림스포츠센터\n* 춘천송암레포츠타운\n", "\n\n\n\n\n 강원대학교 함인섭 광장\n\n 한림대학교 신관\n\n\n\n\n\n\n\n\n\n\n 종합대학\n\n 국공립대학교\n\n 강원대학교\n\n 춘천교육대학교\n\n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원지역대학\n\n\n\n 사립대학교\n\n 한림대학교\n\n\n\n\n\n\n\n 전문대학\n\n 사립전문대학\n\n 송곡대학교\n\n 한림성심대학교\n\n\n\n\n\n 폴리텍대학\n\n 한국폴리텍3대학\n\n\n\n\n\n\n\n 사이버대학\n\n 서울사이버대학교 강원 제1캠퍼스\n\n\n\n\n\n\n\n\n\n\n\n\n\n\n\n\n\n\n 고등학교\n\n\n\n 일반계\n\n 강원고등학교\n\n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n\n 봉의고등학교\n\n 성수고등학교\n\n\n\n 성수여자고등학교\n\n 유봉여자고등학교\n\n 춘천고등학교\n\n 춘천여자고등학교\n\n\n\n 대안\n\n 전인고등학교\n\n\n\n 특성화\n\n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n\n 강원애니고등학교\n\n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n\n 춘천한샘고등학교\n\n\n\n 특수목적\n\n 강원체육고등학교\n\n 춘천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n\n 춘천여자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n\n\n\n\n\n\n\n=== 중학교 ===\n\n\n\n\n* 가정중학교\n* 강서중학교\n* 강원중학교\n* 강원체육중학교\n* 광판중학교\n\n* 남춘천여자중학교\n* 남춘천중학교\n* 대룡중학교\n* 동산중학교\n* 봄내중학교\n\n* 봉의중학교\n* 소양중학교\n* 신포중학교\n* 우석중학교\n* 유봉여자중학교\n\n* 창촌중학교\n* 춘성중학교\n* 춘천중학교\n* 후평중학교\n\n\n\n=== 초등학교 ===\n\n\n\n\n* 가산초등학교\n* 광판초등학교\n* 교동초등학교\n* 근화초등학교\n* 금병초등학교\n\n* 금산초등학교\n* 남부초등학교\n* 남산초등학교\n** 서천분교\n* 남춘천초등학교\n\n* 당림초등학교\n* 동내초등학교\n* 동부초등학교\n* 동춘천초등학교\n* 만천초등학교\n\n* 봄내초등학교\n* 봉의초등학교\n* 부안초등학교\n* 상천초등학교\n* 서상초등학교\n\n* 석사초등학교\n* 성림초등학교\n* 성원초등학교\n* 소양초등학교\n* 송화초등학교\n\n* 신남초등학교\n* 신동초등학교\n* 오동초등학교\n* 우석초등학교\n* 조양초등학교\n\n* 중앙초등학교\n* 지촌초등학교\n** 지암분교\n* 천전초등학교\n* 추곡초등학교\n\n* 춘천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n* 춘천삼육초등학교\n* 춘천초등학교\n* 호반초등학교\n* 효제초등학교\n\n* 후평초등학교\n\n\n\n=== 특수학교 ===\n\n\n\n\n* 강원명진학교\n\n* 춘천계성학교\n\n* 춘천동원학교\n\n\n", "* KBS춘천방송총국\n* 춘천문화방송\n* G1방송 (강원민방)\n* 강원일보\n* 강원도민일보\n* LG헬로비전 강원방송\n* CBS 강원방송\n* 춘천불교방송\n", "대한민국 육군 2군단 본부 및 그 예하 부대가 위치한다.\n", "\n", "\n\n=== 자매결연 도시 ===\n\n\n\n\n\n도시 이름\n\n국가\n\n체결 연도\n\n\n\n25px 야마구치현 25px 호후시\n\n\n\n1991년 10월 29일\n\n\n\n25px 기후현 25px 가카미가하라시\n\n2003년 10월 31일\n\n\n\n25px 서울특별시 25px 동대문구\n\n\n\n2003년 11월 28일\n\n\n\n25px 경기도 25px 안산시\n\n2011년 10월 27일\n\n\n\n25px 서울특별시 25px 강남구\n\n2019년 12월 10일\n\n\n\n25px 아디스아바바 시\n\n\n\n2004년 5월 2일\n\n\n\n25px 일리노이주 25px 시카고\n\n\n\n2014년 3월 20일\n\n\n\n럼동성 달랏시\n\n\n\n2016년 10월 18일\n\n\n\n\n\n\n\n=== 우호 도시 ===\n\n\n\n\n\n 도시 이름\n\n 국가\n\n 체결 연도\n\n\n\n저장성 항저우시\n\n\n\n1994년 9월 1일\n\n\n\n랴오닝성 선양시\n\n1998년 11월 14일\n\n\n\n랴오닝성 다롄시\n\n2001년 3월 28일\n\n\n\n장쑤성 창저우 시\n\n2009년 10월 29일\n\n\n\n허난성 난양 시\n\n2012년 9월 15일\n\n\n\n\n\n", "\n", "* \n* 춘천시청 (공식)\n* 춘천관광포털 사이트\n* 춘천-홍천축 광역 버스정보시스템\n* 춘천생활정보-춘천사랑\n* 춘천관광포털\n* 춘천 가볼만한 곳 추천\n\n\n\n\n\n\n\n\n\n \n분류:강원특별자치도의 도시\n분류:1949년 설치\n분류:1995년 폐지\n분류:1995년 설치\n분류:대한민국의 시도청 소재지" ]
춘천시 전경 파일:Panoramachuncheon.jpg|섬네일|오른쪽|300px|춘천시의 파노라마. 주위에 아파트 등이 우뚝 솟은 것으로 나와 있다. '''춘천시'''(春川市)는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서부에 있는 시이자 강원특별자치도청 소재지이다. 태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영서 지방의 거점 도시이다. 경춘선 철도의 시·종점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교차한다.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태백산맥 정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봉의산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충적지에 도심을 이룬다. 소양호, 춘천호, 의암호 등 호수가 많아 하류의 홍수 조절과 관광지 및 내륙수로 역할을 한다. 시청은 옥천동에 있고, 행정 구역은 1읍 9면 15동이다. 춘천 지역은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로서 후일 고구려, 신라에 차례로 정복되었으며, 637년(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라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춘주(春州)라 칭하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안양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5번째 유수부로 춘천유수부(留守府)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 * 1895년 6월 23일 : 춘천부 춘천군 * 1896년 8월 4일 : 강원도 춘천군 * 1914년 4월 1일 : 면·리를 통폐합하였다. :12면 - 부내면, 신북면, 사북면, 서하면, 신남면, 남산외일작면, 남산외이작면, 동산외일작면, 동산외이작면, 서상면, 사내면, 북산외면 * 1917년 : 부내면을 춘천면, 동내면으로 분면하고, 남산외일작면은 남면으로, 남산외이작면은 남산면으로, 동산외일작면은 동면으로, 동산외이작면은 동산면으로, 북산외면을 북산면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13면) * 1931년 4월 1일 : 춘천면을 춘천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2면) * 1934년 : 서상면, 서하면을 서면으로, 남산면, 남면을 남면으로 합면하고, 남면 의암리를 신동면에 편입하였다. (1읍 10면) * 1939년 10월 1일 : 신북면 일부 등을 춘천읍에 편입하고, 신남면과 동내면을 신동면으로 합면하였다. (1읍 9면) * 1945년 9월 2일 :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군역(郡域)의 대부분이 미군정 관할이 되었고, 38선 이북인 사내면 전부과 북산면·사북면의 일부는 소련군정 관할 아래 들어갔다. (1읍 9면 → 1읍 8면) ** 11월 : 소련군정이 38선 이북의 사내면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다. * 1946년 6월 1일 : 춘천읍을 춘천부로 승격하였다. 춘천군은 춘성군(春城郡)으로 개칭하였다. (8면) * 1949년 8월 15일 : 춘천부를 춘천시로 개칭하였다. * 1950년 6월 22일 : 춘천지구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 7연대는 6월 22일부터 경계태세를 강화하며 동시에 전 장병의 외출을 금지시켰다. 그 때문에 북한군 2만4천 명은 6월 25일 새벽 춘천을 기습공격했지만 40%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국군 6사단은 3일간 적군과 대치하며 춘천을 확보했으나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충주로 철수하면서 인민군은 27일 저녁 10시가 되어서야 춘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 1953년 7월 27일 : 한국 전쟁의 결과, 춘천군의 전 지역을 수복하였다. (9면) * 1954년 11월 17일 : 수복지구에 대한 행정권이 회복되었고, 사내면을 화천군으로 이관하였다. (8면) * 1964년 2월 1일 :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설치하였다. * 1967년 12월 5일 : 남면 발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 1973년 7월 1일 : 신북면 신동리와 신동면 삼천리, 칠전리, 송암리, 서면 현암리 일부와 금산리 일부가 춘천시로 편입, 동산면 북방리가 홍천군 북방면으로, 풍천리가 홍천군 화촌면으로 편입되었다. * 1989년 4월 1일 :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동내면으로, 남면 발산출장소를 남면으로 각각 승격 분리하고 기존 남면은 남산면으로 개칭하였다. (10면) * 1992년 2월 1일 : 춘성군의 명칭을 춘천군(春川郡)으로 환원하였다. * 1995년 1월 1일 : 춘천군 일원과 춘천시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춘천시가 설치되었다. * 1995년 3월 2일 : 신북면을 신북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9면) * 1998년 10월 12일 : 5천미만의 동사무소를 통폐합했다. 이에 따라 중앙동, 소낙동, 소양동이 소양동으로, 근화동, 호반동이 근화동으로, 약사동, 죽림동이 약사명동으로, 온의동, 삼천동, 칠송동이 강남동으로, 사우동, 우두동, 사농동, 신동이 신사우동으로 통합되었으며, 동조례에 의거 서면 덕두원출장소, 사북면 용산출장소, 북산면 조교출장소가 폐지되었다.(1읍 9면 15행정동) * 1999년 : 춘천시 조례 제338호로 신동면 정족리 일부와 온의동 일부를 칠전동에 편입하였다. * 2016년: 본래 춘천시청을 철거하고 옛 춘천여자고등학교 부지를 2018년 4월까지 임시청사로 활용했다. * 2018년 5월 14일: 본래 춘천시청 자리에 춘천시청 신청사를 개청했다. 춘천시는 강원특별자치도의 서북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인제군, 양구군, 서쪽으로 경기도 가평군, 북쪽으로 화천군, 남쪽으로 홍천군과 접한다. 춘천시가 포함된 춘천 분지는 전형적인 차별 침식 분지로, 시가는 호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水鄕) 도시를 이루며, '''호반의 도시'''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 === 기후 === 춘천시의 기후는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a)이다. 춘천시의 행정 구역은 '''15동 1읍 9면'''이다. 면적은 1,116.35 km2이고, 이 중 시내 동 면적은 52.66 km2이다. 인구는 2017년 3월 31일 기준으로 116,273세대, 282,43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139,427명, 여성 144,092명이다. 읍면동 한자 면적 세대 인구 '''신북읍''' 新北邑 57.23 3,495 8,121 '''동면''' 東面 134.2 7,251 19,435 '''동산면''' 東山面 80.81 733 1,504 '''신동면''' 新東面 48.19 1,060 2,542 '''동내면''' 東內面 36.62 1,7000 16,704 '''남면''' 南面 73.2 629 1,132 '''남산면''' 南山面 124.11 1,924 3,774 '''서면''' 西面 141.64 1,975 4,033 '''사북면''' 史北面 152.57 1,394 2,635 '''북산면''' 北山面 214.98 588 960 '''소양동''' 昭陽洞 1.26 4,765 11,042 '''교동''' 校洞 0.5 2,227 3,903 '''조운동''' 朝雲洞 0.32 1,734 3,312 '''약사명동''' 藥司明洞 0.52 1,752 3,668 '''근화동''' 槿花洞 9.59 3,395 7,410 '''후평1동''' 後坪一洞 1.86 6,013 12,862 '''후평2동''' 後坪二洞 0.67 5,246 13,187 '''후평3동''' 後坪三洞 1.21 7,735 18,956 '''효자1동''' 孝子一洞 0.65 2,153 5,222 '''효자2동''' 孝子二洞 1.16 6,783 12,183 '''효자3동''' 孝子三洞 0.85 2,676 5,070 '''석사동''' 碩士洞 4.08 15,231 39,045 '''퇴계동''' 退溪洞 4.13 16,970 44,653 '''강남동''' 江南洞 14.65 7,238 18,042 '''신사우동''' 新史牛洞 11.62 7,724 20,098 '''합계''' '''春川市''' 1,163.35 116,273 282,439 700px === 극점 === * '''최동단 : '''강원 춘천시 북산면 대곡리 산 144-30 * '''최서단 : '''강원 춘천시 남면 관천리 * '''최남단 : '''강원 춘천시 남면 한덕리 산 130 * '''최북단 : '''강원 춘천시 사북면 오탄리 산 61-32 === 춘천권 ===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춘천시, 홍천군, 화천군, 철원군, 양구군 등을 '''춘천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춘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연도 총인구   1965년 191,576명 1970년 209,821명 1975년 204,246명 1980년 210,985명 1985년 213,198명 1990년 217,869명 1995년 234,528명 2000년 252,547명 2005년 260,887명 2010년 276,232명 2015년 281,596명 2017년 283,519명 }=== 국회의원 === * 제21대 국회의원은 허영(갑)과 한기호(을)(철원, 화천, 양구 포함)이다. === 대통령 선거 === 춘천시·군(춘성군)의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은 여타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41,774표를 얻었고 박정희가 28,984표를 얻었다. 다만 춘성군 지역에서는 박정희에 투표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성향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 후보가 약 2천여표 차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다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48,607표를 얻고 김대중이 38,802표를 얻는 등 강원도의 일반적인 성향과 유사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1987년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65,431표를 얻었고 김영삼이 34,751표를 얻었으며 김대중이 12,220표를 얻어 전국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비등했던 과는 달리 노태우 후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46,580표를 얻었고 김대중이 18,716표를 얻었으며 정주영이 44,675표를 얻어 전국 개표 결과와는 달리 김영삼과 정주영이 거의 유사한 득표율을 보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33,598표를 얻었고 이회창이 57,576표를 얻었으며 이인제가 38,011표를 얻어 이인제가 오히려 당선되었던 김대중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 64,221표를 얻었고 노무현 54,187표를 얻었으며 권영길이 6,523표를 얻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66,113표를 얻었고 정동영이 22,632표를 얻었으며 문국현이 9,591표를 얻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가 93,414표를 얻었으며 민주통합당 문재인은 69,365표를 획득하였다. === 춘천시장 === * 현재 춘천 시장은 민선 7대로 당선된 제36대 이재수 시장이다. === 춘천시의회 === 현재 시의원 선거구는 총 8개 선거구로 되어 있으며 한 선거구당 1~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되어있다. 2019년 기준으로 춘천시의회는 제10대 시의회이다. 1991년 초대 춘천시 · 춘성군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통합 시의회가 출범하였고 제2대 의회가 개원하였다. 선거구 지역 가선거구 (2명) 강남동, 약사명동, 효자1동 나선거구 (2명) 남면, 남산면, 동내면, 동산면, 신동면 다선거구 (3명) 석사동, 후평3동 라선거구 (2명) 동면, 후평1동 마선거구 (2명) 교동, 조운동, 후평2동, 효자3동 바선거구 (2명) 북산면, 사북면, 서면, 신북읍 사선거구 (2명) 근화동, 신사우동, 소양동 아선거구 (3명) 효자2동, 퇴계동 비례대표 (3명) 춘천시 전지역 === 농업 === 경지 면적 7,015ha 중 논 2,222ha, 밭 793ha이며, 농가 가구 5,878, 농가 인구 15,272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다. === 공업 === 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군사구역 등 각종 규제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2008년에 거두리 농공단지, 2013년 수동 농공단지가 준공하였다. === 광업 === 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상업 === 중앙시장·풍물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중 약사명동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며 최근 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약사천 복원사업으로 인해 약사동에 위치하였던 풍물시장이 온의동 경춘선 하부 공간으로 이전하였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하며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사농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퇴계동에 수산물 유통센터가 있어 신선한 농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 ==== 백화점 ==== * M백화점 (조양동) ==== 아울렛 ==== * 모다아울렛 춘천점 (온의동) ==== 대형마트 ==== * 이마트 춘천점 (온의동) * 롯데마트 춘천점 (온의동) * 롯데마트 석사점 (석사동) * 홈플러스 춘천점 (퇴계동) * ENTA2022 (석사동) 소양2교소양2교 소양강댐 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 === 영화관 === * CGV 춘천 * 롯데시네마 춘천 * 메가박스 남춘천 * 메가박스 석사점 === 공연장 === * 강원대학교 백령아트센터 * 봄내극장 * 상상마당 춘천 * 춘천문화예술회관 * 춘천인형극장 * 축제극장 몸짓 * 한림대학교 일송아트홀 === 관광지 === 춘천은 의암호·춘천호·소양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0만여 명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 유원지/휴양지 ==== * 강원숲체험장 * 강촌 * 강촌 레일파크 * 고슴도치섬 * 공지천 * 구곡폭포 * 김유정문학촌 * 강원도립화목원 * 레고랜드 코리아: 중도에 있음. * 제이드가든 수목원 * 집다리골 자연휴양림 * 용화산 자연휴양림 * 의암 류인석 유적지 * 청평사 * 추곡약수 * 춘천숲 자연휴양림 * 꿈자람 물놀이장 * 어린이 글램핑장 ==== 섬/호수 ==== * 남이섬 * 춘천댐 * 춘천호 * 소양강댐 * 소양호 * 의암댐 * 의암호 * 의암호 스카이워크 * 소양강 스카이워크 ==== 체험시설 ==== * 대추나무골마을 * 문배마을 * 물레길 카누체험 * 별관측소 * 옥광산 * 원평팜스테이 * 춘천 섬배마을 * 춘천 솔바우마을 * 춘천 막국수 박물관 ==== 박물관/미술관 ==== * 강원경찰박물관 * 강원대학교중앙박물관 * 강원대학교 미술관 * 강원도산림박물관 * 강원드라마갤러리 * 국립춘천박물관 * 권진규 미술관 *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 * 모형항공기박물관 * 애니메이션박물관 * 이상원 미술관 * 춘천미술관 * 한림대학교박물관 ==== 기타 ==== * 구봉산 전망대 * 명동 * 상상마당 춘천 * 소양강처녀상 * 엘리시안 강촌 * 춘천향교 * 춘천인형극장 * 물레길 * 봄내길 * 자전거길 ==== 조성 중인 관광지 ==== * 애견체험박물관 : 남산면에 조성 중으로 2017년 개장 예정 * 영어 테마파크 : 서면에 조성 예정으로 2017년 개장할 예정 * 헬로키티 아일랜드 : 삼천동에 건설 중으로 2018년 개장 예정 * 숲체험 교육장 : 신북읍 삼한골에 어린이 글램핑장, 작은 천문대, 에코 어드벤처, 서바이벌장 등 다양한 체험시설을 조성할 예정으로 2018년 준공 예정 * 삼악산 로프웨이 : 삼천동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삼악산과 연결되는 관광 삭도시설로 2019년 상반기 준공 예정 === 문화 및 향토 축제 === * 김유정문학제 * 춘천마임축제 * 춘천아트페스티벌 * 춘천古음악축제 * 춘천인형극제 * 춘천국제연극제 * 춘천국제애니타운페스티벌 * 월드디제이페스티벌 * 춘천 닭갈비·막국수 축제 * 소양강문화제 * 의암제 === 레져스포츠 축제 === * 춘천전국인라인마라톤대회 (매년 4월) * 함기용세계제패기념춘천호반마라톤대회 (매년 4월) * 코리아오픈 춘천국제태권도대회 (격년 6월) * 전국MTB강촌챌린지대회 (매년 9월) * 조선일보춘천마라톤대회 (매년 10월) * 춘천호반마라톤축제 (매년 10월) * 국제레저대회 과거,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노선인 경춘선이 있어 수도권에 접근하는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으며,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개량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수도권 전철 노선으로 개편되면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2012년 2월 25일에는 ITX-청춘이 경춘선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춘천에서 출발하여 대구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까지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고, 2009년, 서울특별시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양양군으로 이어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타 지역과의 도로 연결망도 잘 갖추어진 편이다. 2016년 7월 8일 서울∼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사업이 최종 확정되어 기존 경춘선 복선전철이 연장되어 속초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 철도 === 철도 (가평군) ← '''굴봉산역''' - '''백양리역''' - '''강촌역''' - '''김유정역''' - '''남춘천역''' - '''춘천역''' 경춘선 (ITX-청춘) (가평군) ← '''강촌역''' - '''남춘천역''' - '''춘천역''' (단, 강촌역은 선택정차) === 고속도로 === 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춘천 나들목''' ↔ '''춘천 분기점''' ↔ 홍천 나들목 서울양양고속도로 설악 나들목 ↔ '''강촌 나들목''' ↔ '''남춘천 나들목''' ↔ '''동산 요금소''' ↔ '''조양 나들목''' ↔ '''춘천 분기점''' ↔ 동홍천 나들목 === 일반도로 === 일반 도로 공지로, 금강로, 소양로, 영서로 경춘로, 순환대로, 춘양로 사내천로, 가락재로 서상로, 김유정로 충효로, 소주고개로, 강촌로, 지내고탄로 춘화로 === 고속·시외버스 === 버스 터미널 25px 춘천고속버스터미널 고속 버스 운행 (온의동) 25px 춘천시외버스터미널 시외 버스 운행 (온의동) === 시내버스 === === 마을버스 === *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와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를 잇는 조교마을버스가 2013년 4월 29일 개통하였다. 4륜구동인 쌍용 코란도 투리스모 1대로 운영한다. * 강원 FC : 1부리그인 K리그1 소속으로 강릉종합운동장, 원주종합운동장, 속초종합운동장과 함께 춘천종합운동장을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강원 FC는 2016년 12월 성남 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2017년부터는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후 스플릿 라운드부터 다시 송암레포츠타운을 홈구장으로 사용중이다. * 한화 이글스 : 1986년에 창단해 2015년부터 춘천 의암야구장을 제3경기장으로 사용한다. * 하이원 아이스하키단 : 프로 아이스하키팀으로 아시아리그에 참가하며 춘천 의암실내빙상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 춘천 FC : 4부리그 격인 K3 리그에 속한 축구단으로 홈 구장은 춘천송암레포츠타운 내에 위치한 송암주경기장이다. ==== 체육 시설 ==== * 강원대학교 백령스포츠센터 * 춘천봄내체육관 * 춘천호반체육관 * 한림대학교 한림스포츠센터 * 춘천송암레포츠타운 강원대학교 함인섭 광장 한림대학교 신관 종합대학 국공립대학교 강원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원지역대학 사립대학교 한림대학교 전문대학 사립전문대학 송곡대학교 한림성심대학교 폴리텍대학 한국폴리텍3대학 사이버대학 서울사이버대학교 강원 제1캠퍼스 고등학교 일반계 강원고등학교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봉의고등학교 성수고등학교 성수여자고등학교 유봉여자고등학교 춘천고등학교 춘천여자고등학교 대안 전인고등학교 특성화 강원생명과학고등학교 강원애니고등학교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춘천한샘고등학교 특수목적 강원체육고등학교 춘천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춘천여자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 중학교 === * 가정중학교 * 강서중학교 * 강원중학교 * 강원체육중학교 * 광판중학교 * 남춘천여자중학교 * 남춘천중학교 * 대룡중학교 * 동산중학교 * 봄내중학교 * 봉의중학교 * 소양중학교 * 신포중학교 * 우석중학교 * 유봉여자중학교 * 창촌중학교 * 춘성중학교 * 춘천중학교 * 후평중학교 === 초등학교 === * 가산초등학교 * 광판초등학교 * 교동초등학교 * 근화초등학교 * 금병초등학교 * 금산초등학교 * 남부초등학교 * 남산초등학교 ** 서천분교 * 남춘천초등학교 * 당림초등학교 * 동내초등학교 * 동부초등학교 * 동춘천초등학교 * 만천초등학교 * 봄내초등학교 * 봉의초등학교 * 부안초등학교 * 상천초등학교 * 서상초등학교 * 석사초등학교 * 성림초등학교 * 성원초등학교 * 소양초등학교 * 송화초등학교 * 신남초등학교 * 신동초등학교 * 오동초등학교 * 우석초등학교 * 조양초등학교 * 중앙초등학교 * 지촌초등학교 ** 지암분교 * 천전초등학교 * 추곡초등학교 * 춘천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 춘천삼육초등학교 * 춘천초등학교 * 호반초등학교 * 효제초등학교 * 후평초등학교 === 특수학교 === * 강원명진학교 * 춘천계성학교 * 춘천동원학교 * KBS춘천방송총국 * 춘천문화방송 * G1방송 (강원민방) * 강원일보 * 강원도민일보 * LG헬로비전 강원방송 * CBS 강원방송 * 춘천불교방송 대한민국 육군 2군단 본부 및 그 예하 부대가 위치한다. === 자매결연 도시 === 도시 이름 국가 체결 연도 25px 야마구치현 25px 호후시 1991년 10월 29일 25px 기후현 25px 가카미가하라시 2003년 10월 31일 25px 서울특별시 25px 동대문구 2003년 11월 28일 25px 경기도 25px 안산시 2011년 10월 27일 25px 서울특별시 25px 강남구 2019년 12월 10일 25px 아디스아바바 시 2004년 5월 2일 25px 일리노이주 25px 시카고 2014년 3월 20일 럼동성 달랏시 2016년 10월 18일 === 우호 도시 === 도시 이름 국가 체결 연도 저장성 항저우시 1994년 9월 1일 랴오닝성 선양시 1998년 11월 14일 랴오닝성 다롄시 2001년 3월 28일 장쑤성 창저우 시 2009년 10월 29일 허난성 난양 시 2012년 9월 15일 * * 춘천시청 (공식) * 춘천관광포털 사이트 * 춘천-홍천축 광역 버스정보시스템 * 춘천생활정보-춘천사랑 * 춘천관광포털 * 춘천 가볼만한 곳 추천 분류:강원특별자치도의 도시 분류:1949년 설치 분류:1995년 폐지 분류:1995년 설치 분류:대한민국의 시도청 소재지
협업 소프트웨어
[ "Introduction", "협업의 수준", "구분", "적용",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n\n'''협업 소프트웨어''', 혹은 '''그룹웨어'''(Groupware)는 여러 사용자가 각기 별개의 작업 환경에서 통합된 하나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이다. 로터스 소프트웨어의 로터스 노츠 (Lotus Notes)가 그 효시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일정을 기록함으로 인해 일정 기록이 매우 유용해진 것처럼 말이다.\n\n그룹웨어의 확장으로 '''협업 미디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웹사이트 내의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협업 미디어의 예로는 위키와 슬래시닷(Slashdot)을 들 수 있다.\n", "그룹웨어는 협업의 수준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나뉘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커뮤니케이션 도구, 회의 도구, 그리고 협업 관리도구이다.\n\n* '''전자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는 메시지나 파일, 데이터, 혹은 문서를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n** 전자 메일\n** 팩스 보내기\n** 음성 메일\n** 웹\n* '''전자적인 회의 도구'''는 좀 더 상호 대화적인 방식으로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n** 데이터 회의 - 네트워크로 연결된 PC 상에서의 “화이트 보드”를 통한 회의\n** 음성 회의 - 전화를 활용한 상호 대화\n** 화상 회의 및 음성 회의\n** 대화방\n** 전자 회의 시스템 (EMS)\n* '''협업 관리 도구'''들은 그룹 내의 활동을 관리하고 증진시킨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n** 전자 캘린더 (일정관리 소프트웨어)\n**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n** 업무흐름관리 시스템\n** 지식 관리\n\n협업 소프트웨어들은 웹 기반일 수도 있고, 데스크톱 PC 상의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n\n또한 최근에는 모바일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모바일에서의 업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있다.\n", "방법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n* 웹 기반 협업 도구\n* 소프트웨어 협업 도구\n\n영역 별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n* 지식 관리 도구\n* 지식 생성 도구\n* 정보 공유 도구\n", "협업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유도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 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고용자들이 협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여하는 데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그 대가는 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인 형태로 주어진다.\n\n많은 경우 협동작업은 회사의 사내문화와 잘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오히려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쟁적인 것에서 협동적인 것으로 사내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조직의 모든 단계의 변화가 요구된다\n", "\n\n=== 관련 용어 ===\n* 컴퓨터 보조 공동 작업\n\n=== 그룹웨어 유형의 응용 프로그램 ===\n* 저작물 관리 시스템\n* 고객 관계 관리 소프트웨어\n* 문서 관리 시스템\n* 기업 콘텐츠 관리\n* 인트라넷\n\n=== 기타 관련 용어 ===\n* 일반인 기반 공동 생산방식\n* 전자 비즈니스\n* 경영 정보 시스템\n* 경영\n* 미디어위키\n* 재택근무\n* 위키백과\n\n=== 협업 소프트웨어 목록들 ===\n* 협업 소프트웨어 목록\n* 소셜 북마크 웹사이트 목록\n* 인트라넷 포털\n* 기업 포털\n\n", "\n\n\n \n \n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n분류:컴퓨터 매개 통신\n분류:소셜 소프트웨어\n분류:협업 프로젝트" ]
'''협업 소프트웨어''', 혹은 '''그룹웨어'''(Groupware)는 여러 사용자가 각기 별개의 작업 환경에서 통합된 하나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이다. 로터스 소프트웨어의 로터스 노츠 (Lotus Notes)가 그 효시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일정을 기록함으로 인해 일정 기록이 매우 유용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룹웨어의 확장으로 '''협업 미디어'''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웹사이트 내의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협업 미디어의 예로는 위키와 슬래시닷(Slashdot)을 들 수 있다. 그룹웨어는 협업의 수준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나뉘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커뮤니케이션 도구, 회의 도구, 그리고 협업 관리도구이다. * '''전자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는 메시지나 파일, 데이터, 혹은 문서를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전자 메일 ** 팩스 보내기 ** 음성 메일 ** 웹 * '''전자적인 회의 도구'''는 좀 더 상호 대화적인 방식으로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 데이터 회의 - 네트워크로 연결된 PC 상에서의 “화이트 보드”를 통한 회의 ** 음성 회의 - 전화를 활용한 상호 대화 ** 화상 회의 및 음성 회의 ** 대화방 ** 전자 회의 시스템 (EMS) * '''협업 관리 도구'''들은 그룹 내의 활동을 관리하고 증진시킨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전자 캘린더 (일정관리 소프트웨어) **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 ** 업무흐름관리 시스템 ** 지식 관리 협업 소프트웨어들은 웹 기반일 수도 있고, 데스크톱 PC 상의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모바일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모바일에서의 업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 웹 기반 협업 도구 * 소프트웨어 협업 도구 영역 별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 지식 관리 도구 * 지식 생성 도구 * 정보 공유 도구 협업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유도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 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고용자들이 협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여하는 데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그 대가는 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인 형태로 주어진다. 많은 경우 협동작업은 회사의 사내문화와 잘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오히려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쟁적인 것에서 협동적인 것으로 사내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조직의 모든 단계의 변화가 요구된다 === 관련 용어 === * 컴퓨터 보조 공동 작업 === 그룹웨어 유형의 응용 프로그램 === * 저작물 관리 시스템 * 고객 관계 관리 소프트웨어 * 문서 관리 시스템 * 기업 콘텐츠 관리 * 인트라넷 === 기타 관련 용어 === * 일반인 기반 공동 생산방식 * 전자 비즈니스 * 경영 정보 시스템 * 경영 * 미디어위키 * 재택근무 * 위키백과 === 협업 소프트웨어 목록들 === * 협업 소프트웨어 목록 * 소셜 북마크 웹사이트 목록 * 인트라넷 포털 * 기업 포털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분류:컴퓨터 매개 통신 분류:소셜 소프트웨어 분류:협업 프로젝트
인류학
[ "Introduction", "관점", "분류", "역사", "연구방법", "사회 기여", "각주", "참고 자료", "같이 보기" ]
[ "\n\n\n\n'''인류학'''(人類學, )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으로서 체계화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학은 보다 전문적인 여러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다. 하위 학문으로는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형질인류학의 연구분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분야와 현대 인류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은 선사시대와 같은 오래된 인류의 유적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문화 등을 규명하는 것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 있다. 문화인류학은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n\n이밖에도 민족학(ethnology), 민속학(folklore) 등을 인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하면 사회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류학과 연관된 사회나 문화를 중심으로한 연구분야는 많은 현대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핵심적 기초과학 학문이다.\n", "인류학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비교문화론·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그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며 특정한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반대되는 용어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다. 비교문화론(또는 비교문화론적 접근)이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를 다른 문화와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라는 추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방법은 없다. 오직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 뿌리나 원리(the root and the nature)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접근이란 근대의 다른 학문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한하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기계적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자들은 복잡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문화인류학은 총체론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치·종교·역사·경제·법·제도·예술 등등이 기계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총체\"로서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이며 경제가 역사라는 안목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전체와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n", "보통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언어인류학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들에 관한 자연 그대로의 설명과 해석이 인류학의 특징이지만 그 주제나 연구방법이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역사와는 다르다. 이는 인류학이 민족·제도·종교 또는 관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자료를 통한 설명보다 인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생산물에 대해 가능한 한 직접 관찰을 중요시 한다. 또한 이런 모든 연구 결과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기록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적·문화적인 발전과 관련된 복합적인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정신의 다양성과 집단적인 차이를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접근방법은 생리학 또는 심리학과도 다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전역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특정 집단과 활동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n\n'''형질인류학'''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진화학적 틀에서 연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 넓게 퍼져 살게 되었는가가 관심분야이며 어떻게 지역적으로 인류가 다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등 종족으로서 인류를 연구한다.\n\n'''문화인류학'''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족지같은 현장에서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n\n'''고고학'''은 물질적 인간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을 통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다.\n\n'''언어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음성이나 비음성적인 다양한 언어를 시간과 공간, 사회적 언어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련을 연구한다.\n\n=== 역사에 따른 구분 ===\n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n\n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료인류학 등이 있다.\n\n* 1600년대 루소와 로크의 인식론적 접근법\n* 1800년대 진화론의 발상과 인종적 분류법 - 스펜서, 타일러\n* 1900년대 초기 보아스\n** 보아스는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미국 인류학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조사기록을 축적했으며 미대륙 인디언의 문화 보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1920년대에 영국에서는 식민지에 대한 통제가 문제시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연구하는 구조주의와 기능주의 인류학이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에 의해 대두되었다.\n* 영국 구조주의\n* 기능주의\n* 구조기능주의\n* 상징주의\n* 탈근대론\n* 신근대\n", "\n=== 19세기 이전 ===\n현대 인류학은 대륙발견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던 유럽 문화는 다양한 토착문화와 폭넓게 접촉하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이 문화들을 일괄적으로 '야만' 또는 '원시' 문화로 규정했다.\n\n=== 19세기 ===\n19세기 중반에 학문에 대한 종교적인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인간의 기원, 인종 분류, 비교해부학, 언어와 같은 주제가 유행했고,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 출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 개념을 언급함에 따라 인류발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문화 발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당대 유행하던 주제와 비교의 관점, 진화론·우생학 등 학문의 지적 유산에 영향을 받은 인류학은, 친족형태의 진화, 문명의 진화, 종교의 진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의 발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때 (19세기 후반) 주류였던 인류학은 단선적인 역사개념을 토대로, 모든 인간집단은 문화적인 진화의 특정 단계들, 즉 '야만' 또는 '미개' 상태를 거쳐 '문명인'(예를 들면 서구 유럽인)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n\n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와는 다른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일련의 지배원리를 결정한다. 이 지배원리는 생산양식이 변한 후에도 한동안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며, 그결과 지배원리와 생산양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긴다. 이러한 통일된 이론들은 여행가·상인·선교사 들이 수집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 같은 대중적인 저서와 달리 몇 년 안 되어 학문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n\n==== 형질인류학 ====\n문화인류학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성숙한 사회과학 분과로 발전하는 동안 형질인류학은 자연현상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양한 인종의 신체적인 차이를 분류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가운데, 형질인류학자들은 고대인류를 추적하는 데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n\n=== 20세기 ===\n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유럽과 북아메리카 초기 인류학자들이 갖고 있던 강한 문화적인 편견이 점점 사라지고, 사회와 문화의 폭넓은 다양성에 대한 다원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바탕을 둔 이 입장은 모든 문화를 물리적인 환경, 문화적인 접촉,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의 독특한 산물로 파악했다. 이러한 견해에 뒤이어 경험적인 자료, 현지조사, 일정한 문화적·자연적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행한 가장 주요한 본보기가 된 사람은 문화사학파의 시조로 알려진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보아스였다. 1900년 초기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고전적 인류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접근법 (언어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체질인류학)의 기초를 닦았다. 보아스와 베네딕트, 미드, 사피어 등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을 통해 미국 인류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화사학파는 문화적인 자료에 기능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한 문화에 속한 여러 다양한 양식·특징·관습을 조화시켜 표현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파리대학교의 민족학연구소 설립자인 모스는 인간사회를 자기조절 할 뿐 아니라, 문화통합체계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총체적인 체계로 보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시켰다.\n\n모스는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 영국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과 같이 이질적인 접근방법을 꾀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말리노프스키는 계속 엄격한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했으며,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두 학파는 사회사를 사회이론의 토대로 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그 현상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이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폭넓은 현상의 구조적 성격 및 대상을 알아내려 했다.\n\n1930년대에 베네딕트가 행한 미국 남서부 인디언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문화심리학이라는 문화인류학의 파생분야가 생겨났다. 베네딕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천천히 발전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심리적인 성향'을 갖게 하는데, 구성원들은 환경적인 요소에 상관없이 문화를 통해 정해진 방향을 따라 현실을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통사회는 물론,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통합' 또는 가치체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와 인성(人性)의 상호관계는 폭넓은 연구주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n\n==== 형질인류학 ====\n20세기가 시작되면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인종이 분류되었으며, 고등 영장류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개괄이 이루어졌다. 1900년 멘델의 일반유전법칙이 재발견되고, ABO식 혈액형계가 처음 발견되면서 종(種)의 진화적인 변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형질인류학자들은 두개골 화석에서 나타난 증거를 바탕으로 약 50만 년 동안의 인류진화과정을 도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n\n=== 현재 ===\n현대인류학의 관심과 기법은 물리학·생물학·행동과학·사회과학 등 폭넓은 전문분야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 덕분에 고고학적인 발굴물의 상대적인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과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여러 민족의 지리적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유럽 집시들이 원래 인도 태생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기술을 응용해 혈액형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 민족들의 가족관계,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종교적·법적인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신분석이론에 주로 바탕을 둔 심리학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다.\n", "인류학자는 현지조사(fieldwork, 현지연구, 현장연구, 현장조사 등으로 번역됨)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헌연구의 허구성을 통렬히 반박하며 \"발로 뛰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실천적 성격을 형성하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문자사회를 연구하는 경우 1년 이상 현장 연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1년이란 기간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의 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인류학자는 먼저 해당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고 라포르(rapport), 즉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를 몇 개 월을 걸쳐서 먼저 확립하고, 실질적인 조사는 그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n\n참고로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면 무문자사회 또는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그러나 이때 무문자사회라는 것도 반드시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있더라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사회'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자가 있는 사회나 심지어는 예컨대 서구와 같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n\n현지조사는 내실적으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 등이 포함되는데,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민족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n", "모든 학문은 당대의 관념을 반영하며, 특히 인류학처럼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회와 각종 영향관계가 폭넓고도 깊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학은 인종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우월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인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의 특성이며, 국민국가 형성기에 벌어진 타자화의 과정 속에서 다른 학문들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과오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여느 학문과 달리 상대론적 세계관을 재빨리 확립하였고, 이어서 연구대상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즉 진화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문화를 현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각종 논리와 사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에는 지구촌 차원에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등함을 인식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소수민족 연구는 현대 도시 내에서의 타자로 전락한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인류학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앞장서서 각종 의제를 던지고 기존의 거대담론이 갖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n", "\n", "* 인류학 용어집\n* History of Anthropological Theory, McGee and Warms 2004\n* Mapping Transdisciplinarity in Human Sciences\n* Fundamental Theory of Anthropology\n*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 공식 홈페이지)\n", "\n* 분자인류학(:en:Molecular anthropology)\n* 문화인류학\n* 인류학자 목록\n\n\n\n\n\n " ]
'''인류학'''(人類學, )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으로서 체계화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학은 보다 전문적인 여러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다. 하위 학문으로는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형질인류학의 연구분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분야와 현대 인류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은 선사시대와 같은 오래된 인류의 유적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문화 등을 규명하는 것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 있다. 문화인류학은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밖에도 민족학(ethnology), 민속학(folklore) 등을 인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하면 사회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류학과 연관된 사회나 문화를 중심으로한 연구분야는 많은 현대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핵심적 기초과학 학문이다. 인류학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비교문화론·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그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며 특정한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반대되는 용어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다. 비교문화론(또는 비교문화론적 접근)이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를 다른 문화와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라는 추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방법은 없다. 오직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 뿌리나 원리(the root and the nature)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접근이란 근대의 다른 학문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한하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기계적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자들은 복잡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문화인류학은 총체론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치·종교·역사·경제·법·제도·예술 등등이 기계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총체"로서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이며 경제가 역사라는 안목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전체와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보통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언어인류학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들에 관한 자연 그대로의 설명과 해석이 인류학의 특징이지만 그 주제나 연구방법이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역사와는 다르다. 이는 인류학이 민족·제도·종교 또는 관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자료를 통한 설명보다 인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생산물에 대해 가능한 한 직접 관찰을 중요시 한다. 또한 이런 모든 연구 결과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기록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적·문화적인 발전과 관련된 복합적인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정신의 다양성과 집단적인 차이를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접근방법은 생리학 또는 심리학과도 다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전역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특정 집단과 활동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 '''형질인류학'''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진화학적 틀에서 연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 넓게 퍼져 살게 되었는가가 관심분야이며 어떻게 지역적으로 인류가 다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등 종족으로서 인류를 연구한다. '''문화인류학'''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족지같은 현장에서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고고학'''은 물질적 인간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을 통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다. '''언어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음성이나 비음성적인 다양한 언어를 시간과 공간, 사회적 언어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련을 연구한다. === 역사에 따른 구분 === 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료인류학 등이 있다. * 1600년대 루소와 로크의 인식론적 접근법 * 1800년대 진화론의 발상과 인종적 분류법 - 스펜서, 타일러 * 1900년대 초기 보아스 ** 보아스는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미국 인류학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조사기록을 축적했으며 미대륙 인디언의 문화 보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1920년대에 영국에서는 식민지에 대한 통제가 문제시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연구하는 구조주의와 기능주의 인류학이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에 의해 대두되었다. * 영국 구조주의 * 기능주의 * 구조기능주의 * 상징주의 * 탈근대론 * 신근대 === 19세기 이전 === 현대 인류학은 대륙발견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던 유럽 문화는 다양한 토착문화와 폭넓게 접촉하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이 문화들을 일괄적으로 '야만' 또는 '원시' 문화로 규정했다. === 19세기 === 19세기 중반에 학문에 대한 종교적인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인간의 기원, 인종 분류, 비교해부학, 언어와 같은 주제가 유행했고,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 출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 개념을 언급함에 따라 인류발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문화 발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당대 유행하던 주제와 비교의 관점, 진화론·우생학 등 학문의 지적 유산에 영향을 받은 인류학은, 친족형태의 진화, 문명의 진화, 종교의 진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의 발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때 (19세기 후반) 주류였던 인류학은 단선적인 역사개념을 토대로, 모든 인간집단은 문화적인 진화의 특정 단계들, 즉 '야만' 또는 '미개' 상태를 거쳐 '문명인'(예를 들면 서구 유럽인)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와는 다른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일련의 지배원리를 결정한다. 이 지배원리는 생산양식이 변한 후에도 한동안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며, 그결과 지배원리와 생산양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긴다. 이러한 통일된 이론들은 여행가·상인·선교사 들이 수집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 같은 대중적인 저서와 달리 몇 년 안 되어 학문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 형질인류학 ==== 문화인류학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성숙한 사회과학 분과로 발전하는 동안 형질인류학은 자연현상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양한 인종의 신체적인 차이를 분류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가운데, 형질인류학자들은 고대인류를 추적하는 데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 20세기 ===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유럽과 북아메리카 초기 인류학자들이 갖고 있던 강한 문화적인 편견이 점점 사라지고, 사회와 문화의 폭넓은 다양성에 대한 다원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바탕을 둔 이 입장은 모든 문화를 물리적인 환경, 문화적인 접촉,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의 독특한 산물로 파악했다. 이러한 견해에 뒤이어 경험적인 자료, 현지조사, 일정한 문화적·자연적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행한 가장 주요한 본보기가 된 사람은 문화사학파의 시조로 알려진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보아스였다. 1900년 초기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고전적 인류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접근법 (언어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체질인류학)의 기초를 닦았다. 보아스와 베네딕트, 미드, 사피어 등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을 통해 미국 인류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화사학파는 문화적인 자료에 기능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한 문화에 속한 여러 다양한 양식·특징·관습을 조화시켜 표현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파리대학교의 민족학연구소 설립자인 모스는 인간사회를 자기조절 할 뿐 아니라, 문화통합체계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총체적인 체계로 보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시켰다. 모스는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 영국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과 같이 이질적인 접근방법을 꾀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말리노프스키는 계속 엄격한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했으며,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두 학파는 사회사를 사회이론의 토대로 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그 현상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이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폭넓은 현상의 구조적 성격 및 대상을 알아내려 했다. 1930년대에 베네딕트가 행한 미국 남서부 인디언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문화심리학이라는 문화인류학의 파생분야가 생겨났다. 베네딕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천천히 발전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심리적인 성향'을 갖게 하는데, 구성원들은 환경적인 요소에 상관없이 문화를 통해 정해진 방향을 따라 현실을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통사회는 물론,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통합' 또는 가치체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와 인성(人性)의 상호관계는 폭넓은 연구주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 형질인류학 ====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인종이 분류되었으며, 고등 영장류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개괄이 이루어졌다. 1900년 멘델의 일반유전법칙이 재발견되고, ABO식 혈액형계가 처음 발견되면서 종(種)의 진화적인 변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형질인류학자들은 두개골 화석에서 나타난 증거를 바탕으로 약 50만 년 동안의 인류진화과정을 도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 현재 === 현대인류학의 관심과 기법은 물리학·생물학·행동과학·사회과학 등 폭넓은 전문분야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 덕분에 고고학적인 발굴물의 상대적인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과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여러 민족의 지리적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유럽 집시들이 원래 인도 태생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기술을 응용해 혈액형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 민족들의 가족관계,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종교적·법적인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신분석이론에 주로 바탕을 둔 심리학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다. 인류학자는 현지조사(fieldwork, 현지연구, 현장연구, 현장조사 등으로 번역됨)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헌연구의 허구성을 통렬히 반박하며 "발로 뛰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실천적 성격을 형성하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문자사회를 연구하는 경우 1년 이상 현장 연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1년이란 기간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의 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인류학자는 먼저 해당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고 라포르(rapport), 즉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를 몇 개 월을 걸쳐서 먼저 확립하고, 실질적인 조사는 그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면 무문자사회 또는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그러나 이때 무문자사회라는 것도 반드시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있더라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사회'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자가 있는 사회나 심지어는 예컨대 서구와 같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조사는 내실적으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 등이 포함되는데,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민족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 모든 학문은 당대의 관념을 반영하며, 특히 인류학처럼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회와 각종 영향관계가 폭넓고도 깊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학은 인종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우월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인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의 특성이며, 국민국가 형성기에 벌어진 타자화의 과정 속에서 다른 학문들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과오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여느 학문과 달리 상대론적 세계관을 재빨리 확립하였고, 이어서 연구대상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즉 진화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문화를 현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각종 논리와 사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에는 지구촌 차원에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등함을 인식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소수민족 연구는 현대 도시 내에서의 타자로 전락한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인류학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앞장서서 각종 의제를 던지고 기존의 거대담론이 갖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 인류학 용어집 * History of Anthropological Theory, McGee and Warms 2004 * Mapping Transdisciplinarity in Human Sciences * Fundamental Theory of Anthropology *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 공식 홈페이지) * 분자인류학(:en:Molecular anthropology) * 문화인류학 * 인류학자 목록
워드 커닝햄
[ "Introduction", "같이 보기", "참고 자료 및 외부 링크" ]
[ "\n워드 커닝햄\n'''워드 커닝햄'''(, 1949년 5월 26일 ~ )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위키의 개념을 만든 인물이다. \n\n그는 1995년에 Portland Pattern Repository라는 최초의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전히 운영 중인 이 사이트는 \"사람, 프로젝트, 패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아이디어들의 비공식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패턴 언어에 대한 정보라든지, extreme programming의 방법론 등을 담고 있는 사이트이다. 커닝햄 자신은 위키의 개념을 착안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그 개념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은 하이퍼카드 스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카드를 사용해서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위키의 전신인 '''패턴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n그는 Bo Leuf와 함께 ''The Wiki Way''를 공동으로 집필했다.\n\n워드 커닝햄은 커닝햄&커닝햄 사의 설립자이다. 그는 Wyatt Software 사의 개발 책임자로서 근무했었고, Tektronix Computer Research Laboratory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워드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방법론의 일종인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업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힐사이드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n\n워드 커닝햄은 현재 인디애나주 미시간시티에 거주하고 있다.\n", "* 위키위키웹\n", "\n* Bo Leuf, Ward Cunningham, ''The Wiki Way: Quick collaboration on the Web'', Addison-Wesley Longmann (April, 2001)\n** \n* The Portland Pattern Repository의 위키\n** http://c2.com/cgi/wiki?WelcomeVisitors\n* 워드의 위키 방명록\n** http://www.c2.com/cgi/wiki?WardCunningham\n* 연락처\n** https://web.archive.org/web/20031001092602/http://www.c2.com/profile.html#contact\n\n\n\n\n분류:1949년 출생\n분류:살아있는 사람\n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n분류:위키\n분류:익스트림 프로그래밍\n분류:퍼듀 대학교 동문" ]
워드 커닝햄 '''워드 커닝햄'''(, 1949년 5월 26일 ~ )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위키의 개념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1995년에 Portland Pattern Repository라는 최초의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전히 운영 중인 이 사이트는 "사람, 프로젝트, 패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아이디어들의 비공식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패턴 언어에 대한 정보라든지, extreme programming의 방법론 등을 담고 있는 사이트이다. 커닝햄 자신은 위키의 개념을 착안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그 개념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은 하이퍼카드 스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카드를 사용해서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위키의 전신인 '''패턴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는 Bo Leuf와 함께 ''The Wiki Way''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워드 커닝햄은 커닝햄&커닝햄 사의 설립자이다. 그는 Wyatt Software 사의 개발 책임자로서 근무했었고, Tektronix Computer Research Laboratory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워드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방법론의 일종인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업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힐사이드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현재 인디애나주 미시간시티에 거주하고 있다. * 위키위키웹 * Bo Leuf, Ward Cunningham, ''The Wiki Way: Quick collaboration on the Web'', Addison-Wesley Longmann (April, 2001) ** * The Portland Pattern Repository의 위키 ** http://c2.com/cgi/wiki?WelcomeVisitors * 워드의 위키 방명록 ** http://www.c2.com/cgi/wiki?WardCunningham * 연락처 ** https://web.archive.org/web/20031001092602/http://www.c2.com/profile.html#contact 분류:1949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위키 분류:익스트림 프로그래밍 분류:퍼듀 대학교 동문
자유 저작물
[ "Introduction", "자유 저작물 라이선스",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파일:Definition of Free Cultural Works logo notext.svg|섬네일|자유문화작품 로고\n'''자유 저작물'''()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 복사, 수정 및 재배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제한이 없는 작품이나 창작물, 정보를 말한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개념을 모든 저작물로 확장한 개념이다. 반의어로는 '''비자유 저작물'''로 부른다.\n\n자유 저작물은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은 물론, 저작권이 있지만 위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허락된 저작물도 포함한다.\n", "자유 저작물은 저작물의 내용을 수정한 후에도 역시 같은 제한을 가진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하는 카피레프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정한 버전은 다른 조건으로 (때로는 자유 저작물이 아닌 조건으로) 배포할 수도 있다.\n\n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의 대표적인 예이고, BSD 허가서는 카피레프트가 아닌 라이선스의 예이다.\n\n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배포된 작품의 경우, \"비영리\"나 \"변경금지\" 제한이 없는 경우는 자유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비영리 혹은 변경금지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자유 저작물에 속하지 않는다.\n", "* 퍼블릭 도메인\n* 카피레프트\n* 오픈 소스\n*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n* 크리에이티브 커먼즈\n* 자유 소프트웨어\n* 오픈 콘텐츠\n* 구텐베르크 프로젝트\n", "* \"free cultural work\"의 정의 - 공개 저작물의 정의로 널리 쓰인다.\n* 위 문서를 번역한 \"자유로운 문화적 저작물\"의 정의 \n\n\n\n \n분류:저작권 라이선스" ]
파일:Definition of Free Cultural Works logo notext.svg|섬네일|자유문화작품 로고 '''자유 저작물'''()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 복사, 수정 및 재배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제한이 없는 작품이나 창작물, 정보를 말한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개념을 모든 저작물로 확장한 개념이다. 반의어로는 '''비자유 저작물'''로 부른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은 물론, 저작권이 있지만 위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허락된 저작물도 포함한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물의 내용을 수정한 후에도 역시 같은 제한을 가진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하는 카피레프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정한 버전은 다른 조건으로 (때로는 자유 저작물이 아닌 조건으로) 배포할 수도 있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의 대표적인 예이고, BSD 허가서는 카피레프트가 아닌 라이선스의 예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배포된 작품의 경우, "비영리"나 "변경금지" 제한이 없는 경우는 자유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비영리 혹은 변경금지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자유 저작물에 속하지 않는다. * 퍼블릭 도메인 * 카피레프트 * 오픈 소스 *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 자유 소프트웨어 * 오픈 콘텐츠 *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 "free cultural work"의 정의 - 공개 저작물의 정의로 널리 쓰인다. * 위 문서를 번역한 "자유로운 문화적 저작물"의 정의 분류:저작권 라이선스
쑹메이링
[ "Introduction", "어린 시절", "장제스의 부인", "이후의 생애", "쑹메이링에 관한 인용들", "상훈",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쑹메이링'''(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 여사는 전부 근대 중국의 출현 동안 눈에 띈 세 명의 쑹 자매중에 막내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상하이 출신으로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진 그녀는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중국의 부유한 감리교도인 쑹 자매의 부친 찰스 존스 쑹은 미국에서 수학하였고, 쑹메이링을 조지아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어 그녀는 석사와 함께 1917년 졸업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그녀에게 청혼하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의 첫 부인과 이혼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활동적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신생활 운동을 일으키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에 오르면서 쑹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n\n미국에서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를 유능한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그녀는 넓게 여행을 다녀 중국의 곤경을 알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성원을 유도하였다. 1943년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두번째 여성이었다. 1948년 쑹 여사는 국민당의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러 미국에 갔다. 1949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설립 후, 그녀는 장제스 총통의 부인으로서 중화민국의 정치에서 현저한 역할을 하였다. 25년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고, 2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한번은 남편과 함께, 한번은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혼자였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그녀는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사망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n\n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받았다.\n", "파일:1910 Soong May-ling student in US.jpg|섬네일|100px|왼쪽|미국 유학 시절의 쑹메이링\n본적은 하이난섬 원창으로 상하이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하카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쑹자수는 영어로 된 이름 \"찰스 존스 쑹\"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성경을 출판한 목사였으며 쑨원의 친구이자 재정적 성원자였다. 쑹메이링은 6명의 자식들 중에 셋째로 그녀의 첫째 언니는 쑹아이링, 자신 위의 언니는 쑹칭링이었고, 3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쑹칭링은 후에 쑨원과 결혼하였다.\n\n메이링의 첫째 언니 쑹아이링은 조지아주 메이컨에 있는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수학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쑹메이링은 8세의 나이에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사립 학교인 모타이어 스쿨에 입학하였다. 1913년 그녀는 자신의 언니들의 모교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대학을 시작하였으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자신의 남동생 쑹타에원에게 가까워지기 위하여 웰즐리 칼리지로 옮겼다. 1917년 6월 19일 쑹메이링은 영문학에서 주요 전공과 철학에서 소수 전공과 영예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그녀는 33명의 듀랜트 장학생들 중의 하나로서 인정을 얻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로서 그녀는 후에 미국의 관중들과 자신의 연결에 도움을 준 조지아주 말투와 함께 상당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였다.\n", "파일:Soong May-ling addressing House of Representatives.jpg|섬네일|왼쪽|미국 하원에서 연설하는 쑹메이링\n1920년 쑹메이링은 쑨원과 결혼한 자신의 언니 쑹칭링의 저택에서 당시 쑨원을 섬긴 군사 장교 장제스를 만났다. 그녀보다 11세 연상인 장제스가 결혼하여 2명의 아들을 두고 불교 신자였던 이래 쑹메이링의 모친은 둘 사이에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장제스가 자신의 이혼에 관하여 증명을 보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약속한 후 결국 동의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의 훗날 장모에게 종교는 알약처럼 삼키지 않고 점차 흡수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에 즉시 개종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장제스가 잠시 망명에 있는 동안 그들은 1927년 12월 1일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실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따랐어도 감리교로 세례를 받았다. 부부는 아무 자식을 두지 않았다.\n\n1925년 형부 쑨원이 서거한 후, 장제스는 중국 북부를 통치한 군벌들에 대항하는 데 북벌을 지도하였다. 쑨원의 지도 아래 중국국민당 (KMT)은 새로운 중국공산당과 협력하였다. 하지만 1927년 장제스는 중국공산당에 반대하여 공산당원들을 학살하는 데 국민당에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원들은 도시로부터 시골 지역들로 달아나 국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조직하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중국 본토를 침입하기 위하여 기초로 사용하는 데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을 설립하였다. 1936년 시안 사건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군사 지도자들은 공산당원들에 싸움을 멈추는 데 장제스를 강요하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데 국공합작을 형성하는 운동에서 시안의 외부 화청지에서 그를 납치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그들의 요구들로 동의하는 데 자신의 남편을 납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n\n파일:Chiang Kai Shek and wife with Lieutenant General Stilwell.jpg|섬네일|오른쪽|조지프 스틸웰 중장과 함께\n쑹메이링 여사는 신생활 운동을 일으켜 중국 정치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 그리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이었다. 1945년 그녀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데 상승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상, 그의 전망, 그의 청각이며 특히 그의 가장 충성적인 옹호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의 대의를 촉진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과 동등하게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유산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과 서양 양쪽의 문화에서 정통한 그녀는 중국과 해외 양쪽에서 인기있게 되었다. 그녀의 두드러짐은 자신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돼야 할 기행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이끌었다.\n\n쑹메이링은 중국을 위한 재료와 군사 성원을 위하여 수도 없이 미국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30,000명의 사람들 만큼 큰 관중들을 끌었고, 두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처음에 \"올해의 남성과 아내\"로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그리고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홀로였다. 남편과 부인은 둘다 국민당을 위하여 미국의 대중으로부터 돈과 성원을 모으는 데 자주 노력한 타임 잡지의 상급 편집자이자 공동 창립자 헨리 루스와 함께 좋은 조건들에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2번째 여성이 되었다.\n\n파일:Cairo Conference Participants.jpg|섬네일|왼쪽|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좌로부터 장제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쑹메이링 여사. 쑹 여사는 여기서 남편의 통역으로 활약하였다.\n쑹메이링 여사는 11월 장제스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는 데 카이로 회담에서 남편을 동행하였다. 3명의 정상들은 일본이 침입한 영토들의 통치를 포기하고, 타이완과 만주가 중국으로 반환되고 한국이 완전한 독립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였다. 그녀는 또한 일본에 대항하는 데 중국을 성원하고 있던 스틸웰 중장과 장제스 사이에 의사 소통을 하였다.\n\n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말과 일본의 항복 후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에서 내전으로 돌아왔다. 1948년 쑹메이링 여사는 국민당을 위한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데 미국으로 갔으나 미국은 중국의 정세에 그 비참여 정책을 변경하는 데 거부하였다. 그녀는 1949년 국공내전에서 남편의 정부의 패배까지 미국에 남아있었고 1950년 타이완에서 남편에게 가입하였다. 그녀의 언니 쑹칭링은 공산당과 편에 있으면서 중국 본토에 머물렀다.\n\n장제스와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설립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지속적으로 국제적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중화민국과 그 이익들을 대표하러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장려자, 영국 중국 기금 원조 연합의 명예 의장과 권리 기념 사회의 첫 명예 회원이었다. 장제스가 노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통역\"의 역할을 취하여 권력을 말하였다. 25년의 세월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다.\n", "1975년 자신의 남편의 사후 쑹메이링 여사는 대중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쑹메이링 여사가 어려운 관계를 가지면서 이전의 결혼 생활로부터 태어난 자신의 장남 장징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계승되었다. 1975년 그녀는 타이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자신의 거실에 완전한 군사 예복 차림의 남편의 초상화를 간직한 롱아일랜드 래팅타운에 자신의 가족의 36 에이커 (14.6 헥타르)의 사유지에서 살았다.\n\n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오랜 동맹들 중에 성원을 강화하는 데 1988년 장징궈의 사망에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총통으로서 장징궈의 후임자 리덩후이는 그녀보다 정치에서 더욱 능숙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n\n그녀는 〈시안, 쿠데타〉 (1937), 〈이것이 우리의 중국이다〉 (1940), 〈중국은 다시 상승해야 한다〉 (1942)와 〈확실한 승리〉 (1955)를 포함한 다수의 기사와 몇몇의 책들을 썼다.\n\n1995년 제2차 세계 대전 50 주년의 축제와 함께 연결에서 자신의 명예에 캐피톨 힐에서 열린 축하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드문 공개적 출연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해 타이완으로 자신의 마지막 방문을 하기도 하였다.\n\n2000년 타이완에서 열린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은 그녀가 의미있게 무소속 후보 쑹추위 (그녀와 관련 없음)에 국민당 후보 롄잔을 성원한 것에서 그녀로부터 편지를 제시하였다. 편지의 확실성은 타이완에서 위대한 토론의 주제였다. 쑹추위는 자신이 리덩후이를 성원했을 때 자신의 일찍이 그녀에 대한 가려진 비판을 위하여 앙갚음으로서 쓰여졌을 것 같은 편지의 확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n\n그해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롱아일랜드 사유지를 팔았고,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그레이시 스퀘어 아파트에서 나머지 일생을 보냈으며 자신이 지나가면서 로비를 청소한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에 의하여 둘러싸였다.\n\n2003년 10월 23일 쑹메이링은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맨해튼 아파트 저택에서 평화롭게 사망하였다. 그녀의 시체는 뉴욕주 하츠데일에 있는 펀클리프 묘지에 일시적으로 안치되었고, 타이완 치후 대영묘에 묻힌 자신의 고인된 남편과 함께 결국적인 매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시된 의도는 한번 정치적 상태가 가능하게 만들 때 둘다 중국 본토에 묻히는 것이다.\n", "* \"그녀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 엘리노어 루스벨트\n\n* \"직접적이고, 강력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권력을 사랑하며 홍보와 아첨을 먹는다 ... 마음대로 매력을 켤 수 있고 그것을 안다.\" - 조지프 스틸웰\n\n* \"쑹메이링 여사는 그녀의 인생을 통하여, 그리고 특히 마지막 세기의 정의적인 투쟁 중에 미국과 가까운 친구였다. 미국인들의 세대들은 항상 그녀의 지능과 성격의 힘을 기억하고 존중할 것이다. 미국 국민들을 대표하여 나는 쑹메이링 여사의 가족 일원들과 전 세계의 많은 찬사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 조지 W. 부시\n", "* 1966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n", "\n* 쑹칭링\n* 쑹아이링\n* 장제스\n* 쑨원\n* 중화민국\n* 김구\n", "\n", "* 1943년 미 의회연설\n* 웰슬리 대학의 전기\n* 추도문\n* 타임지: 올해의 남편과 부인 (1937년) \n\n\n\n\n\n\n\n\n\n\n\n\n분류:1897년 출생\n분류:2003년 사망\n분류:대만의 여자 정치인\n분류:쑨원가\n분류:장제스가\n분류:중국의 반공주의자\n분류:중국의 감리교도\n분류:대만의 개신교도\n분류:중국의 저술가\n분류:타임 올해의 인물\n분류:중화민국 총통 배우자\n분류:장제스의 배우자\n분류:중국국민당 당원\n분류:중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n분류:중화민국 대륙 시기 사람\n분류:중국 대륙 본토계 대만인\n분류:하카인\n분류:국공 내전 관련자\n분류:웰즐리 대학교 동문\n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n분류:중국계 미국인\n분류:상하이시 출신\n분류:중국의 백세인\n분류:대만의 백세인\n분류:훈정시대 제1계 입법원 입법위원\n분류:훈정시대 제2계 입법원 입법위원" ]
'''쑹메이링'''(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 여사는 전부 근대 중국의 출현 동안 눈에 띈 세 명의 쑹 자매중에 막내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상하이 출신으로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진 그녀는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중국의 부유한 감리교도인 쑹 자매의 부친 찰스 존스 쑹은 미국에서 수학하였고, 쑹메이링을 조지아 웨슬리언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어 그녀는 석사와 함께 1917년 졸업하였다. 장제스는 1927년 그녀에게 청혼하며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자신의 첫 부인과 이혼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활동적으로 중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신생활 운동을 일으키고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과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에 오르면서 쑹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를 유능한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그녀는 넓게 여행을 다녀 중국의 곤경을 알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성원을 유도하였다. 1943년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두번째 여성이었다. 1948년 쑹 여사는 국민당의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러 미국에 갔다. 1949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의 설립 후, 그녀는 장제스 총통의 부인으로서 중화민국의 정치에서 현저한 역할을 하였다. 25년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고, 2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한번은 남편과 함께, 한번은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혼자였다. 1975년 장제스의 사망 후 그녀는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사망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받았다. 파일:1910 Soong May-ling student in US.jpg|섬네일|100px|왼쪽|미국 유학 시절의 쑹메이링 본적은 하이난섬 원창으로 상하이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하카인 가족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쑹자수는 영어로 된 이름 "찰스 존스 쑹"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이자 성경을 출판한 목사였으며 쑨원의 친구이자 재정적 성원자였다. 쑹메이링은 6명의 자식들 중에 셋째로 그녀의 첫째 언니는 쑹아이링, 자신 위의 언니는 쑹칭링이었고, 3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쑹칭링은 후에 쑨원과 결혼하였다. 메이링의 첫째 언니 쑹아이링은 조지아주 메이컨에 있는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수학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쑹메이링은 8세의 나이에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사립 학교인 모타이어 스쿨에 입학하였다. 1913년 그녀는 자신의 언니들의 모교 웨슬리언 여자 대학교에서 대학을 시작하였으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자신의 남동생 쑹타에원에게 가까워지기 위하여 웰즐리 칼리지로 옮겼다. 1917년 6월 19일 쑹메이링은 영문학에서 주요 전공과 철학에서 소수 전공과 영예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그녀는 33명의 듀랜트 장학생들 중의 하나로서 인정을 얻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로서 그녀는 후에 미국의 관중들과 자신의 연결에 도움을 준 조지아주 말투와 함께 상당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였다. 파일:Soong May-ling addressing House of Representatives.jpg|섬네일|왼쪽|미국 하원에서 연설하는 쑹메이링 1920년 쑹메이링은 쑨원과 결혼한 자신의 언니 쑹칭링의 저택에서 당시 쑨원을 섬긴 군사 장교 장제스를 만났다. 그녀보다 11세 연상인 장제스가 결혼하여 2명의 아들을 두고 불교 신자였던 이래 쑹메이링의 모친은 둘 사이에 결혼을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장제스가 자신의 이혼에 관하여 증명을 보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약속한 후 결국 동의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의 훗날 장모에게 종교는 알약처럼 삼키지 않고 점차 흡수되는 데 필요하였기 때문에 즉시 개종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장제스가 잠시 망명에 있는 동안 그들은 1927년 12월 1일 일본에서 결혼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실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따랐어도 감리교로 세례를 받았다. 부부는 아무 자식을 두지 않았다. 1925년 형부 쑨원이 서거한 후, 장제스는 중국 북부를 통치한 군벌들에 대항하는 데 북벌을 지도하였다. 쑨원의 지도 아래 중국국민당 (KMT)은 새로운 중국공산당과 협력하였다. 하지만 1927년 장제스는 중국공산당에 반대하여 공산당원들을 학살하는 데 국민당에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원들은 도시로부터 시골 지역들로 달아나 국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을 조직하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여 중국 본토를 침입하기 위하여 기초로 사용하는 데 꼭두각시 국가 만주국을 설립하였다. 1936년 시안 사건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군사 지도자들은 공산당원들에 싸움을 멈추는 데 장제스를 강요하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데 국공합작을 형성하는 운동에서 시안의 외부 화청지에서 그를 납치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그들의 요구들로 동의하는 데 자신의 남편을 납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파일:Chiang Kai Shek and wife with Lieutenant General Stilwell.jpg|섬네일|오른쪽|조지프 스틸웰 중장과 함께 쑹메이링 여사는 신생활 운동을 일으켜 중국 정치에서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회원, 그리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중국 항공 정세 위원회의 사무총장이었다. 1945년 그녀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자신의 남편이 대원수와 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데 상승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그의 영어 통역, 비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녀는 그의 명상, 그의 전망, 그의 청각이며 특히 그의 가장 충성적인 옹호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동안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의 대의를 촉진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과 동등하게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유산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과 서양 양쪽의 문화에서 정통한 그녀는 중국과 해외 양쪽에서 인기있게 되었다. 그녀의 두드러짐은 자신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돼야 할 기행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이끌었다. 쑹메이링은 중국을 위한 재료와 군사 성원을 위하여 수도 없이 미국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30,000명의 사람들 만큼 큰 관중들을 끌었고, 두번이나 타임 잡지의 표지에 나왔으며, 처음에 "올해의 남성과 아내"로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그리고 "용의 여성" 타이틀 아래 홀로였다. 남편과 부인은 둘다 국민당을 위하여 미국의 대중으로부터 돈과 성원을 모으는 데 자주 노력한 타임 잡지의 상급 편집자이자 공동 창립자 헨리 루스와 함께 좋은 조건들에 있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데 첫 중국 국적이자 2번째 여성이 되었다. 파일:Cairo Conference Participants.jpg|섬네일|왼쪽|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좌로부터 장제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과 쑹메이링 여사. 쑹 여사는 여기서 남편의 통역으로 활약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11월 장제스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직접 만나는 데 카이로 회담에서 남편을 동행하였다. 3명의 정상들은 일본이 침입한 영토들의 통치를 포기하고, 타이완과 만주가 중국으로 반환되고 한국이 완전한 독립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동의하였다. 그녀는 또한 일본에 대항하는 데 중국을 성원하고 있던 스틸웰 중장과 장제스 사이에 의사 소통을 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말과 일본의 항복 후에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에서 내전으로 돌아왔다. 1948년 쑹메이링 여사는 국민당을 위한 성원을 위하여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데 미국으로 갔으나 미국은 중국의 정세에 그 비참여 정책을 변경하는 데 거부하였다. 그녀는 1949년 국공내전에서 남편의 정부의 패배까지 미국에 남아있었고 1950년 타이완에서 남편에게 가입하였다. 그녀의 언니 쑹칭링은 공산당과 편에 있으면서 중국 본토에 머물렀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를 설립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지속적으로 국제적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중화민국과 그 이익들을 대표하러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장려자, 영국 중국 기금 원조 연합의 명예 의장과 권리 기념 사회의 첫 명예 회원이었다. 장제스가 노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쑹메이링 여사는 "통역"의 역할을 취하여 권력을 말하였다. 25년의 세월 가까이 그녀는 미국의 10명의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1975년 자신의 남편의 사후 쑹메이링 여사는 대중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쑹메이링 여사가 어려운 관계를 가지면서 이전의 결혼 생활로부터 태어난 자신의 장남 장징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계승되었다. 1975년 그녀는 타이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자신의 거실에 완전한 군사 예복 차림의 남편의 초상화를 간직한 롱아일랜드 래팅타운에 자신의 가족의 36 에이커 (14.6 헥타르)의 사유지에서 살았다.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오랜 동맹들 중에 성원을 강화하는 데 1988년 장징궈의 사망에 타이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총통으로서 장징궈의 후임자 리덩후이는 그녀보다 정치에서 더욱 능숙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안, 쿠데타〉 (1937), 〈이것이 우리의 중국이다〉 (1940), 〈중국은 다시 상승해야 한다〉 (1942)와 〈확실한 승리〉 (1955)를 포함한 다수의 기사와 몇몇의 책들을 썼다. 1995년 제2차 세계 대전 50 주년의 축제와 함께 연결에서 자신의 명예에 캐피톨 힐에서 열린 축하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드문 공개적 출연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해 타이완으로 자신의 마지막 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2000년 타이완에서 열린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은 그녀가 의미있게 무소속 후보 쑹추위 (그녀와 관련 없음)에 국민당 후보 롄잔을 성원한 것에서 그녀로부터 편지를 제시하였다. 편지의 확실성은 타이완에서 위대한 토론의 주제였다. 쑹추위는 자신이 리덩후이를 성원했을 때 자신의 일찍이 그녀에 대한 가려진 비판을 위하여 앙갚음으로서 쓰여졌을 것 같은 편지의 확실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해 쑹메이링 여사는 자신의 롱아일랜드 사유지를 팔았고,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 사이드에 있는 그레이시 스퀘어 아파트에서 나머지 일생을 보냈으며 자신이 지나가면서 로비를 청소한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에 의하여 둘러싸였다. 2003년 10월 23일 쑹메이링은 106세의 나이에 자신의 맨해튼 아파트 저택에서 평화롭게 사망하였다. 그녀의 시체는 뉴욕주 하츠데일에 있는 펀클리프 묘지에 일시적으로 안치되었고, 타이완 치후 대영묘에 묻힌 자신의 고인된 남편과 함께 결국적인 매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시된 의도는 한번 정치적 상태가 가능하게 만들 때 둘다 중국 본토에 묻히는 것이다. * "그녀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아름답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 엘리노어 루스벨트 * "직접적이고, 강력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권력을 사랑하며 홍보와 아첨을 먹는다 ... 마음대로 매력을 켤 수 있고 그것을 안다." - 조지프 스틸웰 * "쑹메이링 여사는 그녀의 인생을 통하여, 그리고 특히 마지막 세기의 정의적인 투쟁 중에 미국과 가까운 친구였다. 미국인들의 세대들은 항상 그녀의 지능과 성격의 힘을 기억하고 존중할 것이다. 미국 국민들을 대표하여 나는 쑹메이링 여사의 가족 일원들과 전 세계의 많은 찬사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 조지 W. 부시 * 1966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 * 쑹칭링 * 쑹아이링 * 장제스 * 쑨원 * 중화민국 * 김구 * 1943년 미 의회연설 * 웰슬리 대학의 전기 * 추도문 * 타임지: 올해의 남편과 부인 (1937년) 분류:1897년 출생 분류:2003년 사망 분류:대만의 여자 정치인 분류:쑨원가 분류:장제스가 분류:중국의 반공주의자 분류:중국의 감리교도 분류:대만의 개신교도 분류:중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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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 "Introduction", "생애", "소설 작품", "문체", "주요 작품 목록", "각주", "외부 링크" ]
[ "\n\n\n\n\n'''찰스 존 허펌 디킨스'''(, , 1812년 2월 7일 - 1870년 6월 9일)는 영국인 작가이자 사회 비평가이다. 그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 속의 인물을 만들어냈고,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소설가이다.\n\n화가 시모어(Robert Seymour)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곡 소설 《The Pickwick Papers(원제: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픽윅 보고서)를 분책(分冊)으로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으로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을 비롯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n", "\n=== 어린시절 ===\n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존 디킨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배로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1812년 2월 7일 태어났다. 찰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n\n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곤란을 겪으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디킨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디킨스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n\n=== 글을 쓰다 ===\n디킨스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아침 신문》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보즈’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중에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된다.너는너는 바보\n\n=== 세상을 떠나다 ===\n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6월 9일 58세의 나이로 개즈 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n\n\n\n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n\n\n=== 미국 방문 ===\n1842년 1월 3일 디킨스는 브리태니아 증기선을 타고 그의 아내 캐더린과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목적은 국가간의 저작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디킨스는 미국에서 그의 책이 불법으로 판매되었고 그의 책 판매 수입은 전혀 없었다. 1891년에 최초로 국가관 저작권법이 만들어졌다. 4개월 후에 영국 귀국 후 그는 미국의 노예 제도에 불만을 표시하였고, 미국의 출판사의 정보 부족을 꼬집었다. 그의 미국 방문 동안 그가 만난 사람들은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드거 앨런 포, 존 퀸시 애덤스, 존 타일러, 윌리엄 채닝등이다. \n\n1867년 11월 19일 그의 두번째 미국 방문이 이루어졌고, 그의 몸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마크 트웨인 등을 만났다. \n", "\n=== 사회비판 ===\n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몇 작품 든다면,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Little Dorrit》은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명작이다.\n\n디킨스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기록을 작품으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였다.\n\n=== 연극 ===\n디킨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한 수단으로 연극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에 녹아 있다. 디킨즈 자신도 자신의 작품의 장면들을 대중들 앞에서 매우 자주 낭독하여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공연 투어를 통해 영국 전역과 미국을 널리 여행했다.\n\n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 —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 — 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 중의 몇몇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그의 작품중에는 유령이 등장하거나, 유령 이야기가 나열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탄절 벨에는 일곱 명의 유령이 등장하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스크루지가 묘사된다.\n\n=== 비판 ===\n그와 동시대 작가 중 몇몇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반유대주의로 비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의 패긴이라는 인물은 메부리코와 탐욕스러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디킨즈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에 살았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그러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악역인 스크루지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혼혈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n\n=== 연민 ===\n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실업자, 성 노예자 등의 인물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볼 수 있다.\n\n=== 성찰 ===\n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n\n찰스 디킨스는 가난에 대한 경험, 부의 경험도 누려본 작가로서 둘에 대한 비판을 수월하게 해내었다. 하지만 요즘에 화두에 오르는 매체에 의하면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할 때에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루머일 뿐, 찰스 디킨스의 디킨지안(dickensian) 소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n\n\n", "디킨스는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 멜로드라마, 감상 소설 등에서 다양한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영국 전기 작가 피터 애크로이드는 디킨스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아리비안 나이트’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중심은 풍자와 아이러니다. 코미디도 피카레스크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로렌스 스턴, 헨리 필딩, 토비아스 스몰렛이 주축이 된 영국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을 이끌었다. 필딩의 ‘기아 톰 존스의 이야기(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는 디킨스를 포함한 19세기 후반 소설가들에게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디킨스는 필딩의 책을 유년시절에 읽고 그의 아들에게 ‘헨리 필딩 디킨스’ 라는 이름을 지어줬다.\n\n디킨스의 문체는 언어적 창의성이 풍부하다. 캐리커처에 재능이 있는 디킨스는 풍자를 실감나게 잘한다. 초기 평론가들은 디킨스가 예리하고 실용적인 감각으로 유쾌한 삶을 포착해내는 점이 로코코 시대의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가스와 다르게 디킨스는 동시대의 인기 있는 극장의 관습을 반영하여 내용을 다양한 계층 언어로 표현하였고 이에 극찬을 받았다. 디킨스는 독자들을 사로잡을 등장인물의 이름을 창작해는 것에 집중하였는데 독자들이 연관성을 느끼고, “우화적 자극”으로 소설의 의미를 주제에 담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예시들 중 하나를 가져오자면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에서의 등장인물 ‘에드워드 머드스톤(Edward Murdstone)’은 쌍둥이가 암시한 살인(murder)과 돌(stone)처럼 차가운 냉기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디킨스의 문체는 환상과 현실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디킨스가 영국의 귀족적 속물 근성을 풍자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 로 불렀다) 환상의 비행이라고 극찬 받은 비유에는 고아를 주식/배당금에, 사람들을 줄다리기에, 저녁 만찬 손님을 가구에 비유한 것이 있다.\n\n디킨스는 삽화가들에게 전체적 스토리를 먼저 제공하여 등장인물 및 설정을 그가 생각한대로 정확히 그려 낼 수 있게 했다. 삽화가에게 1달분의 삽화 계획을 미리 준 후 디킨스는 글을 썼다. 책 “Our Mutual Friend”의 삽화가인 마커스 스톤은 디킨스를 회상하며 그가 “한 등장인물의 아주 작은 특징과 내가 창작해 낸 인물의 생애를 세세하게 묘사할 준비”를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n", "* 《Sketches by Boz》(1836)\n* 《픽윅 보고서》(1836)\n*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n* 《니콜라스 니클비》(1838-1839)\n*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n* 《Barnaby Rudge》(1841)\n* 《그 아이의 이야기》(1842)\n* 《크리스마스 캐럴》(1843)\n* 《Martin Chuzzlewit》(1843-1844)\n* 《Dombey and Son》 (1846-1848)\n*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n* 《A Child's History of England》(1851-1853)\n* 《황폐한 집》(1852-1853)\n* 《어려운 시절》(1854)\n* 《작은 도릿》(1855-1857)\n* 《두 도시 이야기》(1859)\n* 《위대한 유산》(1860-1861)\n* 《Our Mutual Friend》(1864-1865)\n*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1870)\n", "\n", "\n* \n* \n\n\n* 디킨즈에 대한 페이지 작품 원문과 다른 관련 페이지들로의 링크가 실려 있다.\n* 디킨즈에게 바쳐진 또다른 페이지\n* 디킨즈 가문의 가계도\n* 디킨즈의 문학\n\n\n\n\n\n \n분류:1812년 출생\n분류:1870년 사망\n분류:영국의 소설가\n분류:포츠머스\n분류:지폐의 인물\n분류:잉글랜드의 성공회교도\n분류:19세기 수필가\n분류:영국의 자선가\n분류:잉글랜드의 자선가" ]
'''찰스 존 허펌 디킨스'''(, , 1812년 2월 7일 - 1870년 6월 9일)는 영국인 작가이자 사회 비평가이다. 그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 속의 인물을 만들어냈고,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소설가이다. 화가 시모어(Robert Seymour)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곡 소설 《The Pickwick Papers(원제: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픽윅 보고서)를 분책(分冊)으로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으로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을 비롯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 === 어린시절 === 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존 디킨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배로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1812년 2월 7일 태어났다. 찰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곤란을 겪으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디킨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디킨스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 글을 쓰다 === 디킨스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아침 신문》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보즈’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중에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된다.너는너는 바보 === 세상을 떠나다 === 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6월 9일 58세의 나이로 개즈 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 미국 방문 === 1842년 1월 3일 디킨스는 브리태니아 증기선을 타고 그의 아내 캐더린과 미국을 방문하였다. 방문목적은 국가간의 저작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디킨스는 미국에서 그의 책이 불법으로 판매되었고 그의 책 판매 수입은 전혀 없었다. 1891년에 최초로 국가관 저작권법이 만들어졌다. 4개월 후에 영국 귀국 후 그는 미국의 노예 제도에 불만을 표시하였고, 미국의 출판사의 정보 부족을 꼬집었다. 그의 미국 방문 동안 그가 만난 사람들은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드거 앨런 포, 존 퀸시 애덤스, 존 타일러, 윌리엄 채닝등이다. 1867년 11월 19일 그의 두번째 미국 방문이 이루어졌고, 그의 몸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마크 트웨인 등을 만났다. === 사회비판 ===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몇 작품 든다면,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Little Dorrit》은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명작이다. 디킨스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기록을 작품으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였다. === 연극 === 디킨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한 수단으로 연극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에 녹아 있다. 디킨즈 자신도 자신의 작품의 장면들을 대중들 앞에서 매우 자주 낭독하여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공연 투어를 통해 영국 전역과 미국을 널리 여행했다. 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 —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 — 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 중의 몇몇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그의 작품중에는 유령이 등장하거나, 유령 이야기가 나열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탄절 벨에는 일곱 명의 유령이 등장하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스크루지가 묘사된다. === 비판 === 그와 동시대 작가 중 몇몇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반유대주의로 비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의 패긴이라는 인물은 메부리코와 탐욕스러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디킨즈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에 살았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그러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악역인 스크루지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혼혈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 연민 ===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실업자, 성 노예자 등의 인물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볼 수 있다. === 성찰 ===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 찰스 디킨스는 가난에 대한 경험, 부의 경험도 누려본 작가로서 둘에 대한 비판을 수월하게 해내었다. 하지만 요즘에 화두에 오르는 매체에 의하면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할 때에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루머일 뿐, 찰스 디킨스의 디킨지안(dickensian) 소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디킨스는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 멜로드라마, 감상 소설 등에서 다양한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영국 전기 작가 피터 애크로이드는 디킨스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아리비안 나이트’에서 받았다고 말한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중심은 풍자와 아이러니다. 코미디도 피카레스크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으며 로렌스 스턴, 헨리 필딩, 토비아스 스몰렛이 주축이 된 영국 전통 피카레스크 소설을 이끌었다. 필딩의 ‘기아 톰 존스의 이야기(The History of Tom Jones, a Foundling)’는 디킨스를 포함한 19세기 후반 소설가들에게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디킨스는 필딩의 책을 유년시절에 읽고 그의 아들에게 ‘헨리 필딩 디킨스’ 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디킨스의 문체는 언어적 창의성이 풍부하다. 캐리커처에 재능이 있는 디킨스는 풍자를 실감나게 잘한다. 초기 평론가들은 디킨스가 예리하고 실용적인 감각으로 유쾌한 삶을 포착해내는 점이 로코코 시대의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가스와 다르게 디킨스는 동시대의 인기 있는 극장의 관습을 반영하여 내용을 다양한 계층 언어로 표현하였고 이에 극찬을 받았다. 디킨스는 독자들을 사로잡을 등장인물의 이름을 창작해는 것에 집중하였는데 독자들이 연관성을 느끼고, “우화적 자극”으로 소설의 의미를 주제에 담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예시들 중 하나를 가져오자면 책 ‘데이비드 코퍼필드(David Copperfield)’ 에서의 등장인물 ‘에드워드 머드스톤(Edward Murdstone)’은 쌍둥이가 암시한 살인(murder)과 돌(stone)처럼 차가운 냉기를 떠오르게 한다. 또한 디킨스의 문체는 환상과 현실이 조화롭게 어울린다. 디킨스가 영국의 귀족적 속물 근성을 풍자한 것은 유명하다. (그는 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 로 불렀다) 환상의 비행이라고 극찬 받은 비유에는 고아를 주식/배당금에, 사람들을 줄다리기에, 저녁 만찬 손님을 가구에 비유한 것이 있다. 디킨스는 삽화가들에게 전체적 스토리를 먼저 제공하여 등장인물 및 설정을 그가 생각한대로 정확히 그려 낼 수 있게 했다. 삽화가에게 1달분의 삽화 계획을 미리 준 후 디킨스는 글을 썼다. 책 “Our Mutual Friend”의 삽화가인 마커스 스톤은 디킨스를 회상하며 그가 “한 등장인물의 아주 작은 특징과 내가 창작해 낸 인물의 생애를 세세하게 묘사할 준비”를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 《Sketches by Boz》(1836) * 《픽윅 보고서》(1836) *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 * 《니콜라스 니클비》(1838-1839) *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 * 《Barnaby Rudge》(1841) * 《그 아이의 이야기》(1842) * 《크리스마스 캐럴》(1843) * 《Martin Chuzzlewit》(1843-1844) * 《Dombey and Son》 (1846-1848) *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 * 《A Child's History of England》(1851-1853) * 《황폐한 집》(1852-1853) * 《어려운 시절》(1854) * 《작은 도릿》(1855-1857) * 《두 도시 이야기》(1859) * 《위대한 유산》(1860-1861) * 《Our Mutual Friend》(1864-1865) *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1870) * * * 디킨즈에 대한 페이지 작품 원문과 다른 관련 페이지들로의 링크가 실려 있다. * 디킨즈에게 바쳐진 또다른 페이지 * 디킨즈 가문의 가계도 * 디킨즈의 문학 분류:1812년 출생 분류:1870년 사망 분류:영국의 소설가 분류:포츠머스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잉글랜드의 성공회교도 분류:19세기 수필가 분류:영국의 자선가 분류:잉글랜드의 자선가
오픈오피스
[ "Introduction", "역사", "기능", "탁상출판", "파일 형식", "개발", "시장 반응", "기능 개선", "한국어화",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섬네일\n'''오픈오피스'''(, OpenOffice.org)는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피스 제품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2003 포맷을 비롯한 다양한 포맷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교환을 위한 고유 파일 포맷으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을 지원한다.\n\n오픈오피스는 스타디비전이 개발하고 1999년 8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지금의 오라클)가 인수한 스타오피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높은 품질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2000년 7월에 스타오피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다. 이후 오픈오피스 커뮤니티(OpenOffice.org)에서 오픈오피스 개발 및 관련 활동을 책임지고 있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오피스 커뮤니티에 소스 기여/자금 기여/인력 기여 등을 통해 오픈오피스 개발과 활동을 지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그리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그렇게 개발되는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전용 구성 요소를 추가한 스타오피스를 판매하였다. 그 뒤 현재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관리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아파치 라이선스 2.0을 따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n", "원래 독일 회사인 스타디비전이 스타오피스라는 독점 소프트웨어로 개발했으나 1999년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코드를 인수했다. 1999년 8월에는 스타오피스 버전 5.2를 무료로 제공하였다.\n\n2000년 7월 19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스타오피스에 대한 오픈 소스 개발 커뮤니티를 형성할 의도로 LGPL과 SISSL에 따라 소스 코드를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이름은 OpenOffice.org이며, 2000년 10월 13일에 공식 웹 사이트가 열렸다.\n\n2003년 초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목표로 버전 2.0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 확대, 성능 개선, 속도 향상과 메모리 사용량 감소, 폭넓은 스크립팅 지원, 그놈과의 향상된 통합, 보고서, 양식, 쿼리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론트엔드, 새로운 내장 SQL 데이터베이스, 향상된 사용성. 베타 버전은 2005년 4월에 출시되었다.\n\n2005년 9월 2일, 썬은 SISSL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오픈오피스 커뮤니티 협의회는 다시는 오픈오피스를 이중 라이선스로 제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올 버전은 LGPL만 사용한다고 발표했다.\n\n2005년 10월 20일, 오픈오피스 2.0이 공식적으로 출시되었다. 버전 2.0이 출시된 지 8주 후에 업데이트 버전인 오픈오피스 2.0.1이 출시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버그 수정과 새로운 기능이 포함되었다.\n\n오픈오피스는 2.0.3 버전부터 업데이트, 기능 향상, 버그 수정을 배포하기 위한 배포 주기를 종전의 18개월에서 3개월로 변경했다. 현재, 새로운 기능을 포함한 버전(feature release)은 그 사이에 나오는 버그 수정 버전(bug fix release)과 번갈아 가며 6개월마다 배포된다.\n\n=== 스타오피스 ===\n썬은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한 상용 독점 소프트웨어 스타오피스를 위해 오픈오피스 개발을 보조하고 있다. 스타오피스는 버전 6.0 이후로 오픈오피스 소스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추가 독점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n\n* 추가 글꼴.\n* Adabas D 데이터베이스.\n* 추가 문서 템플릿.\n* 클립 아트.\n* 아시아 버전을 위한 정렬 기능.\n* 추가 파일 필터.\n* 마이그레이션 평가 도구 (기업 버전).\n* 매크로 마이그레이션 도구 (기업 버전).\n* 구성 관리 도구 (기업 버전).\n\n오픈오피스는 OpenOffice.org XML 파일 포맷을 포함하여 스타오피스의 많은 기능을 물려받았는데, 이 포맷은 버전 2에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n", "선언문을 보면, 오픈오피스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동작하고, 오픈 컴포넌트에 기반을 둔 API와 XML에 기반을 둔 파일 형식을 통해서 모든 기능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하는 오피스 제품군을 만드는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다.\n\n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경쟁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비슷한 외관과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이 사용하는 파일 형식 중 대부분을 읽고 쓸 수 있다. 이는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이전 버전 파일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열지 못하는 손상된 새 버전의 파일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 매킨토시 워드 파일(MCW)은 열 수가 없다.\n\n=== 플랫폼 ===\n오픈오피스는 리눅스, 윈도우, OS X, 솔라리스, FreeBSD, OpenVMS, IRIX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은 윈도우, 리눅스, 솔라리스이다. 오에스 텐용 버전의 경우 2.x버전의 경우 X11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제한적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3 버전부터는 OS X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에서 네이티브로 작동하는 향상된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로 OS X 전용으로 개발된 네오오피스도 있다. 네오오피스는 오픈오피스에서 떨어져 나간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오피스 2.X 시절부터 아쿠아 버전의 오픈오피스를 제공하였다.\n\n=== 구성 프로그램 ===\n오픈오피스는 최신 오피스 제품군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공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각 프로그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 요소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구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n\n\n\n\n48px \n\n'''라이터(Writer)'''\n\n 워드 프로세서(Text Document)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에 필적하는 기능과 도구를 제공한다. 또한, 추가 소프트웨어 없이 포터블 도큐먼트 포맷(PDF)으로 내보낼 수 있는 기능과 웹 페이지를 만들고 편집하기 위한 WYSIWYG 편집기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라이터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라이터에서는 칼크(아래 참조)에서 쓸 수 있는 많은 함수와 숫자 형식을 라이터의 표 안에서 쓸 수 있다는 점이다.\n\n\n\n48px \n\n'''칼크(Calc)'''\n\n 스프레드시트(Spreadsheet)로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상당히 비슷한 기능을 제공한다. 칼크는 액셀에서 제공하지 않는 사용자 데이터의 레이아웃에 기반을 두어 그래프의 급수를 자동으로 정의하는 시스템 등의 기능을 제공한다. 또한, 스프레드시트를 곧바로 PDF 파일로 저장할 수 있다.\n\n\n\n48px \n\n'''임프레스(Impress)'''\n\n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 프로그램으로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와 비슷하다. 프레젠테이션을 어도비 플래시(SWF) 파일로 내보낼 수 있는 기능이 있어, 플래시 플레이어가 설치된 어떤 컴퓨터에서든 프레젠테이션을 재생할 수 있다. 또한, PDF 파일을 만드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 파일 형식인 .ppt 파일을 읽을 수 있다. 임프레스는 사전에 제공되는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이 부족한 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인터넷에서 템플릿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n\n\n\n48px \n\n'''베이스(Base)'''\n\n 데이터베이스(,Database) 프로그램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와 비슷하다. 베이스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할 수 있으며, 최종 사용자가 데이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양식과 보고서를 만들 수 있다. 액세스와 마찬가지로 베이스는 액세스 데이터베이스(JET), ODBC 데이터 소스, MySQL/PostgreSQL 등의 여러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들에 대한 프론트-엔드로 사용된다. 베이스는 오픈오피스 제품군에 있던 HSQL을 수정하여 버전 2.0부터 제품군에 포함되었다. 베이스는 앞서 나열된 모든 데이터베이스의 프론트-엔드가 될 수 있지만, 베이스를 사용하기 위해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을 설치할 필요는 없다.\n\n\n\n48px \n\n'''드로우(Draw)'''\n\n 드로윙(Drawing)프로그램, 벡터 그래픽 편집기로 기능에서는 코렐 드로우에 필적한다. 도형들을 다양하게 “연결”할 수 있는 기능이 특징적이며, 여러 가지 선 스타일을 사용하여 순서도와 같은 도면을 구축하기에 편리하다. 이는 Scribus와 마이크로소프트 퍼블리셔와 같은 탁상출판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n\n\n\n48px \n\n'''매쓰(Math)'''\n\n 수식(Formula)을 만들고 편집하기 위한 도구로 마이크로소프트 수식 편집기와 비슷하다. 수식은 라이터 문서와 같은 다른 오픈오피스 문서 안에 포함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글꼴과 PDF로 내보내기 기능을 지원한다. MathML을 지원하며, MathML을 지원하는 다른 수식 편집기와 자료 호환을 할 수 있다.\n\n\n\n==== 퀵스타터 ====\n윈도와 리눅스에서 컴퓨터 시작 시 구동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시작될 때 오픈오피스를 위한 핵심 파일들과 라이브러리들을 로드하여 나중에 제품군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빨리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픈오피스 응용 프로그램들의 시작 시간은 1.0 버전의 제품군에서 공통된 불만이었으며, 퀵스타트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버전 2.2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n\n==== 매크로 기록기 ====\n사용자의 동작을 기록하여 이를 OOoBasic(오픈 오피스 오브젝트 베이직)을 이용하여 재생함으로써 작업의 자동화에 도움을 주는 다이알로그 프로그램으로 매크로 기록기는 다이알로그 인터페이스외에도 오픈오피스베이직의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제공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매크로 기록기는 오픈오피스베이직으로 소스코드에 의한 직접적인 사용 방법도 가능하다. 내장된 오픈오피스(오브젝트)베이직(OpenOfficeBasic)이 기본으로 구동되지만 파이썬, 빈 쉘(Bena Shell), 자바 스크립트 등도 연동시킬 수 있다.\n\n윈도에서는 이들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설치할 수는 있어도 별개로 다운로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리눅스 배포판에서는 이 구성 요소들을 패키지로 쪼개서 배포하며 따로따로 다운로드하고 설치할 수 있다.\n\n=== 오픈오피스 베이직 ===\n오픈오피스 베이직은 스타오피스 베이직에 기초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응용 프로그램용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BA)과 비슷하다. 오픈오피스 2.0 노벨 에디션은 추가로 마이크로소프트 VBA 매크로를 지원하며, 이 기능은 주 버전에서도 곧 통합될 것으로 기대된다.\n\n오픈오피스 베이직은 라이터(Writer)와 칼크(Calc) 응용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다. 이는 서브루틴이나 매크로를 부르는 함수로 쓰이며, 각 매크로는 한 문단에서 단어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특히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지 않은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유용하다.\n\n오픈오피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 베이스는 라이터를 이용해 리포트와 폼을 만들기 때문에, 베이스 또한 오픈오피스 베이직으로 프로그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n\n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그래밍작업은 같이 제공되는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통해서 이루어진다.\n\n=====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이용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 예 =====\n다음은 라이터(Text Document)에서 다수의 매쓰(Fomula)오브젝트들을 삽입한후 \"글자크기,폰트,가운데정렬\"을 위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이다.\n:\nREM ***** BASIC *****\n\nSub Main\n embeddedObjects = ThisComponent.getEmbeddedObjects()\n elementNames = embeddedObjects.getElementNames()\n for i=0 to UBOUND(elementNames)\n element = embeddedObjects.getByName(elementNames(i)).Model\n if (element.supportsService(\"com.sun.star.formula.FormulaProperties\")) then\n element.BaseFontHeight = 11\n element.FontNameVariables= \"Noto Serif CJK KR,Italic\"\n element.FontNameFunctions = \"나눔명조\"\n element.FontNameNumbers= \"Noto Serif CJK KR\"\n element.Alignment =com.sun.star.style.TabAlign.CENTER\n\n endif\n next i\n ThisComponent.reformat()\nEnd Sub\n\n\n==== API ====\n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퍼티를 구성하는 API는 사용자가 거의 대부분의 오픈오피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픈오피스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버전의 스타오피스의 전통을 유지하므로 여전히 API 참조에서도 스타오피스의 프레임을 찾아볼 수 있다.\n", "탁상출판(DTP) 용도를 완전히 지원한다. 다양한 출판물의 사이즈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며, 이미지 뿐만 아니라 그래픽SVG 등과 수학 등의 수식을 삽입하는 출판물에 활용도가 높다.\n", "오픈오피스는 ISO/IEC 표준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을 만들었고, 이를 기본 고유 형식으로 사용한다. 또한, 많은 예전 전용 형식들(예: 워드 퍼펙트, 로터스 소프트웨어, MS 웍스, 리치 텍스트 형식)을 읽을 수 있으며, 일부는 쓰기도 가능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형식으로 일부 버전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보다 오히려 더 잘 읽어들인다.\n\n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피스 오픈 XML을 쓰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응하여, 노벨은 오픈오피스를 위한 오피스 오픈 XML을 플러그인을 자유로운 BSD 라이선스 조건으로 내놓았는데(GNU GPL 그리고 LGPL 라이선스 라이브러리들과 병행하여), 이는 OpenOffice.org 프로젝트 안으로 포함되도록 제공될 것이다. 이는 오픈오피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만들어진 .docx 파일을 읽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n", "=== 개요 ===\n오픈오피스 API는 유니버설 네트워크 오브젝트(UNO)로 알려진 컴포넌트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CORBA와 같은 인터페이스 서술 언어에서 정의된 광범위한 인터페이스들로 구성되어 있다.\n\n사용되는 문서 파일 형식은 XML 형식과 여러 가지 내보내기/가져오기 필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픈오피스가 읽어들이는 모든 외부 형식들은 내부 XML 표현을 통해 서로 변환된다. XML을 디스크에 저장할 때에는 압축을 사용하여 똑같은 이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문서들보다 더 작다. 버전 1.0에서 문서 저장을 위해 쓰던 고유 파일 형식은 OASIS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 표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는 버전 2.0에서는 기본 파일 형식이 되었다. 제품군 개발 버전은 OpenOffice.org 웹 사이트의 개발자 존에서 몇 주마다 한 번씩 나오고 있다. 이 배포 버전들은 새로운 특징을 테스트해보고 싶거나 단순히 앞으로 있을 변경들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 이들은 실무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n\n=== 고유 데스크톱 통합 ===\n오픈오피스 1.0은 운영되는 플랫폼을 위해서 고유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의 룩 앤드 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버전 2.0을 시작하면서, 오픈오피스는 고유 응용 프로그램들과 더 잘 어울리고 사용자들에게 더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플랫폼에 걸쳐 있는 고유 위젯 툴키트, 아이콘, 그리고 폰트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적용했다. 특히 GNOME과 KDE 양쪽과 통합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n\n이 문제는 특히나 맥 OS X에서 뚜렷한데, 표준 유저 인터페이스가 윈도나 X-11 기반 데스크톱 환경 어느 쪽과는 눈에 보이게 많이 다르며, 대부분 오픈오피스 개발자와는 친숙하지 않은 프로그래밍 툴킷을 쓰라고 요구한다. 오에스 텐에서 오픈오피스를 쓸 수 있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n\n==== 오픈오피스 Mac OS X (X11) ====\n공식 버전은 X11.app 또는 XDarwin을 설치하여 달라고 요구하며, 잘 테스트된 유닉스 버전에 딱 들어맞는 포팅이다. 이는 기능으로는 유닉스 버전과는 동등하며, 유저 인터페이스는 그 버전의 룩 앤드 필과 닮았다. 예를 들어 응용 프로그램은 화면 상단의 오에스 텐 메뉴 대신에 자체 메뉴를 사용한다. 이는 또한 오픈오피스를 위한 X11 형식의 시스템 글꼴이 필요하다(이는 응용 프로그램 설치 도중에 할 수 있다.).\n\n(X11 오픈오피스는 2.X 버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다.)\n\n==== 오픈오피스 아쿠아 ====\n오픈오피스 아쿠아는 X11 오픈오피스를 대체하여 현재에는 정식 버전의 맥용 오픈오피스 지칭한다. 그러므로 오픈오피스 아쿠아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n\n=== 다른 프로젝트들 ===\n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프로젝트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오피스와 네오오피스가 있고, 그룹웨어 솔루션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보완 프로그램도 있다.\n\n==== 네오오피스 ====\n이는 독자적인 포팅으로 OS X의 아쿠아 유저 인터페이스를 자바, 카본, 그리고 점점 더 비중이 높아지는 코코아 툴킷을 써서 통합을 구현하였다. 네오오피스는 OS X UI 표준에 꽤 가까우며, OS X에 설치된 글꼴과 프린터들을 직접 사용한다. 이는 공식 오픈오피스 X11 릴리즈보다는 뒤처져서 발표되는데, 개발팀이 규모가 작고 유저 인터페이스를 포팅하는 데에 쓰는 기술 개발을 같이하기 때문이다.\n\n==== OpenGroupware.org ====\nOpenGroupware.org는 OpenOffice.org 문서, 캘렌더, 주소록,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그리고 블랙 보드를 공유할 수 있고 다른 그룹웨어 응용 프로그램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n\n또한, OOExtras에서는 문서 템플릿과 쓸모 있는 추가물들을 만들고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n\n외부 프로그램에서 OpenOffice.org 문서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펄 확장기능들을 CPAN에서 구할 수 있다. 이들 라이브러리는 OpenOffice.org API를 쓰지 않는다. 이들은 펄 표준 압축/압축 풀기, XML 접근, 그리고 UTF-8 인코딩 모듈을 이용해서 OpenOffice.org 파일을 직접 읽고 쓴다.\n\n==== 휴대용 프로그램 ====\n“휴대용 OpenOffice.org”라고 부르는 OpenOffice.org 배포판은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서 제품군을 돌리고자 설계되었다.\n\n==== OxygenOffice 프로페셔널 ====\nOpenOffice.org보다 향상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n* 칼크에서 응용 프로그램용 비주얼 베이직(VBA)매크로를 돌릴 가능성(테스트용)\n* 임프레스를 위한 다중 모니터 지원\n* 향상된 칼크 HTML 내보내기\n* 베이스를 위한 향상된 액세스 지원\n* 보안 수정\n* 향상된 성능\n* 향상된 컬러 팰릿\n* 향상된 도움말 메뉴, 추가 사용자 매뉴얼, 그리고 초심자를 위한 확장된 팁들\n\n옵션으로 다음이 제공되며, 개인과 업무용으로 무료로 쓸 수 있다.\n* 클립아트와 사진으로 이루어진 3,200개가 넘는 그래픽.\n* 다양한 템플릿과 보기 문서\n* 90개가 넘는 공짜 글꼴\n* OOoWikipedia와 같은 추가 도구\n\n==== 확장 기능 ====\n버전 2.0.4부터, OpenOffice.org는 모질라 파이어폭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기능을 지원한다. OpenOffice.org 서지 프로젝트는 강력한 참고 문헌 관리 소프트웨어를 이 제품군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주요 추가물들은 2007년 후반이나 2008년 중반에 나올 표준 OpenOffice.org 릴리즈에 포함되기 위한 후보로 정해져 있으나, 프로그래머들의 선호도에 따라서 더 늦어질 수도 있다.\n\n=== 보안 ===\n오픈오피스는 보안 팀을 따로 가동하고 있으며, 보안 사이트인 Secunia는 2007년 9월 현재까지 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패치되지 않은 보안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카스퍼스키 연구소에서는 오픈오피스에 존재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는 오픈오피스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는 없다.\n\n프랑스 국방성의 비공개 회의에서 매크로에 관련된 보안 문제가 제기되었다. 오픈오피스 개발자들은 이 폭로에 가깝게 발표된 취약점이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서 발표되지 않았으며, 국방부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추측되는 취약점에 대해서는 개발자들과 연구원들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n", "=== 시장 점유율 ===\n오픈오피스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 미러 사이트, 피어투피어 네트워크, CD, 리눅스 배포판 등 다양한 경로로 배포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픈오피스 측에서는 표본 조사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고 있다.\n\n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전체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픈오피스와 스타오피스는 2004년에는 대형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14%를, 중소규모 비즈니스 시장에서는 2005년에 19%를 확보했다. 오픈오피스 웹 사이트는 2009년 10월 28일에 다운로드 수 1억 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n\n오픈오피스를 대규모로 쓰는 사용자는 싱가포르 국방부, 그리고 영국의 브리스톨 시청 등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픈오피스가 소프트웨어 조달을 합리화 시키면서도 안정되고, 기록 보관을 위한 표준 파일 형식을 원하는 지역과 국가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리눅스를 쓰는 인도 대법원과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은 완전히 오픈오피스에 의존하고 있다.\n\n2005년 10월 4일, 선과 구글은 전략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합의 일부로써, 선은 구글 검색 바를 오픈오피스에 추가하고, 선과 구글은 공동 마케팅 활동은 물론 공동 연구 개발을 약속했으며, 구글은 오픈오피스 배포를 도울 것이다.\n\n스타오피스 말고도,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업 제품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SISSL 라이선스로 개발되었다(오픈오피스 2.0 베타 2까지 유효하다.). 대체로 이들은 지역 특화 또는 틈새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음성 인식 모듈, 자동 데이터베이스 연결, 또는 더 나은 CJK 지원과 같은 전용 애드-온이 들어 있다.\n\n=== 자바 논란 ===\n\n예전에 오픈오피스는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바 런타임 환경에 의존성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이 자바 창시자이자 오픈오피스의 선도 후원자라는 사실은 이 기술 채택에 숨은 뜻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버전 1은 몇몇 보조 기능을 위하여 현재 사용자 컴퓨터에 있는 자바 런타임 환경(JRE)에 의존하지만, 버전 2에서는 자바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 제품군은 JRE를 요구한다. 그에 대응하여, 레드햇은 자유 자바 구현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늘렸다. 레드햇의 페도라 코어 4(2005년 6월 13일 출시)는 GCJ와 GNU Classpath에서 동작하는 오픈오피스 버전 2를 포함하고 있다.\n", "* 1.1: 문서를 PDF 형식과 SWF 형식으로 출력할 수 있다.\n* 2.0: 공개 표준안인 OpenDocument 형식을 기본 포맷으로 사용한다. 한글 97의 hwp 형식을 읽을 수 있다.\n", "오픈오피스의 한국어화 작업은 처음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의뢰로 미지리서치가 스타오피스를 한국어화하고 그 결과물을 오픈오피스에 반영하였다. 이후 한국어판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지역화 팀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2008년 4월 배포된 2.4판 이후부터는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n\n현재까지 한국어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리눅스, OS X에서 사용할 수 있다.\n\n* 빌드 넘버 635: 한글을 입력할 수 있고, 메뉴가 조금 한국어화되었다. 도움말은 아직 영문이다.\n* 1.0: 대부분의 도움말이 한국어화되었으며 모든 메뉴가 한글이다.\n* 1.1: 아이콘까지 한국어화되었고, 번역된 문장이 더 자연스럽다.\n* 2.0: 한/글 3.0 및 97 파일 포맷 지원. 워디안 계열의 신형 파일 포맷은 지원되지 않는다.\n* 2.1: 한자 키를 눌러서 입력기를 통한 한자 변환이 가능하다.\n* 2.4.0: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n* 3.0.0: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도움말의 한국어화가 100% 완료되었다.\n* 3.1.0: 안티 앨리어싱을 비롯한 몇 가지 기능개선이 이루어졌다.\n* 3.2.0: 라이터의 OOXML 불러오기 호환성 개선 등의 몇 가지 추가적인 기능 개선이 이루어졌다.\n* 4.1.2: 오픈 소스 라이선스의 나눔글꼴이나 본고딕, 본명조 등의 한글 사용이 문서 작성 프로그램에서 뿐만아니라 오브젝트 삽입 내부에서도 안정적이다.\n", "* 리브레 오피스\n* 티맥스오피스\n", "\n", "\n* 오픈오피스 홈페이지\n* 한글 오픈오피스 프로젝트\n* 오픈오피스 한국어 커뮤니티\n* 오픈오피스 문서 프로젝트\n* OpenOffice.org Portable — 무설치\n\n\n\n\n\n\n\n \n분류:자유 소프트웨어\n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n분류:2002년 소프트웨어\n분류: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n분류:자바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n분류:크로스 플랫폼 자유 소프트웨어\n분류:중단된 소프트웨어" ]
섬네일 '''오픈오피스'''(, OpenOffice.org)는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피스 제품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2003 포맷을 비롯한 다양한 포맷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교환을 위한 고유 파일 포맷으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을 지원한다. 오픈오피스는 스타디비전이 개발하고 1999년 8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지금의 오라클)가 인수한 스타오피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높은 품질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2000년 7월에 스타오피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다. 이후 오픈오피스 커뮤니티(OpenOffice.org)에서 오픈오피스 개발 및 관련 활동을 책임지고 있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오피스 커뮤니티에 소스 기여/자금 기여/인력 기여 등을 통해 오픈오피스 개발과 활동을 지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그리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그렇게 개발되는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전용 구성 요소를 추가한 스타오피스를 판매하였다. 그 뒤 현재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관리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아파치 라이선스 2.0을 따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원래 독일 회사인 스타디비전이 스타오피스라는 독점 소프트웨어로 개발했으나 1999년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코드를 인수했다. 1999년 8월에는 스타오피스 버전 5.2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2000년 7월 19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스타오피스에 대한 오픈 소스 개발 커뮤니티를 형성할 의도로 LGPL과 SISSL에 따라 소스 코드를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이름은 OpenOffice.org이며, 2000년 10월 13일에 공식 웹 사이트가 열렸다. 2003년 초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목표로 버전 2.0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 확대, 성능 개선, 속도 향상과 메모리 사용량 감소, 폭넓은 스크립팅 지원, 그놈과의 향상된 통합, 보고서, 양식, 쿼리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론트엔드, 새로운 내장 SQL 데이터베이스, 향상된 사용성. 베타 버전은 2005년 4월에 출시되었다. 2005년 9월 2일, 썬은 SISSL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오픈오피스 커뮤니티 협의회는 다시는 오픈오피스를 이중 라이선스로 제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올 버전은 LGPL만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2005년 10월 20일, 오픈오피스 2.0이 공식적으로 출시되었다. 버전 2.0이 출시된 지 8주 후에 업데이트 버전인 오픈오피스 2.0.1이 출시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버그 수정과 새로운 기능이 포함되었다. 오픈오피스는 2.0.3 버전부터 업데이트, 기능 향상, 버그 수정을 배포하기 위한 배포 주기를 종전의 18개월에서 3개월로 변경했다. 현재, 새로운 기능을 포함한 버전(feature release)은 그 사이에 나오는 버그 수정 버전(bug fix release)과 번갈아 가며 6개월마다 배포된다. === 스타오피스 === 썬은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한 상용 독점 소프트웨어 스타오피스를 위해 오픈오피스 개발을 보조하고 있다. 스타오피스는 버전 6.0 이후로 오픈오피스 소스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추가 독점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 추가 글꼴. * Adabas D 데이터베이스. * 추가 문서 템플릿. * 클립 아트. * 아시아 버전을 위한 정렬 기능. * 추가 파일 필터. * 마이그레이션 평가 도구 (기업 버전). * 매크로 마이그레이션 도구 (기업 버전). * 구성 관리 도구 (기업 버전). 오픈오피스는 OpenOffice.org XML 파일 포맷을 포함하여 스타오피스의 많은 기능을 물려받았는데, 이 포맷은 버전 2에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 선언문을 보면, 오픈오피스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동작하고, 오픈 컴포넌트에 기반을 둔 API와 XML에 기반을 둔 파일 형식을 통해서 모든 기능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하는 오피스 제품군을 만드는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경쟁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비슷한 외관과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이 사용하는 파일 형식 중 대부분을 읽고 쓸 수 있다. 이는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이전 버전 파일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열지 못하는 손상된 새 버전의 파일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 매킨토시 워드 파일(MCW)은 열 수가 없다. === 플랫폼 === 오픈오피스는 리눅스, 윈도우, OS X, 솔라리스, FreeBSD, OpenVMS, IRIX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은 윈도우, 리눅스, 솔라리스이다. 오에스 텐용 버전의 경우 2.x버전의 경우 X11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제한적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3 버전부터는 OS X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에서 네이티브로 작동하는 향상된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로 OS X 전용으로 개발된 네오오피스도 있다. 네오오피스는 오픈오피스에서 떨어져 나간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오피스 2.X 시절부터 아쿠아 버전의 오픈오피스를 제공하였다. === 구성 프로그램 === 오픈오피스는 최신 오피스 제품군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공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각 프로그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 요소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구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48px '''라이터(Writer)''' 워드 프로세서(Text Document)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에 필적하는 기능과 도구를 제공한다. 또한, 추가 소프트웨어 없이 포터블 도큐먼트 포맷(PDF)으로 내보낼 수 있는 기능과 웹 페이지를 만들고 편집하기 위한 WYSIWYG 편집기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라이터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라이터에서는 칼크(아래 참조)에서 쓸 수 있는 많은 함수와 숫자 형식을 라이터의 표 안에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48px '''칼크(Calc)''' 스프레드시트(Spreadsheet)로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상당히 비슷한 기능을 제공한다. 칼크는 액셀에서 제공하지 않는 사용자 데이터의 레이아웃에 기반을 두어 그래프의 급수를 자동으로 정의하는 시스템 등의 기능을 제공한다. 또한, 스프레드시트를 곧바로 PDF 파일로 저장할 수 있다. 48px '''임프레스(Impress)'''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 프로그램으로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와 비슷하다. 프레젠테이션을 어도비 플래시(SWF) 파일로 내보낼 수 있는 기능이 있어, 플래시 플레이어가 설치된 어떤 컴퓨터에서든 프레젠테이션을 재생할 수 있다. 또한, PDF 파일을 만드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 파일 형식인 .ppt 파일을 읽을 수 있다. 임프레스는 사전에 제공되는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이 부족한 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인터넷에서 템플릿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48px '''베이스(Base)''' 데이터베이스(,Database) 프로그램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와 비슷하다. 베이스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할 수 있으며, 최종 사용자가 데이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양식과 보고서를 만들 수 있다. 액세스와 마찬가지로 베이스는 액세스 데이터베이스(JET), ODBC 데이터 소스, MySQL/PostgreSQL 등의 여러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들에 대한 프론트-엔드로 사용된다. 베이스는 오픈오피스 제품군에 있던 HSQL을 수정하여 버전 2.0부터 제품군에 포함되었다. 베이스는 앞서 나열된 모든 데이터베이스의 프론트-엔드가 될 수 있지만, 베이스를 사용하기 위해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을 설치할 필요는 없다. 48px '''드로우(Draw)''' 드로윙(Drawing)프로그램, 벡터 그래픽 편집기로 기능에서는 코렐 드로우에 필적한다. 도형들을 다양하게 “연결”할 수 있는 기능이 특징적이며, 여러 가지 선 스타일을 사용하여 순서도와 같은 도면을 구축하기에 편리하다. 이는 Scribus와 마이크로소프트 퍼블리셔와 같은 탁상출판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48px '''매쓰(Math)''' 수식(Formula)을 만들고 편집하기 위한 도구로 마이크로소프트 수식 편집기와 비슷하다. 수식은 라이터 문서와 같은 다른 오픈오피스 문서 안에 포함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글꼴과 PDF로 내보내기 기능을 지원한다. MathML을 지원하며, MathML을 지원하는 다른 수식 편집기와 자료 호환을 할 수 있다. ==== 퀵스타터 ==== 윈도와 리눅스에서 컴퓨터 시작 시 구동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시작될 때 오픈오피스를 위한 핵심 파일들과 라이브러리들을 로드하여 나중에 제품군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빨리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픈오피스 응용 프로그램들의 시작 시간은 1.0 버전의 제품군에서 공통된 불만이었으며, 퀵스타트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버전 2.2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 매크로 기록기 ==== 사용자의 동작을 기록하여 이를 OOoBasic(오픈 오피스 오브젝트 베이직)을 이용하여 재생함으로써 작업의 자동화에 도움을 주는 다이알로그 프로그램으로 매크로 기록기는 다이알로그 인터페이스외에도 오픈오피스베이직의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제공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프로그래밍 언어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매크로 기록기는 오픈오피스베이직으로 소스코드에 의한 직접적인 사용 방법도 가능하다. 내장된 오픈오피스(오브젝트)베이직(OpenOfficeBasic)이 기본으로 구동되지만 파이썬, 빈 쉘(Bena Shell), 자바 스크립트 등도 연동시킬 수 있다. 윈도에서는 이들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설치할 수는 있어도 별개로 다운로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리눅스 배포판에서는 이 구성 요소들을 패키지로 쪼개서 배포하며 따로따로 다운로드하고 설치할 수 있다. === 오픈오피스 베이직 ===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스타오피스 베이직에 기초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응용 프로그램용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BA)과 비슷하다. 오픈오피스 2.0 노벨 에디션은 추가로 마이크로소프트 VBA 매크로를 지원하며, 이 기능은 주 버전에서도 곧 통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라이터(Writer)와 칼크(Calc) 응용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다. 이는 서브루틴이나 매크로를 부르는 함수로 쓰이며, 각 매크로는 한 문단에서 단어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특히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지 않은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유용하다. 오픈오피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 베이스는 라이터를 이용해 리포트와 폼을 만들기 때문에, 베이스 또한 오픈오피스 베이직으로 프로그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그래밍작업은 같이 제공되는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이용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 예 ===== 다음은 라이터(Text Document)에서 다수의 매쓰(Fomula)오브젝트들을 삽입한후 "글자크기,폰트,가운데정렬"을 위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이다. : REM ***** BASIC ***** Sub Main embeddedObjects = ThisComponent.getEmbeddedObjects() elementNames = embeddedObjects.getElementNames() for i=0 to UBOUND(elementNames) element = embeddedObjects.getByName(elementNames(i)).Model if (element.supportsService("com.sun.star.formula.FormulaProperties")) then element.BaseFontHeight = 11 element.FontNameVariables= "Noto Serif CJK KR,Italic" element.FontNameFunctions = "나눔명조" element.FontNameNumbers= "Noto Serif CJK KR" element.Alignment =com.sun.star.style.TabAlign.CENTER endif next i ThisComponent.reformat() End Sub ==== API ====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퍼티를 구성하는 API는 사용자가 거의 대부분의 오픈오피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픈오피스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버전의 스타오피스의 전통을 유지하므로 여전히 API 참조에서도 스타오피스의 프레임을 찾아볼 수 있다. 탁상출판(DTP) 용도를 완전히 지원한다. 다양한 출판물의 사이즈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며, 이미지 뿐만 아니라 그래픽SVG 등과 수학 등의 수식을 삽입하는 출판물에 활용도가 높다. 오픈오피스는 ISO/IEC 표준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을 만들었고, 이를 기본 고유 형식으로 사용한다. 또한, 많은 예전 전용 형식들(예: 워드 퍼펙트, 로터스 소프트웨어, MS 웍스, 리치 텍스트 형식)을 읽을 수 있으며, 일부는 쓰기도 가능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형식으로 일부 버전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보다 오히려 더 잘 읽어들인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피스 오픈 XML을 쓰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응하여, 노벨은 오픈오피스를 위한 오피스 오픈 XML을 플러그인을 자유로운 BSD 라이선스 조건으로 내놓았는데(GNU GPL 그리고 LGPL 라이선스 라이브러리들과 병행하여), 이는 OpenOffice.org 프로젝트 안으로 포함되도록 제공될 것이다. 이는 오픈오피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만들어진 .docx 파일을 읽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 개요 === 오픈오피스 API는 유니버설 네트워크 오브젝트(UNO)로 알려진 컴포넌트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CORBA와 같은 인터페이스 서술 언어에서 정의된 광범위한 인터페이스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용되는 문서 파일 형식은 XML 형식과 여러 가지 내보내기/가져오기 필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픈오피스가 읽어들이는 모든 외부 형식들은 내부 XML 표현을 통해 서로 변환된다. XML을 디스크에 저장할 때에는 압축을 사용하여 똑같은 이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문서들보다 더 작다. 버전 1.0에서 문서 저장을 위해 쓰던 고유 파일 형식은 OASIS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 표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는 버전 2.0에서는 기본 파일 형식이 되었다. 제품군 개발 버전은 OpenOffice.org 웹 사이트의 개발자 존에서 몇 주마다 한 번씩 나오고 있다. 이 배포 버전들은 새로운 특징을 테스트해보고 싶거나 단순히 앞으로 있을 변경들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 이들은 실무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 고유 데스크톱 통합 === 오픈오피스 1.0은 운영되는 플랫폼을 위해서 고유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의 룩 앤드 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버전 2.0을 시작하면서, 오픈오피스는 고유 응용 프로그램들과 더 잘 어울리고 사용자들에게 더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플랫폼에 걸쳐 있는 고유 위젯 툴키트, 아이콘, 그리고 폰트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적용했다. 특히 GNOME과 KDE 양쪽과 통합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나 맥 OS X에서 뚜렷한데, 표준 유저 인터페이스가 윈도나 X-11 기반 데스크톱 환경 어느 쪽과는 눈에 보이게 많이 다르며, 대부분 오픈오피스 개발자와는 친숙하지 않은 프로그래밍 툴킷을 쓰라고 요구한다. 오에스 텐에서 오픈오피스를 쓸 수 있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 오픈오피스 Mac OS X (X11) ==== 공식 버전은 X11.app 또는 XDarwin을 설치하여 달라고 요구하며, 잘 테스트된 유닉스 버전에 딱 들어맞는 포팅이다. 이는 기능으로는 유닉스 버전과는 동등하며, 유저 인터페이스는 그 버전의 룩 앤드 필과 닮았다. 예를 들어 응용 프로그램은 화면 상단의 오에스 텐 메뉴 대신에 자체 메뉴를 사용한다. 이는 또한 오픈오피스를 위한 X11 형식의 시스템 글꼴이 필요하다(이는 응용 프로그램 설치 도중에 할 수 있다.). (X11 오픈오피스는 2.X 버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다.) ==== 오픈오피스 아쿠아 ==== 오픈오피스 아쿠아는 X11 오픈오피스를 대체하여 현재에는 정식 버전의 맥용 오픈오피스 지칭한다. 그러므로 오픈오피스 아쿠아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 다른 프로젝트들 ===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프로젝트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오피스와 네오오피스가 있고, 그룹웨어 솔루션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보완 프로그램도 있다. ==== 네오오피스 ==== 이는 독자적인 포팅으로 OS X의 아쿠아 유저 인터페이스를 자바, 카본, 그리고 점점 더 비중이 높아지는 코코아 툴킷을 써서 통합을 구현하였다. 네오오피스는 OS X UI 표준에 꽤 가까우며, OS X에 설치된 글꼴과 프린터들을 직접 사용한다. 이는 공식 오픈오피스 X11 릴리즈보다는 뒤처져서 발표되는데, 개발팀이 규모가 작고 유저 인터페이스를 포팅하는 데에 쓰는 기술 개발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 OpenGroupware.org ==== OpenGroupware.org는 OpenOffice.org 문서, 캘렌더, 주소록,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그리고 블랙 보드를 공유할 수 있고 다른 그룹웨어 응용 프로그램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OOExtras에서는 문서 템플릿과 쓸모 있는 추가물들을 만들고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 외부 프로그램에서 OpenOffice.org 문서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펄 확장기능들을 CPAN에서 구할 수 있다. 이들 라이브러리는 OpenOffice.org API를 쓰지 않는다. 이들은 펄 표준 압축/압축 풀기, XML 접근, 그리고 UTF-8 인코딩 모듈을 이용해서 OpenOffice.org 파일을 직접 읽고 쓴다. ==== 휴대용 프로그램 ==== “휴대용 OpenOffice.org”라고 부르는 OpenOffice.org 배포판은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서 제품군을 돌리고자 설계되었다. ==== OxygenOffice 프로페셔널 ==== OpenOffice.org보다 향상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 칼크에서 응용 프로그램용 비주얼 베이직(VBA)매크로를 돌릴 가능성(테스트용) * 임프레스를 위한 다중 모니터 지원 * 향상된 칼크 HTML 내보내기 * 베이스를 위한 향상된 액세스 지원 * 보안 수정 * 향상된 성능 * 향상된 컬러 팰릿 * 향상된 도움말 메뉴, 추가 사용자 매뉴얼, 그리고 초심자를 위한 확장된 팁들 옵션으로 다음이 제공되며, 개인과 업무용으로 무료로 쓸 수 있다. * 클립아트와 사진으로 이루어진 3,200개가 넘는 그래픽. * 다양한 템플릿과 보기 문서 * 90개가 넘는 공짜 글꼴 * OOoWikipedia와 같은 추가 도구 ==== 확장 기능 ==== 버전 2.0.4부터, OpenOffice.org는 모질라 파이어폭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기능을 지원한다. OpenOffice.org 서지 프로젝트는 강력한 참고 문헌 관리 소프트웨어를 이 제품군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주요 추가물들은 2007년 후반이나 2008년 중반에 나올 표준 OpenOffice.org 릴리즈에 포함되기 위한 후보로 정해져 있으나, 프로그래머들의 선호도에 따라서 더 늦어질 수도 있다. === 보안 === 오픈오피스는 보안 팀을 따로 가동하고 있으며, 보안 사이트인 Secunia는 2007년 9월 현재까지 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패치되지 않은 보안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카스퍼스키 연구소에서는 오픈오피스에 존재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는 오픈오피스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는 없다. 프랑스 국방성의 비공개 회의에서 매크로에 관련된 보안 문제가 제기되었다. 오픈오피스 개발자들은 이 폭로에 가깝게 발표된 취약점이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서 발표되지 않았으며, 국방부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추측되는 취약점에 대해서는 개발자들과 연구원들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 시장 점유율 === 오픈오피스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 미러 사이트, 피어투피어 네트워크, CD, 리눅스 배포판 등 다양한 경로로 배포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픈오피스 측에서는 표본 조사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전체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픈오피스와 스타오피스는 2004년에는 대형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14%를, 중소규모 비즈니스 시장에서는 2005년에 19%를 확보했다. 오픈오피스 웹 사이트는 2009년 10월 28일에 다운로드 수 1억 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오픈오피스를 대규모로 쓰는 사용자는 싱가포르 국방부, 그리고 영국의 브리스톨 시청 등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픈오피스가 소프트웨어 조달을 합리화 시키면서도 안정되고, 기록 보관을 위한 표준 파일 형식을 원하는 지역과 국가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리눅스를 쓰는 인도 대법원과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은 완전히 오픈오피스에 의존하고 있다. 2005년 10월 4일, 선과 구글은 전략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합의 일부로써, 선은 구글 검색 바를 오픈오피스에 추가하고, 선과 구글은 공동 마케팅 활동은 물론 공동 연구 개발을 약속했으며, 구글은 오픈오피스 배포를 도울 것이다. 스타오피스 말고도,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업 제품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SISSL 라이선스로 개발되었다(오픈오피스 2.0 베타 2까지 유효하다.). 대체로 이들은 지역 특화 또는 틈새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음성 인식 모듈, 자동 데이터베이스 연결, 또는 더 나은 CJK 지원과 같은 전용 애드-온이 들어 있다. === 자바 논란 === 예전에 오픈오피스는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바 런타임 환경에 의존성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이 자바 창시자이자 오픈오피스의 선도 후원자라는 사실은 이 기술 채택에 숨은 뜻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버전 1은 몇몇 보조 기능을 위하여 현재 사용자 컴퓨터에 있는 자바 런타임 환경(JRE)에 의존하지만, 버전 2에서는 자바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 제품군은 JRE를 요구한다. 그에 대응하여, 레드햇은 자유 자바 구현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늘렸다. 레드햇의 페도라 코어 4(2005년 6월 13일 출시)는 GCJ와 GNU Classpath에서 동작하는 오픈오피스 버전 2를 포함하고 있다. * 1.1: 문서를 PDF 형식과 SWF 형식으로 출력할 수 있다. * 2.0: 공개 표준안인 OpenDocument 형식을 기본 포맷으로 사용한다. 한글 97의 hwp 형식을 읽을 수 있다. 오픈오피스의 한국어화 작업은 처음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의뢰로 미지리서치가 스타오피스를 한국어화하고 그 결과물을 오픈오피스에 반영하였다. 이후 한국어판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지역화 팀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2008년 4월 배포된 2.4판 이후부터는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어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리눅스, OS X에서 사용할 수 있다. * 빌드 넘버 635: 한글을 입력할 수 있고, 메뉴가 조금 한국어화되었다. 도움말은 아직 영문이다. * 1.0: 대부분의 도움말이 한국어화되었으며 모든 메뉴가 한글이다. * 1.1: 아이콘까지 한국어화되었고, 번역된 문장이 더 자연스럽다. * 2.0: 한/글 3.0 및 97 파일 포맷 지원. 워디안 계열의 신형 파일 포맷은 지원되지 않는다. * 2.1: 한자 키를 눌러서 입력기를 통한 한자 변환이 가능하다. * 2.4.0: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 3.0.0: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도움말의 한국어화가 100% 완료되었다. * 3.1.0: 안티 앨리어싱을 비롯한 몇 가지 기능개선이 이루어졌다. * 3.2.0: 라이터의 OOXML 불러오기 호환성 개선 등의 몇 가지 추가적인 기능 개선이 이루어졌다. * 4.1.2: 오픈 소스 라이선스의 나눔글꼴이나 본고딕, 본명조 등의 한글 사용이 문서 작성 프로그램에서 뿐만아니라 오브젝트 삽입 내부에서도 안정적이다. * 리브레 오피스 * 티맥스오피스 * 오픈오피스 홈페이지 * 한글 오픈오피스 프로젝트 * 오픈오피스 한국어 커뮤니티 * 오픈오피스 문서 프로젝트 * OpenOffice.org Portable — 무설치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분류:2002년 소프트웨어 분류: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자바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크로스 플랫폼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중단된 소프트웨어
오피스 제품군
[ "Introduction", "PC/Mac용 오피스 소프트웨어", "모바일/온라인 오피스 소프트웨어",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n파일:OpenOffice.org Writer.png|섬네일|200px|오픈오피스 라이터(Writer)\n\n'''업무용 응용 소프트웨어 제품군'''()은 워드 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 스프레드시트 등의 응용 소프트웨어의 모음이다.\n",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n* 한컴 오피스\n* 리브레 오피스 (우분투 리눅스 기본 오피스)\n* 오픈오피스\n* 스타 오피스\n* IBM 로터스 심포니\n* 아이워크\n* 폴라리스 오피스\n", "* 씽크프리 오피스\n* 폴라리스 오피스(:en:Polaris Office)\n* 네이버 오피스\n** 네이버 워드\n** 네이버 슬라이드\n** 네이버 셀\n", "* 오픈도큐먼트 소프트웨어\n", "* \n\n\n\n \n분류:개인 정보 관리자\n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
파일:OpenOffice.org Writer.png|섬네일|200px|오픈오피스 라이터(Writer) '''업무용 응용 소프트웨어 제품군'''()은 워드 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 스프레드시트 등의 응용 소프트웨어의 모음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 한컴 오피스 * 리브레 오피스 (우분투 리눅스 기본 오피스) * 오픈오피스 * 스타 오피스 * IBM 로터스 심포니 * 아이워크 * 폴라리스 오피스 * 씽크프리 오피스 * 폴라리스 오피스(:en:Polaris Office) * 네이버 오피스 ** 네이버 워드 ** 네이버 슬라이드 ** 네이버 셀 * 오픈도큐먼트 소프트웨어 * 분류:개인 정보 관리자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리눅스
[ "Introduction", "턱스", "역사", "설계", "개발", "하드웨어 지원", "이용", "시장 점유율과 활용", "저작권, 상표, 이름",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리눅스'''() 운영체제는 1991년 9월 17일 리누스 토르발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운영 체제 커널을 리눅스 커널이라고 하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초기에는 콘솔 터미널 형태로 동작되었다. 그 이후 GNOME/KDE등의 GUI 시스템 및 반도체사 하드웨어 드라이버가 추가되기 시작한것이다. 현재 리눅스 배포판의 커널단에 리눅스 커널이 사용되고 있다.\n\n2023년 1월 Linux에서 Windows 앱을 직접 실행해주는 Wine이 버전 8.0으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호환성과 성능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DLL 계층이 복잡한 윈도우 유틸러티와 게임을 설치 관리해주는 Wine기반의 Bottles가 등장하면서 리눅스에서 윈도우 앱 직접 실행이 매우 편리해 졌다. 리눅스에서 KVM/QEMU Virt-Manager로 윈도우10/11 가상머신 설치도 가능하다. \n\n배포판에는 리눅스 커널과 지원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라이브러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콘솔 유틸중 극히 일부가 GNU 프로젝트에 의해 참여되었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는 GNU 소프트웨어가 일부 사용되었다고 해서 GNU/리눅스라고 주장하고 있다.\n\n저명한 리눅스 배포판에는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가 포함된다. 상용 배포판에는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RHEL), 수세 리눅스 엔터프라이즈 서버가 포함된다. 데스크톱 리눅스 배포판에는 X11이나 웨이랜드 등의 윈도잉 시스템, 그리고 그놈, KDE 플라스마 등의 데스크톱 환경이 포함된다. 서버용 배포판은 그래픽스 기능이 제되어 있거나 LAMP 등의 솔루션 스택이 포함될 수 있다. 리눅스는 자유로이 재배포가 가능하므로 누구든지 어떠한 목적으로든 배포판을 만들 수 있다.\n\n리눅스는 처음에는 인텔 x86 아키텍처에 기반한 개인용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나 그 뒤로 기타 운영 체제 외에 더 많은 플랫폼으로 이식되었다. 스마트폰에 안드로이드(리눅스 기반임)가 우세해지면서 리눅스는 또한 모든 범용 운영 체제 가운데 가장 많은 설치 기반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데스크톱 컴퓨터 중 대략 2.3%만이 리눅스를 사용하지만, 리눅스 커널 기반 크롬 OS를 구동하는 크롬북은 미국 K-12 교육 시장을 지배하며 미국 내 300달러 미만 노트북 컴퓨터 가운데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리눅스는 서버 시장에서 주도적인 운영 체제이며(상위 100만 대 웹 서버 운영 체제 중 96.4% 이상이 리눅스이다), 메인프레임 컴퓨터 등의 기타 빅 아이언 시스템을 주도하며 TOP500 슈퍼컴퓨터에 쓰이는 유일한 운영 체제이다.(2017년 11월 이후로 모든 경쟁자를 점차적으로 제거하였다).\n\n리눅스는 또한 일반적으로 운영 체제가 펌웨어로 빌드되면서 시스템에 높은 수준으로 맞추어진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도 동작한다. 여기에는 라우터, 자동화 컨트롤, 스마트 홈 기술(예: 구글 네스트), 텔레비전(삼성전자, LG전자의 스마트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자동차(예: 테슬라,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현대자동차, 도요타는 모두 리눅스에 의존함),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비디오 게임기, 스마트워치가 포함된다. 팰컨 9와 드래곤 2의 항공 전자기기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버전을 사용한다.\n\n리눅스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협업의 매우 저명한 예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스 코드는 누구든지 GNU GPL 등 개별 라이선스에 따라 상업적으로나 비상업적으로 이용, 수정, 배포가 가능하다.\n", "\n섬네일\n턱스는 리눅스의 공식 마스코트이다. 통통한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96년 래리 유잉이 만들었다.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펭귄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는 리눅스 커널의 작성자 리누스 토르발스에게서 나왔다.\n", "\n\n=== 선구자 ===\n파일:Linus Torvalds (cropped).jpg|섬네일|right|upright|리누스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의 주 개발자이다.\n\n유닉스 운영 체제는 1969년 미국 AT&T의 벨 연구소에서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러스 매클로이, 조 오사나(Joe Ossanna)이 착안하여 구현했다. 1971년 처음 출시한 유닉스는 당시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어셈블리어로 작성하였다. 1973년 데니스 리치가 선구자인 접근으로 일부 하드웨어 및 입출력 루틴을 제외하고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재작성하였다. 유닉스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구현체 이용이 가능하자 다른 컴퓨터 플랫폼으로 이식이 더 쉬워졌다.\n\n유닉스의 컴퓨터 사업 진입을 금지하던 초기 미국의 독점금지법으로 인해 AT&T는 운영 체제의 소스 코드를 모든 요청자에게 라이선스할 필요가 있었다. 1984년, AT&T는 벨 연구소와 분리되어 자유 라이선스를 요구하는 법적 책무를 면제하였고 벨 연구소는 유닉스를 사유 제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사용자는 유닉스 수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1983년 리처드 스톨먼이 시작한 GNU 프로젝트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구성된 \"완전한 유닉스 호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드는 목표를 두었다. 작업은 1984년 시작되었다. 나중에 1985년, 스톨먼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시작하였고 1989년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PL)를 작성하였다. 1990년대 초, 운영 체제에 필요한 프로그램들 다수(예: 라이브러리, 컴파일러, 문서 편집기, 유닉스 셸, 윈도 시스템)가 완성되었으나 장치 드라이버, 데몬, GNU/허드라는 이름의 커널 등 저급(low-level) 요소들이 정체되거나 완성되지 못하였다.\n\n리누스 토르발스는 1991년 당시 GNU 커널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자기 스스로 개발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법적 문제로 인해 1992년까지 출시되지 못했음에도 NetBSD, OpenBSD, FreeBSD의 기원이 된 386BSD의 개발이 리눅스의 개발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또, 토르발스는 386BSD가 당시 이용 가능했더라면 아마 리눅스를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언급하였다.\n\n미닉스는 컴퓨터 과학 교수 앤드루 타넨바움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운영 체제의 원리를 학습하고자 한 학생들과 다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소형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로서 1987년 출시되었다. 미닉스의 소스 코드 전체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음에도 라이선스 조항으로 인해 2000년 4월 라이선스 변경이 될 때까지 자유 소프트웨어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n\n=== 개발 ===\n1991년, 헬싱키 대학교의 재학생이었던 토르발스는 운영 체제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교육용으로만 국한되었던 미닉스 라이선스에 실망한 토르발스는 궁극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되었던 자신만의 운영 체제 커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n\n토르발스는 미닉스에서 리눅스 커널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미닉스용으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 또한 리눅스에서 사용되었다. 나중에 리눅스는 성숙하여 더 나아가 리눅스 커널 개발이 리눅스 시스템에서 이루어졌다. GNU의 응용 프로그램들 또한 모든 미닉스 구성 요소를 대체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숙한 운영 체제에 GNU 프로젝트에 자유로이 이용 가능한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GNU GPL로 라이선스된 코드는 동일하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로 출시하는 한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재사용이 가능하였다. 토르발스는 상용 재배포를 금지하였던 자신의 오리지널 라이선스로부터 GNU GPL로의 전환을 시작하였다. 개발자들은 GNU 구성 요소들을 리눅스 커널로 통합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온전히 기능하는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n\n=== 명칭 ===\n파일:Linux 0 12.jpg|섬네일|초창기 리눅스 버전을 담고 있는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n\n리누스 토르발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Freax'''로 호칭하길 원했는데 이는 free, freak, x(Unix의 암시)의 혼성어였다. 그가 시스템에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동안 프로젝트의 makefile 중 일부에 약 6개월 동안 Freax라는 이름이 포함되었다. 토르발스는 이미 이 이름을 \"리눅스\"(Linux)로 고려하였으나 처음에는 이 이름이 너무 독선적인 단어로 일축하였었다.\n\n개발을 용이케 하기 위해 파일은 1991년 9월 FUNET의 FTP 서버(ftp.funet.fi) 에 업로드되었다. 헬싱키 공과 대학교(Helsinki University of Technology, HUT)의 토르발스의 동업자 아리 렘케(Ari Lemmke)는 당시 자발적인 FTP 서버 관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Freax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토르발스와 상의 없이 서버상에서 Linux로 명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토르발스는 리눅스의 명칭 사용에 동의하였다.\n\n토르발스가 쓴 뉴스그룹 게시물에 따르면, \"Linux\"라는 용어는 ( -리눅스-로 발음하는 것이 좋겠다고 언급되었다. 어떻게 리눅스가 발음되는 것이 좋을지를 추가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커널 소스 코드에 오디오 가이드()를 포함하였다.\n\n=== 상업적, 대중적 활용 ===\n\n파일:Desktop Ubuntu 20.04.png|섬네일|right|대중적인 리눅스 배포판의 하나인 우분투\n파일:Nexus 5X (White).jpg|섬네일|안드로이드를 구동 중인 넥서스 5X\n\n호비스트들만 사용하지 않고 1990년대 중반, 운영 환경에 리눅스를 채택하는 일이 슈퍼컴퓨팅 커뮤니티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NASA(미국 항공 우주국) 등의 단체들이 점차 운영체계에 비용이 드는 기계들에 리눅스로 구동하는 저렴한 일상 컴퓨터 클러스터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델과 IBM, 이후 휴렛 팩커드가 데스크톱 운영 체제를 독점하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자유를 얻고자, 리눅스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n\n오늘날 리눅스 시스템을 임베디드 시스템에서 사실상 개인용 컴퓨터에서 모든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컴퓨팅 전반에 사용한다. 대중적인 LAMP 애플리케이션 스택 등 서버 설치본에도 적용하며 중요한 운영체계로 자리잡았다. 가정과 기업 내 리눅스 이용은 지속적으로 증가추세다. 리눅스 배포판은 넷북 시장에서 대중화하며, 수많은 장치들에 알맞게 변형한 리눅스 배포판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구글은 리눅스를 넷북용으로 설계하여 운영체계를 별도로 구축하며 크롬 OS를 출시하였다.\n\n개인 소비자 시장에서 리눅스의 가장 위대한 성공은 모바일 장치 시장이다.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가장 지배적인 운영 체제들 가운데 하나다. 태블릿과 최근 웨어러블에서도 기본 운영체계로 사용한다. 리눅스 게이밍은 리눅스 지지를 표방하고 자체 게이밍 지향 리눅스 배포판인 스팀OS를 출시한 밸브의 성장과 더불어 발전하는 중이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또한 다양한 지역, 그리고 대규모 행정조직을 지닌 정부들도 운영체계 비용을 절약하는 차원에서 호의적이다. 브라질 연방 정부 등 유럽국가 정부들과 인도의 법무부에서도 인기다.\n\n=== 현재의 개발 ===\n파일:In flight system Linux bootup.jpg|right|섬네일|리눅스 로고를 표시하면서 부팅을 하고 있는 기내 오락 시스템\n그레그 크로하트맨(Greg Kroah-Hartman)은 리눅스 커널의 주도적인 유지보수자로서 개발을 가이드하고 있다. 윌리엄 존 설리반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이사로서 GNU 구성 요소들을 지원하고 있다. 개인과 기업들은 GNU가 아닌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을 개발한다. 이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은 커널 모듈과 사용자 애플리케이션, 라이브러리를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n\n리눅스 벤더들과 커뮤니티들은 커널, GNU 구성 요소, GNU가 아닌 구성 요소를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형태로 추가적인 패키지 관리자와 결합하여 배포한다.\n", "수많은 오픈 소스 개발자들은 리눅스 커널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된 것임에 동의한다. 토르발스는\n유닉스의 설계가 발판 역할을 하였음에도 리눅스는 수많은 돌연변이와 함께 성장했으며 돌연변이는 무작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DNA의 알파 입자보다 더 빠르고 더 자발적인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n레이먼드는 리눅스의 혁명적인 면모를 기술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 리눅스 이전에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소규모 단체들에 의해 주의깊게 설계되었으나 리눅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거의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해서만 조직화되는 상당한 수의 자발적 이용자들에 의해 무심코 해킹되었다. 품질은 엄격한 기준이나 독재적으로 관리되지 않았고 수일 동안 사용자 수백 명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매주 릴리스하는 단순한 전략을 취함으로써 개발자들이 도입한 돌연변이의 빠른 다윈 선별 정렬 방식을 만들어냈다. 리눅스 기반 시스템은 모듈 방식의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며 1970년대와 1980년대 중 유닉스 안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기초적 설계 대부분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스템은 프로세스 제어, 네트워킹, 주변기기 접근, 파일 시스템을 관리하는 모놀리식 커널을 사용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커널에 직접 통합되어 있거나 시스템 실행 중에 로드되는 모듈로 추가된다.\n\nGNU 유저랜드는 리눅스 커널에 기반한 대부분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안드로이드가 바로 주목할만한 예외이다.\n프로젝트의 C 라이브러리의 구현체는 커널 사용자 공간 인터페이스에 필수적인 리눅스 커널의 시스템 호출의 래퍼로서 동작하며 툴체인은 리눅스 커널을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컴파일러 모음집이며 코어유틸리티는 수많은 기초적 유닉스 도구들을 구현한다. 이 프로젝트는 또한 저명한 CLI 셸인 Bash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리눅스 시스템에 쓰이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는 X 윈도 시스템 구현체 위에 빌드된다. 근래에 리눅스 커뮤니티는 X 윈도 시스템 대신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서 웨이랜드 사용을 추구한다. 수많은 기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리눅스 시스템에 기여한다.\n\n\n설치되는 리눅스 시스템 구성 요소는 다음이 포함된다:\n* 부트로더(예: GNU GRUB, LILO, SYSLINUX, Gummiboot): 리눅스 커널을 컴퓨터의 주 메모리로 로드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켜진 다음 펌웨어 초기화가 수행된 이후 실행된다.\n* init 프로그램(예: 전통적인 sysvinit과 더 새로운 systemd, OpenRC, Upstart): 리눅스 커널에 의해 시작되는 최초의 프로세스이며 프로세스 트리의 루트에 위치해 있다. 즉, 모든 프로세스는 init을 통해 실행된다. 시스템 서비스와 로그인 프롬프트(그래픽 또는 터미널 모드) 등의 프로세스를 시작한다.\n*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 실행 중인 프로세스가 사용할 수 있는 코드를 포함한다. ELF 포맷 실행 파일을 사용하는 리눅스 시스템에서 동적 라이브러리 이용을 관리하는 동적 링커의 이름은 ld-linux.so이다. 사용자들이 직접 소프트웨어를 컴파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성되어 있다면 헤더 파일 또한 설치된 라이브러리의 인터페이스를 기술하기 위해 포함된다. 리눅스 시스템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 GNU C 라이브러리(glibc) 외에 SDL, 메사 등 그 밖의 수많은 라이브러리들이 존재한다.\n** C 표준 라이브러리는 컴퓨터 시스템에서 C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라이브러리이며, 표준이 되는 GNU C 라이브러리라 할 수 있다.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musl, EGLIBC(데비안에 사용되는 glibc 포크), uClibc(uClinux용으로 설계됨) 등 다른 대안들이 개발되었으나 마지막 2개는 더 이상 유지보수되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Bionic이라는 자체 C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n* 표준 구현체가 되는 GNU 코어 유틸리티를 포함한 기초적인 유닉스 명령어.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카피레프트 비지박스, BSD 라이선스의 토이박스 등 다른 대안들이 존재한다.\n* 위젯 툴킷은 응용 소프트웨어용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라이브러리이다. 수많은 위젯 툴킷을 사용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GTK, 그놈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된 클러터, Qt 프로젝트가 개발하고 Digia가 주도하는 Qt, 인라이튼먼트 팀이 주로 개발하는 인라이튼먼트 파운데이션 라이브러리(EFL)가 포함된다.\n* dpkg, RPM 등 패키지 관리 시스템. 다른 패키지들은 바이너리나 소스 형태의 Tarball로부터 컴파일이 가능하다.\n* 명령 셸이나 윈도 환경 등의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n\n=== 사용자 인터페이스 ===\n셸로 알려진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또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일반적인 관련 하드웨어에 부착된 컨트롤일 수 있다. 데스크톱 시스템의 경우 기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그래픽이지만 터미널 에뮬레이터 창이나 별도의 가상 콘솔을 통해 CLI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n\nCLI 셸은 텍스트 기반 사용자 인터페이스이며 입출력을 위해 모두 텍스트를 사용한다. 리눅스에 사용되는 저명한 셸은 Bash(본 어겐 셸)이며 본래 GNU 프로젝트용으로 개발되었다. 유저랜드의 다양한 부분을 포함하는 가장 낮은 단계의 리눅스 구성 요소들은 예외적으로 CLI를 사용한다. CLI는 특히 반복적이거나 지연되는 작업의 자동화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매우 단순한 프로세스 간 통신을 제공한다.\n\n데스크톱 시스템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GUI 셸이며 KDE 플라스마, 그놈, 메이트, 시나몬, LXDE, Pantheon, Xfce 등 확장 데스크톱 환경과 함께 패키징되지만 다양한 추가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이른바 X로 불리는 X 윈도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 네트워크 투명성을 제공하며 특정 시스템에서 실행 중인 그래픽 애플리케이션이 다른 시스템에서 표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용자가 애플리케이션과 통신할 수 있다. 그러나 X 윈도 시스템의 특정 확장 기능들은 네트워크를 경유하여 동작하지 못한다. 참고 구현체를 포함(가장 대중적인 것이 X.Org 서버)하여 일부 X 디스플레이 서버들이 존재한다.\n\n서버 배포판은 개발자와 관리자들을 위해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으나 시스템의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최종 사용자를 위한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는 다른 시스템에 상주하는 클라이언트를 통해 접근되며 꼭 리눅스 기반일 필요는 없다.\n\n일부 유형의 창 관리자는 X11용으로 존재하며, 틸팅, 동적, 스택, 컴포지트 방식이 포함된다. 창 관리자는 개별 애플리케이션 창의 위치와 모습을 제어하는 수단을 제공하며 X 윈도 시스템과 통신한다. 더 단순한 X 윈도 관리자, 이를테면 dwm, ratpoison, i3wm, herbstluftwm과 같은 것들은 미니멀리스트적 기능을 제공하지만 FVMM, 인라이튼먼트, 윈도 메이커 등의 더 세련된 창 관리자들은 내장 작업 표시줄, 테마와 같은 더 많은 기능들을 제공하지만 데스크톱 환경들과 비교할 때 여전히 가벼운 편에 속한다. 데스크톱 환경에는 자체 표준 설치본의 일부로서 Mutter(그놈), KWin(KDE), Kfwm(kfce) 등의 창 관리자를 포함하지만 사용자는 원하는 경우 각기 다른 창 관리자를 골라서 쓸 수 있다.\n\n웨이랜드는 X11 프로토콜을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된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다. 2014년 기준으로, 폭넓게 채택되지는 못한 상황이다. X11과 달리 웨이랜드는 외부 창 관리자와 컴포지트 관리자가 필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웨이랜드 컴포지터는 디스플레이 서버, 창 관리자, 컴포지트 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웨스턴(Weston)은 웨이랜드의 참조 구현체이지만 그놈의 Mutter와 KDE의 KWin이 독립적인 디스플레이 서버 형태로 웨이랜드에 포팅되고 있다. 인라이튼먼트는 이미 버전 19부터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n\n=== 비디오 입력 기반 구조 ===\n\n\n리눅스는 현재 비디오 입력 장치를 관리하기 위한 2개의 현대적 커널 유저스페이스 API를 갖추고 있다: 비디오 스트림과 라디오를 위한 V4L2 API, 디지털 TV 수신을 위한 DVB API.\n\n장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이유로, 또 해당 API가 관리하는 수많은 포맷과 표준들로 인해 이 기반 구조는 다른 장치들과 더 잘 호환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다. 또, 양호한 유저스페이스 장치 라이브러리는 유저스페이스 애플리케이션들이 해당 장치들에 의해 지원되는 모든 포맷과 성공적으로 동작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n\n=== 멀티 부팅 ===\n\n리눅스는 부팅 수준에서 GRUB 등을 통해 여러 OS로 부팅하는 것을 지원한다.\n\n또한 리눅스는 GRUB를 통해 콘솔모드 부팅뿐만 아니라 콘솔 모드에서 X 윈도 시스템 환경인 GUI 모드와 상호 변환을 완벽히 지원한다.\n\n=== 이식성 ===\n\n리눅스 커널은 원래 IA-32 아키텍처의 Intel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광범위한 아키텍처에 포팅된 운영 체제 중 하나이며, 포팅뿐 아니라 이러한 장치를 위한 배포판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HP 아이팩과 같은 PDA에서부터 메인프레임 최신 장비인 IBM zEnterprise Syste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에서 이용된다.\n", "파일:Unix timeline.en.svg|섬네일|upright=2.25|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의 역사를 단순하게 보여준 그림. 리눅스는 POSIX 표준의 일부로서 유사한 아키텍처와 개념을 공유하지만 오리지널 유닉스나 MINIX와 비자유 소스 코드를 공유하지는 않는다.\n\n\n리눅스와 기타 수많은 대중적인 당대 운영 체제들과의 주된 차이점은 리눅스 커널과 기타 구성 요소들이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점이다. 리눅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일한 운영 체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운영 체제이다. 일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는 카피레프트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카피레프트로 된 소프트웨어에서 파생된 작품은 그 자체가 카피레프트여야 한다는 논지이다. 가장 일반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인 GNU GPL은 카피레프트의 일종이며 리눅스 커널과 GNU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에 사용되고 있다.\n\n리눅스 기반 배포판들은 개발자들이 다른 운영 체제 및 기반 컴퓨팅 표준들과의 상호 운용성을 위해 고안되었다. 리눅스 시스템은 POSIX, SUS, LSB, ISO, ANSI 표준을 가능한 준수하지만, 오늘날까지 오직 하나의 리눅스 배포판인 Linux-FT만이 POSIX.1 인증을 받았다.\n\n협업을 통해 개발된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개발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가 명시적으로 재배포를 허가한다는 사실은 그러나 독립적인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되는 소프트웨어를 대형 프로젝트들이 수집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며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리눅스 배포판 형태로 이용될 수 있게 한다.\n\n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은 네트워크 연결을 경유하여 다운로드와 설치를 통해 원격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응용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수집하고 관리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들은 저만의 필요에 따라 운영 체제에 순응해나간다. 배포판들은 개인, 유동적인 팀, 자발적인 단체, 상업 단체들에 의해 유지보수된다. 배포판은 설치된 리눅스 커널의 기본 구성, 일반 시스템 보안,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을 하나의 일관된 패키지로 통합하는 일을 떠맡는다. 배포판은 일반적으로 apt, yum, zypper, 팩맨, portage 등의 패키지 관리자를 사용하여 특정 지점으로부터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설치, 제거,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n", "리눅스는 다양한 유형의 하드웨어 어디서든 볼 수 있다.\n\n\n리눅스 커널은 널리 이식된 운영 체제 커널로서, 휴대 전화에서부터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치에서 이용이 가능하다.\n매우 다양한 범위의 컴퓨터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는데, 여기에는 휴대용 ARM 기반 iPAQ와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 z9이나 시스템 z10이 포함된다. 주류에서 조금 벗어난 아키텍처를 위한 특수한 배포판과 커널 포크(fork)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ELKS 커널 포크는 인텔 8086이나 인텔 80286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동작하는 반면 µClinux 커널 포크는 메모리 관리 장치(MPU)가 없는 시스템에서 동작할 수 있다. 커널은 또한 매킨토시 컴퓨터(파워PC와 인텔 프로세서 모두), PDA, 비디오 게임기,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휴대 전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제조사가 만든 운영 체제의 이용을 염두에 둔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기도 한다.\n\n프리덤HEC와 같이 리눅스 하에서 다양한 하드웨어의 지원을 유지보수하고 개선하는 일을 맡은 여러 산업 협회들과 하드웨어 콘퍼런스가 존재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눅스에서 각기 다른 하드웨어의 지원이 개선되었으며 호환성 개선이 이루어졌다.\n\n2014년, 테스트된 모든 하드웨어 구성 데이터베이스를 자동으로 수집하기 위한 새로운 이니셔티브가 시작되었다.\n", "\n데스크톱과 서버에 쓰이는 범용 목적으로 설계된 리눅스 배포판 외에도 각기 다른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한 특수 제작된 배포판도 존재한다: 컴퓨터 아키텍처 지원, 임베디드 시스템, 안정성, 보안, 특정 지역이나 언어로의 지역화, 특정 사용자 그룹 타게팅, 실시간 애플리케이션 지원, 주어진 데스크톱 환경에 대한 기여. 게다가 일부 배포판은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2015년 기준으로 400개가 넘는 리눅스 배포판들이 현재 개발되고 있으며 그 중 약 12개 정도의 배포판이 범용 목적으로 대중화되어 쓰이고 있다. 한국형 리눅스 배포판 가운데에는 하모니카 등이 포함된다.\n\n=== 데스크톱 ===\n파일:Free and open-source-software display servers and UI toolkits.svg|섬네일|upright=2.25|리눅스 데스크톱 스택에 보이는 소프트웨어 구성 요소에는 디스플레이 서버, 위젯 엔진, 또 널리 쓰이는 위젯 툴킷 중 일부가 포함된다. D-Bus, 펄스오디오처럼 최종 사용자에게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구성 요소도 존재한다.\n\n\n표준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에서 리눅스의 인기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들은 그래픽 사용자 환경을 포함하며, 2015년 기준으로 가장 대중적인 환경으로는 KDE 플라스마 데스크톱과 Xfce, 이렇게 2가지가 있다.\n\n단독의 공식 리눅스 데스크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스크톱 환경과 리눅스 배포판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풀에서 구성 요소를 선택하며 어느 정도는 유연한 디자인 가이드를 구현하는 GUI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그놈은 인간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을 디자인 가이드로 삼고 있어서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를 중요한 역할로 제공하는데, 단순히 그래픽 디자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며 보안에도 초점을 둔다.\n\n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의 '협업'이라는 특징 덕분에 여러 곳에 분산된 팀들이, 사유 시스템의 지역화가 비용 효율적이지 않은 일부 리눅스 배포판의 언어 지역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 예로 싱할라어 버전의 Knoppix 배포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XP를 싱할라어로 번역하기 전까지 중요한 수준으로 취급되며 이용되었다. 이 건과 관련하여 랑카 리눅스 유저 그룹이 대학교 교수, 언어학자, 지역 개발자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져 지역화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n\n==== 성능과 애플리케이션 ====\n데스크톱에서 리눅스 성능은 논란의 주제로 되고 있다.\n예를 들어 2007년 콘 콜리바스는 서버 위주로만 성능을 우선시한다는 이유로 리눅스 커뮤니티를 고소하였다. 그는 데스크톱에 초점을 아예 두지 않는 것에 실망감이 들어 리눅스 커널 개발을 그만두었으며 이 주제에 관한 진실을 모두 폭로하는 인터뷰를 했다. 그 뒤로 데스크톱 경험 개선에 초점을 둔 상당한 개발이 진척되었다. systemd와 Upstart(2014년 구식화됨)과 같은 프로젝트들은 더 빠른 부팅 시간에 초점을 둔다. 웨이랜드(Wayland)와 미르(Mir) 프로젝트는 X11을 대체하는 대신 데스크톱 성능, 보안, 화면 표시 부분을 개선한다.\n\n수많은 대중적인 애플리케이션들이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이용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모질라 파이어폭스, OpenOffice.org/리브레오피스, 블렌더는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한 버전이다. 게다가 예를 들어 피진과 GIMP과 같이 일부 애플리케이션은 처음부터 리눅스용으로 개발되었는데, 이것들은 인기의 상승으로 인해 윈도우, macOS 등 다른 운영 체제들에도 이식되었다. 또, 상당한 수의 사유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 또한 리눅스에서 지원되는데, 이를테면 하이엔드 애니메이션 및 시각 효과 분야의 오토데스크 마야, 더 파운드리스 누크가 있다. 상세 내용은 리눅스용 사유 소프트웨어 목록(en)을 참고할 것. 자신들만의 또는 다른 기업들의 게임을 리눅스로 이식하는 여러 기업들 또한 존재하며, 리눅스는 저명한 스팀과 Desura 디지털 배급 서비스의 지원 플랫폼이 되었다.\n\n그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macOS용으로 이용 가능한 수많은 유형의 애플리케이션들이 리눅스에서도 실행된다. 공통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은 다른 운영 체제에서 보이는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해당 애플리케이션이 리눅스에서 동작하는 버전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예: 스카이프, 그리고 도타 2와 팀 포트리스 2 등의 일부 비디오 게임) 게다가 와인 프로젝트는 수정되지 않은 기존 윈도우 애플리케이션들을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윈도우 호환성 계층을 제공한다. 와인의 상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코드위버스를 포함한 상업체들에 의해 후원을 받는다. 2009년 이후로 구굴은 와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오픈 소스 와인 프로젝트에 기반한 사유 솔루션 크로스오버(CrossOver)는 윈도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Intuit 애플리케이션(예: Quicken, 퀵북스), 어도비 포토샵 버전들(CS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수많은 대중적인 게임들의 실행을 지원한다.\n탁상출판, 프로페셔널 오디오와 같은 부문에서 일부 소프트웨어의 리눅스 포팅판이 없는 경우에서도 리눅스에서 이용 가능한 동등한 수준의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또, 안드로이드용으로 개발된 애플리케이션은 Anbox를 사용하는 다른 리눅스 버전에서 실행이 가능하다.\n\n==== 구성 요소와 설치 ====\nX 윈도 시스템과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구성 요소들 외에 D-Bus나 펄스오디오와 같은 freedesktop.org가 호스팅하는 프로그램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2개의 주요 데스크톱 환경들인 그놈과 KDE는 이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각기 그에 상응하는 툴킷(GTK나 Qt)을 사용하여 개발된 그래피컬 프론트엔드를 제공한다. 디스플레이 서버는 오랜 기간 X11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 클라이언트와의 통신을 맡은 또다른 구성 요소이다. X11 통신을 하는 저명한 소프트웨어로는 X.Org 서버와 Xlib이 있다. 번거로운 X11 코어 프로토콜에 대한 실망, 특히 수많은 확장 기능으로 인해 웨이랜드라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 탄생하게 되었다.\n\n리눅스에서 소프트웨어를 설치, 업데이트, 제거하는 일은 시냅틱 패키지 매니저, 패키지킷, Yum 익스텐더와 같은 패키지 관리자를 이용하여 수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주요 리눅스 배포판들은 광활한 저장소를 갖추고 있고 수천 수만의 패키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공식 저장소로부터 받아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자는 비공식 저장소로부터 패키지를 설치하거나 웹사이트로부터 직접 미리 컴파일된 패키지를 다운로드하거나 직접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여 쓸 수 있다. 이 모든 방식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수준의 난이도가 있다.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규 리눅스 사용자들에게는 도전 과제로 간주될 수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에서는 꼭 필수적으로 간주되지는 않으며 리눅스에 특화된 방식 또한 아니다.\n\n\n파일:GNOME 3.32.1.png|GNOME\n파일:KDE Plasma 5.16.png|KDE 플라스마\n파일:Cinnamon 4.2.3 screenshot.png|시나몬\n파일:Ubuntu Mate 18.04.1 with MATE 1.20.1.png|Mate\n파일:VirtualBox Elementary OS 5.1.7 21 03 2021 21 17 03.png|Pantheon\n파일:Budgie Desktop Environment.png|Budgie\n파일:XFCE-4.12-Desktop-standard.png|Xfce\n파일:Ubuntu 16.04 Desktop.png|Unity (우분투 20.04를 기점으로 중단)\n파일:Lubuntu 13.04 English.png|LXDE\n파일:LXQt 0.10 - Ambiance.png|LXQt\n파일:I3-gaps-wiki.png|i3-gaps\n파일:E17 bw screenshot.png|Enlightenment\n파일:Fluxbox.png|Fluxbox\n파일:Sugar-home-view-0.82.jpg|Sugar\n파일:Screenshot of Trinity Desktop Environment (TDE) R14.0.5 Development.png|Trinity\n\n\n=== 넷북 ===\n리눅스 배포판들은 넷북 시장에서도 대중화되었으며 여기에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설치된 Asus Eee PC, Acer Aspire One이 포함된다.\n\n2009년, 구글은 미니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로서 크롬 OS를 발표하였으며 이 운영 체제는 주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크롬 브라우저를 사용한다. 크롬 OS는 처음에 기 포함된 파일 관리자와 미디어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웹 기반이 아닌 애플리케이션은 아예 실행하지 못했다.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특정 수준의 지원이 이후 버전에 추가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구글은 컨테이너 안에서 리눅스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으며 크롬 OS가 다른 모든 리눅스 배포판처럼 사용될 수 있게 하였다. 이 운영 체제를 사용하는 넷북은 크롬북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2011년 6월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n\n=== 서버, 메인프레임, 슈퍼컴퓨터 ===\n파일:LAMP software bundle.svg|섬네일|upright=2.25|Squid와 함께 표시되는 LAMP 소프트웨어 번들의 개요. 고성능/고가용성 웹 서버 솔루션은 적대적 환경에서 보안을 제공한다.\n\n리눅스 배포판은 서버 운영 체제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으며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저명도가 있다. 넷크래프트는 2006년 9월 가장 신뢰성 높은 인터넷 호스팅 기업 10곳 중 8곳이 해당 기업들의 웹 서버에 리눅스 배포판을 구동하였다고 보고함으로써 리눅스를 최상위로 두었다. 2008년 6월,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5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2개를 차지했다. 2010년 2월 이후로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6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1개를 차지하여 리눅스가 최상위를 유지했다.\n\n리눅스 배포판들은 개발자들 간 대중성을 달성하고 웹사이트 호스팅의 일반적인 플랫폼 가운데 하나가 된 LAMP 서버 소프트웨어 결합(리눅스, 아파치, 마리아DB/MySQL, 펄/PHP/파이썬)의 초석이다.\n\n리눅스 배포판들은 메인프레임에서 대중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저렴한 가격과 오픈 소스 모델 때문이다. 2009년 12월, 거대 컴퓨터 기업 IBM은 자사가 주로 메인프레임 기반 엔터프라이즈 리눅스 서버의 마케팅과 판매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리눅스콘 노스아메리카 2015에서 IBM은 리눅스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실행을 위해 설계된 메인프레임 시리즈 리눅스원을 발표했다.\n\n리눅스 배포판들은 슈퍼컴퓨터용 운영 체제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500 목록에 오른 모든 슈퍼컴퓨터들은 일부 유형의 리눅스를 구동한다.\n\n=== 스마트 장치 ===\n안드로이드 스마트폰\n파일:Tesla Model S digital panels.jpg|섬네일|upright=0.7|테슬라 모델 S의 자동차 내 오락물 시스템은 우분투에 기반을 둔다.\n\n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가정 자동화(예: 구글 네스트) 등의 스마트 장치, 스마트TV(삼성전자와 LG 스마트 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시스템(예: 오토모티브 그레이드 리눅스)에 쓰이는 일부 운영 체제들은 리눅스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시스템을 위한 주된 플랫폼으로는 안드로이드, 파이어폭스 OS, Mer, 타이젠이 포함된다.\n\n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모바일 운영 체제가 되었는데,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에 판매된 기기 중 79.3%가 이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안드로이드 스마트 TV와 차량용 인토테인먼트 시스템 또한 시장에 등장하였다.\n\n안드로이드가 수정된 버전의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용어가 안드로이드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는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리눅스 재단, 구글의 오픈 소스 관련 주요 인물 크리스 디보나, 여러 기자들에 따르면 안드로이드는 리눅스 배포판이다. 구글 엔지니어 패트릭 브래디와 같은 기타 인물들은 안드로이드가 전통적인 유닉스 계열 리눅스 배포판 측면의 리눅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드로이드는 GNU C 라이브러리를 포함하지 않으며(대체 C 라이브러리로 바이오닉을 사용) 리눅스 배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타 구성 요소 중 일부 또한 사용하지 않는다. 아스테크니카는 \"안드로이드가 리눅스 커널 위에 빌드되긴 하지만 이 플랫폼은 전통적인 데스크톱 리눅스 스택과 공통성이 거의 없다\"고 썼다.\n\n오픈 소스 플랫폼 위에서 리눅스를 구동하는 전화와 PDA들은 2007년부터 일상화되었다. 그 예로 노키아 N810, 오픈모코의 Neo1973, 모토로라 ROKR E8을 들 수 있다. 추세에 힘입어 팜(나중에 HP가 인수)은 새로운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 webOS를 제작하여 Palm Pre 스마트폰 계열에 도입되었다.\n\n최초의 모바일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인 노키아의 마에모는 데비안 기반이었다. 나중에 또다른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인 인텔의 모블린과 병합되어 MeeGo가 탄생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모바일 장치를 대상으로 하는 운영 체제인 타이젠을 선호하게 되면서 종료되었다. 타이젠은 리눅스 재단 내의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일부 삼성전자 제품들은 이미 타이젠을 구동하고 있는데 가장 저명한 예가 삼성 기어 2이다. 삼성 Z 스마트폰은 안드로이드 대신 타이젠을 사용한다.\n\nMeeGo의 종료에 따라 Mer 프로젝트는 모바일 지향 운영 체제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Meego 코드베이스를 포크하였다. 2012년 7월, Jolla는 Mer 기술에 기반을 둔 자신들만의 운영 체제인 세일피시 OS를 발표했다.\n\n파일:Pine-pinephone.jpg|섬네일|upright=0.5|포스트마켓OS 위에 플라스마 모바일을 구동 중인 파인폰.\n\n모질라의 파이어폭스 OS는 리눅스 커널,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 웹 표준 기반 런타임 환경, 사용자 인터페이스, 통합 웹 브라우저로 구성되어 있다.\n\n캐노니컬은 이 모바일 운영 체제와 데스크톱 상응 운영 체제 우분투에서 사용자 경험을 컨버전스(집중)하기 위해 우분투 터치를 출시하였다. 또, 이 운영 체제는 외부 모니터와 연결될 때 온전한 우분투 데스크톱을 제공한다.\n\nLibrem 5는 Purism이 개발한 스마트폰의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회사가 만든 리눅스 기반 PureOS를 사용하지만 다른 리눅스 배포판도 구동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분투 터치처럼 PureOS는 컨버전스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으므로 데스크톱 프로그램들이 스마트폰에서 실행될 수 있다. 한 예로 데스크톱 버전의 모질라 파이어폭스를 들 수 있다.\n\n또다른 스마트폰은 컴퓨터 제조업체 파인64가 제조한 파인폰이다. 파인폰은 우분투 터치, 포스트마켓OS와 같은 다양한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할 수 있다.\n\n=== 임베디드 장치 ===\n\n\n파일:Linksys-Wireless-G-Router.jpg|섬네일|270px|리눅스 커널을 구동 중인 라우터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다.\n\n낮은 비용과 커스터마이즈의 용이성 덕분에 리눅스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자주 사용된다. 모바일이 아닌 통신 장비 부문에서 고객 댁내 장치(CPE) 하드웨어 대부분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OpenWrt는 OEM 펌웨어 릴리스 다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운영하는 한 예시이다.\n\n예를 들어 대중적인 TiVo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또한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스코/링크시스 등 제조사들의 여러 네트워크 방화벽과 라우터들 또한 그러하다. Korg OASYS, Korg KRONOS, 야마하 모티프 XS/모티프 XF 뮤직 워크스테이션, 야마하 S90XS/S70XS, 야마하 MOX6/MOX8 신시사이저, 야마하 모티프-랙 XS 톤 제네레이터 모듈, 롤랜드 RD-700GX 디지털 피아노 또한 리눅스를 구동한다. 또, 리눅스는 WholeHogIII 콘솔 등 무대 조명 제어 시스템에도 사용된다.\n\n=== 게이밍 ===\n\n\n과거에 즐길 수 있는 리눅스용 게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근래 수년 간 AAA 타이틀 게임 일부를 제외한 더 많은 게임들이 리눅스 지원과 함께(특히 인디 게임) 출시되었다. 리눅스 커널을 사용하는 대중적인 모바일 플랫폼 안드로이드는 많은 개발자 관심을 받았으며 아이폰과 아이패드 장치용 애플 iOS 운영 체제와 더불어 모바일 게임 개발을 위한 주된 플랫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n\n2013년 2월 14일 밸브는 PC의 대중적인 게임 배포 플랫폼 스팀의 리눅스 버전을 출시하였다. 수많은 스팀 게임들이 리눅스로 이식되었다. 2013년 12월 13일, 밸브는 베타 테스팅을 위해 데비안 기반의 게이밍 지향 운영 체제인 스팀OS를 출시하였으며 게이밍 및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스팀 머신을 채용할 예정이다. 또, 밸브는 비디오 게임 개발에 도움을 주도록 고안된 OpenGL 디버거 VOGL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소스 게임 엔진이 데스크톱 리눅스로 포팅되었다. 밸브의 노력에 의해 도타 2, 팀 포트리스 2, 포탈, 포탈 2, 레프트 4 데드 2와 같은 일부 저명한 게임들이 데스크톱 리눅스에서 네이티브로 지원된다.\n\n2013년 7월 31일, 엔비디아는 특수 게이밍 플랫픔으로서 안드로이드를 사용할 목적으로 실드를 출시하였다.\n\n일부 리눅스 사용자들은 와인이나 크로스오버 리눅스를 통해 윈도우 게임을 즐길 수 있다.\n\n2018년 8월 22일, 밸브는 게이밍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톤(Proton)이라는 이름의 자체 와인을 출시하였다. 순수 와인에 일부 개선이 추가되었는데, 예를 들면 벌칸 기반 DirectX 11/12 구현체, 스팀 연동, 더 나은 전체 화면 및 게임 컨트롤러 지원, 멀티스레드 지원 게임의 개선된 성능을 들 수 있다.\n\n=== 특수 용도 ===\n리눅스의 유연성, 커스터마이즈 기능, 자유-오픈 소스의 특징 덕분에 특수 목적을 위해 상당한 튜닝을 거친 리눅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수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기 위해 2가지 주된 방식이 존재한다:\n#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n# 범용 목적의 배포판으로부터 만드는 것\n\n이러한 목적에 쓰이는 배포판들은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그 자체가 데비안 기반임), 아치 리눅스, 젠투, 슬랙웨어를 포함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예 처음부터 개발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범용 기반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 필수적인 구성 요소만 포함하되 배포판의 이용에 과도한 것으로 간주되는 구성 요소로 인해 발생되는 자원 부하를 회피하는 JeOS 철학에 초점을 둔다.\n\n==== 홈 시어터 PC ====\n홈 시어터 PC(HTPC)는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특히 홈 시어터 시스템으로 주로 사용되는 PC를 말한다. 텔레비전에 보통 연결되며 추가적인 오디오 시스템이 포함되기도 한다.\n\n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 Kodi를 통합한 리눅스 배포판 OpenELEC는 HTPC용으로 개발된 운영 체제이다. JeOS 철학을 고수하여 개발된 이 운영 체제는 매우 가벼운 편이며 HTPC 범주에서만 사용 시 매우 적절하다.\n\n우분투의 특별판인 Mythbuntu 등 MythTV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는 특수 에디션인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n\n==== 디지털 보안 ====\n칼리 리눅스는 디지털 포렌식과 침투 시험을 위해 설계된 데비안 기반 리눅스 배포판이다. 보안 취약점의 침투 시험 및 식별을 위한 여러 응용 소프트웨어가 사전 설치되어 있다. 우분투 파생판 백박스는 도덕적 해킹(화이트 해킹)을 위해 보안 및 네트워크 분석 도구들이 사전 설치되어 있다. Arch 기반 BlackArch는 침투 및 보안 연구를 위한 도구 2,100개가 포함되어 있다.\n\n프라이버시, 기밀, 네트워크 익명성, 정보 보안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Tails, 틴햇 리눅스, 틴포일 햇 리눅스가 포함된다. 라이트웨이트 포터블 시큐리티는 아치 리눅스 기반 배포판의 하나로서, 미국 국방부가 개발한 것이다. Tor-ramdisk는 네트워크 익명 소프트웨어 토르의 호스팅 전용 목적으로 개발된 초소형 배포판이다.\n\n==== 시스템 복구 ====\n리눅스 라이브 CD 세션은 고장난 컴퓨터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한 도구로서, 또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다. 이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이 목적을 위한 여러 리눅스 배포판들이 등장했는데, 이 중 다수가 파티션 편집기 GParted, 그리고 추가 데이터 복구 및 시스템 수리 소프트웨어를 포함하고 있다:\n* GParted Live GParted 프로젝트가 개발한 데비안 기반 배포판.\n* Parted Magic 상용 리눅스 배포판.\n* SystemRescueCD 윈도우 레지스트리 편집을 지원하는 Arch 기반 배포판\n\n==== 우주에서 ====\n스페이스X는 팰컨 9 로켓의 장애 허용 디자인에서 여러 비행 컴퓨터를 사용한다. 각 멀린(Merlin) 엔진은 3대의 보팅(Voting)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며 컴퓨터 1대당 2개의 물리적 프로세서는 다른 컴퓨터의 작동을 지속적으로 검사한다. 리눅스는 태생적으로 장애 허용이 아니지만 비행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이 목적을 위해 장애를 허용한다. 유연성을 위해 방사능 내성 부품 대신 출하 대기 부품들과 시스템 방사능 허용 디자인이 사용된다.\n2019년 7월 기준으로 스페이스X는 2010년 이후로 팰컨 9을 76회 이상 발사하였다. 드래곤 2 크루 캡슐은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해 크로미엄 OS와 결합된 리눅스를 사용한다.\n\n우주 정거장에서는 임무에 중요하지 않은 노트북에는 윈도우가 운영 체제로 채용되었으나 나중에 리눅스로 대체되었다. 우주의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 Robonaut 2 또한 리눅스 기반이다.\n\n제트 추진 연구소는 무인 우주 비행 및 심해 탐험 구성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리눅스를 사용해 왔다. NASA는 화성 탐사로봇의 로봇공학에 리눅스를 사용하며 위성으로부터 오는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우분투 리눅스를 사용한다.\n\n==== 교육 ====\n리눅스 배포판은 학생들이 직접 코딩과 소스 코드를 다루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라즈베리 파이와 같은 장치용으로 개발되었다. 실제 장치를 개발하는 것 외에 실제 작동 원리를 학생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n\n우분투 파생판 에듀분투와 리눅스 스쿨 프로젝트, 데비안 파생판 스콜리눅스는 교육 지향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학교 컴퓨터실과 컴퓨터 기반 교실을 관리하고 만드는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예: 리눅스 터미널 서버 프로젝트/LTSP)\n\n==== 기타 ====\n인스턴트 웹키오스크와 웹컨버저는 브라우저 기반 리눅스 배포판으로, 주로 키오스크와 디지털 사이니지에 사용된다. 씬스테이션은 씬 클라이언트용으로 설계된 미니멀리스트 배포판이다. 록스 클러스터 디스트리뷰션은 HPCC에 최적화되어 있다.\n\n특정 언어나 지리에 속한 사용자처럼 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범용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중국어 사용자를 대상으로는 우분투 기린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블랙온(BlackOn)이 있다. 직무 특화 배포판들로는 미디어 제작을 위한 우분투 스튜디오, 생물정보학을 위한 DNA리눅스를 들 수 있다. 이슬람 지향 배포판 Sabily는 일부 이슬람교 도구를 제공한다. 특정 기관들은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리눅스 배포판들을 사용하는데, 프랑스 육군 현병대(National Gendarmerie)에 쓰이는 GendBuntu, 구글에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Goobuntu, 러시아군용으로 개발되는 아스트라 리눅스가 있다.\n", "\n\n\n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여러 양적 연구는 시장 점유율과 신뢰성을 포함한 주제에 초점을 두며 수많은 연구가 리눅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리눅스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리눅스를 구동하는 서버,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의 소득은 2008년 35,700,000,000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었다. 분석가들과 지지자들은 리눅스의 상대적 성공을 보안, 신뢰성, 낮은 비용, 벤더 락인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n\n; 데스크톱, 노트북\n: 웹 서버 통계에 따르면(클라이언트 장치의 웹사이트 방문 수에 기반) 2018년 11월 기준으로 데스크톱 컴퓨터의 리눅스 추산 시장 점유율은 약 2.1%이다. 이와 비교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약 87%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macOS는 약 9.7%를 차지하고 있다.\n\n; 웹 서버\n: W3Cook는 상위 1,000,000개 알렉사 도메인을 사용하는 통계를 출판하며, 2015년 5월 기준으로 웹 서버 중 96.55%가 리눅스를 구동하고 1.73%가 윈도우를 구동하며 1.72%가 FreeBSD를 구동하는 것으로 추산한다.\n\n:W3Techs는 매월 업데이트되는 상위 10,000,000개 알렉사 도메인을 사용하는 통계를 출판하며 2016년 11월 기준으로 웹 서버 중 66.7%가 리눅스/유닉스를 구동하며, 33.4%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구동하는 것으로 추산한다.\n\n:2008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의 당시 CEO 스티브 발머는 웹 서버 중 60%가 리눅스를 구동하였으며 40%가 윈도우 서버를 구동하였다고 언급하였다.\n\n:IDC의 2007년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리눅스는 전체 서버 시장의 12.7%를 차지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 추산치는 다양한 기업에 의해 판매되는 리눅스 서버의 수에 기반을 두며 이후 리눅스가 설치된 별도 구매 서버 하드웨어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n\n; 모바일 장치\n: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둔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운영 체제가 되었다.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는 스마트폰 가운데 79.3%가 안드로이드를 사용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2013년 판매 기준 태블릿의 60% 이상이 안드로이드를 사용한다. 웹 서버 통계에 따르면 2014년 12월 기준 안드로이드는 약 46%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며 iOS는 45%를 차지하고 나머지 9%가 다양한 틈새 플랫폼이 차지한다.\n\n; 영화 제작\n: 수년 간 리눅스는 영화 산업에서 선택되는 플랫폼이 되었다. 리눅스 서버에서 제작된 최초의 메이저 영화는 1997년의 타이타닉이었다. 그 뒤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픽사, 웨타 디지털, 인더스트리얼 라인트 앤드 매직 등 주요 스튜디오들이 리눅스로 이관하였다. 리눅스 영화 그룹(Linux Movies Group)에 따르면 대형 애니메이션과 시각 효과 기업의 서버와 데스크톱 중 95% 이상이 리눅스를 사용한다.\n\n; 정부에서의 사용\n: 리눅스 배포판은 여러 지역 및 국가 정부에서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 브라질 연방 정부는 리눅스를 지원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군이 자체 리눅스 배포판을 만든다는 소식이 표면화되고 있으며 G.H.ost 프로젝트로서 성과를 얻었다. 인도 케랄라주는 주의 모든 고등학교의 컴퓨터에 리눅스 구동을 강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기술 독립 달성을 위해 Loongson 프로세서 계열을 위한 운영 체제로 리눅스를 사용한다. 스페인에서 일부 지역은 자체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고 있으며 교육과 여러 공식 기관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또한 리눅스 채택을 향한 단계를 밟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붉은별 운영 체제는 2002년 이후로 개발되고 있으며 페도라 리눅스 버전에 기반을 둔다.\n\n; 금융\n\n: 카카오뱅크는 2017년에 대한민국 금융권 중 최초로 전산 시스템에 리눅스를 도입하였다. 국민은행은 2020년도의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메인프레임과 함께 리눅스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는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유닉스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증권(주식) 거래소인 한국거래소(KRX)는 대한민국 자본 시장 거래 시스템 최초로 2014년에 리눅스 시스템을 도입하였다.\n", "\n\n리눅스 커널은 GNU GPL 버전 2로 라이선스된다. GPL는 해당 라이선스의 소스 코드에 기반한 소프트웨어를 배포하는 누구든지 동일 조항으로 소스 코드(수정사항 포함)를 배포해야 한다. 일반적인 리눅스 배포판의 주된 기타 구성 요소들 또한 주로 GPL로 라이선스되지만 다른 라이선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라이선스들은 GPL보다 더 허용점이 많은 LGPL을 사용하며 X 윈도 시스템의 X.Org 구현체는 MIT 라이선스를 사용한다.\n\n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이 GPL 버전 2에서 버전 3로 이동되지 않을 것이라 언급하였다. 그는 디지털 권리 관리 내에서 소프트웨어의 이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라이선스를 싫어하였다. 수천에 달하는 모든 저작권 보유자들로부터 권한을 취득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했다.\n\n2001년 레드햇 리눅스 7.1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30,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다. COCOMO(Constructive Cost Model) 하에서 이루어진 이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대략 인간 나이로 8000년의 개발 시간이 요구되었다. 또, 연구에 따르면 이 소프트웨어가 전통적인 사유 수단으로 개발되었다면 미국에서 개발 시 대략 $( 미국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소스 코드 대부분(71%)이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되었으나 그 외 C++, 리스프, 어셈블리어, 펄, 파이썬, 포트란, 다양한 셸 스크립트 언어를 포함한 수많은 언어들이 사용되었다.\n모든 코드 줄의 절반 이상이 GPL로 라이선스되었다. 리눅스 커널 그 자체는 2,400,000개 줄로 구성되며 전체의 8%를 차지한다.\n\n이후 연구에서 동일 분석이 데비안 버전 4.0에 대해 수행되었다(2007년 출시). 이 배포판은 283,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으며 전통적인 수단으로 개발한다고 보았을 때 인간 나이로 대략 7300년의 개발 시간, US$( 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 \n\n\n\"Linux\"라는 이름은 스위스 기업 로슈가 제조한 세탁용 세제에도 사용된다.\n\n미국에서 리눅스라는 이름은 리누스 토르발스가 등록한 상표명이다. 처음에 누구도 등록하지 않다가 1994년 8월 15일 윌리엄 R. 델라 크로스 주니어는 리눅스라는 상표를 신청한 다음 리눅스 배포자들로부터 로열티를 요구했다. 1996년, 토르발스와 일부 영향을 받은 단체들은 상표가 토르발스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고소했으며 1997년 논쟁이 해결되었다. 상표의 라이선스 부여는 그 뒤로 리눅스 마크 인스티튜트(LMI)가 관리하고 있다. 토르발스는 오직 다른 사람이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칭을 등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LMI는 원래 상표의 일부로서 리눅스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명목적 2차 라이선스 비용을 청구하였으나 나중에 무료의 계속되는 전 세계적 2차 라이선스를 선호하게 되면서 이를 변경하였다.\n\n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리눅스 배포판을 FSF의 회장 리처드 스톨만이 1983년 시작한 GNU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눅스 커널 기반 운영 체제이기도 한 안드로이드 OS에 대해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에 대해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지 않았는데, GNU가 그 일부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n\n스톨만과 FSF 외 소수의 유명 인사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특히 데비안(1996년까지 FSF의 후원을 받음) 또한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매체와 일반 이용 시에는 운영 체제 계열을 말할 때 단순히 \"리눅스\"라고 부르며 이는 수세 리눅스,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처럼 수많은 대형 리눅스 배포판을 가리킬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GNU/리눅스 또는 단순히 GNU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Trisquel GNU/Linux, Parabola GNU/Linux-libre, BLAG Linux and GNU, gNewSense를 들 수 있다.\n\n2011년 5월 기준으로, 우분투의 Natty 릴리스를 구성하는 소스 코드 줄을 셀 경우 현대 리눅스 배포판의 약 8~13%는 GNU 구성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이 범위는 그놈이 GNU의 일부에 속해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한편, 6%는 리눅스 커널이 차지하며 직접적인 의존성을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9%로 늘어난다.\n", "\n* 리눅스 배포판 비교(en)\n* 오픈 소스와 클로즈드 소스의 비교(en)\n* 운영 체제 비교(en)\n* X 윈도 시스템 데스크톱 환경 비교(en)\n* 리눅스에 대한 비판(en)\n*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n* 리눅스 프롬 스크래치\n* 리눅스 소프트웨어 맵(en)\n* 리눅스 배포판\n:* 리눅스 배포판 목록(en)\n:* 하모니카 (운영 체제)\n:* 구름 플랫폼\n:* 한컴 구름\n:* 티맥스OS\n* 리눅스용으로 출시된 게임 목록(en)\n* 운영 체제 목록\n* 적재 가능 커널 모듈\n\n", "\n; 내용주\n\n", "\n\n* \n* 리눅스 커널의 구조도\n* 리눅스 커널 웹사이트와 아카이브\n* 리눅스의 역사 (GIT 저장소 포맷 1992–2010)\n=== 한국어 ===\n* 한국 페도라 리눅스 사용자 모임\n* KLDP\n* 한국 리눅스 사용자 그룹\n* 한국데비안사용자모임\n* 리눅스 커뮤니티 하모니카\n\n\n\n\n\n\n\n\n \n분류:1991년 소프트웨어\n분류:컴퓨팅 플랫폼\n분류:크로스 플랫폼 소프트웨어\n분류:핀란드의 발명품\n분류:리누스 토르발스\n분류:유닉스 계열\n분류: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n분류:운영체제" ]
'''리눅스'''() 운영체제는 1991년 9월 17일 리누스 토르발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운영 체제 커널을 리눅스 커널이라고 하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초기에는 콘솔 터미널 형태로 동작되었다. 그 이후 GNOME/KDE등의 GUI 시스템 및 반도체사 하드웨어 드라이버가 추가되기 시작한것이다. 현재 리눅스 배포판의 커널단에 리눅스 커널이 사용되고 있다. 2023년 1월 Linux에서 Windows 앱을 직접 실행해주는 Wine이 버전 8.0으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호환성과 성능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DLL 계층이 복잡한 윈도우 유틸러티와 게임을 설치 관리해주는 Wine기반의 Bottles가 등장하면서 리눅스에서 윈도우 앱 직접 실행이 매우 편리해 졌다. 리눅스에서 KVM/QEMU Virt-Manager로 윈도우10/11 가상머신 설치도 가능하다. 배포판에는 리눅스 커널과 지원 시스템 소프트웨어, 그리고 라이브러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콘솔 유틸중 극히 일부가 GNU 프로젝트에 의해 참여되었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에서는 GNU 소프트웨어가 일부 사용되었다고 해서 GNU/리눅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명한 리눅스 배포판에는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가 포함된다. 상용 배포판에는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RHEL), 수세 리눅스 엔터프라이즈 서버가 포함된다. 데스크톱 리눅스 배포판에는 X11이나 웨이랜드 등의 윈도잉 시스템, 그리고 그놈, KDE 플라스마 등의 데스크톱 환경이 포함된다. 서버용 배포판은 그래픽스 기능이 제되어 있거나 LAMP 등의 솔루션 스택이 포함될 수 있다. 리눅스는 자유로이 재배포가 가능하므로 누구든지 어떠한 목적으로든 배포판을 만들 수 있다. 리눅스는 처음에는 인텔 x86 아키텍처에 기반한 개인용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으나 그 뒤로 기타 운영 체제 외에 더 많은 플랫폼으로 이식되었다. 스마트폰에 안드로이드(리눅스 기반임)가 우세해지면서 리눅스는 또한 모든 범용 운영 체제 가운데 가장 많은 설치 기반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데스크톱 컴퓨터 중 대략 2.3%만이 리눅스를 사용하지만, 리눅스 커널 기반 크롬 OS를 구동하는 크롬북은 미국 K-12 교육 시장을 지배하며 미국 내 300달러 미만 노트북 컴퓨터 가운데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리눅스는 서버 시장에서 주도적인 운영 체제이며(상위 100만 대 웹 서버 운영 체제 중 96.4% 이상이 리눅스이다), 메인프레임 컴퓨터 등의 기타 빅 아이언 시스템을 주도하며 TOP500 슈퍼컴퓨터에 쓰이는 유일한 운영 체제이다.(2017년 11월 이후로 모든 경쟁자를 점차적으로 제거하였다). 리눅스는 또한 일반적으로 운영 체제가 펌웨어로 빌드되면서 시스템에 높은 수준으로 맞추어진 임베디드 시스템에서도 동작한다. 여기에는 라우터, 자동화 컨트롤, 스마트 홈 기술(예: 구글 네스트), 텔레비전(삼성전자, LG전자의 스마트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자동차(예: 테슬라,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 현대자동차, 도요타는 모두 리눅스에 의존함),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비디오 게임기, 스마트워치가 포함된다. 팰컨 9와 드래곤 2의 항공 전자기기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버전을 사용한다. 리눅스는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협업의 매우 저명한 예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스 코드는 누구든지 GNU GPL 등 개별 라이선스에 따라 상업적으로나 비상업적으로 이용, 수정, 배포가 가능하다. 섬네일 턱스는 리눅스의 공식 마스코트이다. 통통한 펭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96년 래리 유잉이 만들었다. 리눅스의 마스코트를 펭귄으로 삼자는 아이디어는 리눅스 커널의 작성자 리누스 토르발스에게서 나왔다. === 선구자 === 파일:Linus Torvalds (cropped).jpg|섬네일|right|upright|리누스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의 주 개발자이다. 유닉스 운영 체제는 1969년 미국 AT&T의 벨 연구소에서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러스 매클로이, 조 오사나(Joe Ossanna)이 착안하여 구현했다. 1971년 처음 출시한 유닉스는 당시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어셈블리어로 작성하였다. 1973년 데니스 리치가 선구자인 접근으로 일부 하드웨어 및 입출력 루틴을 제외하고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재작성하였다. 유닉스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구현체 이용이 가능하자 다른 컴퓨터 플랫폼으로 이식이 더 쉬워졌다. 유닉스의 컴퓨터 사업 진입을 금지하던 초기 미국의 독점금지법으로 인해 AT&T는 운영 체제의 소스 코드를 모든 요청자에게 라이선스할 필요가 있었다. 1984년, AT&T는 벨 연구소와 분리되어 자유 라이선스를 요구하는 법적 책무를 면제하였고 벨 연구소는 유닉스를 사유 제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사용자는 유닉스 수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1983년 리처드 스톨먼이 시작한 GNU 프로젝트는 온전히 자유 소프트웨어로 구성된 "완전한 유닉스 호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드는 목표를 두었다. 작업은 1984년 시작되었다. 나중에 1985년, 스톨먼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시작하였고 1989년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NU GPL)를 작성하였다. 1990년대 초, 운영 체제에 필요한 프로그램들 다수(예: 라이브러리, 컴파일러, 문서 편집기, 유닉스 셸, 윈도 시스템)가 완성되었으나 장치 드라이버, 데몬, GNU/허드라는 이름의 커널 등 저급(low-level) 요소들이 정체되거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1991년 당시 GNU 커널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자기 스스로 개발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법적 문제로 인해 1992년까지 출시되지 못했음에도 NetBSD, OpenBSD, FreeBSD의 기원이 된 386BSD의 개발이 리눅스의 개발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또, 토르발스는 386BSD가 당시 이용 가능했더라면 아마 리눅스를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언급하였다. 미닉스는 컴퓨터 과학 교수 앤드루 타넨바움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운영 체제의 원리를 학습하고자 한 학생들과 다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소형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로서 1987년 출시되었다. 미닉스의 소스 코드 전체가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음에도 라이선스 조항으로 인해 2000년 4월 라이선스 변경이 될 때까지 자유 소프트웨어로 자리잡지는 못하였다. === 개발 === 1991년, 헬싱키 대학교의 재학생이었던 토르발스는 운영 체제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교육용으로만 국한되었던 미닉스 라이선스에 실망한 토르발스는 궁극적으로 리눅스 커널이 되었던 자신만의 운영 체제 커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토르발스는 미닉스에서 리눅스 커널의 개발을 시작했으며 미닉스용으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 또한 리눅스에서 사용되었다. 나중에 리눅스는 성숙하여 더 나아가 리눅스 커널 개발이 리눅스 시스템에서 이루어졌다. GNU의 응용 프로그램들 또한 모든 미닉스 구성 요소를 대체하였는데, 그 이유는 미숙한 운영 체제에 GNU 프로젝트에 자유로이 이용 가능한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GNU GPL로 라이선스된 코드는 동일하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로 출시하는 한 다른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재사용이 가능하였다. 토르발스는 상용 재배포를 금지하였던 자신의 오리지널 라이선스로부터 GNU GPL로의 전환을 시작하였다. 개발자들은 GNU 구성 요소들을 리눅스 커널로 통합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온전히 기능하는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 명칭 === 파일:Linux 0 12.jpg|섬네일|초창기 리눅스 버전을 담고 있는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리누스 토르발스는 자신의 발명품을 '''Freax'''로 호칭하길 원했는데 이는 free, freak, x(Unix의 암시)의 혼성어였다. 그가 시스템에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동안 프로젝트의 makefile 중 일부에 약 6개월 동안 Freax라는 이름이 포함되었다. 토르발스는 이미 이 이름을 "리눅스"(Linux)로 고려하였으나 처음에는 이 이름이 너무 독선적인 단어로 일축하였었다. 개발을 용이케 하기 위해 파일은 1991년 9월 FUNET의 FTP 서버(ftp.funet.fi) 에 업로드되었다. 헬싱키 공과 대학교(Helsinki University of Technology, HUT)의 토르발스의 동업자 아리 렘케(Ari Lemmke)는 당시 자발적인 FTP 서버 관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Freax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토르발스와 상의 없이 서버상에서 Linux로 명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토르발스는 리눅스의 명칭 사용에 동의하였다. 토르발스가 쓴 뉴스그룹 게시물에 따르면, "Linux"라는 용어는 ( -리눅스-로 발음하는 것이 좋겠다고 언급되었다. 어떻게 리눅스가 발음되는 것이 좋을지를 추가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커널 소스 코드에 오디오 가이드()를 포함하였다. === 상업적, 대중적 활용 === 파일:Desktop Ubuntu 20.04.png|섬네일|right|대중적인 리눅스 배포판의 하나인 우분투 파일:Nexus 5X (White).jpg|섬네일|안드로이드를 구동 중인 넥서스 5X 호비스트들만 사용하지 않고 1990년대 중반, 운영 환경에 리눅스를 채택하는 일이 슈퍼컴퓨팅 커뮤니티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NASA(미국 항공 우주국) 등의 단체들이 점차 운영체계에 비용이 드는 기계들에 리눅스로 구동하는 저렴한 일상 컴퓨터 클러스터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델과 IBM, 이후 휴렛 팩커드가 데스크톱 운영 체제를 독점하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자유를 얻고자, 리눅스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리눅스 시스템을 임베디드 시스템에서 사실상 개인용 컴퓨터에서 모든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컴퓨팅 전반에 사용한다. 대중적인 LAMP 애플리케이션 스택 등 서버 설치본에도 적용하며 중요한 운영체계로 자리잡았다. 가정과 기업 내 리눅스 이용은 지속적으로 증가추세다. 리눅스 배포판은 넷북 시장에서 대중화하며, 수많은 장치들에 알맞게 변형한 리눅스 배포판을 설치하여 사용한다. 구글은 리눅스를 넷북용으로 설계하여 운영체계를 별도로 구축하며 크롬 OS를 출시하였다. 개인 소비자 시장에서 리눅스의 가장 위대한 성공은 모바일 장치 시장이다.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가장 지배적인 운영 체제들 가운데 하나다. 태블릿과 최근 웨어러블에서도 기본 운영체계로 사용한다. 리눅스 게이밍은 리눅스 지지를 표방하고 자체 게이밍 지향 리눅스 배포판인 스팀OS를 출시한 밸브의 성장과 더불어 발전하는 중이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또한 다양한 지역, 그리고 대규모 행정조직을 지닌 정부들도 운영체계 비용을 절약하는 차원에서 호의적이다. 브라질 연방 정부 등 유럽국가 정부들과 인도의 법무부에서도 인기다. === 현재의 개발 === 파일:In flight system Linux bootup.jpg|right|섬네일|리눅스 로고를 표시하면서 부팅을 하고 있는 기내 오락 시스템 그레그 크로하트맨(Greg Kroah-Hartman)은 리눅스 커널의 주도적인 유지보수자로서 개발을 가이드하고 있다. 윌리엄 존 설리반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이사로서 GNU 구성 요소들을 지원하고 있다. 개인과 기업들은 GNU가 아닌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을 개발한다. 이 서드파티 구성 요소들은 커널 모듈과 사용자 애플리케이션, 라이브러리를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리눅스 벤더들과 커뮤니티들은 커널, GNU 구성 요소, GNU가 아닌 구성 요소를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형태로 추가적인 패키지 관리자와 결합하여 배포한다. 수많은 오픈 소스 개발자들은 리눅스 커널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된 것임에 동의한다. 토르발스는 유닉스의 설계가 발판 역할을 하였음에도 리눅스는 수많은 돌연변이와 함께 성장했으며 돌연변이는 무작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DNA의 알파 입자보다 더 빠르고 더 자발적인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이먼드는 리눅스의 혁명적인 면모를 기술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 리눅스 이전에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소규모 단체들에 의해 주의깊게 설계되었으나 리눅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거의 처음부터 인터넷을 통해서만 조직화되는 상당한 수의 자발적 이용자들에 의해 무심코 해킹되었다. 품질은 엄격한 기준이나 독재적으로 관리되지 않았고 수일 동안 사용자 수백 명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매주 릴리스하는 단순한 전략을 취함으로써 개발자들이 도입한 돌연변이의 빠른 다윈 선별 정렬 방식을 만들어냈다. 리눅스 기반 시스템은 모듈 방식의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며 1970년대와 1980년대 중 유닉스 안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기초적 설계 대부분을 가져왔다. 이러한 시스템은 프로세스 제어, 네트워킹, 주변기기 접근, 파일 시스템을 관리하는 모놀리식 커널을 사용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커널에 직접 통합되어 있거나 시스템 실행 중에 로드되는 모듈로 추가된다. GNU 유저랜드는 리눅스 커널에 기반한 대부분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안드로이드가 바로 주목할만한 예외이다. 프로젝트의 C 라이브러리의 구현체는 커널 사용자 공간 인터페이스에 필수적인 리눅스 커널의 시스템 호출의 래퍼로서 동작하며 툴체인은 리눅스 커널을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컴파일러 모음집이며 코어유틸리티는 수많은 기초적 유닉스 도구들을 구현한다. 이 프로젝트는 또한 저명한 CLI 셸인 Bash를 개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리눅스 시스템에 쓰이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는 X 윈도 시스템 구현체 위에 빌드된다. 근래에 리눅스 커뮤니티는 X 윈도 시스템 대신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서 웨이랜드 사용을 추구한다. 수많은 기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리눅스 시스템에 기여한다. 설치되는 리눅스 시스템 구성 요소는 다음이 포함된다: * 부트로더(예: GNU GRUB, LILO, SYSLINUX, Gummiboot): 리눅스 커널을 컴퓨터의 주 메모리로 로드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켜진 다음 펌웨어 초기화가 수행된 이후 실행된다. * init 프로그램(예: 전통적인 sysvinit과 더 새로운 systemd, OpenRC, Upstart): 리눅스 커널에 의해 시작되는 최초의 프로세스이며 프로세스 트리의 루트에 위치해 있다. 즉, 모든 프로세스는 init을 통해 실행된다. 시스템 서비스와 로그인 프롬프트(그래픽 또는 터미널 모드) 등의 프로세스를 시작한다. *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 실행 중인 프로세스가 사용할 수 있는 코드를 포함한다. ELF 포맷 실행 파일을 사용하는 리눅스 시스템에서 동적 라이브러리 이용을 관리하는 동적 링커의 이름은 ld-linux.so이다. 사용자들이 직접 소프트웨어를 컴파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성되어 있다면 헤더 파일 또한 설치된 라이브러리의 인터페이스를 기술하기 위해 포함된다. 리눅스 시스템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 GNU C 라이브러리(glibc) 외에 SDL, 메사 등 그 밖의 수많은 라이브러리들이 존재한다. ** C 표준 라이브러리는 컴퓨터 시스템에서 C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라이브러리이며, 표준이 되는 GNU C 라이브러리라 할 수 있다.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musl, EGLIBC(데비안에 사용되는 glibc 포크), uClibc(uClinux용으로 설계됨) 등 다른 대안들이 개발되었으나 마지막 2개는 더 이상 유지보수되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Bionic이라는 자체 C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 * 표준 구현체가 되는 GNU 코어 유틸리티를 포함한 기초적인 유닉스 명령어. 임베디드 시스템의 경우 카피레프트 비지박스, BSD 라이선스의 토이박스 등 다른 대안들이 존재한다. * 위젯 툴킷은 응용 소프트웨어용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빌드하기 위해 사용되는 라이브러리이다. 수많은 위젯 툴킷을 사용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GTK, 그놈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된 클러터, Qt 프로젝트가 개발하고 Digia가 주도하는 Qt, 인라이튼먼트 팀이 주로 개발하는 인라이튼먼트 파운데이션 라이브러리(EFL)가 포함된다. * dpkg, RPM 등 패키지 관리 시스템. 다른 패키지들은 바이너리나 소스 형태의 Tarball로부터 컴파일이 가능하다. * 명령 셸이나 윈도 환경 등의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램. === 사용자 인터페이스 === 셸로 알려진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또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일반적인 관련 하드웨어에 부착된 컨트롤일 수 있다. 데스크톱 시스템의 경우 기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으로 그래픽이지만 터미널 에뮬레이터 창이나 별도의 가상 콘솔을 통해 CLI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CLI 셸은 텍스트 기반 사용자 인터페이스이며 입출력을 위해 모두 텍스트를 사용한다. 리눅스에 사용되는 저명한 셸은 Bash(본 어겐 셸)이며 본래 GNU 프로젝트용으로 개발되었다. 유저랜드의 다양한 부분을 포함하는 가장 낮은 단계의 리눅스 구성 요소들은 예외적으로 CLI를 사용한다. CLI는 특히 반복적이거나 지연되는 작업의 자동화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매우 단순한 프로세스 간 통신을 제공한다. 데스크톱 시스템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GUI 셸이며 KDE 플라스마, 그놈, 메이트, 시나몬, LXDE, Pantheon, Xfce 등 확장 데스크톱 환경과 함께 패키징되지만 다양한 추가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대중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이른바 X로 불리는 X 윈도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 네트워크 투명성을 제공하며 특정 시스템에서 실행 중인 그래픽 애플리케이션이 다른 시스템에서 표시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용자가 애플리케이션과 통신할 수 있다. 그러나 X 윈도 시스템의 특정 확장 기능들은 네트워크를 경유하여 동작하지 못한다. 참고 구현체를 포함(가장 대중적인 것이 X.Org 서버)하여 일부 X 디스플레이 서버들이 존재한다. 서버 배포판은 개발자와 관리자들을 위해 명령 줄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으나 시스템의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최종 사용자를 위한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사용자 지정 인터페이스는 다른 시스템에 상주하는 클라이언트를 통해 접근되며 꼭 리눅스 기반일 필요는 없다. 일부 유형의 창 관리자는 X11용으로 존재하며, 틸팅, 동적, 스택, 컴포지트 방식이 포함된다. 창 관리자는 개별 애플리케이션 창의 위치와 모습을 제어하는 수단을 제공하며 X 윈도 시스템과 통신한다. 더 단순한 X 윈도 관리자, 이를테면 dwm, ratpoison, i3wm, herbstluftwm과 같은 것들은 미니멀리스트적 기능을 제공하지만 FVMM, 인라이튼먼트, 윈도 메이커 등의 더 세련된 창 관리자들은 내장 작업 표시줄, 테마와 같은 더 많은 기능들을 제공하지만 데스크톱 환경들과 비교할 때 여전히 가벼운 편에 속한다. 데스크톱 환경에는 자체 표준 설치본의 일부로서 Mutter(그놈), KWin(KDE), Kfwm(kfce) 등의 창 관리자를 포함하지만 사용자는 원하는 경우 각기 다른 창 관리자를 골라서 쓸 수 있다. 웨이랜드는 X11 프로토콜을 대체할 목적으로 개발된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다. 2014년 기준으로, 폭넓게 채택되지는 못한 상황이다. X11과 달리 웨이랜드는 외부 창 관리자와 컴포지트 관리자가 필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웨이랜드 컴포지터는 디스플레이 서버, 창 관리자, 컴포지트 관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웨스턴(Weston)은 웨이랜드의 참조 구현체이지만 그놈의 Mutter와 KDE의 KWin이 독립적인 디스플레이 서버 형태로 웨이랜드에 포팅되고 있다. 인라이튼먼트는 이미 버전 19부터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 === 비디오 입력 기반 구조 === 리눅스는 현재 비디오 입력 장치를 관리하기 위한 2개의 현대적 커널 유저스페이스 API를 갖추고 있다: 비디오 스트림과 라디오를 위한 V4L2 API, 디지털 TV 수신을 위한 DVB API. 장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이유로, 또 해당 API가 관리하는 수많은 포맷과 표준들로 인해 이 기반 구조는 다른 장치들과 더 잘 호환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다. 또, 양호한 유저스페이스 장치 라이브러리는 유저스페이스 애플리케이션들이 해당 장치들에 의해 지원되는 모든 포맷과 성공적으로 동작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 멀티 부팅 === 리눅스는 부팅 수준에서 GRUB 등을 통해 여러 OS로 부팅하는 것을 지원한다. 또한 리눅스는 GRUB를 통해 콘솔모드 부팅뿐만 아니라 콘솔 모드에서 X 윈도 시스템 환경인 GUI 모드와 상호 변환을 완벽히 지원한다. === 이식성 === 리눅스 커널은 원래 IA-32 아키텍처의 Intel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광범위한 아키텍처에 포팅된 운영 체제 중 하나이며, 포팅뿐 아니라 이러한 장치를 위한 배포판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HP 아이팩과 같은 PDA에서부터 메인프레임 최신 장비인 IBM zEnterprise Syste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에서 이용된다. 파일:Unix timeline.en.svg|섬네일|upright=2.25|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의 역사를 단순하게 보여준 그림. 리눅스는 POSIX 표준의 일부로서 유사한 아키텍처와 개념을 공유하지만 오리지널 유닉스나 MINIX와 비자유 소스 코드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리눅스와 기타 수많은 대중적인 당대 운영 체제들과의 주된 차이점은 리눅스 커널과 기타 구성 요소들이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는 점이다. 리눅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유일한 운영 체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운영 체제이다. 일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는 카피레프트의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카피레프트로 된 소프트웨어에서 파생된 작품은 그 자체가 카피레프트여야 한다는 논지이다. 가장 일반적인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인 GNU GPL은 카피레프트의 일종이며 리눅스 커널과 GNU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에 사용되고 있다. 리눅스 기반 배포판들은 개발자들이 다른 운영 체제 및 기반 컴퓨팅 표준들과의 상호 운용성을 위해 고안되었다. 리눅스 시스템은 POSIX, SUS, LSB, ISO, ANSI 표준을 가능한 준수하지만, 오늘날까지 오직 하나의 리눅스 배포판인 Linux-FT만이 POSIX.1 인증을 받았다. 협업을 통해 개발된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개인이 독자적으로 개발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가 명시적으로 재배포를 허가한다는 사실은 그러나 독립적인 프로젝트에 의해 개발되는 소프트웨어를 대형 프로젝트들이 수집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며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리눅스 배포판 형태로 이용될 수 있게 한다.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은 네트워크 연결을 경유하여 다운로드와 설치를 통해 원격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와 응용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수집하고 관리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들은 저만의 필요에 따라 운영 체제에 순응해나간다. 배포판들은 개인, 유동적인 팀, 자발적인 단체, 상업 단체들에 의해 유지보수된다. 배포판은 설치된 리눅스 커널의 기본 구성, 일반 시스템 보안, 각기 다른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을 하나의 일관된 패키지로 통합하는 일을 떠맡는다. 배포판은 일반적으로 apt, yum, zypper, 팩맨, portage 등의 패키지 관리자를 사용하여 특정 지점으로부터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설치, 제거, 업데이트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리눅스는 다양한 유형의 하드웨어 어디서든 볼 수 있다. 리눅스 커널은 널리 이식된 운영 체제 커널로서, 휴대 전화에서부터 슈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치에서 이용이 가능하다. 매우 다양한 범위의 컴퓨터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는데, 여기에는 휴대용 ARM 기반 iPAQ와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 z9이나 시스템 z10이 포함된다. 주류에서 조금 벗어난 아키텍처를 위한 특수한 배포판과 커널 포크(fork)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ELKS 커널 포크는 인텔 8086이나 인텔 80286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동작하는 반면 µClinux 커널 포크는 메모리 관리 장치(MPU)가 없는 시스템에서 동작할 수 있다. 커널은 또한 매킨토시 컴퓨터(파워PC와 인텔 프로세서 모두), PDA, 비디오 게임기,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휴대 전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제조사가 만든 운영 체제의 이용을 염두에 둔 아키텍처 위에서 동작하기도 한다. 프리덤HEC와 같이 리눅스 하에서 다양한 하드웨어의 지원을 유지보수하고 개선하는 일을 맡은 여러 산업 협회들과 하드웨어 콘퍼런스가 존재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눅스에서 각기 다른 하드웨어의 지원이 개선되었으며 호환성 개선이 이루어졌다. 2014년, 테스트된 모든 하드웨어 구성 데이터베이스를 자동으로 수집하기 위한 새로운 이니셔티브가 시작되었다. 데스크톱과 서버에 쓰이는 범용 목적으로 설계된 리눅스 배포판 외에도 각기 다른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한 특수 제작된 배포판도 존재한다: 컴퓨터 아키텍처 지원, 임베디드 시스템, 안정성, 보안, 특정 지역이나 언어로의 지역화, 특정 사용자 그룹 타게팅, 실시간 애플리케이션 지원, 주어진 데스크톱 환경에 대한 기여. 게다가 일부 배포판은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2015년 기준으로 400개가 넘는 리눅스 배포판들이 현재 개발되고 있으며 그 중 약 12개 정도의 배포판이 범용 목적으로 대중화되어 쓰이고 있다. 한국형 리눅스 배포판 가운데에는 하모니카 등이 포함된다. === 데스크톱 === 파일:Free and open-source-software display servers and UI toolkits.svg|섬네일|upright=2.25|리눅스 데스크톱 스택에 보이는 소프트웨어 구성 요소에는 디스플레이 서버, 위젯 엔진, 또 널리 쓰이는 위젯 툴킷 중 일부가 포함된다. D-Bus, 펄스오디오처럼 최종 사용자에게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구성 요소도 존재한다. 표준 데스크톱 컴퓨터와 노트북에서 리눅스의 인기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들은 그래픽 사용자 환경을 포함하며, 2015년 기준으로 가장 대중적인 환경으로는 KDE 플라스마 데스크톱과 Xfce, 이렇게 2가지가 있다. 단독의 공식 리눅스 데스크톱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스크톱 환경과 리눅스 배포판은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풀에서 구성 요소를 선택하며 어느 정도는 유연한 디자인 가이드를 구현하는 GUI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그놈은 인간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을 디자인 가이드로 삼고 있어서 인간-기계 인터페이스를 중요한 역할로 제공하는데, 단순히 그래픽 디자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며 보안에도 초점을 둔다. 자유 소프트웨어 개발의 '협업'이라는 특징 덕분에 여러 곳에 분산된 팀들이, 사유 시스템의 지역화가 비용 효율적이지 않은 일부 리눅스 배포판의 언어 지역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 예로 싱할라어 버전의 Knoppix 배포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XP를 싱할라어로 번역하기 전까지 중요한 수준으로 취급되며 이용되었다. 이 건과 관련하여 랑카 리눅스 유저 그룹이 대학교 교수, 언어학자, 지역 개발자들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져 지역화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하였다. ==== 성능과 애플리케이션 ==== 데스크톱에서 리눅스 성능은 논란의 주제로 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콘 콜리바스는 서버 위주로만 성능을 우선시한다는 이유로 리눅스 커뮤니티를 고소하였다. 그는 데스크톱에 초점을 아예 두지 않는 것에 실망감이 들어 리눅스 커널 개발을 그만두었으며 이 주제에 관한 진실을 모두 폭로하는 인터뷰를 했다. 그 뒤로 데스크톱 경험 개선에 초점을 둔 상당한 개발이 진척되었다. systemd와 Upstart(2014년 구식화됨)과 같은 프로젝트들은 더 빠른 부팅 시간에 초점을 둔다. 웨이랜드(Wayland)와 미르(Mir) 프로젝트는 X11을 대체하는 대신 데스크톱 성능, 보안, 화면 표시 부분을 개선한다. 수많은 대중적인 애플리케이션들이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이용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모질라 파이어폭스, OpenOffice.org/리브레오피스, 블렌더는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한 버전이다. 게다가 예를 들어 피진과 GIMP과 같이 일부 애플리케이션은 처음부터 리눅스용으로 개발되었는데, 이것들은 인기의 상승으로 인해 윈도우, macOS 등 다른 운영 체제들에도 이식되었다. 또, 상당한 수의 사유 데스크톱 애플리케이션 또한 리눅스에서 지원되는데, 이를테면 하이엔드 애니메이션 및 시각 효과 분야의 오토데스크 마야, 더 파운드리스 누크가 있다. 상세 내용은 리눅스용 사유 소프트웨어 목록(en)을 참고할 것. 자신들만의 또는 다른 기업들의 게임을 리눅스로 이식하는 여러 기업들 또한 존재하며, 리눅스는 저명한 스팀과 Desura 디지털 배급 서비스의 지원 플랫폼이 되었다. 그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macOS용으로 이용 가능한 수많은 유형의 애플리케이션들이 리눅스에서도 실행된다. 공통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은 다른 운영 체제에서 보이는 애플리케이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해당 애플리케이션이 리눅스에서 동작하는 버전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예: 스카이프, 그리고 도타 2와 팀 포트리스 2 등의 일부 비디오 게임) 게다가 와인 프로젝트는 수정되지 않은 기존 윈도우 애플리케이션들을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윈도우 호환성 계층을 제공한다. 와인의 상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코드위버스를 포함한 상업체들에 의해 후원을 받는다. 2009년 이후로 구굴은 와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오픈 소스 와인 프로젝트에 기반한 사유 솔루션 크로스오버(CrossOver)는 윈도우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Intuit 애플리케이션(예: Quicken, 퀵북스), 어도비 포토샵 버전들(CS2),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수많은 대중적인 게임들의 실행을 지원한다. 탁상출판, 프로페셔널 오디오와 같은 부문에서 일부 소프트웨어의 리눅스 포팅판이 없는 경우에서도 리눅스에서 이용 가능한 동등한 수준의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또, 안드로이드용으로 개발된 애플리케이션은 Anbox를 사용하는 다른 리눅스 버전에서 실행이 가능하다. ==== 구성 요소와 설치 ==== X 윈도 시스템과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구성 요소들 외에 D-Bus나 펄스오디오와 같은 freedesktop.org가 호스팅하는 프로그램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2개의 주요 데스크톱 환경들인 그놈과 KDE는 이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각기 그에 상응하는 툴킷(GTK나 Qt)을 사용하여 개발된 그래피컬 프론트엔드를 제공한다. 디스플레이 서버는 오랜 기간 X11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로 클라이언트와의 통신을 맡은 또다른 구성 요소이다. X11 통신을 하는 저명한 소프트웨어로는 X.Org 서버와 Xlib이 있다. 번거로운 X11 코어 프로토콜에 대한 실망, 특히 수많은 확장 기능으로 인해 웨이랜드라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서버 프로토콜이 탄생하게 되었다. 리눅스에서 소프트웨어를 설치, 업데이트, 제거하는 일은 시냅틱 패키지 매니저, 패키지킷, Yum 익스텐더와 같은 패키지 관리자를 이용하여 수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주요 리눅스 배포판들은 광활한 저장소를 갖추고 있고 수천 수만의 패키지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리눅스에서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소프트웨어를 공식 저장소로부터 받아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자는 비공식 저장소로부터 패키지를 설치하거나 웹사이트로부터 직접 미리 컴파일된 패키지를 다운로드하거나 직접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여 쓸 수 있다. 이 모든 방식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수준의 난이도가 있다. 소스 코드를 컴파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규 리눅스 사용자들에게는 도전 과제로 간주될 수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배포판에서는 꼭 필수적으로 간주되지는 않으며 리눅스에 특화된 방식 또한 아니다. 파일:GNOME 3.32.1.png|GNOME 파일:KDE Plasma 5.16.png|KDE 플라스마 파일:Cinnamon 4.2.3 screenshot.png|시나몬 파일:Ubuntu Mate 18.04.1 with MATE 1.20.1.png|Mate 파일:VirtualBox Elementary OS 5.1.7 21 03 2021 21 17 03.png|Pantheon 파일:Budgie Desktop Environment.png|Budgie 파일:XFCE-4.12-Desktop-standard.png|Xfce 파일:Ubuntu 16.04 Desktop.png|Unity (우분투 20.04를 기점으로 중단) 파일:Lubuntu 13.04 English.png|LXDE 파일:LXQt 0.10 - Ambiance.png|LXQt 파일:I3-gaps-wiki.png|i3-gaps 파일:E17 bw screenshot.png|Enlightenment 파일:Fluxbox.png|Fluxbox 파일:Sugar-home-view-0.82.jpg|Sugar 파일:Screenshot of Trinity Desktop Environment (TDE) R14.0.5 Development.png|Trinity === 넷북 === 리눅스 배포판들은 넷북 시장에서도 대중화되었으며 여기에는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 배포판이 설치된 Asus Eee PC, Acer Aspire One이 포함된다. 2009년, 구글은 미니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로서 크롬 OS를 발표하였으며 이 운영 체제는 주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크롬 브라우저를 사용한다. 크롬 OS는 처음에 기 포함된 파일 관리자와 미디어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웹 기반이 아닌 애플리케이션은 아예 실행하지 못했다.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특정 수준의 지원이 이후 버전에 추가되었다. 2018년 기준으로 구글은 컨테이너 안에서 리눅스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으며 크롬 OS가 다른 모든 리눅스 배포판처럼 사용될 수 있게 하였다. 이 운영 체제를 사용하는 넷북은 크롬북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며 2011년 6월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서버, 메인프레임, 슈퍼컴퓨터 === 파일:LAMP software bundle.svg|섬네일|upright=2.25|Squid와 함께 표시되는 LAMP 소프트웨어 번들의 개요. 고성능/고가용성 웹 서버 솔루션은 적대적 환경에서 보안을 제공한다. 리눅스 배포판은 서버 운영 체제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으며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저명도가 있다. 넷크래프트는 2006년 9월 가장 신뢰성 높은 인터넷 호스팅 기업 10곳 중 8곳이 해당 기업들의 웹 서버에 리눅스 배포판을 구동하였다고 보고함으로써 리눅스를 최상위로 두었다. 2008년 6월,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5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2개를 차지했다. 2010년 2월 이후로 리눅스 배포판들은 상위 10개 중 6개, FreeBSD는 10개 중 3개, 마이크로소프트는 10개 중 1개를 차지하여 리눅스가 최상위를 유지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개발자들 간 대중성을 달성하고 웹사이트 호스팅의 일반적인 플랫폼 가운데 하나가 된 LAMP 서버 소프트웨어 결합(리눅스, 아파치, 마리아DB/MySQL, 펄/PHP/파이썬)의 초석이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메인프레임에서 대중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저렴한 가격과 오픈 소스 모델 때문이다. 2009년 12월, 거대 컴퓨터 기업 IBM은 자사가 주로 메인프레임 기반 엔터프라이즈 리눅스 서버의 마케팅과 판매를 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리눅스콘 노스아메리카 2015에서 IBM은 리눅스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실행을 위해 설계된 메인프레임 시리즈 리눅스원을 발표했다. 리눅스 배포판들은 슈퍼컴퓨터용 운영 체제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500 목록에 오른 모든 슈퍼컴퓨터들은 일부 유형의 리눅스를 구동한다. === 스마트 장치 ===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파일:Tesla Model S digital panels.jpg|섬네일|upright=0.7|테슬라 모델 S의 자동차 내 오락물 시스템은 우분투에 기반을 둔다.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가정 자동화(예: 구글 네스트) 등의 스마트 장치, 스마트TV(삼성전자와 LG 스마트 TV는 각각 타이젠과 웹OS를 사용함),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VI) 시스템(예: 오토모티브 그레이드 리눅스)에 쓰이는 일부 운영 체제들은 리눅스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시스템을 위한 주된 플랫폼으로는 안드로이드, 파이어폭스 OS, Mer, 타이젠이 포함된다.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모바일 운영 체제가 되었는데,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에 판매된 기기 중 79.3%가 이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안드로이드 스마트 TV와 차량용 인토테인먼트 시스템 또한 시장에 등장하였다. 안드로이드가 수정된 버전의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리눅스 배포판"이라는 용어가 안드로이드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는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리눅스 재단, 구글의 오픈 소스 관련 주요 인물 크리스 디보나, 여러 기자들에 따르면 안드로이드는 리눅스 배포판이다. 구글 엔지니어 패트릭 브래디와 같은 기타 인물들은 안드로이드가 전통적인 유닉스 계열 리눅스 배포판 측면의 리눅스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드로이드는 GNU C 라이브러리를 포함하지 않으며(대체 C 라이브러리로 바이오닉을 사용) 리눅스 배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타 구성 요소 중 일부 또한 사용하지 않는다. 아스테크니카는 "안드로이드가 리눅스 커널 위에 빌드되긴 하지만 이 플랫폼은 전통적인 데스크톱 리눅스 스택과 공통성이 거의 없다"고 썼다. 오픈 소스 플랫폼 위에서 리눅스를 구동하는 전화와 PDA들은 2007년부터 일상화되었다. 그 예로 노키아 N810, 오픈모코의 Neo1973, 모토로라 ROKR E8을 들 수 있다. 추세에 힘입어 팜(나중에 HP가 인수)은 새로운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 webOS를 제작하여 Palm Pre 스마트폰 계열에 도입되었다. 최초의 모바일 운영 체제 가운데 하나인 노키아의 마에모는 데비안 기반이었다. 나중에 또다른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인 인텔의 모블린과 병합되어 MeeGo가 탄생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모바일 장치를 대상으로 하는 운영 체제인 타이젠을 선호하게 되면서 종료되었다. 타이젠은 리눅스 재단 내의 프로젝트의 하나이다. 일부 삼성전자 제품들은 이미 타이젠을 구동하고 있는데 가장 저명한 예가 삼성 기어 2이다. 삼성 Z 스마트폰은 안드로이드 대신 타이젠을 사용한다. MeeGo의 종료에 따라 Mer 프로젝트는 모바일 지향 운영 체제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Meego 코드베이스를 포크하였다. 2012년 7월, Jolla는 Mer 기술에 기반을 둔 자신들만의 운영 체제인 세일피시 OS를 발표했다. 파일:Pine-pinephone.jpg|섬네일|upright=0.5|포스트마켓OS 위에 플라스마 모바일을 구동 중인 파인폰.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OS는 리눅스 커널,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 웹 표준 기반 런타임 환경, 사용자 인터페이스, 통합 웹 브라우저로 구성되어 있다. 캐노니컬은 이 모바일 운영 체제와 데스크톱 상응 운영 체제 우분투에서 사용자 경험을 컨버전스(집중)하기 위해 우분투 터치를 출시하였다. 또, 이 운영 체제는 외부 모니터와 연결될 때 온전한 우분투 데스크톱을 제공한다. Librem 5는 Purism이 개발한 스마트폰의 하나이다. 기본적으로 회사가 만든 리눅스 기반 PureOS를 사용하지만 다른 리눅스 배포판도 구동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분투 터치처럼 PureOS는 컨버전스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으므로 데스크톱 프로그램들이 스마트폰에서 실행될 수 있다. 한 예로 데스크톱 버전의 모질라 파이어폭스를 들 수 있다. 또다른 스마트폰은 컴퓨터 제조업체 파인64가 제조한 파인폰이다. 파인폰은 우분투 터치, 포스트마켓OS와 같은 다양한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할 수 있다. === 임베디드 장치 === 파일:Linksys-Wireless-G-Router.jpg|섬네일|270px|리눅스 커널을 구동 중인 라우터는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다. 낮은 비용과 커스터마이즈의 용이성 덕분에 리눅스는 임베디드 시스템에 자주 사용된다. 모바일이 아닌 통신 장비 부문에서 고객 댁내 장치(CPE) 하드웨어 대부분은 리눅스 기반 운영 체제를 구동한다. OpenWrt는 OEM 펌웨어 릴리스 다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운영하는 한 예시이다. 예를 들어 대중적인 TiVo 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또한 커스터마이즈된 리눅스를 사용하는데, 이는 시스코/링크시스 등 제조사들의 여러 네트워크 방화벽과 라우터들 또한 그러하다. Korg OASYS, Korg KRONOS, 야마하 모티프 XS/모티프 XF 뮤직 워크스테이션, 야마하 S90XS/S70XS, 야마하 MOX6/MOX8 신시사이저, 야마하 모티프-랙 XS 톤 제네레이터 모듈, 롤랜드 RD-700GX 디지털 피아노 또한 리눅스를 구동한다. 또, 리눅스는 WholeHogIII 콘솔 등 무대 조명 제어 시스템에도 사용된다. === 게이밍 === 과거에 즐길 수 있는 리눅스용 게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근래 수년 간 AAA 타이틀 게임 일부를 제외한 더 많은 게임들이 리눅스 지원과 함께(특히 인디 게임) 출시되었다. 리눅스 커널을 사용하는 대중적인 모바일 플랫폼 안드로이드는 많은 개발자 관심을 받았으며 아이폰과 아이패드 장치용 애플 iOS 운영 체제와 더불어 모바일 게임 개발을 위한 주된 플랫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2013년 2월 14일 밸브는 PC의 대중적인 게임 배포 플랫폼 스팀의 리눅스 버전을 출시하였다. 수많은 스팀 게임들이 리눅스로 이식되었다. 2013년 12월 13일, 밸브는 베타 테스팅을 위해 데비안 기반의 게이밍 지향 운영 체제인 스팀OS를 출시하였으며 게이밍 및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 스팀 머신을 채용할 예정이다. 또, 밸브는 비디오 게임 개발에 도움을 주도록 고안된 OpenGL 디버거 VOGL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소스 게임 엔진이 데스크톱 리눅스로 포팅되었다. 밸브의 노력에 의해 도타 2, 팀 포트리스 2, 포탈, 포탈 2, 레프트 4 데드 2와 같은 일부 저명한 게임들이 데스크톱 리눅스에서 네이티브로 지원된다. 2013년 7월 31일, 엔비디아는 특수 게이밍 플랫픔으로서 안드로이드를 사용할 목적으로 실드를 출시하였다. 일부 리눅스 사용자들은 와인이나 크로스오버 리눅스를 통해 윈도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2018년 8월 22일, 밸브는 게이밍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톤(Proton)이라는 이름의 자체 와인을 출시하였다. 순수 와인에 일부 개선이 추가되었는데, 예를 들면 벌칸 기반 DirectX 11/12 구현체, 스팀 연동, 더 나은 전체 화면 및 게임 컨트롤러 지원, 멀티스레드 지원 게임의 개선된 성능을 들 수 있다. === 특수 용도 === 리눅스의 유연성, 커스터마이즈 기능, 자유-오픈 소스의 특징 덕분에 특수 목적을 위해 상당한 튜닝을 거친 리눅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수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기 위해 2가지 주된 방식이 존재한다: #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 # 범용 목적의 배포판으로부터 만드는 것 이러한 목적에 쓰이는 배포판들은 데비안, 페도라, 우분투(그 자체가 데비안 기반임), 아치 리눅스, 젠투, 슬랙웨어를 포함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예 처음부터 개발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범용 기반을 두지 않는다. 그 대신 필수적인 구성 요소만 포함하되 배포판의 이용에 과도한 것으로 간주되는 구성 요소로 인해 발생되는 자원 부하를 회피하는 JeOS 철학에 초점을 둔다. ==== 홈 시어터 PC ==== 홈 시어터 PC(HTPC)는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특히 홈 시어터 시스템으로 주로 사용되는 PC를 말한다. 텔레비전에 보통 연결되며 추가적인 오디오 시스템이 포함되기도 한다.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 Kodi를 통합한 리눅스 배포판 OpenELEC는 HTPC용으로 개발된 운영 체제이다. JeOS 철학을 고수하여 개발된 이 운영 체제는 매우 가벼운 편이며 HTPC 범주에서만 사용 시 매우 적절하다. 우분투의 특별판인 Mythbuntu 등 MythTV 미디어 센터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는 특수 에디션인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 디지털 보안 ==== 칼리 리눅스는 디지털 포렌식과 침투 시험을 위해 설계된 데비안 기반 리눅스 배포판이다. 보안 취약점의 침투 시험 및 식별을 위한 여러 응용 소프트웨어가 사전 설치되어 있다. 우분투 파생판 백박스는 도덕적 해킹(화이트 해킹)을 위해 보안 및 네트워크 분석 도구들이 사전 설치되어 있다. Arch 기반 BlackArch는 침투 및 보안 연구를 위한 도구 2,100개가 포함되어 있다. 프라이버시, 기밀, 네트워크 익명성, 정보 보안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수많은 리눅스 배포판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Tails, 틴햇 리눅스, 틴포일 햇 리눅스가 포함된다. 라이트웨이트 포터블 시큐리티는 아치 리눅스 기반 배포판의 하나로서, 미국 국방부가 개발한 것이다. Tor-ramdisk는 네트워크 익명 소프트웨어 토르의 호스팅 전용 목적으로 개발된 초소형 배포판이다. ==== 시스템 복구 ==== 리눅스 라이브 CD 세션은 고장난 컴퓨터 시스템으로부터 데이터를 복구하기 위한 도구로서, 또 시스템을 수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왔다. 이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고 이 목적을 위한 여러 리눅스 배포판들이 등장했는데, 이 중 다수가 파티션 편집기 GParted, 그리고 추가 데이터 복구 및 시스템 수리 소프트웨어를 포함하고 있다: * GParted Live GParted 프로젝트가 개발한 데비안 기반 배포판. * Parted Magic 상용 리눅스 배포판. * SystemRescueCD 윈도우 레지스트리 편집을 지원하는 Arch 기반 배포판 ==== 우주에서 ==== 스페이스X는 팰컨 9 로켓의 장애 허용 디자인에서 여러 비행 컴퓨터를 사용한다. 각 멀린(Merlin) 엔진은 3대의 보팅(Voting)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며 컴퓨터 1대당 2개의 물리적 프로세서는 다른 컴퓨터의 작동을 지속적으로 검사한다. 리눅스는 태생적으로 장애 허용이 아니지만 비행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이 목적을 위해 장애를 허용한다. 유연성을 위해 방사능 내성 부품 대신 출하 대기 부품들과 시스템 방사능 허용 디자인이 사용된다. 2019년 7월 기준으로 스페이스X는 2010년 이후로 팰컨 9을 76회 이상 발사하였다. 드래곤 2 크루 캡슐은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위해 크로미엄 OS와 결합된 리눅스를 사용한다. 우주 정거장에서는 임무에 중요하지 않은 노트북에는 윈도우가 운영 체제로 채용되었으나 나중에 리눅스로 대체되었다. 우주의 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 Robonaut 2 또한 리눅스 기반이다. 제트 추진 연구소는 무인 우주 비행 및 심해 탐험 구성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리눅스를 사용해 왔다. NASA는 화성 탐사로봇의 로봇공학에 리눅스를 사용하며 위성으로부터 오는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우분투 리눅스를 사용한다. ==== 교육 ==== 리눅스 배포판은 학생들이 직접 코딩과 소스 코드를 다루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라즈베리 파이와 같은 장치용으로 개발되었다. 실제 장치를 개발하는 것 외에 실제 작동 원리를 학생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우분투 파생판 에듀분투와 리눅스 스쿨 프로젝트, 데비안 파생판 스콜리눅스는 교육 지향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학교 컴퓨터실과 컴퓨터 기반 교실을 관리하고 만드는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예: 리눅스 터미널 서버 프로젝트/LTSP) ==== 기타 ==== 인스턴트 웹키오스크와 웹컨버저는 브라우저 기반 리눅스 배포판으로, 주로 키오스크와 디지털 사이니지에 사용된다. 씬스테이션은 씬 클라이언트용으로 설계된 미니멀리스트 배포판이다. 록스 클러스터 디스트리뷰션은 HPCC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정 언어나 지리에 속한 사용자처럼 특정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범용 리눅스 배포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중국어 사용자를 대상으로는 우분투 기린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블랙온(BlackOn)이 있다. 직무 특화 배포판들로는 미디어 제작을 위한 우분투 스튜디오, 생물정보학을 위한 DNA리눅스를 들 수 있다. 이슬람 지향 배포판 Sabily는 일부 이슬람교 도구를 제공한다. 특정 기관들은 조금 더 특수한 형태의 리눅스 배포판들을 사용하는데, 프랑스 육군 현병대(National Gendarmerie)에 쓰이는 GendBuntu, 구글에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Goobuntu, 러시아군용으로 개발되는 아스트라 리눅스가 있다. 자유/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여러 양적 연구는 시장 점유율과 신뢰성을 포함한 주제에 초점을 두며 수많은 연구가 리눅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리눅스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리눅스를 구동하는 서버, 데스크톱, 소프트웨어 패키지들의 소득은 2008년 35,700,000,000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었다. 분석가들과 지지자들은 리눅스의 상대적 성공을 보안, 신뢰성, 낮은 비용, 벤더 락인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 데스크톱, 노트북 : 웹 서버 통계에 따르면(클라이언트 장치의 웹사이트 방문 수에 기반) 2018년 11월 기준으로 데스크톱 컴퓨터의 리눅스 추산 시장 점유율은 약 2.1%이다. 이와 비교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약 87%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macOS는 약 9.7%를 차지하고 있다. ; 웹 서버 : W3Cook는 상위 1,000,000개 알렉사 도메인을 사용하는 통계를 출판하며, 2015년 5월 기준으로 웹 서버 중 96.55%가 리눅스를 구동하고 1.73%가 윈도우를 구동하며 1.72%가 FreeBSD를 구동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W3Techs는 매월 업데이트되는 상위 10,000,000개 알렉사 도메인을 사용하는 통계를 출판하며 2016년 11월 기준으로 웹 서버 중 66.7%가 리눅스/유닉스를 구동하며, 33.4%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구동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2008년 9월 마이크로소프트의 당시 CEO 스티브 발머는 웹 서버 중 60%가 리눅스를 구동하였으며 40%가 윈도우 서버를 구동하였다고 언급하였다. :IDC의 2007년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리눅스는 전체 서버 시장의 12.7%를 차지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 추산치는 다양한 기업에 의해 판매되는 리눅스 서버의 수에 기반을 두며 이후 리눅스가 설치된 별도 구매 서버 하드웨어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 모바일 장치 : 리눅스 커널에 기반을 둔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지배적인 운영 체제가 되었다. 2013년 2/4분기 중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는 스마트폰 가운데 79.3%가 안드로이드를 사용한다. 또, 안드로이드는 태블릿의 대중적인 운영 체제이기도 하며 2013년 판매 기준 태블릿의 60% 이상이 안드로이드를 사용한다. 웹 서버 통계에 따르면 2014년 12월 기준 안드로이드는 약 46%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며 iOS는 45%를 차지하고 나머지 9%가 다양한 틈새 플랫폼이 차지한다. ; 영화 제작 : 수년 간 리눅스는 영화 산업에서 선택되는 플랫폼이 되었다. 리눅스 서버에서 제작된 최초의 메이저 영화는 1997년의 타이타닉이었다. 그 뒤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픽사, 웨타 디지털, 인더스트리얼 라인트 앤드 매직 등 주요 스튜디오들이 리눅스로 이관하였다. 리눅스 영화 그룹(Linux Movies Group)에 따르면 대형 애니메이션과 시각 효과 기업의 서버와 데스크톱 중 95% 이상이 리눅스를 사용한다. ; 정부에서의 사용 : 리눅스 배포판은 여러 지역 및 국가 정부에서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 브라질 연방 정부는 리눅스를 지원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군이 자체 리눅스 배포판을 만든다는 소식이 표면화되고 있으며 G.H.ost 프로젝트로서 성과를 얻었다. 인도 케랄라주는 주의 모든 고등학교의 컴퓨터에 리눅스 구동을 강제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기술 독립 달성을 위해 Loongson 프로세서 계열을 위한 운영 체제로 리눅스를 사용한다. 스페인에서 일부 지역은 자체 리눅스 배포판을 개발하고 있으며 교육과 여러 공식 기관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 또한 리눅스 채택을 향한 단계를 밟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붉은별 운영 체제는 2002년 이후로 개발되고 있으며 페도라 리눅스 버전에 기반을 둔다. ; 금융 : 카카오뱅크는 2017년에 대한민국 금융권 중 최초로 전산 시스템에 리눅스를 도입하였다. 국민은행은 2020년도의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메인프레임과 함께 리눅스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는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유닉스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증권(주식) 거래소인 한국거래소(KRX)는 대한민국 자본 시장 거래 시스템 최초로 2014년에 리눅스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리눅스 커널은 GNU GPL 버전 2로 라이선스된다. GPL는 해당 라이선스의 소스 코드에 기반한 소프트웨어를 배포하는 누구든지 동일 조항으로 소스 코드(수정사항 포함)를 배포해야 한다. 일반적인 리눅스 배포판의 주된 기타 구성 요소들 또한 주로 GPL로 라이선스되지만 다른 라이선스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라이선스들은 GPL보다 더 허용점이 많은 LGPL을 사용하며 X 윈도 시스템의 X.Org 구현체는 MIT 라이선스를 사용한다.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이 GPL 버전 2에서 버전 3로 이동되지 않을 것이라 언급하였다. 그는 디지털 권리 관리 내에서 소프트웨어의 이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라이선스를 싫어하였다. 수천에 달하는 모든 저작권 보유자들로부터 권한을 취득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2001년 레드햇 리눅스 7.1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30,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다. COCOMO(Constructive Cost Model) 하에서 이루어진 이 연구에 따르면 이 배포판은 대략 인간 나이로 8000년의 개발 시간이 요구되었다. 또, 연구에 따르면 이 소프트웨어가 전통적인 사유 수단으로 개발되었다면 미국에서 개발 시 대략 $( 미국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소스 코드 대부분(71%)이 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되었으나 그 외 C++, 리스프, 어셈블리어, 펄, 파이썬, 포트란, 다양한 셸 스크립트 언어를 포함한 수많은 언어들이 사용되었다. 모든 코드 줄의 절반 이상이 GPL로 라이선스되었다. 리눅스 커널 그 자체는 2,400,000개 줄로 구성되며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이후 연구에서 동일 분석이 데비안 버전 4.0에 대해 수행되었다(2007년 출시). 이 배포판은 283,000,000줄의 소스 코드가 포함되었으며 전통적인 수단으로 개발한다고 보았을 때 인간 나이로 대략 7300년의 개발 시간, US$( 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었다. "Linux"라는 이름은 스위스 기업 로슈가 제조한 세탁용 세제에도 사용된다. 미국에서 리눅스라는 이름은 리누스 토르발스가 등록한 상표명이다. 처음에 누구도 등록하지 않다가 1994년 8월 15일 윌리엄 R. 델라 크로스 주니어는 리눅스라는 상표를 신청한 다음 리눅스 배포자들로부터 로열티를 요구했다. 1996년, 토르발스와 일부 영향을 받은 단체들은 상표가 토르발스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고소했으며 1997년 논쟁이 해결되었다. 상표의 라이선스 부여는 그 뒤로 리눅스 마크 인스티튜트(LMI)가 관리하고 있다. 토르발스는 오직 다른 사람이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명칭을 등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LMI는 원래 상표의 일부로서 리눅스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명목적 2차 라이선스 비용을 청구하였으나 나중에 무료의 계속되는 전 세계적 2차 라이선스를 선호하게 되면서 이를 변경하였다.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SF)은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리눅스 배포판을 FSF의 회장 리처드 스톨만이 1983년 시작한 GNU 운영 체제의 일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눅스 커널 기반 운영 체제이기도 한 안드로이드 OS에 대해 안드로이드라는 이름에 대해 문제를 분명히 제기하지 않았는데, GNU가 그 일부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스톨만과 FSF 외 소수의 유명 인사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특히 데비안(1996년까지 FSF의 후원을 받음) 또한 운영 체제 전반을 가리킬 때 GNU/리눅스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매체와 일반 이용 시에는 운영 체제 계열을 말할 때 단순히 "리눅스"라고 부르며 이는 수세 리눅스, 레드햇 엔터프라이즈 리눅스처럼 수많은 대형 리눅스 배포판을 가리킬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유 소프트웨어만을 포함하는 리눅스 배포판들은 GNU/리눅스 또는 단순히 GNU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Trisquel GNU/Linux, Parabola GNU/Linux-libre, BLAG Linux and GNU, gNewSense를 들 수 있다. 2011년 5월 기준으로, 우분투의 Natty 릴리스를 구성하는 소스 코드 줄을 셀 경우 현대 리눅스 배포판의 약 8~13%는 GNU 구성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이 범위는 그놈이 GNU의 일부에 속해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한편, 6%는 리눅스 커널이 차지하며 직접적인 의존성을 포함할 경우 그 수치는 9%로 늘어난다. * 리눅스 배포판 비교(en) * 오픈 소스와 클로즈드 소스의 비교(en) * 운영 체제 비교(en) * X 윈도 시스템 데스크톱 환경 비교(en) * 리눅스에 대한 비판(en) *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 * 리눅스 프롬 스크래치 * 리눅스 소프트웨어 맵(en) * 리눅스 배포판 :* 리눅스 배포판 목록(en) :* 하모니카 (운영 체제) :* 구름 플랫폼 :* 한컴 구름 :* 티맥스OS * 리눅스용으로 출시된 게임 목록(en) * 운영 체제 목록 * 적재 가능 커널 모듈 ; 내용주 * * 리눅스 커널의 구조도 * 리눅스 커널 웹사이트와 아카이브 * 리눅스의 역사 (GIT 저장소 포맷 1992–2010) === 한국어 === * 한국 페도라 리눅스 사용자 모임 * KLDP * 한국 리눅스 사용자 그룹 * 한국데비안사용자모임 * 리눅스 커뮤니티 하모니카 분류:1991년 소프트웨어 분류:컴퓨팅 플랫폼 분류:크로스 플랫폼 소프트웨어 분류:핀란드의 발명품 분류:리누스 토르발스 분류:유닉스 계열 분류: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운영체제
미국
[ "Introduction", "명칭", "역사", "지리·기후·자연 환경", "미국의 주", "인구 통계", "도시와 지역", "정치", "국방", "경제", "교육", "교통", "문화", "같이 보기",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
[ "\n\n\n\n\n'''미합중국'''(, ), 약칭 '''미국'''(, , )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에 위치한 하와이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캐나다와 남쪽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닿는다. 또한 북아메리카 북서측에 있는 알래스카는 동측으로는 캐나다와 서측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에 해외 영토를 보유한다.\n\n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 번째로 넓은 국가이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문화 국가 중 하나로, 주로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 미국의 경제는 2019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21조 4394억 달러로,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경제를 보유하고 있다.\n\n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원주민들의 수는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결국엔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n\n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와 산업화된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를 선도하는 나라이다.http://news.bbc.co.uk/2/hi/americas/country_profiles/1217752.stm Country Profile: United States of America, BBC News, 2008-04-22.\n", "\n\n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 국호의 축약형인 'United States'도 표준 명칭이다. 그 밖에 흔히 쓰이는 명칭으로는 'the U.S.', 'the USA', 'America'가 있다.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이름으로는 'the U.S. of A.'와 'the States'도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명칭인 '컬럼비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말로,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도 나오는 이름이다.\n\n영어권에서 미국인을 이를 때 데모님으로 '아메리칸'(American)을 사용한다. 또 미국의 정식 수식어는 'United States of America'이지만, 'America'나 보통 A를 제외한 'U.S.'가 가장 흔히 미국을 일컫는 수식어다.\n\n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서는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n", "\n===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n\n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n\n파일:MayflowerHarbor.jpg|왼쪽|섬네일|1620년에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갔다. 그림은 윌리엄 핼샐의 '플리머스 항구의 메이플라워 호', 1882년작.\n\n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거의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섬의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의 이전 수도) 등 허드슨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절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n\n파일:GezichtOpNieuwAmsterdam.jpg|섬네일|260px|뉴암스테르담, 후에 뉴욕으로 개명하고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1664년작.\n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n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거의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n\n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 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n\n=== 독립과 영토 확장 ===\n\n파일:Declaration of Independence (1819), by John Trumbull.jpg|섬네일|독립 선언. 존 트럼벌 그림. 1817-18년작.\n\n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n\n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n\n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n\n미국의 연도별 영토 확장.\n\n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 ~ 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n\n=== 내전과 산업화 ===\n\n\n파일:Battle of Gettysburg, by Currier and Ives.png|섬네일|왼쪽|\"게티즈버그 전투\", 쿠리에 & 이브의 석판화. 1863년경.\n\n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n\n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n\n===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 ===\n\n\n파일:Dust Bowl - Dallas, South Dakota 1936.jpg|섬네일|왼쪽|1936년 더스트볼로 버려진 사우스다코타의 농장.\n\n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거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인 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n\n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회의와 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n\n=== 냉전, 저항 정치, 사회 변혁 ===\n\n\n파일:The United Nations Secretariat Building.jpg|섬네일|뉴욕의 미드타운 맨해튼에 위치한 유엔 본부\n파일:Martin Luther King - March on Washington.jpg|섬네일|왼쪽|위오른쪽|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n\n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 ~ 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n\n\n1961년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n마틴 루서 킹 2세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이 반전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 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n\n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n\n=== 오늘날 ===\n\n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일어난 세계 무역 센터 테러.\n\n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n\n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 'Old’ and ‘New’ Europeans United: Public Attitudes Towards the Iraq War and US Foreign Policy , John Springford, Centre for European Reform, December 2003.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21년에는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했다.\n", "\n파일:USA-satellite.jpg|오른쪽|섬네일|300px|미국 본토의 위성 지형 사진.\n\n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000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000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주 면적은 160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위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n\n파일:Bald Eagle Portrait.jpg|섬네일|왼쪽|160px|1782년 이래 미국의 국조인 흰머리수리.\n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의 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인 미시시피강-미주리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과 캐스케이드산맥은 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나 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n\n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과 워싱턴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n\n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 관리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n\n=== 환경문제 ===\n1970년대 이후로 환경 문제가 국가 의제에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원료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논쟁, 공기와 수질 오염, 야생동물(주로 늑대나 매, 고라니, 독수리, 사슴 외)과 산림 벌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 환경갈등이 계속되었다. 환경문제는 거의 대부분 연방정부와 국가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점은 1970년대 대통령명으로 만들어진 미국 환경보호국 (ERA)이다. 1964년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토지 중 황무지를 사용하는 일환으로 원시지역 보호법을 만들었다. 1973년 절멸 위기종 보호법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n", "\n\n\n주(州, state)는 미국의 최고 단계 행정구역으로, 총 50개가 있다.\n", "\n\n=== 인종과 언어 ===\n\n출신 국가별 인종 분포, 2000년 기준.\n\n\n\n\n\n인종/민족\n\n\n\n(2014년 조사 기준)\n\n\n\n인종:\n\n\n\n 백인 \n\n77.4%\n\n\n\n 아프리카계 미국인 \n\n13.2%\n\n\n\n 아시아계 \n\n5.4%\n\n\n\n 아메리카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n\n1.2%\n\n\n\n 하와이 원주민, 태평양 섬 원주민 \n\n0.2%\n\n\n\n 기타 \n\n6.2%\n\n\n\n 혼혈인 \n\n 2.5%\n\n\n\n민족:\n\n\n\n 히스패닉/라티노 \n\n17.4%\n\n\n\n 히스패닉/라티노 이외 \n\n82.6%\n\n\n미국의 인구는 2019년 기준 '''329,676,200명'''으로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이다. 2000년 조사된 인구 분포도를 보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75.1~81.1%, '''흑인'''이 약 12.3~12.6%, '''아시아계''' 3.7~3.9%, '''미국원주민'''이 0.8%다.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중에서도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n\n미국의 발전은 그 역사를 통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로부터의 이민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 이들 민족은 융합하여 새로운 아메리카 민족을 구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국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분명히 몇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백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중에서도 출신 국가별로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최초로 이주해 온 것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이 밖에 독일인 등이 추가되었지만 중심은 영국인이었으므로 현재도 미국에서는 영어가 일상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미국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어휘나 문법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는 종래의 북유럽계의 이민에 비하여 이탈리아인·슬라브인 등의 남유럽계·동유럽계 이주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할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이민을 가장 많이 온 때는 188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이며, 그 전후를 포함하여 1820년부터 1961년까지의 4,200만 명이 입국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멕시코인·쿠바인·푸에르토리코인 등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총칭하여 신이민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 이주하게 된 유대인은 특이한 존재로서, 현재 전 세계 1,500만의 유대인 중 약 550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자산가나 훌륭한 학자가 많고, 각지에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미국 사회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n\n비(非) 백인 가운데 가장 큰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은 히스패닉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유입 및 높은 출산율 등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소수 집단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넘어섰다. 또한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 히스패닉계 주민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그들의 거주지가 미국에 병합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n\n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남부, 북부와 중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아시아계 이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나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주류는 아니다. 한국계 주민들은 약 2백만명, 중국인은 약 3백만명, 일본인은 약 80만명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 많다.\n\n미국 남부에는 흑인이 많이 밀집해있으며, 이 지역의 백인은 주로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다. 동북부 지역의 인종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중북부 지역은 독일계, 아일랜드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백인이, 남서부는 히스패닉이, 서부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n\n미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공용어는 사실상 영어 (미국 영어)이나, 히스패닉계 인구가 많은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를, 특정 민족의 인구가 많은 구역은 그 민족의 언어를 공공 표지판 등에 병기하기도 한다.\n\n\n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해당하는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 그리고 이들의 현대 후손이다. 이 표현은 광범위한 부족, 국가, 민족을 포괄하며 이 중 많은 무리들은 오늘날에 정치적 공동체로 살아남았다.\n", "\n파일:1 times square night 2013.jpg|섬네일|타임 스퀘어 (2013), 뉴욕, 언론과 미국 소비자뿐만 아니라 브로드 웨이 극장 등 지구를 나타낸다.\n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 및 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는 세계대전과 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n\n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과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n\n파일:1 Las vegas strip.jpg|섬네일|왼쪽|미국의 오락, 관광산업의 중심지인 라스베이거스.\n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와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n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콜로라도주의 덴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n\n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n\n파일:Waipio Valley, Big Island.jpg|섬네일|하와이주의 자연경관\n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n\n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 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n\n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n\n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 있다.\n\n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고 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n\n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 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n\n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 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정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n\n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다음은 인구순으로 나열한 도시 목록이다.\n\n\n\n=== 국민성 ===\n다양하고 복잡한 국민성을 다음의 항목에 열거하였다.\n* 선택의 자유와 책임감: 사상적 자유와 소비 선택, 진로 선택 등의 자유는 완벽히 보장되며 그에 따른 책임감은 항상 따른다.\n* 독립과 자립: 미국 부모의 자녀 교육의 최고 목표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으로, 어린이는 어릴 때부터 이를 기른다.\n* 가치의 존중과 인간애 정신\n* 자유민주주의와 타 문화에 대한 개방성\n* 준법정신과 국가협력적 태도 및 애국심: 교통질서뿐만 아니라, 범법적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범죄자에 대한 자비는 없다. 감옥체계가 발달되었다.\n* 가족 중심의 사회 그리고 높은 이혼율과 가족관계의 경제적 선택: 가족이 모든 개인의 중심에 있고 서로 의지하나,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독립되어있고, 이에 따라 이혼이 쉽게 인정된다.\n* 기독교 문화 속 휴일과 감사하는 태도: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은 국가 최대 휴일이고 광범위한 일에 걸쳐 기독교 정신이 자리 잡고있다.\n* 남녀평등과 개방적인 성문화: 남녀의 성적 역할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나, 성적 차이는 차별받지 않으며, 성문화가 개방적이다.\n* 물질적 번영과 미국제일주의: 높은 국민 소득과 생활 수준이 미국 것이 제일이라는 안이한 태도를 만들기도 한다.\n* 소비 생활과 사치성 문화, 대중 문화\n\n=== 미국의 이민 정책 ===\n미국은 이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다. 초기에 미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유색인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일터에 뿌리를 내린 백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유색인 이민문호를 조절했다.\n\n미국은 1850년 무렵부터 아시아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 조짐이 있자, 1882년 중국인 이민부터 금지시키더니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보다 앞선 1913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막았는데, 표적은 아시아계였다. 토지를 소유하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미국시민(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는데 아시아계 이민 1세는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n\n그러다 2차 대전에서 중국과 연합국으로 싸우게 되자 중국에 이민문호를 개방한 것이 1943년, 인도가 1946년,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1952년에 와서야 이민문호를 다시 열었다. 문호를 개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민이 허용되는 숫자는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52년 개정법으로 아시아 이민 1세도 미국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투표권이 있다는 말로 크건 작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면서도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n\n구체적으로 인종 문제가 사회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n\n=== 인종 문제 ===\n앵글로-색슨족(Saxons)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북방계의 이주자들은 이주 시기가 빨랐다는 점도 있어 일찍이 융합하였으며,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이주한 신이민들은 일반적으로 신참자(新參者)로서 생활의 기반이 약한 데다가 유대인·아시아인 등은 인종·문화가 구(舊) 이민과 이질적이어서 동화하기 어려우며, 배척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인종문제로서 최대의 문제는 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흑인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팔려 온 그들은 해방 후 전국 어느 곳에나 거주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선 교육·취직·거주 등의 분야에 불평등한 점이 남아 있고, 이에 항의하는 흑인의 행동도 차츰 격렬해지고 있어, 오늘날 미국 내에서 최대의 사회 문제로 되어 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인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절대수도 많지는 않은데 신이민으로서 흑인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상태는 차츰 사회문제화되어 가고 있다.\n\n=== 종교 ===\n\n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민 온 개신교 신자들 즉, 청교도들은 초기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전통종교를 배격했으며, 같은 기독교 종파들인 성공회와 천주교회도 성공회 기도서 사용 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천주교회 신자 이민거부로 배척했다.\n하지만 건국 후에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미국의 특징상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지만,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 1회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가 다수며 그외 가톨릭교회 및 기타 다양한 종교가 있다. 또한 유대교도도 많아서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앙심도 미국인들은 매우 높아 신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94%에 달할만큼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천주교회와 유대인을 공격했던 시기도 있었고, 존 F. 케네디외에는 천주교 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같은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같이 종교나 민족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적지 않다.\n\n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천주교회에서 분리된 이후,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전통들을 배척한 성경주의자들로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에 이주한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 분리주의자 형제’들을 후에 침례교 또는 침례교인이라고 불렀다.\n\n미국에 1620년 이주한 이들은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는데,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플리머스 정착지에 이주했다. 이 플리머스 정착지는 메사추세스 식민지에 흡수된다. 후에 이들을 일컬어 '필그림 파더스'라고 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되었다는 미국의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기독교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적인 신화라는 설명도 있다. 그 실례로 개혁교회 신학자이자 목사인 마이클 호턴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에서 독립혁명으로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신론자들이었음을 지적한다.\n\n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로서 초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집례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다소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로저 윌리엄스() 前 성공회 사제는 제정분리사상 즉, 종교와 정치의 분리사상을 주장하여, 1635년 청교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n\n로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남부에 정착하여 프로비던스(, 현재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에, 앤 허친슨처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앤 허친슨은 보스턴 주민이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26절과 디도에게 보낸 편지 2장 3~5절에 근거, 여성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추방명령을 받았고, 프로비던스로 피신했다. 물론 로저는 앤 허친슨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녀를 프로비던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의 종교적 자유 포용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n\n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절대다수 청교도들은 이것을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두려워했다. 이것은 1692년 살렘 마녀 사냥으로 폭발하는데, 메사추세스주 살렘에서 일부 시민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치사 또는 사형당한 사건으로, 50000명 중 1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초기 청교도 사회의 오점 중 하나다.\n\n근대 미국과 유럽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기독교와 시대의 연관성을 추구했다. 특히 미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리성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는 등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미국 성공회, 감리교,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장로교는 뉴욕 유니온을 중심으로 한 축을 형성하였을 뿐 여전히 정통 칼뱅주의가 주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은 소수 보수파 칼뱅주의 감리교회와 소수의 장로교회(예:칼 매킨타이어)와 절대다수의 침례교회에서 영향력을 보였는데, 1915년 출판된 《근본》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의 재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경무오설이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특징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구원관, 음주나 흡연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신학 교육과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도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n\n현재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70.6%가 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46.5%며,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있다. 이중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19세기 소위 환원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발생한 자생적인 교파다. 천주교회는 20.8%로 단일 교단으로는 최대 규모다. 정교회는 3%다. 그 중 미국 그리스 정교회 관구 대교구 소속 신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들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학교 졸업식에 개신교 목사가 기도를 할 정도로 개신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다.\n\n한편, 미국 천주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 법조계 인사들은 보수 정치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에야 차별이 완화된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법조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현재 미국 법조계 내 보수주의 대변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인데, 2005년 감리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데 이어, 또 다시 보수 천주교 신자 새뮤얼 알리토를 대법관으로 추천하는 등 미국 보수 천주교와 보수적 복음주의간의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n\n그 외 미국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 성공회()가 있는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시기에는 성공회 기도서 사용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등의 탄압을 받았으나,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일부 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 관구장 즉,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얼 쇼리 주교(1957년생)다.\n", "\n파일:Capitol Building Full View.jpg|섬네일|300px|미국 의회 의사당 서쪽 정면. 미국 상하원이 이곳에 있다.\n미합중국은 1776년 성립되어,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방 국가다. 미국은 \"법에 의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 최상위 법전인 헌법에 규정된 견제와 균형 체제에 따라 통제된다. 미국의 연방 제도에서 시민은 보통 세 단계의 정부 즉 연방, 주, 지역 단위에 속한다. 미국 헌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을 구성 주에서 위임받았는데, 그 가운데 국방·외교 정책·대외 무역의 조정 기능,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은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권에 속한다. 주 정부의 주요 기능은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공공안녕, 교도행정, 주내 통상의 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다. 지역 정부의 업무는 보통 각 군과 시 정부에 나눠 맡기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행정부와 입법부 공무원은 구역별로 시민의 다수 투표에 따라 선출된다.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는 없으며, 하위 정부 단위에서도 이 제도는 극히 드물다.\n파일:WhiteHouseSouthFacade.JPG|섬네일|250px|왼쪽|백악관 남쪽 정면. 미국 대통령의 관저이다.\n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주로 정치제도나 정치행동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브리엘 앨몬드(Gabriel A. Almond)가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정치문화는 동질적이고 세속적이다.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문화·경제 등에 걸쳐서 차이가 크며 시민의 이해(利害)도 대립하기 쉽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부터 정치의 목표는 항상 현실적이며, 동의에 입각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많은 가치가 복합된 정치문화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경험적인 정치문화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무대는 마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시장을 방불케 한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정치 참여 원칙이 관철되어 왔다.\n\n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3권분립을 엄격히 고수하고, 독립국에 가까운 주(州)제도를 채용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분립된 3권간에는 권력의 중복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정치체제 간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중복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연방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는 구성주정부가 연방정부에 위임하는 권한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그 외의 권한은 국민과 50개의 주가 보유하고 있다. 50개주는 연방 정부와 마찬가지로 주 정부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각부는 연방 정부의 각부와 동등한 기능 및 영역을 지닌다. 각 주의 행정 수반은 주지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권력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권력 분포와 행사에 있어서 중복현상과 마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강력하다. 단지 시대적인 차원에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50개주에 포함되지 않는 괌, 북마리아나제도 등의 속령 등 해외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 군대 최고 통수권자의 직함을 가지며, 국방 장관과 합동 참모총장을 임명한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을 비롯한 군 전체를 총괄한다. 해안 경비대의 경우 평화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전시에는 미 해군에서 관할한다.\n파일:Secretary Pompeo and Malaysian Prime Minister Mahathir Mohamad (42910851015).jpg|섬네일|미국 국무부 마이크 폼페이오와 말레이시아의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 (2018년 8월 3일) \n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체벌이 크게 줄었다. 현재 미국 내 학교 체벌을 적극 허용하거나 이를 규제하는 법안 및 관행이 없는 주는 19개다. 이외 31개 주에서는 공립학교에서의 체벌을 불법으로 금지, 아이오와, 몬타나, 델라웨어, 메릴랜드, 뉴저지 및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공립 뿐 아니라 사립학교에서도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n", "\n파일:US Navy 060618-N-8492C-212 An Air Force B-2 bomber along with other aircrafts from the Air Force, Navy and Marine Corps fly over the Kitty Hawk, Ronald Reagan and Abraham Lincoln Carrier Strike groups.jpg|섬네일|키티호크, 로널드 레이건호, 에이브러햄 링컨호와 해안경비대, 해군, 공군 비행기으로 이루어진 항모타격단.\n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n\n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과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공군, 우주군, 해병대를 포함한 군대를 통솔한다. 해안경비대는 평상시에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전쟁 상황에는 미 해군에서 통솔한다. 2008년 현역으로 있는 군인이 140만 명을 넘겼다. 예비군과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230만 명이 넘는다. 또한 국방부는 계약직을 포함하지 않은 민간인 7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n\n평상시에는 모병제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의무 징병 등록제를 통해 거의 대부분 징병제로 뽑는다. 미국 군대는 공군의 신속한 수송기, 해군의 11대 현역 항공모함, 해병 원정부대 해군 함대사령부와 태평양 함대를 통해 빠르게 투입할 수도 있다. 또한 해외에 865개의 해외 주둔 기지를 두고 있고, 25개 국가에는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주둔군은 미국 \"제국의 기반\"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n\n2011년 총 국방비 지출은 7,000억 달러 이상인데, 이는 세계 국방비의 41%며 상위 14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미군 국방비는 GDP 전체의 4.7%로, 상위 15개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CIA에 따르면 2012년 GDP 대비 미국 국방비 지출은 세계에서 23번째라고 한다. 미국 국방비는 냉전 시대 이후 최근 수 십년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1953년 전체 GDP의 14.2%, 1954년 연방비 69.5%를 맡은 것에 비해 2011년에는 GDP의 4.7%, 연방비는 18.8%로 감소했다.\n\n2012년 국방비 예산은 2011년보다 4.2% 증가한 5,530억 달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 때문에 1,180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n", "\n\n\n\n\n\n\n 경제 지표\n\n\n\n 실업률 \n\n 3.8% 2018년 5월\n\n\n\n\n\n GDP 성장률 \n\n 4.0%2014년 3/4분기 2.8%2014년 \n\n\n\n\n\n CPI 인플레이션 \n\n 2.9% 2011년 2월 ~ 2012년 2월 \n\n\n\n\n\n 공공 채무 \n\n 17조 2,300억 달러 2014년 7월 \n\n\n\n\n\n 빈곤율\n\n 12.7%2016년\n\n\n\n\n\n 국가 부(총 가치)\n\n 82조 2,000억 달러2015년 1/41분기 \n\n\n\n\n\n파일:NYC NYSE.jpg|섬네일|왼쪽|월 가의 뉴욕 증권거래소.\n미국의 경제 체제는 민주주의적 혼합 경제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높은 생산성을 누리고 있다. 미국이 부유한 경제를 이룩한 것은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존재와, 기술혁신이 뒷받침된 국내 산업이나 해외에서의 활발한 투자활동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것이다.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조 4128억 달러로, 시장 환율로 세계총생산(GWP)의 23%, 구매력 평가(PPP) 대비 세계총생산의 약 21%를 차지한다고 한다. 미국의 GDP는 세계 최대 규모며, 1인당 명목 GDP 9위, 구매력 평가 1인당 GDP 10위다.\n\n미국은 세계 최대 재화 수입국이며, 수출 규모는 세계 1위인데 1인당 수입액은 비교적 낮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이 있다. 2007년, 자동차는 주요 수출입 품목이었다.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 약 6년간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2007년 12월부터 침체기를 맞고 있다. 한편 미국은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n\n2009년 미국 경제에서 개인 부문은 전체 중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연방 정부 활동은 24.1%, 주 및 지역 정부 활동(연방 이전액 포함)은 20.6%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탈산업화 단계로, 서비스 산업이 GDP의 67.8%를 차지하지만, 지금도 미국은 산업 강국이다. 기업 총수령액 기준 주요 사업 문야는 도소매 무역이며, 순수입 기준으로는 제조업이 주된 분야다. 화학 공학 제품은 주요 제조업 분야이다. 미국은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며,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미국은 전기 및 핵 에너지를 비롯하여 액화 천연 가스, 황, 인지질, 소금 생산에서 세계 1위다. 농업은 미국 GDP의 1%를 넘지 미국은 옥수수와 콩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달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기업이다.\n\n2009년 3/4분기에 미국 노동 인구는 1억 5,440만 명이었다. 이 중 고용 인구의 81%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2,240만 명을 거느린 미국 정부는 주요 고용처다. 미국 노동자의 노동 조합 조직률은 12% 정도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 세계 은행은 미국을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 1위로 들었다. 1973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199시간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에 미국은 시간당 노동 생산성 면에서 십년 전까지만해도 미국보다 높던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따라 잡았다. 유럽과 견주어 미국의 자산 및 법인 소득세율은 보통 높은 편이며, 노동 특히 소비세율은 낮다. 미국은 내수경제가 튼실한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내수 위주로 산업기반을 바꾸기도 했다. 세계최대 석유 비축량에 셰일 가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최첨단 공산품을 많이 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계층이 적고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여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토는 넓고 자원은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공급된다.\n", "파일:UVA Rotunda.jpg|섬네일|250px|버지니아 대학교,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했으며,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n\n\n\n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 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 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n\n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와 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와 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와 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n", "\n총 의 길이를 자랑하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 지도.\n개인 교통수단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자동차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망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데 1억 3천 만개의 도로가 펼쳐져 있다.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며, 미국인 1,000명당 765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자동차 보급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용 자동차의 40%는 밴, SUV, 소형 트럭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9마일 (47 km)을 다니며 55분을 운전하는데 보낸다.\n\n미국인 전체 출퇴근자의 9%는 매스 트랜싯을 이용한다. 철도를 이용한 화물수송은 광범위 한 반면에 여객 철도 이용률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암트랙의 국가 여객 철도 시스템의 이용자 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37%가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매년 경전철 개발이 증가하고 있다.\n\n미국은 국토가 넓은 덕에 항공 산업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항공사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가 모두 미국에 있으며 2013년 아메리칸 항공이 US 에어웨이즈와 합병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30개 중 미국에서 가장 바쁜 공항인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포함해 16개 공항이 이름을 올렸다.\n", "\n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이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n=== 대중 매체 ===\n\n파일:PB050006.JPG|섬네일|왼쪽|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할리우드 사인.\n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n\n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 "* 한국계 미국인\n* 다민족 국가\n* 미국의 이민\n* 영어\n* 초강대국\n* 패권주의\n* 미국, 400년의 도전(:en:America: The Story of Us)\n* 북대서양 조약\n", "; 내용\n\n; 출처\n\n", "\n* 로저 윌리엄과 살렘 마녀사냥에 대한 기사는 《5시간만에 읽는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유재덕 지음/작은 행복을 근거로 작성.\n", "\n* 정부 공식 홈페이지\n* 백악관 홈페이지\n*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n* 주한미국대사관 및 영사관\n* 아메리칸 디플로머시 하우스 (구 미문화원) 홈페이지\n\n* \n* \n\n* \n\n\n\n\n\n\n\n \n분류:G7 회원국\n분류:G20 회원국\n분류:유엔 회원국\n분류:영국의 옛 식민지\n분류:영어권\n분류:연방제 국가\n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n분류: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n분류:아메리카 국가 기구 회원국\n분류:초강대국\n분류:G8 회원국" ]
'''미합중국'''(, ), 약칭 '''미국'''(, , )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에 위치한 하와이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는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캐나다와 남쪽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닿는다. 또한 북아메리카 북서측에 있는 알래스카는 동측으로는 캐나다와 서측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에 해외 영토를 보유한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 번째로 넓은 국가이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문화 국가 중 하나로, 주로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 미국의 경제는 2019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21조 4394억 달러로,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경제를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원주민들의 수는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결국엔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와 산업화된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를 선도하는 나라이다.http://news.bbc.co.uk/2/hi/americas/country_profiles/1217752.stm Country Profile: United States of America, BBC News, 2008-04-22. 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 국호의 축약형인 'United States'도 표준 명칭이다. 그 밖에 흔히 쓰이는 명칭으로는 'the U.S.', 'the USA', 'America'가 있다.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이름으로는 'the U.S. of A.'와 'the States'도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명칭인 '컬럼비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말로,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에서도 나오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 미국인을 이를 때 데모님으로 '아메리칸'(American)을 사용한다. 또 미국의 정식 수식어는 'United States of America'이지만, 'America'나 보통 A를 제외한 'U.S.'가 가장 흔히 미국을 일컫는 수식어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미국(美國)'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서는 '亞米利加'(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을 사용한다.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 ===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식민지화 ===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파일:MayflowerHarbor.jpg|왼쪽|섬네일|1620년에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갔다. 그림은 윌리엄 핼샐의 '플리머스 항구의 메이플라워 호', 1882년작.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거의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섬의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의 이전 수도) 등 허드슨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절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파일:GezichtOpNieuwAmsterdam.jpg|섬네일|260px|뉴암스테르담, 후에 뉴욕으로 개명하고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1664년작.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거의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 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 독립과 영토 확장 === 파일:Declaration of Independence (1819), by John Trumbull.jpg|섬네일|독립 선언. 존 트럼벌 그림. 1817-18년작.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의 연도별 영토 확장.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 ~ 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 내전과 산업화 === 파일:Battle of Gettysburg, by Currier and Ives.png|섬네일|왼쪽|"게티즈버그 전투", 쿠리에 & 이브의 석판화. 1863년경.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 제1차 세계 대전과 대공황 === 파일:Dust Bowl - Dallas, South Dakota 1936.jpg|섬네일|왼쪽|1936년 더스트볼로 버려진 사우스다코타의 농장.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거의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인 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회의와 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 냉전, 저항 정치, 사회 변혁 === 파일:The United Nations Secretariat Building.jpg|섬네일|뉴욕의 미드타운 맨해튼에 위치한 유엔 본부 파일:Martin Luther King - March on Washington.jpg|섬네일|왼쪽|위오른쪽|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 ~ 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61년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 마틴 루서 킹 2세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이 반전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 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 오늘날 ===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일어난 세계 무역 센터 테러.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 'Old’ and ‘New’ Europeans United: Public Attitudes Towards the Iraq War and US Foreign Policy , John Springford, Centre for European Reform, December 2003.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21년에는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파일:USA-satellite.jpg|오른쪽|섬네일|300px|미국 본토의 위성 지형 사진.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000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000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주 면적은 160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위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 파일:Bald Eagle Portrait.jpg|섬네일|왼쪽|160px|1782년 이래 미국의 국조인 흰머리수리. 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의 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인 미시시피강-미주리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과 캐스케이드산맥은 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나 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과 워싱턴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 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 관리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 === 환경문제 === 1970년대 이후로 환경 문제가 국가 의제에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원료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논쟁, 공기와 수질 오염, 야생동물(주로 늑대나 매, 고라니, 독수리, 사슴 외)과 산림 벌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 환경갈등이 계속되었다. 환경문제는 거의 대부분 연방정부와 국가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점은 1970년대 대통령명으로 만들어진 미국 환경보호국 (ERA)이다. 1964년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토지 중 황무지를 사용하는 일환으로 원시지역 보호법을 만들었다. 1973년 절멸 위기종 보호법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 주(州, state)는 미국의 최고 단계 행정구역으로, 총 50개가 있다. === 인종과 언어 === 출신 국가별 인종 분포, 2000년 기준. 인종/민족 (2014년 조사 기준) 인종: 백인 77.4% 아프리카계 미국인 13.2% 아시아계 5.4% 아메리카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1.2% 하와이 원주민, 태평양 섬 원주민 0.2% 기타 6.2% 혼혈인 2.5% 민족: 히스패닉/라티노 17.4% 히스패닉/라티노 이외 82.6% 미국의 인구는 2019년 기준 '''329,676,200명'''으로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다.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이다. 2000년 조사된 인구 분포도를 보면 '''백인'''이 전체인구의 75.1~81.1%, '''흑인'''이 약 12.3~12.6%, '''아시아계''' 3.7~3.9%, '''미국원주민'''이 0.8%다.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 중에서도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미국의 발전은 그 역사를 통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로부터의 이민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 이들 민족은 융합하여 새로운 아메리카 민족을 구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국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분명히 몇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백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그 중에서도 출신 국가별로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최초로 이주해 온 것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이 밖에 독일인 등이 추가되었지만 중심은 영국인이었으므로 현재도 미국에서는 영어가 일상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미국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어휘나 문법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는 종래의 북유럽계의 이민에 비하여 이탈리아인·슬라브인 등의 남유럽계·동유럽계 이주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할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이민을 가장 많이 온 때는 188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이며, 그 전후를 포함하여 1820년부터 1961년까지의 4,200만 명이 입국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멕시코인·쿠바인·푸에르토리코인 등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총칭하여 신이민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 이주하게 된 유대인은 특이한 존재로서, 현재 전 세계 1,500만의 유대인 중 약 550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자산가나 훌륭한 학자가 많고, 각지에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미국 사회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 비(非) 백인 가운데 가장 큰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은 히스패닉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유입 및 높은 출산율 등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소수 집단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넘어섰다. 또한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 히스패닉계 주민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그들의 거주지가 미국에 병합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남부, 북부와 중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아시아계 이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나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주류는 아니다. 한국계 주민들은 약 2백만명, 중국인은 약 3백만명, 일본인은 약 80만명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 많다. 미국 남부에는 흑인이 많이 밀집해있으며, 이 지역의 백인은 주로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다. 동북부 지역의 인종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중북부 지역은 독일계, 아일랜드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백인이, 남서부는 히스패닉이, 서부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공용어는 사실상 영어 (미국 영어)이나, 히스패닉계 인구가 많은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를, 특정 민족의 인구가 많은 구역은 그 민족의 언어를 공공 표지판 등에 병기하기도 한다.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해당하는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 그리고 이들의 현대 후손이다. 이 표현은 광범위한 부족, 국가, 민족을 포괄하며 이 중 많은 무리들은 오늘날에 정치적 공동체로 살아남았다. 파일:1 times square night 2013.jpg|섬네일|타임 스퀘어 (2013), 뉴욕, 언론과 미국 소비자뿐만 아니라 브로드 웨이 극장 등 지구를 나타낸다. 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 및 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는 세계대전과 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 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과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 파일:1 Las vegas strip.jpg|섬네일|왼쪽|미국의 오락, 관광산업의 중심지인 라스베이거스. 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와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콜로라도주의 덴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 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파일:Waipio Valley, Big Island.jpg|섬네일|하와이주의 자연경관 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 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 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 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 있다. 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을 주된 산업으로 하고 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 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 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정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다음은 인구순으로 나열한 도시 목록이다. === 국민성 === 다양하고 복잡한 국민성을 다음의 항목에 열거하였다. * 선택의 자유와 책임감: 사상적 자유와 소비 선택, 진로 선택 등의 자유는 완벽히 보장되며 그에 따른 책임감은 항상 따른다. * 독립과 자립: 미국 부모의 자녀 교육의 최고 목표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으로, 어린이는 어릴 때부터 이를 기른다. * 가치의 존중과 인간애 정신 * 자유민주주의와 타 문화에 대한 개방성 * 준법정신과 국가협력적 태도 및 애국심: 교통질서뿐만 아니라, 범법적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범죄자에 대한 자비는 없다. 감옥체계가 발달되었다. * 가족 중심의 사회 그리고 높은 이혼율과 가족관계의 경제적 선택: 가족이 모든 개인의 중심에 있고 서로 의지하나,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독립되어있고, 이에 따라 이혼이 쉽게 인정된다. * 기독교 문화 속 휴일과 감사하는 태도: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은 국가 최대 휴일이고 광범위한 일에 걸쳐 기독교 정신이 자리 잡고있다. * 남녀평등과 개방적인 성문화: 남녀의 성적 역할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나, 성적 차이는 차별받지 않으며, 성문화가 개방적이다. * 물질적 번영과 미국제일주의: 높은 국민 소득과 생활 수준이 미국 것이 제일이라는 안이한 태도를 만들기도 한다. * 소비 생활과 사치성 문화, 대중 문화 === 미국의 이민 정책 ===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다. 초기에 미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유색인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일터에 뿌리를 내린 백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유색인 이민문호를 조절했다. 미국은 1850년 무렵부터 아시아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 조짐이 있자, 1882년 중국인 이민부터 금지시키더니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보다 앞선 1913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막았는데, 표적은 아시아계였다. 토지를 소유하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미국시민(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는데 아시아계 이민 1세는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2차 대전에서 중국과 연합국으로 싸우게 되자 중국에 이민문호를 개방한 것이 1943년, 인도가 1946년,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1952년에 와서야 이민문호를 다시 열었다. 문호를 개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민이 허용되는 숫자는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52년 개정법으로 아시아 이민 1세도 미국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투표권이 있다는 말로 크건 작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면서도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인종 문제가 사회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 인종 문제 === 앵글로-색슨족(Saxons)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북방계의 이주자들은 이주 시기가 빨랐다는 점도 있어 일찍이 융합하였으며,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이주한 신이민들은 일반적으로 신참자(新參者)로서 생활의 기반이 약한 데다가 유대인·아시아인 등은 인종·문화가 구(舊) 이민과 이질적이어서 동화하기 어려우며, 배척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인종문제로서 최대의 문제는 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흑인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팔려 온 그들은 해방 후 전국 어느 곳에나 거주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선 교육·취직·거주 등의 분야에 불평등한 점이 남아 있고, 이에 항의하는 흑인의 행동도 차츰 격렬해지고 있어, 오늘날 미국 내에서 최대의 사회 문제로 되어 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인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절대수도 많지는 않은데 신이민으로서 흑인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상태는 차츰 사회문제화되어 가고 있다. === 종교 ===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민 온 개신교 신자들 즉, 청교도들은 초기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전통종교를 배격했으며, 같은 기독교 종파들인 성공회와 천주교회도 성공회 기도서 사용 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천주교회 신자 이민거부로 배척했다. 하지만 건국 후에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미국의 특징상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지만,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 1회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가 다수며 그외 가톨릭교회 및 기타 다양한 종교가 있다. 또한 유대교도도 많아서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앙심도 미국인들은 매우 높아 신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94%에 달할만큼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천주교회와 유대인을 공격했던 시기도 있었고, 존 F. 케네디외에는 천주교 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같은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같이 종교나 민족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적지 않다. 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천주교회에서 분리된 이후,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전통들을 배척한 성경주의자들로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에 이주한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 분리주의자 형제’들을 후에 침례교 또는 침례교인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1620년 이주한 이들은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는데,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플리머스 정착지에 이주했다. 이 플리머스 정착지는 메사추세스 식민지에 흡수된다. 후에 이들을 일컬어 '필그림 파더스'라고 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되었다는 미국의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기독교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적인 신화라는 설명도 있다. 그 실례로 개혁교회 신학자이자 목사인 마이클 호턴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에서 독립혁명으로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신론자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로서 초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집례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다소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로저 윌리엄스() 前 성공회 사제는 제정분리사상 즉, 종교와 정치의 분리사상을 주장하여, 1635년 청교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로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남부에 정착하여 프로비던스(, 현재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에, 앤 허친슨처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앤 허친슨은 보스턴 주민이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26절과 디도에게 보낸 편지 2장 3~5절에 근거, 여성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추방명령을 받았고, 프로비던스로 피신했다. 물론 로저는 앤 허친슨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녀를 프로비던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의 종교적 자유 포용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절대다수 청교도들은 이것을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두려워했다. 이것은 1692년 살렘 마녀 사냥으로 폭발하는데, 메사추세스주 살렘에서 일부 시민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치사 또는 사형당한 사건으로, 50000명 중 1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초기 청교도 사회의 오점 중 하나다. 근대 미국과 유럽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기독교와 시대의 연관성을 추구했다. 특히 미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리성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는 등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미국 성공회, 감리교,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장로교는 뉴욕 유니온을 중심으로 한 축을 형성하였을 뿐 여전히 정통 칼뱅주의가 주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은 소수 보수파 칼뱅주의 감리교회와 소수의 장로교회(예:칼 매킨타이어)와 절대다수의 침례교회에서 영향력을 보였는데, 1915년 출판된 《근본》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의 재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경무오설이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특징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구원관, 음주나 흡연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신학 교육과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도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70.6%가 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46.5%며,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있다. 이중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19세기 소위 환원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발생한 자생적인 교파다. 천주교회는 20.8%로 단일 교단으로는 최대 규모다. 정교회는 3%다. 그 중 미국 그리스 정교회 관구 대교구 소속 신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들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학교 졸업식에 개신교 목사가 기도를 할 정도로 개신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다. 한편, 미국 천주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 법조계 인사들은 보수 정치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에야 차별이 완화된 미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법조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현재 미국 법조계 내 보수주의 대변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인데, 2005년 감리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 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데 이어, 또 다시 보수 천주교 신자 새뮤얼 알리토를 대법관으로 추천하는 등 미국 보수 천주교와 보수적 복음주의간의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 그 외 미국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 성공회()가 있는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시기에는 성공회 기도서 사용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등의 탄압을 받았으나,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일부 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 관구장 즉,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얼 쇼리 주교(1957년생)다. 파일:Capitol Building Full View.jpg|섬네일|300px|미국 의회 의사당 서쪽 정면. 미국 상하원이 이곳에 있다. 미합중국은 1776년 성립되어,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방 국가다. 미국은 "법에 의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 최상위 법전인 헌법에 규정된 견제와 균형 체제에 따라 통제된다. 미국의 연방 제도에서 시민은 보통 세 단계의 정부 즉 연방, 주, 지역 단위에 속한다. 미국 헌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을 구성 주에서 위임받았는데, 그 가운데 국방·외교 정책·대외 무역의 조정 기능,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은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권에 속한다. 주 정부의 주요 기능은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공공안녕, 교도행정, 주내 통상의 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다. 지역 정부의 업무는 보통 각 군과 시 정부에 나눠 맡기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행정부와 입법부 공무원은 구역별로 시민의 다수 투표에 따라 선출된다.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는 없으며, 하위 정부 단위에서도 이 제도는 극히 드물다. 파일:WhiteHouseSouthFacade.JPG|섬네일|250px|왼쪽|백악관 남쪽 정면. 미국 대통령의 관저이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주로 정치제도나 정치행동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브리엘 앨몬드(Gabriel A. Almond)가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정치문화는 동질적이고 세속적이다.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문화·경제 등에 걸쳐서 차이가 크며 시민의 이해(利害)도 대립하기 쉽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부터 정치의 목표는 항상 현실적이며, 동의에 입각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많은 가치가 복합된 정치문화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경험적인 정치문화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무대는 마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시장을 방불케 한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정치 참여 원칙이 관철되어 왔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3권분립을 엄격히 고수하고, 독립국에 가까운 주(州)제도를 채용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분립된 3권간에는 권력의 중복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정치체제 간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중복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연방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는 구성주정부가 연방정부에 위임하는 권한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그 외의 권한은 국민과 50개의 주가 보유하고 있다. 50개주는 연방 정부와 마찬가지로 주 정부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각부는 연방 정부의 각부와 동등한 기능 및 영역을 지닌다. 각 주의 행정 수반은 주지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권력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권력 분포와 행사에 있어서 중복현상과 마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강력하다. 단지 시대적인 차원에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50개주에 포함되지 않는 괌, 북마리아나제도 등의 속령 등 해외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 군대 최고 통수권자의 직함을 가지며, 국방 장관과 합동 참모총장을 임명한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을 비롯한 군 전체를 총괄한다. 해안 경비대의 경우 평화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전시에는 미 해군에서 관할한다. 파일:Secretary Pompeo and Malaysian Prime Minister Mahathir Mohamad (42910851015).jpg|섬네일|미국 국무부 마이크 폼페이오와 말레이시아의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 (2018년 8월 3일)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의 체벌이 크게 줄었다. 현재 미국 내 학교 체벌을 적극 허용하거나 이를 규제하는 법안 및 관행이 없는 주는 19개다. 이외 31개 주에서는 공립학교에서의 체벌을 불법으로 금지, 아이오와, 몬타나, 델라웨어, 메릴랜드, 뉴저지 및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공립 뿐 아니라 사립학교에서도 체벌을 금지하고 있다. 파일:US Navy 060618-N-8492C-212 An Air Force B-2 bomber along with other aircrafts from the Air Force, Navy and Marine Corps fly over the Kitty Hawk, Ronald Reagan and Abraham Lincoln Carrier Strike groups.jpg|섬네일|키티호크, 로널드 레이건호, 에이브러햄 링컨호와 해안경비대, 해군, 공군 비행기으로 이루어진 항모타격단. 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과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공군, 우주군, 해병대를 포함한 군대를 통솔한다. 해안경비대는 평상시에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전쟁 상황에는 미 해군에서 통솔한다. 2008년 현역으로 있는 군인이 140만 명을 넘겼다. 예비군과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230만 명이 넘는다. 또한 국방부는 계약직을 포함하지 않은 민간인 7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모병제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의무 징병 등록제를 통해 거의 대부분 징병제로 뽑는다. 미국 군대는 공군의 신속한 수송기, 해군의 11대 현역 항공모함, 해병 원정부대 해군 함대사령부와 태평양 함대를 통해 빠르게 투입할 수도 있다. 또한 해외에 865개의 해외 주둔 기지를 두고 있고, 25개 국가에는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주둔군은 미국 "제국의 기반"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2011년 총 국방비 지출은 7,000억 달러 이상인데, 이는 세계 국방비의 41%며 상위 14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미군 국방비는 GDP 전체의 4.7%로, 상위 15개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CIA에 따르면 2012년 GDP 대비 미국 국방비 지출은 세계에서 23번째라고 한다. 미국 국방비는 냉전 시대 이후 최근 수 십년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1953년 전체 GDP의 14.2%, 1954년 연방비 69.5%를 맡은 것에 비해 2011년에는 GDP의 4.7%, 연방비는 18.8%로 감소했다. 2012년 국방비 예산은 2011년보다 4.2% 증가한 5,530억 달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 때문에 1,180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 경제 지표 실업률 3.8% 2018년 5월 GDP 성장률 4.0%2014년 3/4분기 2.8%2014년 CPI 인플레이션 2.9% 2011년 2월 ~ 2012년 2월 공공 채무 17조 2,300억 달러 2014년 7월 빈곤율 12.7%2016년 국가 부(총 가치) 82조 2,000억 달러2015년 1/41분기 파일:NYC NYSE.jpg|섬네일|왼쪽|월 가의 뉴욕 증권거래소. 미국의 경제 체제는 민주주의적 혼합 경제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높은 생산성을 누리고 있다. 미국이 부유한 경제를 이룩한 것은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존재와, 기술혁신이 뒷받침된 국내 산업이나 해외에서의 활발한 투자활동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것이다.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조 4128억 달러로, 시장 환율로 세계총생산(GWP)의 23%, 구매력 평가(PPP) 대비 세계총생산의 약 21%를 차지한다고 한다. 미국의 GDP는 세계 최대 규모며, 1인당 명목 GDP 9위, 구매력 평가 1인당 GDP 10위다. 미국은 세계 최대 재화 수입국이며, 수출 규모는 세계 1위인데 1인당 수입액은 비교적 낮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이 있다. 2007년, 자동차는 주요 수출입 품목이었다.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 약 6년간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2007년 12월부터 침체기를 맞고 있다. 한편 미국은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 2009년 미국 경제에서 개인 부문은 전체 중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연방 정부 활동은 24.1%, 주 및 지역 정부 활동(연방 이전액 포함)은 20.6%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탈산업화 단계로, 서비스 산업이 GDP의 67.8%를 차지하지만, 지금도 미국은 산업 강국이다. 기업 총수령액 기준 주요 사업 문야는 도소매 무역이며, 순수입 기준으로는 제조업이 주된 분야다. 화학 공학 제품은 주요 제조업 분야이다. 미국은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며,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미국은 전기 및 핵 에너지를 비롯하여 액화 천연 가스, 황, 인지질, 소금 생산에서 세계 1위다. 농업은 미국 GDP의 1%를 넘지 미국은 옥수수와 콩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달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기업이다. 2009년 3/4분기에 미국 노동 인구는 1억 5,440만 명이었다. 이 중 고용 인구의 81%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2,240만 명을 거느린 미국 정부는 주요 고용처다. 미국 노동자의 노동 조합 조직률은 12% 정도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 세계 은행은 미국을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 1위로 들었다. 1973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199시간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에 미국은 시간당 노동 생산성 면에서 십년 전까지만해도 미국보다 높던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따라 잡았다. 유럽과 견주어 미국의 자산 및 법인 소득세율은 보통 높은 편이며, 노동 특히 소비세율은 낮다. 미국은 내수경제가 튼실한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내수 위주로 산업기반을 바꾸기도 했다. 세계최대 석유 비축량에 셰일 가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최첨단 공산품을 많이 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계층이 적고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여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토는 넓고 자원은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공급된다. 파일:UVA Rotunda.jpg|섬네일|250px|버지니아 대학교,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했으며,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 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 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 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와 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와 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와 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 총 의 길이를 자랑하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 지도. 개인 교통수단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자동차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망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데 1억 3천 만개의 도로가 펼쳐져 있다.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며, 미국인 1,000명당 765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자동차 보급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용 자동차의 40%는 밴, SUV, 소형 트럭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9마일 (47 km)을 다니며 55분을 운전하는데 보낸다. 미국인 전체 출퇴근자의 9%는 매스 트랜싯을 이용한다. 철도를 이용한 화물수송은 광범위 한 반면에 여객 철도 이용률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암트랙의 국가 여객 철도 시스템의 이용자 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37%가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매년 경전철 개발이 증가하고 있다. 미국은 국토가 넓은 덕에 항공 산업이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항공사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가 모두 미국에 있으며 2013년 아메리칸 항공이 US 에어웨이즈와 합병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30개 중 미국에서 가장 바쁜 공항인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포함해 16개 공항이 이름을 올렸다.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이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 대중 매체 === 파일:PB050006.JPG|섬네일|왼쪽|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할리우드 사인. 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 한국계 미국인 * 다민족 국가 * 미국의 이민 * 영어 * 초강대국 * 패권주의 * 미국, 400년의 도전(:en:America: The Story of Us) * 북대서양 조약 ; 내용 ; 출처 * 로저 윌리엄과 살렘 마녀사냥에 대한 기사는 《5시간만에 읽는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유재덕 지음/작은 행복을 근거로 작성. * 정부 공식 홈페이지 * 백악관 홈페이지 *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 주한미국대사관 및 영사관 * 아메리칸 디플로머시 하우스 (구 미문화원) 홈페이지 * * * 분류:G7 회원국 분류:G20 회원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영국의 옛 식민지 분류:영어권 분류:연방제 국가 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분류: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분류:아메리카 국가 기구 회원국 분류:초강대국 분류:G8 회원국
니콜로 파가니니
[ "Introduction", "생애", "평가", "대표적인 파가니니 곡 연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 "\n\n\n니콜로 파가니니\n\n'''니콜로 파가니니'''(, ,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n\n현대의 바이올린 기술을 완성하였으며, 초인적인 기교로 당시의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고,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언급할 때, '파가니니의 재래', '21세기의 파가니니' 등과 같은 타이틀을 붙이고 있다. \n\n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번 등이 유명하다.\n",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통달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n\n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 해부터 다시 연주 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 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n\n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 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시선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기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매우 악화하여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결국 사망하였다.\n\n===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 ===\n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떨꾸밈음) 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n", "작곡가 사이에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 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 무반주 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n", "\n* 율리아 피셔 (Julia Fischer) Paganini 24 Caprices\n* 21세기의 파가니니 로만김의 파가니니 협주곡 1번 카덴차\n", "* \n", "\n* \n* \n\n\n\n\n\n \n분류:1782년 출생\n분류:1840년 사망\n분류:낭만주의 작곡가\n분류:이탈리아의 클래식 작곡가\n분류:이탈리아의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n분류:제노바 출신\n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n분류:클래식 기타 작곡가\n분류:19세기 클래식 작곡가\n분류:바이올린 작곡가" ]
니콜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 ,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 현대의 바이올린 기술을 완성하였으며, 초인적인 기교로 당시의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고,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언급할 때, '파가니니의 재래', '21세기의 파가니니' 등과 같은 타이틀을 붙이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번 등이 유명하다.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통달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 해부터 다시 연주 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 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 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시선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기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매우 악화하여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결국 사망하였다. ===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 ===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떨꾸밈음) 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작곡가 사이에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 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 무반주 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율리아 피셔 (Julia Fischer) Paganini 24 Caprices * 21세기의 파가니니 로만김의 파가니니 협주곡 1번 카덴차 * * * 분류:1782년 출생 분류:1840년 사망 분류:낭만주의 작곡가 분류:이탈리아의 클래식 작곡가 분류:이탈리아의 클래식 바이올린 연주자 분류:제노바 출신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분류:클래식 기타 작곡가 분류:19세기 클래식 작곡가 분류:바이올린 작곡가
마이클 크라이튼
[ "Introduction", "작품", "외부 링크" ]
[ "\n\n'''마이클 크라이튼'''(, John Michael Crichton, 1942년 10월 23일 ~ 2008년 11월 4일)은 미국의 과학소설가이자 텔레비전·영화 프로듀서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와 메디컬 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으로 사망했다.\n",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1991)이 있다. 그는 또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텔레비전 시리즈 《ER》의 책임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 외 유명한 작품으로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69), 《스피어》(1987), 《프레이》(2002), 《콩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떠오르는 태양》, 《타임라인》 등이 있다. 앤마리 마틴과 공동으로 영화 《트위스터》(1996)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과학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n\n미국 시카고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자신의 자전적인 일을 다룬 《Travel》이 있다.\n", "* \n* \n* \n* \n\n\n\n\n\n분류:1942년 출생\n분류:2008년 사망\n분류:미국의 SF 작가\n분류:미국의 영화 제작자\n분류:미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n분류:미국의 대학 교수\n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n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n분류:시카고 출신\n분류:암으로 죽은 사람\n분류:에드거상 수상자\n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n분류:쥬라기 공원\n " ]
'''마이클 크라이튼'''(, John Michael Crichton, 1942년 10월 23일 ~ 2008년 11월 4일)은 미국의 과학소설가이자 텔레비전·영화 프로듀서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와 메디컬 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1991)이 있다. 그는 또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텔레비전 시리즈 《ER》의 책임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 외 유명한 작품으로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69), 《스피어》(1987), 《프레이》(2002), 《콩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떠오르는 태양》, 《타임라인》 등이 있다. 앤마리 마틴과 공동으로 영화 《트위스터》(1996)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과학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자신의 자전적인 일을 다룬 《Travel》이 있다. * * * * 분류:1942년 출생 분류:2008년 사망 분류:미국의 SF 작가 분류:미국의 영화 제작자 분류:미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 분류:미국의 대학 교수 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시카고 출신 분류:암으로 죽은 사람 분류:에드거상 수상자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분류:쥬라기 공원
빌 게이츠
[ "Introduction", "학력", "생애",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이후", "자선 활동", "벤처 기업 투자 (부분 목록)", "개인사생활", "기타", "업적", "상훈", "같이 보기", "각주", "참고 서적", "외부 링크" ]
[ "\n\n\n'''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1955년 10월 28일 ~ )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이자 기업인이다. 그는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해석프로그램과 알테어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알테어 베이직을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면서 게이츠는 2014년 5월까지 회장, 최고경영자, 사장,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선구자이자 가장 잘 알려진 기업가 중 한 사람이다.\n\n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자란 게이츠는 1975년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설립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 최대의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었다. 게이츠는 2000년 1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회장 겸 CEO로 회사를 이끌었지만 회장으로 남아 소프트웨어 설계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2006년 6월 게이츠는 자신과 아내 멜린다 게이츠가 2000년에 설립한 개인 자선재단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전일제로 근무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파트타임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에서 물러나, 새로 임명된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를 지원하기 위한 기술자문위원직을 새로 맡았다.\n\n1987년 이후 그는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부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95년부터 2017년까지 그는 포브스지 선정에서 4년을 제외하고 모두 세계 최고 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2017년 10월에는 아마존 창업자 겸 CEO 제프 베조스에게 추월당했다. 2020년 8월 현재 게이츠는 추정 순자산이 1,137억 달러로, 제프 베조스와 일론 머스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n\n게이츠는 이후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제 근무를 그만둔 이후 여러 자선 활동을 추구해 왔다.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 자선단체로 알려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여러 자선단체와 과학 연구 프로그램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 2009년에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ge)를 설립했는데, 이 서약서를 통해 자신과 다른 억만장자들은 적어도 재산의 절반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n", "* 레이크사이드 스쿨 (1973년 졸업)\n* 하버드 대학교 법학 (1974년 중퇴)\n* 하버드 대학교 명예 (2007년 법학박사)\n", "=== 성장 과정 ===\n파일:Paul Allen and Bill Gates at Lakeside School in 1970.jpg|섬네일|1970년 레이크사이드대학에서 폴 앨런과 함께 게이츠(오른쪽)\n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는 1955년 10월 28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시니어와 어머니 매리 맥스웰 게이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계 미국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며,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그의 가정은 상중류층으로,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한다. 또한 외할아버지인 J. W. 맥스웰은 미국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다. 게이츠에게는 누나 크리스티앤(Kristianne)과 리비(Libby)가 있었다. 그는 그의 가문에서 윌리엄 게이츠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네 번째 남자이지만 실제로는 윌리엄 게이츠 3세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에서 '3세'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그가 법조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랬다.\n\n그는 13세 때 상류층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 단말기와 제네럴 일렉트릭 (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게이츠는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프로그래밍을 더 연습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컴퓨터를 상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다른 게임인 달 착륙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입력된 코드를 언제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 기계에 매료되었다. 게이츠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는 '그때 그 기계는 나에게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회의 기부금이 바닥나자, 게이츠와 몇몇 학생들은 DEC의 미니컴퓨터의 사용 시간을 샀다. 이 시스템 중 일부는 PDP-10이라는 것으로 컴퓨터 센터 코퍼레이션(CCC)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훗날 게이츠를 포함한 네 명의 레이크사이드 스쿨 학생(폴 앨런, 릭 와일랜드, 켄트 에번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가 가진 버그를 이용해 공짜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이 회사로부터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1달 동안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n\n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예과를 전공했으나 재학 중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 그는 사업이 안 풀리면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n", "\n=== BASIC ===\nMITS Altair 8800\n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시연한 '포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 1975년 1월호를 읽고, 마이크로인스트레이팅시스템(MITS)에 연락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플랫폼용 BASIC 인터프리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현실에서 게이츠와 앨런은 알테어(Altair)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코드를 쓰지 않았다.그들은 단지 MITS의 관심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MITS의 에드 로버츠 사장을 만나 시범을 보이기로 했고, 몇 주 동안 그들은 미니컴퍼터로 작동하는 알테어 에뮬레이터를 개발한 뒤 BASIC 인터프리터를 개발했다. 시험 설명회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는 MITS 사무실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MITS와 계약으로 이어졌다. MITS는 앨런을 고용했고 게이츠는 1975년 11월 앨런과 함께 MITS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를 휴학했다. 앨런은 그들의 파트너십을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합성어인 \"Micro-Soft\"라고 이름 지었고, 그들의 첫 번째 사무실을 앨버커키에 위치했다. 게이츠와 앨런이 고용한 첫 번째 직원은 그들의 고등학교 협력자 Ric Weiland이다. 그들은 1년 안에 하이폰을 떨어뜨리고 1976년 11월 26일 뉴멕시코주 장관에게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라는 상호를 공식적으로 등록했다.\n\n마이크로소프트의 Altair BASIC은 컴퓨터 취미 활동가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게이츠는 시장 이전 복사본이 유출되어 널리 복사되고 배포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76년 2월, 그는 MITS 뉴스레터에 취미활동가에게 보내는 공개서신(Open Letter to Hobbyists)을 작성했는데, 이 서신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알테어 베이직의 사용자 중 90% 이상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돈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는 전문 개발업자들의 고품질 소프트웨어를 생산, 유통, 유지하도록 하는 동기를 없애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편지는 많은 컴퓨터 취미 생활자들에게 반감을 샀지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6년 말 MITS로부터 독립하였고, 다양한 시스템용 프로그래밍 언어 소프트웨어를 계속 개발하였다. 회사는 1979년 1월 1일 앨버커키에서 워싱턴 벨뷰로 이전하였다.\n\n게이츠는 회사가 처음 5년 동안 생산한 모든 코드 라인을 개인적으로 검토하고 종종 다시 썼다고 말했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관리자 역할로 전환했고, 그 후 임원으로 전환했다.\n\n=== IBM과 파트너쉽 ===\n당시 컴퓨터 장비의 선도적 공급 업체였던 IBM은 1980년 7월 곧 출시될 개인용 컴퓨터인 IBM PC의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접근했다. IBM은 먼저 마이크로소프트가 BASIC 인터프리터를 쓸 것을 제안했다. IBM의 대표들도 운영체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했고 게이츠는 이를 널리 사용되는 CP/M 운영체제의 제조업체인 디지털 리서치(DRI)에 의뢰했다. 그러나 IBM와 DRI의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라이선스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IBM의 대표인 잭 샘스는 게이츠와의 후속 회의에서 라이센싱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제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몇 주 후, 게이츠와 앨런은 CP/M과 유사한 운영 체제인 86-DOS를 사용하여 시애틀 컴퓨터 제품(SCP)의 팀 패터슨이 PC와 유사한 하드웨어용으로 만들었다고 제안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SCP와 86-DOS의 독점 라이선스 에이전트로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정식 소유자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패터슨을 고용하여 PC59용 운영체제를 적응시켰고, 이를 일회성 수수료 5만 달러에 IBM에 PC DOS로 납품했다.\n\n그 계약 자체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수수료를 벌 수 있었으나 그것은 IBM이 그들의 운영체제를 채택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가 소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츠는 다른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IBM의 PC 하드웨어를 복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운영체제에 관한 저작권을 IBM에 양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IBM과 호환되는 PC를 사실상의 표준인 DOS를 실행하면서 그렇게 했다. MS-DOS(IBM 이외의 고객에게 판매되는 DOS 버전)의 판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업계의 주요 주체가 되었다. 언론은 재빨리 마이크로소프트가 IBM PC에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확인했다.PC 매거진은 게이츠가 \"the man behind the machine?\"(기계 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다.\n\n게이츠는 1981년 6월 25일, 워싱턴 주에 회사를 재법인화하며 이사회 의장과 회장으로서 회사를 총괄했으며, 폴 앨런은 부회장과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1983년 초 앨런은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고 회사를 떠났고,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 대한 논쟁으로 수개월 전에 경색되었던 게이츠와 앨런의 공식적인 사업 파트너십은 사실상 종료했다. 10년 후, 게이츠는 앨런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두 사람은 함께 그들의 어린 시절 학교인 레이크사이드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게이츠는 2018년 10월 앨런이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아 있었다.\n\n=== WINDOWS ===\n마이크로소프트는 1985년 11월 20일 첫 번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버전을 출시했다. 이듬해 8월 IBM과 OS/2라는 별도의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은 새 시스템의 첫 번째 버전을 성공적으로 개발했지만 의견 차이가 커져 파트너십이 틀어졌다.\n\n=== 경영 스타일 ===\n빌 게이츠는 미래학자 이상의 시대적 감각으로 소비자들의 요구를 컴퓨터 산업에 접목시켜왔다. 개인용 컴퓨터(PC)가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고 소프트웨어가 도약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빌 게이츠의 통찰력이 바로 성공 신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통찰력은 지속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차례 미국 서북부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은둔하면서 ‘생각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1주일 동안 가족들 방문도 차단한 채 세계 각국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성과물을 만들어 왔다. 빌 게이츠는 직원들 누구나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켜 의사소통의 장벽을 없앴다. 소비자들과 경영진의 접점에 있는 직원들이 보고서를 통해 저변의 시장흐름을 생동감 있게 전달했음은 물론이다. 철저한 고객관리와 상호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빌 게이츠 특유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n",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 업무를 그만둔 이후 자선 사업을 비롯한 프로젝트에 힘쓰고 있다. 게이츠는 2014년 3월 27일자 롤링스톤지에 실렸던 인터뷰에서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기후 변화, 그의 자선 활동, 다양한 기술 회사들과 관련자들, 그리고 미국의 상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게이츠는 50년 후를 내다볼 때 가장 두려운 것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향후 50년, 혹은 100년 안에 매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나, 나는 전세계적 유행병, 핵이나 생화학 테러 행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게이츠는 또 혁신을 '진보의 진정한 원동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이 지금까지보다 훨씬 나은 오늘을 보내고 있다\"고 선언했다.\"\n\n빌 게이츠는 슈퍼지능의 잠재적인 해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 기계들은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관리한다면 인공지능은 긍정적일 것이다. 그 후 몇 십 년이 지나면 인공지능은 걱정거리가 될 만큼 강력할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일론 머스크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왜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게이츠는 2015년 3월 바이두 최고경영자(CEO) 로빈 리와 함께 TED 컨퍼런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닉 보스트롬의 최근 저서인 '초지능' \"매우 추천한다\"고 밝혔다. 2019년 COVID-19로 인해 전세계가 펜데믹 상황에 빠지기 전에 이 회의에서 게이츠는 전세계가 유행병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게이츠는 2018년 3월 시애틀의 자택에서 사우디의 개혁적인 왕세자 겸 사실상의 통치자인 모하메드 빈 살만과 만나 사우디 비전 2030에 대한 투자 기회를 논의했다. 2019년 6월 게이츠는 안드로이드에 모바일 운영체제 경쟁에서 진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인정했다.\"그때 안드로이드를 쳐내야 했는데 ...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해 아쉽다. 반독점법 위반 소송 때문에 온통 정신이 팔려 모바일 시장에 집중하지 못했다. 윈도 모바일 OS를 더 잘 다듬었거나 안드로이드를 구글보다 먼저 인수했더라면 지금 모바일 시장은 (애플 iOS와 함께) 윈도 모바일이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2020년 3월 1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가 버크셔 해서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직을 떠나 기후 변화, 세계 보건 및 개발, 교육 등과 같은 자선 활동에 헌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n", "\n===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n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의 90%는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데, 이 나라들이 보유한 보건 자원은 전 세계 보유량의 10%에 불과하다.”'''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게이츠 재단'''(Gates Foundation) 또는 '''B&MGF'''는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민간 재단 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단이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에 의해 2000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게이츠 가의 관심과 열정에 의해 운영된다'. 주 운영 목적은 국제적 보건의료 확대와 빈곤 퇴치,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교육 기회 확대와 정보 기술에 대한 접근성 확대이다. 빌 게이츠가 자선 활동가로 변모시킨 사람으로 세 명이 언급되는데 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그의 아내 멜린다, 석유왕 록펠러이다.\n\n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이정표(milestone)로 1993년에 읽었던 한 보고서를 꼽는다. 이 보고서의 그래프에는 로타바이러스로 한 해 어린이 50만명이 사망한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었다. 게이츠는 “비행기 사고로 100명이 사망해도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하는데, 50만명이 사망하는 질병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본격적인 기부 활동에 나서기 전 빌 게이츠는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의 도움을 구했다. 1994년에 자선단체 ‘윌리엄 H. 게이츠 재단’을 설립한 아버지가 기부 활동에 있어서는 선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빌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 데이비드 카메론멜린다도 결혼 전까지 기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빌 게이츠를 설득해 자선가로 변신시킨 인물로 언급된다. 빌 게이츠는 지난 2010년부터 다른 백만장자들에게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권유하기 시작했는데, 이 활동에 멜린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절반의 힘(The Power of Half)’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멜린다가 게이츠에게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하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윌리엄 게이츠는 돈에 대한 아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게이츠는 부유한 변호사였지만, 돈을 그냥 물려주면 자식을 망친다는 생각으로 빌 게이츠에게 창업 자금을 주지 않았다. 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 역시 세 자녀에게 각각 1000만달러(약 108억원)씩만 물려주고 재산의 나머지 95%는 기부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게이츠 부부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과 함께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전기차 업체 테슬라 CEO 엘론 머스크, 록펠러 가문의 수장인 데이비드 록펠러, 페이스 북 CEO 마크 저커버그 등 120여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n\n‘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자동차왕’ 포드 등 미국의 자본주의를 개척한 초기의 부호들도 빌 게이츠의 변신에 영향을 미쳤다. 게이츠는 2013년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자선 활동과 관련, “1세대 대(大) 자선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중에서도 게이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히는 인물이 존 D. 록펠러이다.\n\n록펠러와 게이츠는 비슷한 점이 많다. 정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록펠러는 저가 공세로 경쟁사를 차례차례 무너뜨리며 석유업계를 독점했다. 그래도 생전에 교회에 십일조는 꼬박꼬박 냈고, 이후 아들 세대에 막대한 기부를 하면서 무자비한 자본가라는 오명(汚名)을 씻었다. 게이츠가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도 초창기에는 ‘윈도’ 운영체제 안에 웹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기본 탑재해 시장을 독점한다는 논란에 시달렸다. 게이츠는 과거 인터뷰에서 “돈을 버는 것과 번 돈을 남에게 그냥 줘버리는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선가로 변신하기 전까지는 기부나 자선 활동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n\n교육과 의료 사업에 집중적으로 기부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록펠러는 록펠러 재단을 세워 황열병 치료 등을 지원했고 시카고 대학교, 록펠러 대학교를 설립했다. 게이츠 앤 멜린다 재단의 활동도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 집중돼 있다. 저개발 국가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가 가장 큰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재단은 “특정 개인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n\n=== 창조적 자본주의 ===\n“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나 표현수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가난했고 예방할 수도 있는 병들에 시달렸으며 생명을 지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정부와 비영리 단체들이 그들을 돕는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 그 일을 하게 되면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발명품들을 만들 기술은 기업체들이 갖고 있다. 이런 기술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필요하다.”\n\n2008년 1월 스위스의 다보스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역설했다.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을 ‘의무’로 한층 끌어올린 개념이다. 기업 활동을 위해 돈을 버는 동시에 자선 활동도 ‘의무적’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창조적 자본주의’라고 지칭한 것이다.\n\n=== 자선 스포츠 행사 ===\n2017년 4월 29일, 게이츠는 시애틀의 매진된 키 아레나에서 열린 비경쟁 테니스 경기인 아프리카 4차전에서 스위스의 테니스 전설 로저 페더러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 행사는 아프리카에서 로저 페더러 재단의 자선 활동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페더러와 게이츠는 이번 10년 동안 미국 선수 1위 존 이스너와 펄 잼의 리드 기타리스트 마이크 매크레디와 맞붙었다. 그 두 사람은 6대 4로 시합에서 이겼다. 그들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200만 달러를 모금했다.\n\n로저 페더러는 2018년 3월 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Still flying high from last night! Thanks to everyone who made the #MatchForAfrica a great success!\"이라는 문구와 함께 빌 게이츠, 잭 소크와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페더러는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복식조를 구성해 잭 소크와 NBC 투데이쇼 진행자 사바나 거스리조와 자선 경기를 펼쳤다. 게이츠와 페더러는 함께 6-3으로 두 번째 경기 승리를 기록했고 경기는 25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n\n=== 백신개발 ===\n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전 세계로 확산 양상을 보이던 지난 2020년 5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설립한 재단을 통해 코로나 19 백신 개발을 위한 연구 자금으로 써 달라는 요청과 함께 한국의 바이오기업에 360만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미 4월 문 대통령과 코로나 19 대응을 위해 전화통화를 나눴던 빌 게이츠 회장은 한국의 코로나 방역과 리더십에 다시 한번 신뢰를 나타냈다. 특히 그는 코로나 백신 개발을 위해 한국정부와 기업 등과 협력을 약속하면서, 국내 바이오 기업인 에스케이(SK) 바이오사이언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코로나 백신 민간 분야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다\"면서 \"SK 바이오사이언스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내년 6월께 연간 2억개의 백신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를 통해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n", "게이츠는 다양한 분야의 지분을 보유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를 넘어 다음과 같은 여러 벤처 사업에 투자했다.\n\n\n비욘드미트(Beyond meat) 식물성 고기 제조 대체육 기업\n빌게이츠가 투자한 콩고기로 만든 비욘드미트 버거슈뢰딩거(Schrödinger, Inc) 생명과학, 소재과학 소프트웨어 업체로 제약·바이오텍·소재 연구에 쓰이는 화학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제작 기업\n\n웨이스트 매니지먼트(Waste Management) 폐기물 처리 업체\n\n캐나다 국립 철도(Canadian National Railway) 1995년에 민영화된 캐니다 국립 철도\n\n브룸(Vroom)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 스타트업\n\n트위터(Twitter)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기업\n\n월마트(Walmart) 미국의 다국적 유통기업\n", "\n=== 아내 멜린다와 결혼 ===\n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 게이츠\n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의 관계는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두사람이 만난 것은 멜린다가 MS의 제품매니저로 입사한 직후다. 그녀가 입사한 지 몇개월 후 빌은 그녀에게 첫 데이트를 신청했다. 당시 빌 게이츠가 멜린다에게 전화를 걸어와 “저기...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번호를 준다면 우린 오늘 밤부터 2주일 안에 데이트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멜린다는 진지하지 않다고 여겼고, 되물었다. 멜린다는 “나는 그에게 ‘오늘 밤으로부터 2주일 후라고요? 나는 2주일 후에 내가 뭘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나 보이지 않는군요’라고 말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빌 게이츠는 한 시간 뒤에 전화를 걸어서는 ‘이러면 당신에게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난 것처럼 보이나요?’라고 물었지요“라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그리고 그녀는 이 날 데이트에 응했다. 빌과 멜린다는 7년 간의 데이트 끝에 1994년 1월 1일 하와이의 라나이섬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리면서 결혼에 골인했다.\n\n=== 자녀교육 ===\n빌 게이츠는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컴퓨터를 사 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책을 사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컴퓨터 황제'로 통하는 빌 게이츠도 컴퓨터보다 책이 어린 시절 꿈과 상상력, 창의력을 키우는 데 더 중요한 무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자녀들의 컴퓨터 사용 시간을 하루 45분, 주말 1시간으로 제한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n\n빌 게이츠가 제니퍼, 로리, 피비 자신의 3자녀에게 많은 돈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빌 게이츠는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많은 부는 그들(자녀)에게 좋지 못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게이츠는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길 꺼렸으나 신문은 게이츠가 `자녀들에게 1,000만 달러씩 물려줄 것`이라는 그간의 보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 정도의 돈은(1,000만 달러) 내 전체 재산의 아주 극소수\"라며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부로 자녀들이 인생이 영향받지 않기를 원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 자녀들은 현재 집안일을 하고 용돈을 받는 평범한 아이들\"이라며 \"교육, 건강과 관련한 자녀들의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지만, 그들은 향후 직장에 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n\n===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 ===\n\"그와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는 동갑내기이며 순진하게도 낙관적이었고 커다란 회사를 세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제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모든 환상을 모두 이뤄냈다. 그리고 대부분을 라이벌 관계에서 만들어 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상대방이 아플 때에도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소통해 왔다\"\"잡스는 천재였고 나는 그를 많이 질투했다\"면서 \"잡스는 사람들에게 뭔가 엄청난 동기를 부여하는 대단한 마법사였다면 나는 소소한 마법사였다\"1955년생 동갑내기인 게이츠와 잡스는 젊은 시절 70년대 후반부터 30년 넘게 애증관계를 이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잡스는 캘리포니아 노동자 집안에서 자랐으며 모든 제품에 대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닫힌 생태계를 창조했으며, 디자인을 통해 제품에 프리미엄을 불어넣었다. 반면, 워싱턴주 상류층에서 자란 게이츠는 개방형 생태계를 믿었고 디자인은 중시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스타일까지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게이츠는 잡스에 대해 \"기본적으로 괴짜\"라며 \"인간으로서는 괴상하게 흠집난 친구\"라고 평가했고, 잡스는 게이츠를 \"마약을 한 번 해보거나 어렸을 때 히피촌에 갔더라면 좀 더 생각이 넓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IT 산업에 있어서도 게이츠는 \"잡스는 정말 IT에 대해 모른다\"면서 \"대신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채는 놀라운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잡스는 \"빌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이 없고 아무것도 발명한 적이 없다\"면서 \"그래서 그가 그가 이제는 IT보다 자선사업을 더 편안하게 여길 것\"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서로의 태도에 대해 애플 매킨토시 개발팀의 일원이었던 앤디 허츠펠드는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다\"면서도 \"하지만 스티브는 취향과 스타일 때문에 일반적으로 빌을 자신보다 약간 떨어지는 사람처럼 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빌은 프로그래밍을 못한다는 점 때문에 스티브를 무시했다\"고 회상했다.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하지만 2011년 잡스의 타계 이후 게이츠는 그를 그리워하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같은 해 10월5일 게이츠는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미치도록 훌륭하게 명예스러운 일(insanely great honor)이었다\"면서 잡스의 표현인 '미치도록 훌륭한'이란 표현을 빌어 그를 추모했다. 당시 그는 \"스티브와 나는 약 30년 전에 만나, 동료이자 경쟁자 그리고 친구로 삶의 절반 이상을 함께 보냈다\"면서 \"그가 많이 그리울 것이며 잡스가 세상에 미친 강력한 영향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애도했다.\n\n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도 게이츠는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높게 평가하면서 \"나는 연설을 잘하기 위해 힘들여 노력해야 했지만 잡스는 항상 자연스러웠다\"면서 \"내가 잡스처럼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있었다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가난 퇴치·질병 예방 연구 등 국제 사업에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n\n그는 이어 \"잡스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진 '천재'였고, 나도 그를 따라하고 싶었다\"면서 \"잡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사람들이 그의 주문을 따르는 것을 봐왔다\"면서 \"나는 그를 너무나 질투했다\"고 덧붙였다.\n\n=== 워런 버핏과의 관계 ===\n“난 내 친구들을 대부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워런 버핏만은 예외다. 그의 만남이 나와 아내 멀린다의 삶을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5년 전 오늘이다. 1991년 7월5일.”파일:Kathy Ireland, Warren Buffett and Bill Gates at the 2015 Berkshire Hathaway Shareholders Meeting.jpg|섬네일|버크셔헤서웨이 주주총회에서 워런 버핏, 빌게이츠과 캐시 아일랜드 \n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1991년 7월 5일 버핏을 처음 만났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후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게이츠는 버핏이 사실상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으로 세상에 끼친 영향은 '계산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둘은 아버지뻘 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는데 빌 게이츠의 사무실 전화 단축번호에 집과 워런 버핏의 번호만 저장돼 있을 정도다. 대학 강연이나 기부 활동도 같이한다. 워런 버핏의 기부금 대부분도 빌 게이츠 부부가 설립한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으로 들어간다. ‘배움과 웃음의 25년’이란 글을 통해 “버핏은 나와 멀린다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내 삶을 바꿔줬다”며 “그는 내가 오마하에 들를 때 지금도 직접 운전해 나를 공항에 데리러 나온다”고 전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버핏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게이츠는 “컴퓨터만 아는 괴짜와 이메일 한 번 쓰지 않는 투자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버핏은 젊은 사업가에게 정중히 MS의 사업 전략에 대해 예리하게 질문했고, 두 사람은 서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대화에 빠져들었다. 게이츠는 버핏 특유의 ‘초딩 입맛’에 대해서도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는 “버핏이 우리 집에 묵었을 때 아침식사로 오레오 쿠키를 먹었다”며 “워런의 입맛은 마치 여섯 살짜리 꼬마 같다”고 전했다. 또 “햄버거나 아이스크림, 코카콜라를 달고 사는 버핏과 식사하러 나가는 게 즐겁다”며 “솔직히 젊은이들에게 그의 식단은 최악이겠지만, 왠지 그에겐 잘 통하는 식단인 것 같다”고 적었다.\n\n=== 독서 ===\n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문난 독서광이다. 그는 일 년에 50여권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블로그에 독후감을 남긴다. 미국 CNBC는 21일(현지시간) 이 억만장자 독서광이 책을 읽은 후 그 내용을 기억하는 빌게이츠 독서 비법을 소개했다. 빌 게이츠가 밝히는 독서 기억법의 핵심은 ‘맥락’이다. 그는 ‘쿼츠’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읽다보면 이 내용과 저 내용이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면서 “만일 커다란 틀을 갖고 있다면 모든 것을 그 틀 안에 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어떤 주제에 관해 기본적인 이해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다음에 새로운 정보들이 들어오면 그 위에 적절히 배치해 놓는 것이다. 게이츠는 “그러므로 계속 쌓이는 지식을 풍요롭게 유지 관리하는 것이 훨씬 덜 이용이해진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날 수 있지만 일단 그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지식의 조각들이 제 자리를 잡게 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과학과 관련된 독서를 하는 경우, 게이츠는 과학자의 역사에 관한 독서와 과학자의 업적에 관한 독서는 상호 관련되는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큰 틀이나 맥락 속에 놓고 보면 세부적인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말하자면 연대순이나 지도, 혹은 과학의 지류 등을 틀로 삼을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게이츠에게 있어서 독서는 취미나 소일거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2017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독서는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은 배움을 멈추지 않는 한 노쇠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독서가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왔다고 설명했다. “책 한권 한권이 내게 새로운 것을 일깨워주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내게 늘 책을 읽도록 격려해주신 부모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독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공급해줬다. 그 호기심이 내가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고 지금 몸담고 있는 재단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게이츠는 책을 읽을 때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는 편이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내용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끝까지 돌파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읽다가 중간에 멈추는 걸 싫어한다”면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책을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를 적느라 (좋아하는 책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밝혔다.\n\n=== 예술품 수집 ===\n예술품 수집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는 지난 1994년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필사본인 72쪽짜리 레스터사본(Leicester Codex)을 3,100만달러에 사들였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인 윈슬로 호머의 작품도 3,000만달러를 주고 구입한 바 있다.\n\n=== 유튜브 ===\n빌 게이츠가 유튜브로부터 구독자 100만명 이상 유튜버에게 수여되는 골드 버튼을 받았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빌 게이츠'서 골드버튼 언박싱 영상을 게재했다. 그리고는 구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메시지가 나온 뒤 짤막한 영상이 마무리됐다. 그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다양한 영상을 올렸다.\n", "* 자신이 죽을 경우 전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증하고 세 명의 자녀들에게는 1인당 1천만 달러씩만 상속한다고 밝혔다. 이는 빌 게이츠 전 재산의 0.018%에 불과하다.\n\n* 영국의 YouGov에서 전세계 23개국에서 조사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에서 9.2점을 받아 남성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버락 오바마(6.4), 시진핑(5.3)이 뒤를 이었다.\n\n* 2013년 4월 21일 내방 기간 동안 삼성전자 서초동 본사를 방문하였다. 뒤쪽 취재진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며 현관문을 직접 열고 건물로 들어갔다.\n", "* 1971년 정보 과학사 급여 산출 프로그램 개발\n* 1972년 트래프 오 데이터('교통자료 포착'이라는 뜻)설립\n* 1974년 베이직 개발\n*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설립\n* 1975년 ~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 CEO\n* 1980년 MS-DOS 개발\n*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회사로 전환\n* 1985년 윈도우 1.0 개발\n* 1986년 31세의 나이로 억만장자가 됨\n* 1987년 윈도우 2.0 개발\n* 1990년 3월 윈도우 3.0 개발\n* 1994년 1월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n* 1995년 윈도우 95 개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 개발, MSN 컴퓨터 통신시장 진출, 워렌 버핏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n* 1996년 인터넷 익스플로러 3.0 개발\n* 1998년 윈도우 98 개발\n* 2000년 ~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n* 2000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설립\n* 2007년 윈도우 비스타 개발\n*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 은퇴\n* 2015년 클린 에너지 기금 설립\n", "\n* 2005년 영국 명예 KBE 훈장(honorary KBE, 외국인 대상 정원외)\n* 2010년 보이스카우트 실버 버펄로상(Silver Buffalo Award)\n", "* 마이크로소프트\n*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n* 워렌 버핏\n* 스티브 잡스\n* IBM\n* 테라파워(TerraPower)\n** 토륨기반 원자력(:en:Thorium-based nuclear power)\n** 액체불소 토륨 원자로(LFTR, :en:Liquid fluoride thorium reactor)\n** 진행파 원자로(TWR, :en:Traveling wave reactor)\n* 캐스케이드 인베스트먼트(:en:Cascade Investment) - 빌 게이츠가 이끌고 있는 투자회사\n** 포시즌스 호텔 - 세계적인 캐나다의 호텔체인으로서 빌 게이츠의 캐스케이드 인베스트먼트와 사우디 왕가 기업가인 알왈리드 빈 탈랄의 킹덤 홀딩 컴퍼니(Kingdom Holding Company)가 대주주로 있다.\n", "\n", "* \n* \n* \n* \n* \n", "\n\n* 빌 게이츠 공식 사이트 – The Gates Notes\n* \n* \n*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빌 게이츠\n* Biography of Bill Gates at Microsoft.com\n* Forbes topic page on Bill Gates\n*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n\n\n\n\n\n\n\n\n\n \n분류:1955년 출생\n분류:미국의 억만장자\n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n분류:미국의 인도주의자\n분류:미국의 발명가\n분류:미국의 투자가\n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n분류:독일계 미국인\n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n분류:미국의 자선가\n분류:더들리윈스롭가\n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n분류: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n분류:컴퓨팅의 역사\n분류:명예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n분류:하버드 대학교\n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n분류:칭화 대학\n분류:살아있는 사람\n분류:국립 기술혁신 메달 수상자\n분류:시애틀 출신\n분류:대통령 자유 훈장 수상자\n분류:윈도우 관계자\n분류:미국의 회사 설립자\n분류:너드 문화" ]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1955년 10월 28일 ~ )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이자 기업인이다. 그는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해석프로그램과 알테어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알테어 베이직을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면서 게이츠는 2014년 5월까지 회장, 최고경영자, 사장,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선구자이자 가장 잘 알려진 기업가 중 한 사람이다.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자란 게이츠는 1975년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설립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 최대의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었다. 게이츠는 2000년 1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회장 겸 CEO로 회사를 이끌었지만 회장으로 남아 소프트웨어 설계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2006년 6월 게이츠는 자신과 아내 멜린다 게이츠가 2000년에 설립한 개인 자선재단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전일제로 근무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파트타임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에서 물러나, 새로 임명된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를 지원하기 위한 기술자문위원직을 새로 맡았다. 1987년 이후 그는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부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95년부터 2017년까지 그는 포브스지 선정에서 4년을 제외하고 모두 세계 최고 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2017년 10월에는 아마존 창업자 겸 CEO 제프 베조스에게 추월당했다. 2020년 8월 현재 게이츠는 추정 순자산이 1,137억 달러로, 제프 베조스와 일론 머스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게이츠는 이후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제 근무를 그만둔 이후 여러 자선 활동을 추구해 왔다.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 자선단체로 알려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여러 자선단체와 과학 연구 프로그램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 2009년에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ge)를 설립했는데, 이 서약서를 통해 자신과 다른 억만장자들은 적어도 재산의 절반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 * 레이크사이드 스쿨 (1973년 졸업) * 하버드 대학교 법학 (1974년 중퇴) * 하버드 대학교 명예 (2007년 법학박사) === 성장 과정 === 파일:Paul Allen and Bill Gates at Lakeside School in 1970.jpg|섬네일|1970년 레이크사이드대학에서 폴 앨런과 함께 게이츠(오른쪽)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는 1955년 10월 28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시니어와 어머니 매리 맥스웰 게이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계 미국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며,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그의 가정은 상중류층으로,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한다. 또한 외할아버지인 J. W. 맥스웰은 미국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다. 게이츠에게는 누나 크리스티앤(Kristianne)과 리비(Libby)가 있었다. 그는 그의 가문에서 윌리엄 게이츠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네 번째 남자이지만 실제로는 윌리엄 게이츠 3세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에서 '3세'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그가 법조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13세 때 상류층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 단말기와 제네럴 일렉트릭 (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게이츠는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프로그래밍을 더 연습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컴퓨터를 상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다른 게임인 달 착륙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입력된 코드를 언제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 기계에 매료되었다. 게이츠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는 '그때 그 기계는 나에게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회의 기부금이 바닥나자, 게이츠와 몇몇 학생들은 DEC의 미니컴퓨터의 사용 시간을 샀다. 이 시스템 중 일부는 PDP-10이라는 것으로 컴퓨터 센터 코퍼레이션(CCC)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훗날 게이츠를 포함한 네 명의 레이크사이드 스쿨 학생(폴 앨런, 릭 와일랜드, 켄트 에번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가 가진 버그를 이용해 공짜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이 회사로부터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1달 동안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학예과를 전공했으나 재학 중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 그는 사업이 안 풀리면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 BASIC === MITS Altair 8800 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시연한 '포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 1975년 1월호를 읽고, 마이크로인스트레이팅시스템(MITS)에 연락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플랫폼용 BASIC 인터프리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현실에서 게이츠와 앨런은 알테어(Altair)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코드를 쓰지 않았다.그들은 단지 MITS의 관심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MITS의 에드 로버츠 사장을 만나 시범을 보이기로 했고, 몇 주 동안 그들은 미니컴퍼터로 작동하는 알테어 에뮬레이터를 개발한 뒤 BASIC 인터프리터를 개발했다. 시험 설명회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는 MITS 사무실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MITS와 계약으로 이어졌다. MITS는 앨런을 고용했고 게이츠는 1975년 11월 앨런과 함께 MITS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를 휴학했다. 앨런은 그들의 파트너십을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합성어인 "Micro-Soft"라고 이름 지었고, 그들의 첫 번째 사무실을 앨버커키에 위치했다. 게이츠와 앨런이 고용한 첫 번째 직원은 그들의 고등학교 협력자 Ric Weiland이다. 그들은 1년 안에 하이폰을 떨어뜨리고 1976년 11월 26일 뉴멕시코주 장관에게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라는 상호를 공식적으로 등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Altair BASIC은 컴퓨터 취미 활동가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게이츠는 시장 이전 복사본이 유출되어 널리 복사되고 배포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76년 2월, 그는 MITS 뉴스레터에 취미활동가에게 보내는 공개서신(Open Letter to Hobbyists)을 작성했는데, 이 서신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알테어 베이직의 사용자 중 90% 이상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돈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는 전문 개발업자들의 고품질 소프트웨어를 생산, 유통, 유지하도록 하는 동기를 없애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편지는 많은 컴퓨터 취미 생활자들에게 반감을 샀지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6년 말 MITS로부터 독립하였고, 다양한 시스템용 프로그래밍 언어 소프트웨어를 계속 개발하였다. 회사는 1979년 1월 1일 앨버커키에서 워싱턴 벨뷰로 이전하였다. 게이츠는 회사가 처음 5년 동안 생산한 모든 코드 라인을 개인적으로 검토하고 종종 다시 썼다고 말했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관리자 역할로 전환했고, 그 후 임원으로 전환했다. === IBM과 파트너쉽 === 당시 컴퓨터 장비의 선도적 공급 업체였던 IBM은 1980년 7월 곧 출시될 개인용 컴퓨터인 IBM PC의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접근했다. IBM은 먼저 마이크로소프트가 BASIC 인터프리터를 쓸 것을 제안했다. IBM의 대표들도 운영체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했고 게이츠는 이를 널리 사용되는 CP/M 운영체제의 제조업체인 디지털 리서치(DRI)에 의뢰했다. 그러나 IBM와 DRI의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라이선스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IBM의 대표인 잭 샘스는 게이츠와의 후속 회의에서 라이센싱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제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몇 주 후, 게이츠와 앨런은 CP/M과 유사한 운영 체제인 86-DOS를 사용하여 시애틀 컴퓨터 제품(SCP)의 팀 패터슨이 PC와 유사한 하드웨어용으로 만들었다고 제안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SCP와 86-DOS의 독점 라이선스 에이전트로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정식 소유자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패터슨을 고용하여 PC59용 운영체제를 적응시켰고, 이를 일회성 수수료 5만 달러에 IBM에 PC DOS로 납품했다. 그 계약 자체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수수료를 벌 수 있었으나 그것은 IBM이 그들의 운영체제를 채택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가 소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츠는 다른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IBM의 PC 하드웨어를 복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운영체제에 관한 저작권을 IBM에 양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IBM과 호환되는 PC를 사실상의 표준인 DOS를 실행하면서 그렇게 했다. MS-DOS(IBM 이외의 고객에게 판매되는 DOS 버전)의 판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업계의 주요 주체가 되었다. 언론은 재빨리 마이크로소프트가 IBM PC에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확인했다.PC 매거진은 게이츠가 "the man behind the machine?"(기계 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게이츠는 1981년 6월 25일, 워싱턴 주에 회사를 재법인화하며 이사회 의장과 회장으로서 회사를 총괄했으며, 폴 앨런은 부회장과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1983년 초 앨런은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고 회사를 떠났고,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 대한 논쟁으로 수개월 전에 경색되었던 게이츠와 앨런의 공식적인 사업 파트너십은 사실상 종료했다. 10년 후, 게이츠는 앨런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두 사람은 함께 그들의 어린 시절 학교인 레이크사이드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게이츠는 2018년 10월 앨런이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아 있었다. === WINDOWS === 마이크로소프트는 1985년 11월 20일 첫 번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버전을 출시했다. 이듬해 8월 IBM과 OS/2라는 별도의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은 새 시스템의 첫 번째 버전을 성공적으로 개발했지만 의견 차이가 커져 파트너십이 틀어졌다. === 경영 스타일 === 빌 게이츠는 미래학자 이상의 시대적 감각으로 소비자들의 요구를 컴퓨터 산업에 접목시켜왔다. 개인용 컴퓨터(PC)가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고 소프트웨어가 도약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빌 게이츠의 통찰력이 바로 성공 신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통찰력은 지속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차례 미국 서북부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은둔하면서 ‘생각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1주일 동안 가족들 방문도 차단한 채 세계 각국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성과물을 만들어 왔다. 빌 게이츠는 직원들 누구나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켜 의사소통의 장벽을 없앴다. 소비자들과 경영진의 접점에 있는 직원들이 보고서를 통해 저변의 시장흐름을 생동감 있게 전달했음은 물론이다. 철저한 고객관리와 상호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빌 게이츠 특유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 업무를 그만둔 이후 자선 사업을 비롯한 프로젝트에 힘쓰고 있다. 게이츠는 2014년 3월 27일자 롤링스톤지에 실렸던 인터뷰에서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기후 변화, 그의 자선 활동, 다양한 기술 회사들과 관련자들, 그리고 미국의 상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게이츠는 50년 후를 내다볼 때 가장 두려운 것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향후 50년, 혹은 100년 안에 매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나, 나는 전세계적 유행병, 핵이나 생화학 테러 행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게이츠는 또 혁신을 '진보의 진정한 원동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이 지금까지보다 훨씬 나은 오늘을 보내고 있다"고 선언했다." 빌 게이츠는 슈퍼지능의 잠재적인 해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 기계들은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관리한다면 인공지능은 긍정적일 것이다. 그 후 몇 십 년이 지나면 인공지능은 걱정거리가 될 만큼 강력할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일론 머스크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왜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게이츠는 2015년 3월 바이두 최고경영자(CEO) 로빈 리와 함께 TED 컨퍼런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닉 보스트롬의 최근 저서인 '초지능' "매우 추천한다"고 밝혔다. 2019년 COVID-19로 인해 전세계가 펜데믹 상황에 빠지기 전에 이 회의에서 게이츠는 전세계가 유행병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게이츠는 2018년 3월 시애틀의 자택에서 사우디의 개혁적인 왕세자 겸 사실상의 통치자인 모하메드 빈 살만과 만나 사우디 비전 2030에 대한 투자 기회를 논의했다. 2019년 6월 게이츠는 안드로이드에 모바일 운영체제 경쟁에서 진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인정했다."그때 안드로이드를 쳐내야 했는데 ...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해 아쉽다. 반독점법 위반 소송 때문에 온통 정신이 팔려 모바일 시장에 집중하지 못했다. 윈도 모바일 OS를 더 잘 다듬었거나 안드로이드를 구글보다 먼저 인수했더라면 지금 모바일 시장은 (애플 iOS와 함께) 윈도 모바일이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2020년 3월 1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가 버크셔 해서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직을 떠나 기후 변화, 세계 보건 및 개발, 교육 등과 같은 자선 활동에 헌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의 90%는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데, 이 나라들이 보유한 보건 자원은 전 세계 보유량의 10%에 불과하다.”'''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게이츠 재단'''(Gates Foundation) 또는 '''B&MGF'''는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 민간 재단 중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재단이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에 의해 2000년에 설립되었다. 이 재단은 '게이츠 가의 관심과 열정에 의해 운영된다'. 주 운영 목적은 국제적 보건의료 확대와 빈곤 퇴치,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교육 기회 확대와 정보 기술에 대한 접근성 확대이다. 빌 게이츠가 자선 활동가로 변모시킨 사람으로 세 명이 언급되는데 빌 게이츠의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그의 아내 멜린다, 석유왕 록펠러이다. 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이정표(milestone)로 1993년에 읽었던 한 보고서를 꼽는다. 이 보고서의 그래프에는 로타바이러스로 한 해 어린이 50만명이 사망한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었다. 게이츠는 “비행기 사고로 100명이 사망해도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하는데, 50만명이 사망하는 질병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본격적인 기부 활동에 나서기 전 빌 게이츠는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의 도움을 구했다. 1994년에 자선단체 ‘윌리엄 H. 게이츠 재단’을 설립한 아버지가 기부 활동에 있어서는 선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빌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 데이비드 카메론멜린다도 결혼 전까지 기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빌 게이츠를 설득해 자선가로 변신시킨 인물로 언급된다. 빌 게이츠는 지난 2010년부터 다른 백만장자들에게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도록 권유하기 시작했는데, 이 활동에 멜린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절반의 힘(The Power of Half)’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멜린다가 게이츠에게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하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윌리엄 게이츠는 돈에 대한 아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게이츠는 부유한 변호사였지만, 돈을 그냥 물려주면 자식을 망친다는 생각으로 빌 게이츠에게 창업 자금을 주지 않았다. 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 역시 세 자녀에게 각각 1000만달러(약 108억원)씩만 물려주고 재산의 나머지 95%는 기부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게이츠 부부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과 함께 기부 권유 운동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전기차 업체 테슬라 CEO 엘론 머스크, 록펠러 가문의 수장인 데이비드 록펠러, 페이스 북 CEO 마크 저커버그 등 120여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자동차왕’ 포드 등 미국의 자본주의를 개척한 초기의 부호들도 빌 게이츠의 변신에 영향을 미쳤다. 게이츠는 2013년 열린 한 행사에서 자신의 자선 활동과 관련, “1세대 대(大) 자선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중에서도 게이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히는 인물이 존 D. 록펠러이다. 록펠러와 게이츠는 비슷한 점이 많다. 정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록펠러는 저가 공세로 경쟁사를 차례차례 무너뜨리며 석유업계를 독점했다. 그래도 생전에 교회에 십일조는 꼬박꼬박 냈고, 이후 아들 세대에 막대한 기부를 하면서 무자비한 자본가라는 오명(汚名)을 씻었다. 게이츠가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도 초창기에는 ‘윈도’ 운영체제 안에 웹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기본 탑재해 시장을 독점한다는 논란에 시달렸다. 게이츠는 과거 인터뷰에서 “돈을 버는 것과 번 돈을 남에게 그냥 줘버리는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선가로 변신하기 전까지는 기부나 자선 활동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교육과 의료 사업에 집중적으로 기부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록펠러는 록펠러 재단을 세워 황열병 치료 등을 지원했고 시카고 대학교, 록펠러 대학교를 설립했다. 게이츠 앤 멜린다 재단의 활동도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 집중돼 있다. 저개발 국가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효과가 가장 큰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재단은 “특정 개인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 창조적 자본주의 === “지구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나 표현수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가난했고 예방할 수도 있는 병들에 시달렸으며 생명을 지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정부와 비영리 단체들이 그들을 돕는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 그 일을 하게 되면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발명품들을 만들 기술은 기업체들이 갖고 있다. 이런 기술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2008년 1월 스위스의 다보스포럼에서 빌 게이츠는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역설했다.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을 ‘의무’로 한층 끌어올린 개념이다. 기업 활동을 위해 돈을 버는 동시에 자선 활동도 ‘의무적’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창조적 자본주의’라고 지칭한 것이다. === 자선 스포츠 행사 === 2017년 4월 29일, 게이츠는 시애틀의 매진된 키 아레나에서 열린 비경쟁 테니스 경기인 아프리카 4차전에서 스위스의 테니스 전설 로저 페더러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 행사는 아프리카에서 로저 페더러 재단의 자선 활동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페더러와 게이츠는 이번 10년 동안 미국 선수 1위 존 이스너와 펄 잼의 리드 기타리스트 마이크 매크레디와 맞붙었다. 그 두 사람은 6대 4로 시합에서 이겼다. 그들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200만 달러를 모금했다. 로저 페더러는 2018년 3월 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Still flying high from last night! Thanks to everyone who made the #MatchForAfrica a great success!"이라는 문구와 함께 빌 게이츠, 잭 소크와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페더러는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복식조를 구성해 잭 소크와 NBC 투데이쇼 진행자 사바나 거스리조와 자선 경기를 펼쳤다. 게이츠와 페더러는 함께 6-3으로 두 번째 경기 승리를 기록했고 경기는 25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 백신개발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전 세계로 확산 양상을 보이던 지난 2020년 5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설립한 재단을 통해 코로나 19 백신 개발을 위한 연구 자금으로 써 달라는 요청과 함께 한국의 바이오기업에 360만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미 4월 문 대통령과 코로나 19 대응을 위해 전화통화를 나눴던 빌 게이츠 회장은 한국의 코로나 방역과 리더십에 다시 한번 신뢰를 나타냈다. 특히 그는 코로나 백신 개발을 위해 한국정부와 기업 등과 협력을 약속하면서, 국내 바이오 기업인 에스케이(SK) 바이오사이언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코로나 백신 민간 분야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다"면서 "SK 바이오사이언스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내년 6월께 연간 2억개의 백신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를 통해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게이츠는 다양한 분야의 지분을 보유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를 넘어 다음과 같은 여러 벤처 사업에 투자했다. 비욘드미트(Beyond meat) 식물성 고기 제조 대체육 기업 빌게이츠가 투자한 콩고기로 만든 비욘드미트 버거슈뢰딩거(Schrödinger, Inc) 생명과학, 소재과학 소프트웨어 업체로 제약·바이오텍·소재 연구에 쓰이는 화학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제작 기업 웨이스트 매니지먼트(Waste Management) 폐기물 처리 업체 캐나다 국립 철도(Canadian National Railway) 1995년에 민영화된 캐니다 국립 철도 브룸(Vroom)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 스타트업 트위터(Twitter)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기업 월마트(Walmart) 미국의 다국적 유통기업 === 아내 멜린다와 결혼 ===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 게이츠 빌 게이츠와 아내 멜린다의 관계는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두사람이 만난 것은 멜린다가 MS의 제품매니저로 입사한 직후다. 그녀가 입사한 지 몇개월 후 빌은 그녀에게 첫 데이트를 신청했다. 당시 빌 게이츠가 멜린다에게 전화를 걸어와 “저기...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번호를 준다면 우린 오늘 밤부터 2주일 안에 데이트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멜린다는 진지하지 않다고 여겼고, 되물었다. 멜린다는 “나는 그에게 ‘오늘 밤으로부터 2주일 후라고요? 나는 2주일 후에 내가 뭘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나 보이지 않는군요’라고 말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빌 게이츠는 한 시간 뒤에 전화를 걸어서는 ‘이러면 당신에게 충분히 마음에서 우러난 것처럼 보이나요?’라고 물었지요“라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그리고 그녀는 이 날 데이트에 응했다. 빌과 멜린다는 7년 간의 데이트 끝에 1994년 1월 1일 하와이의 라나이섬에서 비밀결혼식을 올리면서 결혼에 골인했다. === 자녀교육 === 빌 게이츠는 "내 아이들에게 당연히 컴퓨터를 사 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책을 사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컴퓨터 황제'로 통하는 빌 게이츠도 컴퓨터보다 책이 어린 시절 꿈과 상상력, 창의력을 키우는 데 더 중요한 무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자녀들의 컴퓨터 사용 시간을 하루 45분, 주말 1시간으로 제한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빌 게이츠가 제니퍼, 로리, 피비 자신의 3자녀에게 많은 돈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빌 게이츠는 영국 일간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를 통해 "많은 부는 그들(자녀)에게 좋지 못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게이츠는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길 꺼렸으나 신문은 게이츠가 `자녀들에게 1,000만 달러씩 물려줄 것`이라는 그간의 보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 정도의 돈은(1,000만 달러) 내 전체 재산의 아주 극소수"라며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부로 자녀들이 인생이 영향받지 않기를 원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내 자녀들은 현재 집안일을 하고 용돈을 받는 평범한 아이들"이라며 "교육, 건강과 관련한 자녀들의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지만, 그들은 향후 직장에 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 === "그와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는 동갑내기이며 순진하게도 낙관적이었고 커다란 회사를 세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제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모든 환상을 모두 이뤄냈다. 그리고 대부분을 라이벌 관계에서 만들어 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상대방이 아플 때에도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소통해 왔다""잡스는 천재였고 나는 그를 많이 질투했다"면서 "잡스는 사람들에게 뭔가 엄청난 동기를 부여하는 대단한 마법사였다면 나는 소소한 마법사였다"1955년생 동갑내기인 게이츠와 잡스는 젊은 시절 70년대 후반부터 30년 넘게 애증관계를 이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잡스는 캘리포니아 노동자 집안에서 자랐으며 모든 제품에 대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닫힌 생태계를 창조했으며, 디자인을 통해 제품에 프리미엄을 불어넣었다. 반면, 워싱턴주 상류층에서 자란 게이츠는 개방형 생태계를 믿었고 디자인은 중시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스타일까지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게이츠는 잡스에 대해 "기본적으로 괴짜"라며 "인간으로서는 괴상하게 흠집난 친구"라고 평가했고, 잡스는 게이츠를 "마약을 한 번 해보거나 어렸을 때 히피촌에 갔더라면 좀 더 생각이 넓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IT 산업에 있어서도 게이츠는 "잡스는 정말 IT에 대해 모른다"면서 "대신 그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채는 놀라운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잡스는 "빌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이 없고 아무것도 발명한 적이 없다"면서 "그래서 그가 그가 이제는 IT보다 자선사업을 더 편안하게 여길 것"이라고 폄훼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서로의 태도에 대해 애플 매킨토시 개발팀의 일원이었던 앤디 허츠펠드는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다"면서도 "하지만 스티브는 취향과 스타일 때문에 일반적으로 빌을 자신보다 약간 떨어지는 사람처럼 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빌은 프로그래밍을 못한다는 점 때문에 스티브를 무시했다"고 회상했다.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하지만 2011년 잡스의 타계 이후 게이츠는 그를 그리워하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같은 해 10월5일 게이츠는 잡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미치도록 훌륭하게 명예스러운 일(insanely great honor)이었다"면서 잡스의 표현인 '미치도록 훌륭한'이란 표현을 빌어 그를 추모했다. 당시 그는 "스티브와 나는 약 30년 전에 만나, 동료이자 경쟁자 그리고 친구로 삶의 절반 이상을 함께 보냈다"면서 "그가 많이 그리울 것이며 잡스가 세상에 미친 강력한 영향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애도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도 게이츠는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높게 평가하면서 "나는 연설을 잘하기 위해 힘들여 노력해야 했지만 잡스는 항상 자연스러웠다"면서 "내가 잡스처럼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능력이 있었다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가난 퇴치·질병 예방 연구 등 국제 사업에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잡스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진 '천재'였고, 나도 그를 따라하고 싶었다"면서 "잡스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사람들이 그의 주문을 따르는 것을 봐왔다"면서 "나는 그를 너무나 질투했다"고 덧붙였다. === 워런 버핏과의 관계 === “난 내 친구들을 대부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워런 버핏만은 예외다. 그의 만남이 나와 아내 멀린다의 삶을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5년 전 오늘이다. 1991년 7월5일.”파일:Kathy Ireland, Warren Buffett and Bill Gates at the 2015 Berkshire Hathaway Shareholders Meeting.jpg|섬네일|버크셔헤서웨이 주주총회에서 워런 버핏, 빌게이츠과 캐시 아일랜드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1991년 7월 5일 버핏을 처음 만났다고 CNN은 보도했다. 이후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게이츠는 버핏이 사실상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으로 세상에 끼친 영향은 '계산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존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둘은 아버지뻘 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는데 빌 게이츠의 사무실 전화 단축번호에 집과 워런 버핏의 번호만 저장돼 있을 정도다. 대학 강연이나 기부 활동도 같이한다. 워런 버핏의 기부금 대부분도 빌 게이츠 부부가 설립한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으로 들어간다. ‘배움과 웃음의 25년’이란 글을 통해 “버핏은 나와 멀린다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내 삶을 바꿔줬다”며 “그는 내가 오마하에 들를 때 지금도 직접 운전해 나를 공항에 데리러 나온다”고 전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버핏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게이츠는 “컴퓨터만 아는 괴짜와 이메일 한 번 쓰지 않는 투자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버핏은 젊은 사업가에게 정중히 MS의 사업 전략에 대해 예리하게 질문했고, 두 사람은 서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대화에 빠져들었다. 게이츠는 버핏 특유의 ‘초딩 입맛’에 대해서도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는 “버핏이 우리 집에 묵었을 때 아침식사로 오레오 쿠키를 먹었다”며 “워런의 입맛은 마치 여섯 살짜리 꼬마 같다”고 전했다. 또 “햄버거나 아이스크림, 코카콜라를 달고 사는 버핏과 식사하러 나가는 게 즐겁다”며 “솔직히 젊은이들에게 그의 식단은 최악이겠지만, 왠지 그에겐 잘 통하는 식단인 것 같다”고 적었다. === 독서 ===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문난 독서광이다. 그는 일 년에 50여권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블로그에 독후감을 남긴다. 미국 CNBC는 21일(현지시간) 이 억만장자 독서광이 책을 읽은 후 그 내용을 기억하는 빌게이츠 독서 비법을 소개했다. 빌 게이츠가 밝히는 독서 기억법의 핵심은 ‘맥락’이다. 그는 ‘쿼츠’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읽다보면 이 내용과 저 내용이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사이에서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면서 “만일 커다란 틀을 갖고 있다면 모든 것을 그 틀 안에 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어떤 주제에 관해 기본적인 이해의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다음에 새로운 정보들이 들어오면 그 위에 적절히 배치해 놓는 것이다. 게이츠는 “그러므로 계속 쌓이는 지식을 풍요롭게 유지 관리하는 것이 훨씬 덜 이용이해진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엄두가 안날 수 있지만 일단 그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지식의 조각들이 제 자리를 잡게 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과학과 관련된 독서를 하는 경우, 게이츠는 과학자의 역사에 관한 독서와 과학자의 업적에 관한 독서는 상호 관련되는 부분이 있어서 하나의 큰 틀이나 맥락 속에 놓고 보면 세부적인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말하자면 연대순이나 지도, 혹은 과학의 지류 등을 틀로 삼을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게이츠에게 있어서 독서는 취미나 소일거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는 2017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독서는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은 배움을 멈추지 않는 한 노쇠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독서가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왔다고 설명했다. “책 한권 한권이 내게 새로운 것을 일깨워주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내게 늘 책을 읽도록 격려해주신 부모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독서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공급해줬다. 그 호기심이 내가 사업을 하도록 이끌었고 지금 몸담고 있는 재단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게이츠는 책을 읽을 때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는 편이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내용이 마음에 들건 안 들건 끝까지 돌파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읽다가 중간에 멈추는 걸 싫어한다”면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책을 읽으면서 여백에 메모를 적느라 (좋아하는 책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밝혔다. === 예술품 수집 === 예술품 수집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는 지난 1994년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필사본인 72쪽짜리 레스터사본(Leicester Codex)을 3,100만달러에 사들였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인 윈슬로 호머의 작품도 3,000만달러를 주고 구입한 바 있다. === 유튜브 === 빌 게이츠가 유튜브로부터 구독자 100만명 이상 유튜버에게 수여되는 골드 버튼을 받았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빌 게이츠'서 골드버튼 언박싱 영상을 게재했다. 그리고는 구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메시지가 나온 뒤 짤막한 영상이 마무리됐다. 그는 워런 버핏(Warren Buffett)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다양한 영상을 올렸다. * 자신이 죽을 경우 전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증하고 세 명의 자녀들에게는 1인당 1천만 달러씩만 상속한다고 밝혔다. 이는 빌 게이츠 전 재산의 0.018%에 불과하다. * 영국의 YouGov에서 전세계 23개국에서 조사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에서 9.2점을 받아 남성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버락 오바마(6.4), 시진핑(5.3)이 뒤를 이었다. * 2013년 4월 21일 내방 기간 동안 삼성전자 서초동 본사를 방문하였다. 뒤쪽 취재진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며 현관문을 직접 열고 건물로 들어갔다. * 1971년 정보 과학사 급여 산출 프로그램 개발 * 1972년 트래프 오 데이터('교통자료 포착'이라는 뜻)설립 * 1974년 베이직 개발 *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설립 * 1975년 ~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 CEO * 1980년 MS-DOS 개발 *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회사로 전환 * 1985년 윈도우 1.0 개발 * 1986년 31세의 나이로 억만장자가 됨 * 1987년 윈도우 2.0 개발 * 1990년 3월 윈도우 3.0 개발 * 1994년 1월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 * 1995년 윈도우 95 개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 개발, MSN 컴퓨터 통신시장 진출, 워렌 버핏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 * 1996년 인터넷 익스플로러 3.0 개발 * 1998년 윈도우 98 개발 * 2000년 ~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 * 2000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설립 * 2007년 윈도우 비스타 개발 *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 은퇴 * 2015년 클린 에너지 기금 설립 * 2005년 영국 명예 KBE 훈장(honorary KBE, 외국인 대상 정원외) * 2010년 보이스카우트 실버 버펄로상(Silver Buffalo Award) * 마이크로소프트 *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 워렌 버핏 * 스티브 잡스 * IBM * 테라파워(TerraPower) ** 토륨기반 원자력(:en:Thorium-based nuclear power) ** 액체불소 토륨 원자로(LFTR, :en:Liquid fluoride thorium reactor) ** 진행파 원자로(TWR, :en:Traveling wave reactor) * 캐스케이드 인베스트먼트(:en:Cascade Investment) - 빌 게이츠가 이끌고 있는 투자회사 ** 포시즌스 호텔 - 세계적인 캐나다의 호텔체인으로서 빌 게이츠의 캐스케이드 인베스트먼트와 사우디 왕가 기업가인 알왈리드 빈 탈랄의 킹덤 홀딩 컴퍼니(Kingdom Holding Company)가 대주주로 있다. * * * * * * 빌 게이츠 공식 사이트 – The Gates Notes * * *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빌 게이츠 * Biography of Bill Gates at Microsoft.com * Forbes topic page on Bill Gates *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분류:1955년 출생 분류:미국의 억만장자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미국의 인도주의자 분류:미국의 발명가 분류:미국의 투자가 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 분류:독일계 미국인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미국의 자선가 분류:더들리윈스롭가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 분류:컴퓨팅의 역사 분류:명예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 분류:하버드 대학교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분류:칭화 대학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국립 기술혁신 메달 수상자 분류:시애틀 출신 분류:대통령 자유 훈장 수상자 분류:윈도우 관계자 분류:미국의 회사 설립자 분류:너드 문화
아햏햏
[ "Introduction", "표기와 발음", "유래", "햏자", "파생 상품 및 인물", "관련 인물",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아햏햏'''은 다양한 뜻을 지니는 인터넷 유행어이다.\n아햏햏은 2002년과 2003년에 유행하였으며 국립국어연구원에 의해 짤방과 같이 신조어로 정식 인정된 적도 있으나(2002년 신어 보고서에 수록), 2003년까지 쓰였으나 2004년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아햏햏이 만들어진 디시인사이드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아햏햏은 디시인사이드 사용자들이 이 모호하고 기분이 언짢은 상황을 표현했던 글로 의성어로는 어리석다는 뜻과 혀과 꼬이면서 당혹스러운 상황을 표현한다.\n", "한자로는 亞行杏(아행행)으로 표기하며, 로마자로는 보통 ahehheh으로 표기한다. 재미로 '아헿헿', '아핳핳', '으흫흫'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n\n아햏햏은 현대 국어에 잘 쓰이지 않는 'ㅎ' 받침을 써서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발음을 생각지 않고 태어난 신조어이니만큼 아무렇게나 발음해도 상관 없다는 의견이 있지만, 여러 의견 중에서 발음 가능한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n\n* 아행행 : 햏자, 수햏, 亞行杏 등의 용례를 고려한 발음이다.\n* 아해해 : 'ㅎ' 받침을 생략한 발음이다.\n* 아해탣 (←아핻핻) : 한국어 발음 규칙에 따른 발음이다. 자음의 끝소리 규칙에 따라 'ㅎ' 받침은 'ㄷ' 받침으로 발음되고, 첫 번째 '햏핻'의 받침은 뒤의 '햏'의 초성 'ㅎ'과 음운 동화가 일어나 'ㅌ'으로 소리난다. 이는 대구광역시 교육청 주관 2012년 고1 영남권 모의고사 국어영역 11번 문제에 '아햏햏'의 발음법에 대한 문제의 답안이 되기도 했다.\n", "2002년 4월 엽기갤러리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꾸준글들이 생겨났다.\n\n홀맨, 피바다, 정신과전문의 표진인 등등 고정리플들을 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 유저가 \"아햏햏 소피티아\"라는 고정 리플을 달면서 엽기 갤러리에서 알려지게 되었다.\n", "햏자행자, 行者는 아햏햏으로부터 파생된 말의 하나로,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던 단어이다. 이들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거나 라면을 주로 먹으며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에 \"아햏햏\"을 쓰는 등의 자신들의 특징을 \"수햏\"하는 활동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평소에 합성사진을 만들어 공유하거나 게시물에 답변을 먼저 달기 위해 경쟁하는 등수놀이, 성인물 감상 등을 즐겨하였다.\n\n아햏햏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자신을 햏자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다(다른 사람을 부를 땐 쓴다).\n\n햏자의 다른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혹은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n\n파생어로 햏테(햏력 테스트=햏자 능력 테스트;짤방을 어디서 찍었는지 알아맞추는 테스트)가 있다.\n", "*아햏햏 티셔츠 : T09 피터판규햏자가 만든티셔츠로, 붓글씨로 적힌 아햏햏이 새겨진 티셔츠이다.\n*아햏햏 D.O.G. : MSN 메신저와 연동되어 각종 상황을 소리나 진동으로 알려주는 강아지 모양의 인형이다.\n*아햏햏 밴드 : 정식명칭은 '저질카피밴드 아햏햏'으로 아햏햏 사이트의 햏자들(아랑쑈, 풍걸,윤득햏, 풍각, 피터판규, 오사마)이 모여서 만든 밴드이다.\n", "* 김풍 - 웹툰 작가로, 아햏햏 문화를 배경으로 한 웹툰으로 유명해졌다.\n", "*스타쉬피스\n", "\n", "* 디시인사이드 - 득햏의 길\n* 아햏햏 도원\n* 고구마 언덕\n\n\n분류:인터넷 신조어\n분류:디시인사이드\n분류:2002년 인터넷 문화\n분류:2003년 인터넷 문화\n분류:신조어\n분류:대한민국의 신조어" ]
'''아햏햏'''은 다양한 뜻을 지니는 인터넷 유행어이다. 아햏햏은 2002년과 2003년에 유행하였으며 국립국어연구원에 의해 짤방과 같이 신조어로 정식 인정된 적도 있으나(2002년 신어 보고서에 수록), 2003년까지 쓰였으나 2004년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아햏햏이 만들어진 디시인사이드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아햏햏은 디시인사이드 사용자들이 이 모호하고 기분이 언짢은 상황을 표현했던 글로 의성어로는 어리석다는 뜻과 혀과 꼬이면서 당혹스러운 상황을 표현한다. 한자로는 亞行杏(아행행)으로 표기하며, 로마자로는 보통 ahehheh으로 표기한다. 재미로 '아헿헿', '아핳핳', '으흫흫'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햏햏은 현대 국어에 잘 쓰이지 않는 'ㅎ' 받침을 써서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발음을 생각지 않고 태어난 신조어이니만큼 아무렇게나 발음해도 상관 없다는 의견이 있지만, 여러 의견 중에서 발음 가능한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행행 : 햏자, 수햏, 亞行杏 등의 용례를 고려한 발음이다. * 아해해 : 'ㅎ' 받침을 생략한 발음이다. * 아해탣 (←아핻핻) : 한국어 발음 규칙에 따른 발음이다. 자음의 끝소리 규칙에 따라 'ㅎ' 받침은 'ㄷ' 받침으로 발음되고, 첫 번째 '햏핻'의 받침은 뒤의 '햏'의 초성 'ㅎ'과 음운 동화가 일어나 'ㅌ'으로 소리난다. 이는 대구광역시 교육청 주관 2012년 고1 영남권 모의고사 국어영역 11번 문제에 '아햏햏'의 발음법에 대한 문제의 답안이 되기도 했다. 2002년 4월 엽기갤러리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꾸준글들이 생겨났다. 홀맨, 피바다, 정신과전문의 표진인 등등 고정리플들을 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 유저가 "아햏햏 소피티아"라는 고정 리플을 달면서 엽기 갤러리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햏자행자, 行者는 아햏햏으로부터 파생된 말의 하나로,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던 단어이다. 이들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거나 라면을 주로 먹으며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에 "아햏햏"을 쓰는 등의 자신들의 특징을 "수햏"하는 활동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평소에 합성사진을 만들어 공유하거나 게시물에 답변을 먼저 달기 위해 경쟁하는 등수놀이, 성인물 감상 등을 즐겨하였다. 아햏햏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자신을 햏자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다(다른 사람을 부를 땐 쓴다). 햏자의 다른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혹은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파생어로 햏테(햏력 테스트=햏자 능력 테스트;짤방을 어디서 찍었는지 알아맞추는 테스트)가 있다. *아햏햏 티셔츠 : T09 피터판규햏자가 만든티셔츠로, 붓글씨로 적힌 아햏햏이 새겨진 티셔츠이다. *아햏햏 D.O.G. : MSN 메신저와 연동되어 각종 상황을 소리나 진동으로 알려주는 강아지 모양의 인형이다. *아햏햏 밴드 : 정식명칭은 '저질카피밴드 아햏햏'으로 아햏햏 사이트의 햏자들(아랑쑈, 풍걸,윤득햏, 풍각, 피터판규, 오사마)이 모여서 만든 밴드이다. * 김풍 - 웹툰 작가로, 아햏햏 문화를 배경으로 한 웹툰으로 유명해졌다. *스타쉬피스 * 디시인사이드 - 득햏의 길 * 아햏햏 도원 * 고구마 언덕 분류:인터넷 신조어 분류:디시인사이드 분류:2002년 인터넷 문화 분류:2003년 인터넷 문화 분류:신조어 분류:대한민국의 신조어
리처드 스톨먼
[ "Introduction", "살아온 길", "자유 소프트웨어 대 오픈 소스", "리눅스 SCO분쟁에 관한 리처드 스톨먼의 입장", "수상경력", "관련 서적",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n\n'''리처드 매슈 스톨먼'''(, 1953년 3월 16일 ~)은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심 인물이며, GNU 프로젝트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설립자이다. 그는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의 개념을 도입했다.\n\n그는 또한 탁월한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그는 문서 편집기인 Emacs, GNU 컴파일러 모음 컴파일러, GDB 디버거 등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이들 모두를 GNU 프로젝트의 일부로 만들었다.\n\n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도덕적, 정치적, 법적인 기초를 세우는 데 본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며, 이는 독점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급에 대한 대안이 되었다.\n", "스톨먼은 1953년 3월 16일, 엘리스 립맨과 대니얼 스톨먼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다.\n\n1960년대 그의 고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시내에 있던 연구소인 IBM 뉴욕 과학센터에서 일하면서, 스톨먼은 고등학교 졸업 후의 여름을 보냈고 거기에서 그의 첫 번째 프로그램인 IBM 7064를 위한 전처리기(pre-processor)를 PL/I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했다. 다음과 같이 그는 회상했다.\n\n:\"나는 첫 프로그램을 PL/I로 작성했다. 그 뒤, 그 프로그램이 그 컴퓨터에 맞지 않을 만큼 커졌을 때 어셈블리어로 다시 고쳤다\"\n\n1971년에 하버드 대학의 신입생으로 스톨먼은 MIT 인공지능 실험실의 해커가 되었다.\n\n=== 해커 문화의 타락 ===\n1980년대, 스톨먼의 삶이었던 해커 공동체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업화로 인해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n\n특히, 실험실 내의 다른 해커들은 심볼릭스(Symbolics)라는 회사를 차리고는, 기존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그들만의 독점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n\n1983년에서 1985년 사이의 2년동안, 스톨먼은 연구실 내에서 혼자 힘으로 심볼릭스의 결과물들과 똑같은 기능의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그들의 독점을 막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그는 그의 세대 중에서 마지막 해커였다. 그는 비밀 유지 합의서에 사인하기를 요구받았으며, 그의 원칙인 다른 이들과의 공유나 이웃을 돕는 것에 위배되는 작업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n\n=== GNU를 설립하다. ===\n1985년, 스톨먼은 GNU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유닉스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한 그의 의지와 동기를 역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비영리 기관인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설립했다.\n\n그리고 그는 1989년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내에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허드(Hurd) 커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GNU 시스템이 거의 동시에 완성되었다.\n\n1991년, 리누스 토르발스는 GPL로 리눅스 커널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완벽하게 기능하는 GNU 시스템인 GNU/리눅스 운영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n", "리처드 스톨먼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동기는 그를 매우 논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코드를 공유하자는 개념에 동의하는 프로그래머들 중 많은 수가 스톨먼의 도덕주의적인 입장과 개인적인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의 한 결과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대안인 오픈 소스 운동이 생겨났다.\n", "\n", "스톨먼은 그의 작업들로 인해 다음과 같이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n\n* 1990년: 맥아더 펠로우쉽\n* 1991년: Emacs 편집기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ACM의 그레이스 하퍼 상 수상\n* 1996년: 스웨덴의 왕립기술연구소에서 명예 박사학위 받음\n* 1998년: 전자 프론티어 재단의 파이오니어 상 수상\n* 1999년: 유리 루빈스키 기념상 수상\n* 2001년: The Takeda Techno-Entrepreneurship Award 수상\n", "* 샘 윌리엄스 (2002년) ''Free as in Freedom: Richard Stallman's Crusade for Free Software'', 오라일리 미디어 (웹에서 읽기 가능, 아래 링크 참조).\n", "\n* 해킹\n* 프로그래밍의 자유를 위한 연합\n* 소프트웨어 특허\n", "* \n* GNU 철학 페이지\n* Original GNU 공지사항 뉴스그룹\n* Free As In Freedom, 스톨먼의 전기.\n* 그의 유즈넷 기고 글\n\n\n\n\n\n\n\n\n분류:1953년 출생\n분류:살아있는 사람\n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n분류:해커\n분류:GNU\n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n분류:컴퓨터 선구자\n분류:프로그래밍 언어 설계자\n분류:저작권 활동가\n분류:인터넷 명예의 전당\n분류:미국의 블로거\n분류: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동문\n분류:유대계 미국인\n분류:GNU 관계자\n분류:리눅스 관계자\n분류:반출생주의자\n분류:미국의 무신론자\n분류:그레이스 머리 호퍼상 수상자\n분류:이맥스" ]
'''리처드 매슈 스톨먼'''(, 1953년 3월 16일 ~)은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심 인물이며, GNU 프로젝트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의 설립자이다. 그는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또한 탁월한 프로그래머이기도 하다. 그는 문서 편집기인 Emacs, GNU 컴파일러 모음 컴파일러, GDB 디버거 등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이들 모두를 GNU 프로젝트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도덕적, 정치적, 법적인 기초를 세우는 데 본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며, 이는 독점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급에 대한 대안이 되었다. 스톨먼은 1953년 3월 16일, 엘리스 립맨과 대니얼 스톨먼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그의 고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시내에 있던 연구소인 IBM 뉴욕 과학센터에서 일하면서, 스톨먼은 고등학교 졸업 후의 여름을 보냈고 거기에서 그의 첫 번째 프로그램인 IBM 7064를 위한 전처리기(pre-processor)를 PL/I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했다. 다음과 같이 그는 회상했다. :"나는 첫 프로그램을 PL/I로 작성했다. 그 뒤, 그 프로그램이 그 컴퓨터에 맞지 않을 만큼 커졌을 때 어셈블리어로 다시 고쳤다" 1971년에 하버드 대학의 신입생으로 스톨먼은 MIT 인공지능 실험실의 해커가 되었다. === 해커 문화의 타락 === 1980년대, 스톨먼의 삶이었던 해커 공동체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상업화로 인해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특히, 실험실 내의 다른 해커들은 심볼릭스(Symbolics)라는 회사를 차리고는, 기존의 자유 소프트웨어를 그들만의 독점 소프트웨어로 바꾸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1983년에서 1985년 사이의 2년동안, 스톨먼은 연구실 내에서 혼자 힘으로 심볼릭스의 결과물들과 똑같은 기능의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그들의 독점을 막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미 그는 그의 세대 중에서 마지막 해커였다. 그는 비밀 유지 합의서에 사인하기를 요구받았으며, 그의 원칙인 다른 이들과의 공유나 이웃을 돕는 것에 위배되는 작업들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 === GNU를 설립하다. === 1985년, 스톨먼은 GNU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유닉스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한 그의 의지와 동기를 역설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비영리 기관인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그는 1989년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GPL) 내에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허드(Hurd) 커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GNU 시스템이 거의 동시에 완성되었다. 1991년, 리누스 토르발스는 GPL로 리눅스 커널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완벽하게 기능하는 GNU 시스템인 GNU/리눅스 운영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리처드 스톨먼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동기는 그를 매우 논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코드를 공유하자는 개념에 동의하는 프로그래머들 중 많은 수가 스톨먼의 도덕주의적인 입장과 개인적인 철학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의 한 결과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대안인 오픈 소스 운동이 생겨났다. 스톨먼은 그의 작업들로 인해 다음과 같이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 1990년: 맥아더 펠로우쉽 * 1991년: Emacs 편집기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ACM의 그레이스 하퍼 상 수상 * 1996년: 스웨덴의 왕립기술연구소에서 명예 박사학위 받음 * 1998년: 전자 프론티어 재단의 파이오니어 상 수상 * 1999년: 유리 루빈스키 기념상 수상 * 2001년: The Takeda Techno-Entrepreneurship Award 수상 * 샘 윌리엄스 (2002년) ''Free as in Freedom: Richard Stallman's Crusade for Free Software'', 오라일리 미디어 (웹에서 읽기 가능, 아래 링크 참조). * 해킹 * 프로그래밍의 자유를 위한 연합 * 소프트웨어 특허 * * GNU 철학 페이지 * Original GNU 공지사항 뉴스그룹 * Free As In Freedom, 스톨먼의 전기. * 그의 유즈넷 기고 글 분류:1953년 출생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해커 분류:GNU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분류:컴퓨터 선구자 분류:프로그래밍 언어 설계자 분류:저작권 활동가 분류:인터넷 명예의 전당 분류:미국의 블로거 분류: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유대계 미국인 분류:GNU 관계자 분류:리눅스 관계자 분류:반출생주의자 분류:미국의 무신론자 분류:그레이스 머리 호퍼상 수상자 분류:이맥스
해킹
[ "Introduction", "낱말의 유래", "개념 정의", "무선해킹", "법률적 해석", "사회 문제",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해킹'''(security hacking)은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 침입하여 데이터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이다. 전자 회로나,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웹사이트 등 각종 정보 체계가 본래의 설계자나 관리자, 운영자가 의도하지 않은 동작을 일으키도록 하거나 체계 내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정보를 열람, 복제, 변경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n \n또한 해킹은 크래킹과 개념이 다르다. 해킹이 다른 사람의 통신망에 정당한 접근 권한 없이 접근하거나 허용된 접근 권한의 범위를 초과하여 침입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면, 크래킹은 그러한 불법적 접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해커는 해킹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n", "본래 거칠게 자르거나 헤집는다는 뜻의 해크()이라는 낱말에 지금의 의미를 부여한 것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한 동아리 회원들이 자신들을 해커()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n", "해킹의 정의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초기에는 '컴퓨터의 호기심이나 지적욕구의 바탕 위에 컴퓨터와 컴퓨터간의 네트워크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했다. 이후 악의적인 행동이 늘어나면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침입할 때 파괴적인 계획을 갖고 침입하는 행위'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일명 크래킹이라 하였다.\n\n현재 사용하고 있는 해킹이란 의미는 대체적으로 '어떠한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컴퓨터에 침입하는 모든 행위'로서 전산망을 통하여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엑세스 권한 없이 무단 침입하여 부당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며, 여기서 부당 행위란 불법적인 시스템 사용, 불법적인 자료 열람, 유출 및 변조 등을 뜻한다. 반면 긍정적 의미로는 '각종 정보 체계의 보안 취약점을 미리 알아내고 보완하는 데에 필요한 행위'란 뜻을 가지고 있다.\n", "조금 더 나아가, 해킹의 형태나 방식을 알아보면 유선 네트워크 환경에서 멀웨어, DDos, 정보탈취 등 다양한 해킹 형태로 진행 중인 유선해킹과 기업 내 Wi-Fi 무선랜 환경을 통해 내부망에 접속해 위협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네트워크 해킹 그리고 무선 스파이칩 또는 비인가 장치를 바로 서버에 연결해 외부에서 무선 전파로 조종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데이터 해킹 등이 있다.\n\n대응 방식으로 NAC(Net Access Control) IP 및 네트워크 접근제어로 유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하거나, IPS(Intrusion Prevention System) 또는 WIPS(Wireless IPS) 침해 방지 시스템을 구축하여 유무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무선 데이터 해킹으로부터의 보안을 위해서는 전체 무선 주파수를 분석하고 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n\n무선 데이터 해킹의 경우, 자연스럽게 공급되는 IT장비를 통한 위험성이 상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서버 메인보드에 스파이칩이 심어진 형태로 공급되는 경우에는 서버 설계도에 따라 부품을 하나하나 대조해 보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며, 놀랍게도 일반적인 무선 키보드나 무선 마우스 등 PC 주변 장치나 일상생활 용품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내장되어 공급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USB메모리와 달리 별다른 보안 절차 없이 서버 PC와 연결되어 해킹 도구로 사용이 가능하다. 무선 데이터 해킹 장치는 점점 고성능화 및 소형화 되는 추세이며, Wi-Fi나 Bluetooth 등을 포함해 다양한 무선통신 기술이 적용된다. 특정 무선통신기술을 활용한 제품의 경우 수십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무선해킹을 통한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하다.\n\n이러한 무선 데이터 해킹 방식은 기업이나 기관의 외부망과 내부망을 분리하여 외부 공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춰 놓은 상태더라도 내부 서버에 무선 스파이칩만 연결하면 외부에 있는 해커가 마음대로 활동이 가능하여 기존의 보안체계가 무용지물이 될 우려가 높고, 흔적이 남게 되는 유선 해킹과는 달리, 내부망에 직접 연결하는 무선 데이터 해킹은 해커가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흔적이 남지 않아 피해 사례 파악이 어렵다.\n", "대한민국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해킹을 \"침해사고\"의 한 원인으로 나열하고 있다.\n\n\n", "진용진은 불법 게임 핵을 성인층이 제작하고 판매하여 유통한다는 고정관념과 달리 일부 청소년층도 포함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n", "=== 유사 개념 · 파생 개념 ===\n* 크래킹\n* 웹해킹\n* 취약점 공격(익스플로잇)\n* 사이트 간 스크립팅(XSS)\n* 사회 공학\n* iOS 탈옥\n* 라이프핵(:en:Life hack) - 분야불문 모든 일상생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팁이나 테크닉\n\n=== 해커 ===\n* 해커\n* 화이트햇 해커\n* 블랙햇 해커\n* 그레이햇 해커\n* 레드 해커\n* 스크립트 키디\n\n=== 관련 기관 · 단체 ===\n* 국가사이버안전센터 (국정원 소속)\n* 사이버안전국 (경찰청 소속)\n*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n* 대한민국의 해커그룹\n", "\n", "* 해킹에 관한 MIT 갤러리\n* hacked.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 2015년 7월 16일.\n\n\n\n\n\n\n " ]
'''해킹'''(security hacking)은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 침입하여 데이터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이다. 전자 회로나,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웹사이트 등 각종 정보 체계가 본래의 설계자나 관리자, 운영자가 의도하지 않은 동작을 일으키도록 하거나 체계 내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정보를 열람, 복제, 변경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또한 해킹은 크래킹과 개념이 다르다. 해킹이 다른 사람의 통신망에 정당한 접근 권한 없이 접근하거나 허용된 접근 권한의 범위를 초과하여 침입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면, 크래킹은 그러한 불법적 접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해커는 해킹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본래 거칠게 자르거나 헤집는다는 뜻의 해크()이라는 낱말에 지금의 의미를 부여한 것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한 동아리 회원들이 자신들을 해커()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해킹의 정의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초기에는 '컴퓨터의 호기심이나 지적욕구의 바탕 위에 컴퓨터와 컴퓨터간의 네트워크를 파괴하는 행위'를 말했다. 이후 악의적인 행동이 늘어나면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침입할 때 파괴적인 계획을 갖고 침입하는 행위'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일명 크래킹이라 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해킹이란 의미는 대체적으로 '어떠한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컴퓨터에 침입하는 모든 행위'로서 전산망을 통하여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엑세스 권한 없이 무단 침입하여 부당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며, 여기서 부당 행위란 불법적인 시스템 사용, 불법적인 자료 열람, 유출 및 변조 등을 뜻한다. 반면 긍정적 의미로는 '각종 정보 체계의 보안 취약점을 미리 알아내고 보완하는 데에 필요한 행위'란 뜻을 가지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가, 해킹의 형태나 방식을 알아보면 유선 네트워크 환경에서 멀웨어, DDos, 정보탈취 등 다양한 해킹 형태로 진행 중인 유선해킹과 기업 내 Wi-Fi 무선랜 환경을 통해 내부망에 접속해 위협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네트워크 해킹 그리고 무선 스파이칩 또는 비인가 장치를 바로 서버에 연결해 외부에서 무선 전파로 조종하는 해킹 형태인 무선 데이터 해킹 등이 있다. 대응 방식으로 NAC(Net Access Control) IP 및 네트워크 접근제어로 유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하거나, IPS(Intrusion Prevention System) 또는 WIPS(Wireless IPS) 침해 방지 시스템을 구축하여 유무선 네트워크 보안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무선 데이터 해킹으로부터의 보안을 위해서는 전체 무선 주파수를 분석하고 탐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선 데이터 해킹의 경우, 자연스럽게 공급되는 IT장비를 통한 위험성이 상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서버 메인보드에 스파이칩이 심어진 형태로 공급되는 경우에는 서버 설계도에 따라 부품을 하나하나 대조해 보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며, 놀랍게도 일반적인 무선 키보드나 무선 마우스 등 PC 주변 장치나 일상생활 용품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내장되어 공급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USB메모리와 달리 별다른 보안 절차 없이 서버 PC와 연결되어 해킹 도구로 사용이 가능하다. 무선 데이터 해킹 장치는 점점 고성능화 및 소형화 되는 추세이며, Wi-Fi나 Bluetooth 등을 포함해 다양한 무선통신 기술이 적용된다. 특정 무선통신기술을 활용한 제품의 경우 수십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무선해킹을 통한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하다. 이러한 무선 데이터 해킹 방식은 기업이나 기관의 외부망과 내부망을 분리하여 외부 공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춰 놓은 상태더라도 내부 서버에 무선 스파이칩만 연결하면 외부에 있는 해커가 마음대로 활동이 가능하여 기존의 보안체계가 무용지물이 될 우려가 높고, 흔적이 남게 되는 유선 해킹과는 달리, 내부망에 직접 연결하는 무선 데이터 해킹은 해커가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흔적이 남지 않아 피해 사례 파악이 어렵다. 대한민국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해킹을 "침해사고"의 한 원인으로 나열하고 있다. 진용진은 불법 게임 핵을 성인층이 제작하고 판매하여 유통한다는 고정관념과 달리 일부 청소년층도 포함되어 있다고 증언하였다. === 유사 개념 · 파생 개념 === * 크래킹 * 웹해킹 * 취약점 공격(익스플로잇) * 사이트 간 스크립팅(XSS) * 사회 공학 * iOS 탈옥 * 라이프핵(:en:Life hack) - 분야불문 모든 일상생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팁이나 테크닉 === 해커 === * 해커 * 화이트햇 해커 * 블랙햇 해커 * 그레이햇 해커 * 레드 해커 * 스크립트 키디 === 관련 기관 · 단체 === * 국가사이버안전센터 (국정원 소속) * 사이버안전국 (경찰청 소속) *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 * 대한민국의 해커그룹 * 해킹에 관한 MIT 갤러리 * hacked.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 2015년 7월 16일.
뉴욕 (동음이의)
[ "Introduction", "같이 보기" ]
[ "\n'''뉴욕'''(New York)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n\n* '''뉴욕주'''(State of New York)는 미국의 주이다.\n** '''뉴욕 시티'''(New York City)는 미국 뉴욕 주의 도시이다.\n* '''뉴욕'''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잡지이다.\n* '''뉴욕'''은 미국 뉴욕 주의 도시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칵테일의 일종이다.\n* '''뉴욕'''은 1983년 매킨토시 글꼴이다.\n* New York (음반)\n", "* \n\n" ]
'''뉴욕'''(New York)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 '''뉴욕주'''(State of New York)는 미국의 주이다. ** '''뉴욕 시티'''(New York City)는 미국 뉴욕 주의 도시이다. * '''뉴욕'''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잡지이다. * '''뉴욕'''은 미국 뉴욕 주의 도시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진 칵테일의 일종이다. * '''뉴욕'''은 1983년 매킨토시 글꼴이다. * New York (음반) *
사전
[ "Introduction", "사전의 역사", "사전의 구조", "사전의 분류", "말뭉치언어학",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n파일:Latin dictionary.jpg|섬네일|300px|right|그라츠 대학 도서관의 라틴어 사전\n사전\n'''사전'''(辭典)은 낱말의 뜻을 서술하는 것 내지는 도표와 함께 모아 놓은 것, 또는 어떤 낱말과 대응하는 다른 나라말의 낱말을 가나다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많은 사전들은 발음기호도 포함하고 있으며 응용, 역사, 어원, 그림, 사용법, 예문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는 종이로된 문서 형식의 사전을 많이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n", "\n발견된 가장 오랜 사전은 기원전 2300년경 쓰인 아카드 제국의 쐐기문자 조각으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대역쌍 목록이다. 우라 후불루 용어집(Urra=hubullu glossary)이라 불리는 이 사전의 이름은 용어집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자가 붙는 채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n\n근대 유럽의 사전들은 이중언어 사전으로 시작했다. 1502년에 나온 언어학자이자 수사인 암브로조 깔레피노(Ambrogio Calepino)의 코르누코파이아(Cornucopia)가 그것인데 이중언어사전이라기 보다는 다국어사전이다. 라틴어를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불어, 독어로 설명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n\n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은 영어사전의 역사에서 한 이정표였다. 이전까지의 사전은 대부분 유사 어휘들을 분류해서 기술하는, 기린 옆에 사자를 나열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존슨은 그 모든 어휘를 예외 없이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여 첫 번째 근대적인 사전을 완성했다.\n", "\n사전은 해당 항목의 대표형을 보여주는 표제어 아래 크게보아 뜻풀이와 예문 그리고 기타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뜻풀이는 해당 의미를 대상언어로 해설한 것이고 예문은 그 의미로 사용된 문장의 사례이다. 기타정보에는 발음, 품사, 통사구조, 형태정보, 관련어 등 해당 항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문법적 해설이나 부가적인 해설을 말한다.\n", "* '''어학사전''' vs 백과사전\n* 일반사전 vs 특수사전\n* 정의식 vs 기술식\n\n사전은 크게 '''어학사전'''(辭典, dictionary, '''말모이''')과 백과사전(百科事典, encyclopedia)으로 나뉘는데 이 둘 사이에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담는 책이라는 공통점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차이점이 있다. 기존에 종이책으로만 출간이 가능했을 때에는 이러한 구분이 비교적 엄격했으나 인터넷 사전의 경우 사람들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찾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전부터 한국어의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일본어의 코지엔과 같은 어학사전들은 백과사전다운 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n\n=== 어학사전 ===\n어학사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뜻풀이 대상언어에 따라 일국어사전과 이중언어사전이 있다. 일국어사전은 한국어사전, 영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같은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것도 모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이 더 자상한 뜻풀이를 담고있다. 이중언어사전은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다른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국어사전이라고도 한다. 같은 영한사전이라고 해도 영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한국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편집 체제가 많이 다르다.\n\n사전의 기술 태도에 따라서 어휘를 규정(pr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고 기술(d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다. 규정하는 것은 정의를 적고 이후 해당 정의에 해당되는 예문을 찾거나 추가설명하는 방식이고 기술하는 것은 말뭉치언어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당 어휘의 사용빈도와 사용분포를 살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는 방식이다. 이 구분은 상대적일 뿐 기술사전도 규정하는 면이 있고 또 규정사전도 기술하는 면이 있다.\n\n범용 사전(general dictionary)은 흔히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라 부르는 언어사전을 말한다.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구분된 의미는 많이 사용되는 순서로 나열될 수도 있고, 오래된 용법 순서대로 나열될 수도 있다. 일상어를 대상으로 한다. 특수 사전(specialized dictionary)은 한정적인 분야를 다룬 사전이다. 제주어 사전이라거나 윤동주 시어사전처럼 특정 범위를 가지고 특화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전이다.\n\n좀 더 특화된 사전들도 있다. 유의어사전(thesaurus)은 유의어, 반의어 등을 모아놓은 사전으로 글쓰기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유사한 형태로 단어의 계통을 정리해놓은 사전인 갈래사전이 있다. 자전(字典)은 한자사전을 말하는데, 한자문명권에서는 개별 한자가 특별한 형태소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한자어 말고도 개별 한자에 대한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n\n다른 형태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듣기, 읽기에 적합한 수동사전(passive dictionary)이 있고 말하기, 쓰기에 적합한 능동사전(active dictionary)이 있다. 이 외에도 외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특수 사전이 나오고 있다. 연어사전, 구동사사전, 관용구사전 등이 그것이다.\n\n=== 백과사전 ===\n\n용어사전(specialized dictionary 혹은 glossary)은 해당 분야의 전문용어만을 모아놓은 용어집이다. 용어사전이 많이 모이면 백과사전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백과라는 말 자체가 수많은 분야라는 의미를 가진다. 백과사전은 인간 지식중에서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균형있게 골라 서술한 책이다. 백과사전이 넓고 평평한 범위를 다루는 사전이고 용어사전은 좁고 깊은 범위를 다룬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의 가장 큰 차이라면 백과사전은 일상적인 의미를 잘 다루지 않고 개별 영역의 전문적인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다. 어학사전이 기능어를 많이 다룬다면 백과사전은 고유명사를 주로 다룬다고 해도 된다.\n", "\n", "\n* 한한대사전\n* 전자 사전\n* 사전 편찬\n* 자전\n* 한국어 사전\n", "\n* \n* \n* \n*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n* 개방형 인터넷 백과사전 \n* 우리말 유의어사전: 낱말창고\n\n\n\n " ]
파일:Latin dictionary.jpg|섬네일|300px|right|그라츠 대학 도서관의 라틴어 사전 사전 '''사전'''(辭典)은 낱말의 뜻을 서술하는 것 내지는 도표와 함께 모아 놓은 것, 또는 어떤 낱말과 대응하는 다른 나라말의 낱말을 가나다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많은 사전들은 발음기호도 포함하고 있으며 응용, 역사, 어원, 그림, 사용법, 예문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는 종이로된 문서 형식의 사전을 많이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 발견된 가장 오랜 사전은 기원전 2300년경 쓰인 아카드 제국의 쐐기문자 조각으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대역쌍 목록이다. 우라 후불루 용어집(Urra=hubullu glossary)이라 불리는 이 사전의 이름은 용어집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자가 붙는 채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근대 유럽의 사전들은 이중언어 사전으로 시작했다. 1502년에 나온 언어학자이자 수사인 암브로조 깔레피노(Ambrogio Calepino)의 코르누코파이아(Cornucopia)가 그것인데 이중언어사전이라기 보다는 다국어사전이다. 라틴어를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불어, 독어로 설명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은 영어사전의 역사에서 한 이정표였다. 이전까지의 사전은 대부분 유사 어휘들을 분류해서 기술하는, 기린 옆에 사자를 나열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존슨은 그 모든 어휘를 예외 없이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여 첫 번째 근대적인 사전을 완성했다. 사전은 해당 항목의 대표형을 보여주는 표제어 아래 크게보아 뜻풀이와 예문 그리고 기타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뜻풀이는 해당 의미를 대상언어로 해설한 것이고 예문은 그 의미로 사용된 문장의 사례이다. 기타정보에는 발음, 품사, 통사구조, 형태정보, 관련어 등 해당 항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문법적 해설이나 부가적인 해설을 말한다. * '''어학사전''' vs 백과사전 * 일반사전 vs 특수사전 * 정의식 vs 기술식 사전은 크게 '''어학사전'''(辭典, dictionary, '''말모이''')과 백과사전(百科事典, encyclopedia)으로 나뉘는데 이 둘 사이에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담는 책이라는 공통점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차이점이 있다. 기존에 종이책으로만 출간이 가능했을 때에는 이러한 구분이 비교적 엄격했으나 인터넷 사전의 경우 사람들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찾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전부터 한국어의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일본어의 코지엔과 같은 어학사전들은 백과사전다운 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 어학사전 === 어학사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뜻풀이 대상언어에 따라 일국어사전과 이중언어사전이 있다. 일국어사전은 한국어사전, 영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같은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것도 모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이 더 자상한 뜻풀이를 담고있다. 이중언어사전은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다른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국어사전이라고도 한다. 같은 영한사전이라고 해도 영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한국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편집 체제가 많이 다르다. 사전의 기술 태도에 따라서 어휘를 규정(pr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고 기술(d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다. 규정하는 것은 정의를 적고 이후 해당 정의에 해당되는 예문을 찾거나 추가설명하는 방식이고 기술하는 것은 말뭉치언어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당 어휘의 사용빈도와 사용분포를 살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는 방식이다. 이 구분은 상대적일 뿐 기술사전도 규정하는 면이 있고 또 규정사전도 기술하는 면이 있다. 범용 사전(general dictionary)은 흔히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라 부르는 언어사전을 말한다.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구분된 의미는 많이 사용되는 순서로 나열될 수도 있고, 오래된 용법 순서대로 나열될 수도 있다. 일상어를 대상으로 한다. 특수 사전(specialized dictionary)은 한정적인 분야를 다룬 사전이다. 제주어 사전이라거나 윤동주 시어사전처럼 특정 범위를 가지고 특화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전이다. 좀 더 특화된 사전들도 있다. 유의어사전(thesaurus)은 유의어, 반의어 등을 모아놓은 사전으로 글쓰기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유사한 형태로 단어의 계통을 정리해놓은 사전인 갈래사전이 있다. 자전(字典)은 한자사전을 말하는데, 한자문명권에서는 개별 한자가 특별한 형태소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한자어 말고도 개별 한자에 대한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형태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듣기, 읽기에 적합한 수동사전(passive dictionary)이 있고 말하기, 쓰기에 적합한 능동사전(active dictionary)이 있다. 이 외에도 외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특수 사전이 나오고 있다. 연어사전, 구동사사전, 관용구사전 등이 그것이다. === 백과사전 === 용어사전(specialized dictionary 혹은 glossary)은 해당 분야의 전문용어만을 모아놓은 용어집이다. 용어사전이 많이 모이면 백과사전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백과라는 말 자체가 수많은 분야라는 의미를 가진다. 백과사전은 인간 지식중에서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균형있게 골라 서술한 책이다. 백과사전이 넓고 평평한 범위를 다루는 사전이고 용어사전은 좁고 깊은 범위를 다룬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의 가장 큰 차이라면 백과사전은 일상적인 의미를 잘 다루지 않고 개별 영역의 전문적인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다. 어학사전이 기능어를 많이 다룬다면 백과사전은 고유명사를 주로 다룬다고 해도 된다. * 한한대사전 * 전자 사전 * 사전 편찬 * 자전 * 한국어 사전 * *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개방형 인터넷 백과사전 * 우리말 유의어사전: 낱말창고
자료
[ "Introduction", "개요", "구분",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여러 종류의 자료 중 일부.\n'''자료'''(資料, , 데이터, )는 문자, 숫자, 소리, 그림, 영상, 단어 등의 형태로 된 의미 단위이다. 보통 연구나 조사 등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말하며, 자료를 의미있게 정리하면 정보가 된다. 자료(data)와 정보(information)는 서로 교환되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료와 정보의 의미는 다르다. \n\n즉, 자료는 또한 \"주어진\" 자료의 정신에 반대하여 높은 해석상의 본질을 가진 인문학 (특히 발전되어가는 digital humanities) 에 사용되어 오고있다. 가능성의 엄청난 수와 그 주의를 지향하게한 하위 집단간의 구별을 위해 Peter Checkland는 용어 \"capta\" (\"~을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apere\"로 부터온)를 소개했다.‘Johanna Drucker’는 인문학이 지식의 생성이 \"놓여있고, 불완전하고, 구성적인\" 과 같다고 단언함과, ''자료''의 사용은 별개이거나 관찰자 독립적인 현상과 같은 역효과를 일으키는 추정들을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구성요소와 같은 관찰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인 ''capta''는 인문학에서의 시각적 묘사들을 위한 ''자료''의 대안으로 제공되었다.\n", "데이터에서 관측되는 개별 대상을 (관측) 단위 혹은 케이스라고 하며 관측된 특성을 변수 또는 필드라 부른다. 특성의 값은 관찰값 또는 관측치이다. 데이터는 하나 이상의 변수에 관한 관찰값의 모음이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방법은 기술통계와 추측통계가 있으며 기술통계는 descriptive로 데이터를 수치나 표, 그래프 등으로 요약하며 데이터의 특성을 드러내는 통계다. 추측통계는 inferential로 불확실한 데이터에 관해 추측하고 그 신뢰성을 계량화하는 방법이다. 일반인들도 사용하는 데이터 수집 방법으론 유한모집단에서 n개의 개체로 이루어진 가능한 모든 부분집합 각각이 모두 선택될 확률이 같도록 수집하는 단순랜덤표집이 있다. 표준편차를 평균으로 나눈 변이계수는 데이터 변동의 단순한 측도로 많이 사용된다.\n\n데이터적 공간인 표본공간은 보통 반복될 수 있는 우연에 의해 구성되는 전체집합을 의미하며 전사건이라 불릴 수도 있다. 근원사건은 원소의 개수가 하나인 집합이다. 통계적 확률은 반복될 수 있는 우연을 정리한 시행에 의해서 구할 수 있으며 경험적 확률로 불릴 수도 있다. 이는 이론적 혹은 수학적 확률과 같은 뜻이 아니다. 데이터에 관한 직접적인 학문을 분류할 때 이론적 확률의 비중이 증가하면 데이터 사이언스이며 경험적 확률을 자주 다루면 통계학이다.\n", "자료는 질적 자료와 양적 자료로 구분된다.\n=== 질적 자료 ===\n질적 자료(qualitative data, 정성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불가능한 자료이다. 분류 자료 또는 범주형 자료(categorical data)라고도 한다.\n:예: 전화번호, 등번호, 성별, 혈액형, 계급, 순위, 등급, 종교 분류 등. 명목형 자료와 순서형 자료가 존재한다.\n\n=== 양적 자료 ===\n양적 자료(quantitative data, 정량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가능한 자료이다. 또는 수치적 자료(Numerical data)라고 하기도 한다.\n예: 온도, 지능지수, 절대온도, 가격, 주가지수, 실업률, 매출액, 기업내 과장의 수 등. 연속형 자료와 이산형 자료가 존재한다.\n\n==== 양적자료의 한계 ====\n양적자료는 풍부한 의미를 상실할 여지를 비롯해서 수치가 갖는 약점도 있다. Parsimony(간결성)의 문제를 갖는 것이다. 수치화되지 않는 개념을 양화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측정하는 데 어떤 것을 포함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선택한 요소의 의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의미들이 배제된다. 그렇기에 어떤 정교한 양적 측정도 이에 상응하는 질적 기술에 비해 의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n", "* 정보\n* 자료형\n* 데이터 처리\n* 데이터 마이닝\n* 데이터 웨어하우스\n", "\n", "\n* 통계분석연구회\n\n\n\n\n\n \n분류:정보" ]
여러 종류의 자료 중 일부. '''자료'''(資料, , 데이터, )는 문자, 숫자, 소리, 그림, 영상, 단어 등의 형태로 된 의미 단위이다. 보통 연구나 조사 등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말하며, 자료를 의미있게 정리하면 정보가 된다. 자료(data)와 정보(information)는 서로 교환되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료와 정보의 의미는 다르다. 즉, 자료는 또한 "주어진" 자료의 정신에 반대하여 높은 해석상의 본질을 가진 인문학 (특히 발전되어가는 digital humanities) 에 사용되어 오고있다. 가능성의 엄청난 수와 그 주의를 지향하게한 하위 집단간의 구별을 위해 Peter Checkland는 용어 "capta" ("~을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apere"로 부터온)를 소개했다.‘Johanna Drucker’는 인문학이 지식의 생성이 "놓여있고, 불완전하고, 구성적인" 과 같다고 단언함과, ''자료''의 사용은 별개이거나 관찰자 독립적인 현상과 같은 역효과를 일으키는 추정들을 소개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구성요소와 같은 관찰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인 ''capta''는 인문학에서의 시각적 묘사들을 위한 ''자료''의 대안으로 제공되었다. 데이터에서 관측되는 개별 대상을 (관측) 단위 혹은 케이스라고 하며 관측된 특성을 변수 또는 필드라 부른다. 특성의 값은 관찰값 또는 관측치이다. 데이터는 하나 이상의 변수에 관한 관찰값의 모음이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방법은 기술통계와 추측통계가 있으며 기술통계는 descriptive로 데이터를 수치나 표, 그래프 등으로 요약하며 데이터의 특성을 드러내는 통계다. 추측통계는 inferential로 불확실한 데이터에 관해 추측하고 그 신뢰성을 계량화하는 방법이다. 일반인들도 사용하는 데이터 수집 방법으론 유한모집단에서 n개의 개체로 이루어진 가능한 모든 부분집합 각각이 모두 선택될 확률이 같도록 수집하는 단순랜덤표집이 있다. 표준편차를 평균으로 나눈 변이계수는 데이터 변동의 단순한 측도로 많이 사용된다. 데이터적 공간인 표본공간은 보통 반복될 수 있는 우연에 의해 구성되는 전체집합을 의미하며 전사건이라 불릴 수도 있다. 근원사건은 원소의 개수가 하나인 집합이다. 통계적 확률은 반복될 수 있는 우연을 정리한 시행에 의해서 구할 수 있으며 경험적 확률로 불릴 수도 있다. 이는 이론적 혹은 수학적 확률과 같은 뜻이 아니다. 데이터에 관한 직접적인 학문을 분류할 때 이론적 확률의 비중이 증가하면 데이터 사이언스이며 경험적 확률을 자주 다루면 통계학이다. 자료는 질적 자료와 양적 자료로 구분된다. === 질적 자료 === 질적 자료(qualitative data, 정성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불가능한 자료이다. 분류 자료 또는 범주형 자료(categorical data)라고도 한다. :예: 전화번호, 등번호, 성별, 혈액형, 계급, 순위, 등급, 종교 분류 등. 명목형 자료와 순서형 자료가 존재한다. === 양적 자료 === 양적 자료(quantitative data, 정량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가능한 자료이다. 또는 수치적 자료(Numerical data)라고 하기도 한다. 예: 온도, 지능지수, 절대온도, 가격, 주가지수, 실업률, 매출액, 기업내 과장의 수 등. 연속형 자료와 이산형 자료가 존재한다. ==== 양적자료의 한계 ==== 양적자료는 풍부한 의미를 상실할 여지를 비롯해서 수치가 갖는 약점도 있다. Parsimony(간결성)의 문제를 갖는 것이다. 수치화되지 않는 개념을 양화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측정하는 데 어떤 것을 포함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선택한 요소의 의미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의미들이 배제된다. 그렇기에 어떤 정교한 양적 측정도 이에 상응하는 질적 기술에 비해 의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 * 정보 * 자료형 * 데이터 처리 * 데이터 마이닝 * 데이터 웨어하우스 * 통계분석연구회 분류:정보
운영체제
[ "Introduction", "종류", "운영체제의 구성", "목적", "시스템 구성", "역사", "운영체제의 예", "구성 요소", "실시간 운영체제", "취미 활동을 통한 운영체제 개발", "시장 점유율", "범위 및 논란",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 "\n\n'''운영체제'''(運營 體制, ) 또는 '''오퍼레이팅 시스템'''(, )은 사용자의 하드웨어, 시스템 리소스를 제어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일반적 서비스를 지원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이다. 시스템 하드웨어를 관리할 뿐 아니라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하여 하드웨어 추상화 플랫폼과 공통 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가상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실제 하드웨어가 아닌 하이퍼바이저(가상 머신) 위에서 실행되기도 한다.\n\n또한 입출력과 메모리 할당과 같은 하드웨어 기능의 경우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컴퓨터 하드웨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용 프로그램 코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체제는 휴대 전화, 게임기에서부터 슈퍼컴퓨터, 웹 서버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서 볼 수 있다. 운영체제는 한 면으로는 소비자를, 다른 한 면으로는 프로그램 개발자를 함께 하나의 시장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양면 플랫폼이다. 잘 알려진 현대의 PC 운영체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X, 리눅스가 있다. 이 밖에 BSD, 유닉스 등의 PC용 운영체제도 존재한다.\n\n운영체제는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와 CPU,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더불어, 이들을 추상화하여 파일 시스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멀티태스킹을 지원하는 경우, 여러 개의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동안, 운영체제는 이러한 모든 프로세스들을 스케줄링하여 마치 그들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다.\n\n또한 운영체제는 컴퓨터 과학의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n", "=== 싱글태스킹 운영체제 / 멀티태스킹 운영체제 ===\n싱글 태스킹 운영체제는 한번에 오직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으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운영체제의 작업 스케줄링 하부 시스템에 의해 제각기 반복적으로 인터럽트 처리되는 여러 프로세스 사이에서 이용 가능한 프로세서 시간을 쪼개는 시분할을 통해 이루어진다. 멀티태스킹의 경우 선점형과 협동형(비선점형)이 있다. 선점형 멀티태스킹의 경우 운영체제는 CPU 시간을 쪼개어 프로그램들 각각에 슬롯을 할당해준다. 솔라리스, 리눅스, 아미가OS와 같은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들은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한다. 협동형 멀티태스킹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른 프로세스들에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각 프로세스에 의존함으로써 수행된다. 16비트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협동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32비트 버전의 윈도우 NT, 윈도우 9x의 경우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n=== 단일 사용자 운영체제 /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 ===\n단일 사용자 운영체제는 사용자 구별이 없으나 여러 프로그램이 나란히 실행하는 것은 허용한다.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는 디스크 공간과 같은 리소스와 프로세스를 식별하는 기능을 갖춘 멀티태스킹의 기본 개념을 확장하며, 여러 사용자에 속해 있으면서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시스템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한다. 시분할 운영체제들은 시스템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태스크를 스케줄링하며, 프로세서 시간, 기억 공간, 인쇄, 기타 자원을 여러 사용자에게 비용적으로 할당하기 위한 회계 소프트웨어를 포함할 수 있다.\n\n=== 분산 운영체제 ===\n분산 운영체제는 구별된 컴퓨터 그룹을 관리하고 이들이 마치 하나의 컴퓨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서로 연결되어 통신하는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이 개발되면서 분산 컴퓨팅이 활성화되었다. 분산되는 연산들은 하나 이상의 컴퓨터에서 수행된다.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 컴퓨터들이 협업을 할 때 분산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n\n=== 판형 운영체제 ===\n운영체제에서, 배포 형식 및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에서 판형은 하나의 가상 머신 이미지를 게스트 운영체제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며, 실행 중인 여러 개의 가상 머신을 위한 도구로 이를 저장한다. 이 기법은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관리에 둘 다 사용되며, 대형 서버 웨어하우스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n\n=== 임베디드 운영체제 ===\n임베디드 운영체제는 임베디드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PDA처럼 조그마한 기계에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제한된 수의 자원으로 동작한다. 매우 크기가 작고 극히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임베디드 운영체제의 예로 윈도우 CE와 미닉스 3이 있다.\n\n=== 실시간 운영체제 ===\n실시간 운영체제는 특정한 짧은 시간 내에 이벤트나 데이터의 처리를 보증하는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운영체제는 싱글태스킹일 수도 있고, 멀티태스킹일 수도 있으며 멀티태스킹의 경우 특수한 스케줄링 알고리즘을 사용한다.\n\n=== 라이브러리 ===\n라이브러리 운영체제는 네트워크 등 일반적인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n", "운영체제는 많은 부분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커널인데, 커널은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프로세스를 제어한다. 얼마나 메모리를 읽고 쓸 것인지, 어느 프로세스를 실행할 것인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를 통해 어떠한 정보를 주고받을 것인지, 네트워크를 통해 받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제어한다.\n\n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컴퓨터 사용자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어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운영체제의 기능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아이콘과 바탕 화면을 지닌 그래픽이나 명령 줄을 지닌 문자를 이룰 수 있다.\n\n이와 비슷한 기능으로 API가 있는데 이것은 응용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와 코드 라이브러리가 한데 모여 있으며 운영체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n\n운영체제에 따라 이러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가 실질적인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윈도우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운영체제의 일부로 여기는데 반해 수많은 버전의 리눅스는 그렇지 않다.\n", "운영체제의 중요한 목적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n* 사용자에게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쉽고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n* 컴퓨터 시스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자원을 여러 사용자 간에 효율적 할당, 관리, 보호하는 것\n* 운영체제는 제어 프로그램으로서 사용자 프로그램의 오류나 잘못된 자원 사용을 감시하는 것과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에 대한 연산과 제어를 관리한다.\n", "일반적인 응용 프로그램들을 제외한 컴퓨터 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세 개의 구성 요소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 세 부분은 운영체제, 셸, 그리고 (낮은 수준의) 필수 유틸리티들이다. 셸은 사용자가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본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다. 이런 셸의 행동들은 결국 운영체제에 명령을 내리는 일이 된다. bash 등의 이러한 셸은 그러나 엄밀히 운영체제의 일부가 아니며 운영체제 입장에서는 셸이나 필수 유틸리티들이나 모두 응용 프로그램일뿐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필수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n\n하드웨어 ↔ 운영체제 ↔ 셸 / 응용 프로그램 ↔ 사용자\n\n", "\n파일:IBM360-65-1.corestore.jpg|섬네일|나사가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는 데 도움을 준 컴퓨터를 포함하여 OS/360은 1966년부터 대부분의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쓰였다.\n초기의 컴퓨터들은 계산기처럼 일련의 단일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속으로 자동 실행하여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레지던트 모니터와 같이, 1950년대에는 기본적인 운영체제의 기능들이 개발되었다. 운영체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현대의 운영체제와 같이 더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드웨어 기능에 런타임 라이브러리, 인터럽트, 병렬 처리가 추가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애플, 아타리, IBM, 아미가와 같은 기업 덕택에 1980년대에 유명해졌다. 이 업체들은 한때 메인프레임과 미니 컴퓨터에 널리 쓰였던 운영체제 기능을 추가하였다. 나중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같은 수많은 기능들이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를 위해 개별적으로 개발되었다.\n\n1950년대 초에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었다. 각 사용자는 컴퓨터만을 사용하여 예약된 시간에 천공 카드와 테이프의 프로그램과 데이터에 접근하여야 했다. 프로그램이 컴퓨터에 적재되면 컴퓨터는 프로그램이 끝나거나 충돌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 동작하였다. 토글 스위치와 패널 불빛을 이용하여 앞면 패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수 있었다.\n\n그 뒤에 나온 컴퓨터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셈블리어로부터의 기계어 발생이나 입출력과 같은 기능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용자 프로그램을 연결해 놓은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것이 현대의 운영체제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일만 할 수 있었다.\n\n=== 메인프레임 ===\n\n1950년대를 통해 일괄 처리, 입출력 인터럽트, 버퍼링, 멀티태스킹, 스풀링, 런타임 라이브러리, 파일 정렬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한 수많은 주요 기능들이 운영체제 분야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은 프로그래머의 취향에 따라 응용 소프트웨어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포함되지 않기도 했다. 1959년에 IBM 704, 709, 7090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한 셰어 운영체제(SHARE)가 통합 유틸리티로 출시되었다.\n\n=== 마이크로컴퓨터 ===\nPC-DOS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 기능을 제공하였던 초기의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였다.\n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는 메인프레임과 미니컴퓨터를 위해 개발해 둔 운영체제에 대한 필요성도 그만한 용량도 없었다. 모니터스(''Monitors'')라는 이름의 매우 작은 운영체제가 개발되었으며 롬에서 불러들였다. 눈에 띄는 초기의 디스크 기반 운영체제로 CP/M이 있었는데 수많은 초기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지원되었으며 IBM PC에 널리 쓰였던 MS-DOS(IBM 버전의 것은 IBM DOS, 곧 PC-DOS로 불렸다)와 매우 비슷하였다. 1980년대에 애플 컴퓨터사(지금의 애플사)가 애플 II 시리즈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버리고, 혁신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맥 OS 운영체제에 갖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를 도입하였다.\n\n32비트 아키텍처에 페이징 기능을 갖춘 인텔 80386 CPU 칩이 도입되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초기의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실행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DEC용 VMS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던 데이비드 커틀러를 해고함으로써 이러한 진행에 응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기반을 다룰 윈도우 NT 운영체제 개발을 이끌었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NeXT 컴퓨터사를 차렸고 유닉스 계열 넥스트스텝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다. 넥스트스텝은 훗날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FreeBSD 코드가 맥 OS X의 중심이 되었다.\n\n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이 사유 유닉스 운영체제를 대체하는 자유 소프트웨어를 목표로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유닉스 여러 곳의 기능을 복제하는 데 큰 성공을 이루자 GNU 허드 커널 개발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1991년 핀란드 컴퓨터 과학부 학생인 리누스 토르발스는 최초의 리눅스 커널 버전을 출시하였다. 곧 GNU 유저랜드와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병합되면서 컴퓨터 운영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BSD는 유닉스 계열로서 1970년대에 시작하여 수많은 미니컴퓨터에 포팅되었으며 마침내 FreeBSD, NetBSD, OpenBSD와 같이 개인용 컴퓨터에도 쓰이게 되었다.\n", "\n===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 ===\n\n유닉스 계열의 역사\n유닉스는 처음에는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다. 켄 톰프슨은 BCPL에 기반을 둔 B를 작성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닉스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멀틱스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C는 B를 대체하였으며 유닉스는 현대의 모든 운영체제에 영향을 미쳤던 크고 복잡한 계열의 상호 관련 운영체제로 발전하였다. (역사 참조)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유닉스에서 파생한 계열이며 시스템 V, BSD, GNU/리눅스,와 같은 주된 하부 분류가 몇 가지 있다. 유닉스라는 이름은 어느 운영체제와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표명한 오픈 그룹의 상표이다. 유닉스 계열은 원래의 유닉스를 닮은 커다란 집합의 운영체제들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인다.\n\n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에서 돌아간다. 이들은 비즈니스 분야의 서버와 학술 및 공학 환경에서의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쓰인다. GNU/리눅스와 BSD와 같은 자유 유닉스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n\nHP의 HP-UX와 IBM의 AIX는 제조업체의 하드웨어에만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솔라리스와 같은 것들은 x86 서버와 PC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넥스트스텝, 마하, FreeBSD에서 파생한 하이브리드 커널 기반의 BSD류인 애플의 맥 OS X은 유닉스 계열이 아니었던 애플의 초기 맥 OS를 대체하였다. 유닉스의 정보 처리 상호 운용성은 POSIX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드러난다. POSIX 표준은 이것이 비록 다양한 유닉스 계열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다른 어떠한 운영체제에라도 적용할 수 있다.\n\n==== BSD 및 BSD 계열 ====\n\n월드 와이드 웹을 위한 최초의 서버는 BSD 기반의 넥스트스텝에서 실행하였다.\n유닉스 계열의 하부 집합 가운데 하나로 BSD 계열이 있다. 여기에는 FreeBSD, NetBSD, OpenBSD를 포함한다. 이러한 운영체제들은 웹 서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로의 역할도 한다. 인터넷은 BSD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데,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데이터를 주고 받는 데 흔히 쓰이는 현재의 프로토콜들 가운데 다수가 BSD에서 정의하여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또, 월드 와이드 웹은 넥스트스텝이라는 BSD 기반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수많은 컴퓨터에서 처음 입증되었다.\n\nBSD는 유닉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는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시간이 지나 컴퓨터 과학부의 학생들과 직원들은 그곳에서 문서 편집기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러한 것들에 일찍이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버클리 대학교가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이 설치된 새로운 VAX 컴퓨터를 1978년에 도입하였을 때 대학생들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이용하기 위하여 유닉스를 수정하였다. 미국 국방부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이에 관심을 가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교와 회사, 정부 단체들은 이를 알아채고 AT&T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인 것이 아닌 버클리 버전의 유닉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애플을 떠났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스텝이라 불리는 BSD류를 실행하는 고성능 컴퓨터를 제조하였던 기업 NeXT사를 세웠다. 이러한 컴퓨터들 가운데 하나는 팀 버너스 리가 최초의 웹 서버로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n\n==== OS X ====\n\n\n맥 OS X은 매킨토시 컴퓨터에 미리 최신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도 애플이 개발하여 판매한 사유 그래픽 운영체제이다. 맥 OS X은 1984년 이후로 애플의 사유 운영체제였던 원래의 맥 OS의 뒤를 잇는 것이다. 전작과 달리 맥 OS X은 1980년대 2/4 분기부터 애플이 1987년 초에 이 회사를 사들일 때까지 NeXT에서 개발한 기술로 만든 유닉스 운영체제이다.\n\n이 운영체제는 1999년에 맥 OS X 서버 1.0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하였으며 그 뒤 2001년 3월에 데스크톱 지향 버전인 맥 OS X v10.0을 출시하였다. 그 뒤로 맥 OS X의 \"클라이언트\", \"서버\" 에디션 여섯 가지가 공개되었으며, 최신 제품은 2020년에 출시된 OS X 빅서이다.\n\n서버 에디션인 맥 OS X 서버는 구조적으로 데스크톱의 것과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의 매킨토시 서버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맥 OS X은 메일 전송 에이전트, 삼바, LDAP 서버, DNS 등을 비롯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워크 그룹 관리 및 관리 소프트웨어 도구를 포함하고 있다.\n\n==== 플랜 9 ====\n\n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라스 맥길로이는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운영체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벨 연구소의 프로그래머들은 현대의 배포 환경을 위해 계획된, 플랜 9와 인페르노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플랜 9는 네트워킹 운영체제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으며 당시 그래픽이 제공되지 않았던 유닉스와 달리 그래픽을 내장하였다. Lucent 공중 허가 사용 허가서 하에 출시되었다. 인페르노는 Vita Nuova Holdings에 팔려 GPL/MIT 라이선스로 배포되고 있다.\n\n=== 리눅스와 GNU ===\n\n파일:Ubuntu 12.04 Final Live CD Screenshot.png|300px|섬네일|리눅스의 데스크톱 배포판인 우분투.\n리눅스는 BSD 및 그 변종과 달리 실제 유닉스 코드 없이 개발된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이다. 슈퍼컴퓨터에서부터 손목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기에 쓰인다. 리눅스 커널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배포되므로 누구나 코드를 읽고 수정할 수 있다. 리눅스는 다양한 전자 기기에서 동작하도록 수정되고 있다.\n\nGNU 프로젝트는 완전한 원래의 코드를 제외하고 유닉스와 비슷하게 완전하게 자유롭고 열려 있는 운영체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프로그래머들의 협동적인 노고 그 자체이다. 이 프로젝트는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이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리눅스의 수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이 까닭에 리눅스는 GNU/리눅스로 불리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운영체제를 위한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에 배포된다. 이 가운데 리눅스 커널은 핀란드의 대학교 학생이었던 리누스 토르발스의 부차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1991년에 토르발스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학생과 프로그래머를 위한 뉴스그룹에 게시하였다.\n\n==== 구글 크롬 OS ====\n\n\n크롬은 구글이 리눅스 커널을 기반으로 설계한 운영체제이다. 크롬은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으로 보내는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기술적으로는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도 없는 웹 브라우저만을 이용하며 문서 작성이나 미디어 보기와 같은 작업을 위해 웹 브라우저에 쓰이는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한다.\n\n===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n\n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개인용 컴퓨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사유 운영체제 계열이다.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가장 흔한 운영체제이며 약 9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최신 버전은 개인용 컴퓨터의 경우 윈도우 11이, 서버의 경우 윈도우 서버 2019이다.\n\n1981년에 IBM PC용의 오래된 MS-DOS 운영체제에 추가 기능으로 나온 것이 기원이다. 198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컴퓨터의 비즈니스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산업 표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윈도우 XP를 시작으로 현대의 모든 윈도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재 나오는 윈도우 버전은 IA-32와 x86-64 프로세서에서 동작하지만 그 이전에 나왔던 버전들은 다른 아키텍처를 지원하기도 하였다.\n\n=== 기타 ===\n틈새 시장에 존재하는 오래된 운영체제로는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OS/2, 애플 맥 OS X의 유닉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전작 맥 OS, 또 BeOS와 XTS-300이 있다. RISC OS, MorphOS, 아미가OS 4도 열성적인 커뮤니티와 전문 분야를 위한 소수 플랫폼으로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DEC의 OpenVMS도 휴렛 패커드가 계속 개발하고 있다. 도스 등의 운영체제도 FreeDOS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밖의 운영체제는 운영체제 교육용이나 학술용, 또는 운영체제 개념의 연구 등을 위해 예외적으로 쓰인다. 학술과 연구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시스템의 전형적인 예로 미닉스가 있다. 반면 순수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것으로는 싱귤래러티가 있다.\n", "운영체제를 이루는 요소는 컴퓨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하게 만들기 위하여 존재한다. 금융 데이터베이스부터 영화 편집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는 모두 소프트웨어에 쓰이는 하드웨어가 단순히 마우스나 키보드만 이용하든지 아니면 인터넷 연결같이 복잡한 방식을 이용하든지 상관 없이 하드웨어를 이용하기 위하여 운영체제로 말미암아 실행해야 한다.\n\n=== 커널 ===\n\n커널이 응용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하드웨어에 연결하고 있다.\n펌웨어와 장치 드라이버의 도움을 받아 커널은 모든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에 대한 가장 기초 수준의 제어권을 제공한다. 커널은 램을 통해 프로그램을 위한 메모리 접근을 관리하며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할지를 결정하며 CPU의 동작 상태를 늘 최적으로 설정 및 초기화하고 디스크, 테이프, 플래시 메모리와 같은 매체의 파일 시스템을 갖춘 장시간 비휘발성 기억 장치를 위한 데이터를 정리한다. 운영체제 내에서의 커널의 영역과 그 구성에 따라 모노리딕 커널(monolithic kernel), 마이크로 커널(micro kernel) 등으로 분류한다.\n\n==== 프로그램 실행 ====\n\n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사이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을 단순하게 하는 서비스의 집합이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운영체제가 프로세스를 만든다. 커널은 메모리와 다른 자원을 할당하여 프로세스를 만들며, 이로써 멀티태스킹 환경에서 프로세스에 대한 우선 순위를 확립하고, 메모리에 프로그램 코드를 적재하며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 뒤 프로그램은 사용자 및 장치와 상호작용한 다음 원하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n\n운영체제는 프로세스 들을 생성하거나 삭제하고, 중단시키거나 재개시킨다. 프로세스 간의 동기화와 통신, 교착상태 처리에 관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n# 사용자 및 시스템 프로세스의 생성과 종료 관리\n# 프로세스의 일시 중지와 속개\n# 프로세스 동기화를 위한 수단의 제공\n# 프로세스간 통신을 위한 수단의 제공\n# 교착 상태 처리를 위한 수단의 제공\n\n==== 인터럽트 ====\n\n인터럽트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데에 효율적인 방법을 운영체제에 제공하므로 운영체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작을 요구하는 이벤트(폴링)를 위한 다양한 소스의 입력을 운영체제가 감시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스택이 매우 작은 구형 운영체제에서 볼 수 있으나 스택이 큰 현대의 운영체제에서는 드문 편이다. 인터럽트 기반의 프로그래밍은 현대의 대부분의 CPU에서 직접적으로 지원된다. 인터럽트는 자동으로 로컬 레지스터 컨텍스트를 저장하고 이벤트에 반응하는 특정 코드를 실행하는 방법을 컴퓨터에 제공한다. 매우 기초적인 컴퓨터들은 모두 하드웨어 인터럽트들을 지원하며 이벤트가 발생할 때 실행될 코드를 프로그래머가 지정할 수 있게 한다.\n\n프로그램이 운영체제에 인터럽트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하드웨어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운영체제의 커널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어권을 커널에 넘겨준다. 그 뒤 커널은 요청을 수행한다. 프로그램이 메모리(또는 공유 자원)와 같은 추가 자원이 필요하면 커널이 집중할 수 있게 인터럽트를 발생시킨다.\n\n==== 모드 ====\n\n파일:Priv rings.svg|섬네일|보호 모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x86용 권한 링. 운영체제는 어느 프로세스가 개별 모드에서 실행할 것인지 결정한다.\n현대의 CPU는 여러 모드의 명령을 지원한다. 이러한 기능을 지원하는 CPU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보호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는 메모리의 기록 및 삭제 방식을 제어하는 것과 그래픽 카드와 같은 장치와 통신하는 것과 같이 운영체제의 커널이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액세스해야 하는 낮은 수준의 태스크를 위해 사용한다. 반대로 보호 모드는 그 밖의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된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보호 모드 안에서 동작하며, 수퍼바이저 모드의 모든 것을 제어하는 커널과 통신해야만 하드웨어를 이용할 수 있다. CPU는 오래된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가상 모드와 같이 보호 모드와 비슷한 다른 모드들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32비트에서 16비트 프로세서를, 아니면 64비트에서 32비트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할 때)\n\n컴퓨터가 처음 시동할 때 자동으로 수퍼바이저 모드에서 실행된다. 컴퓨터를 켜자마다 먼저 실행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들이 바이오스와 부트로더이며 운영체제는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접근한다. 그리고 운영체제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제어권을 보낼 때 CPU를 보호 모드에 놓을 수 있다.\n\n==== 메모리 관리 ====\n\n멀티프로그래밍 운영체제 커널은 현재 프로그램이 이용하는 모든 시스템 메모리를 관리해야 한다. 이로써 어느 특정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메모리와 상호 작용하지 않게 한다. 프로그램이 시분할하므로 각 프로그램은 메모리에 독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n\n==== 가상 메모리 ====\n\n수많은 운영체제는 하드 디스크와 램에 분산된 메모리를 이용하여 마치 가상 메모리로 불리는 메모리 덩어리가 연속적인 것처럼 프로그램을 속일 수 있다.\n페이징이나 세그먼테이션과 같은 가상 메모리 어드레싱을 이용하면 커널은 어느 메모리를 각 프로그램이 주어진 시간에 사용할 수 있게 할지 설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운영체제가 여러 개의 태스크에 같은 메모리 위치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n\n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는 메모리 범위에 없는 메모리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할당되면 커널은 프로그램이 마치 할당된 메모리를 초과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터럽트 처리한다. 유닉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터럽트를 페이지 실패라고 부른다. 커널이 페이지 실패를 감지하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프로그램의 가상 메모리 영역을 수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써 요청된 메모리에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게 한다.\n\n현대의 운영체제에서 자주 접근하지 않는 메모리는 일시적으로 디스크나 다른 매체에 저장하여 다른 프로그램에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이를 스왑 처리(swapping)라고 하며 이를 통해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특정한 메모리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n\n==== 멀티태스킹 ====\n\n멀티태스킹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나의 컴퓨터에 실행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태스크들이 동시에 수행하는 것처럼 보여 준다. 대부분의 컴퓨터가 한 번에 최대 한 두개를 수행할 수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시분할을 통해 수행된다. 다시 말해 각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실행 시간의 일부를 사용한다.\n\n운영체제 커널은 스케줄러라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각 프로그램이 실행에 소비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여기서 실행 제어권이 프로그램에 넘어갈 수 있게 한다. 제어권은 프로그램이 CPU와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커널로 말미암아 프로세스로 넘어간다.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CPU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어권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하여 커널로 반환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 간의 제어권 이동을 이른바 문맥 교환이라고 부른다.\n\n==== 디스크 접근 및 파일 시스템 ====\n\n파일 시스템은 디렉터리(폴더)를 이용하면서 사용자와 프로그램이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정렬할 수 있게 해 준다.\n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것은 모든 운영체제의 기본 기능이다. 컴퓨터는 더 빠른 접근, 더 높은 신뢰성을 위해, 또 드라이브의 남은 공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파일을 이용하여 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파일을 디스크에 저장하는 이러한 방식을 파일 시스템이라고 부르며 파일이 이름과 특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또, 이러한 파일들을 디렉터리 트리로 정렬되는 특정 계급의 디렉터리와 폴더에 저장하게 한다.\n\n초기의 운영체제는 일반적으로 한 종류의 디스크 드라이브와 한 종류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였다. 초기의 파일 시스템들은 용량, 속도, 또 파일 이름과 디렉터리 구조의 종류에 제한이 있었다. 이러한 제한은 설계된 운영체제의 제한에 반영되므로 특정한 운영체제가 하나 이상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n\n더 단순한 수많은 운영체제들은 기억 장치의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한 제한된 옵션들을 지원하였는데, 유닉스와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들은 가상 파일 시스템(VFS)이라는 기술을 지원한다. 유닉스와 같은 운영체제는 공통 API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이나 디자인에 관계 없이 다양한 기억 장치를 지원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장치 접근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VFS는 다양한 파일 시스템에,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와 파일 시스템 드라이버를 사용하여 프로그램들이 무제한의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운영체제에 제공한다.\n\n연결된 하드 드라이브와 같은 기억 장치들은 장치 드라이버를 통해 접근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드라이브의 특정한 언어를 이해하고 이 언어를 운영체제가 모든 디스크 드라이브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표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유닉스에서 이를 블록 장치의 언어라고 한다.\n\n==== 장치 드라이버 ====\n\n장치 드라이버는 하드웨어 장치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특정한 종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n\n장치 드라이버의 주된 설계 목적은 추상화이다. 하드웨어의 모델은, 특히 같은 종류의 장치라 하더라도 각기 다르다. 제조업체들은 더 신뢰할만한,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 더 새로운 모델들을 출시하고 이러한 새로운 모델들은 다르게 동작하기도 한다. 컴퓨터들과 운영체제들은 현재든 앞으로든 모든 장치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체제들은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장치가 제어될 것인지를 지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장치 드라이버의 기능이 이러한 운영체제의 함수 호출을 장치 특유의 호출로 번역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제어되는 새로운 장치는 적절한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올바르게 동작한다. 새로운 드라이버는 운영체제의 관점에서 장치가 평소처럼 동작하고 있음을 보증하게 된다.\n\n비스타 이전의 윈도우, 2.6 미만의 리눅스 버전에서는 모든 드라이버 실행이 협동적이어서, 드라이버가 무한 루프에 진입하면 시스템이 정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더 최근에 나온 운영체제들은 커널 선점을 사용한다. 이 경우 태스크 제공을 위해 커널이 드라이버를 간섭하며 장치 드라이버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프로세스로부터 분리시키며 더 많은 태스크를 부여할 수 있다.\n\n=== 네트워킹 ===\n\n현재 대부분의 운영체제는 다양한 통신 프로토콜, 하드웨어, 응용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다시 말해, 서로 비슷하지 않은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자원(유무선 연결을 이용한 연산, 파일, 프린터, 스캐너)을 공유하기 위해 같은 망에 참여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원격 컴퓨터의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치 리소스가 로컬 컴퓨터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는 컴퓨터의 그래픽, 사운드 하드웨어를 공유하거나 네트워킹 파일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 단순한 통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부 네트워크 서비스는 컴퓨터의 자원을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SSH는 네트워크로 이어진 사용자들이 컴퓨터의 명령 줄 인터페이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한다.\n\n=== 보안 ===\n\n컴퓨터의 보안은 수많은 기술이 올바르게 동작하고 있는 지에 달려 있다. 또, 운영체제는 보안을 위하여 특정 환경에 대한 권한을 사용자나 프로그램에 개별적으로 설정하고 인증 프로세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보안은 특히 여러 사용자가 사용하는 시스템에 적절하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각 사용자는 개인 파일을 다른 사용자가 읽을 수 없게 할 수 있다.\n\n=== 사용자 인터페이스 ===\n\n명령 줄의 한 예. 각 명령어는 프롬프트 뒤에서 입력하면 되며 이에 대한 출력은 아래에 나타난다. 현재의 명령 프롬프트가 아래에 있다.\n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한 예. 프로그램들은 화면 위에 그림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파일, 폴더, 응용 프로그램들은 아이콘과 기호의 모습을 띤다. 마우스는 컴퓨터를 탐색하는 데 쓰인다.\n어떠한 종류의 입력을 받는 모든 컴퓨터는 사람이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이를 위한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역사적으로 컴퓨터 명령어를 한 줄씩 입력해 나가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와 일반적으로 창, 단추, 아이콘을 이루는 시각 환경이 존재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나뉜다.\n\n====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n\n현대의 대부분의 컴퓨터 운영체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맥 OS와 같은 일부 컴퓨터 시스템에서 GUI는 커널에 통합되어 있다.\n\n기술적으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운영체제의 서비스가 아니지만 운영체제 커널에 통합하면 GUI가 출력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문맥 교환을 없앰으로써 GUI를 더 반응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운영체제로는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커널과 운영체제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듈성이 있다. 1980년대 유닉스에서 VMS 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운영체제였다. GNU/리눅스 및 맥 OS X 또한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 윈도우 비스타와 같은 현대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거의 사용자 공간에 위치한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지만 윈도우 NT 4.0과 윈도우 서버 2003 버전 사이의 그래픽 구현 루틴은 거의 커널 공간에 존재한다. 윈도우 9x는 인터페이스와 커널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다.\n\n수많은 컴퓨터 운영체제는 사용자가 원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설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X 윈도 시스템을 GNOME이나 KDE와 함께 쓰면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시스템에서 이러한 설정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윈도우 셸 치환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윈도우 셸을 교체하는 방식을 쓰지만 윈도우로부터 셸 자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n", "\n실시간 운영체제 (RTOS)는 정해진 기간 안에 수행이 끝나야 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위하여 만들어진 멀티태스킹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연산) 이러한 응용 프로그램들에는 조그마한 임베디드 시스템,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 산업 로봇, 우주선, 산업 제어 장치, 일부 대형 컴퓨터 시스템 등이 있다.\n\n초기의 대형 실시간 운영체제는 이를테면 아메리칸 항공과 IBM이 사브레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하여 개발한 트랜잭션 프로세싱 퍼실리티(TPF)가 있다.\n\n일부 임베디드 시스템은 실시간 연산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심비안 OS, 팜 OS, BSD,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를 이용한다.\n", "운영체제 개발은 컴퓨팅에 취미를 둔 사람들이 관여하는 가장 복잡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취미로 만드는 운영체제는 기존의 운영체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코드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들과 활동 개발자들의 수는 적은 편이다.\n\n취미 활동으로 개발된 운영체제의 예로는 ReactOS와 Syllable 등이 있다.\n", "\n\n\n\n+2013년 운영체제별 전 세계 기기 선적량\n\n\n\n 운영체제 \n\n 2012년 (단위: 100만 기기) \n\n 2013년 (단위: 100만 기기)\n\n\n\n 안드로이드\n\n 504\n\n 878\n\n\n\n 윈도우\n\n 346\n\n 328\n\n\n\n iOS/맥 OS\n\n 214\n\n 267\n\n\n\n 블랙베리\n\n 35\n\n 24\n\n\n\n 기타\n\n 1,117\n\n 803\n\n\n\n 전체\n\n 2,216\n\n 2,300\n\n\n출처: 가트너\n\n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n", "운영체제는 잘 정의된 인터페이스를 가지므로 운영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만,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체제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음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1998년 미국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요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제에 너무 많은 기능을 포함시켜 응용 프로그램 제작업체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n", "* 운영체제의 역사\n* 운영체제 목록\n* 운영 체제 최적화\n* 모바일 운영 체제\n* 범용 운영 체제\n* 전용 운영 체제\n* 실시간 운영 체제 (RTOS)\n* 임베디드 시스템\n* 객체 지향 운영 체제\n", "\n", "\n* \n* \n* \n* \n* O'Brien, J. A., & Marakas, G. M.(2011).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10e. McGraw-Hill Irwin.\n* \n* \n\n", "\n* \n* 운영체제의 동작 원리\n* 세계 최초의 컴퓨터 운영체제\n* 운영체제에 관한 TUNES 리뷰\n\n\n\n\n\n " ]
'''운영체제'''(運營 體制, ) 또는 '''오퍼레이팅 시스템'''(, )은 사용자의 하드웨어, 시스템 리소스를 제어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일반적 서비스를 지원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이다. 시스템 하드웨어를 관리할 뿐 아니라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하여 하드웨어 추상화 플랫폼과 공통 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가상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실제 하드웨어가 아닌 하이퍼바이저(가상 머신) 위에서 실행되기도 한다. 또한 입출력과 메모리 할당과 같은 하드웨어 기능의 경우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컴퓨터 하드웨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용 프로그램 코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체제는 휴대 전화, 게임기에서부터 슈퍼컴퓨터, 웹 서버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서 볼 수 있다. 운영체제는 한 면으로는 소비자를, 다른 한 면으로는 프로그램 개발자를 함께 하나의 시장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양면 플랫폼이다. 잘 알려진 현대의 PC 운영체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X, 리눅스가 있다. 이 밖에 BSD, 유닉스 등의 PC용 운영체제도 존재한다. 운영체제는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와 CPU,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더불어, 이들을 추상화하여 파일 시스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멀티태스킹을 지원하는 경우, 여러 개의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동안, 운영체제는 이러한 모든 프로세스들을 스케줄링하여 마치 그들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다. 또한 운영체제는 컴퓨터 과학의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 싱글태스킹 운영체제 / 멀티태스킹 운영체제 === 싱글 태스킹 운영체제는 한번에 오직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으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운영체제의 작업 스케줄링 하부 시스템에 의해 제각기 반복적으로 인터럽트 처리되는 여러 프로세스 사이에서 이용 가능한 프로세서 시간을 쪼개는 시분할을 통해 이루어진다. 멀티태스킹의 경우 선점형과 협동형(비선점형)이 있다. 선점형 멀티태스킹의 경우 운영체제는 CPU 시간을 쪼개어 프로그램들 각각에 슬롯을 할당해준다. 솔라리스, 리눅스, 아미가OS와 같은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들은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한다. 협동형 멀티태스킹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른 프로세스들에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각 프로세스에 의존함으로써 수행된다. 16비트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협동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32비트 버전의 윈도우 NT, 윈도우 9x의 경우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 단일 사용자 운영체제 /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 === 단일 사용자 운영체제는 사용자 구별이 없으나 여러 프로그램이 나란히 실행하는 것은 허용한다. 다중 사용자 운영체제는 디스크 공간과 같은 리소스와 프로세스를 식별하는 기능을 갖춘 멀티태스킹의 기본 개념을 확장하며, 여러 사용자에 속해 있으면서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시스템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한다. 시분할 운영체제들은 시스템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태스크를 스케줄링하며, 프로세서 시간, 기억 공간, 인쇄, 기타 자원을 여러 사용자에게 비용적으로 할당하기 위한 회계 소프트웨어를 포함할 수 있다. === 분산 운영체제 === 분산 운영체제는 구별된 컴퓨터 그룹을 관리하고 이들이 마치 하나의 컴퓨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서로 연결되어 통신하는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이 개발되면서 분산 컴퓨팅이 활성화되었다. 분산되는 연산들은 하나 이상의 컴퓨터에서 수행된다.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 컴퓨터들이 협업을 할 때 분산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 판형 운영체제 === 운영체제에서, 배포 형식 및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에서 판형은 하나의 가상 머신 이미지를 게스트 운영체제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며, 실행 중인 여러 개의 가상 머신을 위한 도구로 이를 저장한다. 이 기법은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관리에 둘 다 사용되며, 대형 서버 웨어하우스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임베디드 운영체제 === 임베디드 운영체제는 임베디드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PDA처럼 조그마한 기계에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제한된 수의 자원으로 동작한다. 매우 크기가 작고 극히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임베디드 운영체제의 예로 윈도우 CE와 미닉스 3이 있다. === 실시간 운영체제 === 실시간 운영체제는 특정한 짧은 시간 내에 이벤트나 데이터의 처리를 보증하는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운영체제는 싱글태스킹일 수도 있고, 멀티태스킹일 수도 있으며 멀티태스킹의 경우 특수한 스케줄링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 라이브러리 === 라이브러리 운영체제는 네트워크 등 일반적인 운영체제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운영체제는 많은 부분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커널인데, 커널은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프로세스를 제어한다. 얼마나 메모리를 읽고 쓸 것인지, 어느 프로세스를 실행할 것인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를 통해 어떠한 정보를 주고받을 것인지, 네트워크를 통해 받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제어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컴퓨터 사용자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어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운영체제의 기능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아이콘과 바탕 화면을 지닌 그래픽이나 명령 줄을 지닌 문자를 이룰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기능으로 API가 있는데 이것은 응용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와 코드 라이브러리가 한데 모여 있으며 운영체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운영체제에 따라 이러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가 실질적인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윈도우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운영체제의 일부로 여기는데 반해 수많은 버전의 리눅스는 그렇지 않다. 운영체제의 중요한 목적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 사용자에게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쉽고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 컴퓨터 시스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자원을 여러 사용자 간에 효율적 할당, 관리, 보호하는 것 * 운영체제는 제어 프로그램으로서 사용자 프로그램의 오류나 잘못된 자원 사용을 감시하는 것과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에 대한 연산과 제어를 관리한다. 일반적인 응용 프로그램들을 제외한 컴퓨터 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세 개의 구성 요소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 세 부분은 운영체제, 셸, 그리고 (낮은 수준의) 필수 유틸리티들이다. 셸은 사용자가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본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다. 이런 셸의 행동들은 결국 운영체제에 명령을 내리는 일이 된다. bash 등의 이러한 셸은 그러나 엄밀히 운영체제의 일부가 아니며 운영체제 입장에서는 셸이나 필수 유틸리티들이나 모두 응용 프로그램일뿐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필수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하드웨어 ↔ 운영체제 ↔ 셸 / 응용 프로그램 ↔ 사용자 파일:IBM360-65-1.corestore.jpg|섬네일|나사가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는 데 도움을 준 컴퓨터를 포함하여 OS/360은 1966년부터 대부분의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쓰였다. 초기의 컴퓨터들은 계산기처럼 일련의 단일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속으로 자동 실행하여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레지던트 모니터와 같이, 1950년대에는 기본적인 운영체제의 기능들이 개발되었다. 운영체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현대의 운영체제와 같이 더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드웨어 기능에 런타임 라이브러리, 인터럽트, 병렬 처리가 추가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애플, 아타리, IBM, 아미가와 같은 기업 덕택에 1980년대에 유명해졌다. 이 업체들은 한때 메인프레임과 미니 컴퓨터에 널리 쓰였던 운영체제 기능을 추가하였다. 나중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같은 수많은 기능들이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를 위해 개별적으로 개발되었다. 1950년대 초에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었다. 각 사용자는 컴퓨터만을 사용하여 예약된 시간에 천공 카드와 테이프의 프로그램과 데이터에 접근하여야 했다. 프로그램이 컴퓨터에 적재되면 컴퓨터는 프로그램이 끝나거나 충돌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 동작하였다. 토글 스위치와 패널 불빛을 이용하여 앞면 패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수 있었다. 그 뒤에 나온 컴퓨터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셈블리어로부터의 기계어 발생이나 입출력과 같은 기능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용자 프로그램을 연결해 놓은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것이 현대의 운영체제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일만 할 수 있었다. === 메인프레임 === 1950년대를 통해 일괄 처리, 입출력 인터럽트, 버퍼링, 멀티태스킹, 스풀링, 런타임 라이브러리, 파일 정렬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한 수많은 주요 기능들이 운영체제 분야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은 프로그래머의 취향에 따라 응용 소프트웨어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포함되지 않기도 했다. 1959년에 IBM 704, 709, 7090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한 셰어 운영체제(SHARE)가 통합 유틸리티로 출시되었다. === 마이크로컴퓨터 === PC-DOS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 기능을 제공하였던 초기의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였다.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는 메인프레임과 미니컴퓨터를 위해 개발해 둔 운영체제에 대한 필요성도 그만한 용량도 없었다. 모니터스(''Monitors'')라는 이름의 매우 작은 운영체제가 개발되었으며 롬에서 불러들였다. 눈에 띄는 초기의 디스크 기반 운영체제로 CP/M이 있었는데 수많은 초기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지원되었으며 IBM PC에 널리 쓰였던 MS-DOS(IBM 버전의 것은 IBM DOS, 곧 PC-DOS로 불렸다)와 매우 비슷하였다. 1980년대에 애플 컴퓨터사(지금의 애플사)가 애플 II 시리즈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버리고, 혁신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맥 OS 운영체제에 갖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를 도입하였다. 32비트 아키텍처에 페이징 기능을 갖춘 인텔 80386 CPU 칩이 도입되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초기의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실행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DEC용 VMS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던 데이비드 커틀러를 해고함으로써 이러한 진행에 응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기반을 다룰 윈도우 NT 운영체제 개발을 이끌었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NeXT 컴퓨터사를 차렸고 유닉스 계열 넥스트스텝 운영체제를 개발하였다. 넥스트스텝은 훗날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FreeBSD 코드가 맥 OS X의 중심이 되었다.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이 사유 유닉스 운영체제를 대체하는 자유 소프트웨어를 목표로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유닉스 여러 곳의 기능을 복제하는 데 큰 성공을 이루자 GNU 허드 커널 개발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1991년 핀란드 컴퓨터 과학부 학생인 리누스 토르발스는 최초의 리눅스 커널 버전을 출시하였다. 곧 GNU 유저랜드와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병합되면서 컴퓨터 운영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BSD는 유닉스 계열로서 1970년대에 시작하여 수많은 미니컴퓨터에 포팅되었으며 마침내 FreeBSD, NetBSD, OpenBSD와 같이 개인용 컴퓨터에도 쓰이게 되었다. ===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 === 유닉스 계열의 역사 유닉스는 처음에는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다. 켄 톰프슨은 BCPL에 기반을 둔 B를 작성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닉스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멀틱스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C는 B를 대체하였으며 유닉스는 현대의 모든 운영체제에 영향을 미쳤던 크고 복잡한 계열의 상호 관련 운영체제로 발전하였다. (역사 참조)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유닉스에서 파생한 계열이며 시스템 V, BSD, GNU/리눅스,와 같은 주된 하부 분류가 몇 가지 있다. 유닉스라는 이름은 어느 운영체제와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표명한 오픈 그룹의 상표이다. 유닉스 계열은 원래의 유닉스를 닮은 커다란 집합의 운영체제들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인다.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에서 돌아간다. 이들은 비즈니스 분야의 서버와 학술 및 공학 환경에서의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쓰인다. GNU/리눅스와 BSD와 같은 자유 유닉스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HP의 HP-UX와 IBM의 AIX는 제조업체의 하드웨어에만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솔라리스와 같은 것들은 x86 서버와 PC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넥스트스텝, 마하, FreeBSD에서 파생한 하이브리드 커널 기반의 BSD류인 애플의 맥 OS X은 유닉스 계열이 아니었던 애플의 초기 맥 OS를 대체하였다. 유닉스의 정보 처리 상호 운용성은 POSIX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드러난다. POSIX 표준은 이것이 비록 다양한 유닉스 계열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다른 어떠한 운영체제에라도 적용할 수 있다. ==== BSD 및 BSD 계열 ==== 월드 와이드 웹을 위한 최초의 서버는 BSD 기반의 넥스트스텝에서 실행하였다. 유닉스 계열의 하부 집합 가운데 하나로 BSD 계열이 있다. 여기에는 FreeBSD, NetBSD, OpenBSD를 포함한다. 이러한 운영체제들은 웹 서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로의 역할도 한다. 인터넷은 BSD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데,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데이터를 주고 받는 데 흔히 쓰이는 현재의 프로토콜들 가운데 다수가 BSD에서 정의하여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또, 월드 와이드 웹은 넥스트스텝이라는 BSD 기반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수많은 컴퓨터에서 처음 입증되었다. BSD는 유닉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는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시간이 지나 컴퓨터 과학부의 학생들과 직원들은 그곳에서 문서 편집기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러한 것들에 일찍이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버클리 대학교가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이 설치된 새로운 VAX 컴퓨터를 1978년에 도입하였을 때 대학생들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이용하기 위하여 유닉스를 수정하였다. 미국 국방부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이에 관심을 가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교와 회사, 정부 단체들은 이를 알아채고 AT&T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인 것이 아닌 버클리 버전의 유닉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애플을 떠났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스텝이라 불리는 BSD류를 실행하는 고성능 컴퓨터를 제조하였던 기업 NeXT사를 세웠다. 이러한 컴퓨터들 가운데 하나는 팀 버너스 리가 최초의 웹 서버로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 OS X ==== 맥 OS X은 매킨토시 컴퓨터에 미리 최신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도 애플이 개발하여 판매한 사유 그래픽 운영체제이다. 맥 OS X은 1984년 이후로 애플의 사유 운영체제였던 원래의 맥 OS의 뒤를 잇는 것이다. 전작과 달리 맥 OS X은 1980년대 2/4 분기부터 애플이 1987년 초에 이 회사를 사들일 때까지 NeXT에서 개발한 기술로 만든 유닉스 운영체제이다. 이 운영체제는 1999년에 맥 OS X 서버 1.0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하였으며 그 뒤 2001년 3월에 데스크톱 지향 버전인 맥 OS X v10.0을 출시하였다. 그 뒤로 맥 OS X의 "클라이언트", "서버" 에디션 여섯 가지가 공개되었으며, 최신 제품은 2020년에 출시된 OS X 빅서이다. 서버 에디션인 맥 OS X 서버는 구조적으로 데스크톱의 것과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의 매킨토시 서버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맥 OS X은 메일 전송 에이전트, 삼바, LDAP 서버, DNS 등을 비롯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워크 그룹 관리 및 관리 소프트웨어 도구를 포함하고 있다. ==== 플랜 9 ====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라스 맥길로이는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운영체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벨 연구소의 프로그래머들은 현대의 배포 환경을 위해 계획된, 플랜 9와 인페르노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플랜 9는 네트워킹 운영체제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으며 당시 그래픽이 제공되지 않았던 유닉스와 달리 그래픽을 내장하였다. Lucent 공중 허가 사용 허가서 하에 출시되었다. 인페르노는 Vita Nuova Holdings에 팔려 GPL/MIT 라이선스로 배포되고 있다. === 리눅스와 GNU === 파일:Ubuntu 12.04 Final Live CD Screenshot.png|300px|섬네일|리눅스의 데스크톱 배포판인 우분투. 리눅스는 BSD 및 그 변종과 달리 실제 유닉스 코드 없이 개발된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이다. 슈퍼컴퓨터에서부터 손목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기에 쓰인다. 리눅스 커널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배포되므로 누구나 코드를 읽고 수정할 수 있다. 리눅스는 다양한 전자 기기에서 동작하도록 수정되고 있다. GNU 프로젝트는 완전한 원래의 코드를 제외하고 유닉스와 비슷하게 완전하게 자유롭고 열려 있는 운영체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프로그래머들의 협동적인 노고 그 자체이다. 이 프로젝트는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이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리눅스의 수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이 까닭에 리눅스는 GNU/리눅스로 불리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운영체제를 위한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에 배포된다. 이 가운데 리눅스 커널은 핀란드의 대학교 학생이었던 리누스 토르발스의 부차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1991년에 토르발스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학생과 프로그래머를 위한 뉴스그룹에 게시하였다. ==== 구글 크롬 OS ==== 크롬은 구글이 리눅스 커널을 기반으로 설계한 운영체제이다. 크롬은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으로 보내는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기술적으로는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도 없는 웹 브라우저만을 이용하며 문서 작성이나 미디어 보기와 같은 작업을 위해 웹 브라우저에 쓰이는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한다.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개인용 컴퓨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사유 운영체제 계열이다.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가장 흔한 운영체제이며 약 9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최신 버전은 개인용 컴퓨터의 경우 윈도우 11이, 서버의 경우 윈도우 서버 2019이다. 1981년에 IBM PC용의 오래된 MS-DOS 운영체제에 추가 기능으로 나온 것이 기원이다. 198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컴퓨터의 비즈니스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산업 표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윈도우 XP를 시작으로 현대의 모든 윈도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재 나오는 윈도우 버전은 IA-32와 x86-64 프로세서에서 동작하지만 그 이전에 나왔던 버전들은 다른 아키텍처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 기타 === 틈새 시장에 존재하는 오래된 운영체제로는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OS/2, 애플 맥 OS X의 유닉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전작 맥 OS, 또 BeOS와 XTS-300이 있다. RISC OS, MorphOS, 아미가OS 4도 열성적인 커뮤니티와 전문 분야를 위한 소수 플랫폼으로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DEC의 OpenVMS도 휴렛 패커드가 계속 개발하고 있다. 도스 등의 운영체제도 FreeDOS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밖의 운영체제는 운영체제 교육용이나 학술용, 또는 운영체제 개념의 연구 등을 위해 예외적으로 쓰인다. 학술과 연구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시스템의 전형적인 예로 미닉스가 있다. 반면 순수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것으로는 싱귤래러티가 있다. 운영체제를 이루는 요소는 컴퓨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하게 만들기 위하여 존재한다. 금융 데이터베이스부터 영화 편집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는 모두 소프트웨어에 쓰이는 하드웨어가 단순히 마우스나 키보드만 이용하든지 아니면 인터넷 연결같이 복잡한 방식을 이용하든지 상관 없이 하드웨어를 이용하기 위하여 운영체제로 말미암아 실행해야 한다. === 커널 === 커널이 응용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하드웨어에 연결하고 있다. 펌웨어와 장치 드라이버의 도움을 받아 커널은 모든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에 대한 가장 기초 수준의 제어권을 제공한다. 커널은 램을 통해 프로그램을 위한 메모리 접근을 관리하며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할지를 결정하며 CPU의 동작 상태를 늘 최적으로 설정 및 초기화하고 디스크, 테이프, 플래시 메모리와 같은 매체의 파일 시스템을 갖춘 장시간 비휘발성 기억 장치를 위한 데이터를 정리한다. 운영체제 내에서의 커널의 영역과 그 구성에 따라 모노리딕 커널(monolithic kernel), 마이크로 커널(micro kernel) 등으로 분류한다. ==== 프로그램 실행 ====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사이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 운영체제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을 단순하게 하는 서비스의 집합이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운영체제가 프로세스를 만든다. 커널은 메모리와 다른 자원을 할당하여 프로세스를 만들며, 이로써 멀티태스킹 환경에서 프로세스에 대한 우선 순위를 확립하고, 메모리에 프로그램 코드를 적재하며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 뒤 프로그램은 사용자 및 장치와 상호작용한 다음 원하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운영체제는 프로세스 들을 생성하거나 삭제하고, 중단시키거나 재개시킨다. 프로세스 간의 동기화와 통신, 교착상태 처리에 관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 사용자 및 시스템 프로세스의 생성과 종료 관리 # 프로세스의 일시 중지와 속개 # 프로세스 동기화를 위한 수단의 제공 # 프로세스간 통신을 위한 수단의 제공 # 교착 상태 처리를 위한 수단의 제공 ==== 인터럽트 ==== 인터럽트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데에 효율적인 방법을 운영체제에 제공하므로 운영체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작을 요구하는 이벤트(폴링)를 위한 다양한 소스의 입력을 운영체제가 감시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스택이 매우 작은 구형 운영체제에서 볼 수 있으나 스택이 큰 현대의 운영체제에서는 드문 편이다. 인터럽트 기반의 프로그래밍은 현대의 대부분의 CPU에서 직접적으로 지원된다. 인터럽트는 자동으로 로컬 레지스터 컨텍스트를 저장하고 이벤트에 반응하는 특정 코드를 실행하는 방법을 컴퓨터에 제공한다. 매우 기초적인 컴퓨터들은 모두 하드웨어 인터럽트들을 지원하며 이벤트가 발생할 때 실행될 코드를 프로그래머가 지정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운영체제에 인터럽트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하드웨어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운영체제의 커널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어권을 커널에 넘겨준다. 그 뒤 커널은 요청을 수행한다. 프로그램이 메모리(또는 공유 자원)와 같은 추가 자원이 필요하면 커널이 집중할 수 있게 인터럽트를 발생시킨다. ==== 모드 ==== 파일:Priv rings.svg|섬네일|보호 모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x86용 권한 링. 운영체제는 어느 프로세스가 개별 모드에서 실행할 것인지 결정한다. 현대의 CPU는 여러 모드의 명령을 지원한다. 이러한 기능을 지원하는 CPU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보호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는 메모리의 기록 및 삭제 방식을 제어하는 것과 그래픽 카드와 같은 장치와 통신하는 것과 같이 운영체제의 커널이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액세스해야 하는 낮은 수준의 태스크를 위해 사용한다. 반대로 보호 모드는 그 밖의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된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보호 모드 안에서 동작하며, 수퍼바이저 모드의 모든 것을 제어하는 커널과 통신해야만 하드웨어를 이용할 수 있다. CPU는 오래된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가상 모드와 같이 보호 모드와 비슷한 다른 모드들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32비트에서 16비트 프로세서를, 아니면 64비트에서 32비트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할 때) 컴퓨터가 처음 시동할 때 자동으로 수퍼바이저 모드에서 실행된다. 컴퓨터를 켜자마다 먼저 실행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들이 바이오스와 부트로더이며 운영체제는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접근한다. 그리고 운영체제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제어권을 보낼 때 CPU를 보호 모드에 놓을 수 있다. ==== 메모리 관리 ==== 멀티프로그래밍 운영체제 커널은 현재 프로그램이 이용하는 모든 시스템 메모리를 관리해야 한다. 이로써 어느 특정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메모리와 상호 작용하지 않게 한다. 프로그램이 시분할하므로 각 프로그램은 메모리에 독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 가상 메모리 ==== 수많은 운영체제는 하드 디스크와 램에 분산된 메모리를 이용하여 마치 가상 메모리로 불리는 메모리 덩어리가 연속적인 것처럼 프로그램을 속일 수 있다. 페이징이나 세그먼테이션과 같은 가상 메모리 어드레싱을 이용하면 커널은 어느 메모리를 각 프로그램이 주어진 시간에 사용할 수 있게 할지 설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운영체제가 여러 개의 태스크에 같은 메모리 위치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는 메모리 범위에 없는 메모리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할당되면 커널은 프로그램이 마치 할당된 메모리를 초과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터럽트 처리한다. 유닉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터럽트를 페이지 실패라고 부른다. 커널이 페이지 실패를 감지하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프로그램의 가상 메모리 영역을 수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써 요청된 메모리에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현대의 운영체제에서 자주 접근하지 않는 메모리는 일시적으로 디스크나 다른 매체에 저장하여 다른 프로그램에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이를 스왑 처리(swapping)라고 하며 이를 통해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특정한 메모리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 ==== 멀티태스킹 ==== 멀티태스킹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나의 컴퓨터에 실행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태스크들이 동시에 수행하는 것처럼 보여 준다. 대부분의 컴퓨터가 한 번에 최대 한 두개를 수행할 수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시분할을 통해 수행된다. 다시 말해 각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실행 시간의 일부를 사용한다. 운영체제 커널은 스케줄러라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각 프로그램이 실행에 소비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여기서 실행 제어권이 프로그램에 넘어갈 수 있게 한다. 제어권은 프로그램이 CPU와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커널로 말미암아 프로세스로 넘어간다.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CPU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어권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하여 커널로 반환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 간의 제어권 이동을 이른바 문맥 교환이라고 부른다. ==== 디스크 접근 및 파일 시스템 ==== 파일 시스템은 디렉터리(폴더)를 이용하면서 사용자와 프로그램이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정렬할 수 있게 해 준다.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것은 모든 운영체제의 기본 기능이다. 컴퓨터는 더 빠른 접근, 더 높은 신뢰성을 위해, 또 드라이브의 남은 공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파일을 이용하여 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파일을 디스크에 저장하는 이러한 방식을 파일 시스템이라고 부르며 파일이 이름과 특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또, 이러한 파일들을 디렉터리 트리로 정렬되는 특정 계급의 디렉터리와 폴더에 저장하게 한다. 초기의 운영체제는 일반적으로 한 종류의 디스크 드라이브와 한 종류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였다. 초기의 파일 시스템들은 용량, 속도, 또 파일 이름과 디렉터리 구조의 종류에 제한이 있었다. 이러한 제한은 설계된 운영체제의 제한에 반영되므로 특정한 운영체제가 하나 이상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더 단순한 수많은 운영체제들은 기억 장치의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한 제한된 옵션들을 지원하였는데, 유닉스와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들은 가상 파일 시스템(VFS)이라는 기술을 지원한다. 유닉스와 같은 운영체제는 공통 API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이나 디자인에 관계 없이 다양한 기억 장치를 지원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장치 접근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VFS는 다양한 파일 시스템에,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와 파일 시스템 드라이버를 사용하여 프로그램들이 무제한의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운영체제에 제공한다. 연결된 하드 드라이브와 같은 기억 장치들은 장치 드라이버를 통해 접근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드라이브의 특정한 언어를 이해하고 이 언어를 운영체제가 모든 디스크 드라이브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표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유닉스에서 이를 블록 장치의 언어라고 한다. ==== 장치 드라이버 ==== 장치 드라이버는 하드웨어 장치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특정한 종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장치 드라이버의 주된 설계 목적은 추상화이다. 하드웨어의 모델은, 특히 같은 종류의 장치라 하더라도 각기 다르다. 제조업체들은 더 신뢰할만한,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 더 새로운 모델들을 출시하고 이러한 새로운 모델들은 다르게 동작하기도 한다. 컴퓨터들과 운영체제들은 현재든 앞으로든 모든 장치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체제들은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장치가 제어될 것인지를 지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장치 드라이버의 기능이 이러한 운영체제의 함수 호출을 장치 특유의 호출로 번역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제어되는 새로운 장치는 적절한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올바르게 동작한다. 새로운 드라이버는 운영체제의 관점에서 장치가 평소처럼 동작하고 있음을 보증하게 된다. 비스타 이전의 윈도우, 2.6 미만의 리눅스 버전에서는 모든 드라이버 실행이 협동적이어서, 드라이버가 무한 루프에 진입하면 시스템이 정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더 최근에 나온 운영체제들은 커널 선점을 사용한다. 이 경우 태스크 제공을 위해 커널이 드라이버를 간섭하며 장치 드라이버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프로세스로부터 분리시키며 더 많은 태스크를 부여할 수 있다. === 네트워킹 === 현재 대부분의 운영체제는 다양한 통신 프로토콜, 하드웨어, 응용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다시 말해, 서로 비슷하지 않은 운영체제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자원(유무선 연결을 이용한 연산, 파일, 프린터, 스캐너)을 공유하기 위해 같은 망에 참여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원격 컴퓨터의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치 리소스가 로컬 컴퓨터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는 컴퓨터의 그래픽, 사운드 하드웨어를 공유하거나 네트워킹 파일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 단순한 통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부 네트워크 서비스는 컴퓨터의 자원을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SSH는 네트워크로 이어진 사용자들이 컴퓨터의 명령 줄 인터페이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한다. === 보안 === 컴퓨터의 보안은 수많은 기술이 올바르게 동작하고 있는 지에 달려 있다. 또, 운영체제는 보안을 위하여 특정 환경에 대한 권한을 사용자나 프로그램에 개별적으로 설정하고 인증 프로세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보안은 특히 여러 사용자가 사용하는 시스템에 적절하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각 사용자는 개인 파일을 다른 사용자가 읽을 수 없게 할 수 있다. === 사용자 인터페이스 === 명령 줄의 한 예. 각 명령어는 프롬프트 뒤에서 입력하면 되며 이에 대한 출력은 아래에 나타난다. 현재의 명령 프롬프트가 아래에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한 예. 프로그램들은 화면 위에 그림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파일, 폴더, 응용 프로그램들은 아이콘과 기호의 모습을 띤다. 마우스는 컴퓨터를 탐색하는 데 쓰인다. 어떠한 종류의 입력을 받는 모든 컴퓨터는 사람이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이를 위한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역사적으로 컴퓨터 명령어를 한 줄씩 입력해 나가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와 일반적으로 창, 단추, 아이콘을 이루는 시각 환경이 존재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나뉜다. ====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 현대의 대부분의 컴퓨터 운영체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맥 OS와 같은 일부 컴퓨터 시스템에서 GUI는 커널에 통합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운영체제의 서비스가 아니지만 운영체제 커널에 통합하면 GUI가 출력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문맥 교환을 없앰으로써 GUI를 더 반응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운영체제로는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커널과 운영체제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듈성이 있다. 1980년대 유닉스에서 VMS 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운영체제였다. GNU/리눅스 및 맥 OS X 또한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 윈도우 비스타와 같은 현대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거의 사용자 공간에 위치한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지만 윈도우 NT 4.0과 윈도우 서버 2003 버전 사이의 그래픽 구현 루틴은 거의 커널 공간에 존재한다. 윈도우 9x는 인터페이스와 커널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다. 수많은 컴퓨터 운영체제는 사용자가 원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설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X 윈도 시스템을 GNOME이나 KDE와 함께 쓰면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시스템에서 이러한 설정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윈도우 셸 치환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윈도우 셸을 교체하는 방식을 쓰지만 윈도우로부터 셸 자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 실시간 운영체제 (RTOS)는 정해진 기간 안에 수행이 끝나야 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위하여 만들어진 멀티태스킹 운영체제이다. (실시간 연산) 이러한 응용 프로그램들에는 조그마한 임베디드 시스템,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 산업 로봇, 우주선, 산업 제어 장치, 일부 대형 컴퓨터 시스템 등이 있다. 초기의 대형 실시간 운영체제는 이를테면 아메리칸 항공과 IBM이 사브레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하여 개발한 트랜잭션 프로세싱 퍼실리티(TPF)가 있다. 일부 임베디드 시스템은 실시간 연산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심비안 OS, 팜 OS, BSD,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를 이용한다. 운영체제 개발은 컴퓨팅에 취미를 둔 사람들이 관여하는 가장 복잡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취미로 만드는 운영체제는 기존의 운영체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코드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들과 활동 개발자들의 수는 적은 편이다. 취미 활동으로 개발된 운영체제의 예로는 ReactOS와 Syllable 등이 있다. +2013년 운영체제별 전 세계 기기 선적량 운영체제 2012년 (단위: 100만 기기) 2013년 (단위: 100만 기기) 안드로이드 504 878 윈도우 346 328 iOS/맥 OS 214 267 블랙베리 35 24 기타 1,117 803 전체 2,216 2,300 출처: 가트너 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 운영체제는 잘 정의된 인터페이스를 가지므로 운영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만,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체제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음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1998년 미국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요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체제에 너무 많은 기능을 포함시켜 응용 프로그램 제작업체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 운영체제의 역사 * 운영체제 목록 * 운영 체제 최적화 * 모바일 운영 체제 * 범용 운영 체제 * 전용 운영 체제 * 실시간 운영 체제 (RTOS) * 임베디드 시스템 * 객체 지향 운영 체제 * * * * * O'Brien, J. A., & Marakas, G. M.(2011).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10e. McGraw-Hill Irwin. * * * * 운영체제의 동작 원리 * 세계 최초의 컴퓨터 운영체제 * 운영체제에 관한 TUNES 리뷰
한글날
[ "Introduction", "유래와 역사", "기념",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한글날'''() 또는 '''조선글날'''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이다.\n\n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고 있다.\n", "파일:Hunmin jeong-eum.jpg|섬네일|오른쪽|훈민정음 언해본\n\n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로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1906년에 제안했던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명명했다.\n\n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이것은 1582년 이전의 윤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매기고, 1582년에 생략된 날짜는 고려하지 않고 잘못 환산한 것이었다. 1446년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실제로는 율리우스력으로 10월 18일이 된다.\n\n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기간도 그레고리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는 역산 그레고리력(proleptic gregorian calender)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합의가 나와 그에 따라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n\n그러던중에 한글이 반포된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에 따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므로 새로이 한글날을 10월 9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n\n=== 대한민국 ===\n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16일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n\n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만들어진 이유...?\n\n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n\n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n\n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n\n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n\n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 2005년, 2011년에는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쉬었다.\n\n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1월 16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n\n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n\n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되면서, 제0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n\n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n\n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n",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n\n\n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n\n2005년에 국어기본법과 국어기본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n\n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n\n", "\n* 한글\n* 훈민정음\n* 국립국어원\n* 한국어\n* 조선어학회\n* 대한민국의 공휴일\n\n* 순우리말\n", "\n", "* 한글날의 유래와 변천 - 새국어 소식 1998년 제3호\n\n\n\n\n분류:대한민국의 국경일\n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념일\n분류:대한민국의 공휴일\n분류:한글\n분류:10월의 기념일\n분류:1월의 기념일\n분류:10월 9일\n분류:1월 15일\n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n분류:대한민국의 국기 게양일" ]
'''한글날'''() 또는 '''조선글날'''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정하고 있다. 파일:Hunmin jeong-eum.jpg|섬네일|오른쪽|훈민정음 언해본 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로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1906년에 제안했던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명명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이것은 1582년 이전의 윤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매기고, 1582년에 생략된 날짜는 고려하지 않고 잘못 환산한 것이었다. 1446년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실제로는 율리우스력으로 10월 18일이 된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기간도 그레고리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는 역산 그레고리력(proleptic gregorian calender)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합의가 나와 그에 따라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그러던중에 한글이 반포된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에 따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므로 새로이 한글날을 10월 9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 대한민국 ===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16일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만들어진 이유...?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 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 2005년, 2011년에는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쉬었다. 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1월 16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 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되면서, 제0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과 국어기본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 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 한글 * 훈민정음 * 국립국어원 * 한국어 * 조선어학회 * 대한민국의 공휴일 * 순우리말 * 한글날의 유래와 변천 - 새국어 소식 1998년 제3호 분류:대한민국의 국경일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념일 분류:대한민국의 공휴일 분류:한글 분류:10월의 기념일 분류:1월의 기념일 분류:10월 9일 분류:1월 15일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분류:대한민국의 국기 게양일
그래픽 소프트웨어
[ "Introduction", "역사",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예", "각주" ]
[ "\n'''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람이 이미지나 모델을 시각적으로(visually)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또는 프로그램 모음을 의미한다. '''화상 편집 소프트웨어'''라고도 한다. 크게 공간에 따라 3차원(입체)과 2차원(평면)으로 나뉘며, 좌표 설정 방식에 따라 벡터방식과 래스터(픽셀) 방식으로 나뉜다.\n", "슈퍼페인트(SuperPaint, 1973년 4월)가 최초의 그래픽 응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이다.\n\nFauve Matisse(이후 매크로미디어 xRes로 명칭 변경)는 1990년대 초에 선구적인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객 소프트웨어 내에 레이어 개념을 도입하였다.\n\n현재 미국에서는 어도비 포토샵이 가장 흔히 사용되고 가장 잘 알려진 그래픽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이다. 코렐드로는 유럽에서 어도비 보다 더 강력한 사용자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GIMP는 어도비 포토샵을 대체하는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n", "=== 2차원 ===\n==== 래스터 방식의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 ====\n* 어도비 포토샵\n* 페인트샵 프로\n* 코렐 페인터\n* 김프\n* ACDSee\n* 어피니티 포토\n\n==== 벡터 방식의 그래픽 제작 프로그램 ====\n*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n* 어도비 플래시\n* 코렐 드로우\n* 잉크스케이프\n* 어피니티 디자이너\n\n=== 3차원 ===\n* 오토캐드\n* 3D 스튜디오 맥스\n* 마야\n* 라이트웨이브\n* 소프트 이미지 XSI\n* 스케치업\n* ZBrush\n* 블렌더\n\n===탁상출판===\n* 스크라이버스\n* 페이지메이커\n", "\n\n\n\n\n분류:응용 소프트웨어\n분류:컴퓨터 그래픽스\n " ]
'''그래픽 소프트웨어'''()는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람이 이미지나 모델을 시각적으로(visually)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또는 프로그램 모음을 의미한다. '''화상 편집 소프트웨어'''라고도 한다. 크게 공간에 따라 3차원(입체)과 2차원(평면)으로 나뉘며, 좌표 설정 방식에 따라 벡터방식과 래스터(픽셀) 방식으로 나뉜다. 슈퍼페인트(SuperPaint, 1973년 4월)가 최초의 그래픽 응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이다. Fauve Matisse(이후 매크로미디어 xRes로 명칭 변경)는 1990년대 초에 선구적인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객 소프트웨어 내에 레이어 개념을 도입하였다. 현재 미국에서는 어도비 포토샵이 가장 흔히 사용되고 가장 잘 알려진 그래픽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이다. 코렐드로는 유럽에서 어도비 보다 더 강력한 사용자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GIMP는 어도비 포토샵을 대체하는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 2차원 === ==== 래스터 방식의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 ==== * 어도비 포토샵 * 페인트샵 프로 * 코렐 페인터 * 김프 * ACDSee * 어피니티 포토 ==== 벡터 방식의 그래픽 제작 프로그램 ==== *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 어도비 플래시 * 코렐 드로우 * 잉크스케이프 * 어피니티 디자이너 === 3차원 === * 오토캐드 * 3D 스튜디오 맥스 * 마야 * 라이트웨이브 * 소프트 이미지 XSI * 스케치업 * ZBrush * 블렌더 ===탁상출판=== * 스크라이버스 * 페이지메이커 분류:응용 소프트웨어 분류:컴퓨터 그래픽스
튜링 기계
[ "Introduction", "개론", "정의", "튜링 머신과 동치인 다른 모델들", "범용 튜링 기계", "실제 기계와의 비교", "역사", "같이 보기", "참고",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 "\n\n\n355x355픽셀\n수학 또는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n\n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n\n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n\n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n\n",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n\n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n\n# '''테이프''' : 테이프는 서로 연속한 단위 구간들로 나뉜다. 각각의 구간은 알파벳을 가지고, 특정 알파벳은 비어있음을 나타낸다. 테이프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임의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한번도 쓰이지 않은 구간은 비어있다는 기호로 표시된다. 어떤 테이프는 왼쪽을 고정시키고 오른쪽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반직선의 형태로 되어있다.\n# '''머리''' : 기계가 머리를 읽으면 테이프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한 칸 (오직 한 칸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모델에서는 머리가 움직이고 테이프가 고정되기도 한다.\n# '''상태 기록기'''는 튜링 기계의 유한히 많은 상태 중 하나를 기록한다. ‘개시 상태’는 상태 기록기를 초기화시키는 특별한 상태이다.\n# '''유한한 표 (또는 행동표)'''는 특정한 상태(qi)에 있는 기계가 어떠한 기호(aj)를 읽을 때 해야 할 행동을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5튜플).\n## 기호를 지우거나 적고 (aj를 aj1으로 치환)\n## 머리를 옮긴다 (‘L’은 왼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R’은 오른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N’은 정지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n## 그리고 같은 상태나 새로운 상태로 간다 (qi에서 qi1으로)\n\n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n",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n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n*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상태들의 집합\n*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기호와 알파벳들의 집합\n* 는 비어있음을 알려주는 기호 (테이프 위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호)\n* 는 입력가능한 기호들의 집합\n* 는 초기상태\n* 는 최종상태, 또는 수락 상태\n* 는 부분함수\n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n\n===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 ===\n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n예를 들면,\n* 기호들을 실제로 결정하는 데 많은 과정이 소모될 것이다.\n*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은 머리가 테이프 위에서 이동하게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튜링 기계를 만들 때 테이프가 머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n* 테이프는 유한하지만 필요한 만큼 비어있는 상태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테이프가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고 유한한 분열의 머리가 채워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n\n=== 다른 정의들 ===\n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를 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n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n: (정의 1) : '''(qj, Sj, Sk/E/N, L/R/N, qm)'''\n:: '''('''현재의 상태 '''qj,''' 읽혀진 기호 '''Sj,'''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새로운 상태 '''qm)'''\n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n: (정의 2) : '''(qj, Sj, qm, Sk/E/N, L/R/N)'''\n:: '''('''현재의 상태 '''qi,''' 읽혀진 기호 '''Sj,''' 새로운 상태 '''qm,'''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n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n\n\n\n\n\n '''예시 : 3-상태 2-기호의 아주 바쁜 기계를 5투플로 표현한 상태표'''\n\n\n\n 현재 상태\n\n 읽혀진 기호\n\n 쓰이는 기호\n\n 이동 종류\n\n 최종(다음) 상태\n\n 5투플 표현\n\n\n\n '''A'''\n\n 0\n\n 1\n\n R\n\n '''B'''\n\n ('''A''', 0, 1, R, '''B''')\n\n\n\n 1\n\n 1\n\n L\n\n '''C'''\n\n ('''A''', 1, 1, L, '''C''')\n\n\n\n '''B'''\n\n 0\n\n 1\n\n L\n\n '''A'''\n\n ('''B''', 0, 1, L, '''A''')\n\n\n\n 1\n\n 1\n\n R\n\n '''B'''\n\n ('''B''', 1, 1, R, '''B''')\n\n\n\n '''C'''\n\n 0\n\n 1\n\n L\n\n '''B'''\n\n ('''C''', 0, 1, L, '''B''')\n\n\n\n 1\n\n 1\n\n N\n\n '''H'''\n\n ('''C''', 1, 1, N, '''H''')\n\n\n\n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0=”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k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n\n\n\n\n\n\n\n\n 현재 m-배형(튜링 상태)\n\n 테이프 기호\n\n 인쇄\n\n 테이프 행동\n\n 최종 m-배형(튜링 상태)\n\n 5투플\n\n 5투플 주석\n\n 4투플\n\n\n\n N1\n\n qi\n\n Sj\n\n Print(Sk)\n\n Left L\n\n qm\n\n (qi, Sj, Sk, L, qm)\n\n \"blank\" = S0, 1=S1, etc.\n\n\n\n\n\n N2\n\n qi\n\n Sj\n\n Print(Sk)\n\n Right R\n\n qm\n\n (qi, Sj, Sk, R, qm)\n\n \"blank\" = S0, 1=S1, etc.\n\n\n\n\n\n N3\n\n qi\n\n Sj\n\n Print(Sk)\n\n None N\n\n qm\n\n (qi, Sj, Sk, N, qm)\n\n \"blank\" = S0, 1=S1, etc.\n\n (qi, Sj, Sk, qm)\n\n\n\n 4\n\n qi\n\n Sj\n\n None N\n\n Left L\n\n qm\n\n (qi, Sj, N, L, qm)\n\n\n\n (qi, Sj, L, qm)\n\n\n\n 5\n\n qi\n\n Sj\n\n None N\n\n Right R\n\n qm\n\n (qi, Sj, N, R, qm)\n\n\n\n (qi, Sj, R, qm)\n\n\n\n 6\n\n qi\n\n Sj\n\n None N\n\n None N\n\n qm\n\n (qi, Sj, N, N, qm)\n\n Direct \"jump\"\n\n (qi, Sj, N, qm)\n\n\n\n 7\n\n qi\n\n Sj\n\n Erase\n\n Left L\n\n qm\n\n (qi, Sj, E, L, qm)\n\n\n\n\n\n\n\n 8\n\n qi\n\n Sj\n\n Erase\n\n Right R\n\n qm\n\n (qi, Sj, E, R, qm)\n\n\n\n\n\n\n\n 9\n\n qi\n\n Sj\n\n Erase\n\n None N\n\n qm\n\n (qi, Sj, E, N, qm)\n\n\n\n (qi, Sj, E, qm)\n\n\n\n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n\n=== 상태 ===\n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n \n\n===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 ===\n\n\n\n\n\n\n '''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상태표 (“P”=1을 인쇄하거나 씀)'''\n\n\n\n 테이프 기호\n\n 현재 상태 '''A'''\n\n 현재 상태 '''B'''\n\n 현재 상태 '''C'''\n\n\n\n\n\n 쓰이는 기호\n\n 테이프 이동\n\n 다음 상태\n\n 쓰이는 기호\n\n 테이프 이동\n\n 다음 상태\n\n 쓰이는 기호\n\n 테이프 이동\n\n 다음 상태\n\n\n\n '''0'''\n\n P\n\n R\n\n '''B'''\n\n P\n\n L\n\n '''A'''\n\n P\n\n L\n\n '''B'''\n\n\n\n '''1'''\n\n P\n\n L\n\n '''C'''\n\n P\n\n R\n\n '''B'''\n\n P\n\n R\n\n '''HALT'''\n\n\n\n파일:State diagram 3 state busy beaver 2B.svg|섬네일|500px|오른쪽|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튜링 기계를 유한 오토마타에 입각해 표현해본 것. 각각의 원은 표의 상태를 나타내고, m배열, 지시, 또는 명령은 화살표로 표현된다. 화살표 위의 표식은 특정한 변화를 야기하는 ‘읽히는 기호’를 결정하고 슬래쉬 뒤의 동작은 따라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맥클럭시(1965), 부스(1967), 힐 그리고 피터슨에 의해 보여졌다.\n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n",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n\n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 등이 있다.\n",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n\n\n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n\n\n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 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n",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n\n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n\n# 실제 컴퓨터가 연산할 수 있다면 튜링 기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튜링 기계의 한계는 곧 실제 컴퓨터에도 적용된다.\n# 실제 컴퓨터와 튜링 기계의 차이점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다. 튜링 기계의 경우 무한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나, 실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유한하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에서는 튜링 기계도 실제 기계처럼 유한한 양의 데이터만 조작 가능하다.\n# 튜링 기계처럼 실제 기계도 하드 디스크와 같은 기타 저장 매체들을 이용해 저장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저장 매체들이 구하기 힘들어진다면 튜링 기계와 실제 기계의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연산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저장 공간의 작은 크기가 아닌 느린 연산 속도이다.\n# 실제 기계를 설명할 때 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모델을 사용한 실제 설명보다 튜링 기계를 이용한 설명이 더욱 간단하다. 만약 튜링 기계가 하나의 알고리즘을 설명하는데 몇 백개 정도의 상태가 필요하다면 같은 설명을 하는데 결정적 유한 오토마타는 수 천조의 상태가 필요하다.\n# 튜링 기계는 얼마나 많은 메모리를 사용하는지에 관계없이 알고리즘을 설명할 수 있다. 튜링 기계는 실제 기계의 발전과 전혀 관계 없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n#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의 설명을 간단케 한다. 튜링 동치인 추상적 기계를 사용하여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것은 실제 기계보다 훨씬 일반적이다. 실제 기계에는 메모리 공간 부족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며 또 자료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n\n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n\n===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 ===\n\n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n", "\n\n===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 ===\n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n\n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n\n# 산술적 함수 +, -, × (이 때의 -는 y≥0 일 때 x-y=0이 되는 적절한 뺄셈이다.)\n# 그 어떤 일련의 연산도 하나의 연산으로 표현될 수 있다.\n# 반복 (연산 P를 n번 반복)\n# 조건부 반복 (시험 T가 성공한다는 조건 하에 연산 P를 n번 반복)\n# 조건부 이동 (결과값에 따라 계산 순서가 변경)\n\n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n=== 판정문제 ===\n\n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n:10.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을 결정하라.임의의 주어진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정수해를 유한한 연산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가?\n\n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n# 수학은 완전한가?\n# 수학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가?\n# 수학은 결정 가능한가?\n\n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n\n=== 앨런 튜링의 a-기계 ===\n\n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n\n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n\n\n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n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n\n===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 ===\n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n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n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n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n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로 환원시켜 생각했다.\n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로 만들었다.\n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n===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 ===\n\n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n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n", "* 확률적 튜링 기계\n* 양자 튜링 기계\n* 교대 튜링 기계\n* 범용 튜링 기계(UTM, :en:Universal Turing machine)\n", "\n", "=== 1차 저서, 재출판, 편집 ===\n* B. Jack Copeland ed. (2004), ''The Essential Turing: Seminal Writings in Computing, Logic, Philosophy,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rtificial Life plus The Secrets of Enigma,'' Clarendon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UK, . Contains the Turing papers plus a draft letter to Emil Post re his criticism of \"Turing's convention\", and Donald W. Davies' ''Corrections to Turing's Universal Computing Machine''\n* 마틴 데이비스 (ed.) (1965),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Raven Press, Hewlett, NY.\n* 에밀 포스트 (1936), \"Finite Combinatory Processes—Formulation 1\", ''Journal of Symbolic Logic'', 1, 103–105, 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에 재출판됨. pp. 289ff.\n* 에밀 포스트 (1947), \"Recursive Unsolvability of a Problem of Thue\", ''Journal of Symbolic Logic'', vol. 12, pp. 1–11.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재출판됨. pp. 293ff. In the Appendix of this paper Post comments on and gives corrections to Turing's paper of 1936–1937. In particular see the footnotes 11 with corrections to the universal computing machine coding and footnote 14 with comments on Turing's first and second proofs.\n* (and ). Reprinted in many collections, e.g. in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p. 115–154; available on the web in many places, e.g. at Scribd.\n* 앨런 튜링, 1948, \"Intelligent Machinery.\" Reprinted in \"Cybernetics: Key Papers.\" Ed. C.R. Evans and A.D.J. Robertson. Baltimore: University Park Press, 1968. p. 31.\n* F. C. Hennie and R. E. Stearns. ''Two-tape simulation of multitape Turing machines''. JACM, 13(4):533–546, 1966.\n\n=== 계산 이론 ===\n* \n* Some parts have been significantly rewritten by Burgess. Presentation of Turing machines in context of Lambek \"abacus machines\" (cf Register machine) and recursive functions, showing their equivalence.\n* 테일러 L. 부스 (1967), ''Sequential Machines and Automata Theory'', John Wiley and Sons, Inc., New York. 공대 졸업생 수준의 책.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며 9장 ''튜링 기계''는 재귀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루고 있다.\n* . On pages 12–20 he gives examples of 5-tuple tables for Addition, The Successor Function, Subtraction (x ≥ y), Proper Subtraction (0 if x < y), The Identity Function and various identity functions, and Multiplication.\n* \n* . On pages 90–103 Hennie discusses the UTM with examples and flow-charts, but no actual 'code'.\n* A difficult book. Centered around the issues of machine-interpretation of \"languages\", NP-completeness, etc.\n* Distinctly different and less intimidating than the first edition.\n* Stephen Kleene (1952), ''Introduction to Metamathematics'',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Amsterdam Netherlands, 10th impression (with corrections of 6th reprint 1971). Graduate level text; most of Chapter XIII ''Computable functions'' is on Turing machine proofs of computability of recursive functions, etc.\n* . With reference to the role of Turing machines in the development of computation (both hardware and software) see 1.4.5 ''History and Bibliography'' pp. 225ff and 2.6 ''History and Bibliography''pp. 456ff.\n* Zohar Manna, 1974, ''Mathematical Theory of Computation''. Reprinted, Dover, 2003. \n* 마빈 민스키, ''Computation: Finite and Infinite Machines'', Prentice–Hall, Inc., N.J., 1967. See Chapter 8, Section 8.2 \"Unsolvability of the Halting Problem.\" 초보자도 읽을만 하며 재밌는 부분도 있다.\n* Chapter 2: Turing machines, pp. 19–56.\n* Chapter 3: The Church–Turing Thesis, pp. 125–149.\n* \n* Peter van Emde Boas 1990, ''Machine Models and Simulations'', pp. 3–66, in Jan van Leeuwen, ed., ''Handbook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Volume A: Algorithms and Complexity'', The MIT Press/Elsevier, place?, (Volume A). QA76.H279 1990. Valuable survey, with 141 references.\n\n=== 처치-튜링 명제 ===\n* \n* \n\n=== 작은 튜링 기계 ===\n* Rogozhin, Yurii, 1998, \" A Universal Turing Machine with 22 States and 2 Symbols\", ''Romanian Journal Of Information Science and Technology'', 1(3), 259–265, 1998. (surveys known results about small universal Turing machines)\n* Stephen Wolfram, 2002, ''A New Kind of Science'', Wolfram Media, \n* Brunfiel, Geoff, Student snags maths prize, ''Nature'', October 24. 2007.\n* Jim Giles (2007), Simplest 'universal computer' wins student $25,000, New Scientist, October 24, 2007.\n* Alex Smith, Universality of Wolfram’s 2, 3 Turing Machine, Submission for the Wolfram 2, 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n* Vaughan Pratt, 2007, \" Simple Turing machines, Universality, Encodings, etc.\",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n* 마틴 데이비스,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and Definition of universal Turing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27, 2007.\n\n* Alasdair Urquhart,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 2007.\n* Hector Zenil (Wolfram Research),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n* Todd Rowland, 2007, \" Confusion on FOM\", Wolfram Science message board, October 30, 2007.\n\n=== 기타 ===\n* \n* 로빈 간디, \"The Confluence of Ideas in 1936\", pp. 51–102 in Rolf Herken, see below.\n* 스티븐 호킹 (editor), 2005, ''God Created the Integers: The Mathematical Breakthroughs that Changed History'', Running Press, Philadelphia, . Includes Turing's 1936–1937 paper, with brief commentary and biography of Turing as written by Hawking.\n* \n* 앤드류 호지스, ''Alan Turing: The Enigma'', Simon and Schuster, New York. Cf Chapter \"The Spirit of Truth\" for a history leading to, and a discussion of, his proof.\n* \n* \n* Hao Wang, \"A variant to Turing's theory of computing machines\",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JACM) 4, 63–92 (1957).\n* Charles Petzold, Petzold, Charles, ''The Annotated Turing'', John Wiley & Sons, Inc., \n* Arora, Sanjeev; Barak, Boaz, \"Complexity Theory: A Modern Approa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 section 1.4, \"Machines as strings and the universal Turing machine\" and 1.7, \"Proof of theorem 1.9\"\n* Isaiah Pinchas Kantorovitz, \"A note on turing machine computability of rule driven systems\", ACM SIGACT News December 2005.\n", "\n* Turing Machine 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n* Detailed info on the Church–Turing Hypothesi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n* Turing Machine-Like Models in Molecular Biology, to understand life mechanisms with a DNA-tape processor.\n* The Turing machine—Summary about the Turing machine, its functionality and historical facts\n* The Wolfram 2,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Stephen Wolfram's $25,000 prize for the proof or disproof of the universality of the potentially smallest universal Turing Machine. The contest has ended, with the proof affirming the machine's universality.\n* \" Turing Machine Causal Networks\" by Enrique Zeleny, Wolfram Demonstrations Project.\n* \n* Purely mechanical Turing Machine\n\n\n\n\n \n분류:이론 컴퓨터 과학\n분류:앨런 튜링\n분류:계산 모형\n분류:정형 기법\n분류:계산 가능성 이론\n분류:잉글랜드의 발명품\n분류:오토마타 이론\n분류:형식 언어\n분류:추상 기계\n분류:1936년 컴퓨팅\n분류:1937년 컴퓨팅" ]
355x355픽셀 수학 또는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 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 '''테이프''' : 테이프는 서로 연속한 단위 구간들로 나뉜다. 각각의 구간은 알파벳을 가지고, 특정 알파벳은 비어있음을 나타낸다. 테이프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임의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한번도 쓰이지 않은 구간은 비어있다는 기호로 표시된다. 어떤 테이프는 왼쪽을 고정시키고 오른쪽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반직선의 형태로 되어있다. # '''머리''' : 기계가 머리를 읽으면 테이프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한 칸 (오직 한 칸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모델에서는 머리가 움직이고 테이프가 고정되기도 한다. # '''상태 기록기'''는 튜링 기계의 유한히 많은 상태 중 하나를 기록한다. ‘개시 상태’는 상태 기록기를 초기화시키는 특별한 상태이다. # '''유한한 표 (또는 행동표)'''는 특정한 상태(qi)에 있는 기계가 어떠한 기호(aj)를 읽을 때 해야 할 행동을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5튜플). ## 기호를 지우거나 적고 (aj를 aj1으로 치환) ## 머리를 옮긴다 (‘L’은 왼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R’은 오른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N’은 정지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고 같은 상태나 새로운 상태로 간다 (qi에서 qi1으로) 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 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상태들의 집합 *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기호와 알파벳들의 집합 * 는 비어있음을 알려주는 기호 (테이프 위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호) * 는 입력가능한 기호들의 집합 * 는 초기상태 * 는 최종상태, 또는 수락 상태 * 는 부분함수 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 ===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 === 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 기호들을 실제로 결정하는 데 많은 과정이 소모될 것이다. *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은 머리가 테이프 위에서 이동하게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튜링 기계를 만들 때 테이프가 머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 테이프는 유한하지만 필요한 만큼 비어있는 상태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테이프가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고 유한한 분열의 머리가 채워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 다른 정의들 === 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를 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 : (정의 1) : '''(qj, Sj, Sk/E/N, L/R/N, qm)''' :: '''('''현재의 상태 '''qj,''' 읽혀진 기호 '''Sj,'''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새로운 상태 '''qm)''' 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 : (정의 2) : '''(qj, Sj, qm, Sk/E/N, L/R/N)''' :: '''('''현재의 상태 '''qi,''' 읽혀진 기호 '''Sj,''' 새로운 상태 '''qm,''' 쓰이는 기호 '''Sk/'''지우기 '''E/'''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오른쪽으로 이동 '''R/'''움직이지 않음 '''N)'''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예시 : 3-상태 2-기호의 아주 바쁜 기계를 5투플로 표현한 상태표''' 현재 상태 읽혀진 기호 쓰이는 기호 이동 종류 최종(다음) 상태 5투플 표현 '''A''' 0 1 R '''B''' ('''A''', 0, 1, R, '''B''') 1 1 L '''C''' ('''A''', 1, 1, L, '''C''') '''B''' 0 1 L '''A''' ('''B''', 0, 1, L, '''A''') 1 1 R '''B''' ('''B''', 1, 1, R, '''B''') '''C''' 0 1 L '''B''' ('''C''', 0, 1, L, '''B''') 1 1 N '''H''' ('''C''', 1, 1, N, '''H''')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0=”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k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m-배형(튜링 상태) 테이프 기호 인쇄 테이프 행동 최종 m-배형(튜링 상태) 5투플 5투플 주석 4투플 N1 qi Sj Print(Sk) Left L qm (qi, Sj, Sk, L, qm) "blank" = S0, 1=S1, etc. N2 qi Sj Print(Sk) Right R qm (qi, Sj, Sk, R, qm) "blank" = S0, 1=S1, etc. N3 qi Sj Print(Sk) None N qm (qi, Sj, Sk, N, qm) "blank" = S0, 1=S1, etc. (qi, Sj, Sk, qm) 4 qi Sj None N Left L qm (qi, Sj, N, L, qm) (qi, Sj, L, qm) 5 qi Sj None N Right R qm (qi, Sj, N, R, qm) (qi, Sj, R, qm) 6 qi Sj None N None N qm (qi, Sj, N, N, qm) Direct "jump" (qi, Sj, N, qm) 7 qi Sj Erase Left L qm (qi, Sj, E, L, qm) 8 qi Sj Erase Right R qm (qi, Sj, E, R, qm) 9 qi Sj Erase None N qm (qi, Sj, E, N, qm) (qi, Sj, E, qm) 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 === 상태 === 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 === 튜링 기계의 “상태” 모식도 === '''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상태표 (“P”=1을 인쇄하거나 씀)''' 테이프 기호 현재 상태 '''A''' 현재 상태 '''B''' 현재 상태 '''C'''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0''' P R '''B''' P L '''A''' P L '''B''' '''1''' P L '''C''' P R '''B''' P R '''HALT''' 파일:State diagram 3 state busy beaver 2B.svg|섬네일|500px|오른쪽|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튜링 기계를 유한 오토마타에 입각해 표현해본 것. 각각의 원은 표의 상태를 나타내고, m배열, 지시, 또는 명령은 화살표로 표현된다. 화살표 위의 표식은 특정한 변화를 야기하는 ‘읽히는 기호’를 결정하고 슬래쉬 뒤의 동작은 따라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맥클럭시(1965), 부스(1967), 힐 그리고 피터슨에 의해 보여졌다. 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 등이 있다.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 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 # 실제 컴퓨터가 연산할 수 있다면 튜링 기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튜링 기계의 한계는 곧 실제 컴퓨터에도 적용된다. # 실제 컴퓨터와 튜링 기계의 차이점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다. 튜링 기계의 경우 무한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나, 실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유한하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에서는 튜링 기계도 실제 기계처럼 유한한 양의 데이터만 조작 가능하다. # 튜링 기계처럼 실제 기계도 하드 디스크와 같은 기타 저장 매체들을 이용해 저장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저장 매체들이 구하기 힘들어진다면 튜링 기계와 실제 기계의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연산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저장 공간의 작은 크기가 아닌 느린 연산 속도이다. # 실제 기계를 설명할 때 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모델을 사용한 실제 설명보다 튜링 기계를 이용한 설명이 더욱 간단하다. 만약 튜링 기계가 하나의 알고리즘을 설명하는데 몇 백개 정도의 상태가 필요하다면 같은 설명을 하는데 결정적 유한 오토마타는 수 천조의 상태가 필요하다. # 튜링 기계는 얼마나 많은 메모리를 사용하는지에 관계없이 알고리즘을 설명할 수 있다. 튜링 기계는 실제 기계의 발전과 전혀 관계 없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의 설명을 간단케 한다. 튜링 동치인 추상적 기계를 사용하여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것은 실제 기계보다 훨씬 일반적이다. 실제 기계에는 메모리 공간 부족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며 또 자료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 === 튜링 기계의 한계(시간 복잡도 이론) === 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 === 역사적 배경 : 계산 기계 === 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 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 # 산술적 함수 +, -, × (이 때의 -는 y≥0 일 때 x-y=0이 되는 적절한 뺄셈이다.) # 그 어떤 일련의 연산도 하나의 연산으로 표현될 수 있다. # 반복 (연산 P를 n번 반복) # 조건부 반복 (시험 T가 성공한다는 조건 하에 연산 P를 n번 반복) # 조건부 이동 (결과값에 따라 계산 순서가 변경) 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 === 판정문제 === 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10.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을 결정하라.임의의 주어진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정수해를 유한한 연산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가? 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 # 수학은 완전한가? # 수학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가? # 수학은 결정 가능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 앨런 튜링의 a-기계 === 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 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 1937-1970 :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 === 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 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로 환원시켜 생각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 1970-현재 : 계산 모델로서의 튜링 기계 === 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 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 확률적 튜링 기계 * 양자 튜링 기계 * 교대 튜링 기계 * 범용 튜링 기계(UTM, :en:Universal Turing machine) === 1차 저서, 재출판, 편집 === * B. Jack Copeland ed. (2004), ''The Essential Turing: Seminal Writings in Computing, Logic, Philosophy,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rtificial Life plus The Secrets of Enigma,'' Clarendon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UK, . Contains the Turing papers plus a draft letter to Emil Post re his criticism of "Turing's convention", and Donald W. Davies' ''Corrections to Turing's Universal Computing Machine'' * 마틴 데이비스 (ed.) (1965),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Raven Press, Hewlett, NY. * 에밀 포스트 (1936), "Finite Combinatory Processes—Formulation 1", ''Journal of Symbolic Logic'', 1, 103–105, 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에 재출판됨. pp. 289ff. * 에밀 포스트 (1947), "Recursive Unsolvability of a Problem of Thue", ''Journal of Symbolic Logic'', vol. 12, pp. 1–11.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재출판됨. pp. 293ff. In the Appendix of this paper Post comments on and gives corrections to Turing's paper of 1936–1937. In particular see the footnotes 11 with corrections to the universal computing machine coding and footnote 14 with comments on Turing's first and second proofs. * (and ). Reprinted in many collections, e.g. in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p. 115–154; available on the web in many places, e.g. at Scribd. * 앨런 튜링, 1948, "Intelligent Machinery." Reprinted in "Cybernetics: Key Papers." Ed. C.R. Evans and A.D.J. Robertson. Baltimore: University Park Press, 1968. p. 31. * F. C. Hennie and R. E. Stearns. ''Two-tape simulation of multitape Turing machines''. JACM, 13(4):533–546, 1966. === 계산 이론 === * * Some parts have been significantly rewritten by Burgess. Presentation of Turing machines in context of Lambek "abacus machines" (cf Register machine) and recursive functions, showing their equivalence. * 테일러 L. 부스 (1967), ''Sequential Machines and Automata Theory'', John Wiley and Sons, Inc., New York. 공대 졸업생 수준의 책.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며 9장 ''튜링 기계''는 재귀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루고 있다. * . On pages 12–20 he gives examples of 5-tuple tables for Addition, The Successor Function, Subtraction (x ≥ y), Proper Subtraction (0 if x < y), The Identity Function and various identity functions, and Multiplication. * * . On pages 90–103 Hennie discusses the UTM with examples and flow-charts, but no actual 'code'. * A difficult book. Centered around the issues of machine-interpretation of "languages", NP-completeness, etc. * Distinctly different and less intimidating than the first edition. * Stephen Kleene (1952), ''Introduction to Metamathematics'',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Amsterdam Netherlands, 10th impression (with corrections of 6th reprint 1971). Graduate level text; most of Chapter XIII ''Computable functions'' is on Turing machine proofs of computability of recursive functions, etc. * . With reference to the role of Turing machines in the development of computation (both hardware and software) see 1.4.5 ''History and Bibliography'' pp. 225ff and 2.6 ''History and Bibliography''pp. 456ff. * Zohar Manna, 1974, ''Mathematical Theory of Computation''. Reprinted, Dover, 2003. * 마빈 민스키, ''Computation: Finite and Infinite Machines'', Prentice–Hall, Inc., N.J., 1967. See Chapter 8, Section 8.2 "Unsolvability of the Halting Problem." 초보자도 읽을만 하며 재밌는 부분도 있다. * Chapter 2: Turing machines, pp. 19–56. * Chapter 3: The Church–Turing Thesis, pp. 125–149. * * Peter van Emde Boas 1990, ''Machine Models and Simulations'', pp. 3–66, in Jan van Leeuwen, ed., ''Handbook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Volume A: Algorithms and Complexity'', The MIT Press/Elsevier, place?, (Volume A). QA76.H279 1990. Valuable survey, with 141 references. === 처치-튜링 명제 === * * === 작은 튜링 기계 === * Rogozhin, Yurii, 1998, " A Universal Turing Machine with 22 States and 2 Symbols", ''Romanian Journal Of Information Science and Technology'', 1(3), 259–265, 1998. (surveys known results about small universal Turing machines) * Stephen Wolfram, 2002, ''A New Kind of Science'', Wolfram Media, * Brunfiel, Geoff, Student snags maths prize, ''Nature'', October 24. 2007. * Jim Giles (2007), Simplest 'universal computer' wins student $25,000, New Scientist, October 24, 2007. * Alex Smith, Universality of Wolfram’s 2, 3 Turing Machine, Submission for the Wolfram 2, 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 * Vaughan Pratt, 2007, " Simple Turing machines, Universality, Encodings, etc.",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 마틴 데이비스,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and Definition of universal Turing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27, 2007. * Alasdair Urquhart,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 2007. * Hector Zenil (Wolfram Research),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 Todd Rowland, 2007, " Confusion on FOM", Wolfram Science message board, October 30, 2007. === 기타 === * * 로빈 간디, "The Confluence of Ideas in 1936", pp. 51–102 in Rolf Herken, see below. * 스티븐 호킹 (editor), 2005, ''God Created the Integers: The Mathematical Breakthroughs that Changed History'', Running Press, Philadelphia, . Includes Turing's 1936–1937 paper, with brief commentary and biography of Turing as written by Hawking. * * 앤드류 호지스, ''Alan Turing: The Enigma'', Simon and Schuster, New York. Cf Chapter "The Spirit of Truth" for a history leading to, and a discussion of, his proof. * * * Hao Wang, "A variant to Turing's theory of computing machines",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JACM) 4, 63–92 (1957). * Charles Petzold, Petzold, Charles, ''The Annotated Turing'', John Wiley & Sons, Inc., * Arora, Sanjeev; Barak, Boaz, "Complexity Theory: A Modern Approa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 section 1.4, "Machines as strings and the universal Turing machine" and 1.7, "Proof of theorem 1.9" * Isaiah Pinchas Kantorovitz, "A note on turing machine computability of rule driven systems", ACM SIGACT News December 2005. * Turing Machine 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Detailed info on the Church–Turing Hypothesi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Turing Machine-Like Models in Molecular Biology, to understand life mechanisms with a DNA-tape processor. * The Turing machine—Summary about the Turing machine, its functionality and historical facts * The Wolfram 2,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Stephen Wolfram's $25,000 prize for the proof or disproof of the universality of the potentially smallest universal Turing Machine. The contest has ended, with the proof affirming the machine's universality. * " Turing Machine Causal Networks" by Enrique Zeleny, Wolfram Demonstrations Project. * * Purely mechanical Turing Machine 분류:이론 컴퓨터 과학 분류:앨런 튜링 분류:계산 모형 분류:정형 기법 분류:계산 가능성 이론 분류:잉글랜드의 발명품 분류:오토마타 이론 분류:형식 언어 분류:추상 기계 분류:1936년 컴퓨팅 분류:1937년 컴퓨팅
컴퓨터 글꼴
[ "Introduction", "표시 방식", "너비의 변화", "글꼴의 속성", "글꼴 형식", "관련 기술", "같이 보기", "외부 링크" ]
[ "\nthumb\n'''글꼴'''은 컴퓨터로 보는 글자들의 모양새 또는 그 전자적 데이터 파일을 뜻한다.\n", "크게 비트맵 방식과 벡터, 그리고 스트로크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n* '''비트맵 방식의 글꼴''': 크기가 고정된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처리 속도가 빠르지만, 정해진 크기에서만 제대로 보이며 확대시키면 획의 둥근 부분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n* '''외곽선 방식의 글꼴''': 벡터 방식이라고도 하며 크기를 변화시켜도 깨지지 않지만, 선을 그리는 데에 처리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n* '''스트로크'''(stroke) 글꼴은 일련의 지정된 선과 부가 정보를 사용하여 특정한 모양의 선의 프로파일, 크기, 모양을 정의한다.\n\n과거 운영 체제에서 사용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글꼴은 벡터 방식에 비트맵 글꼴을 임베딩(추가)하여 넣는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는 비트맵 글꼴만으로는 축소, 확대, 출력에 문제가 있어(일반적으로는 확대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지 않기 때문에: 실제 글꼴 규격에는 확대, 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을 수 있다.) 벡터 방식을 같이 이용하는 것이다.\n\n비트맵 방식은 화면에서 해당 비트맵 그대로 보이는 반면, 벡터 방식은 아웃라인이 화면에 표현되면서 왜곡이 발생하게 되고 원치 않는 형태로 깨져보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특정 크기에 맞추어 비트맵 디자인을 한 후, 벡터 방식에 임베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n", "글꼴을 글자들의 너비 변화에 따라 고정폭 글꼴과 가변폭 글꼴로 나눌 수 있다.\n* '''고정폭 글꼴''': 글자에 상관 없이 일정한 너비를 할당한다.\n** 한글 글꼴의 경우 한글 글자의 폭은 사실 영문 글자의 폭의 두배를 차지한다.\n* '''가변폭 글꼴''': 글자에 따라 변화된 너비를 할당한다.\n** '''넓은 너비''': W와 같은 글자에는 넓은 너비를 할당한다.\n** '''좁은 너비''': i와 같은 글자에는 좁은 너비를 할당한다.\n좀 더 세밀하게 모습을 조정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를테면 'VA'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커닝(자간 여백)이 많은 경우 폰트 자체에 커닝 문자 쌍의 정보가 있거나 수동으로 커닝을 직접 지정해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n\n문자들에 따라서 가변폭 글꼴을 많이 쓰지 않거나 아예 쓰기 힘든 경우도 자주 있다. 이를테면, 한자는 가변폭 글꼴을 만들기 힘들며, 그 영향으로 가나나 한글 글꼴도 고정폭인 경우가 많다.", "글꼴은 컴퓨터에서 표시될때에 여러 가지 속성 설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n* 크기: 글꼴의 크기는 포인트(point) 단위를 쓴다 보통 컴퓨터 글꼴에서는 9~12포인트를 많이 쓰며 6포인트 이하의 글꼴은 대단히 알아보기 힘들어 질 수 있다.\n* 정렬: 오른쪽 줄맞춤, 왼쪽 줄맞춤, 양쪽 줄맞춤, 가운데 줄맞춤을 주로 사용한다.\n* 과부와 고아: 어떤 단어가 문장에서 혼자 따로 떨어져서 표시되면 과부(widow)라고 하고 문단의 시작에 떨어져있으면 고아(orphan)이라고 한다.\n* 줄길이: 문단의 줄길이는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과유불급의 원칙을 따른다.\n* 레딩(leading): 행간 혹은 줄 사이의 수직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 글꼴 크기의 20% 정도 크게 한다. 너무 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으면 읽기 힘들어진다.\n* 커닝(kerning): 글자간, 자간은 글자간의 수평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은 글자들을 충분히 나타낼만한 크기여야한다.\n", "=== 타입 1, 타입 3 글꼴 ===\n타입 1, 타입 3 글꼴은 어도비사가 전문 디지털 타이프세팅을 위하여 개발한 것이다. 포스트스크립트를 사용하면 입방 베지에 곡선의 외곽선 글꼴이 된다. 타입 1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부분집합에 제한을 받으며 어도비의 힌팅 시스템을 사용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쓰였다. 타입 3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무제한적 사용을 허용하지만 힌팅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저해상도의 기기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와 컴퓨터 화면)에서 깨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n\n=== 오픈타입 글꼴 ===\n오픈타입은 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설계한 스마트폰트 시스템이다. 오픈타입 글꼴은 넓은 범위의 메타데이터를 곁들여 트루타입이나 타입 1 (실제로 CFF) 포맷의 외곽선을 포함하고 있다.\n\n===트루타입 글꼴===\n트루타입은 애플이 개발한 글꼴 체제이다. 타입 1 글꼴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타입 1 글꼴과 달리 트루타입은 베지에 곡선으로 그려진다. 현재에 이르러 널리 쓰이고 있으며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 적용되고 있다.\n\n=== 메타폰트 ===\n메타폰트(METAFONT)는 다른 종류의 글꼴이다. 트루타입과 달리 벡터 글꼴의 체제를 갖추었다.\n", "=== 웹 폰트 ===\n웹 폰트는 동적 폰트(dynamic fo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동적 폰트는 글꼴이 사용자의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지 않아도 볼 수 있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안된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웹 폰트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n\n웹 폰트의 포맷은 비트스트림의 .pfr 형식과 마이크로소프트의 .eot 형식, 이렇게 2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pfr은 넷스케이프와 모질라까지 지원하고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반면, .eo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특정 버전 이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지원되고 파일 형식은 공개되지 않아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는 사용하지 못한다. .eot 형식은 MS의 WEFT 응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으며, 웹폰트가 사용될 사이트의 URL(인터넷 주소)을 넣을 수 있어 해당 URL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불법 사용 또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n\n웹 폰트가 사용된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웹 브라우저에서 웹폰트를 접속자의 컴퓨터에 자동으로 내려받아 해당 웹페이지를 웹폰트로 보여준다. 따라서 웹폰트의 파일 용량이 크면 클수록 내려 받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고, 실제 웹페이지가 웹 폰트로 대체되어 표시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웹 폰트를 쓰는 일부 포털에서는 해당 글꼴이 비트맵 방식이면 출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n\neot와 pfr 말고도 GlyphGate에서 개발한 웹 폰트 형태가 있다.\n\n=== 표시 기술 ===\n===== 앤티에일리어싱 =====\n\n앤티에일리어싱은 높은 해상도의 신호를 낮은 해상도에서 나타낼 때 생기는 에일리어싱(깨진 패턴)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운영 체제와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 이미 이 기술을 기본 지원하고 있다.\n===== 클리어타입 =====\n\n클리어타입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기술로, 액정 화면에서 더욱 깨끗하게 글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액정 화면의 한 개 픽셀은 RGB(빨간색, 녹색, 파란색)의 3개의 서브픽셀(sub-pixel)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클리어타입은 가로방향으로만 RGB의 서브픽셀을 이용한 안티에일리어싱 효과가 나기 때문에, 세로방향에 대해서는 계단 현상의 느낌이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클리어타입에 세로방향으로 안티알리아싱 효과를 더한 래스터라이징 기술을 개발하여 발표하였고, 그로 인해, 외곽선의 계단현상이 최소화되어 보다 나은 래스터라이징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정확한 래스터라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힌팅 정보를 필요로 하는데 거의 모든 상용 한글 글꼴에는 제대로 된 힌팅 정보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클리어타입의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선명성에서 큰 향상은 없는 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7에 기본 글꼴로 사용되는 한글 글꼴 ‘맑은 고딕’은 한글 글꼴의 힌팅 정보를 포함하여 클리어타입 기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최초의 한글 글꼴이다.\n", "* 글꼴 목록\n* 오픈 폰트 라이선스\n", "* Font Technologies chapter of the LDP's Font-HOWTO\n* History and technology of computer fonts, Annals of the History of Computing, IEEE, Apr-Jun 1998, Vol. 20, Issue 2, pages 30–34, ISSN 1058-6180.\n\n\n\n\n분류:글꼴\n분류:디지털 타이포그래피" ]
thumb '''글꼴'''은 컴퓨터로 보는 글자들의 모양새 또는 그 전자적 데이터 파일을 뜻한다. 크게 비트맵 방식과 벡터, 그리고 스트로크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 '''비트맵 방식의 글꼴''': 크기가 고정된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처리 속도가 빠르지만, 정해진 크기에서만 제대로 보이며 확대시키면 획의 둥근 부분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 '''외곽선 방식의 글꼴''': 벡터 방식이라고도 하며 크기를 변화시켜도 깨지지 않지만, 선을 그리는 데에 처리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 '''스트로크'''(stroke) 글꼴은 일련의 지정된 선과 부가 정보를 사용하여 특정한 모양의 선의 프로파일, 크기, 모양을 정의한다. 과거 운영 체제에서 사용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글꼴은 벡터 방식에 비트맵 글꼴을 임베딩(추가)하여 넣는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는 비트맵 글꼴만으로는 축소, 확대, 출력에 문제가 있어(일반적으로는 확대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지 않기 때문에: 실제 글꼴 규격에는 확대, 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을 수 있다.) 벡터 방식을 같이 이용하는 것이다. 비트맵 방식은 화면에서 해당 비트맵 그대로 보이는 반면, 벡터 방식은 아웃라인이 화면에 표현되면서 왜곡이 발생하게 되고 원치 않는 형태로 깨져보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특정 크기에 맞추어 비트맵 디자인을 한 후, 벡터 방식에 임베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글꼴을 글자들의 너비 변화에 따라 고정폭 글꼴과 가변폭 글꼴로 나눌 수 있다. * '''고정폭 글꼴''': 글자에 상관 없이 일정한 너비를 할당한다. ** 한글 글꼴의 경우 한글 글자의 폭은 사실 영문 글자의 폭의 두배를 차지한다. * '''가변폭 글꼴''': 글자에 따라 변화된 너비를 할당한다. ** '''넓은 너비''': W와 같은 글자에는 넓은 너비를 할당한다. ** '''좁은 너비''': i와 같은 글자에는 좁은 너비를 할당한다. 좀 더 세밀하게 모습을 조정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를테면 'VA'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커닝(자간 여백)이 많은 경우 폰트 자체에 커닝 문자 쌍의 정보가 있거나 수동으로 커닝을 직접 지정해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문자들에 따라서 가변폭 글꼴을 많이 쓰지 않거나 아예 쓰기 힘든 경우도 자주 있다. 이를테면, 한자는 가변폭 글꼴을 만들기 힘들며, 그 영향으로 가나나 한글 글꼴도 고정폭인 경우가 많다.글꼴은 컴퓨터에서 표시될때에 여러 가지 속성 설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 크기: 글꼴의 크기는 포인트(point) 단위를 쓴다 보통 컴퓨터 글꼴에서는 9~12포인트를 많이 쓰며 6포인트 이하의 글꼴은 대단히 알아보기 힘들어 질 수 있다. * 정렬: 오른쪽 줄맞춤, 왼쪽 줄맞춤, 양쪽 줄맞춤, 가운데 줄맞춤을 주로 사용한다. * 과부와 고아: 어떤 단어가 문장에서 혼자 따로 떨어져서 표시되면 과부(widow)라고 하고 문단의 시작에 떨어져있으면 고아(orphan)이라고 한다. * 줄길이: 문단의 줄길이는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과유불급의 원칙을 따른다. * 레딩(leading): 행간 혹은 줄 사이의 수직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 글꼴 크기의 20% 정도 크게 한다. 너무 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으면 읽기 힘들어진다. * 커닝(kerning): 글자간, 자간은 글자간의 수평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은 글자들을 충분히 나타낼만한 크기여야한다. === 타입 1, 타입 3 글꼴 === 타입 1, 타입 3 글꼴은 어도비사가 전문 디지털 타이프세팅을 위하여 개발한 것이다. 포스트스크립트를 사용하면 입방 베지에 곡선의 외곽선 글꼴이 된다. 타입 1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부분집합에 제한을 받으며 어도비의 힌팅 시스템을 사용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쓰였다. 타입 3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무제한적 사용을 허용하지만 힌팅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저해상도의 기기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와 컴퓨터 화면)에서 깨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 오픈타입 글꼴 === 오픈타입은 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설계한 스마트폰트 시스템이다. 오픈타입 글꼴은 넓은 범위의 메타데이터를 곁들여 트루타입이나 타입 1 (실제로 CFF) 포맷의 외곽선을 포함하고 있다. ===트루타입 글꼴=== 트루타입은 애플이 개발한 글꼴 체제이다. 타입 1 글꼴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타입 1 글꼴과 달리 트루타입은 베지에 곡선으로 그려진다. 현재에 이르러 널리 쓰이고 있으며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 적용되고 있다. === 메타폰트 === 메타폰트(METAFONT)는 다른 종류의 글꼴이다. 트루타입과 달리 벡터 글꼴의 체제를 갖추었다. === 웹 폰트 === 웹 폰트는 동적 폰트(dynamic fo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동적 폰트는 글꼴이 사용자의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지 않아도 볼 수 있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안된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웹 폰트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웹 폰트의 포맷은 비트스트림의 .pfr 형식과 마이크로소프트의 .eot 형식, 이렇게 2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pfr은 넷스케이프와 모질라까지 지원하고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반면, .eo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특정 버전 이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지원되고 파일 형식은 공개되지 않아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는 사용하지 못한다. .eot 형식은 MS의 WEFT 응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으며, 웹폰트가 사용될 사이트의 URL(인터넷 주소)을 넣을 수 있어 해당 URL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불법 사용 또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웹 폰트가 사용된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웹 브라우저에서 웹폰트를 접속자의 컴퓨터에 자동으로 내려받아 해당 웹페이지를 웹폰트로 보여준다. 따라서 웹폰트의 파일 용량이 크면 클수록 내려 받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고, 실제 웹페이지가 웹 폰트로 대체되어 표시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웹 폰트를 쓰는 일부 포털에서는 해당 글꼴이 비트맵 방식이면 출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eot와 pfr 말고도 GlyphGate에서 개발한 웹 폰트 형태가 있다. === 표시 기술 === ===== 앤티에일리어싱 ===== 앤티에일리어싱은 높은 해상도의 신호를 낮은 해상도에서 나타낼 때 생기는 에일리어싱(깨진 패턴)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운영 체제와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 이미 이 기술을 기본 지원하고 있다. ===== 클리어타입 ===== 클리어타입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기술로, 액정 화면에서 더욱 깨끗하게 글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액정 화면의 한 개 픽셀은 RGB(빨간색, 녹색, 파란색)의 3개의 서브픽셀(sub-pixel)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클리어타입은 가로방향으로만 RGB의 서브픽셀을 이용한 안티에일리어싱 효과가 나기 때문에, 세로방향에 대해서는 계단 현상의 느낌이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클리어타입에 세로방향으로 안티알리아싱 효과를 더한 래스터라이징 기술을 개발하여 발표하였고, 그로 인해, 외곽선의 계단현상이 최소화되어 보다 나은 래스터라이징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정확한 래스터라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힌팅 정보를 필요로 하는데 거의 모든 상용 한글 글꼴에는 제대로 된 힌팅 정보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클리어타입의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선명성에서 큰 향상은 없는 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비스타, 윈도우 7에 기본 글꼴로 사용되는 한글 글꼴 ‘맑은 고딕’은 한글 글꼴의 힌팅 정보를 포함하여 클리어타입 기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최초의 한글 글꼴이다. * 글꼴 목록 * 오픈 폰트 라이선스 * Font Technologies chapter of the LDP's Font-HOWTO * History and technology of computer fonts, Annals of the History of Computing, IEEE, Apr-Jun 1998, Vol. 20, Issue 2, pages 30–34, ISSN 1058-6180. 분류:글꼴 분류:디지털 타이포그래피
중국공산당
[ "Introduction", "개요", "연표", "역사", "조직", "이념", "엄격한 입당 절차", "정책", "비판", "역대 지도부", "같이 보기",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외부 링크" ]
[ "\n\n파일:Stalin birthday2.jpg|섬네일|이오시프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는 중국공산당 당원집회(1949년 12월 18일)\n파일:Marx et Engels à Shanghai.jpg|섬네일|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석상 (상하이 소재)\n\n'''중국공산당'''(,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 인도 인민당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정당이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현재까지 일당제를 실시, 유지하고 있다.\n\n중국공산당은 1919년 공산주의 조직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파시즘, 인민민주주의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으며 천두슈와 마오쩌둥, 리다자오, 리다, 마오둔, 덩중샤, 장궈타오, 리한쥔, 위슈쑹 등이 초기 구성원이었다.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천두슈 등이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0년 10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등이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1920년 11월, 창사에서 마오쩌둥 등이 창사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1년 3월, 광저우에서 천궁보 등이 광저우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회로부터 공산당 당원의 골간을 이뤘다. 그 이후 중국국민당과 대립 노선을 분명히 해가고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파업을 주도해가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 옌안 공산 혁명 근거지 시기를 거쳐 1949년까지 중국국민당에 맞서 도시 노동자, 농민, 하급 지식인, 학생 등을 대거 마오쩌둥 진영에 유입시켰고, 스탈린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인민민주독재를 여러 방면으로 파급해갔으며, 두 번째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싸워 승리하며 중국 대륙 본토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n\n중국공산당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상인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정치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합리적인 비판과 민주적인 토론을 통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해 나간다는 사상이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기구는 5년마다 열리는 전국대표회의로, 전국대표회의가 개회되지 않았을 때에는 중앙위원회가 최고 결정권을 가진다. 중국공산당의 당수는 중국의 최고직인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국의 군사력 자체를 총괄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가 주석 등의 자리를 모두 역임하게 되며, 결국 중국공산당의 당수가 곧 중국의 최고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2012년 18대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된 시진핑이다.\n\n중국공산당은 공산당 주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 혁명 노선을 문화 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한 후,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목표가 된 계급 투쟁 노선의 종결을 공식 선포하고, 개혁과 개방 노선을 취해오고 있으며,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개혁과 개방 공산당 영도와 경제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정강 정책을 확립하면서, 1992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n", "\n\n중국공산당은 2014년 기준으로 86,700,000명의 당원을 거느릴 정도로 매우 거대한 규모의 정당이다. 중국은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사례로 베이징 대학 대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이유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공산당 당원이 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를 통제하는 독재적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지닌 이 정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을 계속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현대화 이후 상대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 특히 경제적인 영역에서 중국공산당 이외의 인물과 조직의 공식적인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해안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 및 그 산하 위원회가 모든 중요한 정부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에 대해 정치적인 지침을 내리고 있으므로 비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의 규율에 도전하는 자치기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정부 조직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국공산당의 통제력은 굉장히 강력하며 노동조합도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저학력자도 많았으나 최근에는 전문대졸 이상 고학력자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개개인이 민중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인도의 귀족들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초기에는 대중과 대단한 차이가 없어서 대륙의 중국인들은 비공산당 인물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n", "=== 중화민국 ===\n* 1920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지도로 중국공산당 창당 조직 설립.\n* 1920년 10월: 중화민국 베이징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n* 1920년 10-11월: 중화민국 후난성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n* 1921년 3월: 중화민국 광둥성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n* 1921년 7월 1일: 제1차 공산당 당대회 개최. 공식 창당.\n* 1922년 7월: 레닌의 코민테른(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 정식가입.\n* 1924년-1927년: 제1차 국공 합작.\n* 1927년: 국공 합작 결렬, 국공 내전 .\n*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설립.\n* 1934년: 대장정, 옌안 혁명 근거지 시기. \n* 1937년-1945년 : 옌안 본거지 시기. 제2차 국공 합작으로 중일 전쟁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참전.\n*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n*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 시작.\n* 1949년 2월: 베이징 함락.\n* 1949년 3월: 난징 함락.\n\n=== 중화인민공화국 ===\n*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n* 1950년 10월: 한국 전쟁 개입.\n* 1950년-1951년: 인민민주독재 개시와 반혁명분자 재판.\n* 1951년-1952년: 마오이즘 사상개조운동과 삼반오반운동.\n* 1955년-1957년: 반우파운동.\n* 1958년: 대약진 운동.\n* 1966년-1976년: 문화 대혁명.\n*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화궈펑 체제.\n* 1978년: 덩샤오핑 개혁개방, 4대 현대화.\n* 1989년: 톈안먼 사건 발발.\n* 1992년: 남순강화와 중국 특색 사회주의\n* 1997년: 덩샤오핑 사망, 홍콩 반환\n* 2002년: 자본가들의 입당을 허용.\n* 2005년: 반분열국가법 통과.\n* 2010년: 중국의 총GDP가 2위로 상승하며 일본을 추월.\n* 2013년: 시진핑 집권.\n* 2015년: 국공내전이래 첫 양안회담.\n* 2018년: 시진핑 재집권, 3연임제한 조항 폐지.\n*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결렬, 코로나19 창궐.\n*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n* 2021년: 창당 100주년을 맞이함.", "\n=== 창당 ===\n중국공산당의 역사는 1919년 일어난 5·4 운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급진적인 중국 엘리트층이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은 사회적 이념들을 접하며 큰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활약하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널리 펼치기 시작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공산당을 만들자는 의견이 강해지게 되었다.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가 처음으로 혁명 이론과 공산주의의 세계화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으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또다른 주요 지식인이었던 천두슈와는 다르게 중화민국 건국에 불참하지는 않았다. 다만 리다자오와 천두슈 둘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세기의 전환점이며, 이를 계기로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동일했다. 초기 중국공산당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전위당론에 입각하여 창당되었다.\n\n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이 당시에는 오직 50여 명의 당원들만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팽창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본디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되었으나, 회의 중간인 7월 30일에 프랑스 경찰의 탄압으로 인하여 상하이에서 쫓겨나 31일에는 저장성 난호 위에 떠있는 배 위에서 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때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의 탄압으로 워낙 혼란스러웠던 터라 리다자오나 천두슈도 이 회의에 참여치 못하였고, 오직 12명의 대표들만 모여 회의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회의 마지막 날이었던 31일, 대표들은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천두슈를 대표로 선출하였다.\n\n이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당시 쑨원의 지휘를 받고 있던 국민당에 가입하였는데, 이를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좌익을 맡았으며, 우익 세력들과 함께 권력을 다투었다. 쑨원이 1925년 3월에 세상을 떠나자, 우익 세력의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그의 자리를 맡았다. 장제스는 성공적으로 제1차 북벌을 끝낸 이후 칼 끝을 몇 만명에 달하는 공산당 세력에게 겨누었다. 그는 우한의 국민당 중앙 간부들의 만류도 뿌리친 후 군대를 이끌고 공산당이 장악했던 상하이로 행군했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했으나, 장제스는 본심을 드러내고 5,000여 명의 공산당원들과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를 4·12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장제스는 우한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공산당 장군에 가로막혔다. 장제스와 그의 동맹들은 직후 중국 전역을 돌며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베이징에서는 군벌 장쭤린의 지시 하에 19명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암살당했으며 장사에서는 수 백명에 달하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총살당했다. 그해 5월에 이르자 몇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살해당했으며 중국공산당은 최종적으로 25,000여 명의 당원들 중 15,000여 명의 당원들을 잃으며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n\n중국공산당은 이후에도 우한의 중화민국 정부를 계속 지지했으나, 중화민국은 1927년 7월에 모든 공산당 당적 인사들을 정부 요인 명단에서 제거하였다. 공산당은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군대인 '홍군'을 창군하며 이에 대응했다. 홍군은 국민당이 장악한 중화민국군에 대항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1927년 8월 1일에는 주더 장군이 이끄는 홍군이 난창을 공격하며 난창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막대한 공세를 퍼붓는 중화민국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공산군은 산터우로 후퇴한 이후 푸젠성 임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이 때 마오쩌둥이 홍군의 지도자로 등장했고, 장시성 일대에서 추수 봉기를 일으키며 농민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중화민국에 맞서 싸워주기를 바랐다. 그는 9월에 중화민국의 도시들을 삼면에서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으나, 중화민국과의 압도적인 전력 차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결국 패배를 시인할수 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후 1,000여 명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 동쪽으로 행군해갔다.\n\n===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n중국공산당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은 공산당 조직 자체를 뒤흔들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민주집중제를 채택하였으며 정치국을 설립하여 각기 다른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형태로 바뀌었다. 중앙 정치국은 당의 모든 인사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분열과 내분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천두슈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자 1929년 리리싼이 일시적으로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리리싼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고 공산당은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중국공산당의 상황을 보다 못한 코민테른이 개입하여 리리싼을 쫓아낸 이후 마오쩌둥을 정치국 위원과 비공식적인 지도자로 세웠다. 당의 전 대표였던 저우언라이와 장원톈은 마오쩌둥을 옆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홍군도 이 때 재구성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중앙집중제 형태로 개편되어 마오쩌둥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군대로 바뀌었다,허나 국민당의 5차 공산당토벌로 대장정의 길을 걷고 1년을 걸어서 산시성에서 독립적인 형태로 재등장한다.\n\n2차 중일 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손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2차 국공합작이 만들어졌고,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함께 침략군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처지가 된 것이다. 2차 국공합작은 공식적으로는 1945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실질적인 협력은 이미 1940년에 끝났다. 이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뿌리깊은 불화 때문이었기에 서로를 믿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공산당은 전쟁을 당세를 늘리고 나중에 국민당에 대항할 세력을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국민당도 공산당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1939년부터는 점차 공산당의 팽창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이때문에 종종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공공의 적인 일본이 존재하였던 탓에 이 충돌들은 크게 번지지 않고 작은 규모에서 일단락되었다. 1943년부터는 국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확장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n\n마오쩌둥은 1945년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전쟁은 본격적인 국공 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중국 내전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일본이 망한 1945년 8월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평화 협상이 종결된 1946년 6월까지이다. 1945년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에는 국민당의 중화민국 군대가 공산당보다 3배나 많은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훨씬 더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협조 하에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지역들을 큰 저항없이 장악할 수 있었으나, 이 점령지들에서 중화민국은 부패한 관료들과 무력 행사로 인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국민당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장악한 시골 지역들을 탈환하는데에 처참히 실패하였고, 공산당은 점차 소련의 원조를 받아 만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46년 7월에서 1947년 6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국민당은 중국 대륙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허나 이는 빈껍데기일 뿐이었는데, 이는 국민당 내부의 고질적인 불화와 장제스의 독재적인 면모로 인하여 국민당은 점차 내부에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47년 7월에서부터 1948년 8월까지로, 이 시기에 공산당이 점차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원을 장악하고 북부 지역을 평정하였으며 북동부 지역도 거의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편 국민당은 크게 약화되었고 대략 3백만명에 달하는 군사들을 잃으며 큰 타격을 입었을 뿐더러, 부패와 무능으로 사람들의 지지도 얻는데 실패하며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단계는 1948년 9월에서 1949년 12월까지로, 이 시기에 중국 본토가 완전히 공산당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대만으로 국부천대하며 세력이 크게 쪼그라들었다.\n현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시진핑\n\n=== 현대 ===\n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정식 선포했다. 그해 말이 되자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혔고,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공산당을 이끌어간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과 같은 핵심 인물들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러한 풍조는 단순히 이들에만 그치지 않았고, 중국의 전반적인 사회적, 정치적 지형에서 개인적인 연과 친분이 매우 중요해지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사상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지속적인 혁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반혁명분자와 지주계급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문화 대혁명을 일으키며 수 백만명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참사를 저질렀다.\n\n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 자리를 두고 화궈펑과 덩샤오핑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덩샤오핑이 결국 화궈펑을 누르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고, 1978년에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확고한 중국의 1인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등과 같은 개혁파의 도움에 힘입어 개방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개념을 도입하며 중국공산당을 여타 공산당과 소련과 차별화하려 노력하였다. 덩샤오핑의 통치기에 중국은 시장을 개방했는데, 이는 마오쩌둥과는 달리 자본주의화되지 않고서도 시장을 개방하여 자유로운 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은 덩샤오핑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였다. 허나 이같은 개방 조치는 마오쩌둥을 신봉하던 보수세력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에게까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는 덩샤오핑의 개혁 조치가 만족할 만큼 개방되었거나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같은 불만을 결국 1988년 천안문 사태로 폭발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무력으로 깔아뭉개며 중국의 민주화 움직임을 압살하였으나 다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큰 성취를 이루며 경제 대국으로의 길을 열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사회적 시장 경제의 개념이 등장하였고, 1997년에는 덩샤오핑주의가 아예 중국의 헌법에 못박혔다.\n\n중국공산당의 장쩌민 주석은 1990년대에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으며, 덩샤오핑의 정책들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덩샤오핑 이전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대부분 국가 수립 이전,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고 싸웠던 급진적인 혁명가들이었던 데에 반해, 장쩌민 주석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공산당 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안정된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유능한 정치인들이었으며, 경제적, 사회적 이 두 분야 모두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은 점차 규칙과 법에 기반한 체제를 이룩하기 시작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마구잡이로 간부들을 승진시키거나 좌천하는 악습에서 벗어나 능력, 실무, 학력 등에 기반하여 간부들을 양성하고 채용하는 등 제대로 된 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군사적인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을 익힌 전문 군사 간부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점차 힘을 키우게 되었다.\n\n중화인민공화국은 2003년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문화했다. 삼개 대표사상이란 장쩌민의 정치적 유산들 가운데 하나로, 후임자들과 미래 세대를 위하여 중국의 발전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삼개 대표사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n\n#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n#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n#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n\n장쩌민의 뒤를 이어 총서기에 오린 후진타오는 2002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1인 독재를 추구하였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는 모두 집단지도체제를 중시하였으며 권력이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2000년대 중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지나치게 빠른 성장은 빈부격차, 경제 규모에 걸맞는 사회의식의 부재와 같은 부작용도 가지고 왔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후진타오 총서기은 '과학적인 발전'과 '조화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내세우며 국가의 안정을 닦고자 하였다.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 18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사임하였으며, 자신의 자리를 후임자인 시진핑에게 넘겼다. 시진핑 총서기은 집권 이후부터 강력한 반부패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전임자들과는 달리 집단지도체제를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재림이라는 평을 외신들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시진핑 총서기은 중국 국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켰으며, 201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헌법에 명기하였다. 이같은 일은 후진타오, 장쩌민 총서기도 임기 내에 하지 못한 전례없는 사건이었다. 또한 시진핑 총서기이 2022년에 10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점차 외신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n", "\n중국공산당의 조직은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극좌경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재건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공의 최고 기구는 적어도 5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중공은 전국대표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이 대회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당 헌장의 변경을 추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이어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당의 전국 대표대회 이전에 이미 정해지며, 전국 대회의 주목적은 앞으로의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당의 정책과 비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n\n하위의 당 기구들은 아래와 같다.\n\n*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n* 중앙정치국\n* 중앙서기처\n* 중앙군사위원회\n\n당 권력의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이다. 중앙 정치국 위원과 마찬가지로, 상임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은 전국대회와 함께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의 공식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새로운 권력 구조에 대한 내용이 간접적으로 발표된다. 상임위원회원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전에 비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2002년 16대 전국 대표대회 때 위원회의 인원은 9명으로 확대되었다.\n\n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어가는 정치 권력 중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 두 가지 주요기관이 더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다.\n", "최근들어 외국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은 일관된 이념이 없으며 그저 실용적으로 그때그때 가장 쓸모있는 정책들을 채택하여 사용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허나 중국공산당은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으나, 이같은 의견에 못마땅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에 '서양 세력들이 우리를 분열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또는 '서양의 국제적인 힘은 강한데 반면 중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공산당은 학교에 다니는 중국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을 들어붓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으며 스스로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하며 단순한 공산주의가 아닌, 중국만의 사회주의라고 강변하고 있다. 다만 학자들은 본디 중국에서는 절대적인 이념이 있으면 그에 따라 정책을 맞추어 가는 순서였으나, 실용성을 중시하였던 덩샤오핑의 등장과 함께 가장 실용적인 정책을 고른 후에 그 다음에 이념을 그에 맞추어 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이에 대하여 크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딱딱하고, 창의적이지 못하며 현실과 괴리된 소련의 정책들이 결국 소련의 붕괴를 불러왔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만일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안정화시키고 싶다면 이념을 상황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n공산주의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n\n=== 마르크스-레닌주의 ===\n중국공산당의 제1 이념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이다. 중국공산당에 의하면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인간 사회의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법칙을 밝힌다'라고 한다. 또한 '현재의 불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일면을 보여주며, 미래에 세계가 맞이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성을 증명하고 있다'라고도 한다. 또한 국영 신문인 인민일보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들여와 입맛대로 변형한 마오이즘은 마르크스 레닌 주의를 중국 특성에 맞추어 변형한 한 분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고, 중국공산당이 거의 국가와 동일시되는 중국의 특성에 따라 마오이즘은 단순히 중국공산당의 이념이 아니라 중국 전체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외국의 전문가들이 대부분 마오이즘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거부하고 생겨난 일종의 변종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반해, 중국공산당 스스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쩌민이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시했을 때에 이미 중국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포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n\n하지만 중국 학자들은 이에 '장쩌민은 그저 사회적인 장애물을 치워버렸을 뿐, 절대로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당을 강하게 만들었다. 가장 가까운 예만 들어도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며 함부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최종 목표'는 여전히 지상에 사회주의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고,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중국이 어느정도 사회주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여긴다. 다만 몇몇 당 내 극렬적인 공산주의 학자들은 지금의 중국이 지나치게 '자본주의화'되어 있다고 여기며 이같은 주장에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 뜻을 달리하는 조금 더 온건적인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일뿐'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은 여전히 정통 사회주의 국가라고 피력한다. 공산당의 역사관 역시 인민적이며 특히 세상이 밝아지기 전에는 귀족들보다 인민 반란군 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했다. 현재는 귀족들의 우월함을 반박하기 힘들어서 재평가도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n\n14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주의가 처음으로 중국 헌법에 공식적으로 명시되었다. 이 때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회주의 초기 단계 등과 같은 단어들이 처음으로 등장했으다. 덩샤오핑주의는 크게 국가 사회주의와 통제가 굳이 경직된 사회주의 체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독점물이 아니며, 시장경제는 부패한 자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아무런 특성이 없는 중성적인 요소라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당이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한 이념에만 집착하여 일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실로부터 기반한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4회 대표대회에서 장쩌민은 덩샤오핑 전 주석의 흑묘백묘론을 언급하며, 어떤 것이 자본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 묻기 전에 그 것의 실효성과 타당성에 대하여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연설에서 밝혔다. 이후 장쩌민이 자신의 정치 유산으로 삼개대표사상을 추가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중국에 맞춘 또다른 사상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평가했으나, 정작 장쩌민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후 자신의 사상은 그저 변화하는 세계의 경제 법칙에 맞춘, 조금 더 생산적인 방식의 마르크스주의라고 주장했다. 시진핑은 2018년에 '시진핑 사상'이라고 불리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19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에 추가했으며, 이 사상도 전임자들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중국에 맞추어 개조한 사상이라고 평가받는다.\n\n=== 경제 ===\n덩샤오핑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국가 통제 경제와 시장 경제의 차이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정의는 계획 경제가 아니다... 시장 경제도 계획 경제의 일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사회주의 아래에서도 충분히 잘 작동할 수 있다'라고 믿었다. 장쩌민도 덩샤오핑의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고, 중요한 것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그 정책이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고, 14회 대회에서는 외교관들에게 '시장의 힘이 국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발휘하여야만 한다'라고 발언도 하였다. 다만 공산당 내부의 보수적인 세력들 탓에 완전한 시장 경제를 실현하지는 못하였고, '공공' 경제의 충분한 발전이 있은 후에야만 시장 개인 경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n\n중국공산당은 세계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 두 세력으로 본다. 허나 유물사관을 신봉하는 공산당은 최종적으로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꺾고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급격한 세계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마르크스의 책을 그대로 인용하여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주도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세계화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산당에 의하면 세계화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며 중립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이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일부 도입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중국이 세계화와 국제 무역에 활발히 참여해야만 더 나은 미래를 맞을 것이라고 강변한다.\n", "중국공산당은 당원을 받아들일 때 능력이 검증된 사람만 뽑도록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중국공산당은 입당을 희망하는 자에 대해 3년 동안의 헌신과 직장에서의 능력, 타인과의 관계 등을 관찰하며 공산당 당원과 비공산당 당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입당 여부를 검토한다. 공산당원이 된 후에도 1년에 한 번씩 지난 1년 동안의 실적을 판단하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n\n입당 조건은 18세 이상이며, 노동에 종사하고 있어야 하지만, 2001년부터 자본가의 입당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입당 희망자는 두 명의 당원에게 추천을 받아야 한다. 추천 주체는 해당 지원자에게 당사(黨史)를 교육시켜야 한다. 교육이 완료된 지원자는 예비당원이 되며, 입당 예비 선서를 하게 된다. 예비당원이 되면 1년 동안 당 조직의 감독을 받게 되며, 당이 추진하는 교육 사업 및 활동에 참가해야 한다. 1년이 지나게 되면 지역당 조직은 예비당원이 몸담고 있는 직장을 직접 현지 조사하게 된다. 이 현지 조사에 합격하게 되면, 예비당원은 비로소 입당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지역당 조직은 입당원서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해당 예비당원에 대한 입당 비밀투표를 진행한다. 이 투표에서 입당이 허락되면 예비당원은 정식 입당 선서 과정을 거쳐서 정식당원이 된다. 개혁개방 이전 공산당 입당 심사는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성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졌으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직업 기술 및 학업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정식당원은 중국공산당 당헌에 따라 인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발전 촉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예비당원 단계에서 입당이 거절됐다면, 지원자는 1년의 심사를 다시 거치고 입당원서를 다시 제출해야 한다. 두 번 이상 불합격되면 예비당원 자격이 박탈되며, 처음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입당을 두 번 이상 실패했을 경우 영원히 당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례로 시진핑 총서기는 열 번의 입당 시도 끝에 정식당원이 될 수 있었다.\n\n대부분의 입당자는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이지만, 공산주의청년단에 포함이 되었다고 해서 입당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은 당내 관료주의가 당원의 수준을 하락시키고, 당과 군중을 괴리시키는 요소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당내에는 민주적인 토론 문화가 상당히 강하며, 당직을 맡을 당원을 뽑는 과정은 입당 절차보다 까다로운데, 특히 당원의 학습 능력과 내실을 매우 중시한다. 중국공산당은 무자격자가 당원이 되고, 당직을 맡으면 당이 쉽게 부패하여 붕괴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 있기에 입당 및 당직 임명에서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은 철저히 배제된다.\n\n입당 후에는 의무적으로 당비를 내고, 당이 주관하는 정치 행사에 참여해야 하며, 지속적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6개월 이상 이 과정을 무시할 경우 곧바로 출당 조치가 이루어진다. 또한, 중국공산당 당규에 따라 공산당원은 주식 투자를 비롯한 금융 활동, 미신을 믿는 행위, 사교 조직(교우회·학우회·향우회 등 모든 형태의 사적인 조직) 구성 및 참가 등을 할 수 없게 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종교를 믿을 수 없다. 게다가 특정 범죄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되며,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하지 않을 경우 당규에 따라 얼마든지 출당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n",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2002년 11월에 열린 제16대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 겸 비서장이 대표적인 정책 변화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는 \"인민의 민주 독재\" 상태이지만, 기업가와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인민들이 당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공산당 간부가 자본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n\n2008년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는 농촌경제 성장을 위한 토지 경작권의 매매허용(토지유동화정책), 통화와 재정정책 규제완화, 경기 부양을 위한 거시 경제정책마련 등의 변화가 있었다.\n", "\n탄허 스님에 따르면, 현시대의 조류는 금수운(禽獸運)이다.\n\n\n탄허스님은 특히 김지견 동국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불교의 말법시대를 논하며 유교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n\n\n.......'성인의 발자취는 점점 멀어지고 중생의 마음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미리 알고 말씀해 놓으셨어. 이것은 마치 유교의 소강절 선생이 황(皇), 제(帝), 왕(王), 패(覇), 이적(夷狄), 금수(禽獸)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과 흡사한데, 억세지사업(億世之事業), 만세지사업(萬世之事業), 천세지사업(千世之事業), 백세지사업(百世之事業) 다음에 '이적'이 오는데, 이는 중국 청나라 3백년을 말한 것으로 그 이후는 '금수'가 온다고 했어요'......\n\n\n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계신다면, 교림출판사, p.161~p.162)\n\n\n청나라 이후라면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를 말한다. \n\n요순(堯舜)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에서 점점 시대가 타락하여 이적운이 닥치고 마침내는 금수운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요순시대 때에는 또한, 성인의 가르침이 남아 있어서 은혜와 믿음, 자비 같은 미덕, 착함, 즉 인격으로 다스리지만, 그보다 못한 시대인 춘추전국시대부터는 선함이 아니라 기교에 불과한, 즉 '지식과 힘(智与霸)'으로 통치하게 되며, 그리고 그 후에는 그보다 더 못한 시대 이적운이, 그리고 마침내는 금수운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n\n사람들이 선을 행하지 않고 점점 악에 몰두하고 이기심과 욕망만을 추구하니 점점 살기가 힘들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싸우고, 잡아먹는 금수운이 도래한다고 소강절(邵康節) 선생이 예견을 한 것이다. \n\n(소강절 선생은 송나라 때 학자로서, 상수역학象數易學의 대가이다.) \n\n\n지금 2024년 중공은 댓글부대를 활용하여 한국에 여론전을 펼치고 있으며, 초한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악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n\n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와 장자라는 기라성 같은 성인과 현인을 낳았고 혜능대사(慧能大師)와 법장(法藏)스님 그리고 화엄학(華嚴學)과 선종(禪宗) 등을 통해 인류 정신문명에 크나큰 공헌을 한 '중화'가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하고 무너져버렸는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n\n한때는 동방의 문명의 표준이었고 그토록 세인들에게 흠숭과 존경을 받던 중화, 유불도라는 탁월한 정신문화, 도덕종교를 일으킨 그 중화가 현대에 이르러 이토록 참담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n", "\n\n\n\n\n대수\n\n역대 공식 지도자\n\n직함\n\n임기\n\n비고\n\n\n\n 1 \n\n 천두슈 \n\n 중앙국 서기 \n\n 1921년 7월 1일 ~ 1922년 7월 16일\n\n\n\n\n\n 2 \n\n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n\n 1922년 7월 16일 ~ 1923년 6월 12일\n\n\n\n\n\n 3 \n\n 1923년 6월 12일 ~ 1925년 1월 11일\n\n\n\n\n\n 4 \n\n 1925년 1월 11일 ~ 1927년 4월 27일\n\n\n\n\n\n 5 \n\n 중앙위원회 총서기 \n\n 1927년 4월 27일 ~ 1927년 8월 7일\n\n4.12 사건과 난창 폭동 실패로 실각\n\n\n\n 임시 \n\n 취추바이 \n\n 임시 중앙위원회 총서기 \n\n 1927년 8월 7일 ~ 1928년 6월 18일\n\n \n\n\n\n 6 \n\n 샹중파 \n\n 중앙위원회 총서기 \n\n1928년 6월 18일 ~ 1934년 1월 15일\n\n 실권은 리리산→왕밍 등에게\n\n\n\n 임시 \n\n 왕밍 \n\n 중앙위원회 총서기 대리 \n\n 1931년 6월 ~ 1931년 9월\n\n\n\n\n\n 7 \n\n보구\n\n 중앙위원회 총서기 \n\n1934년 1월 15일~ 1935년 1월 15일 \n\n\n\n\n\n 8 \n\n 장원톈 \n\n 1935년 1월 15일 ~ 1945년 4월 23일\n\n 실권자는 마오쩌둥\n\n\n\n 9 \n\n 마오쩌둥 \n\n 중앙위원회 주석 \n\n 1945년 6월 19일 ~ 1956년 9월 28일\n\n\n\n\n\n 10 \n\n 1956년 9월 28일 ~ 1969년 4월 28일\n\n\n\n\n\n 11 \n\n 1969년 4월 28일 ~ 1973년 8월 30일\n\n\n\n\n\n 12 \n\n 1973년 8월 30일 ~ 1976년 9월 9일\n\n 사망\n\n\n\n 임시 \n\n 화궈펑 \n\n 1976년 10월 7일 ~ 1977년 7월 16일\n\n 승계\n\n\n\n 13 \n\n 1977년 7월 16일 ~ 1977년 8월 19일\n\n\n\n\n\n 14 \n\n 1977년 8월 19일 ~ 1981년 6월 27일\n\n\n\n\n\n 15 \n\n 후야오방 \n\n 1981년 6월 27일 ~ 1982년 9월 11일\n\n실권자는 덩샤오핑\n\n\n\n 16 \n\n 중앙위원회 총서기 \n\n 1982년 9월 12일 ~ 1987년 1월 15일\n\n다당제 주장으로 실각\n\n\n\n 임시 \n\n 자오쯔양 \n\n 1987년 1월 16일 ~ 1987년 11월 2일\n\n실권자는 덩샤오핑\n\n\n\n 17 \n\n 1987년 11월 2일 ~ 1989년 6월 23일\n\n천안문 항쟁 동조로 실각\n\n\n\n 18 \n\n 장쩌민 \n\n 1989년 6월 23일 ~ 1992년 10월 19일\n\n 실권자는 덩샤오핑\n\n\n\n 19 \n\n 1992년 10월 19일 ~ 1997년 9월 19일\n\n\n\n 20 \n\n 1997년 9월 19일 ~ 2002년 11월 15일\n\n\n\n\n\n 21 \n\n 후진타오 \n\n 2002년 11월 15일 ~ 2007년 10월 22일\n\n\n\n\n\n 22 \n\n 2007년 10월 22일 ~ 2012년 11월 15일\n\n\n\n\n\n 23 \n\n 시진핑 \n\n 2012년 11월 15일 ~ 2017년 10월 25일\n\n\n\n\n\n 24 \n\n 2017년 10월 25일 ~ 2022년 10월 23일 \n\n \n\n\n\n 25 \n\n 2022년 10월 23일 ~ \n\n \n\n\n", "\n*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n* 마오쩌둥\n* 중화소비에트공화국\n* 중국공산당 혁명 근거지\n* 인민영웅기념비\n* 중앙인민방송\n* 인민일보\n* 공산당\n* 조선 공산당\n*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n* 러시아 연방 공산당\n", "=== 총선 ===\n\n\n\n\n\n년도\n\n의석 수\n\n득표수\n\n득표율\n\n\n\n1982-1983|\n\n\n알려지지 않음\n\n\n\n1987-1988\n\n\n\n\n\n1993-1994\n\n\n\n\n\n1997-1998\n\n\n\n\n\n2002-2003\n\n\n\n\n\n2007-2008\n\n\n\n\n\n2012-2013\n\n\n\n\n\n2017-2018\n\n\n\n\n", "\n\n", "* 중국공산당 뉴스--인민넷\n* 중국공산당 공식 홈페이지 \n* 신화통신 중국공산당 관련 홈페이지\n* 인민일보 (중국공산당 공식 기관지)\n* 중국공산당의 한 자녀 정책\n\n\n\n\n\n\n\n \n분류:1921년 설립된 정당\n분류:공산주의 정당\n분류:사회주의 정당\n분류:코민테른 지부\n분류:역사수정주의\n분류:중화민국의 역사\n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n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n분류:중국의 역사\n분류:중국의 공산주의 정당\n분류:중국의 공산주의\n분류:국수주의\n분류:일당제 정당" ]
파일:Stalin birthday2.jpg|섬네일|이오시프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는 중국공산당 당원집회(1949년 12월 18일) 파일:Marx et Engels à Shanghai.jpg|섬네일|중화인민공화국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석상 (상하이 소재) '''중국공산당'''(,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 인도 인민당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정당이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현재까지 일당제를 실시, 유지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1919년 공산주의 조직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파시즘, 인민민주주의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으며 천두슈와 마오쩌둥, 리다자오, 리다, 마오둔, 덩중샤, 장궈타오, 리한쥔, 위슈쑹 등이 초기 구성원이었다.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천두슈 등이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0년 10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등이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1920년 11월, 창사에서 마오쩌둥 등이 창사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고, 1921년 3월, 광저우에서 천궁보 등이 광저우 공산주의 소조를 설립하였으며,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회로부터 공산당 당원의 골간을 이뤘다. 그 이후 중국국민당과 대립 노선을 분명히 해가고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파업을 주도해가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 옌안 공산 혁명 근거지 시기를 거쳐 1949년까지 중국국민당에 맞서 도시 노동자, 농민, 하급 지식인, 학생 등을 대거 마오쩌둥 진영에 유입시켰고, 스탈린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인민민주독재를 여러 방면으로 파급해갔으며, 두 번째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싸워 승리하며 중국 대륙 본토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상인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정치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합리적인 비판과 민주적인 토론을 통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유지해 나간다는 사상이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기구는 5년마다 열리는 전국대표회의로, 전국대표회의가 개회되지 않았을 때에는 중앙위원회가 최고 결정권을 가진다. 중국공산당의 당수는 중국의 최고직인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국의 군사력 자체를 총괄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국가 주석 등의 자리를 모두 역임하게 되며, 결국 중국공산당의 당수가 곧 중국의 최고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2012년 18대 중앙위원회에서 선출된 시진핑이다. 중국공산당은 공산당 주도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 혁명 노선을 문화 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한 후,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목표가 된 계급 투쟁 노선의 종결을 공식 선포하고, 개혁과 개방 노선을 취해오고 있으며,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개혁과 개방 공산당 영도와 경제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정강 정책을 확립하면서, 1992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중국공산당은 2014년 기준으로 86,700,000명의 당원을 거느릴 정도로 매우 거대한 규모의 정당이다. 중국은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사례로 베이징 대학 대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이유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공산당 당원이 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를 통제하는 독재적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지닌 이 정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을 계속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현대화 이후 상대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 특히 경제적인 영역에서 중국공산당 이외의 인물과 조직의 공식적인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해안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 및 그 산하 위원회가 모든 중요한 정부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에 대해 정치적인 지침을 내리고 있으므로 비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의 규율에 도전하는 자치기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정부 조직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국공산당의 통제력은 굉장히 강력하며 노동조합도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저학력자도 많았으나 최근에는 전문대졸 이상 고학력자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개개인이 민중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인도의 귀족들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초기에는 대중과 대단한 차이가 없어서 대륙의 중국인들은 비공산당 인물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 중화민국 === * 1920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지도로 중국공산당 창당 조직 설립. * 1920년 10월: 중화민국 베이징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 * 1920년 10-11월: 중화민국 후난성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 * 1921년 3월: 중화민국 광둥성에서 공산당 조직 설립. * 1921년 7월 1일: 제1차 공산당 당대회 개최. 공식 창당. * 1922년 7월: 레닌의 코민테른(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 정식가입. * 1924년-1927년: 제1차 국공 합작. * 1927년: 국공 합작 결렬, 국공 내전 . *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설립. * 1934년: 대장정, 옌안 혁명 근거지 시기. * 1937년-1945년 : 옌안 본거지 시기. 제2차 국공 합작으로 중일 전쟁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참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 시작. * 1949년 2월: 베이징 함락. * 1949년 3월: 난징 함락. === 중화인민공화국 === *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 1950년 10월: 한국 전쟁 개입. * 1950년-1951년: 인민민주독재 개시와 반혁명분자 재판. * 1951년-1952년: 마오이즘 사상개조운동과 삼반오반운동. * 1955년-1957년: 반우파운동. * 1958년: 대약진 운동. * 1966년-1976년: 문화 대혁명. *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화궈펑 체제. * 1978년: 덩샤오핑 개혁개방, 4대 현대화. * 1989년: 톈안먼 사건 발발. * 1992년: 남순강화와 중국 특색 사회주의 * 1997년: 덩샤오핑 사망, 홍콩 반환 * 2002년: 자본가들의 입당을 허용. * 2005년: 반분열국가법 통과. * 2010년: 중국의 총GDP가 2위로 상승하며 일본을 추월. * 2013년: 시진핑 집권. * 2015년: 국공내전이래 첫 양안회담. * 2018년: 시진핑 재집권, 3연임제한 조항 폐지. *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결렬, 코로나19 창궐. *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 * 2021년: 창당 100주년을 맞이함. === 창당 ===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1919년 일어난 5·4 운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급진적인 중국 엘리트층이 마르크스주의나 무정부주의와 같은 사회적 이념들을 접하며 큰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활약하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널리 펼치기 시작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공산당을 만들자는 의견이 강해지게 되었다.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가 처음으로 혁명 이론과 공산주의의 세계화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으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또다른 주요 지식인이었던 천두슈와는 다르게 중화민국 건국에 불참하지는 않았다. 다만 리다자오와 천두슈 둘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세기의 전환점이며, 이를 계기로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동일했다. 초기 중국공산당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전위당론에 입각하여 창당되었다.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이 당시에는 오직 50여 명의 당원들만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며 팽창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본디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되었으나, 회의 중간인 7월 30일에 프랑스 경찰의 탄압으로 인하여 상하이에서 쫓겨나 31일에는 저장성 난호 위에 떠있는 배 위에서 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때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의 탄압으로 워낙 혼란스러웠던 터라 리다자오나 천두슈도 이 회의에 참여치 못하였고, 오직 12명의 대표들만 모여 회의를 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회의 마지막 날이었던 31일, 대표들은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천두슈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당시 쑨원의 지휘를 받고 있던 국민당에 가입하였는데, 이를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공산당은 국민당의 좌익을 맡았으며, 우익 세력들과 함께 권력을 다투었다. 쑨원이 1925년 3월에 세상을 떠나자, 우익 세력의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그의 자리를 맡았다. 장제스는 성공적으로 제1차 북벌을 끝낸 이후 칼 끝을 몇 만명에 달하는 공산당 세력에게 겨누었다. 그는 우한의 국민당 중앙 간부들의 만류도 뿌리친 후 군대를 이끌고 공산당이 장악했던 상하이로 행군했다. 공산당은 장제스를 환영했으나, 장제스는 본심을 드러내고 5,000여 명의 공산당원들과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를 4·12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장제스는 우한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공산당 장군에 가로막혔다. 장제스와 그의 동맹들은 직후 중국 전역을 돌며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베이징에서는 군벌 장쭤린의 지시 하에 19명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암살당했으며 장사에서는 수 백명에 달하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총살당했다. 그해 5월에 이르자 몇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살해당했으며 중국공산당은 최종적으로 25,000여 명의 당원들 중 15,000여 명의 당원들을 잃으며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중국공산당은 이후에도 우한의 중화민국 정부를 계속 지지했으나, 중화민국은 1927년 7월에 모든 공산당 당적 인사들을 정부 요인 명단에서 제거하였다. 공산당은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군대인 '홍군'을 창군하며 이에 대응했다. 홍군은 국민당이 장악한 중화민국군에 대항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1927년 8월 1일에는 주더 장군이 이끄는 홍군이 난창을 공격하며 난창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막대한 공세를 퍼붓는 중화민국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공산군은 산터우로 후퇴한 이후 푸젠성 임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이 때 마오쩌둥이 홍군의 지도자로 등장했고, 장시성 일대에서 추수 봉기를 일으키며 농민들이 그에게 호응하여 중화민국에 맞서 싸워주기를 바랐다. 그는 9월에 중화민국의 도시들을 삼면에서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으나, 중화민국과의 압도적인 전력 차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결국 패배를 시인할수 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후 1,000여 명의 패잔병들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 동쪽으로 행군해갔다. ===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 중국공산당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은 공산당 조직 자체를 뒤흔들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민주집중제를 채택하였으며 정치국을 설립하여 각기 다른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중앙에 권력이 집중된 형태로 바뀌었다. 중앙 정치국은 당의 모든 인사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분열과 내분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천두슈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자 1929년 리리싼이 일시적으로 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리리싼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고 공산당은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중국공산당의 상황을 보다 못한 코민테른이 개입하여 리리싼을 쫓아낸 이후 마오쩌둥을 정치국 위원과 비공식적인 지도자로 세웠다. 당의 전 대표였던 저우언라이와 장원톈은 마오쩌둥을 옆에서 보좌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홍군도 이 때 재구성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중앙집중제 형태로 개편되어 마오쩌둥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군대로 바뀌었다,허나 국민당의 5차 공산당토벌로 대장정의 길을 걷고 1년을 걸어서 산시성에서 독립적인 형태로 재등장한다. 2차 중일 전쟁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손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2차 국공합작이 만들어졌고,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함께 침략군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처지가 된 것이다. 2차 국공합작은 공식적으로는 1945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실질적인 협력은 이미 1940년에 끝났다. 이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뿌리깊은 불화 때문이었기에 서로를 믿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공산당은 전쟁을 당세를 늘리고 나중에 국민당에 대항할 세력을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국민당도 공산당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1939년부터는 점차 공산당의 팽창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이때문에 종종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공공의 적인 일본이 존재하였던 탓에 이 충돌들은 크게 번지지 않고 작은 규모에서 일단락되었다. 1943년부터는 국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지속적으로 확장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1945년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전쟁은 본격적인 국공 내전상태로 접어들었다. 중국 내전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일본이 망한 1945년 8월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평화 협상이 종결된 1946년 6월까지이다. 1945년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에는 국민당의 중화민국 군대가 공산당보다 3배나 많은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훨씬 더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협조 하에 중화민국은 대부분의 지역들을 큰 저항없이 장악할 수 있었으나, 이 점령지들에서 중화민국은 부패한 관료들과 무력 행사로 인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국민당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장악한 시골 지역들을 탈환하는데에 처참히 실패하였고, 공산당은 점차 소련의 원조를 받아 만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1946년 7월에서 1947년 6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국민당은 중국 대륙 대부분의 도시를 장악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허나 이는 빈껍데기일 뿐이었는데, 이는 국민당 내부의 고질적인 불화와 장제스의 독재적인 면모로 인하여 국민당은 점차 내부에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47년 7월에서부터 1948년 8월까지로, 이 시기에 공산당이 점차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였으며 중원을 장악하고 북부 지역을 평정하였으며 북동부 지역도 거의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편 국민당은 크게 약화되었고 대략 3백만명에 달하는 군사들을 잃으며 큰 타격을 입었을 뿐더러, 부패와 무능으로 사람들의 지지도 얻는데 실패하며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단계는 1948년 9월에서 1949년 12월까지로, 이 시기에 중국 본토가 완전히 공산당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국민당 주도의 중화민국은 대만으로 국부천대하며 세력이 크게 쪼그라들었다. 현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시진핑 === 현대 ===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정식 선포했다. 그해 말이 되자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확실히 굳혔고,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중국공산당을 이끌어간 마오쩌둥, 린뱌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과 같은 핵심 인물들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러한 풍조는 단순히 이들에만 그치지 않았고, 중국의 전반적인 사회적, 정치적 지형에서 개인적인 연과 친분이 매우 중요해지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사상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지속적인 혁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반혁명분자와 지주계급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문화 대혁명을 일으키며 수 백만명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참사를 저질렀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 자리를 두고 화궈펑과 덩샤오핑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덩샤오핑이 결국 화궈펑을 누르고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고, 1978년에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확고한 중국의 1인자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등과 같은 개혁파의 도움에 힘입어 개방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개념을 도입하며 중국공산당을 여타 공산당과 소련과 차별화하려 노력하였다. 덩샤오핑의 통치기에 중국은 시장을 개방했는데, 이는 마오쩌둥과는 달리 자본주의화되지 않고서도 시장을 개방하여 자유로운 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은 덩샤오핑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였다. 허나 이같은 개방 조치는 마오쩌둥을 신봉하던 보수세력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에게까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는 덩샤오핑의 개혁 조치가 만족할 만큼 개방되었거나 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같은 불만을 결국 1988년 천안문 사태로 폭발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무력으로 깔아뭉개며 중국의 민주화 움직임을 압살하였으나 다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큰 성취를 이루며 경제 대국으로의 길을 열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사회적 시장 경제의 개념이 등장하였고, 1997년에는 덩샤오핑주의가 아예 중국의 헌법에 못박혔다. 중국공산당의 장쩌민 주석은 1990년대에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으며, 덩샤오핑의 정책들 대부분을 계승하였다. 덩샤오핑 이전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대부분 국가 수립 이전,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고 싸웠던 급진적인 혁명가들이었던 데에 반해, 장쩌민 주석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공산당 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안정된 사회 속에서 제대로 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유능한 정치인들이었으며, 경제적, 사회적 이 두 분야 모두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은 점차 규칙과 법에 기반한 체제를 이룩하기 시작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마구잡이로 간부들을 승진시키거나 좌천하는 악습에서 벗어나 능력, 실무, 학력 등에 기반하여 간부들을 양성하고 채용하는 등 제대로 된 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군사적인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을 익힌 전문 군사 간부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점차 힘을 키우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2003년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문화했다. 삼개 대표사상이란 장쩌민의 정치적 유산들 가운데 하나로, 후임자들과 미래 세대를 위하여 중국의 발전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삼개 대표사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항상 중국의 선진 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社会生产力的发展要求;) # 항상 중국의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先进文化的前进方向;) # 항상 중국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始终代表中国最广大人民的根本利益.) 장쩌민의 뒤를 이어 총서기에 오린 후진타오는 2002년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1인 독재를 추구하였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는 모두 집단지도체제를 중시하였으며 권력이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2000년대 중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지나치게 빠른 성장은 빈부격차, 경제 규모에 걸맞는 사회의식의 부재와 같은 부작용도 가지고 왔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후진타오 총서기은 '과학적인 발전'과 '조화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내세우며 국가의 안정을 닦고자 하였다.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 18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사임하였으며, 자신의 자리를 후임자인 시진핑에게 넘겼다. 시진핑 총서기은 집권 이후부터 강력한 반부패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전임자들과는 달리 집단지도체제를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재림이라는 평을 외신들로부터 듣기도 하였다. 시진핑 총서기은 중국 국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켰으며, 2017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헌법에 명기하였다. 이같은 일은 후진타오, 장쩌민 총서기도 임기 내에 하지 못한 전례없는 사건이었다. 또한 시진핑 총서기이 2022년에 10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점차 외신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극좌경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재건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공의 최고 기구는 적어도 5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중공은 전국대표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이 대회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당 헌장의 변경을 추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이어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당의 전국 대표대회 이전에 이미 정해지며, 전국 대회의 주목적은 앞으로의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당의 정책과 비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하위의 당 기구들은 아래와 같다. *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 중앙정치국 * 중앙서기처 * 중앙군사위원회 당 권력의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이다. 중앙 정치국 위원과 마찬가지로, 상임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은 전국대회와 함께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의 공식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새로운 권력 구조에 대한 내용이 간접적으로 발표된다. 상임위원회원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전에 비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2002년 16대 전국 대표대회 때 위원회의 인원은 9명으로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어가는 정치 권력 중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 두 가지 주요기관이 더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최근들어 외국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은 일관된 이념이 없으며 그저 실용적으로 그때그때 가장 쓸모있는 정책들을 채택하여 사용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허나 중국공산당은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으나, 이같은 의견에 못마땅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후진타오 총서기은 2012년에 '서양 세력들이 우리를 분열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또는 '서양의 국제적인 힘은 강한데 반면 중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공산당은 학교에 다니는 중국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을 들어붓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쏟고 있으며 스스로를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고 정의하며 단순한 공산주의가 아닌, 중국만의 사회주의라고 강변하고 있다. 다만 학자들은 본디 중국에서는 절대적인 이념이 있으면 그에 따라 정책을 맞추어 가는 순서였으나, 실용성을 중시하였던 덩샤오핑의 등장과 함께 가장 실용적인 정책을 고른 후에 그 다음에 이념을 그에 맞추어 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이에 대하여 크게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딱딱하고, 창의적이지 못하며 현실과 괴리된 소련의 정책들이 결국 소련의 붕괴를 불러왔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만일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안정화시키고 싶다면 이념을 상황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 === 마르크스-레닌주의 === 중국공산당의 제1 이념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이다. 중국공산당에 의하면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인간 사회의 역사 발전의 보편적인 법칙을 밝힌다'라고 한다. 또한 '현재의 불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일면을 보여주며, 미래에 세계가 맞이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성을 증명하고 있다'라고도 한다. 또한 국영 신문인 인민일보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들여와 입맛대로 변형한 마오이즘은 마르크스 레닌 주의를 중국 특성에 맞추어 변형한 한 분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고, 중국공산당이 거의 국가와 동일시되는 중국의 특성에 따라 마오이즘은 단순히 중국공산당의 이념이 아니라 중국 전체의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외국의 전문가들이 대부분 마오이즘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거부하고 생겨난 일종의 변종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반해, 중국공산당 스스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쩌민이 삼개대표사상을 헌법에 명시했을 때에 이미 중국이 정통 마르크스 주의를 포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학자들은 이에 '장쩌민은 그저 사회적인 장애물을 치워버렸을 뿐, 절대로 정통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당을 강하게 만들었다. 가장 가까운 예만 들어도 사회주의 시장 경제가 있지 않은가?'라고 반박하며 함부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최종 목표'는 여전히 지상에 사회주의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고,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중국이 어느정도 사회주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여긴다. 다만 몇몇 당 내 극렬적인 공산주의 학자들은 지금의 중국이 지나치게 '자본주의화'되어 있다고 여기며 이같은 주장에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 뜻을 달리하는 조금 더 온건적인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일뿐'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은 여전히 정통 사회주의 국가라고 피력한다. 공산당의 역사관 역시 인민적이며 특히 세상이 밝아지기 전에는 귀족들보다 인민 반란군 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했다. 현재는 귀족들의 우월함을 반박하기 힘들어서 재평가도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14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주의가 처음으로 중국 헌법에 공식적으로 명시되었다. 이 때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회주의 초기 단계 등과 같은 단어들이 처음으로 등장했으다. 덩샤오핑주의는 크게 국가 사회주의와 통제가 굳이 경직된 사회주의 체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독점물이 아니며, 시장경제는 부패한 자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아무런 특성이 없는 중성적인 요소라는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당이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유동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한 이념에만 집착하여 일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실로부터 기반한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4회 대표대회에서 장쩌민은 덩샤오핑 전 주석의 흑묘백묘론을 언급하며, 어떤 것이 자본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 묻기 전에 그 것의 실효성과 타당성에 대하여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연설에서 밝혔다. 이후 장쩌민이 자신의 정치 유산으로 삼개대표사상을 추가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중국에 맞춘 또다른 사상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평가했으나, 정작 장쩌민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후 자신의 사상은 그저 변화하는 세계의 경제 법칙에 맞춘, 조금 더 생산적인 방식의 마르크스주의라고 주장했다. 시진핑은 2018년에 '시진핑 사상'이라고 불리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19회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에 추가했으며, 이 사상도 전임자들과 비슷하게 마르크스 주의를 중국에 맞추어 개조한 사상이라고 평가받는다. === 경제 ===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국가 통제 경제와 시장 경제의 차이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정의는 계획 경제가 아니다... 시장 경제도 계획 경제의 일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사회주의 아래에서도 충분히 잘 작동할 수 있다'라고 믿었다. 장쩌민도 덩샤오핑의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고, 중요한 것은 이념의 차이가 아니라 그 정책이 실효성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고, 14회 대회에서는 외교관들에게 '시장의 힘이 국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발휘하여야만 한다'라고 발언도 하였다. 다만 공산당 내부의 보수적인 세력들 탓에 완전한 시장 경제를 실현하지는 못하였고, '공공' 경제의 충분한 발전이 있은 후에야만 시장 개인 경제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공산당은 세계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 두 세력으로 본다. 허나 유물사관을 신봉하는 공산당은 최종적으로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꺾고 승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급격한 세계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마르크스의 책을 그대로 인용하여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주도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세계화 자체가 자본주의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산당에 의하면 세계화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며 중립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이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일부 도입하여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중국이 세계화와 국제 무역에 활발히 참여해야만 더 나은 미래를 맞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중국공산당은 당원을 받아들일 때 능력이 검증된 사람만 뽑도록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중국공산당은 입당을 희망하는 자에 대해 3년 동안의 헌신과 직장에서의 능력, 타인과의 관계 등을 관찰하며 공산당 당원과 비공산당 당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입당 여부를 검토한다. 공산당원이 된 후에도 1년에 한 번씩 지난 1년 동안의 실적을 판단하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 입당 조건은 18세 이상이며, 노동에 종사하고 있어야 하지만, 2001년부터 자본가의 입당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입당 희망자는 두 명의 당원에게 추천을 받아야 한다. 추천 주체는 해당 지원자에게 당사(黨史)를 교육시켜야 한다. 교육이 완료된 지원자는 예비당원이 되며, 입당 예비 선서를 하게 된다. 예비당원이 되면 1년 동안 당 조직의 감독을 받게 되며, 당이 추진하는 교육 사업 및 활동에 참가해야 한다. 1년이 지나게 되면 지역당 조직은 예비당원이 몸담고 있는 직장을 직접 현지 조사하게 된다. 이 현지 조사에 합격하게 되면, 예비당원은 비로소 입당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지역당 조직은 입당원서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해당 예비당원에 대한 입당 비밀투표를 진행한다. 이 투표에서 입당이 허락되면 예비당원은 정식 입당 선서 과정을 거쳐서 정식당원이 된다. 개혁개방 이전 공산당 입당 심사는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성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졌으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직업 기술 및 학업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정식당원은 중국공산당 당헌에 따라 인민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발전 촉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예비당원 단계에서 입당이 거절됐다면, 지원자는 1년의 심사를 다시 거치고 입당원서를 다시 제출해야 한다. 두 번 이상 불합격되면 예비당원 자격이 박탈되며, 처음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입당을 두 번 이상 실패했을 경우 영원히 당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례로 시진핑 총서기는 열 번의 입당 시도 끝에 정식당원이 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입당자는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이지만, 공산주의청년단에 포함이 되었다고 해서 입당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공산당은 당내 관료주의가 당원의 수준을 하락시키고, 당과 군중을 괴리시키는 요소라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당내에는 민주적인 토론 문화가 상당히 강하며, 당직을 맡을 당원을 뽑는 과정은 입당 절차보다 까다로운데, 특히 당원의 학습 능력과 내실을 매우 중시한다. 중국공산당은 무자격자가 당원이 되고, 당직을 맡으면 당이 쉽게 부패하여 붕괴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 있기에 입당 및 당직 임명에서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은 철저히 배제된다. 입당 후에는 의무적으로 당비를 내고, 당이 주관하는 정치 행사에 참여해야 하며, 지속적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6개월 이상 이 과정을 무시할 경우 곧바로 출당 조치가 이루어진다. 또한, 중국공산당 당규에 따라 공산당원은 주식 투자를 비롯한 금융 활동, 미신을 믿는 행위, 사교 조직(교우회·학우회·향우회 등 모든 형태의 사적인 조직) 구성 및 참가 등을 할 수 없게 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종교를 믿을 수 없다. 게다가 특정 범죄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되며,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하지 않을 경우 당규에 따라 얼마든지 출당 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2002년 11월에 열린 제16대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총서기 겸 비서장이 대표적인 정책 변화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는 "인민의 민주 독재" 상태이지만, 기업가와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인민들이 당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공산당 간부가 자본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2008년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는 농촌경제 성장을 위한 토지 경작권의 매매허용(토지유동화정책), 통화와 재정정책 규제완화, 경기 부양을 위한 거시 경제정책마련 등의 변화가 있었다. 탄허 스님에 따르면, 현시대의 조류는 금수운(禽獸運)이다. 탄허스님은 특히 김지견 동국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불교의 말법시대를 논하며 유교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성인의 발자취는 점점 멀어지고 중생의 마음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미리 알고 말씀해 놓으셨어. 이것은 마치 유교의 소강절 선생이 황(皇), 제(帝), 왕(王), 패(覇), 이적(夷狄), 금수(禽獸)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과 흡사한데, 억세지사업(億世之事業), 만세지사업(萬世之事業), 천세지사업(千世之事業), 백세지사업(百世之事業) 다음에 '이적'이 오는데, 이는 중국 청나라 3백년을 말한 것으로 그 이후는 '금수'가 온다고 했어요'...... 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계신다면, 교림출판사, p.161~p.162) 청나라 이후라면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를 말한다. 요순(堯舜)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에서 점점 시대가 타락하여 이적운이 닥치고 마침내는 금수운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요순시대 때에는 또한, 성인의 가르침이 남아 있어서 은혜와 믿음, 자비 같은 미덕, 착함, 즉 인격으로 다스리지만, 그보다 못한 시대인 춘추전국시대부터는 선함이 아니라 기교에 불과한, 즉 '지식과 힘(智与霸)'으로 통치하게 되며, 그리고 그 후에는 그보다 더 못한 시대 이적운이, 그리고 마침내는 금수운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선을 행하지 않고 점점 악에 몰두하고 이기심과 욕망만을 추구하니 점점 살기가 힘들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싸우고, 잡아먹는 금수운이 도래한다고 소강절(邵康節) 선생이 예견을 한 것이다. (소강절 선생은 송나라 때 학자로서, 상수역학象數易學의 대가이다.) 지금 2024년 중공은 댓글부대를 활용하여 한국에 여론전을 펼치고 있으며, 초한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악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와 장자라는 기라성 같은 성인과 현인을 낳았고 혜능대사(慧能大師)와 법장(法藏)스님 그리고 화엄학(華嚴學)과 선종(禪宗) 등을 통해 인류 정신문명에 크나큰 공헌을 한 '중화'가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하고 무너져버렸는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한때는 동방의 문명의 표준이었고 그토록 세인들에게 흠숭과 존경을 받던 중화, 유불도라는 탁월한 정신문화, 도덕종교를 일으킨 그 중화가 현대에 이르러 이토록 참담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대수 역대 공식 지도자 직함 임기 비고 1 천두슈 중앙국 서기 1921년 7월 1일 ~ 1922년 7월 16일 2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1922년 7월 16일 ~ 1923년 6월 12일 3 1923년 6월 12일 ~ 1925년 1월 11일 4 1925년 1월 11일 ~ 1927년 4월 27일 5 중앙위원회 총서기 1927년 4월 27일 ~ 1927년 8월 7일 4.12 사건과 난창 폭동 실패로 실각 임시 취추바이 임시 중앙위원회 총서기 1927년 8월 7일 ~ 1928년 6월 18일 6 샹중파 중앙위원회 총서기 1928년 6월 18일 ~ 1934년 1월 15일 실권은 리리산→왕밍 등에게 임시 왕밍 중앙위원회 총서기 대리 1931년 6월 ~ 1931년 9월 7 보구 중앙위원회 총서기 1934년 1월 15일~ 1935년 1월 15일 8 장원톈 1935년 1월 15일 ~ 1945년 4월 23일 실권자는 마오쩌둥 9 마오쩌둥 중앙위원회 주석 1945년 6월 19일 ~ 1956년 9월 28일 10 1956년 9월 28일 ~ 1969년 4월 28일 11 1969년 4월 28일 ~ 1973년 8월 30일 12 1973년 8월 30일 ~ 1976년 9월 9일 사망 임시 화궈펑 1976년 10월 7일 ~ 1977년 7월 16일 승계 13 1977년 7월 16일 ~ 1977년 8월 19일 14 1977년 8월 19일 ~ 1981년 6월 27일 15 후야오방 1981년 6월 27일 ~ 1982년 9월 11일 실권자는 덩샤오핑 16 중앙위원회 총서기 1982년 9월 12일 ~ 1987년 1월 15일 다당제 주장으로 실각 임시 자오쯔양 1987년 1월 16일 ~ 1987년 11월 2일 실권자는 덩샤오핑 17 1987년 11월 2일 ~ 1989년 6월 23일 천안문 항쟁 동조로 실각 18 장쩌민 1989년 6월 23일 ~ 1992년 10월 19일 실권자는 덩샤오핑 19 1992년 10월 19일 ~ 1997년 9월 19일 20 1997년 9월 19일 ~ 2002년 11월 15일 21 후진타오 2002년 11월 15일 ~ 2007년 10월 22일 22 2007년 10월 22일 ~ 2012년 11월 15일 23 시진핑 2012년 11월 15일 ~ 2017년 10월 25일 24 2017년 10월 25일 ~ 2022년 10월 23일 25 2022년 10월 23일 ~ *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 마오쩌둥 * 중화소비에트공화국 * 중국공산당 혁명 근거지 * 인민영웅기념비 * 중앙인민방송 * 인민일보 * 공산당 * 조선 공산당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 러시아 연방 공산당 === 총선 === 년도 의석 수 득표수 득표율 1982-1983| 알려지지 않음 1987-1988 1993-1994 1997-1998 2002-2003 2007-2008 2012-2013 2017-2018 * 중국공산당 뉴스--인민넷 * 중국공산당 공식 홈페이지 * 신화통신 중국공산당 관련 홈페이지 * 인민일보 (중국공산당 공식 기관지) * 중국공산당의 한 자녀 정책 분류:1921년 설립된 정당 분류:공산주의 정당 분류:사회주의 정당 분류:코민테른 지부 분류:역사수정주의 분류:중화민국의 역사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분류:중국의 역사 분류:중국의 공산주의 정당 분류:중국의 공산주의 분류:국수주의 분류:일당제 정당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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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 )은 다음을 가리킨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이 수교협정한 이후 한국에는 화성돈(華盛頓)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n", "*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 1799)은 미국 초대 대통령이다.\n*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 ~ 1915)은 미국의 교육자이다.\n* 해럴드 워싱턴(Harold Washington, 1922 ~ 1987)의 미국의 정치인이다.\n* 덴절 워싱턴: 미국의 영화 배우 겸 감독\n* 워싱턴 어빙: 미국의 수필가·소설가\n* 조지 워싱턴 카버: 미국의 농학자\n* 코너 워싱턴: 퀸스 파크 레인저스와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축구 선수\n* 케리 워싱턴: 미국의 배우\n* 메건 워싱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n* 론 워싱턴: 미국의 야구인\n* 아이제이아 워싱턴: 미국의 배우\n* 마사 워싱턴: 초대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아내\n* 디나 워싱턴: 미국의 가수\n* 디절 워싱턴: 미국의 게이 포르노 배우\n", "* 워싱턴 D.C.(Washington D.C.): 미국의 수도.\n*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 미국의 주.\n* 워싱턴 (노스캐롤라이나주): 미국의 도시.\n* 워싱턴 (타인 위어주): 영국의 도시. 시티오브선덜랜드 관할.\n* 워싱턴군\n", "* 《워싱턴(Washington)》: 2007년 영화\n", "* \n\n" ]
'''워싱턴'''(, )은 다음을 가리킨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이 수교협정한 이후 한국에는 화성돈(華盛頓)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 1799)은 미국 초대 대통령이다. *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 ~ 1915)은 미국의 교육자이다. * 해럴드 워싱턴(Harold Washington, 1922 ~ 1987)의 미국의 정치인이다. * 덴절 워싱턴: 미국의 영화 배우 겸 감독 * 워싱턴 어빙: 미국의 수필가·소설가 * 조지 워싱턴 카버: 미국의 농학자 * 코너 워싱턴: 퀸스 파크 레인저스와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 케리 워싱턴: 미국의 배우 * 메건 워싱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 * 론 워싱턴: 미국의 야구인 * 아이제이아 워싱턴: 미국의 배우 * 마사 워싱턴: 초대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아내 * 디나 워싱턴: 미국의 가수 * 디절 워싱턴: 미국의 게이 포르노 배우 * 워싱턴 D.C.(Washington D.C.): 미국의 수도. *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 미국의 주. * 워싱턴 (노스캐롤라이나주): 미국의 도시. * 워싱턴 (타인 위어주): 영국의 도시. 시티오브선덜랜드 관할. * 워싱턴군 * 《워싱턴(Washington)》: 2007년 영화 *
문희준
[ "Introduction", "학력", "활동", "기타", "앨범", "방송", "수상 경력", "가족 관계", "각주", "외부 링크" ]
[ "\n\n'''문희준'''(文熙晙, 1978년 3월 14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배우 겸 방송인이다. 보이 그룹 《H.O.T.('''H'''igh-five '''O'''f '''T'''eenagers)》의 리더를 맡았으며, 팀이 해체된 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였다. 대표곡으로 《Alone》, 《Red & White》, 《아낌없이 주는 나무》, 《G선상의 아리아》, 《전설》, 《기억이란 작은 마을》 등이 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보이 그룹 《'H.O.T'》의 리더였던 그는, 2000년 6월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마약퇴치 홍보대사, 2011년 8월 제주 세계 7대 자연경관 유치 도전 홍보대사 등을 지냈었으며, 현재는 주로 방송인으로 활약하고 있다.\n", "* 서울문정초등학교 (졸업)\n* 문정중학교 (졸업)\n* 중산고등학교 (졸업)\n*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학과 (전문학사)\n*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부 연기학 전공 (학사)\n* 경기대학교 대학원 레저스포츠학과 (석사과정 수료)\n", "=== H.O.T.와 솔로 전향 ===\n문희준은 1978년 3월 14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정동(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정동)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고등학생 시절(1994년)에는 서울 송파구에서 주로 노란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가, 1996년 보이 그룹 《H.O.T.》의 구성원으로 데뷔한다.\n\n한편, 보이 그룹 《H.O.T.》로 데뷔하기 이전에는 남성 2인조 보컬 음악 그룹 《녹색지대》의 구성원이 될 뻔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불발되었다.\n\n=== 군 입대 이후 ===\n2005년 11월 21일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으며, 운전병으로 복무하다가 2006년에 연예병사에 지원하여 발탁되었으며 2007년 국군방송(KFN) FM 〈문희준의 Music Talk Show〉의 DJ로 진행을 맡은 바가 있다. 그의 입대는 당시 여러 남성 연예인들이 군복무 기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쳤다. 2007년 11월 20일에 전역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동년 12월 1일에 결혼하였다.\n\n=== 안티팬 ===\nH.O.T.에서 솔로 데뷔때부터 남성들을 중심으로한 안티 세력이 생겼다.\n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에는 문희준의 음악 실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대개 외모나 와전된 발언을 비하하는 인신 공격 수준의 단순한 비난이었다.\n그들은 은어로 10대 열성 소녀팬들을 비하하기 위해 속칭 빠순이라 지칭하였으며, 문희준을 무뇌충(無腦蟲)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빠순이라는 은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연예 뉴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n\n디시인사이드나 웃긴대학과 같은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속칭 필수요소가 된 문희준을 희화화한 합성사진과 유행어들이 끊임없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n그의 노래 가사 중의 일부를 따온, 뷁과 같은 부정적인 속어도 유행하였다.\n\n한 웹사이트에서 주최한 《2003 최악의 딴따라 워스트 어워드》에서 “최악의 가수 부문” 및 무려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가수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는 특히 2002년 무렵부터 집요해졌다.\n안티들의 기세에 힘입어 김구라는 자신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문희준에게 인신공격이 포함된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n\n그의 발언들은 이른바 ‘문희준 어록’이라 불리며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n하지만, 그 내용중 대부분은 문희준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사실이 대부분이며 안티들이 지적하는 이른바 ‘건방진’ 언행들은 대부분 신문 기사나 네티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팬들의 웹상에서의 말 실수를 문희준의 말 실수로 오해한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무려 100만 여건의 악플이 달린 네이버 뉴스의 댓글은 국내 뉴스 댓글중 기네스에 오르며 안티계의 최고봉으로 정점에 이른다.\n\n이러한 안티들의 행동은 문희준이 2007년 11월 20일에 현역 만기 제대한 이후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후에, 김구라는 '문희준은 보살'이란 말과 함께 문희준에게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퍼부었던 인신공격들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혔다.\n\n=== 잘못된 소문에 대한 해명 ===\n제대후 MBC의 토크쇼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문희준 어록'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어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 “레드 제플린을 모른다”라는 부분은 문희준이 방송 DJ이던 시절, DJ의 입장에서 “레드 제플린에 대해 소개해 달라”라는 취지의 질문을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오이 3개만 먹고 연습했다”라는 발언은 인디 아티스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때 몸이 많이 불어나는 바람에 다이어트 차원에서 오이만 먹었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오인용 플래시에 나온 내용과 달리 문희준은 군 면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n\n문희준의 소속사는 한때 안티팬들을 상대로 고소하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지만, 후에 오히려 본인이 고소를 취하했다.\n", "* 현재 문희준이 살고 있는 파주 소재의 저택은 문희준이 H.O.T. 활동을 해서 번 돈으로 구매했다. 그러나 2011년 2월 28일 《밤이면 밤마다》 방송에서 한 발언 때문에, 그 집을 1996년 당시 1억 2천만원을 주고 샀으나 10억원으로 인상됐다고 잘못 알려져, 이 점을 근거로 HOT의 1집 정산금액이 1억 2천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하지만 해당 방송을 정확히 보면 자막을 잘못 썼음을 알 수 있다. 문희준은 1996년에 샀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방송 자막이 15년전이라고 잘못 쓰여있었다. 당시 방송 내용을 보면,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는데 지금 시가로 치면 40억 정도 할거라면서, 왜냐하면 그때 내가 1억 2천 짜리 집을 샀는데 그것이 10억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 집은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을 때 산 집이지, 1996년에 산 집이 아니다. 또한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서 해명하길, 그 파주 집이 1억 2천에서 10억 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집이 그렇게 오른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6월부터 출연을 시작한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통해 기존 파주주택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공동주택으로 이사함이 공개됨에따라 파주주택 논란은 일단락됐다. 뉴스검색결과(네이버 뉴스검색시스템)\n*2019년 달 문희율 양(태명:잼잼이)과 아내 소율의 담백한 일상을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수수하게 공개한 점과 불후의 명곡 서브 진행자로서의 진행력을 인정받아 2019 KBS연예대상에서 명예의 데뷔후 첫 연예대상을 수상했다.\n", "H.O.T. 때의 앨범은 해당 페이지 참고.\n* 1st Album《Alone...》(2001년 10월 5일)\n* 2nd Album《Messiah》(2002년 7월 19일)\n* Live Album《LIVE REVOLUTION》(2002년 12월 9일)\n* 3rd Album《LEGEND》(2003년 7월 29일)\n* Best Album《A Soaring For Dream》(2004년 4월 28일)\n* 1st Single ''Winter Letter'' (2004년 12월 22일)\n* 4th Album《Triple X》(2005년 9월 12일)\n* Special Album《hj》(2008년 3월 10일)\n* 1st Mini Album《LAST CRY》(2009년 6월 19일)\n* 2nd Mini Album《BEGINS》(2013년 1월 18일)\n", "=== 예능 ===\n* KBS2 《TV는 사랑을 싣고》\n* MBC 《해피타임》\n* Mnet 《와이드 연예뉴스》\n* MBC 《세바퀴》\n* MBC 《이경규의 요리원정대》 (2016.02.06 ~ 2016.02.07 종영)\n* JTBC 《수상한 미용실 - 살롱드림》 (2015.10.05 ~ 2015.11.09 종영)\n* E채널 《더 맛있는 원샷》 (2015.07.16 ~ 2015.09.03 종영)\n* KBS2 《대단한 레시피-마트에 가자》 (2015.06.04 ~ 2015.06.18 종영)\n* KBS W 《나르는 쇼퍼맨》 (2014.11.03 ~ 2015.01.19 종영)\n* JTBC 《동갑내기》 (2014.09.07 ~ 2014.09.08 종영)\n* 온스타일 《위시》 (2014.07.19 ~ 2014.08.09 종영)\n* SBS 《매직아이》 (2014.07.08 ~ 2014.11.18 종영)\n* Mnet 《문희준의 순결한 15》 (2013.07.03 ~ 2015. 02. 11 종영)\n* KBS2 《별친구》(2014.01.25 ~ 2014.02.01 종영)\n* QTV 《미소년 통신》(2013.11.26 ~ 2013.12.25 종영)\n* QTV 《20세기 미소년》 (2013.04.16 ~ 2013.11.19 종영)\n*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2011.06.04 ~ 2020.8.15 하차)\n* SBS 《강심장》(2009.10.06 ~ 2011.06.21 하차)\n*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2007.01.13 ~ 2011.10.08 하차)\n* MBC 《댄싱 위드 더 스타》(2011.6.10 ~ 2011.08.26 종영)\n* MBC every1 《식신원정대 시즌 2》(2010.12.06~2011.05.30 종영)\n* MTV 코리아 《아이돌 유나이티드》(2010.05.22 ~ 2010.08.07 종영)\n* MBC 에브리원 《스타 포토그래퍼 탄생기 - 열혈포스》(2010.05.10~2010.06.28 종영)\n* KBS Joy 《대격돌! 아이돌리그》(2010.05.04 ~ 2010.06.22 종영)\n* Y-STAR 《디시인사이드 SHOW》 진행(2010.05.28 하차)\n* MBC ESPN 《F1 스피드 레이서》(2010.03 ~ 2010.04 종영)\n* MBC 에브리원 《블링블링 에브리쇼 - 스토커》(2010.01.22 ~ 2010.03.26 종영)\n* tvN 《tVN ENEWS》월요일 패널 (2009.11.23 ~ 2010.08.02 하차)\n* MBC every1 《기상천외! 묻지마 선수단》(2008.11.06~2009.01.22 종영)\n* Mnet 《문희준의 음악반란》(2008.04.02~2008.07.09 종영)\n* SBS 《절친노트 시즌 2》(2009.06.19 ~ 2009.12.25 종영)\n* SBS 《절친노트 시즌 1》(2008.10.31 ~ 2009.06.12 종영)\n* KBS2 《개그콘서트》(게스트 출연, 2009년 7월 12일 방송)\n* 2015년 6월 15일 ~ 2018년 5월 13일 KBS 쿨FM 《정재형, 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DJ\n* 2018년 5월 14일 ~ 2020년 3월 1일 KBS 쿨FM 《문희준의 뮤직쇼》\n* EBS2 《세상의 모든 법칙 Talk》\n* JTBC 《싱포유》\n* 채널A 《아빠본색》\n*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2019.06.09 ~ 2020.08.09 하차)\n\n=== 드라마•시트콤 ===\n* 1997년 MBC 《남자 셋 여자 셋》 - 1997년 8월 문화대학교 축제 초대 가수 역 (특별출연)\n* 1998년 SBS 《순풍산부인과》(특별출연)\n* 2009년 MBC 《태희 혜교 지현이》\n* 2012년 tvN 《응답하라 1997》 - (목소리출연) (특별출연)\n", "* 2001년 KMTV 가요대전 네티즌 인기상, 본상\n* 2001년 MBC 연기대상 인기상 (라디오 진행자 부문)\n* 2002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네티즌 인기상\n* 2002년 SBS 가요대전 록 부문 상\n* 2002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NATE상, 올해의 가수상\n* 2003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시청자 인기상, 올해의 가수상\n* 2004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파란상\n* 2005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네티즌 인기상\n* 2009년 SBS 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n* 2011년 제19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예능 부문 대상\n* 2013년 KBS 연예대상 정보 쇼.오락 부문 최고 엔터테이너상\n* 2018년 KBS 연예대상 토크&쇼 부문 최우수상\n* 2019년 KBS 연예대상 대상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들)\n\n=== 가요 프로그램 1위 ===\n\n\n\n 연도\n\n 수상 내역 (총 1회)\n\n\n\n 2002년 (총 1회)\n\n\n* '''아낌없이 주는 나무 (총 1회)\n** 9월 1일 SBS 《인기가요》 1위\n\n\n", "200px\n\n* 아버지 문광식 (1955년 9월 10일 ~ )\n* 어머니 이희경 (1957년 9월 11일 ~ 2020년 12월 22일) : 건강 약화로 별세하였다.\n*\n* 동생 문혜리 (1981년 ~ ) : 기혼, 슬하 1남 1녀\n* 배우자 소율 (1991년 ~ ) : 걸그룹 크레용팝 출신으로 2016년 4월부터 교제하였으며, 2017년 2월 12일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n* 자녀\n** 자녀 문희율 (2017년 ~ ) : 태명은 잼잼이. 2017년 5월 12일에 첫 딸을 출산하였다. 딸과 함께 2016년 6월부터 2020년 8월까지 슈퍼맨이 돌아왔다로 가족의 일상을 공개했었다.\n** 자녀 문희우 (2022년 ~ ) : 태명은 뽀뽀. 2022년 2월에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유튜브채널-( 재미하우스)를 통하여 둘째 임신사실을 알렸다. 기사 2022년 9월 7일 둘째 아들을 출산하였다. 2024년 3월 슈퍼맨이 돌아왔다로 아들 희우와 함께 출연했다.\n", "\n", "\n* 문희준 - 공식 웹사이트\n*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 내용 전문\n\n\n\n\n\n\n\n\n\n\n\n\n분류:살아있는 사람\n분류:1978년 출생\n분류:송파구 출신\n분류:H.O.T.의 일원\n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n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n분류:대한민국의 브레이크댄서\n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n분류:서울문정초등학교 동문\n분류:문정중학교 (서울) 동문\n분류:중산고등학교 (서울) 동문\n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n분류:경기대학교 동문\n분류:경기대학교 대학원 동문\n분류:서울특별시 출신 가수\n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음악가\n분류:남평 문씨\n분류:대한민국의 불교도\n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n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
'''문희준'''(文熙晙, 1978년 3월 14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배우 겸 방송인이다. 보이 그룹 《H.O.T.('''H'''igh-five '''O'''f '''T'''eenagers)》의 리더를 맡았으며, 팀이 해체된 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였다. 대표곡으로 《Alone》, 《Red & White》, 《아낌없이 주는 나무》, 《G선상의 아리아》, 《전설》, 《기억이란 작은 마을》 등이 있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보이 그룹 《'H.O.T'》의 리더였던 그는, 2000년 6월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마약퇴치 홍보대사, 2011년 8월 제주 세계 7대 자연경관 유치 도전 홍보대사 등을 지냈었으며, 현재는 주로 방송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 서울문정초등학교 (졸업) * 문정중학교 (졸업) * 중산고등학교 (졸업) *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학과 (전문학사) *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부 연기학 전공 (학사) * 경기대학교 대학원 레저스포츠학과 (석사과정 수료) === H.O.T.와 솔로 전향 === 문희준은 1978년 3월 14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정동(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정동)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고등학생 시절(1994년)에는 서울 송파구에서 주로 노란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가, 1996년 보이 그룹 《H.O.T.》의 구성원으로 데뷔한다. 한편, 보이 그룹 《H.O.T.》로 데뷔하기 이전에는 남성 2인조 보컬 음악 그룹 《녹색지대》의 구성원이 될 뻔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불발되었다. === 군 입대 이후 === 2005년 11월 21일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으며, 운전병으로 복무하다가 2006년에 연예병사에 지원하여 발탁되었으며 2007년 국군방송(KFN) FM 〈문희준의 Music Talk Show〉의 DJ로 진행을 맡은 바가 있다. 그의 입대는 당시 여러 남성 연예인들이 군복무 기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쳤다. 2007년 11월 20일에 전역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동년 12월 1일에 결혼하였다. === 안티팬 === H.O.T.에서 솔로 데뷔때부터 남성들을 중심으로한 안티 세력이 생겼다.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에는 문희준의 음악 실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대개 외모나 와전된 발언을 비하하는 인신 공격 수준의 단순한 비난이었다. 그들은 은어로 10대 열성 소녀팬들을 비하하기 위해 속칭 빠순이라 지칭하였으며, 문희준을 무뇌충(無腦蟲)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빠순이라는 은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연예 뉴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디시인사이드나 웃긴대학과 같은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속칭 필수요소가 된 문희준을 희화화한 합성사진과 유행어들이 끊임없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노래 가사 중의 일부를 따온, 뷁과 같은 부정적인 속어도 유행하였다. 한 웹사이트에서 주최한 《2003 최악의 딴따라 워스트 어워드》에서 “최악의 가수 부문” 및 무려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가수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는 특히 2002년 무렵부터 집요해졌다. 안티들의 기세에 힘입어 김구라는 자신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문희준에게 인신공격이 포함된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의 발언들은 이른바 ‘문희준 어록’이라 불리며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하지만, 그 내용중 대부분은 문희준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사실이 대부분이며 안티들이 지적하는 이른바 ‘건방진’ 언행들은 대부분 신문 기사나 네티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팬들의 웹상에서의 말 실수를 문희준의 말 실수로 오해한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무려 100만 여건의 악플이 달린 네이버 뉴스의 댓글은 국내 뉴스 댓글중 기네스에 오르며 안티계의 최고봉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안티들의 행동은 문희준이 2007년 11월 20일에 현역 만기 제대한 이후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후에, 김구라는 '문희준은 보살'이란 말과 함께 문희준에게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퍼부었던 인신공격들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혔다. === 잘못된 소문에 대한 해명 === 제대후 MBC의 토크쇼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문희준 어록'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어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 “레드 제플린을 모른다”라는 부분은 문희준이 방송 DJ이던 시절, DJ의 입장에서 “레드 제플린에 대해 소개해 달라”라는 취지의 질문을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오이 3개만 먹고 연습했다”라는 발언은 인디 아티스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때 몸이 많이 불어나는 바람에 다이어트 차원에서 오이만 먹었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오인용 플래시에 나온 내용과 달리 문희준은 군 면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문희준의 소속사는 한때 안티팬들을 상대로 고소하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지만, 후에 오히려 본인이 고소를 취하했다. * 현재 문희준이 살고 있는 파주 소재의 저택은 문희준이 H.O.T. 활동을 해서 번 돈으로 구매했다. 그러나 2011년 2월 28일 《밤이면 밤마다》 방송에서 한 발언 때문에, 그 집을 1996년 당시 1억 2천만원을 주고 샀으나 10억원으로 인상됐다고 잘못 알려져, 이 점을 근거로 HOT의 1집 정산금액이 1억 2천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하지만 해당 방송을 정확히 보면 자막을 잘못 썼음을 알 수 있다. 문희준은 1996년에 샀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방송 자막이 15년전이라고 잘못 쓰여있었다. 당시 방송 내용을 보면,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는데 지금 시가로 치면 40억 정도 할거라면서, 왜냐하면 그때 내가 1억 2천 짜리 집을 샀는데 그것이 10억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 집은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을 때 산 집이지, 1996년에 산 집이 아니다. 또한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서 해명하길, 그 파주 집이 1억 2천에서 10억 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집이 그렇게 오른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6월부터 출연을 시작한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통해 기존 파주주택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 공동주택으로 이사함이 공개됨에따라 파주주택 논란은 일단락됐다. 뉴스검색결과(네이버 뉴스검색시스템) *2019년 달 문희율 양(태명:잼잼이)과 아내 소율의 담백한 일상을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수수하게 공개한 점과 불후의 명곡 서브 진행자로서의 진행력을 인정받아 2019 KBS연예대상에서 명예의 데뷔후 첫 연예대상을 수상했다. H.O.T. 때의 앨범은 해당 페이지 참고. * 1st Album《Alone...》(2001년 10월 5일) * 2nd Album《Messiah》(2002년 7월 19일) * Live Album《LIVE REVOLUTION》(2002년 12월 9일) * 3rd Album《LEGEND》(2003년 7월 29일) * Best Album《A Soaring For Dream》(2004년 4월 28일) * 1st Single ''Winter Letter'' (2004년 12월 22일) * 4th Album《Triple X》(2005년 9월 12일) * Special Album《hj》(2008년 3월 10일) * 1st Mini Album《LAST CRY》(2009년 6월 19일) * 2nd Mini Album《BEGINS》(2013년 1월 18일) === 예능 === * KBS2 《TV는 사랑을 싣고》 * MBC 《해피타임》 * Mnet 《와이드 연예뉴스》 * MBC 《세바퀴》 * MBC 《이경규의 요리원정대》 (2016.02.06 ~ 2016.02.07 종영) * JTBC 《수상한 미용실 - 살롱드림》 (2015.10.05 ~ 2015.11.09 종영) * E채널 《더 맛있는 원샷》 (2015.07.16 ~ 2015.09.03 종영) * KBS2 《대단한 레시피-마트에 가자》 (2015.06.04 ~ 2015.06.18 종영) * KBS W 《나르는 쇼퍼맨》 (2014.11.03 ~ 2015.01.19 종영) * JTBC 《동갑내기》 (2014.09.07 ~ 2014.09.08 종영) * 온스타일 《위시》 (2014.07.19 ~ 2014.08.09 종영) * SBS 《매직아이》 (2014.07.08 ~ 2014.11.18 종영) * Mnet 《문희준의 순결한 15》 (2013.07.03 ~ 2015. 02. 11 종영) * KBS2 《별친구》(2014.01.25 ~ 2014.02.01 종영) * QTV 《미소년 통신》(2013.11.26 ~ 2013.12.25 종영) * QTV 《20세기 미소년》 (2013.04.16 ~ 2013.11.19 종영) *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2011.06.04 ~ 2020.8.15 하차) * SBS 《강심장》(2009.10.06 ~ 2011.06.21 하차) *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2007.01.13 ~ 2011.10.08 하차) * MBC 《댄싱 위드 더 스타》(2011.6.10 ~ 2011.08.26 종영) * MBC every1 《식신원정대 시즌 2》(2010.12.06~2011.05.30 종영) * MTV 코리아 《아이돌 유나이티드》(2010.05.22 ~ 2010.08.07 종영) * MBC 에브리원 《스타 포토그래퍼 탄생기 - 열혈포스》(2010.05.10~2010.06.28 종영) * KBS Joy 《대격돌! 아이돌리그》(2010.05.04 ~ 2010.06.22 종영) * Y-STAR 《디시인사이드 SHOW》 진행(2010.05.28 하차) * MBC ESPN 《F1 스피드 레이서》(2010.03 ~ 2010.04 종영) * MBC 에브리원 《블링블링 에브리쇼 - 스토커》(2010.01.22 ~ 2010.03.26 종영) * tvN 《tVN ENEWS》월요일 패널 (2009.11.23 ~ 2010.08.02 하차) * MBC every1 《기상천외! 묻지마 선수단》(2008.11.06~2009.01.22 종영) * Mnet 《문희준의 음악반란》(2008.04.02~2008.07.09 종영) * SBS 《절친노트 시즌 2》(2009.06.19 ~ 2009.12.25 종영) * SBS 《절친노트 시즌 1》(2008.10.31 ~ 2009.06.12 종영) * KBS2 《개그콘서트》(게스트 출연, 2009년 7월 12일 방송) * 2015년 6월 15일 ~ 2018년 5월 13일 KBS 쿨FM 《정재형, 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DJ * 2018년 5월 14일 ~ 2020년 3월 1일 KBS 쿨FM 《문희준의 뮤직쇼》 * EBS2 《세상의 모든 법칙 Talk》 * JTBC 《싱포유》 * 채널A 《아빠본색》 *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2019.06.09 ~ 2020.08.09 하차) === 드라마•시트콤 === * 1997년 MBC 《남자 셋 여자 셋》 - 1997년 8월 문화대학교 축제 초대 가수 역 (특별출연) * 1998년 SBS 《순풍산부인과》(특별출연) * 2009년 MBC 《태희 혜교 지현이》 * 2012년 tvN 《응답하라 1997》 - (목소리출연) (특별출연) * 2001년 KMTV 가요대전 네티즌 인기상, 본상 * 2001년 MBC 연기대상 인기상 (라디오 진행자 부문) * 2002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네티즌 인기상 * 2002년 SBS 가요대전 록 부문 상 * 2002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NATE상, 올해의 가수상 * 2003년 KMTV 코리안 뮤직 어워드 시청자 인기상, 올해의 가수상 * 2004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파란상 * 2005년 Mnet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네티즌 인기상 * 2009년 SBS 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 2011년 제19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예능 부문 대상 * 2013년 KBS 연예대상 정보 쇼.오락 부문 최고 엔터테이너상 * 2018년 KBS 연예대상 토크&쇼 부문 최우수상 * 2019년 KBS 연예대상 대상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들) === 가요 프로그램 1위 === 연도 수상 내역 (총 1회) 2002년 (총 1회) * '''아낌없이 주는 나무 (총 1회) ** 9월 1일 SBS 《인기가요》 1위 200px * 아버지 문광식 (1955년 9월 10일 ~ ) * 어머니 이희경 (1957년 9월 11일 ~ 2020년 12월 22일) : 건강 약화로 별세하였다. * * 동생 문혜리 (1981년 ~ ) : 기혼, 슬하 1남 1녀 * 배우자 소율 (1991년 ~ ) : 걸그룹 크레용팝 출신으로 2016년 4월부터 교제하였으며, 2017년 2월 12일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 자녀 ** 자녀 문희율 (2017년 ~ ) : 태명은 잼잼이. 2017년 5월 12일에 첫 딸을 출산하였다. 딸과 함께 2016년 6월부터 2020년 8월까지 슈퍼맨이 돌아왔다로 가족의 일상을 공개했었다. ** 자녀 문희우 (2022년 ~ ) : 태명은 뽀뽀. 2022년 2월에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유튜브채널-( 재미하우스)를 통하여 둘째 임신사실을 알렸다. 기사 2022년 9월 7일 둘째 아들을 출산하였다. 2024년 3월 슈퍼맨이 돌아왔다로 아들 희우와 함께 출연했다. * 문희준 - 공식 웹사이트 *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 내용 전문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1978년 출생 분류:송파구 출신 분류:H.O.T.의 일원 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분류:대한민국의 브레이크댄서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분류:서울문정초등학교 동문 분류:문정중학교 (서울) 동문 분류:중산고등학교 (서울) 동문 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 분류:경기대학교 동문 분류:경기대학교 대학원 동문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가수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음악가 분류:남평 문씨 분류:대한민국의 불교도 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 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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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n\n\n'''댓글'''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보통 인터넷 게시물 밑에는 댓글란이 있어 그 게시물과 관련하여 독자는 의견을 표할 수 있다. '''댓글''', '''코멘트'''(), '''리플'''(←reply)이라고도 한다. 댓글을 통해 다양한 대화와 논리적인 토론 및 토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감정적인 반대 표현이나 지극히 단순한 맞장구와 같은 일도 이루어지기도 한다.\n", "\n대한민국 인터넷 초창기 시절 유즈넷(USENET)에서는 인터넷 활성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때 영문으로 되어 있는 누리집 용어를 한글화시키자는 과정에서 생긴 신종 단어이다.\n\n유즈넷(USENET) 뉴스그룹 초창기 시절 'reply'를 '리플라이', '답장' 등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인터넷 용어 한글화를 주제로 토론을 나누는 자리에서 '리플라이', '덧글', '댓글' 등이 거론되었다. '리플라이'는 영어의 한글식 표기인 데다가 내용까지 길어져서 지지도가 약하였다. '덧글'의 경우는 '덧붙여 쓰는 글', '댓글'의 경우는 '대롱 대롱 이어지는 덧대어 쓰는 글'로 두 단어가 혼용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덧글'의 경우 글을 게시한 작성자가 추가로 덧붙여 쓰는 글의 의미가 강하여 사용이 줄어들었고 뉴스그룹 댓글 모양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어 '댓글'로 통일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댓글'은 '본문에 대어서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사용되었다.\n", "=== 댓글 저널리즘 ===\n댓글이 네티즌들의 토론과 지식 공유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댓글 저널리즘'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형성하였다. 특히 '양방향적 속성'을 갖고 있는 댓글은 특정 이슈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뉴스 기사 등 원문을 읽고 나서 독자가 다양한 의견들을 작성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독자들에게 원문에서 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댓글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n\n2012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는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이은주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연구가 세계적인 언론학 학술지 에 소개됐다고 밝혔다. 이 학술지는 온라인 뉴스 기사의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면서 이은주의 연구를 주요 논거로 상세히 소개했다. 소개된 연구는 2012년 10월호에 실린 이은주의 단독 논문이었다. 논문 내용은 독자의 뉴스 기사에 대한 인식이 댓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특히 기사의 이슈에 관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댓글을 접했을 경우 미디어가 왜곡돼 있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논문을 통해 이은주는 온라인 미디어 시대의 뉴스 공정성에 대한 독자의 인식은 기사 자체 뿐 아니라 댓글에도 영향을 받고 댓글이 매체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침을 보여줬다.\n\n=== 놀이 ===\n 댓글은 기존의 답글과 기술적으로 비슷하지만, 즉각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인하여 답글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댓글은 그 웹사이트의 성격이나 유행어 등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논리적인 반박글이나 동의하는 글보다는 짧은 감상평 위주이다. 댓글이 없는 상태를 '무플'(無플←無리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무플에 댓글을 다는 '무플 방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1빠', ' 1등' 등과 같이 누가 먼저 댓글을 달았는지 겨루는 '등수 놀이'를 하기도 한다.\n\n=== 홍보 ===\n 댓글에 일부 인터넷 사이트나 기업이 광고를 달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유해 웹사이트 링크를 걸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회원들 또는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 사이에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행위에 대해 그 목적이 의심될 경우 '상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댓글 문화가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댓글이 끼치는 영향을 이익과 연결하려는 현상이 발생하여 댓글 알바라는 신종 직업도 발생하였고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n\n=== 범죄 ===\n 댓글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악의적으로 남을 공격하고 상습적으로 남을 헐뜯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댓글 문화인 '악플문화'가 발전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악플'은 '악성 리플'의 줄임말로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악성 댓글은 언어 폭력인데, 그 대상이 여성인 경우 더 악랄한 댓글이 달리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인터넷에 비방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게재해 명예훼손을 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 수 있다. 악플도 형법상 모욕죄·협박죄,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 명예 훼손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n", "* 소셜 댓글\n* 라이브리\n* 우마오당\n* 사이버 여론 조작\n", "\n", "* \n\n분류:비언어적 의사소통\n분류:인터넷 문화\n분류:인터넷 용어" ]
'''댓글'''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보통 인터넷 게시물 밑에는 댓글란이 있어 그 게시물과 관련하여 독자는 의견을 표할 수 있다. '''댓글''', '''코멘트'''(), '''리플'''(←reply)이라고도 한다. 댓글을 통해 다양한 대화와 논리적인 토론 및 토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감정적인 반대 표현이나 지극히 단순한 맞장구와 같은 일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 인터넷 초창기 시절 유즈넷(USENET)에서는 인터넷 활성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때 영문으로 되어 있는 누리집 용어를 한글화시키자는 과정에서 생긴 신종 단어이다. 유즈넷(USENET) 뉴스그룹 초창기 시절 'reply'를 '리플라이', '답장' 등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인터넷 용어 한글화를 주제로 토론을 나누는 자리에서 '리플라이', '덧글', '댓글' 등이 거론되었다. '리플라이'는 영어의 한글식 표기인 데다가 내용까지 길어져서 지지도가 약하였다. '덧글'의 경우는 '덧붙여 쓰는 글', '댓글'의 경우는 '대롱 대롱 이어지는 덧대어 쓰는 글'로 두 단어가 혼용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덧글'의 경우 글을 게시한 작성자가 추가로 덧붙여 쓰는 글의 의미가 강하여 사용이 줄어들었고 뉴스그룹 댓글 모양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어 '댓글'로 통일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댓글'은 '본문에 대어서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정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사용되었다. === 댓글 저널리즘 === 댓글이 네티즌들의 토론과 지식 공유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댓글 저널리즘'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형성하였다. 특히 '양방향적 속성'을 갖고 있는 댓글은 특정 이슈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뉴스 기사 등 원문을 읽고 나서 독자가 다양한 의견들을 작성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독자들에게 원문에서 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댓글 저널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012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는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이은주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연구가 세계적인 언론학 학술지 에 소개됐다고 밝혔다. 이 학술지는 온라인 뉴스 기사의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면서 이은주의 연구를 주요 논거로 상세히 소개했다. 소개된 연구는 2012년 10월호에 실린 이은주의 단독 논문이었다. 논문 내용은 독자의 뉴스 기사에 대한 인식이 댓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특히 기사의 이슈에 관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댓글을 접했을 경우 미디어가 왜곡돼 있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논문을 통해 이은주는 온라인 미디어 시대의 뉴스 공정성에 대한 독자의 인식은 기사 자체 뿐 아니라 댓글에도 영향을 받고 댓글이 매체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침을 보여줬다. === 놀이 === 댓글은 기존의 답글과 기술적으로 비슷하지만, 즉각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인하여 답글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댓글은 그 웹사이트의 성격이나 유행어 등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논리적인 반박글이나 동의하는 글보다는 짧은 감상평 위주이다. 댓글이 없는 상태를 '무플'(無플←無리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무플에 댓글을 다는 '무플 방지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1빠', ' 1등' 등과 같이 누가 먼저 댓글을 달았는지 겨루는 '등수 놀이'를 하기도 한다. === 홍보 === 댓글에 일부 인터넷 사이트나 기업이 광고를 달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유해 웹사이트 링크를 걸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회원들 또는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 사이에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행위에 대해 그 목적이 의심될 경우 '상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댓글 문화가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댓글이 끼치는 영향을 이익과 연결하려는 현상이 발생하여 댓글 알바라는 신종 직업도 발생하였고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 범죄 === 댓글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악의적으로 남을 공격하고 상습적으로 남을 헐뜯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댓글 문화인 '악플문화'가 발전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악플'은 '악성 리플'의 줄임말로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악성 댓글은 언어 폭력인데, 그 대상이 여성인 경우 더 악랄한 댓글이 달리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인터넷에 비방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게재해 명예훼손을 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 수 있다. 악플도 형법상 모욕죄·협박죄,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 명예 훼손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 소셜 댓글 * 라이브리 * 우마오당 * 사이버 여론 조작 * 분류:비언어적 의사소통 분류:인터넷 문화 분류:인터넷 용어
스칼라곱
[ "Introduction", "정의", "성질", "응용", "일반화", "각주", "외부 링크" ]
[ "\n\n선형대수학에서 '''스칼라곱'''(scalar곱, ) 또는 '''점곱'''()은 유클리드 공간의 두 벡터로부터 실수 스칼라를 얻는 연산이다. 스칼라곱이 유클리드 공간의 내적을 이루므로, 이를 단순히 '내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칼라곱의 개념의 물리학 배경은 주어진 힘이 주어진 변위의 물체에 가한 일을 구하는 문제이다.\n", "차원이 인 유클리드 공간 의 두 벡터 의 '''스칼라곱''' 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스칼라곱의 기호에는 가운뎃점 '⋅'을 사용하며, 수의 곱셈 기호와는 다르게 생략할 수 없다. \n\n=== 대수적 정의 ===\n두 벡터의 좌표가 각각 와 라면, 이 둘의 스칼라곱은 같은 위치의 성분을 곱한 뒤 모두 합하여 얻는 값이다.\n:\n예를 들어, 두 3차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다.\n:\n이 경우 스칼라곱의 정의는 벡터의 좌표에 의존하여 정의하지만, 에 기존의 좌표계가 아닌 새로운 좌표계를 주더라도, 이 좌표계가 정규 직교 좌표계라면, 스칼라곱을 나타내는 공식은 바뀌지 않는다. 즉, 임의의 정규 직교 좌표계 아래 스칼라곱은 위치가 같은 두 좌표의 곱을 합한 것과 같다.\n\n유클리드 공간의 벡터는 종종 열벡터로 간주되며, 이 경우 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n:\n여기서 우변의 는 의 전치 행렬이며, 곱셈 기호가 생략된 곱셈은 행렬 곱셈이다.\n\n이 경우 앞선 예시에서의 내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n:\n\n=== 기하학적 정의 ===\n스칼라곱은 기하학적 성질인 '길이'와 '각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n:\n여기서\n* 는 로 표기하기도 하며, 벡터 의 노름을 뜻한다. 이는 의 길이 또는 크기를 나타낸다. 역시 마찬가지이다.\n* 는 두 벡터 사이의 각도이다. 이는 두 벡터가 모두 0이 아닐 때에만 정의되며, 보통 에서 값을 취한다.\n* 는 코사인이며, 직각 삼각형의 이웃변과 빗변의 길이의 비로 정의하거나, 테일러 급수 전개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n예를 들어, 만약 두 벡터의 길이가 모두 2이며, 둘 사이의 각도의 코사인 값이 1/2이라면, 이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2 × 2 × 1/2 = 2이다.\n\n이 정의에서 스칼라곱은 두 벡터의 길이와 위치 관계에만 의존하므로, 스칼라곱이 좌표계와 무관함이 더욱 뚜렷하다. 반대로 두 벡터를 똑같은 등거리 변환에 의하여 변환시켰을 때,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정의로부터 자명하다.\n\n몇 가지 특수한 각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n* 만약 이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같다면,) 이므로, 내적은 단순히 두 벡터의 길이의 곱이다.\n*:\n* 만약 라면, (즉, 두 벡터가 서로 수직이라면,) 이므로, 내적은 0이다.\n*:\n* 만약 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서로 반대라면,) 이므로, 와 의 내적은 다음과 같다.\n*:\n\n또한, 이 정의로부터 두 벡터 사이의 각도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n:\n", "임의의 벡터 및 스칼라 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n* 교환 법칙\n*:\n* 왼쪽 분배 법칙\n*:\n* 오른쪽 분배 법칙\n*:\n* 스칼라 곱셈의 보존\n*:\n* 위 네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대칭 쌍선형 형식이다.\n*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은 음이 아닌 실수이다.\n*:\n* 영벡터와의 스칼라곱은 0이다.\n*:\n*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이 0인 벡터는 영벡터뿐이다.\n*:\n* 위 세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양의 정부호 형식이다.\n*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n*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n*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n반면 스칼라곱이 만족시키지 않는 성질에는 다음이 있다.\n* 결합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두 벡터의 스칼라곱이 벡터가 아닌 스칼라이므로, 나 가 무의미한 수식이기 때문이다.\n* 소거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에서, , , 이라면, , 이지만, 이다. 사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n", "=== 스칼라 사영 ===\n벡터 의 벡터 위의 '''스칼라 사영'''() 은 를 로 수직 사영하여 얻는 벡터의 길이이다.\n:\n스칼라 사영은 다음과 같이 단위 벡터와의 스칼라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n:\n반대로,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스칼라 사영과 벡터의 길이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n:\n\n=== 코사인 법칙 ===\n삼각형의 세 변에 대응하는 세 벡터 '''a''', '''b''', '''c'''와 이들 가운데 두 벡터의 각도 ''θ''.\n삼각형의 세 변 와 가 마주보는 각 에 대한 코사인 법칙은 스칼라곱의 성질을 통해 유도할 수 있다. 벡터 가 그림과 같다고 하면,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n:\n\n=== 삼중곱 ===\n3차원 유클리드 공간 속 벡터에 대한 곱셈은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두 벡터 의 벡터곱 은 스칼라곱과 달리 두 벡터로부터 또 다른 벡터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3차원이 아닌 유클리드 공간에서 의미를 잃는다.\n\n스칼라 삼중곱은 에서 스칼라곱과 벡터곱을 사용하여 정의된다. 세 벡터 의 스칼라 삼중곱은 로 정의된다.\n\n벡터 삼중곱은 에서 두 번의 벡터 곱으로 정의된다. 세 벡터 의 벡터 삼중곱은 스칼라곱을 계수로 하는 선형 결합 전개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n:\n\n=== 물리학 ===\n물리학의 여러 가지 개념은 스칼라곱을 통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일은 힘과 변위의 스칼라곱이며, 자기 선속은 자기 선속 밀도와 면적 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물론 변하는 힘이나 일정하지 않은 자기 선속의 경우 적분을 사용한다.\n", "=== 복소수 벡터의 경우 ===\n차원이 인 복소수 곱공간 속의 벡터 에 대하여 스칼라곱과 비슷한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n:\n여기서 는 의 (열벡터로서의) 켤레전치이며, 는 의 켤레 복소수이다. 이러한 함수는 양의 정부호성을 만족시킨다. 즉, 영벡터가 아닌 복소수 벡터와 자기 자신의 스칼라곱은 항상\n실수이며 0보다 크다. 그러나 실수 벡터의 스칼라곱과 달리 쌍선형성을 만족시키지 않으며, 대신 다음과 같은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임의의 및 에 대하여,\n:\n:\n또한 대칭성(교환 법칙) 대신 다음과 같은 켤레 대칭성을 만족시킨다.\n:\n이 경우, 영벡터가 아닌 두 복소수 벡터의 사잇각을 나타내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n:\n여기서 는 복소수 의 실수부이다.\n\n만약 이 함수의 정의에서 켤레 복소수를 생략한다면, 이는 쌍선형성과 대칭성을 유지하지만 양의 정부호성을 잃는다. 이는 대략 이기 때문이다. 사실,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함수 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함수의 존재가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n:\n\n=== 내적 ===\n유클리드 공간이나 복소수 곱공간의 스칼라곱을 일반화하여 내적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 실수 벡터 공간 에서, 두 벡터 로부터 실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복소수 벡터 공간 의 두 벡터 로부터 복소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에 다음과 같은 함수를 정의하면, 이는 내적을 이룬다.\n:\n\n=== 함수의 경우 ===\n두 실숫값 함수 의 내적 은 급수 대신 적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n:\n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숫값 함수 의 내적 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n:\n\n=== 행렬의 경우 ===\n사이즈가 같은 두 실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 은 위치가 같은 두 성분의 곱들을 합한 결과이며, 대각합과 행렬 곱셈을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다음과 같다.\n:\n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은 다음과 같다.\n:\n여기서 는 의 켤레전치이다.\n", "\n", "* \n* \n\n\n\n\n분류:선형대수학\n분류:벡터\n분류:해석기하학\n분류:텐서" ]
선형대수학에서 '''스칼라곱'''(scalar곱, ) 또는 '''점곱'''()은 유클리드 공간의 두 벡터로부터 실수 스칼라를 얻는 연산이다. 스칼라곱이 유클리드 공간의 내적을 이루므로, 이를 단순히 '내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칼라곱의 개념의 물리학 배경은 주어진 힘이 주어진 변위의 물체에 가한 일을 구하는 문제이다. 차원이 인 유클리드 공간 의 두 벡터 의 '''스칼라곱''' 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스칼라곱의 기호에는 가운뎃점 '⋅'을 사용하며, 수의 곱셈 기호와는 다르게 생략할 수 없다. === 대수적 정의 === 두 벡터의 좌표가 각각 와 라면, 이 둘의 스칼라곱은 같은 위치의 성분을 곱한 뒤 모두 합하여 얻는 값이다. : 예를 들어, 두 3차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다. : 이 경우 스칼라곱의 정의는 벡터의 좌표에 의존하여 정의하지만, 에 기존의 좌표계가 아닌 새로운 좌표계를 주더라도, 이 좌표계가 정규 직교 좌표계라면, 스칼라곱을 나타내는 공식은 바뀌지 않는다. 즉, 임의의 정규 직교 좌표계 아래 스칼라곱은 위치가 같은 두 좌표의 곱을 합한 것과 같다. 유클리드 공간의 벡터는 종종 열벡터로 간주되며, 이 경우 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여기서 우변의 는 의 전치 행렬이며, 곱셈 기호가 생략된 곱셈은 행렬 곱셈이다. 이 경우 앞선 예시에서의 내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 기하학적 정의 === 스칼라곱은 기하학적 성질인 '길이'와 '각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여기서 * 는 로 표기하기도 하며, 벡터 의 노름을 뜻한다. 이는 의 길이 또는 크기를 나타낸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 는 두 벡터 사이의 각도이다. 이는 두 벡터가 모두 0이 아닐 때에만 정의되며, 보통 에서 값을 취한다. * 는 코사인이며, 직각 삼각형의 이웃변과 빗변의 길이의 비로 정의하거나, 테일러 급수 전개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두 벡터의 길이가 모두 2이며, 둘 사이의 각도의 코사인 값이 1/2이라면, 이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2 × 2 × 1/2 = 2이다. 이 정의에서 스칼라곱은 두 벡터의 길이와 위치 관계에만 의존하므로, 스칼라곱이 좌표계와 무관함이 더욱 뚜렷하다. 반대로 두 벡터를 똑같은 등거리 변환에 의하여 변환시켰을 때,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정의로부터 자명하다. 몇 가지 특수한 각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 만약 이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같다면,) 이므로, 내적은 단순히 두 벡터의 길이의 곱이다. *: * 만약 라면, (즉, 두 벡터가 서로 수직이라면,) 이므로, 내적은 0이다. *: * 만약 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서로 반대라면,) 이므로, 와 의 내적은 다음과 같다. *: 또한, 이 정의로부터 두 벡터 사이의 각도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 : 임의의 벡터 및 스칼라 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 교환 법칙 *: * 왼쪽 분배 법칙 *: * 오른쪽 분배 법칙 *: * 스칼라 곱셈의 보존 *: * 위 네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대칭 쌍선형 형식이다. *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은 음이 아닌 실수이다. *: * 영벡터와의 스칼라곱은 0이다. *: *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이 0인 벡터는 영벡터뿐이다. *: * 위 세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양의 정부호 형식이다. *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반면 스칼라곱이 만족시키지 않는 성질에는 다음이 있다. * 결합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두 벡터의 스칼라곱이 벡터가 아닌 스칼라이므로, 나 가 무의미한 수식이기 때문이다. * 소거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에서, , , 이라면, , 이지만, 이다. 사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 스칼라 사영 === 벡터 의 벡터 위의 '''스칼라 사영'''() 은 를 로 수직 사영하여 얻는 벡터의 길이이다. : 스칼라 사영은 다음과 같이 단위 벡터와의 스칼라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 반대로,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스칼라 사영과 벡터의 길이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 === 코사인 법칙 === 삼각형의 세 변에 대응하는 세 벡터 '''a''', '''b''', '''c'''와 이들 가운데 두 벡터의 각도 ''θ''. 삼각형의 세 변 와 가 마주보는 각 에 대한 코사인 법칙은 스칼라곱의 성질을 통해 유도할 수 있다. 벡터 가 그림과 같다고 하면,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 === 삼중곱 === 3차원 유클리드 공간 속 벡터에 대한 곱셈은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두 벡터 의 벡터곱 은 스칼라곱과 달리 두 벡터로부터 또 다른 벡터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3차원이 아닌 유클리드 공간에서 의미를 잃는다. 스칼라 삼중곱은 에서 스칼라곱과 벡터곱을 사용하여 정의된다. 세 벡터 의 스칼라 삼중곱은 로 정의된다. 벡터 삼중곱은 에서 두 번의 벡터 곱으로 정의된다. 세 벡터 의 벡터 삼중곱은 스칼라곱을 계수로 하는 선형 결합 전개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 === 물리학 === 물리학의 여러 가지 개념은 스칼라곱을 통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일은 힘과 변위의 스칼라곱이며, 자기 선속은 자기 선속 밀도와 면적 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물론 변하는 힘이나 일정하지 않은 자기 선속의 경우 적분을 사용한다. === 복소수 벡터의 경우 === 차원이 인 복소수 곱공간 속의 벡터 에 대하여 스칼라곱과 비슷한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의 (열벡터로서의) 켤레전치이며, 는 의 켤레 복소수이다. 이러한 함수는 양의 정부호성을 만족시킨다. 즉, 영벡터가 아닌 복소수 벡터와 자기 자신의 스칼라곱은 항상 실수이며 0보다 크다. 그러나 실수 벡터의 스칼라곱과 달리 쌍선형성을 만족시키지 않으며, 대신 다음과 같은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임의의 및 에 대하여, : : 또한 대칭성(교환 법칙) 대신 다음과 같은 켤레 대칭성을 만족시킨다. : 이 경우, 영벡터가 아닌 두 복소수 벡터의 사잇각을 나타내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복소수 의 실수부이다. 만약 이 함수의 정의에서 켤레 복소수를 생략한다면, 이는 쌍선형성과 대칭성을 유지하지만 양의 정부호성을 잃는다. 이는 대략 이기 때문이다. 사실,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함수 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함수의 존재가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 === 내적 === 유클리드 공간이나 복소수 곱공간의 스칼라곱을 일반화하여 내적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 실수 벡터 공간 에서, 두 벡터 로부터 실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복소수 벡터 공간 의 두 벡터 로부터 복소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에 다음과 같은 함수를 정의하면, 이는 내적을 이룬다. : === 함수의 경우 === 두 실숫값 함수 의 내적 은 급수 대신 적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숫값 함수 의 내적 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 === 행렬의 경우 === 사이즈가 같은 두 실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 은 위치가 같은 두 성분의 곱들을 합한 결과이며, 대각합과 행렬 곱셈을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다음과 같다. :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의 켤레전치이다. * * 분류:선형대수학 분류:벡터 분류:해석기하학 분류:텐서
마이애미 말린스
[ "Introduction", "역대 주요 선수", "영구 결번", "역대 한국인 선수" ]
[ "\n\n\nthumb\n'''마이애미 말린스'''()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 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n\n콜로라도 로키스와 함께 후발주자로 1993년에 창단하였고, 1997년, 2003년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우승 팀이다.\n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를 제외하고 가장 단시간 안에 2번째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기도 하다.\n\n또한 이 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와일드 카드로만 두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두 번 다 우승한 팀으로, 지구우승이 없지만 리그 우승이 두 번 있는 건 그 때문이다.\n\n미술수집상인 제프리 로리아가 현재 구단주로 있으며, 감독으로는 프레디 곤잘레스, 단장으로는 마이클 힐이 있으며 야구운영팀장으로는 래리 바인페스트가 있다. (직책상의 단장은 마이클 힐이지만, 실제 단장 역할은 바인페스트가 모두 하고 있다.)\n\n콜로라도가 지난 95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데에 자극을 받아 말린스는 97년에 마이애미 출신의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 내야수 보비 보니아, 외야수 모이스 알루 등 내로라 하는 자유계약선수들을 돈으로 끌어 모았다.\n\n흔히 '말린스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우승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97년과 2003년 둘다 당시 와일드 카드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했고, 베테랑 선수들과 루키계약을 맺고 있던 선수들의 대활약으로 우승했다는 것이다.\n\n97년의 말린스 팀의 주축이 베테랑 위주였다면, 2003년에는 신예들이 위주였으며, 특히 이 차이는 투수력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n\n또한 특이한 점은 97년의 겨울에 있었던 이른바 '대방출' 사건으로, 이는 말린스 주력 선수들의 재계약들이 (재계약과 메이저 리그 계약)이 이 겨울에 몰려있었던 것으로,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을 두려워한 구단주에 의해 대부분의 주력선수들이 유망주와 맞트레이드되는 조건으로 다른 구단으로 팔려나가게 된다.\n\n이 현상은 2003년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이 '대방출'은 2008년 초에 이루어진 돈트렐 윌리스와 미겔 카브레라, 이 두 선수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유망주 6명을 받고 트레이드한 것으로 다시금 마무리되었다.\n\n2008년 3월 31일 말린스 팀 연봉은 뉴욕 양키스 선수들인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제이슨 지암비 선수의 개인 연봉보다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는 한국인 1호 타자 메이저리거 최희섭(전 KIA 타이거즈)과 김병현(전 KIA 타이거즈)가 뛰었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n\n2012시즌부터 팀명을 마이애미 말린스로 변경하고 홈구장도 말린스 파크(2011년 11월 11일에 개장한다.)로 옮겼으며 이에 앞서 2006년 초 라스베이거스 샌안토니오 포틀랜드 노퍽 북부 뉴저지 이전설이 있었으나 무산됐다.\n\n\n2019시즌엔 팀 로고, 유니폼, 경기장을 새롭게 바꾸었고 팀 색상도 주황색 대신 파란색으로 바뀌었다.\n", "* 아모리 가르시아\n* 존 갈\n* 김병현\n* 라이언 뎀스터\n* 핸리 라미레스\n* 존 레스터\n* 에드가 렌테리아\n* 이반 로드리게스\n* 비니 로티노\n* 카를로스 리\n* 데릭 리\n* 랜디 메신저\n* 데니 바티스타\n* 릭 반덴허크\n* 마크 벌리\n* 조시 베켓\n* 히스 벨\n* 크리스 볼스테드\n* 두에인 빌로우\n* 케빈 브라운\n* 엔리케 에르난데스\n* 오마 인판테\n* 크리스 세든\n* 게리 셰필드\n* 지안카를로 스탠튼\n* 크리스티안 옐리치\n* 웨스 오버뮬러\n* 파블로 오즈나\n* 대런 올리버\n* 로스 울프\n* 돈트렐 윌리스\n* 오마 인판테\n* 라이언 잭슨\n* 조시 존슨\n* 최희섭\n* 호르헤 칸투\n* 헤수스 타바레스\n* 맷 트레이너\n* 브래드 페니\n* 호세 페르난데스\n* 데이비드 펠프스\n* 마이크 피아자\n* 후안 피에르\n* 잭 필립스\n* 빌리 홀\n", "* '''#16''' 호세 페르난데스\n* '''#42''' 재키 로빈슨 (전 구단 공통)\n", "(말린스 시절 등번호, 포지션, 말린스 소속이던 시즌)\n* 최희섭 - 25번, 내야수, 2004년\n* 김병현 - 23번/38번/49번, 투수, 2007년\n\n\n\n\n\n\n\n\n \n분류:플로리다주의 야구\n분류:1993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n분류:플로리다주의 야구팀\n분류:1993년 설립된 야구팀\n분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 ]
thumb '''마이애미 말린스'''()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 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와 함께 후발주자로 1993년에 창단하였고, 1997년, 2003년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우승 팀이다.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를 제외하고 가장 단시간 안에 2번째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기도 하다. 또한 이 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와일드 카드로만 두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두 번 다 우승한 팀으로, 지구우승이 없지만 리그 우승이 두 번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미술수집상인 제프리 로리아가 현재 구단주로 있으며, 감독으로는 프레디 곤잘레스, 단장으로는 마이클 힐이 있으며 야구운영팀장으로는 래리 바인페스트가 있다. (직책상의 단장은 마이클 힐이지만, 실제 단장 역할은 바인페스트가 모두 하고 있다.) 콜로라도가 지난 95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데에 자극을 받아 말린스는 97년에 마이애미 출신의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 내야수 보비 보니아, 외야수 모이스 알루 등 내로라 하는 자유계약선수들을 돈으로 끌어 모았다. 흔히 '말린스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우승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97년과 2003년 둘다 당시 와일드 카드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했고, 베테랑 선수들과 루키계약을 맺고 있던 선수들의 대활약으로 우승했다는 것이다. 97년의 말린스 팀의 주축이 베테랑 위주였다면, 2003년에는 신예들이 위주였으며, 특히 이 차이는 투수력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또한 특이한 점은 97년의 겨울에 있었던 이른바 '대방출' 사건으로, 이는 말린스 주력 선수들의 재계약들이 (재계약과 메이저 리그 계약)이 이 겨울에 몰려있었던 것으로,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을 두려워한 구단주에 의해 대부분의 주력선수들이 유망주와 맞트레이드되는 조건으로 다른 구단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이 현상은 2003년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이 '대방출'은 2008년 초에 이루어진 돈트렐 윌리스와 미겔 카브레라, 이 두 선수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유망주 6명을 받고 트레이드한 것으로 다시금 마무리되었다. 2008년 3월 31일 말린스 팀 연봉은 뉴욕 양키스 선수들인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제이슨 지암비 선수의 개인 연봉보다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는 한국인 1호 타자 메이저리거 최희섭(전 KIA 타이거즈)과 김병현(전 KIA 타이거즈)가 뛰었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2시즌부터 팀명을 마이애미 말린스로 변경하고 홈구장도 말린스 파크(2011년 11월 11일에 개장한다.)로 옮겼으며 이에 앞서 2006년 초 라스베이거스 샌안토니오 포틀랜드 노퍽 북부 뉴저지 이전설이 있었으나 무산됐다. 2019시즌엔 팀 로고, 유니폼, 경기장을 새롭게 바꾸었고 팀 색상도 주황색 대신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 아모리 가르시아 * 존 갈 * 김병현 * 라이언 뎀스터 * 핸리 라미레스 * 존 레스터 * 에드가 렌테리아 * 이반 로드리게스 * 비니 로티노 * 카를로스 리 * 데릭 리 * 랜디 메신저 * 데니 바티스타 * 릭 반덴허크 * 마크 벌리 * 조시 베켓 * 히스 벨 * 크리스 볼스테드 * 두에인 빌로우 * 케빈 브라운 * 엔리케 에르난데스 * 오마 인판테 * 크리스 세든 * 게리 셰필드 * 지안카를로 스탠튼 * 크리스티안 옐리치 * 웨스 오버뮬러 * 파블로 오즈나 * 대런 올리버 * 로스 울프 * 돈트렐 윌리스 * 오마 인판테 * 라이언 잭슨 * 조시 존슨 * 최희섭 * 호르헤 칸투 * 헤수스 타바레스 * 맷 트레이너 * 브래드 페니 * 호세 페르난데스 * 데이비드 펠프스 * 마이크 피아자 * 후안 피에르 * 잭 필립스 * 빌리 홀 * '''#16''' 호세 페르난데스 * '''#42''' 재키 로빈슨 (전 구단 공통) (말린스 시절 등번호, 포지션, 말린스 소속이던 시즌) * 최희섭 - 25번, 내야수, 2004년 * 김병현 - 23번/38번/49번, 투수, 2007년 분류:플로리다주의 야구 분류:1993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 분류:플로리다주의 야구팀 분류:1993년 설립된 야구팀 분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
전자기학
[ "Introduction", "전기장", "자기장", "전자기 유도", "맥스웰 방정식", "같이 보기", "참고 문헌", "주해", "각주" ]
[ "\n\n\n'''전자기학'''(電磁氣學, )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장을 이룬다. 자기 현상은 이미 기원전 2000년 무렵 중국 문헌에 등장하며, 전기 역시 기원전 700년 무렵 고대 그리스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기가 전자기력이라는 동일한 기본 상호작용에 의한 현상이라는 점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n", "파일:Static slide.jpg|섬네일|플라스틱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아이가 정전기에 대전되어 머리카락이 곤두서 있다.\n양전하와 음전하로 대전된 물체가 만들어 내는 전기장의 모습\n\n양털로 만든 옷감에 플라스틱 빗을 여러 번 문지른 후 머리카락에 갖다 대면 머리카락이 빗에 달라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체가 전기를 띄게 되는 것을 대전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탈레스는 호박(琥珀)을 마찰하면 호박에 작은 물체가 달라 붙는 것을 관찰하였다. 전기를 뜻하는 는 호박을 뜻하는 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n\n위에 든 예와 같이 두 물체를 마찰하여 대전된 전기를 정전기라고 하는데, 정전기가 대전되는 까닭은 물체를 이루는 원자가 지니는 전자 가운데 일부가 적은 에너지로도 쉽게 원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자로부터 벗어나 움직이는 전자를 자유 전자라고 한다. 금속과 같이 자유 전자를 많이 지닌 물질은 언제나 전자들이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대전되었더라도 다른 물체와 닿게 되면 전기가 쉽게 전달되어 버린다. 이런 물체를 도체라고 한다. 반면에 고무나 유리와 같은 물질은 자유전자가 매우 적어서 한 번 대전되면 전하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이런 물체를 부도체라고 한다. 물질 가운데에는 상태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런 물질들은 반도체라고 부른다. 반도체는 최근 여러 전자 제품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n\n전기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하가 있어서 같은 것은 밀쳐내고 다른 것과는 끌어당긴다. 18세기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두 전하를 한 쪽은 양 전하, 다른 쪽은 음 전하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척력과 인력의 크기는 물체가 갖고 있는 전하의 양과 두 물체 사이의 거리에 관계된다. 이렇게 정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쿨롱의 법칙으로 계산될 수 있다.\n\n어떤 공간에 대전된 한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할 때, 이 물체 근처로 지나가는 다른 대전된 물체는 쿨롱의 법칙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더 강한 힘을 받게 된다. 반대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두 전하 사이의 힘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하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전기장이라고 한다. 전기장의 세기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물체가 단위 전하당 얼마만큼의 힘을 받는지로 계산한다. 국제단위계로 나타내면 쿨롱당 뉴턴, 즉 로 나타낸다.\n\n물체에 고여있는 정전기와 달리 전류는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흐르는 전기의 흐름이다. 1800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알레산드로 볼타는 황산 수용액에 구리막대와 아연막대를 담은 후, 두 막대를 금속선으로 이어 전지를 발명하였다. 볼타 전지는 최초로 전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장치였다.\n", "18세기에 제작된 항해용 나침반\n막대 자석 주위에 자기장을 따라 늘어선 철가루\n\n고대 중국에서는 자석에 철이달라붙는 다는 사실과 자석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침반은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항해에 필수적인 장비가 되었다.\n\n자석은 전하와 같이 같은 극끼리는 밀치고 다른 극끼리는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관례적으로 자석에서 북극을 가리키는 쪽을 N극, 반대편을 S극이라고 한다. 물질이 자기를 띄게 되는 것은 원자가 스스로 전류 고리를 갖기 때문이다. 원자핵의 자전과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공전과 자전때문에 원자에 전류 고리가 생기고 이 때문에 원자 자체에 N극과 S극의 성질을 나타내는 자기쌍극자가 형성된다. 전기의 기본 단위인 전하가 음전하 또는 양전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는 자기쌍극자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기초 단위에서부터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한다.\n\n자석에 철과 같은 물질이 달라붙는 현상을 자기라고 하고, 자석에 달라붙는 물질을 자성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자성체로는 철 이외에 니켈과 같은 것이 있다. 자기에 반응하지 않는 물질은 비자성체라고 하며, 이 외에 자석에 아주 약하게 반응하는 알루미늄, 크롬과 같은 물질은 상자성체, 구리, 금, 은과 같이 자석이 가까이 가면 약하게 반발하는 물질은 반자성체라고 한다.\n\n대부분의 물질은 원자단위의 자기쌍극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자기가 상충되어 자성을 띄지 않지만, 철이나 니켈같은 물질들은 원자의 배열이 자기가 한 쪽 방향으로 정렬되기 쉽도록 되어 있어서 쉽게 자성을 띄게 되고 한 번 자석이 되면 계속하여 자성을 유지하게 된다. 자성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는 자석을 영구 자석이라고 한다. 철 막대를 자석의 한 극으로 내려 치면 철 원자의 자기쌍극자가 한 쪽으로 정렬되어 영구 자석이 된다. 한편, 영구 자석이 된 철이라고 하더라도 약 770℃ 가 되면 자성을 잃는데, 열에 의해 원자가 무질서하게 운동하기 때문이다.\n\n전기장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미치는 공간을 자기장이라고 한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의 단위 자극인 자하는 전하와 달리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쌍극자로 존재하므로 N극에서 나와 S극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자기 흐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되는 자기 흐름을 자기력선이라고 하는데, 자기장은 일정 공간에 자기력선이 얼마나 많이 모여있는지와 그렇게 모인 자기력선이 얼마나 센 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자기력선이 일정 공간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지는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束密度)라고 하며, 관례적으로 로 나타낸다. 한편, 특정 위치에서 자기장의 세기는 로 나타내는데, 그곳에 놓인 자하가 받는 힘을 뜻한다. 국제단위계에서는 자기장의 단위로 테슬라(T)를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우스(G)가 더 많이 쓰인다.\n\n자기장의 경우에 자기 선속 밀도와 자기장의 세기가 다른 까닭은 자기장이 통과하는 매질마다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 자화되어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을 투자율(透磁率)이라고 하고 그리스 문자 μ로 나타낸다. 투자율은 물질마다 고유의 값이 있는데 투자율이 수백에 근접하는 강자성 물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물질은 1에 가까운 투자율을 가지고 있다. 진공 또는 자유공간의 투자율은 특히 μ 0로 나타내며, 그 값은 이다. 자기장의 자기 선속 밀도 는 자기장의 세기에 투자율 μ를 곱한 것과 같은 값을 갖는다. 즉,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n:\n", "파일:Sturgeon electromagnet.png|섬네일|left|150px|1823년 제작된 스터전의 전자석 \n\n전기와 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현상이었지만, 이 둘이 사실은 같은 상호 작용이란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1820년 덴마크의 과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 나침반을 두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전류와 자기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프랑스의 과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논문을 읽고 자신도 같은 실험을 하여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 생기는 자기장의 방향을 관찰하였다. 앙페르는 전류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흐를 때 자기장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말아쥔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오른손 엄지를 위로 치켜 든다면 나머지 말아 쥔 네손가락은 반시계방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앙페르의 오른나사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수리 모형이 만들어져 앙페르의 회로 법칙이 수립되었다. 1824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스터전은 전류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전자석을 만들었다. 스터전이 처음 만든 전자석은 말굽 모양의 철심을 자기 코어로 이용한 것이었다. 스터전은 자기 코어에 굵은 구리 전선을 18 번 감아 전자석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절연체가 없었기 때문에 스터전은 구리 도선에 바니시를 발라 절연체로 사용하였다.\n\n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실험. 코일을 감아 만든 전자석을 다른 코일 속에 넣고 움직이면 전류가 발생한다.\n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장에서도 전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자석을 도선 가까이에서 움직이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구 자석이든, 전자석이든 자기장을 형성하는 것이기만 하면 도선가까이에서 움직이면(즉, 자기장의 변화가 일어나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정리하여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표하였다. 자기에서 전기가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것을 이용한 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자기 유도를 이용하여 교류 발전기를 발명하였다.\n",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n파일:Guglielmo Marconi 1901 wireless signal.jpg|섬네일|1901년 대서양 너머로 무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굴리엘모 마르코니 \n\n1864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기존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이론의 수리 모형들을 약 20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맥스웰은 나중에 의미가 같은 방정식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본질적인 네 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한다.\n\n맥스웰 방정식이 다루는 전자기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n* 가우스 법칙: 가우스의 법칙은 전하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기장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이는 본질적으로 쿨롱의 법칙과 같은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가우스의 법칙은 두 개의 전하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하는 쿨롱의 법칙과 달리 하나의 전하만을 고려할 때에도 그에 따른 전하량을 계산할 수 있다.\n* 가우스 자기 법칙: 자기는 언제나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닫힌 곡면을 지나는 자기량은 곡면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통과하여 나오는 것이 언제나 같게 된다. 자기력은 벡터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자기량과 나오는 자기력의 합은 언제나 0 이 된다.\n*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 도선 주변에서 자기장이 변화하면 전류가 생기는데, 이렇게 전류가 발생하도록 하는 힘을 기전력이라고 한다.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은 자기 선속 밀도의 변화와 기전력의 관례를 수리적으로 정리한 법칙이다.\n* 앙페르 회로 법칙 : 앙페르는 전류 주변에 흐르는 자기장의 세기를 예측할 수 있는 수리 모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앙페르가 만든 방정식은 불완전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맥스웰은 이를 개선하여 새로운 방정식으로 대체하였다. 이 때문에 수정된 앙페르 회로 법칙은 앙페르-맥스웰 회로 법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n\n맥스웰은 전자기학에 대한 법칙들의 수리 모형을 정리하면서 로런츠 힘은 다루지 않았다. 로렌츠 힘은 전하를 띈 물체가 전기장 안에서 받는 힘을 뜻한다. 오늘날 전자기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n\n맥스웰은 맥스웰 방정식을 정리한 후, 자계가 사인파와 같은 파동을 보이며 변화한다면 전계 역시 그에 따라 사인파 파동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므로, 전기와 자기의 성질을 모두 갖는 파동, 즉 전자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맥스웰이 예측한 전자파는 1888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후, 전기 회로에서 생성된 전자파를 안테나를 통해 방출하거나 수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무선 통신이나 방송과 같은 전자파를 이용한 기술들이 발명되었다.\n", "\n* 전기\n* 자기\n* 전자기역학\n* 고전 전자기학\n* 양자 전기역학\n* 이중 슬릿 실험\n* 전자석\n* 엑스선\n* 광학\n* 물리학\n", "* \n** 원서: \n* \n", "\n", "\n\n\n\n\n\n분류:물리학\n " ]
'''전자기학'''(電磁氣學, )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장을 이룬다. 자기 현상은 이미 기원전 2000년 무렵 중국 문헌에 등장하며, 전기 역시 기원전 700년 무렵 고대 그리스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기가 전자기력이라는 동일한 기본 상호작용에 의한 현상이라는 점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파일:Static slide.jpg|섬네일|플라스틱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아이가 정전기에 대전되어 머리카락이 곤두서 있다. 양전하와 음전하로 대전된 물체가 만들어 내는 전기장의 모습 양털로 만든 옷감에 플라스틱 빗을 여러 번 문지른 후 머리카락에 갖다 대면 머리카락이 빗에 달라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체가 전기를 띄게 되는 것을 대전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탈레스는 호박(琥珀)을 마찰하면 호박에 작은 물체가 달라 붙는 것을 관찰하였다. 전기를 뜻하는 는 호박을 뜻하는 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 든 예와 같이 두 물체를 마찰하여 대전된 전기를 정전기라고 하는데, 정전기가 대전되는 까닭은 물체를 이루는 원자가 지니는 전자 가운데 일부가 적은 에너지로도 쉽게 원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자로부터 벗어나 움직이는 전자를 자유 전자라고 한다. 금속과 같이 자유 전자를 많이 지닌 물질은 언제나 전자들이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대전되었더라도 다른 물체와 닿게 되면 전기가 쉽게 전달되어 버린다. 이런 물체를 도체라고 한다. 반면에 고무나 유리와 같은 물질은 자유전자가 매우 적어서 한 번 대전되면 전하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이런 물체를 부도체라고 한다. 물질 가운데에는 상태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런 물질들은 반도체라고 부른다. 반도체는 최근 여러 전자 제품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기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하가 있어서 같은 것은 밀쳐내고 다른 것과는 끌어당긴다. 18세기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두 전하를 한 쪽은 양 전하, 다른 쪽은 음 전하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척력과 인력의 크기는 물체가 갖고 있는 전하의 양과 두 물체 사이의 거리에 관계된다. 이렇게 정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쿨롱의 법칙으로 계산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대전된 한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할 때, 이 물체 근처로 지나가는 다른 대전된 물체는 쿨롱의 법칙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더 강한 힘을 받게 된다. 반대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두 전하 사이의 힘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하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전기장이라고 한다. 전기장의 세기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물체가 단위 전하당 얼마만큼의 힘을 받는지로 계산한다. 국제단위계로 나타내면 쿨롱당 뉴턴, 즉 로 나타낸다. 물체에 고여있는 정전기와 달리 전류는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흐르는 전기의 흐름이다. 1800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알레산드로 볼타는 황산 수용액에 구리막대와 아연막대를 담은 후, 두 막대를 금속선으로 이어 전지를 발명하였다. 볼타 전지는 최초로 전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장치였다. 18세기에 제작된 항해용 나침반 막대 자석 주위에 자기장을 따라 늘어선 철가루 고대 중국에서는 자석에 철이달라붙는 다는 사실과 자석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침반은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항해에 필수적인 장비가 되었다. 자석은 전하와 같이 같은 극끼리는 밀치고 다른 극끼리는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관례적으로 자석에서 북극을 가리키는 쪽을 N극, 반대편을 S극이라고 한다. 물질이 자기를 띄게 되는 것은 원자가 스스로 전류 고리를 갖기 때문이다. 원자핵의 자전과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공전과 자전때문에 원자에 전류 고리가 생기고 이 때문에 원자 자체에 N극과 S극의 성질을 나타내는 자기쌍극자가 형성된다. 전기의 기본 단위인 전하가 음전하 또는 양전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는 자기쌍극자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기초 단위에서부터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자석에 철과 같은 물질이 달라붙는 현상을 자기라고 하고, 자석에 달라붙는 물질을 자성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자성체로는 철 이외에 니켈과 같은 것이 있다. 자기에 반응하지 않는 물질은 비자성체라고 하며, 이 외에 자석에 아주 약하게 반응하는 알루미늄, 크롬과 같은 물질은 상자성체, 구리, 금, 은과 같이 자석이 가까이 가면 약하게 반발하는 물질은 반자성체라고 한다. 대부분의 물질은 원자단위의 자기쌍극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기 때문에 서로간의 자기가 상충되어 자성을 띄지 않지만, 철이나 니켈같은 물질들은 원자의 배열이 자기가 한 쪽 방향으로 정렬되기 쉽도록 되어 있어서 쉽게 자성을 띄게 되고 한 번 자석이 되면 계속하여 자성을 유지하게 된다. 자성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는 자석을 영구 자석이라고 한다. 철 막대를 자석의 한 극으로 내려 치면 철 원자의 자기쌍극자가 한 쪽으로 정렬되어 영구 자석이 된다. 한편, 영구 자석이 된 철이라고 하더라도 약 770℃ 가 되면 자성을 잃는데, 열에 의해 원자가 무질서하게 운동하기 때문이다. 전기장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미치는 공간을 자기장이라고 한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의 단위 자극인 자하는 전하와 달리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쌍극자로 존재하므로 N극에서 나와 S극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자기 흐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되는 자기 흐름을 자기력선이라고 하는데, 자기장은 일정 공간에 자기력선이 얼마나 많이 모여있는지와 그렇게 모인 자기력선이 얼마나 센 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자기력선이 일정 공간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지는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束密度)라고 하며, 관례적으로 로 나타낸다. 한편, 특정 위치에서 자기장의 세기는 로 나타내는데, 그곳에 놓인 자하가 받는 힘을 뜻한다. 국제단위계에서는 자기장의 단위로 테슬라(T)를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우스(G)가 더 많이 쓰인다. 자기장의 경우에 자기 선속 밀도와 자기장의 세기가 다른 까닭은 자기장이 통과하는 매질마다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 자화되어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을 투자율(透磁率)이라고 하고 그리스 문자 μ로 나타낸다. 투자율은 물질마다 고유의 값이 있는데 투자율이 수백에 근접하는 강자성 물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물질은 1에 가까운 투자율을 가지고 있다. 진공 또는 자유공간의 투자율은 특히 μ 0로 나타내며, 그 값은 이다. 자기장의 자기 선속 밀도 는 자기장의 세기에 투자율 μ를 곱한 것과 같은 값을 갖는다. 즉,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 파일:Sturgeon electromagnet.png|섬네일|left|150px|1823년 제작된 스터전의 전자석 전기와 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현상이었지만, 이 둘이 사실은 같은 상호 작용이란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1820년 덴마크의 과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 나침반을 두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전류와 자기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프랑스의 과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논문을 읽고 자신도 같은 실험을 하여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 생기는 자기장의 방향을 관찰하였다. 앙페르는 전류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흐를 때 자기장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말아쥔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오른손 엄지를 위로 치켜 든다면 나머지 말아 쥔 네손가락은 반시계방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앙페르의 오른나사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수리 모형이 만들어져 앙페르의 회로 법칙이 수립되었다. 1824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스터전은 전류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전자석을 만들었다. 스터전이 처음 만든 전자석은 말굽 모양의 철심을 자기 코어로 이용한 것이었다. 스터전은 자기 코어에 굵은 구리 전선을 18 번 감아 전자석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절연체가 없었기 때문에 스터전은 구리 도선에 바니시를 발라 절연체로 사용하였다.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실험. 코일을 감아 만든 전자석을 다른 코일 속에 넣고 움직이면 전류가 발생한다. 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장에서도 전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자석을 도선 가까이에서 움직이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구 자석이든, 전자석이든 자기장을 형성하는 것이기만 하면 도선가까이에서 움직이면(즉, 자기장의 변화가 일어나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정리하여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표하였다. 자기에서 전기가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것을 이용한 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자기 유도를 이용하여 교류 발전기를 발명하였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파일:Guglielmo Marconi 1901 wireless signal.jpg|섬네일|1901년 대서양 너머로 무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굴리엘모 마르코니 1864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기존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이론의 수리 모형들을 약 20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맥스웰은 나중에 의미가 같은 방정식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본질적인 네 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이 다루는 전자기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 가우스 법칙: 가우스의 법칙은 전하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기장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이는 본질적으로 쿨롱의 법칙과 같은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가우스의 법칙은 두 개의 전하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하는 쿨롱의 법칙과 달리 하나의 전하만을 고려할 때에도 그에 따른 전하량을 계산할 수 있다. * 가우스 자기 법칙: 자기는 언제나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닫힌 곡면을 지나는 자기량은 곡면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통과하여 나오는 것이 언제나 같게 된다. 자기력은 벡터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자기량과 나오는 자기력의 합은 언제나 0 이 된다. *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 도선 주변에서 자기장이 변화하면 전류가 생기는데, 이렇게 전류가 발생하도록 하는 힘을 기전력이라고 한다.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은 자기 선속 밀도의 변화와 기전력의 관례를 수리적으로 정리한 법칙이다. * 앙페르 회로 법칙 : 앙페르는 전류 주변에 흐르는 자기장의 세기를 예측할 수 있는 수리 모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앙페르가 만든 방정식은 불완전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맥스웰은 이를 개선하여 새로운 방정식으로 대체하였다. 이 때문에 수정된 앙페르 회로 법칙은 앙페르-맥스웰 회로 법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맥스웰은 전자기학에 대한 법칙들의 수리 모형을 정리하면서 로런츠 힘은 다루지 않았다. 로렌츠 힘은 전하를 띈 물체가 전기장 안에서 받는 힘을 뜻한다. 오늘날 전자기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맥스웰은 맥스웰 방정식을 정리한 후, 자계가 사인파와 같은 파동을 보이며 변화한다면 전계 역시 그에 따라 사인파 파동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므로, 전기와 자기의 성질을 모두 갖는 파동, 즉 전자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맥스웰이 예측한 전자파는 1888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후, 전기 회로에서 생성된 전자파를 안테나를 통해 방출하거나 수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무선 통신이나 방송과 같은 전자파를 이용한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 전기 * 자기 * 전자기역학 * 고전 전자기학 * 양자 전기역학 * 이중 슬릿 실험 * 전자석 * 엑스선 * 광학 * 물리학 * ** 원서: * 분류:물리학
전기
[ "Introduction", "역사", "개념", "생산과 이용", "전기와 자연세계", "문화적 현상",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번개와 도시 조명은 전기의 가장 극적인 효과 중 일부이다.\n\n'''전기'''(電氣, )란 전하의 존재 및 흐름과 관련된 물리현상들의 총체이다. 전기는 번개, 정전기, 전자기 유도, 전류 등 일상적인 효과들의 원인이다. 또한 전기는 전파 따위의 전자기 복사를 발산하고 또한 수집할 수 있다.\n\n물리학에서 다루는 전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n* '''전하''': 일부 아원자 입자가 전자기 상호작용을 결정하는 능력. 전하가 대전된 물질은 전자기장을 만들어내고, 또한 전자기장의 영향을 받는다. 전하는 음전하와 양전하가 있다.\n* '''전기장'''(정전기학 참조): 전하들은 전기장에 둘러싸여 있다. 전기장은 다른 전하에 가해지는 힘을 생성한다. 전기장의 변화는 광속으로 전달된다.\n* '''전위''': 전기장이 전하에게 일을 하는 능력, 단위는 대개 볼트.\n* '''전류''': 전하가 대전된 입자들의 운동 또는 흐름. 단위는 대개 암페어.\n* '''전자석''': 움직이는 전하는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전류도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장의 변화는 전류를 만들어낸다.\n\n전기공학에서는 전기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n* '''전력''': 전류를 이용해 에너지를 공급한다.\n* '''전자공학''': 진공관,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집적회로 등의 능동소자 및 관련된 수동소자 기술로 만든 회로를 다룬다.\n* 전기는 17세기와 18세기까지 비록 과학적인 진보가 오지 않았을지라도, 고대 이래로 연구되어 왔다. 전기가 19세기 후반까지 되지 않았을지라도, 전기 기술자들은 산업적인 사용과 거주에 관한 사용에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전기 기술 발전에 있어 빠른 확장이 목격되었다. 에너지 원천으로서 전기의 비범한 융통성은 운송, 난방, 빛, 통신, 계산을 포함하는 거의 무제한으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력은 현대 산업 사회의 중추이다.\n\n", "\n파일:Thales.jpg|섬네일|upright|역사상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전기 연구자인 탈레스.\n전기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기물고기의 전기충격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750년의 고대 이집트 문헌에는 이 물고기들을 \"나일강의 뇌신\"이라 부르며 다른 모든 물고기의 \"수호자\"라고 했다. 이후 1천년기가 지난 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박물학자들과 의사들도 전기물고기의 존재를 기록했다. 대 플리니우스나 스크리보니우스 라르구스 같은 고대 사람들은 전기메기 및 전기가오리의 전기충격 효과 및 그 충격이 충격을 전달(오늘날 용어로 전도)할 수 있는 물체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통풍이나 두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어 치료가 되라고 전기물고기를 만지게 하는 처방도 이루어졌다. 번개와 여타 출처의 전기가 같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아랍인들일 것이다. 15세기 이전부터 아랍어에서는 전기가오리를 가리키는 말로 \"번개()라는 말을 사용했다.\n\n지중해 주변의 고대 문화에서는 특정한 물체. 예컨대 호박을 고양이 털로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기원전 600년경 정전기에 관한 다양한 관찰을 남겼다. 그는 마찰이 호박을 자성을 띠게 하며, 이는 자철석과 같은 문지르지 않아도 자성을 가지는 광물과 대조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마찰된 호박의 인력 작용이 자성의 효과라고 생각한 점에서 틀렸다. 그러나 훗날의 과학자들은 자기와 전기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논란이 많은 학설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이 전기도금의 원리를 알고 있었지도 모른다. 1936년 발견된 바그다드 전지가 그 증거로 제시되는데, 이 유물은 마치 갈바니 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유물이 전기적 성질을 정말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n\n파일:Franklin-Benjamin-LOC.jpg|섬네일|left|upright|벤저민 프랭클린은 18세기에 전기에 관한 광범한 연구를 수행했다.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프랭클린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이를 《전기의 역사와 오늘날의 상황》(1767년)에 기록했다.\n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전기는 단순히 지식인들의 호기심 대상에 불과했다. 1600년 잉글랜드의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와 자기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수행하여 자철석 효과와 정전기 효과는 서로 다른 것임을 구분해냈다. 길버트는 문지른 호박이 작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라틴어로 \"엘렉트리쿠스( < )\"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이것이 영어 낱말 \"electric\" 과 \"electricity\"의 어원이 되었으며, 이 두 낱말은 토머스 브라운의 《프세우도독시아 에피데미카》(1646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연구해보니 1646년보다 더 앞선 1435년에 안토니오 맥서니의 프라도니칸 길버르튼이라는 연구책에서 이 두 낱말을 언급한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n\n이후 오토 폰 게르니케, 로버트 보일, 스티븐 그레이, 샤를 프랑수아 드 시스테르네 등이 전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재를 팔아가면서 전기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프랭클린은 1752년 6월 물에 적신 연줄 끝에 금속 열쇠를 매달고 천둥치는 날 연을 띄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다만 프랭클린이 이 실험을 정말 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열쇠를 통해 그의 손등으로 전달된 스파크는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확실히 알게 하였다. 또한 프랭클린은 음전하와 양전하라는 개념을 내놓아 전하 저장 장치인 라이덴병의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질이 사실 역설이 아님을 설명해냈다.\n\n파일:M Faraday Th Phillips oil 1842.jpg|섬네일|upright|마이클 패러데이의 발견은 전동기 기술의 토대를 이루었다.\n1791년 루이지 갈바니가 생물전기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는 전기가 뉴런을 통해 근육에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는 아연판과 구리판을 겹쳐 만든 볼타 전지를 개발하여 과학자들이 그전까지 사용되던 정전기 기계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819년-1820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와 앙드레마리 앙페르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전자기 개념의 단초를 발견했다. 182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동기를 발명했고, 1827년에는 게오르크 옴이 전기회로를 수학적으로 분석해냈다. 그리고 1861년-1862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유명한 논문 〈물리적 역선에 관하여〉에서 전기와 자기(와 빛)을 하나로 통합하였다.\n\n이렇듯 19세기 초가 전기과학의 급속한 발전 시대였다면, 19세기 말은 전기공학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블라시 오토, 토머스 에디슨, 갈릴레오 페라리스, 올리버 헤비사이드, 예디크 아노이시, 켈빈 남작, 찰스 앨저넌 파슨스, 베르너 폰 지멘스, 조지프 스완, 니콜라 테슬라,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기를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부터 근대적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전환시켰고, 이는 제2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n\n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자외선을 쬔 전극이 전기 스파크를 더 잘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이산적인 양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빛의 에너지가 전자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광전효과로 인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양자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광전효과는 태양광판을 비롯한 광검출기에 이용되는 원리로서 오늘날 상업적 전기 생산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n", "=== 전하 ===\n전하(電荷, electric charge)는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으로, 어떤 물질이 갖고 있는 전기의 양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 단위는 쿨롱이며, 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10의 18제곱 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의 양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10^-1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n=== 전류 ===\n전기의 흐름\n전류는 물분자가 전하와 함께 이동하는 상태를 뜻한다.\n전기는 물분자가 가지는 전하의 상태를 의미하고,\n물분자의 수소원자의 전하가 양전하 상태를 갖고\n물분자의 산소원자가 음전하의 상태를 가지며\n물분자 크기 180pm이내에서 갖는 전하는 한국과학으로 직류전기로 표기되어 있다.그러므로 전류와 전기의 구분은 물분자가 전기도체인 구리선과 함께 움직이느냐와 물분자의 수소원자 전하와 산소원자의 전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기와 전류가 한국과학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n\n=== 전기장 ===\n전기를 띤 물체 주위의 전기 작용이 존재하는 공간. 전계(電界). 전장(電場).\n\n=== 전위 ===\n전기적인 위치에너지 전압과 비슷한 개념이다.\n\n=== 전자석 ===\n철심에 코일을 감고 코일에 전류를 흘리게 되면 철심이 자성을 띄게 되는데 이것을 전자석이라고 한다.\n\n=== 전기화학===\n전기화학은 물질간의 전자의 이동과 그것들에 의한 여러 현상을 취급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화학, 분석화학, 화학공학 등과의 연관이 깊다.\n\n=== 전기회로 ===\n전기 회로는 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전원과 함께 설치된 닫힌 회로다. 회로에는 저항기, 축전기, 코일 등 다양한 전기적 소자가 전기 전도체인 전선에 의해 연결된다.\n\n=== 전력 ===\n전기에너지의 힘\n직류에서의 전력 공식은 P=VI\n\n교류에선 전력이 세가지로 피상전력,무효전력,유효전력이 있다.\n\n=== 전자공학 ===\n전자공학은 구동력으로서 전력을 이용하는 구성장치, 시스템 또는 여러 장비들을 개발하기 위하여 전자들의 운동에 대한 영향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공학의 한 분야이다.\n\n=== 전자기파 ===\n\n전자기파는 특정 전자기적인 과정에 의해 복사되는 에너지이다. 가시광선도 전자기파에 속하며 전파, 적외선, 자외선, X선 같은 전자기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n고전 역학에서 전자기복사는 동시에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구성된 전자기파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들은 진공에서 빛의 속력으로 전달된다. 두 장의 진동은 서로 수직이며 진행방향에 수직이고 횡파이다.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크거나 작은 순서대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라디오파,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이 포함된다.\n", "=== 발전과 전달 ===\n 와 샌즈!\n\n=== 사용 ===\n\n\n=== 산업에 미친 영향 ===\n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은 파괴적 기술이 아주 잘나가는 기업들을 몰락시키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를 조명함으로써 경제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전기화'는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기술 중 하나였다. 이는 21세기의 ICT 혁명에 따른 '디지털화'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20세기의 처음 몇십 년 동안 전기화는 미국 제조업에 마치 대량 멸종에 흡사한 위기를 야기했다.\n\n20세기가 시작될 때 미국의 제조업은 '산업의 트러스트(industrial trusts)'라고 불리는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기업들은 합병을 통해 독접적 지위를 구축한 대기업들이었다. 이 대기업의 소유주들은 생산, 구매, 유통, 판매 등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용하고자 했다. 몇몇 트러스트 소유주들은 시장을 독접함으로써 가격을 결정할 힘을 확보할 만큼 거대한 기업 집단을 구축하기를 원했다. 1904년에 발표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그런 트러스트가 300개가 넘었다.\n\n당시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장기간 동안 지배를 유지할 것처럼 보였다. 자본이 충분했고, 1세대 전문 경영자들이 운영했고, 새로운 기술에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전신을 통해 통신하고, 철도로 상품을 실어 나르는 것이 좋다는 점을 금방 알았으며, 공장을 증기력에서 전력으로 바꿀 의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화가 확산될 때 이를 계속 실행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 즉 사업 분야의 많은 영역들에서 - 모두가 자원과 역량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다.\n\n경제학자 쇼 리버모어(Shaw Livermore)가 1935년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다르면, 1888~1905년에 설립된 산업 트러스트 중 1930년대 초에 도산한 사례가 40퍼센트를 넘었다. 또 11퍼센트는 \"서류상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뒤섞인 ... '비틀거리는' 집단들이었다. ... 대체로 조사한 기간 중 최근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더 나빴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트러스트 중 대부분은 규모가 훨씬 축소되었다. 경제학자 리처드 케이브스(Richard Caves) 연구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05년에 시장 지배력을 발휘한 기업 중 49곳이 1929년에도 존속했지만, 이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은 평균 69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3분의 1 이상 감소되었다고 한다.\n", "=== 심리적 효과 ===\n\n=== 동물의 세계 ===\n\n", "\n", "* 앙페르의 회로법칙\n* 전기적 위치 에너지\n* 수류의 유추\n* 발전\n", "\n", "\n* \"One-Hundred Years of Electricity\", May 1931, Popular Mechanics\n* Illustrated view of how an American home's electrical system works\n* Electricity around the world\n* Electricity Misconceptions\n* Electricity and Magnetism\n* Understanding Electricity and Electronics in about 10 Minutes\n* World Bank report on Water, Electricity and Utility subsidies\n\n\n\n\n \n분류:전자공학\n분류:통신공학" ]
번개와 도시 조명은 전기의 가장 극적인 효과 중 일부이다. '''전기'''(電氣, )란 전하의 존재 및 흐름과 관련된 물리현상들의 총체이다. 전기는 번개, 정전기, 전자기 유도, 전류 등 일상적인 효과들의 원인이다. 또한 전기는 전파 따위의 전자기 복사를 발산하고 또한 수집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전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전하''': 일부 아원자 입자가 전자기 상호작용을 결정하는 능력. 전하가 대전된 물질은 전자기장을 만들어내고, 또한 전자기장의 영향을 받는다. 전하는 음전하와 양전하가 있다. * '''전기장'''(정전기학 참조): 전하들은 전기장에 둘러싸여 있다. 전기장은 다른 전하에 가해지는 힘을 생성한다. 전기장의 변화는 광속으로 전달된다. * '''전위''': 전기장이 전하에게 일을 하는 능력, 단위는 대개 볼트. * '''전류''': 전하가 대전된 입자들의 운동 또는 흐름. 단위는 대개 암페어. * '''전자석''': 움직이는 전하는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전류도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장의 변화는 전류를 만들어낸다. 전기공학에서는 전기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 '''전력''': 전류를 이용해 에너지를 공급한다. * '''전자공학''': 진공관,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집적회로 등의 능동소자 및 관련된 수동소자 기술로 만든 회로를 다룬다. * 전기는 17세기와 18세기까지 비록 과학적인 진보가 오지 않았을지라도, 고대 이래로 연구되어 왔다. 전기가 19세기 후반까지 되지 않았을지라도, 전기 기술자들은 산업적인 사용과 거주에 관한 사용에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전기 기술 발전에 있어 빠른 확장이 목격되었다. 에너지 원천으로서 전기의 비범한 융통성은 운송, 난방, 빛, 통신, 계산을 포함하는 거의 무제한으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력은 현대 산업 사회의 중추이다. 파일:Thales.jpg|섬네일|upright|역사상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전기 연구자인 탈레스. 전기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기물고기의 전기충격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750년의 고대 이집트 문헌에는 이 물고기들을 "나일강의 뇌신"이라 부르며 다른 모든 물고기의 "수호자"라고 했다. 이후 1천년기가 지난 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박물학자들과 의사들도 전기물고기의 존재를 기록했다. 대 플리니우스나 스크리보니우스 라르구스 같은 고대 사람들은 전기메기 및 전기가오리의 전기충격 효과 및 그 충격이 충격을 전달(오늘날 용어로 전도)할 수 있는 물체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통풍이나 두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어 치료가 되라고 전기물고기를 만지게 하는 처방도 이루어졌다. 번개와 여타 출처의 전기가 같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아랍인들일 것이다. 15세기 이전부터 아랍어에서는 전기가오리를 가리키는 말로 "번개()라는 말을 사용했다. 지중해 주변의 고대 문화에서는 특정한 물체. 예컨대 호박을 고양이 털로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기원전 600년경 정전기에 관한 다양한 관찰을 남겼다. 그는 마찰이 호박을 자성을 띠게 하며, 이는 자철석과 같은 문지르지 않아도 자성을 가지는 광물과 대조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마찰된 호박의 인력 작용이 자성의 효과라고 생각한 점에서 틀렸다. 그러나 훗날의 과학자들은 자기와 전기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논란이 많은 학설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이 전기도금의 원리를 알고 있었지도 모른다. 1936년 발견된 바그다드 전지가 그 증거로 제시되는데, 이 유물은 마치 갈바니 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유물이 전기적 성질을 정말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파일:Franklin-Benjamin-LOC.jpg|섬네일|left|upright|벤저민 프랭클린은 18세기에 전기에 관한 광범한 연구를 수행했다.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프랭클린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이를 《전기의 역사와 오늘날의 상황》(1767년)에 기록했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전기는 단순히 지식인들의 호기심 대상에 불과했다. 1600년 잉글랜드의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와 자기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수행하여 자철석 효과와 정전기 효과는 서로 다른 것임을 구분해냈다. 길버트는 문지른 호박이 작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라틴어로 "엘렉트리쿠스( < )"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이것이 영어 낱말 "electric" 과 "electricity"의 어원이 되었으며, 이 두 낱말은 토머스 브라운의 《프세우도독시아 에피데미카》(1646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연구해보니 1646년보다 더 앞선 1435년에 안토니오 맥서니의 프라도니칸 길버르튼이라는 연구책에서 이 두 낱말을 언급한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오토 폰 게르니케, 로버트 보일, 스티븐 그레이, 샤를 프랑수아 드 시스테르네 등이 전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재를 팔아가면서 전기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프랭클린은 1752년 6월 물에 적신 연줄 끝에 금속 열쇠를 매달고 천둥치는 날 연을 띄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다만 프랭클린이 이 실험을 정말 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열쇠를 통해 그의 손등으로 전달된 스파크는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확실히 알게 하였다. 또한 프랭클린은 음전하와 양전하라는 개념을 내놓아 전하 저장 장치인 라이덴병의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질이 사실 역설이 아님을 설명해냈다. 파일:M Faraday Th Phillips oil 1842.jpg|섬네일|upright|마이클 패러데이의 발견은 전동기 기술의 토대를 이루었다. 1791년 루이지 갈바니가 생물전기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는 전기가 뉴런을 통해 근육에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는 아연판과 구리판을 겹쳐 만든 볼타 전지를 개발하여 과학자들이 그전까지 사용되던 정전기 기계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819년-1820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와 앙드레마리 앙페르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전자기 개념의 단초를 발견했다. 182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동기를 발명했고, 1827년에는 게오르크 옴이 전기회로를 수학적으로 분석해냈다. 그리고 1861년-1862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유명한 논문 〈물리적 역선에 관하여〉에서 전기와 자기(와 빛)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렇듯 19세기 초가 전기과학의 급속한 발전 시대였다면, 19세기 말은 전기공학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블라시 오토, 토머스 에디슨, 갈릴레오 페라리스, 올리버 헤비사이드, 예디크 아노이시, 켈빈 남작, 찰스 앨저넌 파슨스, 베르너 폰 지멘스, 조지프 스완, 니콜라 테슬라,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기를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부터 근대적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전환시켰고, 이는 제2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자외선을 쬔 전극이 전기 스파크를 더 잘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이산적인 양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빛의 에너지가 전자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광전효과로 인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양자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광전효과는 태양광판을 비롯한 광검출기에 이용되는 원리로서 오늘날 상업적 전기 생산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 전하 === 전하(電荷, electric charge)는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으로, 어떤 물질이 갖고 있는 전기의 양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 단위는 쿨롱이며, 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10의 18제곱 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의 양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10^-1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 전류 === 전기의 흐름 전류는 물분자가 전하와 함께 이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전기는 물분자가 가지는 전하의 상태를 의미하고, 물분자의 수소원자의 전하가 양전하 상태를 갖고 물분자의 산소원자가 음전하의 상태를 가지며 물분자 크기 180pm이내에서 갖는 전하는 한국과학으로 직류전기로 표기되어 있다.그러므로 전류와 전기의 구분은 물분자가 전기도체인 구리선과 함께 움직이느냐와 물분자의 수소원자 전하와 산소원자의 전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기와 전류가 한국과학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 전기장 === 전기를 띤 물체 주위의 전기 작용이 존재하는 공간. 전계(電界). 전장(電場). === 전위 === 전기적인 위치에너지 전압과 비슷한 개념이다. === 전자석 === 철심에 코일을 감고 코일에 전류를 흘리게 되면 철심이 자성을 띄게 되는데 이것을 전자석이라고 한다. === 전기화학=== 전기화학은 물질간의 전자의 이동과 그것들에 의한 여러 현상을 취급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화학, 분석화학, 화학공학 등과의 연관이 깊다. === 전기회로 === 전기 회로는 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전원과 함께 설치된 닫힌 회로다. 회로에는 저항기, 축전기, 코일 등 다양한 전기적 소자가 전기 전도체인 전선에 의해 연결된다. === 전력 === 전기에너지의 힘 직류에서의 전력 공식은 P=VI 교류에선 전력이 세가지로 피상전력,무효전력,유효전력이 있다. === 전자공학 === 전자공학은 구동력으로서 전력을 이용하는 구성장치, 시스템 또는 여러 장비들을 개발하기 위하여 전자들의 운동에 대한 영향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공학의 한 분야이다. === 전자기파 === 전자기파는 특정 전자기적인 과정에 의해 복사되는 에너지이다. 가시광선도 전자기파에 속하며 전파, 적외선, 자외선, X선 같은 전자기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전 역학에서 전자기복사는 동시에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구성된 전자기파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들은 진공에서 빛의 속력으로 전달된다. 두 장의 진동은 서로 수직이며 진행방향에 수직이고 횡파이다.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크거나 작은 순서대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라디오파,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이 포함된다. === 발전과 전달 === 와 샌즈! === 사용 === === 산업에 미친 영향 ===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은 파괴적 기술이 아주 잘나가는 기업들을 몰락시키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를 조명함으로써 경제학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전기화'는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기술 중 하나였다. 이는 21세기의 ICT 혁명에 따른 '디지털화'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20세기의 처음 몇십 년 동안 전기화는 미국 제조업에 마치 대량 멸종에 흡사한 위기를 야기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 미국의 제조업은 '산업의 트러스트(industrial trusts)'라고 불리는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기업들은 합병을 통해 독접적 지위를 구축한 대기업들이었다. 이 대기업의 소유주들은 생산, 구매, 유통, 판매 등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용하고자 했다. 몇몇 트러스트 소유주들은 시장을 독접함으로써 가격을 결정할 힘을 확보할 만큼 거대한 기업 집단을 구축하기를 원했다. 1904년에 발표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그런 트러스트가 300개가 넘었다. 당시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장기간 동안 지배를 유지할 것처럼 보였다. 자본이 충분했고, 1세대 전문 경영자들이 운영했고, 새로운 기술에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미국 산업 트러스트는 전신을 통해 통신하고, 철도로 상품을 실어 나르는 것이 좋다는 점을 금방 알았으며, 공장을 증기력에서 전력으로 바꿀 의향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화가 확산될 때 이를 계속 실행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 즉 사업 분야의 많은 영역들에서 - 모두가 자원과 역량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제학자 쇼 리버모어(Shaw Livermore)가 1935년에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다르면, 1888~1905년에 설립된 산업 트러스트 중 1930년대 초에 도산한 사례가 40퍼센트를 넘었다. 또 11퍼센트는 "서류상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뒤섞인 ... '비틀거리는' 집단들이었다. ... 대체로 조사한 기간 중 최근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더 나빴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트러스트 중 대부분은 규모가 훨씬 축소되었다. 경제학자 리처드 케이브스(Richard Caves) 연구진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05년에 시장 지배력을 발휘한 기업 중 49곳이 1929년에도 존속했지만, 이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은 평균 69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3분의 1 이상 감소되었다고 한다. === 심리적 효과 === === 동물의 세계 === * 앙페르의 회로법칙 * 전기적 위치 에너지 * 수류의 유추 * 발전 * "One-Hundred Years of Electricity", May 1931, Popular Mechanics * Illustrated view of how an American home's electrical system works * Electricity around the world * Electricity Misconceptions * Electricity and Magnetism * Understanding Electricity and Electronics in about 10 Minutes * World Bank report on Water, Electricity and Utility subsidies 분류:전자공학 분류:통신공학
전하
[ "Introduction", "개요", "전하에 작용하는 힘", "전하량", "같이 읽기", "주해", "각주" ]
[ "\n\n섬네일\n'''전하'''(電荷, )는 전자기장내에서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Q)'''이라고 한다.\n\n전하의 국제단위는 쿨롱이며, 단위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량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n\n또한,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이렇게 전하를 띄는 물체는 '''대전체'''(帶電體)로 부른다.\n",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호박을 문지르면 옷자락이나 먼지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언어들에서 전기를 뜻하는 단어들(, , )은 호박을 뜻하는 에서 기원하였다. 18세기 중엽 벤저민 프랭클린은 뇌우 속으로 연을 날리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통해 번개가 호박에 의해 발생되는 것과 동일한 전기임을 입증하였다.\n\n같은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척력이 작용하고 다른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한다. 이 두 종류의 전하를 '''양전하'''와 '''음전하'''라고 한다. 물체가 양전하 또는 음전하를 띄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 입자의 전하 때문이다. 전자는 음전하를 띄고 두 개의 위 쿼크와 하나의 아래 쿼크로 이루어진 양성자는 양전하를 띈다. 기본 입자를 고려하지 않는 원자 단위 이상에서 전하량은 모두 전자 한 개의 전하량인 1.6021773349 에 대한 정수배로 존재한다. 즉, 일반적인 경우 전자 한 개가 갖는 전하량이 전하량의 최소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n\n일반적으로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의 수가 균형을 이루어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원자의 가장 바깥 껍질에 위치한 전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마찰과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쉽게 원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전자들이 이동하게 되면 전자를 잃은 쪽 물질은 양전하를 띄게 되고 반대편의 물질은 음전하를 띄게 된다. 마찰과 같은 것에 의해 축적되어 흐르지 않는 전기를 정전기라고 한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가 마찰하면 정전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겨울철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걷는다면 마찰로 인해 우리 몸에 정전기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정전기는 자동차 문 손잡이와 같은 금속을 만나면 전기충격을 줄 수도 있다.\n", "\n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n\n\n\n\n\n\n'''쿨롱의 전하 측정 시험'''\n----\n\n\n\n 파일:Bcoulomb.png|200px|섬네일|왼쪽| 샤를 드 쿨롱이 고안한 전하 측정 시험장치\n\n '''시험과정''' 1. 금박을 입힌 작은 금속공을 여러 개 준비한다. 2. 하나의 금속공을 마찰하여 정전기를 대전시킨다. 3. 대전된 금속공에 다른 금속 공을 접촉시키면 각 금속공의 전하량은 원래 전하량의 ½이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찰로 대전된 전하량에 대해 1/4, 1/8, 1/16의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준비한다. 4. 왼쪽 그림과 같은 비틀림 저울을 설치하고 한쪽에는 1/2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서로 다른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연결하여 금속공이 이동하는 거리를 측정한다.\n\n\n\n '''시험 결과'''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n\n\n\n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n:\n: F=힘, Ke=쿨롱 상수, q_1 q_2=전하의 크기, r=두 전하 사이의 거리\n\n*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로 이 상수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n:\n::   N m2 C−2\n\n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n: C−2\n:: = 9 N 1000 Kg중 = 100만 t중\n\n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0t 트럭 1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n", "\n하나의 전자가 갖는 전하량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전하량을 측정하는 SI 단위인 쿨롱은 6.24150962915265개의 전자가 한꺼번에 수송하는 전하량을 사용한다. 이 때 전류의 단위 암페어는 1초 동안 1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n", "* 기본 전하\n* 전기장\n* 전기\n* 방전\n", "\n", "\n\n\n\n\n \n분류:물리량\n분류:화학적 성질\n분류:전기\n분류:전자공학\n분류:통신공학\n분류:보존 법칙" ]
섬네일 '''전하'''(電荷, )는 전자기장내에서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Q)'''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단위는 쿨롱이며, 단위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량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또한,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이렇게 전하를 띄는 물체는 '''대전체'''(帶電體)로 부른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호박을 문지르면 옷자락이나 먼지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언어들에서 전기를 뜻하는 단어들(, , )은 호박을 뜻하는 에서 기원하였다. 18세기 중엽 벤저민 프랭클린은 뇌우 속으로 연을 날리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통해 번개가 호박에 의해 발생되는 것과 동일한 전기임을 입증하였다. 같은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척력이 작용하고 다른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한다. 이 두 종류의 전하를 '''양전하'''와 '''음전하'''라고 한다. 물체가 양전하 또는 음전하를 띄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 입자의 전하 때문이다. 전자는 음전하를 띄고 두 개의 위 쿼크와 하나의 아래 쿼크로 이루어진 양성자는 양전하를 띈다. 기본 입자를 고려하지 않는 원자 단위 이상에서 전하량은 모두 전자 한 개의 전하량인 1.6021773349 에 대한 정수배로 존재한다. 즉, 일반적인 경우 전자 한 개가 갖는 전하량이 전하량의 최소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의 수가 균형을 이루어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원자의 가장 바깥 껍질에 위치한 전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마찰과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쉽게 원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전자들이 이동하게 되면 전자를 잃은 쪽 물질은 양전하를 띄게 되고 반대편의 물질은 음전하를 띄게 된다. 마찰과 같은 것에 의해 축적되어 흐르지 않는 전기를 정전기라고 한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가 마찰하면 정전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겨울철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걷는다면 마찰로 인해 우리 몸에 정전기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정전기는 자동차 문 손잡이와 같은 금속을 만나면 전기충격을 줄 수도 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쿨롱의 전하 측정 시험''' ---- 파일:Bcoulomb.png|200px|섬네일|왼쪽| 샤를 드 쿨롱이 고안한 전하 측정 시험장치 '''시험과정''' 1. 금박을 입힌 작은 금속공을 여러 개 준비한다. 2. 하나의 금속공을 마찰하여 정전기를 대전시킨다. 3. 대전된 금속공에 다른 금속 공을 접촉시키면 각 금속공의 전하량은 원래 전하량의 ½이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찰로 대전된 전하량에 대해 1/4, 1/8, 1/16의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준비한다. 4. 왼쪽 그림과 같은 비틀림 저울을 설치하고 한쪽에는 1/2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서로 다른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연결하여 금속공이 이동하는 거리를 측정한다. '''시험 결과'''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 F=힘, Ke=쿨롱 상수, q_1 q_2=전하의 크기, r=두 전하 사이의 거리 *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로 이 상수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 ::   N m2 C−2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 C−2 :: = 9 N 1000 Kg중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0t 트럭 1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하나의 전자가 갖는 전하량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전하량을 측정하는 SI 단위인 쿨롱은 6.24150962915265개의 전자가 한꺼번에 수송하는 전하량을 사용한다. 이 때 전류의 단위 암페어는 1초 동안 1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기본 전하 * 전기장 * 전기 * 방전 분류:물리량 분류:화학적 성질 분류:전기 분류:전자공학 분류:통신공학 분류:보존 법칙
쿨롱 법칙
[ "Introduction", "쿨롱의 실험", "수학적 표현", "역제곱 법칙",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쿨롱 법칙'''() 또는 '''쿨롱 힘 법칙'''()은 두 전하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정전기적 인력이 두 전하의 곱에 비례하고, 두 입자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역제곱 법칙의 하나다. 샤를 드 쿨롱이 발견했다.\n",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n\n\n\n\n\n\n'''쿨롱의 전하 측정 실험'''\n----\n\n\n\n 파일:Bcoulomb.png|200px|섬네일|왼쪽| 샤를 드 쿨롱이 고안한 전하 측정 시험장치\n\n '''실험과정''' 1. 금박을 입힌 작은 금속공을 여러 개 준비한다. 2. 하나의 금속공을 마찰하여 정전기를 대전시킨다. 3. 대전된 금속공에 다른 금속 공을 접촉시키면 각 금속공의 전하량은 원래 전하량의 ½이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찰로 대전된 전하량에 대해 1/4, 1/8, 1/16의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준비한다. 4. 왼쪽 그림과 같은 비틀림 저울을 설치하고 한쪽에는 1/2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서로 다른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연결하여 금속공이 이동하는 거리를 측정한다.\n\n\n\n '''실험 결과'''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 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n\n\n",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n:\n:\n = 전기력\n = 쿨롱 상수\n · = (전하의 크기)의 곱\n = 두 전하 사이의 거리\n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밀어내고, 다르면 끌어당긴다.\n\n*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로 다음과 같다.\n:\n::   (N · m2 · C−2 )\n\n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n: \n:: \n (Kg중) = 100만 t중\n\n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t 트럭 10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n", "\n쿨롱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역제곱 법칙, 즉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가해지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는 공간이 3차원일 때 일정한 밀도로 퍼져나가는 전기장이 어떤 거리에서 2차원 면을 이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n", "* 비오-사바르 법칙\n* 전기장\n* 쿨롱\n* 전자기 상호작용\n", "\n", "* 네이버 캐스트 - 전기력\n\n\n분류:과학 법칙\n분류:물리학 개념\n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n분류:전자기학\n분류:정전기학\n분류:힘" ]
'''쿨롱 법칙'''() 또는 '''쿨롱 힘 법칙'''()은 두 전하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정전기적 인력이 두 전하의 곱에 비례하고, 두 입자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역제곱 법칙의 하나다. 샤를 드 쿨롱이 발견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 '''쿨롱의 전하 측정 실험''' ---- 파일:Bcoulomb.png|200px|섬네일|왼쪽| 샤를 드 쿨롱이 고안한 전하 측정 시험장치 '''실험과정''' 1. 금박을 입힌 작은 금속공을 여러 개 준비한다. 2. 하나의 금속공을 마찰하여 정전기를 대전시킨다. 3. 대전된 금속공에 다른 금속 공을 접촉시키면 각 금속공의 전하량은 원래 전하량의 ½이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찰로 대전된 전하량에 대해 1/4, 1/8, 1/16의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준비한다. 4. 왼쪽 그림과 같은 비틀림 저울을 설치하고 한쪽에는 1/2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서로 다른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연결하여 금속공이 이동하는 거리를 측정한다. '''실험 결과'''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 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 = 전기력 = 쿨롱 상수 · = (전하의 크기)의 곱 = 두 전하 사이의 거리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밀어내고, 다르면 끌어당긴다. *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로 다음과 같다. : ::   (N · m2 · C−2 )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 :: (Kg중)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t 트럭 10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쿨롱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역제곱 법칙, 즉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가해지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는 공간이 3차원일 때 일정한 밀도로 퍼져나가는 전기장이 어떤 거리에서 2차원 면을 이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 * 비오-사바르 법칙 * 전기장 * 쿨롱 * 전자기 상호작용 * 네이버 캐스트 - 전기력 분류:과학 법칙 분류:물리학 개념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전자기학 분류:정전기학 분류:힘
전기장
[ "Introduction", "쌍극자 사이의 전기장", "같이 보기" ]
[ "\n\n'''전기장'''(electric field)은 관찰 대상인 전하를 띤 물체가 공간 상의 어느 점 P에 있는 시험 전하에 가해주는 단위 전하량 당 전기력을 뜻한다. 즉, 시험 전하가 느끼는 전기력을 시험 전하의 전하량으로 나눈 값이다. 전기장은, 어느 전하가 다른 전하에 전기력을 가할 때, 순간적인 원격 작용이 아니라 이러한 전기력을 매개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다. 즉, 전기력이 갖고 있는 원격력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전하가 주위에게 전기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위공간을 적합하게 변형시킨 것이 전기장이다.\n\n또 다르게 말하면, 전기장은 공간상에 전하가 존재할 때, 그 전하에 의해 생기는 공간상 각 지점의 전위의 기울기를 말한다. 전위의 기울기이기 때문에, 단위는 V/m가 된다.\n\n또한 일반적으론, 공간상의 한 점의 전기장의 크기는 그 지점에 단위전하(+1 C)을 놓았을 때 그 전하가 받는 전기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단위는 N/C이며, 단위는 위와 동일하게 V/m이다.\n\n\n* : 전기장\n* : 전하량\n\n\n파일:Cat demonstrating static cling with styrofoam peanuts.jpg|섬네일|300px|전기장의 존재 증거. 고양이의 움직임으로 인한 마찰전기가 고양이의 털에 정전하를 발생시킨다. 정전하들의 전기장은 스티로폼의 분자들을 극화시키고(정전유도), 충분히 가벼워서 전기력이 중력보다 큰 스티로폼 조각들이 고양이 털에 들러붙는다.\n* 전기장의 단위 유도\n\n\n\n* : 변위 Displacement\n* : 에너지 Energy\n\n : 단위 전하가 갖는 에너지 = 전위\n\n\n", "가 두 전하 사이의 중점으로부터 특정 위치까지의 거리이고, 는 전기 쌍극자모멘트라고 할 때, 다음 공식이 성립한다.\n\n\n* : 진공의 유전율\n", "* 전하\n\n\n\n분류:전자기학\n분류:전기\n분류:힘\n분류:물리량" ]
'''전기장'''(electric field)은 관찰 대상인 전하를 띤 물체가 공간 상의 어느 점 P에 있는 시험 전하에 가해주는 단위 전하량 당 전기력을 뜻한다. 즉, 시험 전하가 느끼는 전기력을 시험 전하의 전하량으로 나눈 값이다. 전기장은, 어느 전하가 다른 전하에 전기력을 가할 때, 순간적인 원격 작용이 아니라 이러한 전기력을 매개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다. 즉, 전기력이 갖고 있는 원격력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전하가 주위에게 전기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위공간을 적합하게 변형시킨 것이 전기장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기장은 공간상에 전하가 존재할 때, 그 전하에 의해 생기는 공간상 각 지점의 전위의 기울기를 말한다. 전위의 기울기이기 때문에, 단위는 V/m가 된다. 또한 일반적으론, 공간상의 한 점의 전기장의 크기는 그 지점에 단위전하(+1 C)을 놓았을 때 그 전하가 받는 전기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단위는 N/C이며, 단위는 위와 동일하게 V/m이다. * : 전기장 * : 전하량 파일:Cat demonstrating static cling with styrofoam peanuts.jpg|섬네일|300px|전기장의 존재 증거. 고양이의 움직임으로 인한 마찰전기가 고양이의 털에 정전하를 발생시킨다. 정전하들의 전기장은 스티로폼의 분자들을 극화시키고(정전유도), 충분히 가벼워서 전기력이 중력보다 큰 스티로폼 조각들이 고양이 털에 들러붙는다. * 전기장의 단위 유도 * : 변위 Displacement * : 에너지 Energy : 단위 전하가 갖는 에너지 = 전위 가 두 전하 사이의 중점으로부터 특정 위치까지의 거리이고, 는 전기 쌍극자모멘트라고 할 때, 다음 공식이 성립한다. * : 진공의 유전율 * 전하 분류:전자기학 분류:전기 분류:힘 분류:물리량
가우스 법칙
[ "Introduction", "정의", "적용", "역사", "각주", "같이 보기" ]
[ "\n\n파일:Maxwell integral Gauss sphere.svg|섬네일|upright=1.2|가우스 법칙은 적분 형태로 주어졌을 때, 대칭성에 따라 전기장이 균일한 닫힌 표면을 찾을 수 있는 경우에 특히 유용된다. 전기 선속은 그 표면적과 전기장의 세기의 곱으로 표현되며, 해당 표면에 포함된 총 전하에 비례한다. 여기서는 충전된 구체의 외부(''r'' > ''R'')와 내부(''r'' < ''R'')의 전기장을 계산한다.\n내부에 전하가 있는 구에 대한 가우스 법칙\n'''가우스 법칙'''()은 폐곡면을 통과하는 전기 선속이 폐곡면 속의 알짜 전하량과 동일하다는 법칙이다. 맥스웰 방정식 가운데 하나다.\n", "가우스 법칙은 미분 형태와 적분 형태가 있다. 두 형태는 발산 정리에 대등하다.\n\n가우스 법칙의 적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n: \n여기서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표면 ''A'' 위의 미소 면적을 나타내는 벡터 (그 지점의 접평면에서 바깥쪽을 향하는 법선 벡터), 는 폐곡면 속의 알짜 자유 전하량이다. 는 표면 ''A''전체에 대한 면적분이다.\n\n가우스 법칙의 미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n:\n여기서 는 발산 연산자,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자유 전하 밀도다.\n\n위 공식은 자유 전하에 대한 가우스 법칙이다. 즉, 와 는 매질 속의 분극 전하를 포함하지 않는다. 분극 전하를 포함한 모든 전하에 대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n: \n:.\n여기서 는 알짜 전하 (분극 전하 포함), 는 전하 밀도 (분극 전하 포함)다. 는 전기장이다. 는 진공의 유전율로, 기본 상수다.\n", "\n(전도체 표면, σ는 단위면적당 전하량이다.)\n\n\n(도선, λ은 단위길이당 전하량이고, r은 가우스 표면까지의 거리이다.)\n\n (면)\n\n (구 껍질 또는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표면)\n\n (구 껍질에서, r<R인 구의 표면)\n\n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단위면적당 전하)\n",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1835년에 발견하고, 1867년에 발표하였다.\n", "\n", "* 가우스 자기 법칙\n* 맥스웰 방정식\n* 발산 정리\n*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n\n분류:전자기학\n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n분류: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n분류:맥스웰 방정식" ]
파일:Maxwell integral Gauss sphere.svg|섬네일|upright=1.2|가우스 법칙은 적분 형태로 주어졌을 때, 대칭성에 따라 전기장이 균일한 닫힌 표면을 찾을 수 있는 경우에 특히 유용된다. 전기 선속은 그 표면적과 전기장의 세기의 곱으로 표현되며, 해당 표면에 포함된 총 전하에 비례한다. 여기서는 충전된 구체의 외부(''r'' > ''R'')와 내부(''r'' < ''R'')의 전기장을 계산한다. 내부에 전하가 있는 구에 대한 가우스 법칙 '''가우스 법칙'''()은 폐곡면을 통과하는 전기 선속이 폐곡면 속의 알짜 전하량과 동일하다는 법칙이다. 맥스웰 방정식 가운데 하나다. 가우스 법칙은 미분 형태와 적분 형태가 있다. 두 형태는 발산 정리에 대등하다. 가우스 법칙의 적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표면 ''A'' 위의 미소 면적을 나타내는 벡터 (그 지점의 접평면에서 바깥쪽을 향하는 법선 벡터), 는 폐곡면 속의 알짜 자유 전하량이다. 는 표면 ''A''전체에 대한 면적분이다. 가우스 법칙의 미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발산 연산자,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자유 전하 밀도다. 위 공식은 자유 전하에 대한 가우스 법칙이다. 즉, 와 는 매질 속의 분극 전하를 포함하지 않는다. 분극 전하를 포함한 모든 전하에 대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 :. 여기서 는 알짜 전하 (분극 전하 포함), 는 전하 밀도 (분극 전하 포함)다. 는 전기장이다. 는 진공의 유전율로, 기본 상수다. (전도체 표면, σ는 단위면적당 전하량이다.) (도선, λ은 단위길이당 전하량이고, r은 가우스 표면까지의 거리이다.) (면) (구 껍질 또는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표면) (구 껍질에서, r<R인 구의 표면)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단위면적당 전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1835년에 발견하고, 1867년에 발표하였다. * 가우스 자기 법칙 * 맥스웰 방정식 * 발산 정리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분류:전자기학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분류:맥스웰 방정식
전위
[ "Introduction", "정의", "같이 보기" ]
[ "\n\n\nthumb\n'''전위'''(, ) 또는 '''정전 퍼텐셜'''()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전기장에서 단위 전하가 가지게 되는 전기적 위치 에너지다. 국제단위계에서 단위는 볼트다.\n",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인데, 정전기학에서는 전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자기장이 없고, 따라서 이 값이 0이 된다. 즉 의 회전이 0이 되므로 이를 어떤 스칼라함수의 기울기로 표현할 수 있다. 보통 그 스칼라 함수를 라고 쓰고, 를 전위라고 부른다. 즉 가 된다.\n\n위치 에너지가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두 지점 사이의 위치 에너지 차이만이 절대적인 값인 것처럼, 전위 또한 상대적인 값이다. 즉 특정 지점의 전위는 임의로 정의할 수 있고, 두 지점의 전위차만이 물리적 의미를 갖는다. (전위차는 전압이라고도 불린다.) 수학적인 이유는 에 어떤 상수를 더해준 값인 에 대해서도 가 되어 같은 전기장이 나오기 때문이다.\n\n다만, 이론 물리학에서는 통상적으로 계에서 \"무한히 먼 곳\"에서의 전위를 0으로 놓는다. 전기 회로에서는 보통 접지(接地, )의 전위를 0으로 놓거나, 아니면 회로도에 어느 점의 전위를 0으로 정의하는지 표시한다.\n\n전위는 에너지와 전하의 비(단위전하가 가지고 있는 정전기 퍼텐셜 에너지)이다. 즉, 전위의 국제 단위인 볼트는 다음과 같다.\n: 볼트(V) = 줄(J)/쿨롱(C).\n\n:\n: (전위차의 정의)\n: (전위의 정의)\n\n:\n두 점의 전위차()는 두 점 사이의 전기장을 선적분 한 값이다. 이때, 전기장은 보존장이기 때문에 적분구간의 모양은 상관 없고, 적분구간의 시작점과 끝점만 중요하다.\n\n=== 하나의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n\n: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존재하는 점전하 q가 있을 때, 이 전하에서 r만큼 떨어진 곳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n: 이 공식은 무한히 먼 곳의 전위를 0V라고 놓은 다음에 세운 공식이다.\n: = 진공의 유전율\n\n=== 여러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n\n: 공간에 점전하 n개가 존재할때, 특정 지점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구할 수 있다.\n: = 각 전하의 전하량\n: = 전위를 구할 지점에서 각 전하까지의 거리\n\n=== 전기 쌍극자의 전위 ===\n\n\n\n=== 연속적인 전하 분포 ===\n\n\n\n\n=== 전기장과의 관계 ===\n\n\n\n\n=== 대전입자 계의 전기 퍼텐셜 에너지 ===\n\n", "* 전기적 위치 에너지\n\n\n분류:전자기학\n분류:정전기학\n분류:퍼텐셜\n분류:전압\n분류:물리량" ]
thumb '''전위'''(, ) 또는 '''정전 퍼텐셜'''()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전기장에서 단위 전하가 가지게 되는 전기적 위치 에너지다. 국제단위계에서 단위는 볼트다.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인데, 정전기학에서는 전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자기장이 없고, 따라서 이 값이 0이 된다. 즉 의 회전이 0이 되므로 이를 어떤 스칼라함수의 기울기로 표현할 수 있다. 보통 그 스칼라 함수를 라고 쓰고, 를 전위라고 부른다. 즉 가 된다. 위치 에너지가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두 지점 사이의 위치 에너지 차이만이 절대적인 값인 것처럼, 전위 또한 상대적인 값이다. 즉 특정 지점의 전위는 임의로 정의할 수 있고, 두 지점의 전위차만이 물리적 의미를 갖는다. (전위차는 전압이라고도 불린다.) 수학적인 이유는 에 어떤 상수를 더해준 값인 에 대해서도 가 되어 같은 전기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이론 물리학에서는 통상적으로 계에서 "무한히 먼 곳"에서의 전위를 0으로 놓는다. 전기 회로에서는 보통 접지(接地, )의 전위를 0으로 놓거나, 아니면 회로도에 어느 점의 전위를 0으로 정의하는지 표시한다. 전위는 에너지와 전하의 비(단위전하가 가지고 있는 정전기 퍼텐셜 에너지)이다. 즉, 전위의 국제 단위인 볼트는 다음과 같다. : 볼트(V) = 줄(J)/쿨롱(C). : : (전위차의 정의) : (전위의 정의) : 두 점의 전위차()는 두 점 사이의 전기장을 선적분 한 값이다. 이때, 전기장은 보존장이기 때문에 적분구간의 모양은 상관 없고, 적분구간의 시작점과 끝점만 중요하다. === 하나의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 :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존재하는 점전하 q가 있을 때, 이 전하에서 r만큼 떨어진 곳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이 공식은 무한히 먼 곳의 전위를 0V라고 놓은 다음에 세운 공식이다. : = 진공의 유전율 === 여러 점전하에 의해 생기는 전위 === : 공간에 점전하 n개가 존재할때, 특정 지점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구할 수 있다. : = 각 전하의 전하량 : = 전위를 구할 지점에서 각 전하까지의 거리 === 전기 쌍극자의 전위 === === 연속적인 전하 분포 === === 전기장과의 관계 === === 대전입자 계의 전기 퍼텐셜 에너지 === * 전기적 위치 에너지 분류:전자기학 분류:정전기학 분류:퍼텐셜 분류:전압 분류:물리량
전류
[ "Introduction", "정의와 단위", "종류와 밀도", "앙페르의 법칙", "옴의 법칙", "전류의 방향", "같이 보기", "주해", "각주" ]
[ "\n\n\n섬네일\n'''전류'''(電流, electric current)는 전하의 흐름으로, 단위 시간 동안에 흐른 전하의 양으로 정의된다. 전하의 흐름은 전선과 같은 도체, 전해질의 특성을 갖는 이온, 플라스마 등에서 일어난다.\n\n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로 1 암페어는 1 초 당 1 쿨롱의 전하가 흐르는 것을 뜻한다. 암페어는 기호 A로 표기한다.\n", "전류는 일정 시간 동안 흐른 전하량의 비율로 정의된다.\n: \n: I-전류, Q-전하, t-시간\n\n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이고 기호 A로 표기한다. 1 암페어는 1 초에 1 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을 뜻한다.\n: \n: A-암페어, C-쿨롱, s-초\n\n: mA-밀리암페어, µA-마이크로암페어, nA-나노암페어\n", "전류의 종류로는 도체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흐름인 전도 전류와 진공관과 같은 것에서 일어나는 전하를 갖는 대전 입자의 흐름인 대류 전류가 있다. 전도 전류는 금속과 같은 도체에서 원자는 물체의 결합구조를 유지한채 전자의 이동만으로 이루어지는 전류인 반면, 대류 전류는 대전 입자 자체가 이동하여 일어나는 전류이다. 대류 전류는 전도 전류와 달리 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n\n전류의 방향에 대해 수직인 단면에서 단위면적 당 전류의 세기를 전류밀도라고 한다. SI 단위는 제곱미터 당 암페어(A/m²)이다. 정의에 따라서 전류와 전류밀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n:\n: I-전류, J-전류밀도, A-전류가 흐르는 단면적\n\n전류밀도는 전류의 종류에 따라 전도전류밀도와 대류전류밀도로 구분된다.\n\n=== 직류와 교류 ===\n\n도체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흐름인 전도 전류는 한 방향으로 연속하여 흐르는 직류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전류의 방향이 바뀌는 교류로 구분된다. 직류와 교류의 전류 흐름이 다른 것은 전류를 만드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전지와 같이 일정한 전위차가 유지되는 전원에 연결된 전기회로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지속적인 전류가 흐르게 된다. 한편, 교류는 발전기와 같은 것을 전원으로 한 전류이다. 현재 대부분의 가정에는 교류전원이 공급되나, 가전제품에는 주로 직류가 사용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기 제품은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정류기를 사용하거나 둘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n", "전류와 자기장\n\n전류가 흐르는 도선에는 오른쪽 그림과 같이 자기장이 형성되는데 이를 앙페르의 회로법칙이라고 한다. 앙페르의 회로법칙은 전자기역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n", "\n직류 전기회로에서 전류의 세기는 전원의 전압과 회로의 전기저항에 의해 결정되어 전압의 크기에 비례하고 전기저항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이를 옴의 법칙이라 한다.\n: \n: I-전류, E-기전력(전압), R-전기저항\n\n한편 교류에서는 전기저항 대신 다음의 식과 같이 임피던스가 전류의 세기에 관계한다. 따라서, 비록 저항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교류에서도 여전히 옴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n: \n: I-전류, E-기전력(전압), Z-임피던스\n", "전기회로에서 실제 전자의 흐름은 음극(-)에서 양극(+)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최초 정의한 전류의 흐름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 다르게 양극(+)에서 음극(-)인 양전하의 흐름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실제 전류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정의한 까닭은 전류의 흐름을 발견할 당시 과학자들이 전자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정공, 양이온처럼 양전하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전류의 방향은 양전자의 이동 방향과 같은데, 양전하가 이동할 때나 음전하가 이동할 때 만들어진 전류에 현상적인 차이는 없으므로 옛부터 전류의 방향을 양전하의 흐름으로 통일하였다.\n\n1830년대 마이클 패러데이는 아래 그림처럼 전해전도 실험을 하였다.\n\n\n\n 250px\n\n '''실험 결과'''1. 질산염(AgNO3) 수용액에 은 막대와 강철 스푼을 넣고 전지와 연결한다. 2. 질산염 수용액에 있는 이온들에 의해 전해전도가 일어난다. 3. 전류의 크기와 비례하여 강철 스푼에 은이 축적되어 도금된다.\n\n 200px실제 전자의 흐름(녹색)과 반대로 전류의 흐름(적색)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르는 것으로 정의된다.\n\n\n패러데이는 이 실험을 통해 전해질의 전도를 통해 축적한 은의 양을 측정하여 전류의 이동을 입증하였으며, 현대 SI 단위를 정의하기 전까지 전류의 단위 1 암페어는 \"1초 동안 0.001118 그램의 은을 축적한 전류의 세기\"로 정의했었다. 또한, 패러데이는 계속하여 새로운 은 원자를 제공하는 은막대를 양극(anode), 은 원자가 축적되는 강철 쪽을 음극(Cathode)로 정의하고 전류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이때문에 전류가 실제로는 전자의 흐름이라는 게 밝혀진 오늘날에도 전류의 방향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는 반대로 여전히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정의한다.\n", "\n* 전류밀도\n* 교류\n* 직류\n* 전자기 유도\n* 전압\n* 전력\n* 저항\n* 마찰전기\n* 옴의법칙\n* 감전\n", "\n", "\n\n\n\n \n분류:전자기학" ]
섬네일 '''전류'''(電流, electric current)는 전하의 흐름으로, 단위 시간 동안에 흐른 전하의 양으로 정의된다. 전하의 흐름은 전선과 같은 도체, 전해질의 특성을 갖는 이온, 플라스마 등에서 일어난다. 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로 1 암페어는 1 초 당 1 쿨롱의 전하가 흐르는 것을 뜻한다. 암페어는 기호 A로 표기한다. 전류는 일정 시간 동안 흐른 전하량의 비율로 정의된다. : : I-전류, Q-전하, t-시간 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이고 기호 A로 표기한다. 1 암페어는 1 초에 1 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을 뜻한다. : : A-암페어, C-쿨롱, s-초 : mA-밀리암페어, µA-마이크로암페어, nA-나노암페어 전류의 종류로는 도체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흐름인 전도 전류와 진공관과 같은 것에서 일어나는 전하를 갖는 대전 입자의 흐름인 대류 전류가 있다. 전도 전류는 금속과 같은 도체에서 원자는 물체의 결합구조를 유지한채 전자의 이동만으로 이루어지는 전류인 반면, 대류 전류는 대전 입자 자체가 이동하여 일어나는 전류이다. 대류 전류는 전도 전류와 달리 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전류의 방향에 대해 수직인 단면에서 단위면적 당 전류의 세기를 전류밀도라고 한다. SI 단위는 제곱미터 당 암페어(A/m²)이다. 정의에 따라서 전류와 전류밀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 : I-전류, J-전류밀도, A-전류가 흐르는 단면적 전류밀도는 전류의 종류에 따라 전도전류밀도와 대류전류밀도로 구분된다. === 직류와 교류 === 도체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흐름인 전도 전류는 한 방향으로 연속하여 흐르는 직류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전류의 방향이 바뀌는 교류로 구분된다. 직류와 교류의 전류 흐름이 다른 것은 전류를 만드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전지와 같이 일정한 전위차가 유지되는 전원에 연결된 전기회로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지속적인 전류가 흐르게 된다. 한편, 교류는 발전기와 같은 것을 전원으로 한 전류이다. 현재 대부분의 가정에는 교류전원이 공급되나, 가전제품에는 주로 직류가 사용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기 제품은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정류기를 사용하거나 둘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류와 자기장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는 오른쪽 그림과 같이 자기장이 형성되는데 이를 앙페르의 회로법칙이라고 한다. 앙페르의 회로법칙은 전자기역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직류 전기회로에서 전류의 세기는 전원의 전압과 회로의 전기저항에 의해 결정되어 전압의 크기에 비례하고 전기저항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이를 옴의 법칙이라 한다. : : I-전류, E-기전력(전압), R-전기저항 한편 교류에서는 전기저항 대신 다음의 식과 같이 임피던스가 전류의 세기에 관계한다. 따라서, 비록 저항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교류에서도 여전히 옴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 : I-전류, E-기전력(전압), Z-임피던스 전기회로에서 실제 전자의 흐름은 음극(-)에서 양극(+)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최초 정의한 전류의 흐름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 다르게 양극(+)에서 음극(-)인 양전하의 흐름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실제 전류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정의한 까닭은 전류의 흐름을 발견할 당시 과학자들이 전자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정공, 양이온처럼 양전하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전류의 방향은 양전자의 이동 방향과 같은데, 양전하가 이동할 때나 음전하가 이동할 때 만들어진 전류에 현상적인 차이는 없으므로 옛부터 전류의 방향을 양전하의 흐름으로 통일하였다. 1830년대 마이클 패러데이는 아래 그림처럼 전해전도 실험을 하였다. 250px '''실험 결과'''1. 질산염(AgNO3) 수용액에 은 막대와 강철 스푼을 넣고 전지와 연결한다. 2. 질산염 수용액에 있는 이온들에 의해 전해전도가 일어난다. 3. 전류의 크기와 비례하여 강철 스푼에 은이 축적되어 도금된다. 200px실제 전자의 흐름(녹색)과 반대로 전류의 흐름(적색)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르는 것으로 정의된다. 패러데이는 이 실험을 통해 전해질의 전도를 통해 축적한 은의 양을 측정하여 전류의 이동을 입증하였으며, 현대 SI 단위를 정의하기 전까지 전류의 단위 1 암페어는 "1초 동안 0.001118 그램의 은을 축적한 전류의 세기"로 정의했었다. 또한, 패러데이는 계속하여 새로운 은 원자를 제공하는 은막대를 양극(anode), 은 원자가 축적되는 강철 쪽을 음극(Cathode)로 정의하고 전류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이때문에 전류가 실제로는 전자의 흐름이라는 게 밝혀진 오늘날에도 전류의 방향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는 반대로 여전히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정의한다. * 전류밀도 * 교류 * 직류 * 전자기 유도 * 전압 * 전력 * 저항 * 마찰전기 * 옴의법칙 * 감전 분류:전자기학
전기저항
[ "Introduction", "개요", "비저항", "옴의 법칙", "온저항", "같이 보기", "각주" ]
[ "\n\n\n'''전기저항'''(電氣抵抗, )은 도체에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국제단위계 단위는 옴이고 로 나타낸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간단히 줄여 '''저항'''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전기를 얼마나 잘 흐르게 하는 지를 나타내는 물리량은 '''전기 전도도'''(電氣傳導度, electrical conductance)라고 하고 로 나타낸다. 전기 전도도는 전기저항의 역수이다.\n", "파일:Metal film resistor.jpg|섬네일|금속피막 저항기. 사진에 표시된 값은 6.5 이다.\n일정한 비저항을 갖는 물체의 저항은 길이에 비례하고 단면적에 반비례한다.\n전기저항은 세기 성질과 크기 성질을 모두 보인다. 물질마다 서로 다른 값을 갖는 비저항은 전기저항의 세기 성질이고, 물질의 모양은 크기 성질이다. 전기저항의 비저항(比抵抗, resistivity)은 물질에 따라 서로 다르다.\n\n물체의 저항은 비저항이 클수록, 물체의 길이가 길수록, 단면적이 작을수록 커진다. 어떤 물질의 비저항을 , 길이를 , 단면적을 라고 할 때 저항 의 크기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보인다.\n:\n\n전기 회로에서 저항은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여 전압 강하를 일으킨다. 따라서 회로의 두 지점 사이의 저항 은 전압 와 전류 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n:\n\n한편, 회로의 전기 전도도는 비저항의 역수로 나타낼 수 있다.\n:\n: - 전기 전도도, - 저항\n", "\n\n비저항의 크기가 작아 전기를 잘 전달하는 물질을 도체, 비저항의 크기가 커서 전기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물질을 부도체라고 한다. 반도체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특징을 모두 보일 수 있는 물질이다.\n\n잘 알려진 물질의 상온 비저항은 다음과 같다.\n\n\n\n+ 물질의 상온 비저항\n\n\n\n 물질 \n\n 비저항 (단위: \n\n\n\n 은 \n\n 1.59\n\n\n\n 구리 \n\n 1.68\n\n\n\n 금 \n\n 2.44\n\n\n\n 알루미늄 \n\n 2.65\n\n\n\n 텅스텐 \n\n 5.6\n\n\n\n 니켈 \n\n 6.99\n\n\n\n 철 \n\n 9.71\n\n\n\n 백금 \n\n 10.6\n\n\n\n 납 \n\n 22\n\n\n\n=== 온도와의 관계 ===\n물질의 비저항은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온도에 따른 비저항 변화 비율을 저항온도계수라고 하고 일반적으로 로 나타낸다. 온도의 변화를 라고 하면 상온 비저항 에 대한 변화된 비저항 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n:\n\n전기회로에 사용되는 저항기의 저항온도계수는 1백만분의 1 °C를 기준으로 하는 ppm/°C 로 나타낸다. 금속피막형 저항기의 경우 저항온도계수는 약 ±50 - ± 200 ppm/°C 정도이다.\n", "\n파일:FourIVcurves.svg|섬네일|500px|네 종류의 전기 회로 소자에서 나타나는 전류-전압 특성. 저항값이 큰 저항기, 저항값이 작은 저항기, 다이오드, 전지 \n\n독일의 물리학자 게오르크 옴이 발견한 옴의 법칙은 전류와 전압 사이에 일정한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법칙이다.\n:\n:: 전류, : 전압\n\n옴은 전압과 전류의 이러한 비례 관계를 토대로 전기저항을 정의하고 다음과 같은 관계를 정리하였다.\n:\n:: 전류, : 전압, : 저항\n", "\n\n전기 회로에서 직류와 달리 교류는 일정한 주기를 갖고 전압과 전류가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전압, 전류의 변화는 사인파 형태를 띈다. 따라서 한 주기를 놓고 보았을 때 전체 전압 또는 전류의 총 변화량은 0 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실제 전기 회로가 하는 일의 양은 0 이 아니므로 특정 순간의 전압과 전류의 양인 순시값과 일정 주기에서 실재 투여되는 실효값을 고려하여야 한다. 온저항()은 교류에 옴의 법칙을 적용하여 교류의 전류에 대한 전압의 비를 나타낸 것이다. 약어로는 가 쓰인다. 회로 이론에서는 영어인 임피던스로 표기되는 경우가 더 많다.\n:\n:: 온저항, : 전류, : 전압\n\n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전기 회로가 저항 성분만을 갖는다면 전압과 전류의 위상변화는 없고 온저항 역시 전원의 실효 전압과 실효 전류로만 계산될 수 있다. 그러나, 유도계수를 갖는 유도자나 전기용량을 갖는 축전기는 전류와 전압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순수한 유도계수 회로나 전기용량 회로에서 전압과 전류는 90°의 위상차이를 보인다. 실재 모든 전기 회로는 저항 성분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는 0°와 90°사이의 어떠한 값이 된다.\n파일:VI phase.svg|섬네일|가운데|300px|축전기(위)와 유도자(아래)의 전압 전류 위상 변화\n\n교류 전기 회로에서 온저항은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여 계산하게 된다. 위상차에 의해 발생하는 저항 성분의 변위 백터를 반응저항이라고 한다. 반응저항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지만 전기 에너지의 일부를 흡수하거나 배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온저항의 값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교류 회로의 전기저항은 빛과 열을 발생시키며 전기 부하의 역할을 하는 실효저항과 유도자나 축전기 등의 위상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반응저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실재 전기 부품은 유도자나 축전기 역시 스스로도 자체 저항값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부품 자체의 실효저항을 직렬 연결한 것으로 파악하는 등가회로를 이용하여 계산한다.\n\n전기용량에 의한 위상 변화는 전류가 전압보다 90° 앞서고, 순수 유도계수에 의한 위상 변화에서는 전류가 전압보다 90°뒤에 놓인다. 어느 경우든 전기회로에서 이러한 위상 변화는 결국 전류 진행 방향에 반대되는 기전력을 일으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이것이 빛과 열을 발생하지 않음에도 이들이 저항으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실효저항은 , 유도반응저항은 , 용량반응저항은 로 표기한다.\n\n유도반응저항 과 용량반응저항 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n:\n:: 유도반응저항, : 주파수 성분에 따른 위상, : 유도계수\n\n:\n:: 용량반응저항, : 주파수 성분에 따른 위상, : 전기용량\n\n온저항은 실효저항과 반응저항의 제곱평균제곱근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n:(온저항)2 = (실효저항)2 + (반응저항)2\n:: = (실효저항)2 + (유도반응저항 - 용량반응저항)2\n\n온저항을 라 하면,\n:\n\n온저항은 반응저항의 위상 변화를 복소평면에 두어 계산할 수 있다. 이때 온저항은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n: (는 허수 단위)\n복소평면에 놓인 온저항. 실효저항이 실수축, 반응저항이 허수축에 놓이고 온저항은 이 둘의 백터로 표시된다.\n\n온저항 백터를 나타내는 복소평면에서 허수축은 반응저항에 따른 위상 변화의 발생을 나타낸다. 반응저항이 0보다 크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회로에서 측정하는 두 지점 사이에 흐르는 전류의 위상이 전압 위상의 변화보다 지연된다는 의미이고 0보다 작다면 그 반대를 뜻한다.\n", "\n* 전기 이론: 옴의 법칙, 전력, 전압, 전류\n* 전기 회로: 저항기, 축전기, 유도자\n", "\n\n\n\n \n분류:전자공학\n분류:물리량\n분류:전기" ]
'''전기저항'''(電氣抵抗, )은 도체에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국제단위계 단위는 옴이고 로 나타낸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간단히 줄여 '''저항'''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전기를 얼마나 잘 흐르게 하는 지를 나타내는 물리량은 '''전기 전도도'''(電氣傳導度, electrical conductance)라고 하고 로 나타낸다. 전기 전도도는 전기저항의 역수이다. 파일:Metal film resistor.jpg|섬네일|금속피막 저항기. 사진에 표시된 값은 6.5 이다. 일정한 비저항을 갖는 물체의 저항은 길이에 비례하고 단면적에 반비례한다. 전기저항은 세기 성질과 크기 성질을 모두 보인다. 물질마다 서로 다른 값을 갖는 비저항은 전기저항의 세기 성질이고, 물질의 모양은 크기 성질이다. 전기저항의 비저항(比抵抗, resistivity)은 물질에 따라 서로 다르다. 물체의 저항은 비저항이 클수록, 물체의 길이가 길수록, 단면적이 작을수록 커진다. 어떤 물질의 비저항을 , 길이를 , 단면적을 라고 할 때 저항 의 크기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보인다. : 전기 회로에서 저항은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여 전압 강하를 일으킨다. 따라서 회로의 두 지점 사이의 저항 은 전압 와 전류 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 : 한편, 회로의 전기 전도도는 비저항의 역수로 나타낼 수 있다. : : - 전기 전도도, - 저항 비저항의 크기가 작아 전기를 잘 전달하는 물질을 도체, 비저항의 크기가 커서 전기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물질을 부도체라고 한다. 반도체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특징을 모두 보일 수 있는 물질이다. 잘 알려진 물질의 상온 비저항은 다음과 같다. + 물질의 상온 비저항 물질 비저항 (단위: 은 1.59 구리 1.68 금 2.44 알루미늄 2.65 텅스텐 5.6 니켈 6.99 철 9.71 백금 10.6 납 22 === 온도와의 관계 === 물질의 비저항은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온도에 따른 비저항 변화 비율을 저항온도계수라고 하고 일반적으로 로 나타낸다. 온도의 변화를 라고 하면 상온 비저항 에 대한 변화된 비저항 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전기회로에 사용되는 저항기의 저항온도계수는 1백만분의 1 °C를 기준으로 하는 ppm/°C 로 나타낸다. 금속피막형 저항기의 경우 저항온도계수는 약 ±50 - ± 200 ppm/°C 정도이다. 파일:FourIVcurves.svg|섬네일|500px|네 종류의 전기 회로 소자에서 나타나는 전류-전압 특성. 저항값이 큰 저항기, 저항값이 작은 저항기, 다이오드, 전지 독일의 물리학자 게오르크 옴이 발견한 옴의 법칙은 전류와 전압 사이에 일정한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법칙이다. : :: 전류, : 전압 옴은 전압과 전류의 이러한 비례 관계를 토대로 전기저항을 정의하고 다음과 같은 관계를 정리하였다. : :: 전류, : 전압, : 저항 전기 회로에서 직류와 달리 교류는 일정한 주기를 갖고 전압과 전류가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전압, 전류의 변화는 사인파 형태를 띈다. 따라서 한 주기를 놓고 보았을 때 전체 전압 또는 전류의 총 변화량은 0 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실제 전기 회로가 하는 일의 양은 0 이 아니므로 특정 순간의 전압과 전류의 양인 순시값과 일정 주기에서 실재 투여되는 실효값을 고려하여야 한다. 온저항()은 교류에 옴의 법칙을 적용하여 교류의 전류에 대한 전압의 비를 나타낸 것이다. 약어로는 가 쓰인다. 회로 이론에서는 영어인 임피던스로 표기되는 경우가 더 많다. : :: 온저항, : 전류, : 전압 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전기 회로가 저항 성분만을 갖는다면 전압과 전류의 위상변화는 없고 온저항 역시 전원의 실효 전압과 실효 전류로만 계산될 수 있다. 그러나, 유도계수를 갖는 유도자나 전기용량을 갖는 축전기는 전류와 전압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순수한 유도계수 회로나 전기용량 회로에서 전압과 전류는 90°의 위상차이를 보인다. 실재 모든 전기 회로는 저항 성분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는 0°와 90°사이의 어떠한 값이 된다. 파일:VI phase.svg|섬네일|가운데|300px|축전기(위)와 유도자(아래)의 전압 전류 위상 변화 교류 전기 회로에서 온저항은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여 계산하게 된다. 위상차에 의해 발생하는 저항 성분의 변위 백터를 반응저항이라고 한다. 반응저항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지만 전기 에너지의 일부를 흡수하거나 배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온저항의 값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교류 회로의 전기저항은 빛과 열을 발생시키며 전기 부하의 역할을 하는 실효저항과 유도자나 축전기 등의 위상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반응저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실재 전기 부품은 유도자나 축전기 역시 스스로도 자체 저항값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부품 자체의 실효저항을 직렬 연결한 것으로 파악하는 등가회로를 이용하여 계산한다. 전기용량에 의한 위상 변화는 전류가 전압보다 90° 앞서고, 순수 유도계수에 의한 위상 변화에서는 전류가 전압보다 90°뒤에 놓인다. 어느 경우든 전기회로에서 이러한 위상 변화는 결국 전류 진행 방향에 반대되는 기전력을 일으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이것이 빛과 열을 발생하지 않음에도 이들이 저항으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실효저항은 , 유도반응저항은 , 용량반응저항은 로 표기한다. 유도반응저항 과 용량반응저항 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 유도반응저항, : 주파수 성분에 따른 위상, : 유도계수 : :: 용량반응저항, : 주파수 성분에 따른 위상, : 전기용량 온저항은 실효저항과 반응저항의 제곱평균제곱근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온저항)2 = (실효저항)2 + (반응저항)2 :: = (실효저항)2 + (유도반응저항 - 용량반응저항)2 온저항을 라 하면, : 온저항은 반응저항의 위상 변화를 복소평면에 두어 계산할 수 있다. 이때 온저항은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 (는 허수 단위) 복소평면에 놓인 온저항. 실효저항이 실수축, 반응저항이 허수축에 놓이고 온저항은 이 둘의 백터로 표시된다. 온저항 백터를 나타내는 복소평면에서 허수축은 반응저항에 따른 위상 변화의 발생을 나타낸다. 반응저항이 0보다 크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회로에서 측정하는 두 지점 사이에 흐르는 전류의 위상이 전압 위상의 변화보다 지연된다는 의미이고 0보다 작다면 그 반대를 뜻한다. * 전기 이론: 옴의 법칙, 전력, 전압, 전류 * 전기 회로: 저항기, 축전기, 유도자 분류:전자공학 분류:물리량 분류:전기
전력
[ "Introduction", "정의", "구분", "직류 전력", "교류 전력", "사용",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전력'''(電力, electric power)은 일반적으로 전기에너지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작동적 정의는 단위 시간당 전류, 또는 단위 시간당 전달되거나 변환된 전기 에너지에 의해 수행되는 일의 양이다. 전기설비의 전력소비능력(전기에너지를 얼마나 빨리 소비하는지를 나타내는 물리량), 발전설비의 발전용량, 송변전설비의 송전능력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전력은 P로 표시되고, 전력의 단위는 와트(Watt)이며 W로 표시된다. \n", "파일:Ohm's Law with Voltage source TeX.svg|섬네일|간단한 전기회로. '''v''': 전원, '''i''': 전류, '''R''': 저항\n\n전기 회로에서 전력은 전류와 전기저항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그림과 같은 단순한 전기 회로에서 전기저항 R은 전류를 소비하면서 열을 발생시킨다.\n\n1840년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콜 줄은 전기 회로에서 저항에 의해 발생하는 열량이 다음과 같은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줄의 법칙''' 이라고 한다.\n:\n:(Q: 열량J, I: 전류의 세기A, R: 도체의 전기저항Ω, t: 전류가 흐르는 시간s)\n\n전기 회로의 저항에서 열이 발생하는 까닭은 저항을 통과하는 전자들이 저항 내의 원자들과 충돌하면서 전기적 위치 에너지를 잃기 때문이다. 전자들이 잃은 에너지는 저항 내에 있는 원자들의 진동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결과 열이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하는 열을 줄열이라고 하고 그러한 변환을 손실이라고 한다. 전력은 전기 회로 전체가 소비하는 단위 시간당 줄열 발생량이라 할 수 있다.\n\n한편, 전압은 전류와 저항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위 식은 아래와 같이 간단히 할 수 있다.\n\n:\n:P: 전력, V: 전압, I: 전류\n\n따라서 전력은 전압과 전류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n",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하여 흐르는 전류를 직류라고 하고, 주기적으로 전류의 방향이 바뀌는 전류를 교류라고 한다. 전기 회로에서 저항으로 작용하는 구성 요소인 전기 부하는 직류와 교류에서 서로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전력 역시 직류 전력과 교류 전력의 계산 방식이 다르다.\n\n한편, 교류 전력의 경우 파동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위상에 따른 성질을 지닌다.\n", "직류 전력의 계산은 전력의 정의에서와 같이 간단히 기전력을 일으키는 전압과 전류의 양으로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전기 회로에 1.5V의 전압으로 300 mA의 전류가 흐른다면 전력은 0.45 W 가 될 것이다. 전기 회로에 여러 전기 부하가 직렬 또는 병렬로 연결되면 전체 전력은 각 부분 부하가 소비하는 전력의 합과 같다.\n:\n", "\n일반적인 교류는 사인파의 형태를 띈다.\n\n교류의 경우엔 계산이 몹시 복잡해진다. 교류는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에 따라 생성되어 일정한 주기를 갖고 방향을 바꾸는 파동 에너지이다. 발전원에 따라 다양한 파형이 있을 수 있으나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쓰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원은 사인파의 형태를 띈다. 교류의 주기는 보통 50 Hz 또는 60 Hz가 쓰이며, 대한민국의 경우 60Hz이다.\n\n교류의 전압과 전류는 아래의 식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n:\n:V(t): 순간 전압, Vm: 최대 전압, : 위상, Θt: 전압의 순간 변위\n:\n:i(t): 순간 전류, Im: 최대 전류, : 위상, Θi: 전류의 순간 변위\n\n따라서 특정 순간의 전력은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n: \n:: \n:: \n\n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위의 교류 전력식 P(t)는 일정한 주기를 갖는 주기 함수이다. 교류 전력은 일정한 주기를 갖기 때문에 주기를 단위로 하여 합하면 상쇄되어 0 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매 시각의 전력은 분명 0 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조화 함수를 사용하여 제곱평균제곱근의 양으로 전압과 전류의 실효값를 계산하고 이를 통해 유효 전력을 나타낸다.\n\n교류 전력을 사용하는 전기 회로에서 부하를 통과하는 전류는 부하의 특성에 따라 전압과 전류의 위상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때문에 교류 전기 회로의 전력은 전기저항(Resistance), 유도계수(Inductance), 전기용량(Capacitance)에 대하여 따로 계산되기도 한다. 전류가 각각의 부하를 통과할 때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은 저항 성분에서만 발생하고 유도자나 축전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n\n교류 전력 삼각형 '''P''': 실효 전력 '''Q''': 무효 전력 '''S''': 복소 전력 '''φ''': 전류에 대한 전압의 위상\n교류의 전체 전력은 조화 함수를 이용하여 아래와 같이 나타낸다.\n:\n:'''S''': 복소전력, '''P''': 유효전력, '''j''': 허수 단위, '''Q''': 무효전력\n\n저항 성분을 통해 발생하는 유효 전력과 달리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의해 소모되는 전력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무효 전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효 전력도 실제 전력 변화에는 관여하기 때문에 유효 전력은 전체 복소 전력의 절대값인 피상 전력을 포함하여 계산하게 된다. 교류 전력 삼각형은 복소 전력과 유효 전력, 무효 전력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n:\n:\n\n=== 역률 개선 ===\n교류 전력에서 실제 부하에 사용되는 전력은 유효 전력이고 무효 전력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효 전력을 높이고 무효 전력을 낮추어야 한다. 위 식에서 보면 유효 전력과 무효 전력의 위상이 0 이 될 때 가 되어 유효 전력은 100% 사용하고 무효 전력은 0 %로 낮추는 이상적인 상태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전기회로에서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상태는 불가능하므로 최대한 의 값이 1에 가깝게 되도록 노력한다. 이때\n를 역률이라고 하고 이 값을 크게 하려는 활동을 역률 개선이라고 한다.\n\n=== 단상 전력과 삼상 전력===\n삼상교류의 발생. 자석 안쪽에 세 축으로 나뉜 전선이 회전하여 삼상 유도 전류를 만드는 것을 설명하는 그림\n교류는 위상을 가지므로 상의 수에 따라 단상전력과 3상전력으로 나뉜다. 상이 하나인 것은 단상, 셋인 것은 삼상이라고 부른다. 삼상은 단상 교류 셋을 위상을 달리하여 결합한 것이다.\n\n단상전력은 위에서 설명한 일반적인 전력 관계식을 따른다.\n: (에너지 전송의 비율)\n: (저항으로 인한 손실)\n: (저항으로 인한 손실)\n\n\n삼상전력의 상전압 과 선전압 은 아래의 관계식을 따른다.\n:\n\n삼상전력은 순간 전력 총합이 언제나 일정하기 때문에 전동기를 가동할 때 일정한 전력을 계속하여 공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단상에 비해 전기 누설의 위험이 크므로 사용에 주의하여야 한다. 삼상 전력은 전동차나 대형 에어컨과 같이 전동기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기계에 일반적으로 사용된다.\n", "\n\n전력은 전원을 통해 공급된다. 전원은 크게 보아 직류와 교류로 구분되며 가전제품이나 전자제품은 대부분 직류로 작동된다. 그러나 직류를 발전하여 한 지역에 공급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대규모 전력 공급은 교류로 제공되며 각각의 전기 기기는 정류기를 이용하여 교류를 직류로 변환해 사용한다. 교류를 계속하여 공급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사용하는 기기인 휴대전화와 같은 이동용 기기에는 전지가 사용된다.\n\n=== 송전선과 전력 ===\n\n송전선\n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류는 송전선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송전선 역시 일정한 저항을 갖는 도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전기가 전달되는 동안 열을 발생시켜 전력 손실이 일어난다. 줄의 법칙에 따라 같은 전력을 전달할 때 전류와 저항은 반비례 관계에 놓인다. 따라서 송전선의 전력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전선의 저항을 낮추거나 전압을 올려야 한다. 전선의 저항을 낮추는 것은 기술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압을 올리는 쪽이 경제적이다. 발전소에서 고압의 전류를 송전하는 이유다. 어떤 경우에는 765 kV까지 전압을 올린 고압 전류를 송전한다. 이렇게 전송된 전류는 도시나 공장과 같은 소비지 근처의 변전소까지 전달되고, 이 곳의 변압기를 통해 22.9 kV로 낮추어진 다음 다시 곳곳에 설치된 변압기를 거쳐 220 V 또는 380V 와 같은 사용 전압으로 낮춰져 쓰인다. 대한민국의 가정용 단상 교류 전압은 220V 이고,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나라에선 110V 가 가정용 소비 전압으로 제공된다. 사이리스터나 인버터 등 전력 전자공학이 발달한 현재는 손실이 적은 고압직류송전방식이 사용되는 구간이 있다.\n", "* 전력산업\n* 전력량\n* 에너지 개발\n* 발전 (전기)\n* 전기\n* 전압\n* 전류\n* 전원\n", "\n", "\n* 한국의 전력 - 한국전력\n* U.S. Department of Energy: Electric Power\n* GlobTek, Inc. Glossary of Electric power Power Supply Terms\n* Platform of electric sector\n\n\n\n \n분류:전자기학" ]
'''전력'''(電力, electric power)은 일반적으로 전기에너지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작동적 정의는 단위 시간당 전류, 또는 단위 시간당 전달되거나 변환된 전기 에너지에 의해 수행되는 일의 양이다. 전기설비의 전력소비능력(전기에너지를 얼마나 빨리 소비하는지를 나타내는 물리량), 발전설비의 발전용량, 송변전설비의 송전능력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전력은 P로 표시되고, 전력의 단위는 와트(Watt)이며 W로 표시된다. 파일:Ohm's Law with Voltage source TeX.svg|섬네일|간단한 전기회로. '''v''': 전원, '''i''': 전류, '''R''': 저항 전기 회로에서 전력은 전류와 전기저항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그림과 같은 단순한 전기 회로에서 전기저항 R은 전류를 소비하면서 열을 발생시킨다. 1840년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콜 줄은 전기 회로에서 저항에 의해 발생하는 열량이 다음과 같은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줄의 법칙''' 이라고 한다. : :(Q: 열량J, I: 전류의 세기A, R: 도체의 전기저항Ω, t: 전류가 흐르는 시간s) 전기 회로의 저항에서 열이 발생하는 까닭은 저항을 통과하는 전자들이 저항 내의 원자들과 충돌하면서 전기적 위치 에너지를 잃기 때문이다. 전자들이 잃은 에너지는 저항 내에 있는 원자들의 진동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결과 열이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하는 열을 줄열이라고 하고 그러한 변환을 손실이라고 한다. 전력은 전기 회로 전체가 소비하는 단위 시간당 줄열 발생량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전압은 전류와 저항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위 식은 아래와 같이 간단히 할 수 있다. : :P: 전력, V: 전압, I: 전류 따라서 전력은 전압과 전류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하여 흐르는 전류를 직류라고 하고, 주기적으로 전류의 방향이 바뀌는 전류를 교류라고 한다. 전기 회로에서 저항으로 작용하는 구성 요소인 전기 부하는 직류와 교류에서 서로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전력 역시 직류 전력과 교류 전력의 계산 방식이 다르다. 한편, 교류 전력의 경우 파동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위상에 따른 성질을 지닌다. 직류 전력의 계산은 전력의 정의에서와 같이 간단히 기전력을 일으키는 전압과 전류의 양으로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전기 회로에 1.5V의 전압으로 300 mA의 전류가 흐른다면 전력은 0.45 W 가 될 것이다. 전기 회로에 여러 전기 부하가 직렬 또는 병렬로 연결되면 전체 전력은 각 부분 부하가 소비하는 전력의 합과 같다. : 일반적인 교류는 사인파의 형태를 띈다. 교류의 경우엔 계산이 몹시 복잡해진다. 교류는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에 따라 생성되어 일정한 주기를 갖고 방향을 바꾸는 파동 에너지이다. 발전원에 따라 다양한 파형이 있을 수 있으나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쓰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원은 사인파의 형태를 띈다. 교류의 주기는 보통 50 Hz 또는 60 Hz가 쓰이며, 대한민국의 경우 60Hz이다. 교류의 전압과 전류는 아래의 식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V(t): 순간 전압, Vm: 최대 전압, : 위상, Θt: 전압의 순간 변위 : :i(t): 순간 전류, Im: 최대 전류, : 위상, Θi: 전류의 순간 변위 따라서 특정 순간의 전력은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 :: 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위의 교류 전력식 P(t)는 일정한 주기를 갖는 주기 함수이다. 교류 전력은 일정한 주기를 갖기 때문에 주기를 단위로 하여 합하면 상쇄되어 0 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매 시각의 전력은 분명 0 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조화 함수를 사용하여 제곱평균제곱근의 양으로 전압과 전류의 실효값를 계산하고 이를 통해 유효 전력을 나타낸다. 교류 전력을 사용하는 전기 회로에서 부하를 통과하는 전류는 부하의 특성에 따라 전압과 전류의 위상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때문에 교류 전기 회로의 전력은 전기저항(Resistance), 유도계수(Inductance), 전기용량(Capacitance)에 대하여 따로 계산되기도 한다. 전류가 각각의 부하를 통과할 때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은 저항 성분에서만 발생하고 유도자나 축전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교류 전력 삼각형 '''P''': 실효 전력 '''Q''': 무효 전력 '''S''': 복소 전력 '''φ''': 전류에 대한 전압의 위상 교류의 전체 전력은 조화 함수를 이용하여 아래와 같이 나타낸다. : :'''S''': 복소전력, '''P''': 유효전력, '''j''': 허수 단위, '''Q''': 무효전력 저항 성분을 통해 발생하는 유효 전력과 달리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의해 소모되는 전력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무효 전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효 전력도 실제 전력 변화에는 관여하기 때문에 유효 전력은 전체 복소 전력의 절대값인 피상 전력을 포함하여 계산하게 된다. 교류 전력 삼각형은 복소 전력과 유효 전력, 무효 전력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 : === 역률 개선 === 교류 전력에서 실제 부하에 사용되는 전력은 유효 전력이고 무효 전력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효 전력을 높이고 무효 전력을 낮추어야 한다. 위 식에서 보면 유효 전력과 무효 전력의 위상이 0 이 될 때 가 되어 유효 전력은 100% 사용하고 무효 전력은 0 %로 낮추는 이상적인 상태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전기회로에서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상태는 불가능하므로 최대한 의 값이 1에 가깝게 되도록 노력한다. 이때 를 역률이라고 하고 이 값을 크게 하려는 활동을 역률 개선이라고 한다. === 단상 전력과 삼상 전력=== 삼상교류의 발생. 자석 안쪽에 세 축으로 나뉜 전선이 회전하여 삼상 유도 전류를 만드는 것을 설명하는 그림 교류는 위상을 가지므로 상의 수에 따라 단상전력과 3상전력으로 나뉜다. 상이 하나인 것은 단상, 셋인 것은 삼상이라고 부른다. 삼상은 단상 교류 셋을 위상을 달리하여 결합한 것이다. 단상전력은 위에서 설명한 일반적인 전력 관계식을 따른다. : (에너지 전송의 비율) : (저항으로 인한 손실) : (저항으로 인한 손실) 삼상전력의 상전압 과 선전압 은 아래의 관계식을 따른다. : 삼상전력은 순간 전력 총합이 언제나 일정하기 때문에 전동기를 가동할 때 일정한 전력을 계속하여 공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단상에 비해 전기 누설의 위험이 크므로 사용에 주의하여야 한다. 삼상 전력은 전동차나 대형 에어컨과 같이 전동기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기계에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전력은 전원을 통해 공급된다. 전원은 크게 보아 직류와 교류로 구분되며 가전제품이나 전자제품은 대부분 직류로 작동된다. 그러나 직류를 발전하여 한 지역에 공급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대규모 전력 공급은 교류로 제공되며 각각의 전기 기기는 정류기를 이용하여 교류를 직류로 변환해 사용한다. 교류를 계속하여 공급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사용하는 기기인 휴대전화와 같은 이동용 기기에는 전지가 사용된다. === 송전선과 전력 === 송전선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류는 송전선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송전선 역시 일정한 저항을 갖는 도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전기가 전달되는 동안 열을 발생시켜 전력 손실이 일어난다. 줄의 법칙에 따라 같은 전력을 전달할 때 전류와 저항은 반비례 관계에 놓인다. 따라서 송전선의 전력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전선의 저항을 낮추거나 전압을 올려야 한다. 전선의 저항을 낮추는 것은 기술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압을 올리는 쪽이 경제적이다. 발전소에서 고압의 전류를 송전하는 이유다. 어떤 경우에는 765 kV까지 전압을 올린 고압 전류를 송전한다. 이렇게 전송된 전류는 도시나 공장과 같은 소비지 근처의 변전소까지 전달되고, 이 곳의 변압기를 통해 22.9 kV로 낮추어진 다음 다시 곳곳에 설치된 변압기를 거쳐 220 V 또는 380V 와 같은 사용 전압으로 낮춰져 쓰인다. 대한민국의 가정용 단상 교류 전압은 220V 이고,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나라에선 110V 가 가정용 소비 전압으로 제공된다. 사이리스터나 인버터 등 전력 전자공학이 발달한 현재는 손실이 적은 고압직류송전방식이 사용되는 구간이 있다. * 전력산업 * 전력량 * 에너지 개발 * 발전 (전기) * 전기 * 전압 * 전류 * 전원 * 한국의 전력 - 한국전력 * U.S. Department of Energy: Electric Power * GlobTek, Inc. Glossary of Electric power Power Supply Terms * Platform of electric sector 분류:전자기학
벨기에
[ "Introduction", "역사", "지리", "기후", "정치", "무역", "인구", "주민", "언어", "종교", "군사", "행정 구역", "문화", "대외 관계", "역대 군주", "각주", "외부 링크" ]
[ "\n\n'''벨기에 왕국'''(, , , ), 줄여서 '''벨기에'''(, , )는 서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이다. 공용어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이다.\n", " \n\n=== 독립 ===\n\n벨기에는 본래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년) 이후 북부와 분열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93년 프랑스는 벨기에를 합병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벨기에는 북부의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합쳐지게 되었으나 절대주의적 통치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신앙적인 차이로 인해 왈롱인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n\n프랑스 국내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난 1830년, 이 혁명에 자극받은 왈롱인들이 8월 5일경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벨기에 사람들은 벨기에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 날을 독립 기념일로 여긴다. 네덜란드가 편성한 진압군은 벨기에군을 간단히 격파하였으나 벨기에를 병합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프랑스의 무력 및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831년 휴전을 맺고 1839년에는 런던조약에 서명하여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여야만 했다.\n\n=== 식민지 개척 ===\n벨기에는 국가로 인정받은 이후 해군(Marine Royale; 1865년에 해체되었다가 1917년에 다시 창설)을 창설하고, 식민지 개척을 장려한다. 레오폴 2세 치하인 1878년에는 콩고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콩고 자유국으로 만들었다.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콩고 자유국에서는 수백만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무력과 착취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집단 살해 사건은 고무 테러라고 불린다. 1899년 조지프 콘래드는 자신의 저서 ‘암흑의 핵심’에서 처음으로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콩고의 참혹한 역사를 처음으로 고발했다.\n\n이 시기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충격적인 책은 1999년 아담 호츠쉴드의 ‘레오폴드왕의 유령:식민지 아프리카의 탐욕과 테러, 영웅주의의 이야기’였다. 호츠쉴드는 이 책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간 수천명과 함께 수많은 콩고 민중들이 상아와 고무에 대해 레오폴 2세가 정한 생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학살을 당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레오폴 2세는 한번도 자신이 사유지화한 콩고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콩고로부터 착취한 자원은 그로 하여금 궁전과 기념비, 박물관을 짓고 어린 딸에게 호화스런 옷과 빌라를 사줄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살당한 콩고인의 수가 10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나 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n\n이후 레오폴드의 콩고 자유국 지배의 실태가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는 물론 본국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커졌고 1908년 벨기에 의회는 레오폴드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빼앗아 합병하고 인권침해 금지법안을 제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하여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를 만들어냈다. 한편 이 시기에 르완다, 부룬디에서 형성된 후투족과 투치족의 민족주의가 1990년대 르완다 내전의 불씨가 된다.\n\n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 6월 30일에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는 1962년 7월 1일에 르완다 공화국과 부룬디 공화국으로 각각 독립했다.\n\n=== 나치 독일의 지배 ===\n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국토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나라이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해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루뱅에서는 독일군이 자행한 학살로 많은 시민들이 무고하게 죽었다(벨기에 사람들은 이를 루뱅 시 학살 사건이라 하여 추념하며, 루뱅에서는 지금도 독일 국기를 게양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부흥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나라이며 1920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기도 했다.\n\n벨기에 사람들은 레오폴 3세를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레오폴 3세와 전왕(前王)인 알베르 1세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알베르 1세는 전쟁이 터졌을 때 국민과 군인들을 자주 만나고, 자신도 전쟁에 나섰다고 하여 국민들이 칭송하지만 레오폴트 3세는 나치 독일의 군대가 벨기에를 포위할 때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는 1951년에 퇴위를 선언하고, 보두앵을 국왕으로 임명한다.\n\n=== 연립정부 ===\n벨기에는 1993년에 연방 국가로 탈바꿈했으나, 최근 북부와 남부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국왕의 중재 아래 2008년 3월에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n\n또한 벨기에는 1993년 11월 1일 유럽연합이 탄생되면서 유럽연합의 본부가 설치된 나라이기도 하다.\n", "벨기에는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한다. 전체 면적은 33,990km2로 저지대를 뺀 온전한 땅만을 취한다면 30,528km2이다.\n", "쾨펜의 기후구분에 따르면 서안해양성 기후인 Cfb이다.\n", "이 나라는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헌 군주제이다. 현재 국왕은 필리프 1세다. 정치적으로는 의원내각제를 실행하고 있다. 현재 총리는 혁신운동 출신의 소피 월메스이다.\n\n벨기에는 언어 사용 지역별로 지역주의가 굉장히 강하며, 벨기에 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원내 정당은 지역정당이다. 플랑드르 지역은 신플람스 연맹, 열린 플람스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당과 플람스, 다른 사회당, 녹색당, 플람스의 이익이, 왈롱 지역은 사회당, 혁신운동, 생태당, 인문민주중도당, 데피, 인민당이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n", "2017년 기준으로 벨기에의 주요 수입출 상대국은 독일(16.61%), 프랑스(14.89%), 네덜란드(12.01%), 영국(8.42%), 이탈리아(4.91%)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네덜란드(17.20%), 독일(13.84%), 프랑스(9.48%), 미국(7.19%), 영국(4.83%)이다.\n\n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429,98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06,41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제품(25,532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20,8454백만 달러), 자동차 (11,053백만 달러), 다이아몬드 (10,911백만 달러), 독극물(8,067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제품(18,838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15,831백만 달러), 원유(15,285백만 달러), 자동차(12,648백만 달러), 가솔린(9,243백만 달러)이다.\n", "", "\n전국민의 약 57%를 차지하는 북쪽의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플랑드르인(자신들은 '플라밍'라고 부른다. : Vlaming)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고, 32%를 차지하는 남쪽의 왈로니 지역에서는 왈로니인(왈롱, wallons)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살고 있으며, 벨기에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모로코, 터키와 콩고 (대부분 브뤼셀에 거주) 등지에서 온 이민들이다.\n", "'''공식 언어'''\n\n\n공식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이다. 벨기에 왕실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구사해야 하며, 미스 벨기에 역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n\n10%를 차지하는 수도 브뤼셀 지역은 법적으로는 네덜란드어 및 프랑스어 두 언어를 병용하지만, 브뤼셀의 주민 8할 이상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나라의 언어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1993년에 개정한 헌법과 그에 따른 연방제의 구조를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n\n독일어 사용지역(벨기에 독일어 공동체)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가 독일로부터 할양받은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 독일의 라인 지방의 일부였던 이 지역을 얻은 1919년에 독일어가 공식 공용어로 지정되었다.\n\n벨기에의 모든 학교에서는 영어가 외국어 필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스페인어 등을 제2외국어로 선택한다. 그리고 왈롱에서는 네덜란드어를, 플란데런에서는 프랑스어를 외국어로 배운다.\n", "\n이 나라의 국민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다. 그 밖에도 정교회나 개신교 종파가 존재하며, 이민자들로 인해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다.\n", "\n\n벨기에의 국군 통수권자는 국왕이며, 4만 1천명의 정규군이 존재한다.\n\n# 육군 (Composante Terre), 1830년 창설 (26,400명)\n# 해군 (Composante Maritime), 1917년 창설 (2,400명)\n# 공군 (Composante Air), 1915년 창설 (8,900명)\n# Medical Component (Composante Médicale), 2002년 창설 (2,000명)\n", "200px\n\n\n\n1993년 7월 14일 개정된 헌법은 벨기에를 독특한 연방제 국가로 만들었다. 연방은 세 계층으로 구성된다.\n# 브뤼설에 자리한 연방 정부\n# 세개의 언어 공동체\n# 세개의 지역\n", "벨기에는 맥주와 초콜릿, 그리고 벨기에 와플로 유명하다. 또한 스머프와 탱탱의 모험 같은 만화들을 제작해내기도 하였다. 수도 브뤼셀에는 오줌싸개 동상이 있어 세계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n\n=== 언론 ===\n이 나라의 공영방송으로는 네덜란드어권의 VRT, 프랑스어권의 RTBF, 독일어권의 BRF가 있으며, 민영방송으로 네덜란드어권의 VTM, 프랑스어권의 RTL-TVI가 있다.\n", "=== 대한민국 ===\n==== 한국과의 수교 및 한국전쟁 참전 ====\n벨기에는 1901년에 대한 제국과 수교하였고, 1905년에 단교하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벨기에군과 룩셈부르크 군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보병 1개 대대(일명 벨룩스 대대, 벨기에 대대에 룩셈부르크가 소대 병력으로 합류)를 파병했다. 휴전 때까지 연인원 약 3천500명이 참전해 106명이 전사했다. 2016년 기준으로 생존자는 약 730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n\n==== 대사관 ====\n브뤼셀에 대한민국 대사관(주 룩셈부르크 대사관, 주 유럽연합 대표부 겸임)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벨기에 수출은 22억5537만USD, 벨기에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억5033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벨기에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35위의 수출국이자 제38위의 수입국이다. 모두 824 명(재외국민 751명, 시민권자 73명)의 한민족들이 벨기에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2002년 FIFA 월드컵 때는 대표팀이 일본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대한민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으로 갔으나, 1988년 하계 올림픽 때는 벨기에가 서울에 선수단을 직접 파견하였다. 2014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겐트 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섰다. 1995년에는 아시아나항공이 벨기에로 가는 항공편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인해 단항되었다. 한편, 설기현이 벨기에 주필러 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으며 벨기에 선수도 K-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n\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n2001년에 공식 수교하였다. 이로써 벨기에는 사실상 한반도의 두 개 정부를 모두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n\n=== 파키스탄 ===\n벨기에는 이슬라마바드에 대사관, 카라치와 라호르에 각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파키스탄은 브뤼셀에 대사관, 헨트, 안트베르펜, 그리고 벨기에령 룩셈부르크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6위 규모의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수입국이며, 양국의 무역 규모는 6억 USD에 육박하고 있다. 2008년 초, 파키스탄의 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그의 유럽 순방(영국, 프랑스, 스웨덴 포함) 중에 벨기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브뤼셀 방문 중, 당시 벨기에 총리 히 버르호프스타트와 함께 무역 및 상호 방위 협약에 대하여 논의한 바 있다.\n\n=== 터키 ===\n벨기에는 앙카라에 대사관, 이스탄불에 총영사관, 안탈리아와 이즈미르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터키는 브뤼셀에 대사관, 안트베르펜에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n", "\n* 레오폴 1세 (1831년~1865년)\n* 레오폴 2세 (1865년~1909년)\n* 알베르 1세 (1909년~1934년)\n* 레오폴 3세 (1934년~1951년)\n* 보두앵 1세 (1951년~1993년)\n* 알베르 2세 (1993년~2013년)\n* 필리프 1세 (2013년~현재)\n", "\n", "\n* 벨기에 정부 홈페이지\n* 브뤼셀 시 홈페이지\n* 주한 벨기에 대사관\n* 주벨기에 대한민국 대사관 겸 유럽연합 대표부 \n\n\n\n\n\n\n\n\n\n\n\n\n\n\n \n분류:독일어권\n분류:프랑스어권\n분류:네덜란드어권\n분류:입헌군주국\n분류:유엔 회원국\n분류:연방제 국가\n분류:유럽 연합 회원국\n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n분류:프랑코포니 회원국\n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n분류: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n분류:지중해 연합 회원국" ]
'''벨기에 왕국'''(, , , ), 줄여서 '''벨기에'''(, , )는 서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이다. 공용어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이다. === 독립 === 벨기에는 본래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년) 이후 북부와 분열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93년 프랑스는 벨기에를 합병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벨기에는 북부의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합쳐지게 되었으나 절대주의적 통치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신앙적인 차이로 인해 왈롱인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내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난 1830년, 이 혁명에 자극받은 왈롱인들이 8월 5일경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벨기에 사람들은 벨기에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 날을 독립 기념일로 여긴다. 네덜란드가 편성한 진압군은 벨기에군을 간단히 격파하였으나 벨기에를 병합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프랑스의 무력 및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831년 휴전을 맺고 1839년에는 런던조약에 서명하여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여야만 했다. === 식민지 개척 === 벨기에는 국가로 인정받은 이후 해군(Marine Royale; 1865년에 해체되었다가 1917년에 다시 창설)을 창설하고, 식민지 개척을 장려한다. 레오폴 2세 치하인 1878년에는 콩고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콩고 자유국으로 만들었다.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콩고 자유국에서는 수백만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무력과 착취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집단 살해 사건은 고무 테러라고 불린다. 1899년 조지프 콘래드는 자신의 저서 ‘암흑의 핵심’에서 처음으로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콩고의 참혹한 역사를 처음으로 고발했다. 이 시기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충격적인 책은 1999년 아담 호츠쉴드의 ‘레오폴드왕의 유령:식민지 아프리카의 탐욕과 테러, 영웅주의의 이야기’였다. 호츠쉴드는 이 책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간 수천명과 함께 수많은 콩고 민중들이 상아와 고무에 대해 레오폴 2세가 정한 생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학살을 당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레오폴 2세는 한번도 자신이 사유지화한 콩고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콩고로부터 착취한 자원은 그로 하여금 궁전과 기념비, 박물관을 짓고 어린 딸에게 호화스런 옷과 빌라를 사줄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살당한 콩고인의 수가 10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나 이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후 레오폴드의 콩고 자유국 지배의 실태가 알려지면서 국제사회는 물론 본국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커졌고 1908년 벨기에 의회는 레오폴드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빼앗아 합병하고 인권침해 금지법안을 제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하여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를 만들어냈다. 한편 이 시기에 르완다, 부룬디에서 형성된 후투족과 투치족의 민족주의가 1990년대 르완다 내전의 불씨가 된다.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 6월 30일에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는 1962년 7월 1일에 르완다 공화국과 부룬디 공화국으로 각각 독립했다. === 나치 독일의 지배 === 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국토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나라이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해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루뱅에서는 독일군이 자행한 학살로 많은 시민들이 무고하게 죽었다(벨기에 사람들은 이를 루뱅 시 학살 사건이라 하여 추념하며, 루뱅에서는 지금도 독일 국기를 게양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부흥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나라이며 1920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기도 했다. 벨기에 사람들은 레오폴 3세를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레오폴 3세와 전왕(前王)인 알베르 1세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알베르 1세는 전쟁이 터졌을 때 국민과 군인들을 자주 만나고, 자신도 전쟁에 나섰다고 하여 국민들이 칭송하지만 레오폴트 3세는 나치 독일의 군대가 벨기에를 포위할 때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는 1951년에 퇴위를 선언하고, 보두앵을 국왕으로 임명한다. === 연립정부 === 벨기에는 1993년에 연방 국가로 탈바꿈했으나, 최근 북부와 남부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국왕의 중재 아래 2008년 3월에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 또한 벨기에는 1993년 11월 1일 유럽연합이 탄생되면서 유럽연합의 본부가 설치된 나라이기도 하다. 벨기에는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한다. 전체 면적은 33,990km2로 저지대를 뺀 온전한 땅만을 취한다면 30,528km2이다. 쾨펜의 기후구분에 따르면 서안해양성 기후인 Cfb이다. 이 나라는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헌 군주제이다. 현재 국왕은 필리프 1세다. 정치적으로는 의원내각제를 실행하고 있다. 현재 총리는 혁신운동 출신의 소피 월메스이다. 벨기에는 언어 사용 지역별로 지역주의가 굉장히 강하며, 벨기에 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원내 정당은 지역정당이다. 플랑드르 지역은 신플람스 연맹, 열린 플람스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당과 플람스, 다른 사회당, 녹색당, 플람스의 이익이, 왈롱 지역은 사회당, 혁신운동, 생태당, 인문민주중도당, 데피, 인민당이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벨기에의 주요 수입출 상대국은 독일(16.61%), 프랑스(14.89%), 네덜란드(12.01%), 영국(8.42%), 이탈리아(4.91%)이다. 주요 수입 상대국은 네덜란드(17.20%), 독일(13.84%), 프랑스(9.48%), 미국(7.19%), 영국(4.83%)이다. 2017년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429,980백만 달러, 총수입액은 406,412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제품(25,532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20,8454백만 달러), 자동차 (11,053백만 달러), 다이아몬드 (10,911백만 달러), 독극물(8,067백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석유 제품(18,838백만 달러), 기타 의약품(15,831백만 달러), 원유(15,285백만 달러), 자동차(12,648백만 달러), 가솔린(9,243백만 달러)이다. 전국민의 약 57%를 차지하는 북쪽의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플랑드르인(자신들은 '플라밍'라고 부른다. : Vlaming)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고, 32%를 차지하는 남쪽의 왈로니 지역에서는 왈로니인(왈롱, wallons)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살고 있으며, 벨기에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모로코, 터키와 콩고 (대부분 브뤼셀에 거주) 등지에서 온 이민들이다. '''공식 언어''' 공식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이다. 벨기에 왕실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구사해야 하며, 미스 벨기에 역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10%를 차지하는 수도 브뤼셀 지역은 법적으로는 네덜란드어 및 프랑스어 두 언어를 병용하지만, 브뤼셀의 주민 8할 이상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나라의 언어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1993년에 개정한 헌법과 그에 따른 연방제의 구조를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독일어 사용지역(벨기에 독일어 공동체)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가 독일로부터 할양받은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 독일의 라인 지방의 일부였던 이 지역을 얻은 1919년에 독일어가 공식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벨기에의 모든 학교에서는 영어가 외국어 필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스페인어 등을 제2외국어로 선택한다. 그리고 왈롱에서는 네덜란드어를, 플란데런에서는 프랑스어를 외국어로 배운다. 이 나라의 국민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다. 그 밖에도 정교회나 개신교 종파가 존재하며, 이민자들로 인해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다. 벨기에의 국군 통수권자는 국왕이며, 4만 1천명의 정규군이 존재한다. # 육군 (Composante Terre), 1830년 창설 (26,400명) # 해군 (Composante Maritime), 1917년 창설 (2,400명) # 공군 (Composante Air), 1915년 창설 (8,900명) # Medical Component (Composante Médicale), 2002년 창설 (2,000명) 200px 1993년 7월 14일 개정된 헌법은 벨기에를 독특한 연방제 국가로 만들었다. 연방은 세 계층으로 구성된다. # 브뤼설에 자리한 연방 정부 # 세개의 언어 공동체 # 세개의 지역 벨기에는 맥주와 초콜릿, 그리고 벨기에 와플로 유명하다. 또한 스머프와 탱탱의 모험 같은 만화들을 제작해내기도 하였다. 수도 브뤼셀에는 오줌싸개 동상이 있어 세계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 언론 === 이 나라의 공영방송으로는 네덜란드어권의 VRT, 프랑스어권의 RTBF, 독일어권의 BRF가 있으며, 민영방송으로 네덜란드어권의 VTM, 프랑스어권의 RTL-TVI가 있다. === 대한민국 === ==== 한국과의 수교 및 한국전쟁 참전 ==== 벨기에는 1901년에 대한 제국과 수교하였고, 1905년에 단교하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벨기에군과 룩셈부르크 군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보병 1개 대대(일명 벨룩스 대대, 벨기에 대대에 룩셈부르크가 소대 병력으로 합류)를 파병했다. 휴전 때까지 연인원 약 3천500명이 참전해 106명이 전사했다. 2016년 기준으로 생존자는 약 730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대사관 ==== 브뤼셀에 대한민국 대사관(주 룩셈부르크 대사관, 주 유럽연합 대표부 겸임)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벨기에 수출은 22억5537만USD, 벨기에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억5033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벨기에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35위의 수출국이자 제38위의 수입국이다. 모두 824 명(재외국민 751명, 시민권자 73명)의 한민족들이 벨기에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2002년 FIFA 월드컵 때는 대표팀이 일본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대한민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으로 갔으나, 1988년 하계 올림픽 때는 벨기에가 서울에 선수단을 직접 파견하였다. 2014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겐트 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섰다. 1995년에는 아시아나항공이 벨기에로 가는 항공편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인해 단항되었다. 한편, 설기현이 벨기에 주필러 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으며 벨기에 선수도 K-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2001년에 공식 수교하였다. 이로써 벨기에는 사실상 한반도의 두 개 정부를 모두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 파키스탄 === 벨기에는 이슬라마바드에 대사관, 카라치와 라호르에 각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파키스탄은 브뤼셀에 대사관, 헨트, 안트베르펜, 그리고 벨기에령 룩셈부르크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6위 규모의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수입국이며, 양국의 무역 규모는 6억 USD에 육박하고 있다. 2008년 초, 파키스탄의 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그의 유럽 순방(영국, 프랑스, 스웨덴 포함) 중에 벨기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브뤼셀 방문 중, 당시 벨기에 총리 히 버르호프스타트와 함께 무역 및 상호 방위 협약에 대하여 논의한 바 있다. === 터키 === 벨기에는 앙카라에 대사관, 이스탄불에 총영사관, 안탈리아와 이즈미르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터키는 브뤼셀에 대사관, 안트베르펜에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 레오폴 1세 (1831년~1865년) * 레오폴 2세 (1865년~1909년) * 알베르 1세 (1909년~1934년) * 레오폴 3세 (1934년~1951년) * 보두앵 1세 (1951년~1993년) * 알베르 2세 (1993년~2013년) * 필리프 1세 (2013년~현재) * 벨기에 정부 홈페이지 * 브뤼셀 시 홈페이지 * 주한 벨기에 대사관 * 주벨기에 대한민국 대사관 겸 유럽연합 대표부 분류:독일어권 분류:프랑스어권 분류:네덜란드어권 분류:입헌군주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연방제 국가 분류:유럽 연합 회원국 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 분류:프랑코포니 회원국 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분류: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분류:지중해 연합 회원국
6월 25일
[ "Introduction", "사건", "문화", "탄생", "사망", "기념일", "같이 보기" ]
[ "\n'''6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6번째(윤년일 경우 177번째) 날에 해당한다.\n\n", "* 1592년 - 해유령 전투 : (임진왜란)한양을 함락 시킨 일본이 양주를 침공함. 조선 육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n* 1862년 - 미국 남북 전쟁 : 북군3군단(군단장 하인첼만) 소속 후커 사단이 남북군 중간지대의 남군을 공격하여 숲 지역 점령하다.\n* 1876년 - 리틀빅혼 전투, 앉은황소를 중심으로 한 인디언 연합이 미국 7기병연대를 무찌른 전투.\n* 1950년 - 새벽 4시,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다.\n* 1963년 - 거제 장승포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n* 1975년 -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다.\n* 1991년 -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n* 1993년 - 킴 캠벨이 캐나다 최초의 여성 총리로 뽑히다.\n* 1999년 - 코소보 전쟁의 종전.\n* 2007년 - 캄보디아 전세기가 캄보디아 프놈펜 남쪽 130km 떨어진 산 속에 추락, 13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22명이 사망하다.\n", "* 1960년 - 일본 도로교통법 제정되었다.\n* 1971년 - 하나은행의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이 설립되다.\n* 1978년 - 아르헨티나가 1978년 FIFA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연장접전까지 간 끝에 3:1로 승리, 월드컵에서 우승함.\n* 1998년 - 윈도우 98이 영어판으로 최초로 출시되다.\n* 2002년 - 대한민국이 2002년 FIFA 월드컵 4강전에서 발락의 결승골로 독일에 0:1로 패하며 3-4위전으로 밀려났다.\n* 2012년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4대 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착좌 미사가 거행되었다.\n* 2021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11이 공개되었다.\n", "* 1852년 -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1926년)\n* 1894년 - 독일의 과학자 발터 네른스트. (~1941년)\n* 1903년 -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 (~1950년)\n* 1908년 - 미국의 철학자 윌러드 밴 오먼 콰인. (~2000년)\n* 1919년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가수 한복남. (~1991년)\n* 1924년 - 미국의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 (~2011년)\n* 1937년 - 제16대 쿠웨이트 에미르 나와프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2023년)\n* 1926년 - 오스트리아의 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 (~1973년)\n* 1949년 - 대한민국의 배우 겸 방송인 윤주상.\n* 1950년 - 대한민국의 성우 기연호.\n* 1956년 - 미국의 요리사, 방송인 앤서니 보데인. (~2018년)\n* 1961년 - 잉글랜드의 배우 리키 저베이스.\n* 1963년 - 영국의 가수 조지 마이클 (Wham!). (~2016년)\n* 1966년 - 대한민국의 성우 성완경.\n* 196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채시라.\n* 1969년\n**대한민국의 배우 추귀정.\n**일본의 축구선수 혼다 야스토.\n* 1973년\n**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세진.\n** 대한민국의 야구인 손혁.\n* 1979년 - 미국의 배우 홍 차우.\n* 1981년 - 스위스의 스키점프 선수 지몬 아만.\n* 1982년\n** 대한민국의 가수 비.\n** 대한민국의 배우 김재철.\n* 1986년\n**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호석.\n** 일본의 가수 마쓰우라 아야\n* 1987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배장호.\n* 1988년\n**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지성.\n** 대한민국의 컬링 선수 이슬비.\n* 1990년\n**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화리.\n**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혜리.\n* 1991년 - 케냐의 축구 선수 빅터 완야마.\n* 1993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현희.\n* 1994년 - 일본의 성우 아사쿠라 모모.\n* 199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유재이.\n* 1996년 -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하이딘.\n* 1998년 - 대한민국의 가수 챠닐.\n* 1999년 - 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 신시아.\n* 2001년 - 일본의 가수 히라테 유리나.\n* 2003년 - 대한민국의 래퍼 차우주.\n", "* 1822년 - 독일의 소설가이자 작곡가 E. T. A. 호프만. (1776년~)\n* 1861년 - 오스만 제국의 31대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 (1823년~)\n* 1876년 - 미국의 군인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1839년~)\n* 1939년 - 한국의 소설가 백신애. (1908년~)\n* 1959년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첫 번째 부인 차용애. (1927년~)\n* 198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음악인 리면상. (1908년~)\n* 1996년 - 대한민국의 승려 서경보. (1914년~)\n* 2007년 - 대한민국의 기자 조종옥. (1971년~)\n* 2009년 - 대한민국의 탤런트 김태호. (1979년~)\n* 2009년 - 미국의 영화배우 파라 포셋. (1947년~)\n* 2009년 - 미국의 팝 가수 마이클 잭슨. (1958년~)\n* 2019년 - 아르헨티나의 배우, 모델 이사벨 사를리. (1925년~)\n* 2020년 - 대한민국의 작가 양근승. (1935년~)\n* 2020년 -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김종철. (1947년~)\n* 2023년 - 미국의 물리학자 존 B. 구디너프. (1922년~)\n", "* 6·25전쟁일\n* 유니세프 선정 마룬 5의 날(Maroon 5 Day, 2016년 ~ )\n", "\n* 전날: 6월 24일 다음날: 6월 26일 - 전달: 5월 25일 다음달: 7월 25일\n* 음력: 6월 25일\n* 모두 보기\n\n\n " ]
'''6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76번째(윤년일 경우 177번째) 날에 해당한다. * 1592년 - 해유령 전투 : (임진왜란)한양을 함락 시킨 일본이 양주를 침공함. 조선 육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 * 1862년 - 미국 남북 전쟁 : 북군3군단(군단장 하인첼만) 소속 후커 사단이 남북군 중간지대의 남군을 공격하여 숲 지역 점령하다. * 1876년 - 리틀빅혼 전투, 앉은황소를 중심으로 한 인디언 연합이 미국 7기병연대를 무찌른 전투. * 1950년 - 새벽 4시,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다. * 1963년 - 거제 장승포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 1975년 -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다. * 1991년 -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 1993년 - 킴 캠벨이 캐나다 최초의 여성 총리로 뽑히다. * 1999년 - 코소보 전쟁의 종전. * 2007년 - 캄보디아 전세기가 캄보디아 프놈펜 남쪽 130km 떨어진 산 속에 추락, 13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22명이 사망하다. * 1960년 - 일본 도로교통법 제정되었다. * 1971년 - 하나은행의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이 설립되다. * 1978년 - 아르헨티나가 1978년 FIFA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연장접전까지 간 끝에 3:1로 승리, 월드컵에서 우승함. * 1998년 - 윈도우 98이 영어판으로 최초로 출시되다. * 2002년 - 대한민국이 2002년 FIFA 월드컵 4강전에서 발락의 결승골로 독일에 0:1로 패하며 3-4위전으로 밀려났다. * 2012년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4대 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착좌 미사가 거행되었다. * 2021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11이 공개되었다. * 1852년 -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1926년) * 1894년 - 독일의 과학자 발터 네른스트. (~1941년) * 1903년 -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 (~1950년) * 1908년 - 미국의 철학자 윌러드 밴 오먼 콰인. (~2000년) * 1919년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가수 한복남. (~1991년) * 1924년 - 미국의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 (~2011년) * 1937년 - 제16대 쿠웨이트 에미르 나와프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2023년) * 1926년 - 오스트리아의 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 (~1973년) * 1949년 - 대한민국의 배우 겸 방송인 윤주상. * 1950년 - 대한민국의 성우 기연호. * 1956년 - 미국의 요리사, 방송인 앤서니 보데인. (~2018년) * 1961년 - 잉글랜드의 배우 리키 저베이스. * 1963년 - 영국의 가수 조지 마이클 (Wham!). (~2016년) * 1966년 - 대한민국의 성우 성완경. * 196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채시라. * 1969년 **대한민국의 배우 추귀정. **일본의 축구선수 혼다 야스토. * 1973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세진. ** 대한민국의 야구인 손혁. * 1979년 - 미국의 배우 홍 차우. * 1981년 - 스위스의 스키점프 선수 지몬 아만. * 1982년 ** 대한민국의 가수 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재철. * 1986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호석. ** 일본의 가수 마쓰우라 아야 * 1987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배장호. * 1988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지성. ** 대한민국의 컬링 선수 이슬비. * 1990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화리.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혜리. * 1991년 - 케냐의 축구 선수 빅터 완야마. * 1993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현희. * 1994년 - 일본의 성우 아사쿠라 모모. * 199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유재이. * 1996년 - 대한민국의 전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하이딘. * 1998년 - 대한민국의 가수 챠닐. * 1999년 - 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 신시아. * 2001년 - 일본의 가수 히라테 유리나. * 2003년 - 대한민국의 래퍼 차우주. * 1822년 - 독일의 소설가이자 작곡가 E. T. A. 호프만. (1776년~) * 1861년 - 오스만 제국의 31대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 (1823년~) * 1876년 - 미국의 군인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1839년~) * 1939년 - 한국의 소설가 백신애. (1908년~) * 1959년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첫 번째 부인 차용애. (1927년~) * 198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음악인 리면상. (1908년~) * 1996년 - 대한민국의 승려 서경보. (1914년~) * 2007년 - 대한민국의 기자 조종옥. (1971년~) * 2009년 - 대한민국의 탤런트 김태호. (1979년~) * 2009년 - 미국의 영화배우 파라 포셋. (1947년~) * 2009년 - 미국의 팝 가수 마이클 잭슨. (1958년~) * 2019년 - 아르헨티나의 배우, 모델 이사벨 사를리. (1925년~) * 2020년 - 대한민국의 작가 양근승. (1935년~) * 2020년 -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김종철. (1947년~) * 2023년 - 미국의 물리학자 존 B. 구디너프. (1922년~) * 6·25전쟁일 * 유니세프 선정 마룬 5의 날(Maroon 5 Day, 2016년 ~ ) * 전날: 6월 24일 다음날: 6월 26일 - 전달: 5월 25일 다음달: 7월 25일 * 음력: 6월 25일 * 모두 보기
도쿄도
[ "Introduction", "개요", "수도", "역사", "지리", "기후", "상징", "인구", "행정", "교육", "경제", "교통", "문화", "스포츠", "자매 결연 도시",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
[ "\n\n\n\n'''도쿄도'''(, , , Tōkyō-Tō) 또는 '''도쿄''', '''동경'''은 일본의 수도이며 간토지방에 위치하는 도(都)로, 일본의 도 행정구역 가운데서 인구 수가 2021년 기준 14,049,146으로 가장 많은 지역이다. 동부는 태평양 연안 도쿄만이 접한다. 서부는 구모토리산이 최고봉이며 간토산지가 있다.\n\n도부(23구) 다마지역(26시 3정 1촌) 및 도서부(2정 7촌)로 이어져 있고, 현청 소재지는 신주쿠구에 있다.\n\n행정기관, 금융기관이나 대기업 등이 집중되어 신문·방송·출판 등의 문화면, 대학·연구기관 등의 교육·학술면에서도 일본의 중추를 이룬다. 교통면에서도 철도망, 도로망, 항공로의 중심이며, 경제, 문화, 교통, 상업, 금융 등 여러 부분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이다. \n\n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도시에 속하며, 일본의 민간 연구소가 2016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도시에서는 뉴욕, 런던과 함께 뒤이어 세계 3위로 평가되었다. 이코노미스트의 조사 부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에 의해 2021년도 조사에서 도쿄도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세계 5위이며 아시아에서는 1위로 선출되었다. \n또, 미국의 싱크탱크 또한, 2020년 세계도시 랭킹(GCI 2020)에서는 뉴욕과 런던 파리가 세계 4위의 도시로 평가되었으며 영국기관이 발표하고 있는 2021년의 세계금융센터지수에선 세계 7위, 아시아 5위의 금융 센터로 평가되었다. 세계 경제권 명목 GDP 순위로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간토 지방이 전 세계 유일하게 2조 달러를 넘은 지역으로 세계 1위이다.\n\n지리적으로는 도쿄도와 주변 7현으로 수도권을 구성하고 있다.특히 도쿄권(도쿄도,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 등 도쿄 수도권, 혹은 이를 총칭하는 간토 지방의 총인구는 약 4,400만명에 달해, 일본 인구의 약 30%를 차지한다.\n", "관할하는 영역은 도쿄도 구부(도쿄 23구), 다마 지역(26시,3정 1촌) 및 도쿄도 도서부(오시마, 미야케, 하치조, 오가사와라) 4개의 지청(2정 7촌)이 구성되어 있다. 오키노토리 암초와 미나미토리섬을 오가사와라 제도를 포함시키기 위해 일본의 극점에 위치한 도도부현이다. 도가 공인한 '도쿄도'의 영어 표기는 Tokyo Metropolis (Tokyo Met.) 그 외 Tokyo Prefecture와 Tokyo Metropolitan Prefecture가 있다.\n\n인구는 2021년 7월 1일 기준으로 14,049,146명으로 돌파했으며. 일본 도도부현 중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으며 일본 인구의 약 11%를 차지하고 있다.인구밀도도 도도부현 안에서 가장 높다.도쿄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쿄 도시권은 인구 3700만명을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권이다.일본 인구의 대략 3할이 집중해, 폴란드나 모로코, 캐나다 등의 나라의 총인구에 필적한다.\n\n도쿄는 에도 막부가 놓인 예전의 에도가 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시 계획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 막말에는 동란을 거쳐 메이지 원년의 문서로부터 「도쿄」라고 표기되었다. 1869년 2월 11일 헤이안쿄 (교토)로부터 천도되어 (도쿄전도, 옛 수도 목록을 참고하라) 1878년에 부제가 시행되면서 도쿄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7월 1일 수도의 행정구역을 강화할 목적에서 도쿄도제를 시행하였다. 이로써 도쿄부와 도쿄시가 폐지되고 이를 통합하는 형태로 도쿄도가 설치된다. 종전 후인 1947년 일본 지방자치법이 시행에 따라, 1943년에 도쿄도제는 폐지되었지만, 「도쿄도」의 명칭과 행정 구역은 변경하지 않았다.즉 도쿄도제에 의해 도의 직할로 여겨진 구는 지방자치법 시행에 의해 특별지방공공단체인 특별구가 되어 시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일부 사무나 징세권은 계속해서 도에 유보된다. 이 때문에 도쿄도청은, 지금도 「23구를 포괄하는 시청으로서의 기능」과「현청으로서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n\n도쿄도의 의결기관인 도쿄도의회가 설치되었으며 수장인 도쿄도지사가 역할을 한다. 그 권능은 일본 지방자치법에 의해 정해져 있으며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임기는 4년. 지사 보좌직으로 도쿄도 부지사가 4명으로 놓여진다. 2017년 4월 현재 도청의 직원 수(이른바 '도의 직원')는 지사부국 등의 일반행정직원이 약 2만 5천명이며 공기업 부문(교통, 상수도, 하수도이 1만 3천명이고 또한 도쿄 소방청및 경시청 직원, 도쿄도 내의 국립학교 교직원까지 합치면 총계 약 16만 8천 명이다.\n\n도쿄도청사 (본청사)는 오랫동안 지요다구 유라쿠초에 있다가 1991년 4월 1일에 신주쿠구 니시신주쿠로 이전하였다. 이전에 따라 지방자치법에 따라 조례가 개정되어 이후 도청 소재지는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신주쿠 2초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 등의 도청 소재지 표기는 편의상 '도쿄'가 사용되어 국토지리원에 따르면 도쿄 이외의 도부현청 소재지는 시의 명칭을 사용하는데 반해, 도쿄의 경우는 실제 소재지인 신주쿠구를 포함한 23구를 통합하여 '도쿄'로 표기한다. 교과서에서도 국토 지리원과 같이 「도쿄」라고 하고 있는 것이 많다. 특별구가 시정촌이 아닌점, 시정촌이 가지는 업무 권한의 일부를 가지지 않은 점, 구부가 과거 도쿄시라는 하나의 시였던 점 등이 원인이 된다.\n", "도쿄 도심은 예전의 에도에 해당하며, 에도 막부 성립 이래 일본 정치·행정의 실질적인 중심지였다.1868년에 헤이안쿄에서 에도로 황궁과 태정관 등의 수도 기능이 이동했다고 하여(도쿄전도) 그 후 에도를 도쿄부로 개칭하고 수도가 되었다. 대일본제국기에는 제도라고도 불린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3년 도쿄부와 도쿄시가 통합되면서 다시 도쿄도가 수도가 됐다. 전후인 1950년에 도쿄도를 일본의 수도로서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수도건설법이 시행되었으나, 이 법은 1956년에 수도권정비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수도건설법 폐지로 도쿄도는 법적으로는 일본의 수도라는 근거가 없지만, 일본국 정부의 공식견해나 공문서상으로는 수도로 여겨져 도쿄도에 일본의 중추기능이 존재하고 있다. 2018년 2월에는 중의원 의원 아이사카 세이지의 질문에 대해 \"수도를 도쿄라고 직접 규정한 법령은 없지만, 도쿄도가 일본의 수도라는 것은 사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정부 견해가 나왔다.\n\n또, 수도권 정비법에서는, 도쿄도는 수도권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어 도쿄도의 공식 영어 표기 「Tokyo Metropolis」의 metropolis에는 「대도시, 대도시권」외에 「수도」의 의미도 있다.\n\n전술한 바와 같이 도쿄도를 수도로 직접 규정하는 것은 일본 헌법 및 일본 법률에는 없지만, 수도로서 그 중심부(특히 도쿄 23구)에 일본 정부의 국회의사당, 내각총리대신관저와 주요 부처, 최고재판소를 비롯한 3권의 중추기관이 설치된다. 이 밖에도 법률에 의해 그 기관을 도쿄도에 두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있다\n", "파일:Tokugawa Ieyasu2.JPG|섬네일|오른쪽|도쿠가와 이에야스\n파일:Kokyo0057.jpg|200px|섬네일|고쿄\n도쿄는 원래 작은 어촌으로 에도라고 명명되었다. 1457년에 오타 도칸은 에도 성을 세웠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를 근거지로 삼아 1603년에 쇼군이 되었으며 도시는 막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의 18세기 무렵에 인구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263년 후에 막부는 메이지 유신 하에 전복되었다. 1869년에 17세의 메이지 천황은 에도로 천도하였다. 에도는 이미 일본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있었고 예전의 에도 성은 고쿄가 되었다. 1889년 도쿄부 동부에 도쿄시가 설치되었다.\n\n도쿄는 20세기에 두 번의 대재해를 겪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번은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14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또 한번은 1945년의 도쿄 대공습으로 7만 5천 명에서 최대 20만 명이 사망하였고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1943년에는 도쿄부와 도쿄시를 도쿄도로 합쳤고, 이전의 도쿄시 지역은 도쿄도 구부(東京都區部)로 불리게 되었다. 전쟁 후에 도쿄는 완전히 재건되었고 196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에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는 선샤인60과 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섰고 1978년에는 도쿄 인근 지바현 나리타시에 나리타 국제공항이 건설되었으며 인구는 증가하여 도쿄도의 인구는 1,1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n\n도쿄 지하철과 통근 철도망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곳이 되었다. 1980년대에 도쿄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여 버블을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에 버블이 터지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한 많은 회사와 은행, 개인들은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다. 경기의 후퇴가 뒤따르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쿄는 여전히 많은 곳에 새로운 도시 개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의 계획으로는 에비스 공원과 덴노즈 아일, 시오도메, 롯폰기 힐스, 시나가와, 도쿄역의 마루노우치 부분이 포함된다. 중요한 건물들이 오모테산도 힐스와 같은 최신식 쇼핑 시설을 위해 헐리고 있다. 도쿄의 토지 매립 계획 또한 몇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다이바 지역으로 현재 쇼핑과 오락의 중심지이다.\n\n2020년에 두 번째로 개최되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인프라를 비롯한 자본 정비가 새롭게 추진되어 갈 예정이다(2020년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확인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의 영향으로 도쿄 대회는 2021년으로 연기 예정이다)\n", "도쿄도의 행정구역\n도쿄도의 본토 부분은 도쿄만의 북서쪽에 놓여있고 대략 동서의 길이는 90 km, 남북의 길이는 25 km 정도이다. 동쪽으로 지바현, 서쪽으로 야마나시현, 남쪽으로 가나가와현, 북쪽으로 사이타마현과 접한다.구와 서부의 다마 지역으로 나뉜다.\n\n또한 도쿄도의 행정 경계는 정남쪽의 두 개의 태평양의 열도를 포함한다. 하나는 이즈 제도이고 또 하나는 일본 본토에서 1000 km 이상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이다. 이들 섬들과 서부의 산지 지방 때문에 도쿄도의 인구 밀도는 도쿄의 도시 및 교외 지역의 실제 인구 밀도보다 훨씬 낮게 나타난다.\n\n=== 도쿄 23구 ===\n도쿄 23구 지도\n도쿄도의 특별구는 예전에 도쿄시를 이루었다. 1943년 7월 1일에 도쿄시는 도쿄부와 합쳐져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합병의 결과로서 일본의 다른 구들과 달리 특별구는 어떤 대도시의 일부로 취급되지 않는다. 각각의 구들은 일본의 다른 도시들처럼 각자의 시장과 의회를 선출한다. 이들 구들은 도 정부와 독특한 행정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들과 다르다. 수도, 하수, 소방과 같은 일부 지자체의 기능은 도 정부가 다룬다. 이러한 행정 비용을 위해 도 정부는 구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 사실상 일본의 수도·경제·정치·방송을 담당하며 관동지방이나 동경 경제권의 중심지이다.\n\n도쿄 23구(동경 23구)는 다음과 같다.\n\n\n* 가쓰시카구()\n* 고토구()\n* 기타구()\n* 나카노구()\n* 네리마구()\n* 다이토구()\n* 도시마구()\n* 미나토구()\n* 메구로구()\n* 스미다구()\n* 스기나미구()\n* 신주쿠구()\n* 세타가야구()\n* 시나가와구()\n* 시부야구()\n\n* 아다치구()\n* 아라카와구()\n* 에도가와구()\n* 이타바시구()\n* 오타구()\n* 분쿄구()\n* 주오구()\n* 지요다구()\n\n\n\n\n=== 다마 지역 ===\n1943년 이전에는 도쿄부에 속했던 지역이다. 도쿄 23구의 서쪽에 위치하며 시와 정, 촌으로 이루어져있다. 도쿄 중심가의 업무 기능을 위한 '침상도시' 역할을 하며 일부는 지역의 상업과 공업의 기반이다. 도쿄 23구는 물론 도쿄도와 붙어있는 가나가와현보다도 집값이 싼데다가 전철노선이 잘 갖추어져있어 이곳에서 도쿄 23구 혹은 요코하마 등의 다른 대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n==== 시 ====\n다마 지역에는 26개의 도시가 있다.\n\n\n* 고가네이시()\n* 고다이라시()\n* 고마에시()\n* 고쿠분지시()\n* 구니타치시()\n* 기요세시()\n* 니시토쿄시()\n* 다마시()\n* 다치카와시()\n\n* 마치다시()\n* 무사시노시()\n* 무사시무라야마시()\n* 미타카시()\n* 아키루노시()\n* 아키시마시()\n* 오메시()\n* 이나기시()\n* 조후시()\n\n* 하무라시()\n* 하치오지시()\n* 후추시()\n* 훗사시()\n* 히가시무라야마시()\n* 히가시야마토시()\n* 히가시쿠루메시()\n* 히노시()\n\n\n도쿄도 정부는 도쿄 중심의 도시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하치오지시(), 다치카와시, 마치다시, 오메시, 다마 신시가지는 다마 지역의 지역 중심지로 지정하였다.\n\n==== 군, 정, 촌 ====\n도쿄도의 극서부에는 니시타마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산지로 도시화에 적합하지 않다. 도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구모토리산(2017m)를 비롯해 다카수산(1737m), 오다케산(1266m), 미타케산(929m)이 이곳에 있다. 야마나시현 주변의 다마강에 위치한 도쿄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오쿠타마호가 있다.\n* 니시타마군()\n** 오쿠타마정(), 히노데정(), 미즈호정(), 히노하라촌()\n\n=== 도서 지역 ===\n파일:ShikinePortTyoJpDec04-01.jpg|섬네일|시키네섬\n파일:Hachijo-jima.JPG|섬네일|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n도쿄도에는 특별구의 도심으로부터 1850km까지 뻗어있는 수많은 외곽의 섬들이 있다. 신주쿠의 도청사와 섬들의 거리 때문에 지역 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한다.\n\n이즈 제도는 화산 열도로 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섬들로는 도쿄 본토에서 가까운 순으로 이즈오섬, 도시마, 니지마섬, 시키네섬, 고즈섬, 미야케섬, 미쿠라섬, 하치조섬, 아오가섬이 있다. 이즈오섬과 하치조섬은 정이다. 섬들에는 6개의 촌이 있으며 니지마와 시키네섬은 하나의 촌을 이룬다.\n\n도쿄도에는 오가사와라 제도가 포함되며 섬들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치지마섬, 니시노섬, 하하지마섬, 기타이오섬, 이오섬, 미나미이오섬이 있다. 오가사와라 지청은 또한 두 개의 조그마한 섬을 관할한다. 하나는 미나미토리섬으로 일본의 최동단에 있고 도쿄 중심부에서 1850 km 떨어진 가장 먼 섬이다. 또 하나는 오키노토리섬으로 일본의 최남단에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사람이 살지 않는 암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잔 열도와 외곽의 섬들은 영구적인 정착민은 없지만 자위대가 상주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오직 지치지마 섬과 하하지마 섬에만 살며 이 섬들은 오가사와라촌을 이루고 있다.\n\n* 오시마 지청()\n** 오시마정(), 도시마촌(), 니지마촌(), 고즈시마촌()\n* 미야케 지청()\n** 미야케촌(), 미쿠라지마촌()\n* 하치조 지청()\n** 하치조정(), 아오가시마촌()\n* 오가사와라 지청()\n** 오가사와라촌()\n\n=== 국립 공원 ===\n도쿄도에는 다음과 같은 국립공원들이 있다.\n* 메이지의 모리다카오 국정공원이 하치오지 남쪽 다카오산 주변에 있다.\n* 오가사와라 국립공원: 2006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n* 우에노 공원: 박물관으로 유명한 공원이다. 도쿄 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시타마치 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 우에노 동물원이 이곳에 있다. 또한 공원 도처에 예술 작품과 조각상들이 있다.\n", "도쿄는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로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온화하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연평균 기온은 15.8℃이다. 눈보라는 이따금씩 발생하는 수준이고, 거의 매년 태풍이 찾아온다. 장마가 6월 중순경부터 시작되므로 봄·가을에 여행하는 것이 좋다.\n\n", "도쿄도는 공식적으로 2개의 상징물이 있다. 하나는 문장(紋章)이고 나머지는 심벌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상징물이 들어간 깃발도 공식적으로 쓰인다.\n\n=== 문장 ===\n도쿄도문장\n'''도쿄도문장'''(東京都紋章)은 1943년 11월 2일부터 쓰이고 있으며 제 9대 도쿄도지사와 귀족원의원(현재의 참의원)을 지낸 와타나베 히로모토가 디자인하여 1889년 12월부터 쓰인 도쿄시의 문장과 같다. 고시 제 464호로 인하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6개의 햇살이 뻗어가는 태양을 나타내며 도쿄가 일본의 중심임을 나타낸다.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색이 채택되지 않았다. 이 문장은 간지인 東京(도쿄)의 京(쿄)를 닮았지만 고시에서는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n\n도쿄도기\n'''도쿄도기'''(東京都旗)는 1964년 10월 1일부터 쓰이고 있으며(고시 제 1042호) 진보라(江戸紫, 에도의 전통색)색 바탕의 중심에 하얀색의 도쿄도문장이 가운데에 들어가 있다. 비율은 2:3이다.\n\n=== 심벌 ===\n도쿄도심벌기\n'''도쿄도의 심벌마크'''(東京都のシンボルマーク)는 1989년 6월 1일 고시 제577호로 채택되었다. 디자인은 도쿄도심벌마크전형위원회의 20명의 지원자가 선택한 것으로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인 레이 요시무라(レイ吉村)가 만든 것이다. 선명한 초록색 심벌을 3개의 호가 있는 은행나무(도쿄도의 나무)의 잎이며 Tokyo의 T를 나타낸다.\n\n'''도쿄도심벌기'''(東京都シンボル旗)는 1989년 9월 30일 고시 제 978호로 채택되었다. 도쿄도의 심벌마크가 흰색 바탕의 기 중앙에 있다. 비율은 2:3이다.\n", "\n\n2016년 6월 기준으로 도쿄 도의 인구는 13,613,660명 도쿄 23구의 인구는 896만 7천 명으로 추정되었다. 주간에는 인접한 지역으로부터 통근하는 250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이 결과 도심인 지요다구, 주오구, 미나토구의 2005년 인구는 야간에는 32만 6천 명이지만 주간에는 240만 명에 달했다. 도의 인구는 주간에는 300만 명 이상 증가한다. 도쿄의 인구가 절정에 달했던 1965년에 23구의 인구는 889만 3094명에 달했고 1995년에 80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현재 인구는 전에는 14만명을 넘어섰으나 최근엔 도쿄도 전체 인구는 13,971,109명으로 하락했으며 최근 문서상에 따르면 인구조사에서 10,673명이 유출 된것으로 확인되었다. 결정적인 원인은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와 밀집지역 기피현상이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했다.\n\n2005년에 도쿄 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중국인 (123,661), 한국인 (106,697), 필리핀인 (31,077), 미국인 (18,848), 영국인 (7,696), 브라질인 (5,300) 프랑스인 (3,000) 순이었다.\n\n=== 고령자 ===\n2010년 시점에서 도쿄도의 고령화율은 20.4%이며 즉 고령자가 5명 중 1명에 이르고 있다,(향후 노인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2020년에는 도쿄에 사는 4명 중 1명이 고령자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n\n독신 고령자는 2010년 시점에서 62만명이다.(그 10년 후인 2020년에는 80만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됨)\n\n=== 연소자 ===\n도쿄도의 연소자(0~14세) 인구는, 이미 노인 인구보다 작다.(장래에도 감소가 전망된다).\n\n=== 주간 인구 및 야간 인구, 주간 유입 인구===\n\n; 주간 인구와 야간 인구\n\n2015년 기준 도쿄도의 주간 인구는 약 1592만명이며 그에 비해 야간 인구는 1352만명이나 되고 이는 도쿄도 내의 직장으로 통근하는 사람들과 도내의 학교로 통학하는 사람들로 인해 낮에 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낮에만 도쿄에서 주변의 도도부현으로 통근·통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수보다 유입되는 인구가 더 크므로 차감하여 낮에 241만 명이 많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마 지역과 도쿄 주변현(인접하지 않는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의 남부 포함)에는 도쿄의 베드타운이 점재하며 시즈오카현 동부와 니가타현 남부 등에서의 신칸센 통근자도 존재한다.\n\n; 주간 유입 인구\n\n23구 지역으로의 주간 유입 인구는 1980년에 266만명이던 것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5년에 372만명으로 정점을 맞았으며 그 후에는 서서히 감소해 2015년에 318만 명이 되었다. 주간 유입 인구가 많다는 것은 이들이 구 지역에서 낮에 다양한 활동(생산 활동이나 소비 활동)을 벌여 활기를 주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재해시에는 대량의 귀가 곤란자가 생기는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의미한다동일본 대지진 때에는, 도쿄도에서 약 352만명이 귀가 곤란자가 되었다고 추계되었다(내각부가 2011년 11월 22일에 발표한 인터넷 조사에 근거하는 추계.자세한 것은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귀가 곤란자」의 기사를 참조할 것).\n\n1920년 이후 도쿄도의 인구 그래프\n", "파일:Tokyo Metropolitan Government Building Oka1.JPG|섬네일|오른쪽|도쿄도청사\n파일:YasudaAuditorium.jpg|섬네일|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n파일:Old Keio University Library 3.jpg|섬네일|위오른쪽|게이오기주쿠 대학\n《일본 지방자치법》 하에서 도쿄는 도(都)로 지정되어 있다. 행정 구조는 일본의 다른 도도부현과 유사하다. 도쿄도는 1943년까지 도쿄시를 이루었던 23개의 특별구를 포함하며 이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각자의 구장과 의회를 가지고 있어 사실상 도시의 지위를 가진다. 도쿄도는 또한 각자의 지역 정부를 가진 26개의 시와 5개의 정, 8개의 촌을 포함한다. 도쿄도 정부는 공개적으로 선출된 도지사와 도 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도쿄도청은 신주쿠구에 있다. 도 정부는 호수, 강, 댐, 농장, 먼곳의 섬, 국립 공원과 번화가, 마천루, 지하철 등을 포함한 도쿄의 모든 것을 관할한다.\n", "도쿄에는 많은 대학, 전문 대학, 직업 학교가 존재 하고 있다. 많은 일본의 권위있는 대학들이 도쿄에 있다.\n=== 국립 대학 ===\n* 도쿄 대학\n* 도쿄 공업대학\n* 도쿄 외국어대학\n* 도쿄 해양대학\n* 도쿄 예술대학\n* 도쿄 농공대학\n* 도쿄 가쿠게이 대학\n* 히토쓰바시 대학\n* 정책연구대학원대학\n\n=== 공립 대학(도쿄 도립) ===\n* 도쿄 도립대학\n\n=== 사립 대학 ===\n* 게이오기주쿠 대학\n* 와세다 대학\n* 조치 대학\n* 메이지 대학\n* 릿쿄 대학\n*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n* 호세이 대학\n* 주오 대학\n* 가쿠슈인 대학\n* 국제 기독교 대학\n* 니혼 대학\n* 센슈 대학\n\n구와 지자체에 의해 운영되는 공립 유치원, 소학교(1학년~6학년), 중학교(7학년~9학년)이 있다. 도쿄의 공립 고등학교는 도쿄도 교육위원에 의해 운영되고 \"도 고등학교\"로 불린다. 그밖에 도쿄에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많은 사립 학교가 있다.\n", "\n파일:Tokyo stock exchange.jpg|섬네일|오른쪽|도쿄 증권거래소\n도쿄는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 3대 금융 중심지 중 하나이다. 또한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권 경제이다. 도쿄도의 2019년 총 GDP는 115조 7000억 엔로 세계의 도시들 중 1위를 차지했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목록에서 도쿄에 기반을 둔 기업은 51개로 2위 파리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n\n도쿄는 주요 국제 금융 중심지이고 몇몇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과 보험 회사들의 본사가 입지해있으며 일본의 교통, 출판, 방송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중앙집권화된 성장에 따라 많은 대기업들이 정부와의 더 좋은 접근성을 얻기 위해서 역사적인 상업 수도인 오사카 같은 도시에서 도쿄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도쿄의 지속적인 인구 성장과 높은 생계 비용 때문에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도쿄는 이코노미스트에 의해 2006년까지 14년 동안 생계 비용이 가장 비싼 도시로 선정되었다.\n\n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 일본 경제의 중추는 도쿄에 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일본에서 가장 큰 증권 거래소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증권 거래소이다. 1990년의 일본 자산 가격 버블 때 도쿄는 세계 주식 시장 가치의 60% 이상을 차지했다.\n\n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2003년에 도쿄도의 경작지는 8460헥타르였다. 농지는 주로 도쿄도의 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상하기 쉬운 야채, 과일, 꽃을 편리하게 도의 동부로 선적할 수 있다. 고마츠나와 시금치는 가장 중요한 야채로써 2000년에 도쿄도는 중앙 생산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마츠나의 32.5%를 공급하였다. 전체 면적의 36%가 숲으로 덮여있고 도쿄도의 서부 산지에서는 삼나무와 편백이 광범위하게 자란다. 목재 가격의 하락, 생산 비용의 증가, 임업 인구의 노령화로 도쿄도의 생산량은 감소하고 있다.\n\n도쿄만은 한때 주요 어장이었으며 현재 도쿄도의 어업 생산량 대부분은 이즈오섬, 하치조섬과 같은 바깥의 섬들로부터 온다. 가다랑어, 노리(김), 전갱이과가 대양에서 생산된다. 관광업 또한 도쿄의 경제에 상당 부분 기여를 한다.\n", "=== 공항 ===\n파일:Haneda kokusaisen entrance.png|섬네일|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n도쿄도에는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 조후 비행장, 오시마 공항, 미야케지마 공항, 하치조지마 공항,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이 있다.\n\n도쿄 국제공항(東京国際空港)은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라고도 불리며, 오타구 남부에 위치하여 있다. 1978년 5월, 나리타 국제공항이 개항한 이후로는 국내선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2010년 10월에 신 국제선 터미널이 완공되었다. 도심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일본 정부의 전용기, 국빈급 승객이 이용하는 일본 이외 국가의 특별기도 도쿄 국제공항을 많이 사용한다. 도심과의 교통수단으로는 터미널 바로 아래에서 탈 수 있는 도쿄 모노레일과 게이큐 선이 있으며, 이외에도 리무진 버스가 공항과 도쿄도 내 또는 인근 도도부현의 주요 역, 주요 호텔 등을 잇는다. 이외에 노선 버스나 택시 등도 이용할 수 있다.\n\n도쿄 국제공항에서 발착하지 않는 국제선은 주로 지바현 나리타시에 있는 나리타 국제공항(成田国際空港)에서 발착한다. 개항 당시에는 도심에서 공항으로의 교통수단이 히가시칸토 자동차도를 경유하는 리무진 버스와 터미널에서 가까웠던 당시의 나리타 공항역(현 히가시나리타 역)까지 운행하였던 게이세이 전철의 스카이라이너 뿐이었지만, 1991년 3월부터 공항 터미널 바로 아래에 역이 신설되어(제3터미널 제외) 동일본여객철도와 게이세이 전철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쿄도 도심부에서 공항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되며, 2010년 7월에는 나리타 고속철도 액세스가 개통하였다.\n\n다마 지역에는 조후 비행장(調布飛行場)이 있으며, 신추오항공이 이즈 제도로의 정기편을 운항하고 있다. 다른 공항들은 도서 지역의 공항이다. 이즈오섬에 있는 오시마 공항(大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 하치조지마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미야케지마 공항(三宅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하치조지마 공항(八丈島空港)에는 하네다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에는 공항이 없으며, 교통 상황의 개선을 위해 공항을 건설해야 하는가, 자연 보호를 위해 건설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이 있다.\n\n=== 철도 ===\n파일:Tokyo Station Outside view 201804.jpg|섬네일|오른쪽|도쿄역 \n파일:Yamanote-Line-E235.jpg|섬네일|오른쪽|야마노테선 \n파일:Tokyo metro map en.png|섬네일|오른쪽|도쿄 지하철 노선도\n\n도쿄에 위치한 역수는 654개 역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의 도도부현에서 가장 역수가 많아 가장 면적이 넓은 홋카이도의 522개 역을 비교해도 100개 역을 많이 가지고 있다. 동일본여객철도의 야마노테선이 순환선을 운행하고 있으며 연선을 주기적으로 이어지는 도쿄역, 시나가와역, 시부야역, 우에노역, 이케부쿠로역 등의 역이 철도 각선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에노 도쿄 라인과 게이힌 도호쿠선, 요코스카·소부 쾌속선등이 운행을 하고 있으며 그외에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까지 직통 열차가 하루종일 운행되고있다.\n\n==== 주요 역 ====\n:도쿄역, 우에노역, 시나가와역, 시부야역, 신주쿠역, 이케부쿠로역, 아키하바라역, 아사쿠사역, 긴자역 등\n\n==== 주요 노선 ====\n* 초광역 노선\n** 도카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도카이도 본선, 주오 본선, 도호쿠 본선, 조반 선\n* 광역노선\n** 동일본 여객철도 : 야마노테선, 소부 본선, 게이힌토호쿠선, 난부 선, 요코하마 선, 무사시노 선, 게이요 선, 하치코 선, 오메 선, 이쓰카이치 선, 사이쿄 선\n** 도쿄 지하철 : 도자이 선, 후쿠토신 선, 신주쿠 선, 유라쿠초 선\n** 도쿄 급행 전철 : 도요코 선, 메구로 선, 덴엔토시 선\n** 게이힌 급행 전철 : 게이큐 본선\n** 오다큐 전철 : 오다와라 선, 다마선\n** 세이부 철도 : 이케부쿠로 선, 신주쿠 선, 다마코 선, 야마구치 선, 하이지마 선, 고쿠분지 선, 세이부엔 선, 다마가와 선\n** 도부 철도 : 이세사키 선, 도조 본선\n** 게이세이 전철 : 게이세이 본선\n** 사이타마 고속철도 : 사이타마 고속철도선\n** 호쿠소 철도 : 호쿠소선\n** 수도권 신도시 철도 : 쓰쿠바 익스프레스\n** 게이오 전철 : 게이오선, 이노카시라 선\n** 다마 도시 모노레일 : 다마 도시 모노레일 선\n* 도쿄23구내\n** 도쿄 메트로 : 긴자선, 마루노우치선, 히비야선, 지요다선, 한조몬 선, 난보쿠 선\n** 도쿄 도 교통국(도에이 지하철) : 아사쿠사 선, 미타 선, 오에도선, 신주쿠 선, 노면전차 아라카와 선, 우에노 현수선, 닛포리·도네리 라이너\n** 도쿄 급행 전철(도큐 전철) : 오이마치 선, 다마가와 선, 이케가미 선, 세타가야 선\n** 게이힌 급행 전철(게이큐 전철) : 게이큐 본선, 공항선\n** 세이부 철도 : 유라쿠초 선, 도시마 선\n** 도부 철도 : 이세사키 선, 가메이도 선, 다이시 선\n** 게이세이 전철 : 오시아게 선, 가나마치 선\n** 도쿄 모노레일 : 하네다 선\n** 유리카모메 : 도쿄 임해 신교통 임해선\n** 도쿄 임해 고속 철도 : 린카이선\n* 다마 지역\n** 게이오 전철 : 경마장선, 동물원선, 다카오 선\n\n=== 도로 ===\n* 고속도로\n** 도메이 고속도로\n** 주오 자동차도\n** 간에쓰 자동차도\n** 도쿄 외환 자동차도\n** 게이요 도로\n** 수도권 중앙 연락 자동차도\n* 도시권 자동차 전용도로\n** 슈토 고속도로\n** 도쿄 고속도로\n** \n* 국도\n** 국도 제1호선\n** 국도 제4호선\n** 국도 제6호선\n** 국도 제14호선\n** 국도 제15호선\n** 국도 제16호선\n** 국도 제17호선\n** 국도 제20호선\n** \n** 국도 제130호선\n** 국도 제131호선\n** 국도 제139호선\n** 국도 제246호선\n** \n** 국도 제298호선\n** 국도 제357호선\n** \n** 국도 제466호선\n* 도도부현도\n** 도쿄도도 제2호선\n** 도쿄도도 제3호선\n** 도쿄도도 제4호선\n** 도쿄도도 제5호선\n** 도쿄도도 제6호선\n** 도쿄도도 제7호선\n** 도쿄도도 제8호선\n** 도쿄도도 제11호선\n** 도쿄도도 제12호선\n** 도쿄도도 제15호선\n** 도쿄도도 제118호선\n** 도쿄도도 제123호선\n** 도쿄도도 제201호선\n** 도쿄도도 제316호선\n** 도쿄도도 제318호선\n** 도쿄도도 제451호선\n** 도쿄도도 제481호선\n** 도쿄도도 제482호선\n** 도쿄도도 제484호선\n** 그 외의 다른 노선은 도쿄도의 도도 목록 문서 참조.\n\n=== 항구 ===\n* 도쿄항\n", "\n파일:Tokyo National Museum, Honkan 2010.jpg|섬네일|오른쪽|도쿄 국립박물관\n파일:Fuji TV headquarters and Aqua City Odaiba - 2006-05-03 edit.jpg|섬네일|오른쪽|후지 TV 본사\n도쿄에는 많은 박물관들이 있다. 우에노 공원 안에는 네 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중 하나인 도쿄 국립박물관은 일본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전통 일본 예술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국립서양미술관과 4만 개가 넘는 일본과 외국 영화를 비롯해 많은 일본 현대 예술품들을 소장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또한 우에노 공원에는 국립과학박물관과 우에노 동물원이 있다. 다른 박물관으로 아오야마의 네주 미술관과 도쿄 도심에서 스미다강 너머 스미다구의 에도-도쿄 박물관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고쿄 주변에 위치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n\n도쿄에는 공연을 하는 많은 극장들이 있다. 이들은 노와 가부키와 같은 일본 전통극을 공연하는 많은 국영 및 민영 극장들을 포함한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다른 음악 협회들이 서양과 일본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도쿄에서는 또한 친숙한 클럽에서부터 국제적으로 알려진 일본 무도관까지의 다양한 곳에서 일본 현대음악과 서양의 팝과 락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도쿄에서는 많은 축제들이 열린다. 주요 행사로 히에 신사의 산노, 아사쿠사 신사의 산자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신전제가 있다. 해마다 7월의 마지막 토요일에는 스미다강에서 성대한 불꽃 축제가 열리고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봄에 벚꽃이 만개할 때 많은 도쿄의 시민들이 우에노 공원, 이노카시라 공원, 신주쿠 교엔으로 소풍을 나온다.\n\n시부야와 이웃한 하라주쿠는 젊은이들의 스타일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도쿄의 주요 지하철역들에는 대규모 쇼핑센터들이 들어서 있다. 쇼핑 지구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백화점과 고급 상점들, 극장, 레스토랑 들이 모여 있는 긴자이다. 간다 지역에는 백여 개의 고서점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아키하바라에는 전자제품과 컴퓨터 및 부속 기기 등을 취급하는 대규모 쇼핑센터들과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다.\n\n=== 관광지 ===\n* 도쿄도청(東京都庁)\n* 시부야(渋谷)\n*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n* 아사쿠사(浅草)와 센소지(浅草寺)\n* 아키하바라(秋葉原)\n* 에도-도쿄 박물관(江戸東京博物館)\n* 우에노 공원(上野公園)\n* 오다이바(お台場)\n* 하라주쿠(原宿)\n\n=== 갤러리 ===\n\n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of Tokyo.jpg|도쿄도청\nShibuya intersection at night.jpg|시부야 횡단보도\nAmeyayokocho Entrance Sign.JPG|아메야요코초\nAsakusa Sensoji Kaminarimon 2012.JPG|아사쿠사 센소지의 카미라미몬\nMen's shop AOKI, Akihabara.jpg|아키하바라 거리\nEdo-Tokyo Museum - Lifesize diorama of kabuki play Sukeroki 04 (15769459291).jpg|에도-도쿄 박물관에 전시된 가부키 공연 전시물\nUeno-Park.JPG|우에노 공원의 벚꽃\nOdaiba night.jpg|오다이바의 야경\nSunday at Harajuku - panoramio.jpg|하라주쿠의 코스프레 매니아들\n\n", "파일:Tokyo Dome 2007-2.jpg|섬네일|오른쪽|도쿄 돔\n도쿄는 일본 스포츠의 중심이다. 야구, 축구, 스모 프로 팀들이 경쟁하고 있으며 1964년 하계 올림픽과 2020년 하계 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n\n2개의 프로 야구팀이 도쿄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데,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메이지 진구 구장)과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이 그것이다. 일본 스모 협회의 본부 또한 도쿄의 료고쿠 국기관 스모 경기장에 있고 이 곳에서 매년 3회(1월, 5월, 9월)에 스모 대회가 열린다.\n\nJ리그에는 도쿄 베르디, FC 도쿄, FC 마치다 젤비아 3개 구단이 도쿄 도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도쿄 23구를 직접 연고지로 하는 J리그 소속 구단은 존재하지 않는다.\n\n도쿄는 1964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이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수많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열렸다. 세계적인 수준의 개최지로서 도쿄에서는 종종 테니스, 수영, 마라톤, 미식축구, 유도, 가라테 대회와 같은 국내외의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 시부야구 센다가야에 있는 도쿄 체육관은 수영장, 훈련실, 커다란 실내 경기장을 포함한 대형 스포츠 복합단지이다.\n\n2020년 하계 올림픽이 도쿄에서 개최됨에 따라 새로운 도쿄 신국립경기장이 건립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많은 스포츠 시설들이 개보수중이다.\n\n=== 도쿄 도의 스포츠 팀 ===\n*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준 본거지)\n* 축구: 도쿄 베르디, FC 도쿄, FC 마치다 젤비아(마치다시), 도쿄 무사시노 시티 FC(무사시노시)\n* 농구: 도쿄 아파치(후추시)\n* 배구: NEC 블루 로켓츠\n", "\n단, #표시는 우호도시이다.\n\n* 서울()\n* 베이징시()\n* 자카르타()\n* 뉴욕()\n* 상파울루()\n* 파리()\n* 런던() #\n* 로마()\n* 베를린()\n* 카이로()\n* 모스크바()\n* 뉴사우스웨일스()\n", "* 도쿄도지사\n* 재일중국인\n", "\n", "\n\n\n* 도쿄 도 공식 웹사이트\n* 도쿄 관광 안내\n* 론리플래닛의 정보(도쿄편)\n\n\n\n\n\n\n\n\n\n\n \n분류:아시아에 위치한 수도\n분류: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n분류:하계 패럴림픽 개최 도시\n분류:아시안 게임 개최 도시\n분류:일본의 항구 도시" ]
'''도쿄도'''(, , , Tōkyō-Tō) 또는 '''도쿄''', '''동경'''은 일본의 수도이며 간토지방에 위치하는 도(都)로, 일본의 도 행정구역 가운데서 인구 수가 2021년 기준 14,049,146으로 가장 많은 지역이다. 동부는 태평양 연안 도쿄만이 접한다. 서부는 구모토리산이 최고봉이며 간토산지가 있다. 도부(23구) 다마지역(26시 3정 1촌) 및 도서부(2정 7촌)로 이어져 있고, 현청 소재지는 신주쿠구에 있다. 행정기관, 금융기관이나 대기업 등이 집중되어 신문·방송·출판 등의 문화면, 대학·연구기관 등의 교육·학술면에서도 일본의 중추를 이룬다. 교통면에서도 철도망, 도로망, 항공로의 중심이며, 경제, 문화, 교통, 상업, 금융 등 여러 부분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이다.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도시에 속하며, 일본의 민간 연구소가 2016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도시에서는 뉴욕, 런던과 함께 뒤이어 세계 3위로 평가되었다. 이코노미스트의 조사 부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에 의해 2021년도 조사에서 도쿄도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세계 5위이며 아시아에서는 1위로 선출되었다. 또, 미국의 싱크탱크 또한, 2020년 세계도시 랭킹(GCI 2020)에서는 뉴욕과 런던 파리가 세계 4위의 도시로 평가되었으며 영국기관이 발표하고 있는 2021년의 세계금융센터지수에선 세계 7위, 아시아 5위의 금융 센터로 평가되었다. 세계 경제권 명목 GDP 순위로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인 간토 지방이 전 세계 유일하게 2조 달러를 넘은 지역으로 세계 1위이다. 지리적으로는 도쿄도와 주변 7현으로 수도권을 구성하고 있다.특히 도쿄권(도쿄도,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 등 도쿄 수도권, 혹은 이를 총칭하는 간토 지방의 총인구는 약 4,400만명에 달해, 일본 인구의 약 30%를 차지한다. 관할하는 영역은 도쿄도 구부(도쿄 23구), 다마 지역(26시,3정 1촌) 및 도쿄도 도서부(오시마, 미야케, 하치조, 오가사와라) 4개의 지청(2정 7촌)이 구성되어 있다. 오키노토리 암초와 미나미토리섬을 오가사와라 제도를 포함시키기 위해 일본의 극점에 위치한 도도부현이다. 도가 공인한 '도쿄도'의 영어 표기는 Tokyo Metropolis (Tokyo Met.) 그 외 Tokyo Prefecture와 Tokyo Metropolitan Prefecture가 있다. 인구는 2021년 7월 1일 기준으로 14,049,146명으로 돌파했으며. 일본 도도부현 중에서는 인구가 가장 많으며 일본 인구의 약 11%를 차지하고 있다.인구밀도도 도도부현 안에서 가장 높다.도쿄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쿄 도시권은 인구 3700만명을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권이다.일본 인구의 대략 3할이 집중해, 폴란드나 모로코, 캐나다 등의 나라의 총인구에 필적한다. 도쿄는 에도 막부가 놓인 예전의 에도가 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시 계획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 막말에는 동란을 거쳐 메이지 원년의 문서로부터 「도쿄」라고 표기되었다. 1869년 2월 11일 헤이안쿄 (교토)로부터 천도되어 (도쿄전도, 옛 수도 목록을 참고하라) 1878년에 부제가 시행되면서 도쿄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7월 1일 수도의 행정구역을 강화할 목적에서 도쿄도제를 시행하였다. 이로써 도쿄부와 도쿄시가 폐지되고 이를 통합하는 형태로 도쿄도가 설치된다. 종전 후인 1947년 일본 지방자치법이 시행에 따라, 1943년에 도쿄도제는 폐지되었지만, 「도쿄도」의 명칭과 행정 구역은 변경하지 않았다.즉 도쿄도제에 의해 도의 직할로 여겨진 구는 지방자치법 시행에 의해 특별지방공공단체인 특별구가 되어 시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일부 사무나 징세권은 계속해서 도에 유보된다. 이 때문에 도쿄도청은, 지금도 「23구를 포괄하는 시청으로서의 기능」과「현청으로서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도쿄도의 의결기관인 도쿄도의회가 설치되었으며 수장인 도쿄도지사가 역할을 한다. 그 권능은 일본 지방자치법에 의해 정해져 있으며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임기는 4년. 지사 보좌직으로 도쿄도 부지사가 4명으로 놓여진다. 2017년 4월 현재 도청의 직원 수(이른바 '도의 직원')는 지사부국 등의 일반행정직원이 약 2만 5천명이며 공기업 부문(교통, 상수도, 하수도이 1만 3천명이고 또한 도쿄 소방청및 경시청 직원, 도쿄도 내의 국립학교 교직원까지 합치면 총계 약 16만 8천 명이다. 도쿄도청사 (본청사)는 오랫동안 지요다구 유라쿠초에 있다가 1991년 4월 1일에 신주쿠구 니시신주쿠로 이전하였다. 이전에 따라 지방자치법에 따라 조례가 개정되어 이후 도청 소재지는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신주쿠 2초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 등의 도청 소재지 표기는 편의상 '도쿄'가 사용되어 국토지리원에 따르면 도쿄 이외의 도부현청 소재지는 시의 명칭을 사용하는데 반해, 도쿄의 경우는 실제 소재지인 신주쿠구를 포함한 23구를 통합하여 '도쿄'로 표기한다. 교과서에서도 국토 지리원과 같이 「도쿄」라고 하고 있는 것이 많다. 특별구가 시정촌이 아닌점, 시정촌이 가지는 업무 권한의 일부를 가지지 않은 점, 구부가 과거 도쿄시라는 하나의 시였던 점 등이 원인이 된다. 도쿄 도심은 예전의 에도에 해당하며, 에도 막부 성립 이래 일본 정치·행정의 실질적인 중심지였다.1868년에 헤이안쿄에서 에도로 황궁과 태정관 등의 수도 기능이 이동했다고 하여(도쿄전도) 그 후 에도를 도쿄부로 개칭하고 수도가 되었다. 대일본제국기에는 제도라고도 불린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3년 도쿄부와 도쿄시가 통합되면서 다시 도쿄도가 수도가 됐다. 전후인 1950년에 도쿄도를 일본의 수도로서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수도건설법이 시행되었으나, 이 법은 1956년에 수도권정비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수도건설법 폐지로 도쿄도는 법적으로는 일본의 수도라는 근거가 없지만, 일본국 정부의 공식견해나 공문서상으로는 수도로 여겨져 도쿄도에 일본의 중추기능이 존재하고 있다. 2018년 2월에는 중의원 의원 아이사카 세이지의 질문에 대해 "수도를 도쿄라고 직접 규정한 법령은 없지만, 도쿄도가 일본의 수도라는 것은 사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정부 견해가 나왔다. 또, 수도권 정비법에서는, 도쿄도는 수도권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어 도쿄도의 공식 영어 표기 「Tokyo Metropolis」의 metropolis에는 「대도시, 대도시권」외에 「수도」의 의미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도쿄도를 수도로 직접 규정하는 것은 일본 헌법 및 일본 법률에는 없지만, 수도로서 그 중심부(특히 도쿄 23구)에 일본 정부의 국회의사당, 내각총리대신관저와 주요 부처, 최고재판소를 비롯한 3권의 중추기관이 설치된다. 이 밖에도 법률에 의해 그 기관을 도쿄도에 두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있다 파일:Tokugawa Ieyasu2.JPG|섬네일|오른쪽|도쿠가와 이에야스 파일:Kokyo0057.jpg|200px|섬네일|고쿄 도쿄는 원래 작은 어촌으로 에도라고 명명되었다. 1457년에 오타 도칸은 에도 성을 세웠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를 근거지로 삼아 1603년에 쇼군이 되었으며 도시는 막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의 18세기 무렵에 인구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263년 후에 막부는 메이지 유신 하에 전복되었다. 1869년에 17세의 메이지 천황은 에도로 천도하였다. 에도는 이미 일본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있었고 예전의 에도 성은 고쿄가 되었다. 1889년 도쿄부 동부에 도쿄시가 설치되었다. 도쿄는 20세기에 두 번의 대재해를 겪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번은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14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또 한번은 1945년의 도쿄 대공습으로 7만 5천 명에서 최대 20만 명이 사망하였고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1943년에는 도쿄부와 도쿄시를 도쿄도로 합쳤고, 이전의 도쿄시 지역은 도쿄도 구부(東京都區部)로 불리게 되었다. 전쟁 후에 도쿄는 완전히 재건되었고 196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에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는 선샤인60과 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섰고 1978년에는 도쿄 인근 지바현 나리타시에 나리타 국제공항이 건설되었으며 인구는 증가하여 도쿄도의 인구는 1,1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도쿄 지하철과 통근 철도망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곳이 되었다. 1980년대에 도쿄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여 버블을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에 버블이 터지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한 많은 회사와 은행, 개인들은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다. 경기의 후퇴가 뒤따르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쿄는 여전히 많은 곳에 새로운 도시 개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의 계획으로는 에비스 공원과 덴노즈 아일, 시오도메, 롯폰기 힐스, 시나가와, 도쿄역의 마루노우치 부분이 포함된다. 중요한 건물들이 오모테산도 힐스와 같은 최신식 쇼핑 시설을 위해 헐리고 있다. 도쿄의 토지 매립 계획 또한 몇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다이바 지역으로 현재 쇼핑과 오락의 중심지이다. 2020년에 두 번째로 개최되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이 예정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인프라를 비롯한 자본 정비가 새롭게 추진되어 갈 예정이다(2020년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확인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의 영향으로 도쿄 대회는 2021년으로 연기 예정이다) 도쿄도의 행정구역 도쿄도의 본토 부분은 도쿄만의 북서쪽에 놓여있고 대략 동서의 길이는 90 km, 남북의 길이는 25 km 정도이다. 동쪽으로 지바현, 서쪽으로 야마나시현, 남쪽으로 가나가와현, 북쪽으로 사이타마현과 접한다.구와 서부의 다마 지역으로 나뉜다. 또한 도쿄도의 행정 경계는 정남쪽의 두 개의 태평양의 열도를 포함한다. 하나는 이즈 제도이고 또 하나는 일본 본토에서 1000 km 이상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이다. 이들 섬들과 서부의 산지 지방 때문에 도쿄도의 인구 밀도는 도쿄의 도시 및 교외 지역의 실제 인구 밀도보다 훨씬 낮게 나타난다. === 도쿄 23구 === 도쿄 23구 지도 도쿄도의 특별구는 예전에 도쿄시를 이루었다. 1943년 7월 1일에 도쿄시는 도쿄부와 합쳐져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합병의 결과로서 일본의 다른 구들과 달리 특별구는 어떤 대도시의 일부로 취급되지 않는다. 각각의 구들은 일본의 다른 도시들처럼 각자의 시장과 의회를 선출한다. 이들 구들은 도 정부와 독특한 행정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들과 다르다. 수도, 하수, 소방과 같은 일부 지자체의 기능은 도 정부가 다룬다. 이러한 행정 비용을 위해 도 정부는 구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 사실상 일본의 수도·경제·정치·방송을 담당하며 관동지방이나 동경 경제권의 중심지이다. 도쿄 23구(동경 23구)는 다음과 같다. * 가쓰시카구() * 고토구() * 기타구() * 나카노구() * 네리마구() * 다이토구() * 도시마구() * 미나토구() * 메구로구() * 스미다구() * 스기나미구() * 신주쿠구() * 세타가야구() * 시나가와구() * 시부야구() * 아다치구() * 아라카와구() * 에도가와구() * 이타바시구() * 오타구() * 분쿄구() * 주오구() * 지요다구() === 다마 지역 === 1943년 이전에는 도쿄부에 속했던 지역이다. 도쿄 23구의 서쪽에 위치하며 시와 정, 촌으로 이루어져있다. 도쿄 중심가의 업무 기능을 위한 '침상도시' 역할을 하며 일부는 지역의 상업과 공업의 기반이다. 도쿄 23구는 물론 도쿄도와 붙어있는 가나가와현보다도 집값이 싼데다가 전철노선이 잘 갖추어져있어 이곳에서 도쿄 23구 혹은 요코하마 등의 다른 대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 시 ==== 다마 지역에는 26개의 도시가 있다. * 고가네이시() * 고다이라시() * 고마에시() * 고쿠분지시() * 구니타치시() * 기요세시() * 니시토쿄시() * 다마시() * 다치카와시() * 마치다시() * 무사시노시() * 무사시무라야마시() * 미타카시() * 아키루노시() * 아키시마시() * 오메시() * 이나기시() * 조후시() * 하무라시() * 하치오지시() * 후추시() * 훗사시() * 히가시무라야마시() * 히가시야마토시() * 히가시쿠루메시() * 히노시() 도쿄도 정부는 도쿄 중심의 도시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하치오지시(), 다치카와시, 마치다시, 오메시, 다마 신시가지는 다마 지역의 지역 중심지로 지정하였다. ==== 군, 정, 촌 ==== 도쿄도의 극서부에는 니시타마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산지로 도시화에 적합하지 않다. 도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구모토리산(2017m)를 비롯해 다카수산(1737m), 오다케산(1266m), 미타케산(929m)이 이곳에 있다. 야마나시현 주변의 다마강에 위치한 도쿄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오쿠타마호가 있다. * 니시타마군() ** 오쿠타마정(), 히노데정(), 미즈호정(), 히노하라촌() === 도서 지역 === 파일:ShikinePortTyoJpDec04-01.jpg|섬네일|시키네섬 파일:Hachijo-jima.JPG|섬네일|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 도쿄도에는 특별구의 도심으로부터 1850km까지 뻗어있는 수많은 외곽의 섬들이 있다. 신주쿠의 도청사와 섬들의 거리 때문에 지역 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한다. 이즈 제도는 화산 열도로 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섬들로는 도쿄 본토에서 가까운 순으로 이즈오섬, 도시마, 니지마섬, 시키네섬, 고즈섬, 미야케섬, 미쿠라섬, 하치조섬, 아오가섬이 있다. 이즈오섬과 하치조섬은 정이다. 섬들에는 6개의 촌이 있으며 니지마와 시키네섬은 하나의 촌을 이룬다. 도쿄도에는 오가사와라 제도가 포함되며 섬들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치지마섬, 니시노섬, 하하지마섬, 기타이오섬, 이오섬, 미나미이오섬이 있다. 오가사와라 지청은 또한 두 개의 조그마한 섬을 관할한다. 하나는 미나미토리섬으로 일본의 최동단에 있고 도쿄 중심부에서 1850 km 떨어진 가장 먼 섬이다. 또 하나는 오키노토리섬으로 일본의 최남단에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사람이 살지 않는 암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잔 열도와 외곽의 섬들은 영구적인 정착민은 없지만 자위대가 상주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오직 지치지마 섬과 하하지마 섬에만 살며 이 섬들은 오가사와라촌을 이루고 있다. * 오시마 지청() ** 오시마정(), 도시마촌(), 니지마촌(), 고즈시마촌() * 미야케 지청() ** 미야케촌(), 미쿠라지마촌() * 하치조 지청() ** 하치조정(), 아오가시마촌() * 오가사와라 지청() ** 오가사와라촌() === 국립 공원 === 도쿄도에는 다음과 같은 국립공원들이 있다. * 메이지의 모리다카오 국정공원이 하치오지 남쪽 다카오산 주변에 있다. * 오가사와라 국립공원: 2006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우에노 공원: 박물관으로 유명한 공원이다. 도쿄 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시타마치 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 우에노 동물원이 이곳에 있다. 또한 공원 도처에 예술 작품과 조각상들이 있다. 도쿄는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로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온화하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연평균 기온은 15.8℃이다. 눈보라는 이따금씩 발생하는 수준이고, 거의 매년 태풍이 찾아온다. 장마가 6월 중순경부터 시작되므로 봄·가을에 여행하는 것이 좋다. 도쿄도는 공식적으로 2개의 상징물이 있다. 하나는 문장(紋章)이고 나머지는 심벌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상징물이 들어간 깃발도 공식적으로 쓰인다. === 문장 === 도쿄도문장 '''도쿄도문장'''(東京都紋章)은 1943년 11월 2일부터 쓰이고 있으며 제 9대 도쿄도지사와 귀족원의원(현재의 참의원)을 지낸 와타나베 히로모토가 디자인하여 1889년 12월부터 쓰인 도쿄시의 문장과 같다. 고시 제 464호로 인하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6개의 햇살이 뻗어가는 태양을 나타내며 도쿄가 일본의 중심임을 나타낸다.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색이 채택되지 않았다. 이 문장은 간지인 東京(도쿄)의 京(쿄)를 닮았지만 고시에서는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쿄도기 '''도쿄도기'''(東京都旗)는 1964년 10월 1일부터 쓰이고 있으며(고시 제 1042호) 진보라(江戸紫, 에도의 전통색)색 바탕의 중심에 하얀색의 도쿄도문장이 가운데에 들어가 있다. 비율은 2:3이다. === 심벌 === 도쿄도심벌기 '''도쿄도의 심벌마크'''(東京都のシンボルマーク)는 1989년 6월 1일 고시 제577호로 채택되었다. 디자인은 도쿄도심벌마크전형위원회의 20명의 지원자가 선택한 것으로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인 레이 요시무라(レイ吉村)가 만든 것이다. 선명한 초록색 심벌을 3개의 호가 있는 은행나무(도쿄도의 나무)의 잎이며 Tokyo의 T를 나타낸다. '''도쿄도심벌기'''(東京都シンボル旗)는 1989년 9월 30일 고시 제 978호로 채택되었다. 도쿄도의 심벌마크가 흰색 바탕의 기 중앙에 있다. 비율은 2:3이다. 2016년 6월 기준으로 도쿄 도의 인구는 13,613,660명 도쿄 23구의 인구는 896만 7천 명으로 추정되었다. 주간에는 인접한 지역으로부터 통근하는 250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이 결과 도심인 지요다구, 주오구, 미나토구의 2005년 인구는 야간에는 32만 6천 명이지만 주간에는 240만 명에 달했다. 도의 인구는 주간에는 300만 명 이상 증가한다. 도쿄의 인구가 절정에 달했던 1965년에 23구의 인구는 889만 3094명에 달했고 1995년에 80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현재 인구는 전에는 14만명을 넘어섰으나 최근엔 도쿄도 전체 인구는 13,971,109명으로 하락했으며 최근 문서상에 따르면 인구조사에서 10,673명이 유출 된것으로 확인되었다. 결정적인 원인은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와 밀집지역 기피현상이 생겼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 신문이 보도했다. 2005년에 도쿄 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중국인 (123,661), 한국인 (106,697), 필리핀인 (31,077), 미국인 (18,848), 영국인 (7,696), 브라질인 (5,300) 프랑스인 (3,000) 순이었다. === 고령자 === 2010년 시점에서 도쿄도의 고령화율은 20.4%이며 즉 고령자가 5명 중 1명에 이르고 있다,(향후 노인인구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2020년에는 도쿄에 사는 4명 중 1명이 고령자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독신 고령자는 2010년 시점에서 62만명이다.(그 10년 후인 2020년에는 80만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됨) === 연소자 === 도쿄도의 연소자(0~14세) 인구는, 이미 노인 인구보다 작다.(장래에도 감소가 전망된다). === 주간 인구 및 야간 인구, 주간 유입 인구=== ; 주간 인구와 야간 인구 2015년 기준 도쿄도의 주간 인구는 약 1592만명이며 그에 비해 야간 인구는 1352만명이나 되고 이는 도쿄도 내의 직장으로 통근하는 사람들과 도내의 학교로 통학하는 사람들로 인해 낮에 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낮에만 도쿄에서 주변의 도도부현으로 통근·통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수보다 유입되는 인구가 더 크므로 차감하여 낮에 241만 명이 많다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마 지역과 도쿄 주변현(인접하지 않는 이바라키현, 도치기현, 군마현의 남부 포함)에는 도쿄의 베드타운이 점재하며 시즈오카현 동부와 니가타현 남부 등에서의 신칸센 통근자도 존재한다. ; 주간 유입 인구 23구 지역으로의 주간 유입 인구는 1980년에 266만명이던 것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5년에 372만명으로 정점을 맞았으며 그 후에는 서서히 감소해 2015년에 318만 명이 되었다. 주간 유입 인구가 많다는 것은 이들이 구 지역에서 낮에 다양한 활동(생산 활동이나 소비 활동)을 벌여 활기를 주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재해시에는 대량의 귀가 곤란자가 생기는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는 것도 의미한다동일본 대지진 때에는, 도쿄도에서 약 352만명이 귀가 곤란자가 되었다고 추계되었다(내각부가 2011년 11월 22일에 발표한 인터넷 조사에 근거하는 추계.자세한 것은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귀가 곤란자」의 기사를 참조할 것). 1920년 이후 도쿄도의 인구 그래프 파일:Tokyo Metropolitan Government Building Oka1.JPG|섬네일|오른쪽|도쿄도청사 파일:YasudaAuditorium.jpg|섬네일|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파일:Old Keio University Library 3.jpg|섬네일|위오른쪽|게이오기주쿠 대학 《일본 지방자치법》 하에서 도쿄는 도(都)로 지정되어 있다. 행정 구조는 일본의 다른 도도부현과 유사하다. 도쿄도는 1943년까지 도쿄시를 이루었던 23개의 특별구를 포함하며 이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각자의 구장과 의회를 가지고 있어 사실상 도시의 지위를 가진다. 도쿄도는 또한 각자의 지역 정부를 가진 26개의 시와 5개의 정, 8개의 촌을 포함한다. 도쿄도 정부는 공개적으로 선출된 도지사와 도 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도쿄도청은 신주쿠구에 있다. 도 정부는 호수, 강, 댐, 농장, 먼곳의 섬, 국립 공원과 번화가, 마천루, 지하철 등을 포함한 도쿄의 모든 것을 관할한다. 도쿄에는 많은 대학, 전문 대학, 직업 학교가 존재 하고 있다. 많은 일본의 권위있는 대학들이 도쿄에 있다. === 국립 대학 === * 도쿄 대학 * 도쿄 공업대학 * 도쿄 외국어대학 * 도쿄 해양대학 * 도쿄 예술대학 * 도쿄 농공대학 * 도쿄 가쿠게이 대학 * 히토쓰바시 대학 * 정책연구대학원대학 === 공립 대학(도쿄 도립) === * 도쿄 도립대학 === 사립 대학 === * 게이오기주쿠 대학 * 와세다 대학 * 조치 대학 * 메이지 대학 * 릿쿄 대학 *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 호세이 대학 * 주오 대학 * 가쿠슈인 대학 * 국제 기독교 대학 * 니혼 대학 * 센슈 대학 구와 지자체에 의해 운영되는 공립 유치원, 소학교(1학년~6학년), 중학교(7학년~9학년)이 있다. 도쿄의 공립 고등학교는 도쿄도 교육위원에 의해 운영되고 "도 고등학교"로 불린다. 그밖에 도쿄에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많은 사립 학교가 있다. 파일:Tokyo stock exchange.jpg|섬네일|오른쪽|도쿄 증권거래소 도쿄는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 3대 금융 중심지 중 하나이다. 또한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권 경제이다. 도쿄도의 2019년 총 GDP는 115조 7000억 엔로 세계의 도시들 중 1위를 차지했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목록에서 도쿄에 기반을 둔 기업은 51개로 2위 파리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도쿄는 주요 국제 금융 중심지이고 몇몇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과 보험 회사들의 본사가 입지해있으며 일본의 교통, 출판, 방송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중앙집권화된 성장에 따라 많은 대기업들이 정부와의 더 좋은 접근성을 얻기 위해서 역사적인 상업 수도인 오사카 같은 도시에서 도쿄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도쿄의 지속적인 인구 성장과 높은 생계 비용 때문에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도쿄는 이코노미스트에 의해 2006년까지 14년 동안 생계 비용이 가장 비싼 도시로 선정되었다. 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 일본 경제의 중추는 도쿄에 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일본에서 가장 큰 증권 거래소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증권 거래소이다. 1990년의 일본 자산 가격 버블 때 도쿄는 세계 주식 시장 가치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2003년에 도쿄도의 경작지는 8460헥타르였다. 농지는 주로 도쿄도의 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상하기 쉬운 야채, 과일, 꽃을 편리하게 도의 동부로 선적할 수 있다. 고마츠나와 시금치는 가장 중요한 야채로써 2000년에 도쿄도는 중앙 생산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마츠나의 32.5%를 공급하였다. 전체 면적의 36%가 숲으로 덮여있고 도쿄도의 서부 산지에서는 삼나무와 편백이 광범위하게 자란다. 목재 가격의 하락, 생산 비용의 증가, 임업 인구의 노령화로 도쿄도의 생산량은 감소하고 있다. 도쿄만은 한때 주요 어장이었으며 현재 도쿄도의 어업 생산량 대부분은 이즈오섬, 하치조섬과 같은 바깥의 섬들로부터 온다. 가다랑어, 노리(김), 전갱이과가 대양에서 생산된다. 관광업 또한 도쿄의 경제에 상당 부분 기여를 한다. === 공항 === 파일:Haneda kokusaisen entrance.png|섬네일|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 도쿄도에는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 조후 비행장, 오시마 공항, 미야케지마 공항, 하치조지마 공항,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이 있다. 도쿄 국제공항(東京国際空港)은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라고도 불리며, 오타구 남부에 위치하여 있다. 1978년 5월, 나리타 국제공항이 개항한 이후로는 국내선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2010년 10월에 신 국제선 터미널이 완공되었다. 도심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일본 정부의 전용기, 국빈급 승객이 이용하는 일본 이외 국가의 특별기도 도쿄 국제공항을 많이 사용한다. 도심과의 교통수단으로는 터미널 바로 아래에서 탈 수 있는 도쿄 모노레일과 게이큐 선이 있으며, 이외에도 리무진 버스가 공항과 도쿄도 내 또는 인근 도도부현의 주요 역, 주요 호텔 등을 잇는다. 이외에 노선 버스나 택시 등도 이용할 수 있다. 도쿄 국제공항에서 발착하지 않는 국제선은 주로 지바현 나리타시에 있는 나리타 국제공항(成田国際空港)에서 발착한다. 개항 당시에는 도심에서 공항으로의 교통수단이 히가시칸토 자동차도를 경유하는 리무진 버스와 터미널에서 가까웠던 당시의 나리타 공항역(현 히가시나리타 역)까지 운행하였던 게이세이 전철의 스카이라이너 뿐이었지만, 1991년 3월부터 공항 터미널 바로 아래에 역이 신설되어(제3터미널 제외) 동일본여객철도와 게이세이 전철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쿄도 도심부에서 공항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되며, 2010년 7월에는 나리타 고속철도 액세스가 개통하였다. 다마 지역에는 조후 비행장(調布飛行場)이 있으며, 신추오항공이 이즈 제도로의 정기편을 운항하고 있다. 다른 공항들은 도서 지역의 공항이다. 이즈오섬에 있는 오시마 공항(大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 하치조지마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미야케지마 공항(三宅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하치조지마 공항(八丈島空港)에는 하네다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에는 공항이 없으며, 교통 상황의 개선을 위해 공항을 건설해야 하는가, 자연 보호를 위해 건설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이 있다. === 철도 === 파일:Tokyo Station Outside view 201804.jpg|섬네일|오른쪽|도쿄역 파일:Yamanote-Line-E235.jpg|섬네일|오른쪽|야마노테선 파일:Tokyo metro map en.png|섬네일|오른쪽|도쿄 지하철 노선도 도쿄에 위치한 역수는 654개 역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의 도도부현에서 가장 역수가 많아 가장 면적이 넓은 홋카이도의 522개 역을 비교해도 100개 역을 많이 가지고 있다. 동일본여객철도의 야마노테선이 순환선을 운행하고 있으며 연선을 주기적으로 이어지는 도쿄역, 시나가와역, 시부야역, 우에노역, 이케부쿠로역 등의 역이 철도 각선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에노 도쿄 라인과 게이힌 도호쿠선, 요코스카·소부 쾌속선등이 운행을 하고 있으며 그외에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까지 직통 열차가 하루종일 운행되고있다. ==== 주요 역 ==== :도쿄역, 우에노역, 시나가와역, 시부야역, 신주쿠역, 이케부쿠로역, 아키하바라역, 아사쿠사역, 긴자역 등 ==== 주요 노선 ==== * 초광역 노선 ** 도카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도카이도 본선, 주오 본선, 도호쿠 본선, 조반 선 * 광역노선 ** 동일본 여객철도 : 야마노테선, 소부 본선, 게이힌토호쿠선, 난부 선, 요코하마 선, 무사시노 선, 게이요 선, 하치코 선, 오메 선, 이쓰카이치 선, 사이쿄 선 ** 도쿄 지하철 : 도자이 선, 후쿠토신 선, 신주쿠 선, 유라쿠초 선 ** 도쿄 급행 전철 : 도요코 선, 메구로 선, 덴엔토시 선 ** 게이힌 급행 전철 : 게이큐 본선 ** 오다큐 전철 : 오다와라 선, 다마선 ** 세이부 철도 : 이케부쿠로 선, 신주쿠 선, 다마코 선, 야마구치 선, 하이지마 선, 고쿠분지 선, 세이부엔 선, 다마가와 선 ** 도부 철도 : 이세사키 선, 도조 본선 ** 게이세이 전철 : 게이세이 본선 ** 사이타마 고속철도 : 사이타마 고속철도선 ** 호쿠소 철도 : 호쿠소선 ** 수도권 신도시 철도 : 쓰쿠바 익스프레스 ** 게이오 전철 : 게이오선, 이노카시라 선 ** 다마 도시 모노레일 : 다마 도시 모노레일 선 * 도쿄23구내 ** 도쿄 메트로 : 긴자선, 마루노우치선, 히비야선, 지요다선, 한조몬 선, 난보쿠 선 ** 도쿄 도 교통국(도에이 지하철) : 아사쿠사 선, 미타 선, 오에도선, 신주쿠 선, 노면전차 아라카와 선, 우에노 현수선, 닛포리·도네리 라이너 ** 도쿄 급행 전철(도큐 전철) : 오이마치 선, 다마가와 선, 이케가미 선, 세타가야 선 ** 게이힌 급행 전철(게이큐 전철) : 게이큐 본선, 공항선 ** 세이부 철도 : 유라쿠초 선, 도시마 선 ** 도부 철도 : 이세사키 선, 가메이도 선, 다이시 선 ** 게이세이 전철 : 오시아게 선, 가나마치 선 ** 도쿄 모노레일 : 하네다 선 ** 유리카모메 : 도쿄 임해 신교통 임해선 ** 도쿄 임해 고속 철도 : 린카이선 * 다마 지역 ** 게이오 전철 : 경마장선, 동물원선, 다카오 선 === 도로 === * 고속도로 ** 도메이 고속도로 ** 주오 자동차도 ** 간에쓰 자동차도 ** 도쿄 외환 자동차도 ** 게이요 도로 ** 수도권 중앙 연락 자동차도 * 도시권 자동차 전용도로 ** 슈토 고속도로 ** 도쿄 고속도로 ** * 국도 ** 국도 제1호선 ** 국도 제4호선 ** 국도 제6호선 ** 국도 제14호선 ** 국도 제15호선 ** 국도 제16호선 ** 국도 제17호선 ** 국도 제20호선 ** ** 국도 제130호선 ** 국도 제131호선 ** 국도 제139호선 ** 국도 제246호선 ** ** 국도 제298호선 ** 국도 제357호선 ** ** 국도 제466호선 * 도도부현도 ** 도쿄도도 제2호선 ** 도쿄도도 제3호선 ** 도쿄도도 제4호선 ** 도쿄도도 제5호선 ** 도쿄도도 제6호선 ** 도쿄도도 제7호선 ** 도쿄도도 제8호선 ** 도쿄도도 제11호선 ** 도쿄도도 제12호선 ** 도쿄도도 제15호선 ** 도쿄도도 제118호선 ** 도쿄도도 제123호선 ** 도쿄도도 제201호선 ** 도쿄도도 제316호선 ** 도쿄도도 제318호선 ** 도쿄도도 제451호선 ** 도쿄도도 제481호선 ** 도쿄도도 제482호선 ** 도쿄도도 제484호선 ** 그 외의 다른 노선은 도쿄도의 도도 목록 문서 참조. === 항구 === * 도쿄항 파일:Tokyo National Museum, Honkan 2010.jpg|섬네일|오른쪽|도쿄 국립박물관 파일:Fuji TV headquarters and Aqua City Odaiba - 2006-05-03 edit.jpg|섬네일|오른쪽|후지 TV 본사 도쿄에는 많은 박물관들이 있다. 우에노 공원 안에는 네 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중 하나인 도쿄 국립박물관은 일본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전통 일본 예술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국립서양미술관과 4만 개가 넘는 일본과 외국 영화를 비롯해 많은 일본 현대 예술품들을 소장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또한 우에노 공원에는 국립과학박물관과 우에노 동물원이 있다. 다른 박물관으로 아오야마의 네주 미술관과 도쿄 도심에서 스미다강 너머 스미다구의 에도-도쿄 박물관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고쿄 주변에 위치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도쿄에는 공연을 하는 많은 극장들이 있다. 이들은 노와 가부키와 같은 일본 전통극을 공연하는 많은 국영 및 민영 극장들을 포함한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다른 음악 협회들이 서양과 일본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도쿄에서는 또한 친숙한 클럽에서부터 국제적으로 알려진 일본 무도관까지의 다양한 곳에서 일본 현대음악과 서양의 팝과 락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도쿄에서는 많은 축제들이 열린다. 주요 행사로 히에 신사의 산노, 아사쿠사 신사의 산자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신전제가 있다. 해마다 7월의 마지막 토요일에는 스미다강에서 성대한 불꽃 축제가 열리고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봄에 벚꽃이 만개할 때 많은 도쿄의 시민들이 우에노 공원, 이노카시라 공원, 신주쿠 교엔으로 소풍을 나온다. 시부야와 이웃한 하라주쿠는 젊은이들의 스타일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도쿄의 주요 지하철역들에는 대규모 쇼핑센터들이 들어서 있다. 쇼핑 지구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백화점과 고급 상점들, 극장, 레스토랑 들이 모여 있는 긴자이다. 간다 지역에는 백여 개의 고서점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아키하바라에는 전자제품과 컴퓨터 및 부속 기기 등을 취급하는 대규모 쇼핑센터들과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다. === 관광지 === * 도쿄도청(東京都庁) * 시부야(渋谷) *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 아사쿠사(浅草)와 센소지(浅草寺) * 아키하바라(秋葉原) * 에도-도쿄 박물관(江戸東京博物館) * 우에노 공원(上野公園) * 오다이바(お台場) * 하라주쿠(原宿) === 갤러리 ===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of Tokyo.jpg|도쿄도청 Shibuya intersection at night.jpg|시부야 횡단보도 Ameyayokocho Entrance Sign.JPG|아메야요코초 Asakusa Sensoji Kaminarimon 2012.JPG|아사쿠사 센소지의 카미라미몬 Men's shop AOKI, Akihabara.jpg|아키하바라 거리 Edo-Tokyo Museum - Lifesize diorama of kabuki play Sukeroki 04 (15769459291).jpg|에도-도쿄 박물관에 전시된 가부키 공연 전시물 Ueno-Park.JPG|우에노 공원의 벚꽃 Odaiba night.jpg|오다이바의 야경 Sunday at Harajuku - panoramio.jpg|하라주쿠의 코스프레 매니아들 파일:Tokyo Dome 2007-2.jpg|섬네일|오른쪽|도쿄 돔 도쿄는 일본 스포츠의 중심이다. 야구, 축구, 스모 프로 팀들이 경쟁하고 있으며 1964년 하계 올림픽과 2020년 하계 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2개의 프로 야구팀이 도쿄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데,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메이지 진구 구장)과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이 그것이다. 일본 스모 협회의 본부 또한 도쿄의 료고쿠 국기관 스모 경기장에 있고 이 곳에서 매년 3회(1월, 5월, 9월)에 스모 대회가 열린다. J리그에는 도쿄 베르디, FC 도쿄, FC 마치다 젤비아 3개 구단이 도쿄 도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도쿄 23구를 직접 연고지로 하는 J리그 소속 구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쿄는 1964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이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수많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열렸다. 세계적인 수준의 개최지로서 도쿄에서는 종종 테니스, 수영, 마라톤, 미식축구, 유도, 가라테 대회와 같은 국내외의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 시부야구 센다가야에 있는 도쿄 체육관은 수영장, 훈련실, 커다란 실내 경기장을 포함한 대형 스포츠 복합단지이다. 2020년 하계 올림픽이 도쿄에서 개최됨에 따라 새로운 도쿄 신국립경기장이 건립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많은 스포츠 시설들이 개보수중이다. === 도쿄 도의 스포츠 팀 === *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준 본거지) * 축구: 도쿄 베르디, FC 도쿄, FC 마치다 젤비아(마치다시), 도쿄 무사시노 시티 FC(무사시노시) * 농구: 도쿄 아파치(후추시) * 배구: NEC 블루 로켓츠 단, #표시는 우호도시이다. * 서울() * 베이징시() * 자카르타() * 뉴욕() * 상파울루() * 파리() * 런던() # * 로마() * 베를린() * 카이로() * 모스크바() * 뉴사우스웨일스() * 도쿄도지사 * 재일중국인 * 도쿄 도 공식 웹사이트 * 도쿄 관광 안내 * 론리플래닛의 정보(도쿄편) 분류:아시아에 위치한 수도 분류: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 분류:하계 패럴림픽 개최 도시 분류:아시안 게임 개최 도시 분류:일본의 항구 도시